산골로 간 예술가들 -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산촌 생활자 이야기
박원식 지음, 주민욱 사진 / 창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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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도 가물거리는 대학 새내기 시절 학교 자치 기구인 방송국에 지원을 했었다.

지원한다고 다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선배들은 아무것도 안 알려주고 수습작품이란 것을 만들어 내라고 했었는데,

내가 지원했던 분야는 프로듀서 였던지라, 보도 프로그램의 인터뷰를 따는 일이 주어졌다.

묻고 대답하는게 인터뷰라고 알고 있었던 내겐, 

인터뷰를 따는 과정에서 내가 묻는 목소리가 같이 녹음되는 것은 당연지사로 여겨졌지만,

선배들은 프로듀서란 겉으로 두드러져서는 안되는 존재라고 꼬투리를 잡아,

눈물을 쏙 빼놓은건 물론이고 혼까지 쏙 빼놨던 것으로 기억한다.

암튼 그때 이후로 난 방송국에 주눅이 들어, 대체로 의욕 상실 사기 저하의 나날을 보냈었다.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산촌 생활자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산골로 간 예술가들'이란 이 책을 읽게 된데에는,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을뿐더러,

지독히도 몸을 움직이는걸 싫어해서 강이나 산으로의 여행은 물론이거니와,

동네 뒷산을 바라보는 것도 쓸데없는 시간낭비라고 여겼던 내가,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가며 귀촌을 동경하는 것으로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남편의 고향이 시골이어서 명절 때마다 한번씩 다녀왔었고,

'미루야마 겐지'의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의 일침을 통해서도,

시골이 마냥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결정할 사안은 아니어 주시고,

이런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간접 체험하고, 꿈꿀 수 있는 용기를 갖는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큰 의미이다.

 

이 책은 (산골이라기 보다는)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예술가들을 총 4장에 걸쳐서 다루고 있는데,

자연이라는 길을 통해서 교감하고,

자연이라는 교사를 통해서 성찰하고,

자연이라는 순리를 통해서 조화를 이루며,

자연이라는 춤을 통해서 몰입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려준다.

 

난 그동안 막연하게, (농촌도 그렇겠지만),

유독 산에 사는 사람과 관련하여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졌었다.

역으로, 산에 사는 사람들은 으례 자유로운 사람이겠거니,

(실상은 안 그럴지라도), 적어도 영혼이라도 자유로운 사람일테지 하고 상상했었다.

 

흔히들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게 신선이나 도사 정도 일텐데,

이들의 자유로움은 경계조차 없는 자유로움이겠고,

또 한 부류로 예술가들을 생각해 볼 수 있겠는데,

이들은 경계나 형식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는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리고 있는데, 예술가인지 신선이나 도사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ㅋ~.

 

총 25명이 등장하는데, 제일 앞에 등장하는 사람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하는 시인 '나태주'이다.

"심플한 표현. 이게 중요합니다. 사람들을 보면, 어려운 걸 어렵게 말하는 사람, 쉬운걸 어렵게 말하는 사람, 어려운 걸 쉽게 말하는 사람, 이렇게 세 부류가 있어요. 시도 마찬가지죠. 독자를 골치 아프게 하는 시가 휑행하지만, 사실 어렵게 쓰기는 쉽고, 쉽게 쓰기가 더 어려워요. 그럼 시가 왜 어려워졌느냐? 시의 본질은 '예藝'에 있는데 '학學'을 먼저 가르쳐서 그래요. 또, 시에서 우선하는 건은 말言이며, 말의 근본은 입말에 있어요. 이건 제가 절대 양보 못할 개념인데, 이런 신념에서 쉽게 읽히는 시가 나오는 것이죠."(17쪽)

그는 작품과 인격이 일치해야 하는지를 놓고 이렇게 얘기한다.

"ㆍㆍㆍㆍㆍㆍ알아서 믿는 게 아니라 몰라도 믿으면 그게 길이 되는 거죠. 문학도 마찬가지겠지. 나는 내가 믿는 길을 갑니다. 동시에 나와 다른 사람의 길도 인정해요."(20쪽)

이 책의 저자 박원식은, 자연과 인생의 자잘한 징후들에서 핵심을 읽어 시를 가꾸는 일에 노련한 시인 나태주를 일컬어 '달인'이라 한다.

시의 언어들은 풍진 세상의 정밀한 상처를 드러내는 데 능하다. 시인의 내면에 고인 상처를 정밀하게 드러내는 일에도 능숙하다. 하지만, 언어는 요술의 일종이라서, 능함이 넘쳐 현란한 헛꽃을 피울 가능성이 있다. 재능이 폐단과 동거한다는 말은 무릇 틀린 게 아니다. 본색을 잃은 시는 자본을 비아냥거리되 상품시장에 이미 주둔해 호객행위를 하며, 허영의 시장에 좌판을 벌여 명예라는 푼돈을 챙긴다. 그러나 명예욕이나 탐욕이 창작의 화톳불이 될 수도 있으니, 그걸 때 묻었다 몰아칠 일만은 아니다.(24쪽)

저자 '박원식'의 목소리는 책 여기저기서 개입하는데, 어디까지가 인터뷰어이고 어디부터가 인터뷰이인지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읽지 않으면 금방 헷갈리게 되고,

그리하여 한 예술가의 삶을 줏대없이 왔다갔다 하는 그런 것으로 오독할 수도 있으니 주의하여야 하겠다~--;

 

나태주는 한때 심한 병고에 허덕였고,

쓸개가 터지고 췌장이 녹아없어지는 질환에서 용케 회복한 후, 삶이 변했단다.

아프기 전엔 불필요한 일들에 많이 사로잡여 살았으나, 이젠 그러지 않는다며,

매사 언제 어디서고 잣대를 대충 재도 다 맞아 떨어진다고 너스레를 떤다.

예전엔 눈치를 봐가며 대충 사교하고, 듣기에 좋은 말을 하고, 처세처럼 술을 마시고 그랬는데,

지금은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싫은 일은 안 하고... 그렇게  살다보니,

나이든다는 것조차 즐겁다는 나태주의 말에, 박원식이 선문답 같은 한마디를 보탠다.

상생이 본분이라지만 상극도 이치다. 배터지게 얻어먹을 지경만 아니라면, 적시에 마땅히 얻어먹은 욕은 차라리 양분이라서 먹어도 체할 게 없다. (27쪽)

요즘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질병에서 회복된 후의 나태주에 가깝다.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싫은 일은 안 하고... 그렇게  살면,

누가 뭐라고 하던, 주위 신경쓰지 말고 대범하게 살아야 하는데,

작은 일에도 연연해하고 안달하는 본성은 그대로인지라 여전히 '안달루시아'과의 삶을 살고 있다.

 

실은 지난 석달동안 알라딘서재, 이곳에서 '이달의 당선작 선정위원'을 했었다.

소금이 짠지 단지 찍어먹어봐야 아는 성격 탓에 지원을 했었고,

숙제로 주어지면 좀 적극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을거라 기대도 했었는데,

상대방이 먼저 손 내밀어주고, 말 걸어주는 것에 익숙했던지라,

내가 먼저 다른 알라디너의 서재에 가서 손 내밀고 말 걸고 친한 척 한다는 것은 참 버거운 일이었다.

 

게다가 나를 잘 모르거나 처음 마주하는 사람들이 곧잘 당황하고 황당해 하는 문제이기도 한데,

생각이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널을 뛰고 중간 생략을 하다보니,

다른 알라디너의 리뷰나 페이퍼에 친목이나 관계를 목적으로 다는 댓글인데도,

머릿말이나 꼬릿말 등 인사 따윈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가 버리곤 한다.

또 댓글이란 것이 대부분 입말이어서 말할때 버릇이 그대로 튀어나오는지라,

뒤에 이모티콘이 없거나, 이모티콘이 있더라도 내 말버릇을 모르는 상대방이 받아들이기에 따라선,

'시비거는거냐?' 내지는 '싸워보자는 거냐?'의 심정이 될 수 있다는걸 상황이 종료된 후에야 깨달았다.

 

그런데, 이제까지 제대로 못한 걸,

앞으로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또는 '관계 개선을 위하여'라는 이유로,

눈치를 봐가며 대충 사교하고, 상대방이 듣기에 좋은 말을 하고, 술을 마시는 것도 처세를 위해서 그렇게 하면서,

대충 그렇게 살 자신은 없다.

병 후의 나태주처럼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만나고 싶은 대로 만나고, 오가고 싶은 대로 오가면서 그렇게 살아야지 싶고,

그러기 위해서 '친목 도모'나 '관계 개선'을 위한 마실이나 댓글 놀이 따위는 집어치우고,

예전에 그렇게 해오던 대로 닥치고 책이나 읽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렇게 살기위해선 안달루시아를 지양하고 산을 보며 호연지기를 키우는게 제일이지 않을까도 싶다.

 

사실 이 책이 완전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귀촌에 대해 양가적 감정을 느꼈는데,

작가 자야 같은 경우, '적게 벌어 적게 쓰자'가 귀촌의 목적이라고 했던 반면,

나주 죽설헌에 사는 화가 박태후 같은 경우는 집의 전체 면적이 자그만치 8천 평(그 정도면 소공화국 수준)이라고 하고 있다.

 

예술가란 원래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한다지만,

누군가는 와인이고 누군가는 오디오이고 누군가는 사진이고,

누군가는 미식가를 넘어 탐식가의 수준이며,

누군가는 이 모두를 한데 아우르기도 한다.

해외에서는 예술가들이 오픈 스튜디오나 거리의 카페를 통해 자유롭게 소통하는 살롱문화를 통해서 예술의 풍토가 다져지고 신진 예술가들이 배출되기도 하나 보다.

해외로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나 해외여행을 자주 다닌 사람들 중에,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자유롭게 소통하는 이른바 '살롱문화'를 흉내낸 듯한 것들을 보게 되는데,

일반적인 의미의 산골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의 왕래가 그리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싶고,

그러다보니 내가 색안경을 끼고보는 것일까?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해야 할까, '귀족의 품위에 걸맞는 전원 생활 놀이'를 향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전교조 출신의 판화가 김준권 같은 경우는 골프에 심취해 태국으로 골프여행을 가기도 한다니 의외였다.

 

이 책에서는 제외됐지만, 산골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기인같은 삶을 사는 예술가들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앞 부분에서 작가 자야는,

도시에서는 관계나 상황에 따라서 지출이 발생하니까, 돈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들지만,

시골에서는 스스로 결정한 대로 꼭 필요한 지출만 가능하기 때문에 가난이라는 걸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고 하는데,

이 견해에 글쎄 난 찬성하기 힘들다.

시골에서의 삶이어서 지출이 발생하지 않은게 아니고,

새로운 관계나 상황에서 도시에서 했던 것만큼의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네트워크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하면 그동안에 맺어왔던 관계나 상황은 약화되었고, 새로운 관계는 제대로 형성되기 전이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돈을 적게 번다고 해서 지출의 규모가 작아질 수는 있지만 지출이 전혀 발생하지 않을 수는 없다.

지출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는 관계, 네트워킹이 성립되지 않고 혼자 고립된 채로 사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나같은 경우는 읽는 내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시골이 마냥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노년에 귀촌을 꿈꾸는 이유는,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어서이다.

내가 생각하는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사는 삶'이란

'하고 싶은 일은 하고 싫은 일은 안 하고... 그렇게 살다보니, 나이든다는 것조차 즐겁다' 는 '나태주'의 삶이나,

"ㆍㆍㆍㆍㆍㆍ 농사를 짓는 주인공은 햇빛과 비, 바람이에요. 순응이라는 거, 순종과는 다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자연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일이 정말 좋아요.ㆍㆍㆍㆍㆍㆍ세상에는 영원한게 아무것도 없다죠? 어느 선사가 말하길, 고정관념이나 과거에서 나온 생각이 아닌, 무無에서 올라온 마음이 자연스럽다고 합니다. 에고에서 벗어나면 분노도 슬픔도 줄어들 거라고 생각해요. 자연이 그런 걸 가르쳐주죠.ㆍㆍㆍㆍㆍㆍ흔히들 '있는 그대로'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보통은 나의 기대와 상처, 바람을 싣고 상대를 바라보죠. 자연엔 그런 게 없어요. 묵묵한 수굿함이라고나 할까? 그게 자연의 미덕으로 다가와요.  "(40~41쪽)

라고 하는 '자야'의 삶에 가깝다.

 

될 수 있으면 문명의 이기를 줄이고, 획일화된 공장식 축산을 지양하며,

살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만 방목하여 키우고 채취하는 자급자족의 삶을 지향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25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등장하다보니까, 그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공통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산골'에 사는 '예술가'에 초점을 맞추기에는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의 기준이 제각각일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어떤 사람은 '산골'이라는 '지역'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려 들것이고,

어떤 사람은 '예술가'라는 직업 분류 상의 개념으로 접근하려 들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산다'는 자유로운 영혼의 개념으로 바라보려 할 테니까 말이다.

 

앞에서 와인이며 오디오며 사진이며 음식이며 이 모두를 한데 아우르는 '다재다능'한 예술가는 살롱문화를 얘기했었다.

그 살롱문화 예찬론자는 어느 하나라도 격을 갖추면, 다른 장르 역시 다 따라오게 마련이라고 하는데,

그때까지는 그저 '오홋, 멋진걸~!'하는 정도였지, 산골에 사는 예술가의 풍모를 느낄 순 없었는데,

"사람 사이의 공감이라는 것. 그것만큼 좋은 게 다시 있을까? 굳이 예술인들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에요. 공감이란, 이 시대 최대의 화두 아닐까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감은 물론, 자연과의 공감이라는 문제 역시 정색하고 깊이 있게 접근해야 해요.ㆍㆍㆍㆍㆍㆍ오디오로 음악을 즐기지만, 자연의 소리에 비하면 1퍼센트 미만의 감동을 얻을 뿐이죠. 최상의 음악은 자연이 내는 소리라는 겁니다. 자연의 소리를 닮으려는 것, 자연의 에너지와 감동을 닮으려는 게 예술이겠죠.ㆍㆍㆍㆍㆍㆍ"(193쪽)

이렇게 정색을 하고 자연을 얘기하는 걸 보니 또 달라보인다.

 

이 책은 글을 쓴 박원식도 그렇고, 사진을 찍은 주민욱도 그렇고,

소개되고 있는 25명의 예술가들도 그렇고,

하나하나 내로라하는 사람들이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25명을 묶어낸 방식이 통일성이 없고 산만했다.

누구 하나 책 한권으로 다루어도 손색이 없을 예술가들인데 가볍게 훑듯 지나가는건,

인터뷰어로서 인터뷰이에게 원하는 것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멍석을 펼쳐주지 못한 셈이다.

비슷한 분위기로 몇 명씩 묶어 집중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는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쓴 박원식의 경우, 글이 수려하고 아름다웠지만, 산골 예술가들과 어우러지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화려하고 융슝했지만 겉도는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박원식은 자신이 미문을 쓰는 줄, 글을 잘 쓰는 줄 알고 있는게 틀림없다.

그러니 글 속에서라고 하지만, 상대방의 삶에 너무 깊숙이 개입해서 산촌생활자들의 개성을 짓누르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병고 후 삶이 변했다는 나태주를 향하여 '달인'이라고 치켜세우질 말던지,

"상생이 본분이라지만 상극도 이치다. 배터지게 얻어먹을 지경만 아니라면, 적시에 마땅히 얻어먹은 욕은 차라리 양분이라서 먹어도 체할 게 없다. (27쪽) " 

라는 박원식의 입장은 생략하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다.

 

경주 남산의 한국 화가 박대성 편을 보게 되면,

"소산과 추사는 무엇이 다르지?"

"감히 추사의 정신세계를 따를 수 있예로는 그에게 다가갈 수 있겠지. 그러나 시적 상상력, 다시 말해 문기文氣는 미치기 워려워요. 그렇다면 이를 어쩌나. 내가 말이오. 죽는 그날까지 붓을 손에 쥐겠다는 이유가 뭐냐면, 추사를 때려잡겠다는 것, 그 때문이오. 하하핫!"

"앗!"

"ㆍㆍㆍㆍㆍㆍ부처를 이루려면 부처의 목을 베야 하는 법.ㆍㆍㆍㆍㆍㆍ"(282쪽)

라는 구절이 있다.

그동안 이 구절을 임제록과 관련하여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의미로 알았었다.

그리고 여기서 죽이는 대상도 부처나 조사가 아니라,

내 안에 내가 만들어 놓은 부처나 조사에 대한 아상, 말하자면 편견이나 선입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보니 소산 박대성의 기백이 읽히는 듯 싶어 새로웠지만,

이런 고전의 경우, 관점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로 생각이 미치자 아이러니컬 하다 싶기도 했다.

 

좋은 글은 경험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통찰에서 나오기도 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수는 있지만, 둘 중 어느 하나만으론 좋은 글을 쓰긴 어렵다.

 

기억도 가물거리던 대학 새내기 시절,

혼자 겉으로 두드러져서는 안된다던 그 말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떠오르는건 웬일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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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6-07-07 16:18   좋아요 1 | URL
바쁘고 은근 신경 많이 쓰이셨을거같아요

2016-07-07 2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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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언젠가도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일본 작가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바로 옆 나라이고 우리나라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연관을 맺어온 나라이니,

지리적 특성 상 외양만큼이나 정서적으로도 닮았을텐데,

딱 꼬집어 무엇이 틀리거나 다르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뭉뚱그려 아우를 수도 없는, 뭔가 다른 이질적인 요소가 분명 존재한다.

 

내가 가장 이질감을 느끼는 부분은,

우리나라라면 중개자나 매개체가 있어야만 가능한 설정일텐데,

일본 소설에서는 혼령이나 영혼이나 귀신따위가 중개자나 매개체 없이도 심심하면 나타나서,

소설 속의 등장하는 사람들과 지지고 볶고 난리 블루스를 추는걸 밥 먹듯 한다는 것이다.

 

중개자나 매개체 없이 산자가 혼령이나 영혼이나 귀신따위와 공감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니,

나로써는 감당 불가인 기괴한 정서가 아닐 수 없는데,

그렇다고 마냥 간과할 수만도 없는게,

사람들에게는 '음양사'로 유명한 '유메마쿠라 바쿠'의 '신들의 봉우리'같은 경우 내 인생 손가락 안에 드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이후로 관심을 갖게 되었을 정도로 초창기부터 그의 팬이었던건 아니고, 요번『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같은 경우도 한풀 꺾이기를 기다리며 묵히다보니 좀 늦어졌다.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이 책은 참 좋았는데,

개인적으로 하루키의 경우,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같은 에세이라는 장르여도 초창기의 그것들보다는 요즘 것들이, 좋은 것 같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제목 때문에 소설가라는 직업을 위한 내지는, 글쓰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책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는데,

그런 사람이 아니어도 하루키의 팬이라면 한번쯤,

그의 팬이 아니더라도,

나보다 인생을 먼저 산 사람에게서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인생상담이나 조언을 구하고 싶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볼 수가 있겠다.

 

이 책은 여러 곳에서 우리의 허를 찌르고 있다.

일례로, 우리는 책에서 지혜를 얻고 삶의 답을 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책을 쓰는 작가들을 인격적으로 성숙하거나 훌륭한 사람이라고 착각할 수가 있는데,

하루키는 이 책의 거의 첫 부분에서

'작가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인종이고 역시 자존심이나 경쟁의식이 강한 사람이 많아요. 작가들끼리 붙여놓으면 잘 풀리는 경우보다 잘 풀리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10쪽)'라고 하면서 그 부분을 명확히 한다.

그런데, 바로 뒷 문단에서, 각 직업에서의 영역 배타성을 놓고 봤을 때는, 소설가는 넓은 마음을 갖고 포용력을 보이는 인종이라는 알쏭달쏭한 얘기를 한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발달해서 좋고 편리한 점 중의 하나는 전화 기능 외에 문자 기능이다.

글은 언어에 비해 감정을 전달하는 데 있어 제약이 따른다.

아니, 이모티콘을 생략하게 되면, 글이 어떤 의도로 쓰였는지 오독이 빈번하다.

얼마전 글로써 내 의사 표현 하는데 한계를 느껴 속상해하는 내게 친구가 '소설은 누구나 쓸 수 있다'는 말로 위로를 하길래 속으로 '으쓱으쓱~^^'했었는데,

알고 보니 소설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소설을 오래 지속적으로 써내는 것, 소설로 먹고사는 것, 소설가로서 살아남는 것, 따위는 지극히 어려워서 보통 사람은 못할 짓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암튼, 이 책에서 하루키가 말하는 소설가의 자격을 보면,

어쩌면 나는 '소설가'로 최적화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현실은 왜 이리 암울하기만 한가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 혹은 특출나게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소설 쓰는 일에는 맞지 않을 거라고 나는 항상 생각합니다.ㆍㆍㆍㆍㆍㆍ기본적으로 몹시 둔해빠진' 작업입니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 '이것도 아니네, 저것도 아니네'하고 오로지 문장을 주물럭거립니다.ㆍㆍㆍㆍㆍㆍ실제로 내 발로 정상까지 올라가보지 않고서는 후지 산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입니다.(20~26쪽)

나로 말할것 같으면, '엉덩이가 뚱뚱한' '엉.뚱.족'일 뿐만 아니라,

지루하고 둔해빠진 작업도 결코 지루해하지 않고 즐기며 버티는 재주가 있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일일 경우에만 그렇지만~(,.))

생각이 이리저리 짬뽕공처럼 널을 뛰지만,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내 몸뚱이와 발의 경건함을 알고, 내 몸을 움직여 경험한 것만 믿는 부류이다.

그러니까 혼령이나 영혼이나 귀신따위가 중개자나 매개체 없이 나타나는걸 견딜 수 없어 하는 건 당연지사이다.

 

암튼 생각이 엉뚱하고 유니크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고로,

이 모두는 소설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직업인이라면 어느 직종의,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얘기가 아닐까 싶었다.

 

두뇌가 명석하고, 그리하여 천재라고 불리우는 사람일수록, 이해속도가 빠르고 그만큼 빨리 터득하겠지만,

전문가나 숙련인이 될만하면 싫증을 느낄 것이고,

싫증을 느껴 자리에 안주하기보단 새로운 일을 찾으려 들 것이고,

그러다보면 매번 나이에 상관없이 초보자에 머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하루키가 맘에 들었던 것은,

그가 천재가 아닌, 소설가의 자질을 가져서 겪은 일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그는 이를 통해 사회를 배웠다는 얘길, 전보다 얼마간 터프해졌고 전보다는 얼마간 지혜가 붙은 것 같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소설가로 제한시킬게 아니라 직업인이라면 누구에게든 적용되는 것이리라.

 

무엇보다, 자신이 더 흥미를 갖는 일을 찾아,

자신이 겪어냈고, 스스로 통과하여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원하는 대로 자유로게' 써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개인적으로 글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괜히 어려운 말을 늘어놓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사람들이 감탄할 만한 아름다운 표현을 굳이 쓰지 않아도 된다'(50쪽)는 것을 하루키는 명확히 하고 있다.

 

또 한가지 '소설가의 자격'으로 다른 것과 아울러, '기초체력이 몸에 배도록 할 것'이라고 한 것도 좋았다.

나이가 들수록 책상앞에 앉아있는 시간이나 책을 붙들고 앉아 있는 시간에 비해, 집중력은 한참 못 미치는 걸 느낀다.

운동을 잘 하지도 않고 운동신경이 뛰어나지도 않지만,

한때는 마라톤 동호회에서 일주일에 두세번은 7킬로씩을 걷듯이 달려(?)줬었는데,

얼마전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이 깜박거릴때 몇발자국 뛰었다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걸 보니, 세월을 탓해야 할지, 어쩔 수 없는 저질 체력을 탓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그리고 그 강고한 의지를 장기간에 걸쳐 지속시키려고 하면 아무래도 삶의 방식 그 자체의 퀄리티가 문제가 됩니다. 일단은 만전을 기하며 살아갈 것. '만전을 기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다시 말해 영혼을 담는 '틀인' 육체를 어느 정도 확립하고 그것을 한 걸음 한 걸음 꾸준히 밀고 나가는 것, 이라는 게 나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경우) 지겨울 만큼 질질 끄는 장기전입니다.ㆍㆍㆍㆍㆍㆍ육체적인 힘과 정신적인 힘은 말하자면 자동차의 양쪽 두 개의 바퀴입니다. 그것이 번갈아 균형을 잡으며 제 기능을 다할 때, 가장 올바른 방향성과 가장 효과적인 힘이 생겨납니다.(198~199쪽)

라고 하고 있는데,

 

하루키에 의하면,

천재적 소설가가 아닌, 소설가의 자격을 갖췄다고 생각되는 생명력이 긴 소설가들을 보게 되면,

막노동으로 생활비를 벌어야했던 스티븐 킹 같은 경우도 담배랑 술 때문에 고생을 하기도 하지만,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꾸준히 글을 쓰고 운동을 하는 등 지금도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마이클 코넬리와 로버트 크레이스는 서로의 작품 속에 주인공을 교차 등장 시킬 정도로 절.친.인데,

그들 또한 작품활동시간과 운동시간을 따로 정해놓고 철저히 관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소설가를 꿈꾸진 않더라도,

직업인으로서의 나에 대해 얘기해보라고 한다면,

관리해야할 시간과 쉬어할 시간을 적절히 배분하자고 생각한다.

주5일 근무를 했으면, 나머지 이틀은 완전한 휴식과 재충전에 할애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직업인은 일 하는 시간 뿐만 아니라 쉬는 시간까지 고려하고 적절히 안배하여, 몸과 마음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다양하고 멋진 형태로 나타날지라도, 지지고 볶고 그러면서 사는게 인간의 본모습이니까 말이다.

 

이 책에서 하루키는 소설가라서 사람을 관찰하는 게 일이지만,

세밀히 관찰해서 대략적인 프로세스는 거치지만, 판단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판단은 정말로 그것이 필요할 때까지 보류해 둔다고 한다.

 

이 말은 어찌보면 무척 양심적인 말 같지만, 무척 애매모호한 말이 될 수도 있다.

정말 필요한 순간이 오면, 판단을 한다는 얘기이니까 말이다.

그때의 판단 기준은?

어찌보면 가와이 하야오의 임상 심리 기법 같기도 하지만, 결국은 가와이 하야오와 카를 융을 합한 하루키만의 방법을 쓰고 있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36년동안 한가지 일을 꾸준히 해왔다는 것은, 그것이 소설가이든 다른 무슨 직업이든 간에,

도통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시간일테니까 말이다.

 

 

군데 군데, 껄끄러웠던 단어가 보였는데...차치하고,

하나만 얘기하자면,

 

사전을 찾아보면, 감촉이란 '외부의 자극이 피부 감각을 통하여 전해지는 느낌'이라고 되어있다.

282쪽과 330쪽에 '감촉'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느낌'정도로 바꿔주는게 어떨까 싶다.

우리의 정서상, '감촉'이라고 하기엔 '외부의 자극이 '피부감각'을 통하여 전해지는 느낌으로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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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7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6-06-29 10:59   좋아요 2 | URL
아직 님이 젊다는 거예요.
젊을 때는 앞만 보고 달려도 좋거든요.
아마 하루키도 29세까지였던가 돈을 이리저리 빌려 재즈바를 하느라고 앞만 보고 달렸다고 하죠.
그가 작가로 데뷔하게 된 첫 소설을 그렇게 바 한 귀퉁이에서 탈고했다고 하더라구요.

재충전할 기회를 갖는다는 건,
바꾸어 말하면 그냥 열심히 내달리기만 할 정도로 체력이 협조해 주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젊음을 향하여 그토록 찬사를 보내고,
젊었을 때는 누더기만 걸쳐도 아름답다는 둥,
젊음이 가장 값나가는 밑천이고 재산이라는 둥,
그런 얘기를 하는 걸거예요.

저는 지금의 제 삶을 완전 만족하진 못하고,
때때로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살지만,
만약 다시 한번 젊은 시절로 돌아가 그때를 살 수만 있다면,
열심히 공부하고 책을 읽고...그러고 사는 대신,
젊은 시절을, 젊음을 만끽하며 살고 싶어요.

젊었을때 밖에 할 수 없는 그런 일들 있잖아요.
무모함이나 치기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기도 하는, 그런 것들이요.
저는 너무 바른생활로 살아온 것 같아서요~--;

루쉰P 2016-06-29 00:04   좋아요 1 | URL
오옵 역시 같은 책을 읽어도 나문꾼님의 리뷰가 훨씬 좋군요 ㅎ 아니 내가 읽은 책이 이런 내용이었나 하며 다시 읽게되는 ㅋㅋㅋ

하루키의 에세이가 좋다는 건 정말 완전 공감이에요 ㅎ 에세이를 읽을 때마다 알던 그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아 너무나 좋아요. 나무꾼님이 말씀하신데로 어떤 외적 존재와 바로 소통을 하고 등장을 하는 그런 부분이 저도 좀 다가오지 않고 어려운 부분은 있어요.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결론에 다가올 수록 `응?` 이런 반응을 보이게 돼요 ㅋ 아무래도 톨스토이류 소설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제대로 맺어서 끝내는 스타일이 아닌 소설은 힘들다고 할까요? ㅎ

오늘은 금연 3주째라 병원과 약국가서 칭찬 받고 왔습니다. 완벽한 금연가가 될려구요 ㅎ

sslmo 2016-06-29 11:14   좋아요 1 | URL
교주님~!
저 놀려 먹는게 그렇게 재밌어요?
자꾸만, 그렇게, 계속, 놀려먹으면 교주님이랑 안 놀거예요, 끙~(,.)

근데, 교주님, 혹시 `루쉰의 편지`라는 책 가지고 계시면, 저 좀 보여주세요~^^
품절인데다가, `자음과 모음`출판사 거라서 일부러 구하긴 좀 그렇고 말이죠, 헤에~^^

금연 3주째라~,
간식 완전 땡기지 않으시려나?
응원하는 의미루다가 간식 좀 보내드릴가요?
연락처 알려주세요.

 
지구의 맛 한겨레 동시나무 1
이정록 시, 오윤화 그림 / 한겨레아이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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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말미에 2016년 가장 짧은 달에 '옥수수수염 머리 이정록'이라는 서명으로 미루어, 책 앞 날개 안쪽의 이 그림도 옥수수수염인고로 이정록 시인이 손수 그리신 자화상이 분명하다. 그림 밑에 날짜와 낙관을 흉내낸 돋을새김'록'자 하며 시인 특유의 자상함과 재치, 기발한 아이디어가 도드라진다.

 

그동안의 나는 어른과 어린이로 연령 상의 분류는 피치 못할 것이지만,

언어의 바다에서 아름다운 시어를 길어올려 시로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런 시를 읽고 감상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동시 또한 쓸 수도 있고 감상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터라,

시와 동시를 구태여 경계 나누는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었다.

 

'동시는 유치하다'고 할 친구들을 위해 요번엔 생각이 깊고 의젓한 동시를 묶었다고 하길래,

시인의 세심한 배려라기보다는 심한 과장법이구나 싶었었다.

그런데,

그간 시를 공부하며 느낀 하나는

좋은 시집에는 분명 빼어난 동시가 알알이 박혀 있다는 것이에요.

좋은 동시집에 뛰어난 시가 숨어 있듯 말이죠.

그건 본래 시와 동시가 한몸이기 때문이죠.

동심이 바탕이 돼야 기가 막힌 시가 탄생하죠.

어른 시와 동시는 동심원이 같아서 딱히 경계선을 긋기 어려워요.

시를 품은 동시, 동심을 꼭 감싸 안고 있는 시를

한곳에 모아 보고 싶었어요.

                                                                                                                  ('시인의 말' 부분)

라고 하는데,

어린아이의 마음을 일컫는 '동심'과 수학용어 동심원에서 원의 중심이 같고 반지름이 다른 원에서 동음이의어의 묘를 살려내는걸 보면,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사가 틀림없다.

일반적인 언어를 벼리고 모두어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내는 걸 보면 확실한 스페셜리스트 같기도 하고 말이다.

 

좋은 시가 참 많지만,

그동안 시인의 전작을 읽었던 이들이라면 정서가 크게 새로울게 없다고 느껴질 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이래서 '요번엔 생각이 깊고 의젓한 동시를 묶었다'고 했구나 하고 느껴질 정도로,

어려운 시들도 있었다.

 

나도 뛸래

 

 

처음으로 차를 산 담임 선생님

운동장에서 주차 연습하다가

축구 골대를 박았다.

 

"조기축구회 공격수라면서요!"

 

"뒷발질로 골인시키기가 쉽냐?

 후진은 너무 어려워."

 

그날 밤,

축구 골대가

꺾인 골대가

꺾인 무릎을 쓰다듬으며

달에게 소리쳤다.

 

"보름아.

나도 너처럼 공을 차올릴 수 있겠어.

이제 한쪽 다리가 접혔거든."

 

이 시는 축구골대를 주차라인 삼아,

차를 후진시켜 주차연습을 해본 어른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쉬운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

난 모든 사물을 의인화해서 의미를 부여하며 혼잣말하기를 즐기는 사차원이라 이해가능한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부자되세요

 

목욕탕에서

아빠 등을 밀어 드리는데

처음 보는 할아버지가 말씀하신다.

 

--부자 되셔!

 

서커스 공연장에

아빠 손잡고 들어가는데

매표소 누나가 빙긋이 웃는다.

 

--부자 되세요!

 

느낌표가 아니라

아빠와 아들 사이냐 묻는

물음표란 걸 나도 안다.

 

--네 부자예요.

벌써 부잔걸요.

 

난 아빠의 웃음이 좋다.

더운 나라에 사시는 외할머니는

우리가 부자인 걸 단박에 아셨는데.

 

이 시는 요즘 애들 말로 하면 '아제 개그'도 아니고, 썰렁 개그 정도 되시겠다.

아, 춥다, 추워~--;

 

어떤 시들은 시인이 과거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쓰였고,

또 어떤 시들은 시인의 자녀 정도의 설정이지 싶고,

또 어떤 시들은 요즘 뉴스에서 차용했지 싶은것이, 시대가 제각각이다.

 

달이 환하게 웃는다.

구름에 숨은 달처럼

엄마 아빠는 조금만 웃는다

                     '보름달 돈가스' 중에서

같은 경우, 설정도 그럴 듯 하고 상황도 애잔한 것이,

어렵지 않은 단어들로, 마음  가운데를 파고 든다.

 

'우유주머니'라는 시는 맞벌이 가정이 늘어나면서,

아침에 우유주머니가 하교시 현관 열쇠주머니가 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데,

요즘은 지문인식키, 비밀번호 설정키가 대세를 이루니,

요즘 아이들은 이해하기 힘든 상황일 수도 있겠다.

왼손과 오른손이 번갈아 어긋나는 상황을,

'이제야 짝을 맞춘다'고 한 것도 참 긍정적인 발상이고 말이다, ㅋ~.

 

'골고루', '골목', '압력밥솥', '사랑', '네가 나를 부를때', '왜가리' , 등 재미있거나 기발하거나 재미있고 기발하고 이쁘기까지한 시가 넘쳐난다.

말 못하는 아기들은 궁금한건 일단 입에 넣고 본다.

난 아기는 아니지만,

한가득 머금고 입안에서 궁글려서 조금씩 음미하듯 베어 삼킬 것인지,

한꺼번에 눌러 삼킬 것인지, 는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달라요~!'되시겠다.

그러다가 얹히거나 소화불량이 되는 건?

팔자소관 되시겠고, ㅋ~.

 

 

이런 팔방미인인 이정록시인을 직접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있어 서둘러 리뷰를 썼다.

(시집이 나온것에 비해 한참 게으르지만~--;)

6월26일 오후 3시, 충남홍성 홍주문화회관에서 열리는 <2016 문학콘서트>에 가시면 만나실 수 있겠다.

(자세한 기사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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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6-22 23:22   좋아요 0 | URL
동시는 그야말로 마음이 순수한 사람만이 쓸 수 있지 않을까 싶더군요.. 동시를 썻던 윤동주 시인도 생각나네요....

sslmo 2016-06-23 13:37   좋아요 1 | URL
점심 드셨어요?
윤동주를 말씀하시는데, 내 고장 칠설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하는 이육사가 떠오르는 뜬금없음이란...ㅋ~.

2016-06-23 16: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9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4 0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6-06-29 10:49   좋아요 0 | URL
맞아요, 내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은 시에서나 가능한 거고,
청포도는 이 무렵이 젤 맛날 때죠~^^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 - 작가 위화가 보고 겪은 격변의 중국
위화 지음, 이욱연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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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아닌 나 같은 평범한 사람도 (기억력이 깜박깜박 하는 나이 때문이지만, ㅋ~.) 책을 읽었을 때의 감동과 느낌을 붙들어 두기위해서 글을 쓰는지라, 위화 같은 전문 작가의 경우에는 뭔가 다른 목적을 가지고 글을 쓴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작가 위화가 보고 겪은 격변의 중국'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를 읽기 시작하면서 먼저 읽었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 비해서 훨씬 둥글렸다는 느낌이 들어 맥이 빠져버릴 때 즈음, 책날개에 적힌 그간의 사정을 읽게 되었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검열'로 인해 중국이 아닌 대만에서만 출간되었으며,『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이 책 같은 경우는 중국에서 10년 만에 발간된 산문집이라고 하니, 아무래도 자체 검열의 과정을 거쳤을 테고 그러면서 순화되었을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이 책이 유난히 반가워졌고 그간이랑 다른 의미로 읽혔다.

 

그렇다면 이렇게 일기 형식을 띤 이 산문집을 통해서 위화라는 작가가 우리에게 얘기하려던 것은 무엇일까?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삶, 불균등한 삶이다. 지역 간의 불균등, 경제 발전의 불균등, 개인적 삶의 불균등이 나중에 마음의 불균등이 되었고, 끝내는 꿈의 불균등으로 이어졌다. 꿈은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원래 지니고 있는 재산이고, 모든 사람의 마지막 희망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잃어도 꿈만 있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꿈조차 균형을 잃었다.

ㆍㆍㆍㆍㆍㆍ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이다. 우리는 현실과 역사라는 이중의 거대한 격차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모두 환자라고 할 수 있고, 모두 건강하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두 극단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과 과거를 비교해도 그러하고, 오늘과 오늘을 비교해도 역시 그러하다.ㆍㆍㆍㆍㆍㆍ 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차라리 치료법을 찾는 사람이라 하겠다. 나는 한사람의 환자이기 때문이다.(12~13쪽)

곳곳에서 다른 시대, 다른 국가, 다른 언어와의 비교가 나와서 '차이'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요량인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개혁개방 이후, 경제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사유 방식과 생활 방식, 세계관과 가치관 따위가 천치(지)가 개벽하듯이 변했고(15쪽), 사람들의 추격 속도는 발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서 지쳐가고 있다며,

개인의 가치와 가정의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찾을 수 있도록 발걸음을 늦춰야 한다고 하는 데에서야 저자 위화가 하고자 하는 얘기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일례로 93년부터 컴퓨터로 글을 쓴 386세대인 그가, 그 이전에 10년 정도 손으로 글을 써서 생긴 손가락의 굳은살을 은근 자랑스러워 했었는데, 나중에 왕멍(왕멍의 쾌활한 장자 읽기의 그 왕멍인듯~^^)을 만나 그의 손에 굳은살을 보고는 완전 감탄한 얘기를 들려준다. 자신은 겨우10년이지만, 왕멍은 286세대로 컴퓨터로 글을 쓴것도 먼저이지만, 이전 손으로 글을 쓴 것도 반평생이란다.

내겐 '차이'로 읽히지 않고, '꾸준함을 이기는 힘은 없다' 쯤으로 읽혔다.

 

이 책이 좋았던 것은,

소설가 위화가 쓴 산문집 답게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책머리에,

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차라리 치료법을 찾는 사람이라 하겠다. 나는 한사람의 환자이기 때문이다.(13쪽)

라고 하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문제를 제기하지만 않고, 다양한 해법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책과 글을 통하여 문제 제기를 하고, 치유책을 찾고,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 과정에서, 독서를 할 때 중요한 문제가 부상하기도 하고,

작가에 대한 선입견을 토대로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은 잘못이며, 위대한 독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상태에서 읽는 것이란 점이다. 그것은 텅빈 마음을 품고 읽는 것으로, 독서 과정에서 마음은 빠르게 풍성해진다. 왜냐하면 문학은 언제나 미완성이고 부조리 서사의 특징도 미완성이기 때문이다.(66쪽)

영향을 준 작가는 많지만, 다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며,

포크너 만을 진정한 스승이라고 하는데,

스승의 요건으로 이론뿐 아니라 제자에게 직접 전수해주는 한 수가 있어야 하는데,

포크너는 어떻게 심리묘사를 처리해야 하는지 절묘한 한 수를 알려주었다고 치하한다.(95쪽 내용 재배열)

 

위화 자신이 '스트린드 베리'의 '빨간방'을 다시 읽은 독서 경험을 살려 이런 말도 한다.

지나간 삶은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지만 지나간 독서는 세월이 지나면 더욱 새롭다. 20여년 동안 위대한 작품들을 읽을 때면 늘 다른 시대, 다른 국가, 다른 언어의 작가들에게서 나 자신의 감성을 읽었고, 심지어 나 자신의 삶도 읽었다. 문학에 어떤 신비한 힘이 진정으로 존재한다면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생각한다. (112쪽)

 

작가 사이의 상호 영향 내지는 다른 작가나 외부의 영향을 이렇게 비유했었다.

한 작가의 창작이 다른 작가의 창작에 영향을 주는 것은 태양이 식물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으나, 중요한 것은 식물이 태양의 빛을 받아들여 성장할 때 결코 태양의 방식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식물 자신의 방식으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118쪽)

이 말은 무척 멋지게 들렸지만, 어찌보면 자신의 본성을 고집한다는 의미로도 읽혔다.

과연 식물은 성장할때 식물의 방식만을,

또는 태양은 빛을 비추일때 태양의 방식만을, 고집하는 것일까?

태양이 빛을 비춰주고 식물이 받아들여 성장하는게, 태양이나 식물 어느 한쪽만을 고집하는 것일까?

번지고 스며 물드는, 통섭이나 융합 따위로는 설명 불가능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봤다.

 

이 책의 뒷부분 '부록'으로 가면, 위화 본인이 쓴 소설 『형제』에 대한 본인의 해설이 나오고,

달라이 나마와 관련 오늘날 중국에 대한 비판과,

창간 50주년을 맞는 잡지에 축하문을 기고하며 자신의 20년 작가인생에 대한 소회를 밝힌다.

우리가 아무리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을 지라도,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차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위화는,

'차이'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요량이 아니라,

향후 10년 혹은 20년 동안의 중국 사회 형태가 차츰 보수적 방향으로 나아가고 부드러운 방향으로 나아가길 희망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를 구해야 하기 때문에.

 

소설 『형제』의 해설을 이렇게 마무리 한다.

ㆍㆍㆍㆍㆍㆍ언어의 온도를 조금 높일 수 있었다. 나는 쓰면서 현실 세계의 냉혹함을 느꼈고, 사납게 썼다. 그래서 따뜻한 부분이 필요했고, 지극히 선한 부분이 필요했으며, 이는 내게 희망을 주고, 독자에게 희망을 주었다. 현실 세계가 사람들을 실망시킨 뒤 나는 아름다운 죽은 자들의 세계를 쓴 것이다. 이 세계는 유토피아도 아니고, 도화원도 아니다. 하지만 무척 아름답다.(244쪽)

그의 글이 내게 치유인 이유이다.

맨날맨날 그날이 그날인,

다를게 없는 무미건조한 일상일지라도,

조금쯤은 현실세계에 냉혹함과 각박함을 느끼더라도,

우리가 무조건 따뜻한 남쪽나라를 그릴 수 없는 까닭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유토피아도 아니고, 도화원도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 맞잡은 손으로 온기를 더할 수는 있고,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로 언어의 온도를 조금 높일 수는 있지만,

우리는 죽은 자들이 아니고, 현실에 발 딛고 서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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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1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2 0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6-06-21 21:13   좋아요 1 | URL
오늘 지금 북플 화제의 글에 이 책 리뷰만 세 글이 올라와 있습니다. 첨 보는 저자와 책이라 갑작스런 리뷰 폭풍에 갑자기 이유가 궁금합니다. ㅎㅎ

sslmo 2016-06-22 10:09   좋아요 1 | URL
ㅋㅋㅋ~, 리뷰 폭풍이 일었나요?
어제가 위화의 산문 두권 리뷰 이벤트 마감일이었어요.

책 밑에 딸리는 서지 정보나 이벤트 정보를 잘 들여다보면, 간혹 이런 이벤트가 있고,
음, 저도 그동안 종종 당첨 됐어요.

뭐, 글을 잘 써야 하지 않을까...생각들을 하시겠지만,
리뷰대회가 아닌 다음에야 성의껏 쓰면 되고,
거의 추첨이나 제비뽑기 방식이더라구요~.

상품이나 상금으로 받은 것 중 제일 고가는 `비밀`이구요, ㅋ~.
보통은 책 한두권이나 책 한두권을 구입할 수 있는 도서상품권 정도인데,
우리 같이 책에 환장한 사람들은 그게 제일 좋죠~^^

제일 쓸모없었던 경품은요.
무슨 닥터백이라나.
노랑색 천으로 만든 가방이었는데,
천도 네 귀퉁이가 안 맞아 울고 조악한 것이,
제가 만들면 더 잘만들 자신이 있었어요.
애먼 천과 부자재가 아깝더라는~--;

이렇게 상세 브리핑했으니,
자, 님도 트라이 투 해보시길~!!!

북다이제스터 2016-06-22 23:48   좋아요 1 | URL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sslmo 2016-06-23 13:38   좋아요 1 | URL
It`s my pleasure~^^

루쉰P 2016-06-23 14:29   좋아요 1 | URL
아우 저 표현 정말 좋네요 ㅎ

한 작가의 창작이 다른 작가의 창작에 영향을 주는 것은 태양이 식물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으나, 중요한 것은 식물이 태양의 빛을 받아들여 성장할 때 결코 태양의 방식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식물 자신의 방식으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118쪽)

어떻게 이런 문장을 ㅋ 감탄을 하게 되네요. 위화가 말한 나는 치료법을 찾는 사람이다라는 말에서는 루쉰 선생의 스멜이 느껴지네요. 루쉰 선생은 의학 공부를 하다가 문예를 종사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의학관련 지식을 비유해 글을 쓰곤 했거든요.

마지막에 쓰신 글은 무척이나 함축적이지만 철학적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의 글이 내게 치유인 이유이다. 맨날맨날 그날이 그날인, 다를게 없는 무미건조한 일상일지라도, 조금쯤은 현실세계에 냉혹함과 각박함을 느끼더라도, 우리가 무조건 따뜻한 남쪽나라를 그릴 수 없는 까닭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유토피아도 아니고, 도화원도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 맞잡은 손으로 온기를 더할 수는 있고,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로 언어의 온도를 조금 높일 수는 있지만,우리는 죽은 자들이 아니고, 현실에 발 딛고 서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베스트 문장입니다. ㅋ 감동 쩔어 ㅋ

sslmo 2016-06-29 10:40   좋아요 1 | URL
위화도 작가가 되기 전에 발치사였다고 하더라구요.

사실 전 한때 모옌과 위화를 살짝 헷갈렸는데여, 지금 생각해보니 위화나 루쉰 입장에서는 되게 기분 나빴을 수도 있겠다 싶네요~.
모옌으로 말할 것 같으면 노벨문학상을 받기는 했지만, 중국 같은 나라에서 문학을 하는 사람에게 체제 순응적이란 말은 일종의 모욕적인 언사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한 것이~.

요번 기회에 위화의 다른 소설들을 알게 된게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2016-06-28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6-06-29 10:43   좋아요 1 | URL
히힛~^^
저보다 고수이신 님께 축하를 받으니 기쁘기도 하지만 부끄럽기도 한 걸요~^^

뭐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일종의 제비뽑기 같은 것일테니까요.
그리고 요번엔 어쩐 일인지, 알라딘 적립금이 아니라, 게좌번호를 대라는 것이...여간 번거롭지가 않은걸요~ㅠ.ㅠ
 
인문학적 독법이란 인간의 삶 전반에 걸친 가변적인 것이다

때때로 누군 말로써 자신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누군 글이 그렇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는 말과 글 양쪽 다 자신을 제대로 표현해 내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웅현 님의 '다시, 책은 도끼다'는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고,

실전에 적용시켜 볼 수 있는 근사한 책이었다.

 

 

 

 

 

 다시, 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6년 6월

 

 

얼마 전, '다시, 책은 도끼다'를 읽다가 혼란스러웠던 부분을 잘라내어, 지인에게 여쭙는 과정을 리뷰에 올린 적이 있다.

난 이 지인이라는 사람과 계속 책에 관해서 이것 저것 여쭙는 사이였고,

그래서 용어가 통일되다보니,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서,

박웅현보다 쉽게 이해가 되었지만, 모두가 그런건 아니었나 보다.

 

혼란스러움을 줄이겠다는 선의와는 상관없이, 오히려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키는 꼴이 되어 버렸나 보다~--;

 

그리고 이 책의 한 부분, 불교와 관련하여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어, 지인에게 여쭈어 보았더니 이런 답을 주셨다.

나도 지인의 생각에 동의한다.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내가 불교의 개념 자체를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할 생각은 눈곱 만큼도 없었고,

이책에서 궁금하였던 부분에 관해서 였다.

'불교에서  수행의 최종 목적은 환생이 아니라 멸이랍니다'라고 한 저 문장과 그 뒤에 나오는 내용이 호응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 책이 강의내용을 토대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강의 도중에는, 말하기 중에는 말외의 모든 공감각적인 표현들이 감정전달의 수단이기 때문에 의미하는 바가 충분히 전달되었겠지만, 책으로만 읽어선 충분히 오해할 여지가 있다 싶어서 였다.

 

그러다 보니, 일이 커졌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냥 침묵을 지킨다는 것도 비겁한 일인것 같아 바로 잡아본다.

 

내가 책에서 궁금했었던 부분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인의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같은 경우도,

처음 저 구절만을 접한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데, 나 또한 그 부분을 간과했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가 '언어도단'을 일걷는 것만 인지하고는,

언어도단을 말함으로써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근데, 사실은...

불교의 언어는 언어도단의 세계를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어서 이렇듯 오해가 생길 여지가 다분하다는데,

이건 넷상에서 내가 사용하는 언어인, 반어법이랑도 닮았다.

나는 상대방에게 마음을 그대로 전하지 못하고 역설이나 반어를 많이 사용해서, 때로 오해를 불러 일으키곤 한다.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눈다던지, 감정이 목소리에 실리는 대화의 경우에는 덜 한데,

글자로 어떤 상황이나 사실을 전달할 경우, 분위기까지 통째로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 때문에 여간 아쉽지가 않다.

 

태어남도 없고 소멸됨도 없는 것,

그리하여 멸 자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해탈이 아닐까?

모든 고뇌를 멸해서 새로운 연을 이루는 게 아니라,

모든 고뇌 자체가 망상임을 깨달으면, 그것이 곧 열반이요, 해탈이 아닐까?

그러니 내 마음이 곧 부처고,

모든 것이 허상임을 깨달으면,

곧 부처를 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박웅현 님이 책에서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고통임을 깨달으라'는 말을 빼먹은 채로, 

그냥 멸만을 얘기해서, 의미를 모호하게 한것을 바로 잡고 싶었을 뿐이었다.

 

다시 한번 얘기하는데,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내가 불교의 개념 자체를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할 생각은 눈곱 만큼도 없었다.

 

길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려야 하는데, 난 때로 너무 집착하고 연연해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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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해탈에 대하여...
    from Value Investing 2016-06-21 13:43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양철나무꾼 님께서도 지적했듯이, '맥락' 없이 인용하는 글들은 곧잘 '말도 안되는 소리'로 매도될 때가 자주 있는 듯합니다. 저 역시 (바로 그런 '표현'을 앞세운 지인의 글을 보고) 대뜸 그런 느낌을 받았으니 말이지요. '연도 멸도 없는 해탈의 세계'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저도 한동안 곰곰 생각해 봤습니다. '해탈'이 곧 불교도의 궁극적인 목적이고, 그 해탈에 이르면 곧 '윤회'를 벗어난다는 뜻일진대, 왜 거기서 다시 '새로
 
 
2016-06-20 15: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1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낭만인생 2016-06-20 16:51   좋아요 1 | URL
저도 그래요. 버려야 하는데.. 아직도 아내를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옳은 생각입니다.

sslmo 2016-06-21 17:26   좋아요 1 | URL
낭만인생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버려야 할 건 아니지요.
잠시 접어두는 것일 수도 있고,
살다보면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 잠시 잊혀지거나 잃어버릴 수는 있지만 말예요.

구태여 칼로 무우자르듯이, 상처를 도려내듯이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충분히 애도하셔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빠져버리거나 침잠하지만 않는다면...요~^^
힘 내세요~^^

2016-06-21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2 0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