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5분 내손으로 성형하기 - MBC 불만제로도 불만 없이 돌아간 착한 골근테라피 내 몸을 살리는 시리즈 6
위수영 지음 / 씽크스마트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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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종류의 책은 엄청 많이 주워 모으지만,

리뷰로 잘 쓰지는 않게 되는데,

그 이유가 긍정적인 얘기를 할게 없어서이다.

 

나에겐 별로였어도,

책을 만드는데 어떤 노력이 소요되는지 가늠하겠기 때문이고,

책을 만드는데 베어 넘겨진 나무들이 아깝기 때문이다.

 

한가지 더 구실을 대라면,

책에 대한 나의 느낌이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나랑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도 얼마든지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존중해 줘야 한다고 생각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나에게 잘못 걸린 책이다.

'MBC불만제로'는 불만 없이 돌아갔을지 모르지만,

난 그럴 수 없다.

이 책은 날 투덜이스머프로 만들어 버렸다.

 

 

골근테라피의 원리와 효과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데,

원리는 두루뭉술, 모호하게 담을 넘고,

효과는 아주 많이 중의적이다.

골근테라피가 무엇이길래~(,.)

 

 

이 책에 의하면, 변형된 얼굴의 뼈와 근육을 자극함으로써 뼈세포 자체의 교환을 돕는 관리법인데,

인체 스스로 재생하게 하여 얼굴의 형태를 작게 만드는 것이란다.

 

내가 유독 이 책을 갖고 투덜거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내 손으로 성형하기'란 제목부터가 일반인들을 타겟으로 만들어진 책이라는 얘기인데,

저런 용어들을 두루뭉술하고 모호하게 설명하는 것부터가,

독자들의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킨다.

 

백번 양보하여, 얼굴의 뼈와 근육이 변형되었다는 표현은 넘어가더라도,

얼굴의 뼈와 근육을 어떻게 자극을 하길래, 뼈세포가 자체 교환되는 것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변형된 얼굴뼈에 적절한 자극을 가하면 피부의 말초신경 말단부에서 발생하는 자극이'라는 부분도,

저 내용만으로는 얼굴뼈와 말초신경의 말단부가 별개의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결국 이론은 '고유수용성 신경근 촉진법'을 차용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공부를 제대로 해서 이론적 기반을 탄탄히 해주었어야 했다.

그래야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가 있다.

 

골근 테라피의 차별화된 효과라고 하면서,

표피 자극을 기본으로 하는 경락마사지와는 달리,

각각의 경락 자극에 영향을 미치도록 적절한 깊이와 압력을 유지하며 진행된다고 하는데,

일반인들이 '각각의 경락 자극에 영향을 미치도록 적절한 깊이와 압력'을 구별해 낼 수 있을까?

게다가 '골근테라피가 만들어내는 놀라운 변화 (저 위에서는 변형, 교환, 변화라는 낱말이 혼용됐다. 용어에 일관성이 없다.)는 마사지 자체의 효과라기보다는 인체의 자연치유력을 극대화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 고 하는데,

 

결국 이 책에서 모호하게 말하고 있는 골근 테라피의 원리와 효과를,

내가 아는 의학적 지식을 사용하면,

'피부를 자극하여, 말초신경계에 영향을 줌으로써, 인체의 자연치유력을 극대화하는데 있다.' 

라는 한줄로 요약할 수 있는 것이다.

 

'골근테라피를 위한 기본 준비물'도 그렇다.

'내 손으로 성형하기'라는 제목을 생각한다면,

손과 오일이 있으면 될텐데,

머리를 감싸는 타월, 큰 목욕타월, 아로마테라피용 오일이나 캔들, 실내온도, 조명, 음악 등 분위기와 feel 충만이다.

'고기잡는 법'이 아니라, 고기를 잡아 주는 꼴인데,

어부가 죽으면 굶어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씁쓸하다, 에혀~--;

 

준비하는 마사지 오일에 대해서도,

'세서미오일이 인체의 유지방과 비슷한 분자구조를 갖고 있다' 는 엉뚱한 얘기를 할게 아니라,

원액이 아닌 묽게 희석시킨 오일을 사용해야 피부저항이 없다는 걸 집어주어야 했다.

 

손의 압력을 얘기하는데 0.3~0.8 kg/㎠이라는데,

이게 어느 정도의 압력인지 알 수 있을까?

차라리 골근 테라피 이후 멍이 들었으면 그 압력을 사용하면 안된다고 하는게 적절하지 않을까?

그리고 같은 손의 압력을 사용하여도 적용되는 사람의 혈관 탄력성과 신진대사, 혈액순환의 정도에 따라,

다른 반응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본인이 스스로에게 적용하다가,

온몸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을 경우,

하소연 할때가 없지만,

그래도 한가지 분명한건,

이렇게 멍 투성이가 되는건 명현반응이 아니고 모세혈관이 터지는 것이다.

그리고 한 세트를 9회라고 규정했는데 어떤 이유에 근거한 것인지 궁금하다.

 

이 모든 테크닉(아무래도 테라피라는 용어는 안 나온다~ㅠ.ㅠ)의 기본 원리는,

말초에서 중추를 향하여,

심장에서 먼곳에서 심장에서 가까운 곳을 향하여, 이다.

방향은 중요한 문제인데,

어깨를 손과 팔의 연장으로 봤을때와 머리를 받치고 있는 걸로 봤을때,

비롯함이냐 말미암음이냐, 가 되어 방향이 달라진다.

 

단적인 예로,

목과 어깨부위 테크닉의 경우만 하더라도,

경락에 근거했을때의 접근법은, 책과는 다르다.

자연치유력이라고 했으면, 그렇게 된 원인이 있을것이다.

방향이 내가 아는 그것과 다른데, 원인이 궁금하다.

 

이 모든 테크닉의 원리는 위에서 얘기했었고,

이 책에 나오는 수기법이 틀렸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이 테크닉만이 유일한 방법인양 설명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 하고 싶은 것이다.

부분집합으로 그려보면 소속 관계가 바뀔 수도 있다는 얘기다.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그리하여 혈액순환과 신진대사를 유발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이 정도의 효과는 거둘 수 있다.

문제는, 사람이 얼마만큼의 성심을 갖고 실행에 옮기느냐 그냥 말로만 하느냐, 에 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손을 보면,

그 사람이 손재주가 좀 있어서 얼추 흉내는 내고 따라 할 수 있는지,

죽었다 깨어나도 솜씨가 메주여서 어찌 해볼 수가 없는지, 알 수 있다.

이 손의 경우,

손의 살집이 있고 탄력이 있는 사람은 노력가이다.

동정심이 있고 친구나 친지를 위해 금품을 원조하고 어쩌고 따위는 차치하고,

이런 여자는 경리나 회계 따위의 일을 싫어하고, 가계부는 적으려 하지 않는다.

규칙을 싫어하고 자유분망하다.

 

반면, 손가락이 가늘고 긴 사람은,

긴 손톱이 자국을 만들 우려가 있다고 하더라도,

안 했으면 안 했지,

셀프케어는 지지리 궁상이라 생각하는 유형이다.

 

암튼, 이러쿵 저러쿵 신경쓰기도 싫고, 내 손으로 성형수술을 하기도 싫은 사람을 위하여,

한가지 비법을 귀뜸해 드리자면,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이어도 좋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어도 좋다.

 

자기 자신이건 타인이건 간에,

관심을 갖고 이뻐해주는 것보다 더 쉽고 편안한 성형수술 방법은 없지 싶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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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시선 38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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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언젠가부터 김사인에게 삐껴 있었다.

내가 삐치던 말던 작가는 모를 일이고, 상관도 없는 일이겠지만,

그의 전작 '시를 어루만지다' 의 책머리를 읽다가,

작가의 처연한 고고함을 편협함으로 착각했었다.

 

나는, 시 쓰기는 제 할 말을 위해 말을 잘 '사용하는' 또는 '부리는'데 있지 않다고 말해왔다. 시공부는 말과 마음을 잘 '섬기는' 데에 있고, 이 삶과 세계를 잘 받들어 치르는 데 있다고 말해왔다. 그러므로 종교와 과학과 시의 뿌리가 다르지 않으며, 시의 기술은 곧 사랑의 기술이요 삶의 기술이라고 말해왔다.
생각건대 쓰기뿐 아니라 읽기 역시 다르지 않아, 사랑이 투입되지 않으면 시는 읽힐 수 없다. 마치 전기를 투입하지 않으면 음반을 들을 수 없는 것처럼. 그러므로 단언하자면 시 쓰기와 똑같은 무게로 시 읽기 역시 진검승부인 것이며, 시를 읽으려는 이라면 앞에 놓인 시의 겉이 '진부한 서정시' 이건 '생경한 전위시' 이건 다만 사랑의 절실성과 삶의 생생함이란 더 깊은 준거 위에서 일이관지(一以貫之)하고자 애쓰는 것이 마땅하다.

                                                                                             '시를 어루만지다'의 '책머리에서'부분 인용

 

'가만히 좋아하는'의 '조용한 일' 같은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시쓰기에 대해 얘기하면서,

말을 잘 사용하는지, 부리는지, 

또는 말과 마음을 섬기는 지, 받들어 치르는지, 에 대해서 이러구 저러구 중언부언 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집을 선물 받아 읽으면서,

'시를 어루만지다'에서의 중언부언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언어를 잘 벼리는 사람은, 마음도 잘 벼리는 사람일 것이다.

이렇게 처연하고 맑고 고고한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심뽀(심포를 얘기하는게 아니라, 놀부의 '심술보'이기도 한 그것, ㅋ~.)를 곱게 쓸 수밖에 없을테니까 말이다.

 

나도 그렇고,

지인이나 친구들도 그렇지만,

오장 육부, 내지는 육장 육부 외에, 심술보를 하나 더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게 행동을 할때가 있다.

 

그게 심술보를 하나 더 가지고 있어서 심통맞아 그런 것이 아니라,

심성은 착하고, 마음은 그지 없이 곱지만,

그걸 겉으로 표현하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쑥스럽고 낯 간지러워서,

맘이랑 정 반대로 행동하고,

반어법으로 얘기하는 거라는 건,

내 자신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걸 인식하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하던 것들이다.

 

'못난이'나 '짜샤'따위의 호칭을 들이대면,

처음엔 서운해서 찔끔거리고 울었었는데,

이젠 '볼수록 이뻐진다'의 '볼.이.'='보리'라든지,

'원래(월래) 이뻤다'의 '월.이.'= '워리'라고 불러달라고 주문한다.

 

그렇다.

모든 글들이 그렇지만,

시란 것도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어야 울림이 큰 법이다.

 

암튼,

시집의 제목만 듣고는 '사석원'을 떠올렸고,

읽으면서 내내 찔찔거렸다.

 

 

시집의 맨 뒤 '시인의 말'에 가서야,

 

그도 나와 내 친구, 지인들처럼,

맘이랑 정 반대로 행동하고 반어법으로 얘기하는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어린 당나귀가 있고 나는 그 곁에 있습니다.

나는 어쩌다가 고집 세고 욕심 많은 이놈과 있게 되었나요. 곁에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요.

언젠가 그를 버리게 될지 모른다는 예감이 몹시도 슬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곁에 있다는 것에 오늘 나는 이토록 사무쳐 있습니다.

독한 술을 들이켜고 한숨 잘 잤으면 싶습니다.

아침이면 어디로 떠나고 없기를 바랍니다. 어미에게 갔건, 바람이 났건.

그러나 아마 그런 기특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난 김사인의 당나귀가 아니라, 사석원의 그림 속의 '당나귀'이고 싶다.

'곁에 있다는 건' 실제적인 거리가 아니라, 공감과 소통이 빚어낸 관계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견디거나 버리거나 슬프거나 사무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만으로도 선물이고 축복인 그런게 아닐까 생각해 봤다.

그걸 김사인은 시인답게 반어법으로 얘기하고 있는 걸게다.

 

때문에, 달팽이의 그것은,

귀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그안에서 달팽이는

천년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속을 궁금해할 그 누구조차 사라진 뒤에도

길이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다한 뒤에도

네 개의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더듬더듬

먼길을

                                  (달팽이, 부분)

네개의 뿔이 아니라,

귀를 잃어버린 후에나 제대로 갖게 되는,

진정한 소통과 공감의 더듬이가 아닐까?

정작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고,

온몸으로,

아니 온몸의 감각이 집중된 더듬이,

아니 네 개의 뿔로,

공감각해야 하는 것이고,

다시 얘기하자면,

'곁에 있다는 건' 실제적인 거리가 아니라, 공감과 소통이 빚어낸 관계의 그것이다.

 

눈물이 나면 침을 꼴깍 눌러 삼키듯 그렇게 눌러 삼키면, 어느 정도 진정된다.

하지만, 이런 자체 처방에도 불구하고,

찔찔거리다가, '꺼이, 꺼이~'울고 만 시가 있다.

바짝 붙어서다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뻬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바짝 벽에 붙어선다.

유일한 열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 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 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 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씽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선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멘다

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난 몸뻬가 많이 헐겁지도 않을텐데 목이 멘다.

눈물은 찔찔 흩뿌리면서도 목을 매지는 못한다.

 

좋은 시가 여럿이지만,

우느라 다 옮겨적지 못한다.

그리고 반어법으로 읊조린다, 시가 웃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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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 동백 - 이제하 그림 산문집
이제하 지음 / 이야기가있는집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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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어느 시인이 보내는 단체 톡을 받아볼 기회가 있었다.

 

거의 다 예술가였던것 같은데,

그중 제외되는 사람은 나를 비롯한 몇 명이었나 보다.

 

암튼, 이런 저런 인사가 오가고, 대화가 오가는 것을 유령 처럼 그냥 바라볼 뿐이었는데,

그 중 비록 몇명이긴 했지만,

욕설이 섞인 사투리와,

걸쭉한 음담패설이 오고가서 참 별로였었다.

 

하지만, 그건 대중을 상대로 한 예술이 아니고,

지극히 사적인 대화이니까,

전봇대로 이빨을 쑤시든지 말든지 자유라고 생각하고 눈 질끈감고 넘어갔었다.

 

내가 이 책을 집어들게 된 건,

우연히 듣게 된 '모란, 동백'이 너무 좋았는데,

이 책을 쓴 이제하가 그 '모란, 동백'의 작사, 작곡 가라는 소릴 듣고서,

호기심이 발동을 해서 였다.

 

내가 예술에 문외한이어서,

누군가의 작품을 갖고 이러쿵 저러쿵 할 깜냥이 아니라는 걸 전제 하고,

그리고 지극히 주관적이고 편협한데다,

고리타분하다는 걸 미리 밝히고 나서,

 

그의 이 책을 대충 훑어보고 나서, 지인한테 이렇게 투덜거렸었다.

 

 

 

내 멋에 겨운 이런 '자신감'은 책을 찬찬히 읽어가면서 경외심으로 바뀌었지만,

그건 당신의 연세와 관련된,

삶을 내다보는 혜안에 관한 존경심일 뿐이다.

 

아직도 예술이 예술가의 개인적인 배설 행위가 먼저여야 하는지,

아님 독자들이 공감을 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게 먼저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나의 이런 마음을 엿보기라도 했는지,

깨끗이 헹구어져 하얗게 바래는 빨래가 내게는 아름다움의 원형이고 그 시초다. 대상이 아름답다, 그렇지 않다는 판별이 쉽사리 내려지지 않을 때, 나는 지체 않고 그것을 빨래 곁으로 데려간다. 혹은 줄에 널려 살랑이는 빨래를 그 곁에다 배치한다. 여기서 아름답다는 것은 눈에 띄는 그런 것만이 아니라, 옳고 그른 것까지도 포함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면 그 진위가 금방 판가름이 난다.ㆍㆍㆍㆍㆍㆍ이 미국 현대 화가의 그 진정성과 선정성을 가려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판가름은 논리로 해명되거나 말로 설명되어질 그런 게 아니다.

빨래는 바다를 배경으로 놓아도 청렬하고, 어느 지저분한 도시의 생각에 끌어다 놓아도 그 이미지가 손상되지 않는다.ㆍㆍㆍㆍㆍㆍ뉴스를 떠들어 대는 아나운서의 입을 그 곁에 데려다 놓아도 그것을 밀어내지 않고, 피 흘리며 쓰러진 학생을 그 곁으로 이끌고 와도 그런 고통을 더욱 선명하게 정화시킨다. 빨래는 빨래끼리 격돌하지 않고, 그 무더기는 무더기끼리 동족상잔을 일으키지도 않는다.ㆍㆍㆍㆍㆍㆍ위대함도 뜨거움도 아름다움을 이루는 근간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아니고도 별개의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테면 피도 눈물도 없는 아름다움이란 것도 있고, 그 때문에 기꺼이 죽는 목숨도 세상에는 있다 피와 가슴으로도 가늠할 수 없는 아름다움. 순간으로 영혼을 싸잡아 버리는 아름다움. 찰나의 질주. 무(無)에의 믿음.(53~54쪽)

이라고 장황하게 썰(說)을 풀어 내지만,

그걸로는 뭔가 아쉬웠는지, 임의적이고 우발적인 선택이라고 다시 한번 눙친다.

 

그의 아트를 좋아하기 힘들었지만,

개인적으로 맘에 들었던 것은, 이 삽화이다.

 

 

ㆍㆍㆍㆍㆍㆍ술판에 동참하려고 나타난 여자의 모습에 포인트를 주었던 것 같다. 어딘지 좀 쭈뼛거리는 기색이다. 진짜 애인은 이런 데 잘 불려 나오지 않는다. 대체로 글친구든가 소 닭 보듯이 서로 무관한 사이일 텐데 점입가경으로 술판이 무르익고 왁자지껄 객담과 욕설이 오갈 무렵이면 '여자가' '계집애가'하는 소리들이 튀어나오고 술판은 파투가 난다. 그동안 의식화 과정이 조금씩 치열했던 아가씨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린 것이다. 삐친 그들이 몇 달 혹은 몇 년 만에 다시 화해를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70쪽)

지금 이삽화를 다시 모사해 보려 해도 분위기가 우러나지 않는다. 분위기는커녕 은유도 상징도 사라지고 그 대신 윤곽과 색깔만이 단순해지고 선명해졌다. 동참하려 나타난 아가씨는 여전히 보이지만 문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자중을 야리는 듯한 기색이 역력하다. 술친구들을 수하로 거느리면서 닭살 돋는 아첨과 추파라도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72쪽)

위의 그림에 대한 해설에도 불구하고 

내가 읽어낸 건, 해설을 통해 당신이 얘기하려던게 아니라, ' 윤곽과 색깔만이 단순해지고 선명해졌다'는 구절이 주는 뉘앙스였다.

 

단순해지고 선명해졌다는 얘기는,

어찌보면 단출해지고 응축되는 것처럼 들리지만,

 

색이 단순해지고 선이 선명해졌다는 얘기는,

내가 언젠가도 얘기했던 번지고 스며 물드는 자연의 속성처럼,

사람이고, 그림이고, 예술이고, 간에,

경계가 없고, 경계를 구분하여 나눌 수 없는,

원형과 태초의 자연이 되는 것인가 보다.

 

다시말해,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서,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대기와,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과,

하늘과 땅, 물들을,

자연이라고 뭉뚱그릴 수는 있지만,

명확하게 경계 나누기가 어려워지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때문에 선을, 윤곽을 선명하게 처리했다는 건 어쩜,

명확하게 경계 나누기가 어려워진다는 말도 되고,

경계를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의미도 되겠다.

'정작 떠들고 싶었던 침묵의 내용'(78쪽)이나 '격렬한 열망의 중심에서 피할 수 없이 일어나는 산화'(79쪽)와 같은 수사라고 해야할까?

 

암튼, 내가 이 책을 설렁설렁 읽고 '나라도'하는 툴툴거림이,

감히 범점할 수 없는 존경심으로 바뀐것은,

세월의 더께가 앉은 그 연륜이라는 것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울러, 당신의 그것이 껄렁껄렁해보여도(황인숙 시인은 '영혼이나마 히피인 친구들의 아름다운 족장'이라고 표현한),

어찌되었건 몸소 경험하고 체험한 것들이 예술로 탄생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 였다.

세간에서 호평이 자자한 얼굴 예쁜 작가들의 소설을 그래서 나는 믿지 않는다. 사무실에서 몇 해씩 주리도 틀어보고 양말도 기워 보고 행상 리어카에서 홍합도 삶고 재봉틀 앞에서 하루 종일 틀질도 안 해본 적거거 해봤자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싶어서다.

이삿짐 센터에서 노가다하면서 우러나온 시가 남의 시나 달달 외며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꿰맞춘 시와 어떻게 비교가 되겠는가.

예의 이삿짐 센터의 시인 K는 불황으로 대학병원 수술실 경비 노릇으로 옮겼다가 피 냄새를 못 견뎌 이태 만에 뛰어나와 지금은 동네 아파트 경비로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시런 시인을 나는 믿는다.(178쪽)

 

이 글을 쓰는데, 지난 가을 남편이 동백꽃의 씨앗이라며 감씨 비슷하게 생긴 씨앗 몇 개를 갈무리해서 줬던게 생각났다.

난 그냥 흙에다 심으려고 했더니, 한동안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심어야 한다고 했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피어나는 꽃이라서 그런 것일까?

(자세히 보면 딱딱한 껍질을 뚫고 나오는 눈이 보인다, 앗싸~!)

 

내가 세월의 더께가 낀 그 연륜이라는 것,

몸소 경험하고 체험한 그것, 앞에서 숙연해 지는 것과 같은 이치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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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한의학 - 낮은 한의사 이상곤과 조선 왕들의 내밀한 대화
이상곤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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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란 무엇일까?

누군가는 '도끼'를 상징했다고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하늘과 사람 사이(二)의 중간에 위치하여(一) 하늘과 백성을 연결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여,

하늘의 명으로 만민을 통치하는 존재라고 풀이하기도 했다.

어찌 되었건, 위로는 하늘을 우러르고, 백성의 민심을 모두어 반영하는 존재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었다.

왕이 없어졌지만,

그에 가장 근접한게 대통령이 아닐까 싶다.

국민의 숫자가 늘어나고, 숫자에 걸맞게 민심이 다양해졌다.

'하늘을 우러르고, 백성의 민심을 모두어 반영'하는게 번거로워 졌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역할을 소홀히 해도 좋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어느 한 곳에서부터 어긋나서 삐그덕거리고 그리하여 균열이 생기는 걸 무시하다 보면 어찌되는지,

역사는 이름만을 달리할뿐, 되돌이하여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한때 택시 요금이 엄청 바가지인것 같았을때, '할머니와 택시'라는 웃지못할 유머가 나돌았었다.

택시를 탄 할머니가  목적지에 도착해서 보니,

요금이 3000원 나왔는데, 700원만 주고 내리면서,

"내가 탈때 2300원부터 시작했어!"라고 했다는 거나,

요금이 2000원이 나오자,

1000원만 주고 내리면서,

택시기사를 향하여,

"이놈아! 네놈은 같이 안타고 왔냐!"라고 했다는,

경우가 바르고 셈이 정확한 할머니가 유머에 등장한다.

 

며칠전 또 하나의 웃지못할 유머가 탄생하는걸 몸소 경험하였다.

 

해가 바뀌어 다니러 오신 어르신이 있었다.

 

접수에서 진료비를 낼때만 해도 쿨하게 계산을 하셨다는데,

내가 '어르신'이라고 부르자 노발 대발 하시더니,

낸 진료비 중에서 1500원을 제외한 차액을 돌려달라셨다.

진료비를 많이(=1500원이상)  내는건 65세가 안된 젊은이들의 특권이라고 생각하셨고,

1500원을 넘게 받길래 당신이 아직 65세가 안 되어보여 그러는 구나 싶어,

접수에서 몇 살로 보이냐고 진지하게 물어보기까지 하셨다는거다.

 

그런데 내가 어르신이라고 부르자,

'젊은 오~화~'의 꿈은 산산이 무너져 버렸을 뿐이고~ㅠ.ㅠ

당신의 연세를 다 알면서 진료비를 왜 비싸게 받냐면서,

우산꼬챙이를 들고 삿대질을 하셨다.

 

2015년이 되어, 의료보험 수가가 인상되었다.

의료보험수가가 항목마다 조금씩 인상되는 바람에,

공단에서 보조해주던 상한선인 15000원을 쉽게 넘어가고, 그 부분은 개인부담이 될 수 밖에 없다.

그걸 일선에서 체감하게 되는건 65세 이상의 노령층이다.

 

전과 똑같은 의료 서비스인데 부담해야할 진료비가 늘어나는걸,

설명하고 이해시키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아무런 저항없이 이해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괴담으로만 끝났으면 좋겠을, 또 하나의 민심의 표출이다.



13월의 보너스라고 불리우던 연말 정산은 13월의 세금 폭탄이 되었고,

의료보험료, 담배값 등 공공요금이고 민간 요금이고 뭐 하나 인상되지 않는게 없다.

유머가 되어야 할 민심의 표출은 오히려 괴담이다.

경우 바른 할머니의 유머가 절실하다.

 

조선시대 왕이라고 하면 절대 권력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겉으로는 피의 숙청을 통해,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개개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하늘과 민심을 진정으로 두려워했고,

그리하여 평생 여러가지 약을 달고 살았던 인간적인 면모를 지녔다.

 

먹는 것만 해도, 산해진미나 진수성찬을 먹고 살았을 것 같지만,

오히려 아주 소박했다.

김소운의 '가난한 날의 행복'에 나오는,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은 잘못된 표현인 셈이다, ㅋ~.

 

 

가끔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을때,

참고가 된 책을 쓴 사람의 입장이나,

그가 속한  당파나 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한번,

후대에 그걸 해석하는 사람의 역사관에 따라, 또 한번,

개인의 주관이 개입되는 통에 혼란스러웠다.

왕이나 대신들의 초상화를 보다보면,

책속에 나타난 그들의 성격이나 행동과 일치하지 않아서 혼란스러울때도 여러번이었다.

 

물론, 이 책 또한 개인의 주관적인 견해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논리적이고 개연성 있는 접근으로 추리소설을 읽는듯한 재미가 있었다.

 

영조의 경우,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광선부원군 김만기의 손자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었다.

김춘택이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동이, 즉 숙빈 최 씨를 숙종의 침전에 집어넣었다는 이야기 등이 당대에도 널리 퍼졌고 야사로도 전해진다.ㆍㆍㆍㆍㆍㆍ『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등 각종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영조의 체질은 확실히 특이한 데가 있다.그의 풍성한 수염이나 큰 키는 숙종의 풍모와 전혀 달랐다.ㆍㆍㆍㆍㆍㆍ조선 왕들은 무장인 이성계의 혈통을 이어바다서 그런지 대개 성격이 불꽃같거나 화병을 앓았다. 심지어는 화가 내부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다 못해 피부로 솟아오르는 종기 질환을 앓다가 죽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몸에 열기를 보태는 인삼을 약재로 잘 쓰지 않았다.(302~303쪽)

라고 하는데,

'설도 있었다'라고 둥글리는 어법도 그렇고, 제법 설득력도 있다.

 

사람을 보게 되면, 그냥 사람이 보이지 않고,

그 사람의 외형으로 미루어, 성격이나 질병의 연관성을 자꾸만 유추하려 드는 건,

아무래도 직업이 만들어낸 오랜 습관이지 싶다.

 

모든 책을 그렇게 읽는 편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주인공은 살아 움직이는캐릭터라는 둥,

어떤 캐릭터는 만들어낸 설정이라는 둥,

그렇게 너스레를 떨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만화 '미생'의 경우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살아움직였다.

하나도 겉도는 인물이 없었다.

 

그런데, 만화'미생'의 인기를 업고 만들어진 드라마 '미생'의 경우,

다른 캐릭터는 몰라도 '오과장'은 좀 아니었다.

(이건,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나 '외모가 캐릭터에 들어맞는다' 따위의 평가가 아니다, ㅋ~.)

 

 

이름부터가 '오상식'인 그는 '상식'있고 경우에 맞게 행동하는 캐릭터이다.

만화에선, 처음 장그래의 사수로 등장할때 잠깐이었지만, 바둑의 묘를 아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반해,

드라마 마지막 회를 보고 놀랐는데,

어디 사막에 가서 가드 올리고 폼 잔뜩 잡는 인물로 그려지더라~--;

 

'오상식'에 맞춤인 인물을 연기자 중에서 찾기 쉽지 않아서 그랬겠지만,

충혈된 퀭한 눈의 만화 '오과장'과 드라마의 '오과장'은 전혀 다른 체질과 성격이다.

 

그런 예로,

역대 왕들의 대표적인 질병은 '산증(疝症)'으로 진단명은 같지만,

처방과 치료법은 체질에 따라 각각 다르다.

그걸 이 책을 쓴 '이상곤'님은,

역사적 접근에서 크게 비껴 가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접근에 입각하여,

알기 쉽게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솔직히 일반인들이 얼마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내가 보기엔 한방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애쓴,

한의학과 서양의학의 접점을 모색하려고 애쓴, 기색이 역력해 보인다.

 

결코 쉬운 책은 아니다.

 

개인에게 살아온 이력이,

왕에겐 살아온 이력의 흐름인 역사가,

질병을 이해하는데,

질병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온 우주, 자연 삼라만상이 필요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분이시고,

그러다 보니, 그런 각종 분야의 공부와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은 것이 드러난다.

그걸 알 수 있는 단적인 예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등을 두루 넘나드는 것이다.

게다가 '장자'의 '소요유'등을 떡주무르듯 인용한다.

권말에 그가 남겨놓은 '논문'과 '단행본'등 참고 문헌만 훑어보아도,

내공을 짐작할 수 있다.

'하늘을 우러르고, 백성의 민심을 모두어 반영'하는게 왕의 역할이라면,

하늘과 백성이, 자연과 국민이 균형을 회복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역할을 하는게,
한의학에서 말하는 '치료'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과 백성이, 자연과 국민이 균형을 회복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은 찾았으니,

왕만 찾으면 되는 건가 보다.

 

나는 하늘의 이치는 고사하고,

맨날 환자들이랑 지지고 볶는 일개 돌팔이이니까,

조선의 왕들 같은 통치자를 학수고대하는 수밖에 없겠다.같은 '치'자가 들어가서 생각해본 엉뚱한 발상이다.

 

통즉불통(通則不痛) 불통즉통(不通則痛)은

한의학 관련, 치료에만 적용되는 말은 아닌것 같다.

왕이나, 대통령 등 통치자들이 솔선수범해야할 당면과제이다.

 

나의 툴툴거림을 보고,

왜, 어떻게 그런 비약이 가능하냐고 할 사람들을 위해 대답도 준비해 놨다.

짬뽕공이 어디로 튈지는 아무도 모르고,

엿장수가 가위질을 몇번 하는가는 엿장수 맘대로다, ㅋ~.

 

 

한자가 많이 섞인 책인데도 불구하고 오ㆍ탈자가 없어 눈에 띄었다.

손수 갔다 드렸다->손수 갖다 드렸다.(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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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1-23 19:14   좋아요 0 | URL
전 책에서 독살설과 음모론이 빠지니까 심심했어요 ㅋ

sslmo 2015-01-26 15:49   좋아요 0 | URL
전, 독살설과 음모론이 아니어도,
잘 만들어진 장르소설 한권을 보는 것처럼 흥미로웠어요, ㅋ~.

cyrus 2015-01-23 19:50   좋아요 0 | URL
출판사는 과학 전문 도서를 펴내는 곳인데 책 내용은 역사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어요.

sslmo 2015-01-26 15:50   좋아요 1 | URL
책 내용이 역사에만 치우치지는 않아요.
다만 제가 리뷰의 수위를 조절하느라, 의학적인 언급은 자제했어요.
참, 좋은 책이예요, 읽어보세요~^^
 
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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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많이 나아졌는데, 무엇이고 잘 버리지 못하는 병이 있었다.

그 근원에는,

그것들을 모두 의인화하여 나에게 버림받는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했던 것 같다.

 

전에도 얘기했던 적이 있지만,

이젠 한살 한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소박하고 단출해지는 방법으로 버리고 비워내고 줄이는 걸 생각해보게 된다.

 

그런데 소박하고 단출해지는 방법으로,

버리고 비워내고 줄이는걸 택할 수도 있지만,

안으로 여미고 응축시키는 것도 될 수 있고,

흩어지고 성글게 하여,

번지고 스며 물들게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정희진처럼 읽기'이다.

'처럼'에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이 책의 첫머리에서 '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읽는 편'이라고 하며,

그런 자신의 독서법을 일반화할 의도는 없고,

많은 독서방식 중에 정희진처럼 읽는 방법 있다고 풀이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좁은 독서 편력' 을 이렇게 털어 놓는데,

'한권을 읽어도 열권을 읽는 사람이 있고, 열권을 읽어도 한권도 못 읽는 경우가 있다'고 얘기한다.

 

충분히 공감하겠다.

나같은 경우도, 오지랖이 넓다보니 독서 취향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잡식성 독서가 되고 있다.

인문이나 고전을 많이 읽어야지 하지만 결심뿐이고,

어느새 나의 관심 도서 목록은 분야를 종횡으로 넘나든다.

 

오죽했으면 한 친구는,

내가 읽는 책들을 보면 책 같은 책이 하나도 없다고 일축하면서,

'500쪽 이상의 고전이나 역사서' 위주로 읽으라고 콜렉션하는 법까지 귀뜸한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내가 책을 고르고 읽는 방법은 지극히 사적이지만,

어떤 규칙이나 조건이 있지는 않다, 'feel 꽂히는 대로'이다.

 

이 거대하고 막막힌 우주를 통틀어 수많은 별들이 있고,

그 중 태양 계의 지구라는 행성 안에,

깨알 같이 많은 사람들 중에 그대와 내가 만난것 처럼,

 

거대하고 막막한 읽을 거리의 홍수 속에,

오디오 북, e-북, 점자책, 종이 책 등 수많은형태의 책 중에,

그 책을 접하게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그걸로, 끝, The end가 아니다.

 

관점을 조금만 비틀어 보면,

그 책을 원서로 읽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두단계, 세단계- 번역본을 가지고 번역을 해서,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중간에 번역자의 감정이나 가치 판단이 개입되면서,

또는 사소한 오역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전혀 다른 의미로 읽혀, 다른 책이 될 수도 있다.

 

고딩때 읽고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조차 없었던 '안나까레리나'가

중년이 되어 다시 읽으니 무한 감동을 주는 대작인것처럼,

읽는 사람의 맥락과 상황, 나이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읽히고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중언부언 말이 길었다.

근데 참 좋으니까,

참 좋은 책이니까,

그리고 내가 이렇게 투덜거리는게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아 딴지를 걸어 보자면,

 

<무소유>의 영향으로 최대한 단순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건 좋은데,

나도 소박하고 단출해지려고 하니, 취지는 충분히 이해하겠는데,

'사람이 태어나 물건을 사고 관리하고, 나아가 집착하고 그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은 비참하다(32쪽)'는 말뜻도 얼추 이해하겠는데,

'집착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삶이 비참하다'는 것, 자체가 '정희진 식의' 지극히 주관적 가치관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냥 되는 대로 사는 삶 또한,

어떤 기준이나 목표가 없이 되는 대로 사는 삶 또한,

기준이나 목표가 있이 사는 삶과 비교해서 살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소박하고 단출해진다는 것은,

극도로 여미고 집약시키고 응축시키는 것이라기 보다는,

어떤 기준이나 목표, 원래 따위에 집착하여 연연하는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흩어지고 성글어지더라도,

그리하여 번지고 스며 물들게 되더라도,

자연의 이치라고 생각하고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책의 내용이야 흠잡을게 없을 정도로 수려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도 범상치 않은 것은 틀림없다.

독서법이랑 독후감이랑, 그런 것에 대한 견해가 나랑 별반 다를게 없어 보이고,

'논문과 잡문의 구별을 지양한다(17쪽)'고 하는 것도 나랑 똑같길래,

더 많은 공통점을 찾고 싶은 바램으로 내가 뾰족해 졌나 보다

<무소유>의 영향으로 최대한 단순하게 살려고 노력한다는 건 말뿐인지,

독후감에 쓰는 단어, 일반 불특정 독자를 대상으로 한 책에 쓰길,

뭘 그리 까다롭게 기준을 정하고 단어를 까칠하게 선택하고 어렵게 얘기하나?

 

이런 인문학적 독후감 책은 인문학 책을 좀 쉽게 읽을 요량으로,

또  특별하게 기획된 인문학, 사회 과학 책들의 경우에는 취지에 동참하기 위해, 구입할 때가 있다.

 

안내서나 지침서라고 하기에는,

눈물을 닦아주고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아픔을 나누기 위해 쓰여진 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불친절해서, 몇장 읽지 못하고 집어던진 적이 여러번이다.

일부러 어려운 용어나 한문 투의 어체를 구사하고 있는 건지, 학술 논문 수준이다.

 

거창하게 폼잡고 어렵게 얘기하지 않으면,

책으로서의 품위나 격이 떨어져 안 팔리는 법이 있는 모양이다.

 

소박하고 단출해지는데,

거기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말도 포함시키는 건 어떨까?

거창하게 폼잡고 어렵게 애기하지 않아도,

소박한 몇 마디 단어나 의미있는 눈짓만으로 내 마음을 상대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요원한걸까?

 

독서법이나 독후감에 대한 견해가 나랑 아무리 비슷한다고 해도,

우러를 요량으로라도,

'정희진처럼 읽기'를 넘보겠다고 하는건 언감생심인가 보다.

 

그런 의미에서,

책 한권 안 사주면서,

말로만 읽을 책을 콜렉션해 주는 친구에게 한마디 하자면,

"냅둬~!"이지만,

그뒤에 생략된 말이 '이대로 살다 죽게'가 될지, '내멋대로 살래~'가 될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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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5-01-15 15:30   좋아요 0 | URL
저도 저 집착부분 좀 그렇다...생각했었어요 ^^;;;;

정희진처럼 읽기는
제겐 진짜 언감생심이라
저도 그냥 저 좋을데로
읽기...로 결론을 내렸어요

sslmo 2015-01-16 09:32   좋아요 0 | URL
그쵸, 그쵸~?^^
물건을 소비하고 관리하는 시간을 줄이겠다는건 좋은데,
그 저변에 물건과 사람을 등가(等價)로 놓는것 같아서 좀 그랬어요.

물론 우월의식을 갖고있는건 아니지만,
혹, 갖고있다면 안 그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살아있는 생명체, 이를테면 동물이나 식물이랑도 아니고,
물건이랑은 좀 그랬어요~ㅠ.ㅠ

그리하여 결론은 `정희진처럼 읽기`도 하나의 독서방법이다, 쯤으로 만족하려구요, 헤헤~^^

수이 2015-01-15 18:42   좋아요 1 | URL
무소유_ 많이 찔려하면서 읽었는데 난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 살아요_ 혼잣말 했어요.

sslmo 2015-01-16 09:37   좋아요 2 | URL
법정스님의 무소유는 뭐랄까, 선각자의 그것처럼 느껴져서,
읽고 좋은 깨달음으로 삼을 경구들을 얻어 가졌다면, ㅋ~.
정희진 님의 무소유 저부분은,
언감생심,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더라구요.
근데, 저만 그런게 아니다 싶으니, 위로가 되는걸요~^^

알라딘 서재가 이렇게도 위안이 되는군요,
고맙고 반갑습니다, 야나님~^^

해피북 2015-01-16 00:13   좋아요 1 | URL
한비야님의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여행갈때 배낭에 담아가는 짐으로 충분히 살아갈수 있다는 생각에 집에와 짐을줄이고 나서 다시 쓰려고 찾은 짐이없더라던 이야기 반성 많이 했는데 그보다 더 깊은 사유를하고 계시는 분을보니 여러가지 생각이 깊이생기네요 ~^^

sslmo 2015-01-16 09:48   좋아요 1 | URL
전 한비야 님을 실제 가까이서 뵜는데, 정말 수수하고 수더분하시더군요~^^
전 그정도만 닮아도 선방하는걸거예요, ㅋ~.

전 그냥 제멋에 겨워, 제가 행복하면, 그걸로 만족하려구요~^^

바람돌이 2015-01-16 00:55   좋아요 1 | URL
소박하고 단출해지는데,
거기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말도 포함시키는 건 어떨까?
요 대목에 확 꽂혔습니다. ^^ 양철나무꾼님 말에 공감 백개 드리고 싶네요. ㅎㅎ
정희진씨책은 예전에 <페미니즘의 도전>을 굉장히 인상적으로 읽었는데 이 책은 저기 저 대목만으로는 좀 과한듯한 느낌이 드네요. 그래도 예전에 읽었던 책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이 책도 찜 하고 갑니다. ^^

sslmo 2015-01-16 09:52   좋아요 1 | URL
정희진 님같은 경우,
어쩜, 과한 부분이 있으니까, 앞서 나가고 계신거라고...
평범한 일개 중생은 생각해 봤습니다여, ㅋ~.

말-언어는 소박하게,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하는건 꾸준히 과단성있게 하는 삶이고 싶어요, 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