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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4년 11월
평점 :
절판


데니스 루헤인은 내가 참 좋아하는 작가이다.

읽으면 재미있고 즐겁다기 보다는, 진한 감동이 밀려온다.

미국 작가이고, 소설의 배경이 되고 있는 곳도 미국의 보스톤으로 나와는 동떨어진 곳인데도 불구하고,

깊게 몰입하고 감정이입하여,

마음 한켠이 아련하고 안쓰러워 어쩌지 못하게 만들어 놓는다.

 

소설이라는게 플롯이나 설정, 캐릭터 묘사등만을 따라가다보면 얼마든지 낯설어질 수 있지만,

등장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다보면,

다른 것들은 소설을 이해하는데 보조적인 수단에 지나지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플롯이나 설정, 캐릭터 묘사 따위는 나라마다 지방색 마다, 또는 개인의 문체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겠지만,

등장인물의 감정선이라는건 일정한 패턴을 그리게 마련일 것이고,

이건 바꾸어 얘기하면,

쓸쓸하고 외로움을 표현하는 방법은 나라마다 지방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누구는 쓸쓸하고 외로움을 느끼는 그 상황에서, 혼자여서 단출하니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테니 말이다.

 

사람 사는 세상, 더하고 덜하고의 차이는 있겠지만, 쓸쓸하고 외롭기로 따지면 다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성공한 사람은 과거를 감출 수 있지만, 낙오자는 바로 그 과거 속에 익사하지 않기 위해 여생을 발버둥 칠 수밖에 없다'

말에 대입시켜보자면,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일수도 있고, 감정표현을 잘 안하는 사람일수도 있고, 자제력이 뛰어나서 잘 참는 사람일수도 있지만, 매정한 사람일수도 있다는 말도 된다.

바꾸어 말하면, 감정의 기복이 없는 듯 보이고 감정표현을 잘 안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삶에서 성공한게 아니라,

감정 컨트롤에 성공한 것일 뿐이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난 이 책에 나오는 바텐더 밥에게 금세 감정이입할 수 있었는데,

쉽게 길들지 못하는 거나, 한번 길들인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나, 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것들이,

또 다른 날 보고 있는 듯 꼭 닮아서였다.

밥에게는 다행이었다. 그는 바텐더 일을 좋아했으며, 당연하게도 예전의 거친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올해는, 28일이 플래츠 거리의 쓰레기 버리는 날이다. 이른 아침 사람들은 습관처럼 쓰레기통을 갓길에 내놓고 쓰레기차가 가져가도록 했다. 밥은 인도를 따라 걸었다. 사람들이 내버린 물건들. 재미있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장난감들은 너무 쉽게 망가졌다. 어떤 물건들은 아무 문제없이 작동하면서도 교체되는 운명을 겪어야 했다.ㆍㆍㆍㆍㆍㆍ밥은 쓰레기 더미를 볼 때마다 폭력에 가까운 탐욕을 느껴야 했다. 애초에 금했어야 할 음식을 먹고 똥을 싸지른 느낌.

밥은 특유의 외로움, 그리고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상대와 5분 이상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갈 능력의 부재 탓에 이런 의례적인 일에서 조차 남달랐다.(19~20쪽)

난 전자제품의 사용설명서를 읽는게 취미라고 할 정도로 새로 나오는 제품들에 관심을 보이지만,

반면 길들여진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하다.

이건 사물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규칙이어서 한번 믿어버린 사람은 팥으로 메주를 쑤어도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고, 배신을 당해도 웬만하면 나의 안목이라며 감수하는 성향으로 발전하였다.


너무 행복하면 마냥 좋아할게 아니라,

최고 정점을 찍고 이제 추락할 일만 남았다는 예시이니, 대비할 줄도 알게 되었다.

행복은 마브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반면에 깨진 행복은 두 팔로 감싸 안을 가치가 있다. 늘 함께 보듬어 안아주기 때문이다.(78쪽)

 

그런 의미에서,

밥은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는 상대에게 5분이상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갈 능력의 부재를 가졌다고 표현되어지지만,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일상적인 대화가 되지 않아서 '배신 당할 필요가 없는' 개와의 관계에서는, 밥이 먼저 무장해제하고 경계를 허물고 소통하고 공감하려고 손내밀고 다가간다.

먼저 개를 향하여 무장해제할 수 있게 된 밥은 사람을 향하여도 경계를 허물고 다가갈 수 있게 된다.

밥도 나디아가 어딘가 무심하다는 정도는 알았다. 자기 집에서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개를 만났건만 나디아는 그 사실에 놀라지도 흥미로워하지도 않았다. 대수로운 일은 아니다. 이 지상에 있는 누구나 어느 정도씩은 무심하지 않던가? 오히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는 않을 게다.(87~88쪽)

 

비로소 '두근두근'이라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때문에 지금 '두근두근'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멀리 있을 때도 그랬고 마음 속에 있을 때도 그랬고, 지금처럼 서로 닿을 만큼 가까이 있을 때도(한 번도 접촉은 없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예전에 공개 장소에서 전화를 사용했던가요? 다들 부스에 들어가 문을 닫고 최대한 속삭이듯 말했죠. 지금은? 지금은 공중화장실에서 대변을 보면서도 떠들어 대요. 도무지 이해 못 하겠어요."

  나디아가 웃었다.

  "왜요?"

  그녀가 사과의 표시로 한 손을 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 흥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제대로 이해하는지조차 모르겠는걸요. 어쨌든 공중전화가 내 흉터하고 무슨 상관이죠?"

  "아무도 프라이버시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누구 할 것 없이 자기 얘기만 씨불이느라 몸살을 앓죠. 아, 미안해요. 숙녀 앞에서 몹쓸 단어를 썼나 봅니다."

  그녀가 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계속해 봐요."

  그가 한 손을 귀 옆으로 올리다가 불현듯 깨닫고 얼른 내렸다.

  "누구나 상대한테 얘기하고 싶어해요. 뭐든 자기 얘기를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하는 거죠. 하지만 정작 자신의 정체를 보여 줄 때가 되면, 찔끔 움츠리고 말아요, 나디아.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거든요. 그러니까 더 많이 떠들어 위장하는 겁니다. 해명이 불가능한 일을 해명하려는 거예요. 그 다음엔 다른 사람에 대해 심하게 떠들어 대죠. 도대체 말이 됩니까?"

(138~139쪽)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해 주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한다는 말이 이런 연유에서 탄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ㆍㆍㆍㆍㆍㆍ커피 한 잔 하는데 나를 바라보더라고. 정말로 나를 보고 있었어."

"나도 당신을 봐."

롬지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보는 건, 당신과 비슷한 일부뿐이야. 에반드로, 내 최고의 매력이 아니라. 미안. 하지만 그 사람? 그 사람은

달라. 나를 볼 때면 늘 최고의 나를 찾아내거든."(219쪽)

 

그런 의미에서 요즘 '이경원'이라는 사람의 '첫눈에 반하지마라'를 읽고 있는데,

난 '골상학'책인줄 알고 집어들었는데 '나에게 맞는 배우자 찾는 법'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첫눈에 반하는' 그 사랑의 유효기간은 3개월에서 1년이니,

이것저것 신중하게 살펴서 나에게 맞는 배우자를 찾아라, 뭐 그런 얘기이다.

그러면서 '인생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있다.'라고 끝맺고 있다.

 

그런데, 내 개인적인 생각은 이 사람이랑은 약간 다르다.

이것저것 신중하게 살피느라고 첫눈에 반하는,

즉 마음이 시키는대로, 감성에 의해 움직이는 그런 사랑 한번 못해보고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고 한들,

그리 행복한 인생이겠느냐 하는 것이다.

차라리 마음이 시키는 대로, 첫눈에 반하는 불같은 사랑이라도 한번 해보는 것이 후회없는 삶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스포일러를 핑계로 제쳐 두고,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이라는 것과,

그런 외롭고 쓸쓸한 우리들은 나와 공통점을 지닌 상대에게서 매력을 느끼게 되는지 어떤지는 차치해 두고,

보통의, 평범한 나에게서 최고의 매력을 찾아내 주는 사람을 발견하게 되면 난 그 사람을 위해 기꺼이 화장을 하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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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미스코리아 선발 대회라는걸 텔레비전에서 방송해 주던 때가 있었다.

유독 얼굴도 이쁜데다가 몸매도 착해뵈는 후보가 나와,

태극기를 보면 눈시울이 붉어지고 감격의 눈물이 난다고 하는데 같이 울컥해졌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미의 사절이니만큼, 스피치교육까지 따로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건 한참 후였다.

 

이젠 텔레비전에서 더 이상 미스코리아 선발 대회를 방송해주는 것도 아니고,

보는 것도 뉴스나 보도 프로그램 정도가 고작인데, 보기만 하면 폭풍눈물을 흘려대는 통에 뭘 볼 수가 없다.

 

옛날엔 드라마를 보면서,

개연성 있고 현실감 있게 잘 만들어졌다고 하며 열을 올렸었다면,

요즘은 텔레비전의 뉴스나 보도 프로그램을 보면서,

사실일리가 없다고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고 고개를 젖고 혀를 내두른다.

 

용산참사가 그렇고,

쌍용차 사태가 그렇고,

세월호가 그렇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에선가 체육관이 무너지고 어디에선 환풍구가 붕괴되고 어디에선가 화재가 일어나지만,

장소와 때는 달리하는데,

사건 원인을 분석하려고 하면 하나같이 똑같다.

이럴땐 어쭙잖게 책 한권 읽는게 사치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하지만, 책 말고는 내가 답을 구할 다른 무엇도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러 권을 같이 읽고 있는데,

그중 '이상수'의 '운명 앞에서 주역을 읽다'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서대원'의 '주역강의'와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있는데,

서대원의 그것보다 더 개념적이고 원리적으로 쉽게 접근한다.

 

주역책을 맘 잡고 읽어 볼려고 하면,

쉽게 쓰여진 책이건 어렵게 쓰여진 책이건, 일단은 한자가 나와서 전의를 상실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또는 한자를 우리말로 억지로 번역해 놓아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이 책은 우리말로 해석한다고 해서, 무작정 우리말로 꿰어 맞히려 들지도 않았고,

때문에 껄끄럽지 않게 잘 읽힌다.

 

 

 

 

 

 운명 앞에서 주역을 읽다
 이상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

 2014년 9월

 

 주역강의
 서대원 지음 / 을유문화사 /

 2008년 1월

 

게다가 이상수의'운명 앞에서 주역을 읽다' 초반에는 이 시대를 사는 내가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엿볼 수 있는 구절이 있어서 좋았다.

ㆍㆍㆍㆍㆍㆍ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거나 직장을 옮기는 등 자기 삶에 주요 고비가 닥칠 깨마다 주역점을 의뢰했다.

ㆍㆍㆍㆍㆍㆍ현대 사회를 사는 이들의 삶을 씨줄로, 《주역》을 날줄로 삼아 교직해 읽다 보니, 일정한 시간이 지나자 《주역》을 지은 이들의 의도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주역점을 쳐보지 않고  《주역》의 문장만 읽었더라면 《주역》지은이의 의도를 이렇게 명확하게 깨닫기는 어려웠을 것이다.(17쪽)

작게는 책속에서 주역의 문장만을 읽을게 아니라, 직접 주역 점을 쳐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나아가서는 삶속에서 일일이 점을 쳐보아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삶은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통과했을때만이 진정 자기의 것이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미리 정해져 있어서 극복할 수 없는 팔자라는 뜻은 아니오. 당신이 만약에 간절하게 현재의 상황을 바꾸고 싶다면 이런 것들을 찾아내 바꾸어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오. 밑창은 막고, 인생에서 걸리적거리는 바윗덩이와 가시덤불은 걷어내고 말이오. 고맙잖소?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입 밖에 꺼내기 힘든 이런 얘기들을 《주역》이 대신해서 시원시원하고 진솔하게 다 말해주니 말이오. 지금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흉한 괘와 흉한 효가 나왔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무엇이 삶을 황무지로 만드는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사는 방식과 사람에 대한 태도와 가게의 분위기가 좀 더 유연했더라면 더 다양한 인연을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면 삶에서 무언가 다른 기회와 마주칠 가능성도 더 많아지지 않았을까?(23쪽)

이런 주역 책을 너무 어려서 읽는 것은 지양하는 게 좋지않을까 싶다.

그리고 또 한가지, 우리를 독선과 독단에 빠뜨리는 그것,

다른 이름으로 맹목적이라는 말로 불리우기도 하는 것,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만의 일들로 그렇게 그렇게 살고,

그걸 향하여 맹목적으로 치닫는다.

가치관이나 신념이라고 하지만,

독선이나 독단, 편협함과 다른 의미일수 있는 것은,

잘못됐거나 틀린줄 알았을때, 맹목적이지 않고 수정가능하다는 것이다.

황무지가 된 땅은 복원되기까지 시간이 걸리지만,

삶은 유연할수록 다양한 기회와 인연을 만날 수 있고,

그리하여 윤택해진다.

 

《주역》은 운명의 지도다. 지도는 길만 보여주지 않는다. 길이 아닌 곳도 함께 보여주어야 제대로 된 지도다. 《주역》은 그리로 가면 가시밭인데 왜 그리로 가느냐고 질문을 하는 책이다. 이것이 《주역》이 우리에게 주는 지혜의 본질이다. 그러나 길이 아닌 가시밭에 치명적인 유혹이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주역》은 우리의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주역》은 우리의 삶에 깊숙이 개입해 발언한다. 그렇기 때문에 절실하기도 하고 위험하기도 하다.(24~25쪽)

 

이 이야기들은 우리 인생의 한 단면을 베어내어 만든 것들이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든 예외없이 길함과 흉함이 교차해 등장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주역》은 어떤 면에서 예순네 가지의 새옹지마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주역》은 반드시 인간의 실천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32쪽)

 

이렇게 텔레비전을 볼때마다 하도 울어서,

우는걸 직장동료에게 들킬때마다 벌금을 내다보니,

벌금을 내느라 집을 팔아야 될 정도라고 하여 '집.파.녀.'라는 별명이 붙었었다.

누군가는 이런 나의 별명과 관련하여,

아니 나의 헤픈 눈물과 관련하여,

내 이름이 너무 무겁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진단을 했었다.

'조정에 은혜를 다하라'고 하여 여자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신 할아버지가 지어 주신 이름이란다. 

 

암튼, 어제는 화개장터의 화재소식 때문에,

오늘은 쌍용차 사태가 대법원에서 기각된 그 소식때문에, 한방울씩 맺혀 들던 그것이 폭풍 눈물로 이어졌다.

간혹 그런 생각이 든다.

책은 왜 읽나?

책을 읽고 깨달음의 눈물을 흘려대더라도 행동이나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못하면...부질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어쩜 내가 오늘 할 일은,

책 한권을 읽는 것보다는 느끼고 깨닫는 일이고,

느끼고 깨달았으면 행동이나 실천으로 이어져 삶에 어떤 자그마한 변화라도 가져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냥 눈물만 흘리다가는 '집.파.녀.'에서 헤어나오지 못할테니 명심할 일이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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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 2014-11-28 22:11   좋아요 0 | URL
이상수씨가 한겨레에 이상수의 고전중독 연재하던 그분이신가요? 글 좋던데.. 흠.
눈물부터 멈추시길.

sslmo 2014-12-02 16:13   좋아요 0 | URL
이 이상수 님이 그 이상수 님인지는 모르겠고,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내는건 보통의 내공으로 되는 일이 아니죠~^^

감은빛 2014-11-29 02:47   좋아요 0 | URL
두 권 보관함에 담았습니다.
언젠가 읽다 만 주역 책이 어느 구석에 있을텐데, 못 찾겠네요.
뭐 찾는다해도 읽을 틈이 없습니다만.

참 어려운 시절입니다.
눈물을 넘어 분노로 살아남아야 할 시대가 아닌가 싶어요.

sslmo 2014-12-02 16:19   좋아요 0 | URL
얼음왕국 생각나요.
눈물을 흘리면, 다 얼음으로 변해버리는~ㅠ.ㅠ

눈물이 되었건, 분노가 되었건,
칼날이 향하는 곳을 꼭바로 인지할 필요가 있고,
그렇다고 하여 칼자루를 우리 후대에 넘겨주어선 안 되겠죠~--;
 
이영돈 PD의 운명, 논리로 풀다 - 운명에 대한 과학적 논리석 해석
이영돈 지음 / 동아일보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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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부류가 아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운명론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집안이나 부모를 자신이 택해서 태어날 수 있는게 아닌데,

운명을 초자연적인 힘인양 여기고,

그게 사람에게 작용하여 좌지우지한다고 하면,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특출나게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열심히 묵묵히 노력하는 것 말고는 딴 재주가 없는 나 같은 사람은 의기소침해지기 십상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나이를 이만큼 먹으며 살다보니까 운명론에 의지하여 사주나 관상을 보고 어쩌고 하지 않더라도,

현재 행동거지나 정신상태, 마음가짐을 보면 그 사람이 과거 어떤 삶을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지 뻔히 보인다.

이건 내가 신에게 계시나 응답을 받거나 접신의 능력이 있어서도 아니고,

사주나 관상을 보는 특별한 공부를 하거나 주역을 공부한 것도 아니다.

굳이 까닭을 대보라면, 언젠가도 얘기한적이 있는 '부분은 전체를 대표한다'의 '프랙탈이론'쯤 되겠다.

주역64괘의 경우 '화수미제'가 아니라 '건위천'으로 옮아가는 영원한 도돌이인것 처럼 말이다.

어제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오늘이라는 '순환' 속에서, 어제와는 다른, 아주 미세하고 미미한 '변화'가 생기는데,

그 순환속에서 변화를 끄집어 읽어내면 되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쌓인 순환 속에서 변화를 읽어내는건,

다시한번 얘기하지만,

신에게 계시나 응답을 받거나 접신의 능력이 아니라, 케이스스터디의 회수를 늘려 대표성을 높이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정확도가 높아진다는 얘기는 바꾸어 말하면, 예측이 어긋날 확률이 줄어든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건 하루 아침에 되는건 아니고,

세월이 흐르면서 케이스스터디가 무한반복되는것 뿐이니까, 경험이나 연륜쯤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삼라만상이라고 하면서,

그 수많은 사람의 체질을 네가지로 분류해낸 사상체질에 의한 처방이나

A, B,O,AB 혈액형에 의한 분류법을 가지고 사람의 성격을 구분짓겠다는 것은,

인간의 다양한 체질이나 섬세한 성격 따위를모호하게 흩트려놓거나 뭉뚱그려놓을 위험이 있으니 주의하여야 겠다.

 

옛날엔 부족장이 정치적 지도자였고 무당이 정신적 지도자였단다.

무당은 닥쳐올 자연재해를 미리 예측해 부족민의 안녕을 도모했으며 예방하고 환자를 치료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고, 더구나 통신매체가 발달하지 않아서 그때그때 정보를 전달할 수 없었던 옛날에는,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생각되었고,

그리하여 무당과 역술가들이 그 영역을 담당했겠지만,

지금은 과학이 발달하고 통신매체가 발달하여 실시간으로 정보전달이 이루어져서,

그게 자연스런 현상이란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역술가와 무당을 찾는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사람들이 역술가와 무당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운명이 맞고 안 맞고를 떠나 운명 그 자체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5~6쪽)

그렇다면 오늘날, 역술가와 무당을 찾는 이들의 경우,

현재 행동거지나 정신상태나 마음가짐을 보면 그 사람이 과거 어떤 삶을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지 알 수 없고 볼 수 없어서 이들을 찾는 것일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행위가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 뻔히 내다보이는 자연스런 현상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그것이어서,

역부족이었다는 면죄부가 필요한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그런 면죄부를 주는게 자연인인 사람인것 보다는,

때때로 초자연적인 어떤 힘을 발산하기도 하는 역술가나 무당이었을때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싶다.

 

난 이걸 현대인의 외로움에서 답을 찾고 싶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 속에서 사는 듯 하지만,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얘기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 얘기를 하면 들어줄 귀가 없다.

홀로 외롭고 고독한 사람들이다 보니,

자신의 미래를 예측해 어찌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잠시 무장해제하고 쉴 곳을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가 무장해제하고 쉴 수 있는 곳이나 사람이,

우리 주변의 사람이나 자연인것 보다는,

어떤 초자연적인 어떤 힘을 발산하기도 하는 역술가나 무당인것이 낫다고 생각하는게 아닐까?

 

운명이 맞고 안 맞고를 떠나 운명 그 자체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역술가가 제시하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그런 의미에서, 가짜역술가를 양산하는 것도 어쩜 우리 자신들인지도 모르겠다.

가짜 역술가는 이 짧은 대화를 통해 손님 1의 가족 중 누군가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아픈 사람이 본인이나 자식이 아니라 시부모나 혹은 부모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눈치챘다.ㆍㆍㆍㆍㆍㆍ가짜역술가는 손님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털어놓도록 하기 위해 한마디만 던졌을 뿐이다.ㆍㆍㆍㆍㆍㆍ그 뒤는 손님들의 몫이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걱정을 그 자리에서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그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역술가가 제시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상담하는 내내 그들 스스로가 이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ㆍㆍㆍㆍㆍㆍ사실 이들은 자신의 상황을 말하기 전부터 표정과 동작으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ㆍㆍㆍㆍㆍㆍ인간이 구사하는 언어에는 '말'뿐만 아니라 표정, 동작까지 포함된다. 작정하고 상대방을 속이려는 의도가 없는 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미세하게 혹은 몹시 솔직하게 드러나게 마련이다.(54~55쪽)

암튼, 이 책에서는 운명이나 사주 외에도 삶에 수많은 변수가 작용한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부모복, 관상 등과 같은 것들이 운명을 좌우하는 변수가 된다(32쪽)는 것이다.

동일한 사주를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각자의 삶이  다른 이유는 이런 것들 때문이란다.

 

기존의 역술가가 쓴 책이 아니라서 그런지,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나 내용이 흥미로웠는데,

그중 쌍둥이의 사주 뽑는 법엔 이런 코멘트가 달렸다.

그것은 쌍둥이의 사주는 뽑는 방법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쌍둥이는 나란히 있지 않고 마주 보는 형상이라 한쪽은 양을, 다른 한쪽은 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한날한시에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라 해도 똑같은 인생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사주라도 부모나 관상 등에 따라 운명이 바뀌고 쌍둥이는 사주를 뽑는 방법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인생을 살 수 없다는 역술가들의 논리,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35쪽)

예를 들면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 부모복과 관상도 같을텐데,

그게 운명을 좌우하는 변수로 작용하지 못한다면,

반대로 일란성 쌍둥이들을 역추적하여 유추해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말했던 현재 행동거지나 정신상태나 마음가짐 같은게 달라진 원인을 역추적하다보면,

배우자나 친구, 생활환경, 심지어 버릇 까지도 그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가 되지 않을까?

 

이 책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운명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운명 안에는 노력(부적을 쓰거나 개명하는 것,제왕절개)도 포함되는데,

때문에 노력을 통해 미래가 바뀌었다면 그것 또한 그 사람의 운명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사주는 바뀌지 않아도 사주를 해석하는 방법은 바뀌기 때문에,

그에 따라 운명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 오늘날 역술가들의 정설이라고 한다.

이는 '애당초 완벽하게 좋은 사주란 없다'라는 말이기도 한다는데,

때에 따라 혹은 상황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건,

이후에도 얼마든지 그 기준점이 바뀔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매사에 긍정적이고 유연해야 겠다.

 

가장 흥미로웠던 내용은, 궁합과 관련된 것이었다.

 '네 인생의 20%는 양보해라'라는 뜻에서, '80점이 가장 좋은 궁합'이라는 얘기도 그랬지만,

사주 상의 궁합은 안좋은데, 실제 잘 살 경우 경우의 해석법이 흥미로웠다.

"이분들의 사주에 애정운이 안 좋은 걸로 나왔죠? 그런데 전 배우자와 한 번 이혼한 것으로 액땜을 한 거죠. 그럼 좀 더 나은 인연을 만날 가능성이 있는 거고요. 말 그대로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꼭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개인의 사주 복에 따라 차이가 있거든요. 또 심성의 차이가 있기도 하고요."

"심성의 차이요?"

"이를테면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고 되돌아보는 거죠."

"그렇다면 궁합은 왜 보는 겁니까?"

"일조의 참고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궁합이 좋게 나오면 좋은가 보다 하고 서로 넉넉한 마음으로 살고, 궁합이 나쁘게 나오면 서로 더 조심하고 노력하는 거죠."(106쪽)

 

이 책을 읽고,

본인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어쩜 운명이나 사주 같은것이 아니라, 매사에 긍정적이고 유연한 사고방식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대가 변하고 과학이 발달하면서,

천재지변이나 질병, 원인을 알 수 없는 불행 요소 등 초자연적인 형상으로 일컬어지던 것들을,

과학적으로 예측하고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논리적으로 예측하고 정확하게 규명할 수 있는 과학을 따를 것인지,

마녀 사냥을 일삼는 미신이나 주술을 믿고 신봉할 것인지,는 각자의 판단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겠지만 말이다.

 

다만 한가지,

운명도 그렇고 사주나 관상도 그렇고,

산사람을 위해 만들어진것이지,

죽은 사람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홀로 외롭고 고독해서 몸부림치다가,

자신의 나은 미래(홀로가 아닐지도 모르고 외롭거나 고독하지 않을지도 모르는)를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가 아닌,사주나 관상에 의지하게 되지 말고,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 매사에 긍정적이고 유연한 사고방식으로 살도록 힘써서,

운명에 지배당하는 사람 말고,

운명 까짓것,

스스로 지배하고 개척하는 사람이 되자,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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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리습관이 어때서! 맛있는 습관 8
이상미 글, 장연화 그림 / 파란정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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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언젠가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박상천'의 시 '5679는 나를 불안케 한다'과의 정리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정리 습관이란 말은 나의 행태를 잘 반영하는 말이 아닌 것 같다.

결벽증 내지는 편집증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내가 이렇게 털털하고 수더분하다 못해 지저분해진건,

우리 아들이 어렸을 적 식당에만 가면 식당에 온 다른 사람들 신발 정리까지 하느라고 입구를 떠나지 못하는 걸 보고나서였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 수 없다지만,

너무 지저분하고 흐려도 위계질서가 흔들려 생태계에 교란이 오더라.

적당한 선에서의 타협과 조율이 필요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맛있는 습관 시리즈의 '내 정리습관이 어때서!' 이 책은 어린이용 책이지만,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잘 기획 되어,

내용도 알차고, 기획 의도도 좋고, 대상도 명확하고,

어린이들이 좋아하게끔 흥미 유발도 하고 있지만,

나처럼 정리가 서툰 어른이 봐도 좋은 책이다.

 

각 장이 끝날때마다,

'체크 리스트'를 두어 중요한 점들을 집고 넘어가게 했으며,

'깔끔 선생님의 한마디'라는 박스 코너를 통하여 어린이의 마음을 다독여 줌과 동시에 해결방안을 같이 모색해 보는 것도 좋았다.

거기다가, 보드게임처럼 'yes', 'no'가 있어서 각자 선택하여 결과에 이르는 것도,

성취감과 재미 두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효과였다.

 

한가지 명확하게 집고 넘어갈 부분이 있다.

우리는 흔히 버리지 않고 쌓아두거나 쑤셔 넣어두고는 그걸 알뜰하다거나 근검하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도 옛날에, 아니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랬었다.

물건에 감정이입을 해서 단지 필요없거나 쓸모없는 물건을 버리는 것일 뿐인데, 버림받는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걸 애착육아와 연관시켜 공부하기도 하고 책도 읽었지만 그때뿐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가 대대적이고 획기적으로 정리를 결심하게 된건,

언젠가 포천 빌라의 살인용의자가 시신을 어쩌지 못하고 빌라 안에다 방치한 것과 엄청난 쓰레기들을 쌓아둔 것을 같은 맥락에서 접근하는 것을 보고 경악하고나서였다.

 

흔히 콜렉션이라고 하는 수집 또한 적당한 선에서는 취미가 되지만,

과하게 되면 못버리고 쌓아두고 방치하는 병이 되는 걸 명심해야 겠다.

그리고 수집이 되는지 벽癖이 되는지를 가르는 기준은 정리인지 쌓거나 쑤셔넣는 수준인지에 달려 있다.

 

항상 '적당한'과 '적절한'의 수위를 조절하는게 관건일텐데, 언젠가 웹서핑을 하다가 보았던 어떤 동영상이 떠올라서 씁쓸했다.

씁쓸한 이유는 물론 동영상 속의 저 상황이 물론 과장된 설정이겠지만, 그럴 듯 해서 격하게 공감하겠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제대로된 정리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일단 물건의 자리를 정해주는 것이 중요하겠다.

물건을 쓰고 나서 아무곳에나 두지 않고 정해진 자리에 둔다.

정리보다 어려운 것은 정리한 것을 유지하는 일이란다.

 

무엇보다 내가 격하게 공감하였던 것은, 정리 정돈은 자기관리 능력이라는 부분이었다.

자기 앞가림을 한 연후에 시선을 타인에게로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음은 너무도 당연한 얘기이다.

 

정리의 기본 4단계는 '꺼내기, 나누기, 버리기, 넣기'란다.

일단 끄집어 내어 중요도나 사용도에 따라 나누고,

필요없는 물건이나 버리기 아까운 물건이라도 쓰지않을것 같으면 버리고,

중요도나 사용도에 따라 분류하였으면 효율적으로 배치하여 넣는다.

 

암튼 이 책은 엄마 선생님이 우리 딸이나 아들에게 조곤 조곤 들려주듯 자상하고 다정하다.

난 이 책을 보며, 책꽂이=책장 정리에 돌입해보아야 겠다, ㅋ~.

수준에 맞지 않는 책 고르기, 책 사이에 여유 두기, 영역별로 분류하기, 위치 정하기, 정하기, 책꽂이 설계도 그려보기 등 내용이 꼼꼼하면서도 알찬게 세심하고 섬세한 배려가 느껴진다.

한가지 아쉬운 점을 꼽으라면, 19쪽의 그림 같은 경우 사실감이 떨어진다.

건희는 남자 어린이인데 방의 모습만으로는 그것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고,

걸려 있는 옷이나 인형 같은 경우는 여자 어린이의 그것에 가깝다.

그리고 침대 머리 맡의 선반 같은 경우,

화분 미니어처인지 진짜 화분인지 모르겠지만 진짜 화분이어도 그렇고 미니어처여도 겉도는 느낌이다.

(자는데 머리 위로 떨어지면 어쩌나?, 또는 화분에 물과 영양 공급을 제대로 안해주면 어쩌나?

 만약 전자파 차단용이라면 있어야 할 곳은 저기가 아니라 책상 컴퓨터 옆이 그럴 듯 하다~--;)

내가 가장 이상하게 느낀 것은 침대와 책상의 크기로 미루었을때,

벽면의 세계지도 포스터와 창문 크기가 안 어울린다.

물론 일러스트인데 왜곡, 굴절시킬 수 있지 뭐 그리 예민하게 구냐고 하면 할말은 없다.

하지만 어린이가 주요 독자인 책이고,

그렇다면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서 그림도 그려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서 그렇다.

아무리 유니섹스의 시대라고 하지만,

그들에게도 나름의 유행과 취향은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뭐랄까, e-book 리더기를 통하여 철수와 영희가 나오는 옛날 교과서를 추억하는 느낌이다, ㅋ~.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엄마가 읽고 아이에게 권해 줄 수 있는 그런 책을 만나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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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동의 손바닥 아트
박재동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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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버리는 모래처럼 느껴지는건 나이를 먹었다는 얘기렷다.

소싯적엔 그렇게 쓰라고 노래를 불러도 쓰기 싫던 일기가,

언제부턴가 순간을 붙잡아 둘 수 있는건 기록뿐이지 싶어졌다.

예전엔 완전 범죄에 위해 증거인멸에 어려움이 있는 사진과 동영상 따위는 무슨일이 있어도 찍히면 안되는줄 알았었다.

어쩌다 그때 증거들을 만나게 되면, 후회가 물밀듯 밀려들었다. 

영 아닌 얼굴에 이빨이라도 옥수수처럼 드러내고 찍으면 그나마 좀 나을텐데, 우거지 죽상도 그런 우거지 죽상이 없다.

그런데 괜찮은 줄 알았던 기억력이 예전만 못하다는걸 깨달은 어느 순간,

그때가 순간을 붙잡아 둘 수 있는건 기록뿐이라는걸 깨달은 그 즈음이지 싶은데,

이젠 찌그러진 얼굴일지라도 그 순간의 느낌에 가까운 사진이면 기록으로 남긴다.

종종 셀카도 찍는다.

 

이 책의 제목은 '손바닥 아트'지만, 기회가 있을때마다 사람이든, 풍경이든, 사물이든, 박재동의 마음이든, 을 그리고 쓴 일종의 그림일기란다.

사실 난 이 책을 그림 보고 그리기 내지는 그림 따라 그리기 연습을 할 요량으로 언젠가 구입해 뒀었는데,

어쩌다가 이 책을 읽게 되었고,

이 책을 이렇게 읽자, 이 사람이 너무 인간적이어서 맘에 들어,

이 사람의 그림만이 아니고, 삶 전반에 걸쳐서 본받고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체가 다소 코믹스러워서 그렇지만,

이 네 작품을 통하여 박재동 님의 예술 세계를 엿본 소감을 얘기해보라면, 몸매가 완전 예술이라는거다.

그런데 박재동 님은 부러워하지만 말고,

'예술이란 특별한 예술가들이 대중들에게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자신만의 예술을 꽃피워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책 날개를 빌어 슬며시 꼬신다.

 

첫번째 그림의 경우,

머리카락의 방향과 뒤로 젖힌 손의 각도,

티셔츠 주름의 방향이 그려내는 각도가 거친듯 단조롭지만 통일되었다.

멋지다.

두번째 그림 '배에 힘주고'는 그 밑의 '뱃살을 빼야해'와 묘한 대조와 대구를 이룬다.

세번째 그림은 실루엣만으로도 율동감이 느껴진다.

 

이 네 편의 그림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건 그림이 어렵지 않다는 것이고,

박재동 님이 말하는 바가 뭔지 쉽게 전달되어 온다는 것이고,

또 하나,

그렇지만 그림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아움직이는 듯 느껴지지,

어느 한구석 소외되거나 미완성된것처럼 허술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즘 극과 극은 통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우리가 아둥바둥하는 것은 어느 단계에 이르기까지인 것 같다.

그 단계를 넘어서게 되면,

그러면 찾아드는 허허로움을,

박재동 님의 경우,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다가도,

나이 들어 찾아드는 마음의 편안함,

나이 들면서 쌓이는 풍요로움과 자유로움이라고 표현하며,

그것을 젊음과 바꾸기는 '너무' 아깝다고도 하는 걸 보면 말이다. (54쪽)

 

또 하나 박재동 님의 '손바닥 아트' 이 책을 보면서 든 느낌은 따뜻하다는 것이었다.

 

그걸 박재동 님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먼저 사람이 되거라

 

이 그림을 다시 보고 다시 감회에 젖는다. 재능과 기술과 학문 등을 연마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거니와 먼저 인격을 갖추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아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젊을 때 "먼저 사람이 되거라"는 이야기는 나한테 얼마나 진부한 잔소리로 들렸던가. 이 나이에 생각해보면 이제야 와 닿는 이야기다. 사람됨 없이 쌓아진 모든 것들은 흔들리는 이빨처럼 무너져 위태롭더라. 그래서 요즘, 어떤 상황에서 행동 판단이 어려울 때 가끔 '무엇이 아름다운가'를 생각해본다.(135쪽)

 

재능과 기술과 학문 등을 연마하는 것들도 그렇지만,

사람이 하는 모든 일들은, 사람을 위해서이다.

 

여기서 박재동 님과 내가 견해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등장한다.

오래전에 박재동 님이 누군가의 캐리커쳐를 그려줬는데,

많은 사람들은 똑같다고 박수를 치며 좋아했는데 정작 장본인은 그림을 구겨버렸단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는단다.

다른 사람이 즐거워하는 그림이 그 사람에게 상처가 된다면 그런 그림이 과연 예술일까 고민했으며,

그때부터 단점은 감추고 장점을 부각해서, 상처가 되는 그림은 그리지 않게 되었단다.

 

사람은 어느 정도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사진이 됐든, 그림이 됐든, 실물은 아닌 것이고,

실물이 아닌 그것을 보고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는데 그렇게 되는게 사람이더라~--;

 

나 또한 완전 소심 덩어리 그 자체여서, 옛날 같았으면,

박재동 님처럼 다른 사람이 즐거워 하는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겠지만,

지금은 내 자신이 만족스럽고 내 자신이 즐거운 그림을 그리는게 우선이다.

 

그렇다고 이 둘이 완전 상반된 견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기 자신을 진정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고,

내 자신이 만족하고 즐거워야 상대방도 같이 즐거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죽재킷을 즐겨입는 걸 보고 누군가가 나 때문에 죽어나간 동물들을 생각하라는 말을 했다.

가죽재킷을 입는 것을 잘했다고 정당화하는게 아니라,

그건 그렇게 비약시킬 수 있는 논쟁거리가 아니라고 했다.

그런 가치 판단의 기준을 적용시키면, 모나 울, 동물의 털로 된 옷들도 자유롭지 못한 게 아니냐,

가죽 신발, 가죽 가방, 심지어 가죽 벨트, 지갑 등등 가죽을 안 사용하는게 몇 개나 되겠냐,

같은 말들도 했던 것 같다.

 

그의 얘긴즉슨, 털은 살아있는 동물에서 깎는 것이고,

가죽은 동물을 죽여서 취하는 것인데 어떻게 같을 수가 있느냐,

뭐 그런 취지였다.

 

정작 동물은 털을 깎이는 과정에서 죽을때보다 더한 고통을 느낄지도 모르는 일이고,

털이 깎이는 걸로 인해 죽음과 맞바꿔야할 환경의 역습을 당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있는 것만으로 낫다고 생각하는 건, 어쩜 선을 위한 독선일지도 모른다.

 

나와 그 또한 완전 상반된 견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박재동 님은 아티스트니까 '무엇이 아름다운가'가 가치 판단의 기준이시겠고,

난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인간 되기를 추구 하는 사람이니까 '무엇이 내마음이 천국인가' 즉, '무엇이 편안한가'가 가치판단의 기준되시겠다.

 

하지만, 이 모두가 백날 말로 떠들어봐야 사상누각이다.

모든 가치는 행동으로 옮겨졌을때 견고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독서일기가 됐든 그림 일기가 됐든,

깜박깜박하는 기억력을 붙들어두기 위해서 그날 그날을 기록하는 것을 결심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옮겨야겠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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