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 류시화의 하이쿠 읽기
류시화 지음 / 연금술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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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얘기한적이 있는것 같은데 일본문학을 일부러 찾아 읽는 편은 아니다.

이 책은 우연히 보게 됐는데 그림과 글씨가 너무 예쁜지라, 눈요기를 할 요량으로 집어들었다.

보통 책이 힐링이라고 들 얘기 하지만,

비판없이 무조건 읽기만 하면,

다시말해 자신의 느낌이나 감상 없이 무조건 읽기만 한다면,

저자나 역자를 그대로 좇는것이고,

여기까진 간접 경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책의 주파수와 나의 주파수가 만나게 되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때,

다른 사람들이 봤을땐 아무것도 아닌 듯 사소한 것 같아 보이는 것까지 그대로이지만,

저자나 역자의 생각과 일치할 수도, 어긋나거나, 비껴갈 수도 있는 그 때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내 스스로 무언가를 느끼고 깨닫게 되는 그것을, '힐링'이라 부를 만하다.

왜냐하면,

책을 읽고 힐링을 느끼는 그 행위를, 스스로 이어갈 수도 있고 중단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장자에 보면,

달인인 목수에게 나무가 다가온다고 하였는데,

나에게도 책이 그렇게 다가올 날이 있을까?

힘 빼고 아무렇지도 않은듯 얘기하고 있어도,

그건 달인도 아니고, 진인이나 다다를 수 있는 경지이니까 꿈도 꾸지 말아야 할까?

 

하이쿠의 언어는 의미보다는 소리, 움직임, 시간, 풍경을 전달하는 수단이었단다.

목적이 훌륭히 이루어졌을때 의미는 자연스럽게 전달된단다.

 

그런 의미의 연장에서,

책의 내용이 아니라,

책을 꾸미고 있는 외형, 표지와 판형과 그림과 글씨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 치유가 되는 느낌이었다.

'책을 이렇게도 예쁘게 디자인 할 수도 있구나'

그동안 난 포장을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하여 본모습을 과장시키거나 왜곡시킨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본모습에 긍정적으로 작용을 하는게 아니라,

과장 또는 왜곡, 굴절시킨다는 이상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혹시 선물을 하거나 누구에게 마음을 전할 일이 있을 때도,

포장이 마음을 왜곡시킨다는 이상한 편견을 갖고서는,

원래 것을 벗겨내고 신문지에 둘둘 말아 알맹이만 전하는 기행을 하곤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류시화의 하이쿠 읽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란 이 책은 예쁜 한권의 그림이 있는 시화집처럼 읽혔다.

 

 

 

 

책 날개 안쪽을 보면,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라고 일컬어지는  하이쿠는 5ㆍ7ㆍ5의 열일곱 자로 한 줄의 정형시 라고 적혀 있으며,

짧기 때문에 함축적이며, 그래서 독자가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 매력이다. 말의 홍수 시대에 자발적으로 말의 절제를 추구하는 문학, 생략과 여백으로 다가가려는 시도, 단 한 줄로 사람의 마음에 감동과 탄성을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하이쿠의 세계를 류시화 시인의 감성과 깊이 있는 해설로 읽는다.

라고 되어 있다.

 

내가 하이쿠가 뭔지 모르는 문외한이라는 단서를 달고,

하이쿠의 매력은 독자가 의미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책 날개에도 적혀 있고,

나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 '독특한' 하이쿠를 류시화가 해설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시인이라면, 독자들에게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도록 열린 상상력을 자극하고 안내해야 하지 않았을까?

시인의 감성과 깊이 있는 해설은,

독자들의 주체적이고 자기주도적 하이쿠 감상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부터 시인에 대한 신뢰 지수와  독자의 주체적인 하이쿠 감상 지수는 반비례할 수밖에 없었는 지도 모르겠다.

 

가장 안타까운 생각이 든건, 5ㆍ7ㆍ5 열 일곱 자의 고집이었다.

하이쿠가 5ㆍ7ㆍ5의 열 일곱 자의 정형시라고 하여 우리말로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도,

지나친 생략으로 뜻이 모호해져 가면서까지  5ㆍ7ㆍ5의 열 일곱 자를 고집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렇다고 류시화의 글(해설)이 부족하거나 겉돈다는 건 결코 아니다.

책 뒤의 '한줄하이쿠/출전'과 '참고서적'과 '국내 하이쿠 관련 책들'만 보아도 알 수 있겠지만,

그가 자료를 수집하는데만도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고 또 정말 열심히 공부하였으리라고는 짐작할 수 있다.

하이쿠 시인들과 그 하이쿠 시인의 특징을 잘 집어내 설명하고 있고,

'언어의 정원에서 읽는 열일곱 자의 시-하이쿠의 이해'는 한편의 논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다.

그것만으로도 한권의 책이다.

 

근데 아쉬운 생각이 드는건 어쩔 수 없다.

중구난방으로 너무 쫙 펼쳐져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그 많은 하이쿠를 어떤 기준으로든 묶고 분류를 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비슷한 느낌의 하이쿠는 비슷한 느낌의 하이쿠 끼리 묶어 비교와 대조를 통해,

특징을 두드러지게 한다든지 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어떤 것의 있음'을 표현하기 위한 '없음'처럼 말이다.(602쪽)

그냥 이렇게 저렇게 붓가는대로 쓰다보니까 문득 생각나는 것을 끄집어 내는 식으로 쓰여진데다가,

책의 윗부분엔 하이쿠, 밑부분엔 류시화의 해설이 있는데,

그게 꼭 하이쿠의 내용과 같이 가는 느낌이 들지도 않아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소칸'의 하이쿠가 맘에 들었는데,

소박함, 아니 지지리 궁상을 지지리 궁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류시화는 인생의 고통을 극복하는 노력에서라고 표현하였지만, 내 생각에는)

달관한 자만이 얘기할 수 있는 해학으로 표현해 낸 것이 멋지다.

 

달에 손잡이를 달면 얼마나 멋진 부채가 될까  /소칸 (32쪽)

 

근데 난 '산토카'와 호사이'의 자유율 하이쿠가 더 좋은 걸 보면,

하이쿠만의 매력을 모르거나 글자수나 계어에 얽매이는 게 싫은 자유로운 영혼인가 보다, ㅋ~.

 

힘주고 또 힘주어 힘이라고 쓴다/ 산토카(541쪽)

 

기침이 멎지 않는다 등 두드려 줄 손이 없다/산토카(547쪽)

 

이렇게 좋은 달을 혼자서 보고 잔다/호사이(580쪽)

 

책의 외형이 맘에 들어 시작하게 되었으나, 이 책을 읽은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요즘은 소셜 네트워크의 발달로 인해서,

메일, 문자 메시지, 카카오 톡, 트위터 등 말과 글자의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다.

개중에는 읽지도 않고 삭제되는 것도 상당수이지만,

읽는 사람에게 쓸모없는 그런 것이라고 해서,

보낼 때 수고롭지 않고 정보이용료가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어서는 곤란하겠으나,

오래 생각하고 극도로 응축시킨다는 것은 말과 글을 아낀다는 것이고,

오지랖이 넓어 흘러넘치는 게 아니라, 가볍고 단출하여 한결 홀쭉해진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우린, 아니 나는 너무 아쉬운 걸 모르고 헤프게 살아왔던것 같다.

고팠던 적도, 아팠던 적도, 보고팠던 적도, 못가져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실제로 그랬을 수도 있고,

세뇌이고 최면일수도 있지만,

내 자신에게 비겁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인색하지는 않았다.

 

이 참에 나도 한줄로 된 하이쿠를 쓰듯,

줄이고 가볍게 하고 단출하게 하여, 그리하여 홀쭉하게 살아야 겠다.

 

힘빼고 살다보면,

달인인 목수에게 나무가 다가오듯 그렇게,

나에게도 책이 그렇게 다가올 날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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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보며 - 2000년에 1887년을 Rediscovery 아고라 재발견총서 3
에드워드 벨러미 지음, 김혜진 옮김 / 아고라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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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요즘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행복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스스로 불행하게 사는것 같다'라는 말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내게는 그 연장선 상이 될텐데,

내가 하는 일에, 즉 나의 직업에 회의를 느낄라치면, 

'호강에 겨워 요강에 밥말아 먹는 소리를 한다'고들 한다.

 

행복에 겨운줄 알라는 말일테고,

자기가 하는 일에 회의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들 하지만,

어떤 때는 나만큼 직업에 회의를 느끼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은것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택한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할때가 있다.

그런데 발상을 조금만 전환하면 직업, 즉 자기가 하는 일에서 흥미를 발견하고 느껴가는 것도 못지않은 행복일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모든 일은 바라보거나 생각하기에 따라 양면성을 지닌,

관점에 따라 천국이 되거나 동시에 지옥이 될 수도 있는 그런 것일테고,

그러므로 이럴때 필요한건 양면 중 어느 한 쪽면을 취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둘다를 취하거나 어느 쪽도 취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의학은 원인치료가 아닌 대증치료를 원칙으로 한다.

병의 증상에 대응하여 약이나 주사를 처방하다보니까,

말 그대로, 병을 앓을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상태나 모양인 증상이 발현되는 것을 차단하거나 늦추는 고로,

병을 간과하게 된다.

 

뇌졸중 기왕력이 있는 아주머니 한분이 멀리 인천에서부터  다니신지가,

내가 여기서 근무한 기간만큼이니 한 8~9년 되는 것 같다.

워낙 거리가 멀어 오시는데만 한나절이 걸리시는데도 오시는 성의가 괘씸하니까(?) 웬만해선 맞춰드리는데,

언제부턴가 점심시간을 코앞에 두고 오셔서 서둘러 약처방을 받으시거나 주사만 맞고 쏜살같이 내빼시길래,

새로 생긴 의료기 체험장이나 약장사한테 가지는 줄 알았지,

그걸로도 부족해서 이곳저곳 병원 쇼핑까지 하시는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데 지난 주 금욜날 봤을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오늘 보니까 입이 돌아가고 혀가 굳어 말이 어눌하신 거다.

 

처음에는 이 지경이 되도록 발견을 못한 내자신에 대한 자괴감으로 어쩌지 못하다가,

'맨날 이약 저약 좋다는 약이란 약은 다 먹는데 왜 이러는거냐?'고 하시는데,

이런 대증처방들이, 어떤 증상이 발현되어 나타나는 걸 차단시켜 버렸으리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의료보험제도가 좋은것이기는 하지만,

병원을 이곳저곳, 의료 쇼핑을 하게 만드는 맹점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약물의 오남용 내지는 과용하게 만들기도 한다.

의사와 환자 간에 신뢰라는 것은, 약효가 지속되는 동안 만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쓰여지고, 배경이 된 19세기에 대해,

당시의 부자와 가난한 자의 사이가 어떠했는지를, 마차에 비유한 구절이 인상적이다.

굶주림이 마차의 마부였고, 마차를 끄는 속도는 당연히 느릴 수밖에 없었지만 결코 홀로 처지게 내버려두지도 않았다. 가파른 모래투성이 길로 마차를 끌고 가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지만, 마차 위에는 길이 아무리 가팔라져도 절대 마차에서 내려오지 않는 승객들이 가득했다. 이 꼭대기 자리는 선선한 바람이 불고 편안했다. 흙먼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윗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느긋하게 경치를 즐기거나 힘들어하는 무리의 공로를 엄정하게 논의하기도 했다. 모두가 마차 자리를 하나 얻어 자손에게 물려주는 일을 생애 최고의 목표로 삼았으므로, 당연히 이런 자리는 수요가 매우 많앗고 경쟁도 치열했다. 이 마차의 규칙상 자리는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 물려주어도 됐지만, 좌석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 있는 사고도 아주 잦았다. 이 자리는 아주 안락햇지만 매우 불안정하기도 했다. 마차가 갑자기 덜컹댈 때면 자리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곧바로 밧줄을 쥐고 자기들이 이제까지 편안히 탔던 마차를 끄는 일에 동참해야 했다.

ㆍㆍㆍㆍㆍㆍ

승객들은 줄을 끄는 노동자들을 내려다보며 격려하는 말을 외쳤고, 인내심을 가지라고 설교했고, 이들의 힘든 운명이 아마 다른 세상에서 보상받으리라는 희망을 주었으며, 한편으로는 불구가 되거나 다친 사람들에게 줄 고약과 연고를 사는 데 기부했다.(10~11쪽)

 

이 구절을 읽으면서,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분단국가라는 점을 감안할때,

1888년에 쓰여진 책이 왜 우리나라에 이제서야 번역되어 들어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책은 SF소설로 분류되는데,

일반적으로 얘기되는 science fiction이 아니라 ,

최내현의 그것처럼 social fantasy라고 풀이되어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왜냐하면, 2000년에 1887년을 뒤돌아본다는 설정으로 쓰여진 이책은,

2014년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과학적인 것보다는 사회현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소설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주제는 '이상향 추구'내지는 '이상 국가 건설'이라고 해야겠다.

그런데 이 책에서 말하는 '이상향 추구 '내지는 '이상 국가 건설'은 오늘날과 같은 민주주의형태를 띤게 아니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10~11쪽의 마차 애기도 그렇고,

ㆍㆍㆍㆍㆍㆍ노동의 분배가 대단히 급진적으로 개선되지는 않으리라고 확고하게 믿었다.ㆍㆍㆍㆍㆍㆍ안타깝지만 어쩔 도리 없는 일이었고, 당시 철학에 따르면 어쩔 수 없는 일에 동정심을 낭비해서는 안 되었다.ㆍㆍㆍㆍㆍㆍ

자기 같은 사람과 평범한 인간은 본질이 아예 다르다고 아주 확신했다. 이러한 착각 때문에 결국 대다수가 겪는 고통을 함께 느끼는 능력이 약해져 거리감 있고 철학적인 동정이 되었음은 자명하다. 내가 설명하는 이 시기에는 동시대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무관심이 뚜렷했고 나 또한 그런 특징을 보였는데, 이런 무관심은 그나마 이렇게밖에 변할 길이 없다(12쪽)

라는 주인공인 줄리언 웨스트를 통한 언급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데,

이건 어찌보면 오늘날 우리들의 삶과 비슷한 것처럼 보여 씁쓸하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에는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끝이나면 이 책이 이제서야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리가 없었겠지.

2000년에 깨어난 줄리언 웨스트가 리트박사와 대화를 통하여 하나씩 교육을 받고 깨달아 가는 과정이,

'미국식 사회주의'라고 불리우는 '공산주의'의 형태를 띄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차린 식탁에서 밥을 먹을 권리는 그가 인간이라는 데 있으며, 그가 자신의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한 그의 건강이나 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입니다."

"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말했다. "하지만 저는 그 규칙은 능력이 있는 노동자들에게만 적용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그 원칙이 적용된다는 겁니까?"

"그들은 사람 아닌가요?"
"그러면 가장 유능한 사람은 물론이고 불구나 맹인, 병자, 허약자가 모두 수입이 같다는 말씀입니까?"
"물론이죠." 박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런 엄청난 자선이 있다고 하면." 내가 말했다. "제가 살던 시대에는 아무리 열정적인 박애주의자로 놀라 숨이 막혔을 것 같습니다."(120~121쪽)

위의 문단을 보면서 든 생각이, 바로 내가 고민하던 '대증치료'와 '원인치료'의 적절한 안배였다.

일단 증상이 빠른 시일 안에  '속전속결' 해소되지 않으면 환자들은 나았다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양질의 치료를 하고 싶어도 환자를 병원으로 억지로 잡아들일 순없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그들을 향하여,

한번 눈치보고 시간 내서 오기 힘든 그들을 향하여,

기간이 얼마나 소요될지도 모르는 원인 치료만을 고수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들이 겪는 통증의 크기와 강도를,

내가 숨막히고 심장이 타들어가는 듯 아파 보기전까지는,

헤아린다고 하면서도 미루어짐작조차 할 수 없었고,

그랬을 때에나 그런 이들을 향하여 원칙을, '원인치료'의 타당성만을 고집할 수 있었다.

 

내가 아파보고 난 후,

하루하루 몸을 움직여야 벌어먹을 수 있는 노동자들에게,

사용하면 악화되니까 쓰지말라는 말을 더 이상할 수 없었다.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지만 오늘날 우리의 삶이 그리 행복한거 같지 않다.

그렇다고 이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미국식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행복을 가져다 줄 것 같지도 않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사람은 누구나 각자 자신만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그런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고 평등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우리는 헌법에서 정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국가가 차린 식탁에서 밥을 먹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이라고 하여 모든 사람에게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그런 것이 아니고,

자신의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차등이 적용되는 자유와 평등이다.

 

그렇게 봤을때,

우리가 사는 이 나라는 과연 자유민주주의가 맞나?

헌법에만 그렇게 명시되어 있고,

실상은 절대 왕권 국가는 아니었던가? 

 

다시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요즘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행복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스스로 불행하게 사는것 같다'라는 말과 관련하여,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으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사는 건 아니지만,

그런 관계 맺음 속에서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불행을 느끼기도 한다.

 

얼마전에 나의 이런 생각을 두고,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면서...

국가가 어쩌지 못하는 걸, 왜 니가 나서서 그러는데...?

라는 말을 들었었다.

그 뒤에는 아줌의 오지랖이 넓다...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고 배우기 위해서 라고 생각한다.

보고 배우고 느꼈으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우리는 관계 맺음 속에서,

마주하고 부딪치고 어긋나고 그러면서,

몸으로 경험을 한다.

그것만이 진짜고 값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식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는 다르게 자유민주주의는,

다른 사람에게 행복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불행하게 사는것이 됐든 어쨌든, 간에...

정부나 국가나 어떤 힘이 개입하지 않고,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명심하고 명심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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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8-28 11:59   좋아요 0 | URL
몸으로 벌어 먹고 사는것 정말 중요한것같아요 몸의 소중함이 절로 저도 자꾸 목이 삐끗하면서. 머리까지 찌릿찌리싸고겨느랑이 임파선 이 통증이 을때가 있어서 병원에 가봐야겠다 합니다 나무꾼 언니 우리 같이 건강해요

sslmo 2014-08-31 10:33   좋아요 0 | URL
몸의 소중함은 건강의 소중함으로 이어지죠.
여기서 다시 노동의 신성함으로 의미가 확장되는 것 같아요.

가봐야겠다...하지 마시고, 지금 당장 가보세요~ㅅ^^
하늘바람 님이 건강하셔야 가족들도, 가정도 다 건강하답니다~^^
저도 물론이구요, ㅋ~.
 

'조급한 부모가 아이 뇌를 망친다'를 읽고나서 필(feel) 충만하여 '1.4킬로그램의 우주, 뇌'를 집어들었다.

'신경 의학에서 뉴로 마케팅까지 융합 뇌과학의 현장'이라는 겉표지의 소 제목을 본 터라 쉬울거라고 생각은 안했었지만,

첫강의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이 생각지도 못했던 난관에 부딪혔다.

'카이스트 명강'이란 타이틀을 달아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용, 정재승, 김대수 이 세분들은 강의가 깔끔하기로 유명한 분들이다.

이 분들의 강의를 이해 못하면 다른 누가 강의를 해도 마찬가지라는 얘기이다.

 

 

 

 

 



 

 1.4킬로그램의 우주, 뇌
 정재승.정용.김대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4년 7월

   

하물며 소싯적에 해부학이란 걸 들여다본 적이 있는 내가,

다른 것도 아니고 해부학 용어로 등장하는 의학 용어가 중구난방이어서 못 알아먹는다는 것은 창피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난 그동안 한글을 제법 사랑하고 잘 사용한다고 자부했는데도 불구하고 반의 반도 알아먹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시작부터 기가 죽어 책을 덮어버릴 수도 없고, 낭패였다~--;

위 사진 속의 글을 뇌에서 인체 전반으로 의미를 확장시켜 슬쩍 문맥에 맞게 바꿔 본다면,

소싯적에 해부학 책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 내가 이렇게 해부학 용어를 두고 잘 몰라서 한참 들여다 보게 된 까닭이,

많은 사람들이 인체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부학계에서 한글단어를 새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글쎄, 정작 한자어로 해부학을 공부했던 세대들이 혼란스러움을 겪는 한글단어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체에 대한 이해는 차치하고라도,

얼마나 더 쉽게 접근하도록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차라리 그동안 해부학에서 사용되었던 한자어가 대부분 일제의 잔재이고,

그래서 일제 잔재를 한시바삐 청산하기 위하여 한글 이름으로 바꾸는것이라면,

실용성이나 접근성 등의 측면에서 설득력이 없더라도,

우리가 북한처럼 한글을 잘 살려쓰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걸 부끄러워 하며,

한글이 다의어여서 의미전달이 모호하여 불편하더라도,

한글 단어로만 이루어진 해부학 용어 사용에 대한 타당성은 인정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동안 한자어로 쓰여진 해부학적 용어를 사용했던 것은 한글단어가 어떻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글이 다의어여서 여러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경우가 있고,

그런 경우 풀어쓰거나 설명을 하게되면 용어가 한없이 길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더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위해서 한글 단어로 바꾼 것이라면,

설명을 위해 풀어쓰다보니까 길어지는 부분은 간결성이라는 면에서 위배된다.

그렇다면 해부학 용어를 한글단어로 바꿀게 아니라, 한글 사용법을 익히는게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한글은 다의어여서,

글이나 말 만으로는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 될 수 없을 때도 있다고 생각 했었다.

그래서 글에서는 한자어를 병기하는 걸로 설명을 대신 했었고,

그래서 글이나 말 등의 문자 외에도 음의 고조나 장단 ㆍ 음색ㆍ어조나 어투 ㆍ몸짓 ㆍ얼굴 표정이나 분위기 등 의미의 전달을 명확하게 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었다.

 

사람이 삶을 살아간다는건,

살아 움직인다는 건(生),

그래서 바뀐다는 의미이고, 변화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노병사'가 삶의 과정이지만,

병은 그냥 병일 뿐이지만, 의학에서는 이를 더 세분해서 질병, 증후군, 질환, 장애 이렇게 네가지로 구분(90쪽)하는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겠다.

(예를 들어 어떤 병에 증후군이라고 이름이 붙여져 있다는 애기는 원인을 아직 잘 모른다는 뜻이란다~--;)

 

바뀜과 변화는 필요한 걸까?

아니면 늘 한결같아야 할까?

세상엔 변해야 할 것이 있고, 늘 한결 같아야 할 것도 있다.

하지만, 이걸 가르는 데는, 다시말해 구분하는 데는 기준과 방향점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기준과 방향점이 없거나 한쪽으로 치우치면 답보가 되거나 편견 또는 선입견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또는 고집이나 아집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요즘 '신영복'님의 '강의'를 다시 읽고 있는데,

거길 보면 '역易'을 '주역'의 '계사전'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역易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 가 그것입니다. "역이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변화가 궁극에 이른 상태, 즉 양적 변화와 양적 축적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질적 변화는 새로운 지평을 연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통通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열린 상황은 답보하지 않고 부단히 새로워진다(進新)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구久라고 할 수 있습니다.(130쪽)

처음 주역을 읽을때는 역(易), '변화'에 치중을 하였다면,

그다음 읽을때는 구(久), '오래지속된다'에 연연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주역이 64괘의 마지막 괘인 '화수미제'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도돌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삶이 그렇고 자연이 그렇고 인간의 마음 또한 그렇게 바뀌고 변하는게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면 변덕이고 변절인 것처럼 폄하하였다.

 

고인 물은 썪는다고 오래 지속되거나 머무르면 안된다고도 생각했고,

오래 지속되는 것은 한결같음이 아니라, 현실에 안주하고 답보하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발전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현실에 안주하고 답보하는 것은 퇴보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쯤에서,

'바뀜과 변화는 기준과 방향점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말을 다시 한번 강조해야 겠다.

 

성격이 좋게 말하면 까칠하고 나쁘게 말하면 더러워서,

매사에 흑백 논리가 분명하게 살려고 했던 내게,

역(易)과 구(久)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참 많이 돌아왔다.

역(易), '변화'의 속성에서 본다는 것은 순간순간을 치열하고 가열차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구(久), '오래지속된다'라는 것은 '영원한 도돌이'와도 같은 것으로,
바꾸어 말하면 변하지 않는다가 될 수도 있고,

한발 떨어져서, 관조적인 입장에서 바라보면,

변화가 아주 조금씩 천천히 눈곱만큼씩 이루어져서,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이런 것들을,

종교 따위는 없는 내가,

먼 이국 땅의 말도 안통하는 교황의 말한마디에서 깨달았다고 하면 좀 아이러니컬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교황은 세월호 추모 리본을 유족에게서 받아 달았는데,

반나절쯤 지나자 어떤 사람이 와서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고 한다.
그때 교황은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바뀜과 변화는 기준과 방향점을 명확하게 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사람이 삶을 살아간다는건,

살아 움직인다는 건(生),

그래서 바뀐다는 의미이고, 변화한다는 의미이지만,

이 모두가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이고, 인간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이건, 종교고 과학이고 모두에게 통용되는 이치이다.

다시말해, 종교고 과학이고, 정치고 이념이고 간에,

인간을 능가하는 것은...

인간 위에 군림하는 것은... 없다.

 

 

암튼,

새로운 의학 용어를 공부할 생각은 안하고,

窮則變 變則通 通則久해가며 툴툴거리고 구시렁거리며 변명할 생각만 하는 나,

어쩔 것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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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8-20 01:38   좋아요 1 | URL
해부학까지 섭렵하시니넘 우러러볼 뿐이어요

sslmo 2014-08-26 18:25   좋아요 1 | URL
섭렵이 아니라 들여다 봤을 뿐이라는~--;
다치셨다는 무릎은 좀 어떠세요?
빨리 나으시라고 제가 '호오~=3'해 드릴게요~^^
 
조급한 부모가 아이 뇌를 망친다 - 뇌과학이 알려준 아이에 대한 새로운 생각
신성욱 지음 / 어크로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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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아침 할 일 없이 텔레비젼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경남 하동 평사리의 너른 들판을 보게 되었다.

잘 가꾸어진 전통 한옥이 한채 줌 인 되더니,

그 집의 주인과 친구들이라고 하여, 나이 아흔 안팎의 어르신 세 분이 앉아 계셨다.

세분은 한동네에서 나고 자란 친구분들이신데,

오늘날까지 우정을 유지해 오는 비결이 뭐냐고 묻자,

대뜸 하신다는 말씀이 '참는다'였다.

 

근데 그 참는다...라는 말이 울분을 참는다 거나, 눈물을 눌러 삼키는 '억지로'의 그런 느낌이 아니라,

그냥 훨훨 털어버리는 무념무상의 해탈인듯 자연스러웠다.

그동안 참는다는 말은 '참아내다' 따위의 '힘든 과정을 이겨내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나로서는,

'기꺼이 참는다' 느낌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한번 들인 습관과 버릇이 무서우니 습관과 버릇을 잘 들여야 한다는 것일까?

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기의 주장이 강해진다는 걸, 이른바 괴팍해진다는 걸 경험으로 너무 잘 알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나 자신부터가 한살 한살 더 먹는게 무서울 정도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펴야 하는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게 미덕인양,

머리에 넣어둔 그것이 나이가 들수록 무거워지는 것마냥,

고개를 숙이고 자기 자신만 들여다 보는 것일까?

그러다보니 에고(ego)가 생겨나게 되고,

후벼파서 상처만 덧나게 만들고,

상처가 옹이가 되어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더라~--;

 

고개를 숙여 안을 들여다 보진 않더라도, 시야를 넓게 확장시키지 못하면,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처럼 편견과 선입견에 갇혀,

그동안 내가 봐온 세계만이 전부인 줄 아는 우를 범하게 된다.

 

그런데, 세분이 보여주신 '기꺼이 참는다'는 말은,

나 아닌 다른 사람, 개념을 확장시켜 다른 존재, 자연물 전체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되는 셈인데,

이건 내 안과 내 주변, 내가 봐온 세계가 전부라는,

내가 그동안 쌓아올린 단단한 벽을 허물고 고정관념을 탈피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고,

그렇게 봤을때 이건 신선의 경계없음 내지는,

경계가 생기기 이전 어린 아이의 순진무구라는 말로 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 책 '조급한 부모가 아이 뇌를 망친다'는 그러니까,

거칠게 말하자면 그동안 잘못 알려졌던 뇌과학 신화에 반기를 든 책이다.

이른바 '3세 신화'와 '우뇌 신화' 따위의 잘못된 믿음이 '조기교육'으로 이어졌고,

이런 '조기교육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아이 뇌를 망친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현대 뇌과학에 조금만 관심을 갖다보면,

이 스트레스가 인간 아이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있어서 뇌발달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과도한 스트레스가 문제입니다. 아이들이 발달 단계에 맞는 적절한 자극 대신 과도한 자극, 즉 문자 학습 등에 노출되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과다 분비됩니다. 이 코르티솔이 신경세포의 발달을 억제한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아이의 뇌에 스트레스는 천적입니다.("41쪽)

 

어떤 단체에서 건강 실태조사를 해서, 언어발달 지체, 정서발달 지체, 호천적 자폐 성향을 보인 아이들의 문제의 원인으로,

아이들에게 전이되는 부모의 과도한 스트레스와 아이들의 과도한 조기교육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꼽았다.

 

인간의 뇌의 발달 과정을 보게 되면,

파충류의 뇌, 감정의 뇌, 생각의 뇌, 순서로 발달한다.

이중 파충류의 뇌는 아이가 태어날때부터 생명활동을 해야하니 이미 거의 완성 되어 있다고 할 수 있고,

그다음 감정의 뇌, 즉 대뇌변연계를 약 12세까지 집중적으로 발달시킨다.

 

건강한 뇌라는 것은 그러니까, 각 나이단계 별로  파충류의 뇌, 감정의 뇌, 생각의 뇌가 조화를 이루는 뇌이다.

그런데 조기교육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감정의 뇌를 (집중적으로 발달시켜야할 그때) 발달시키지 못하고, 생각의 뇌만 발달시키게 되는 부조화를 초래하게 되는 셈이다.

 

이 말은 바꿔 표현하면,

약 12세가 될때까지는 감정의 뇌를 집중적으로 발달시켜주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아이의 뇌를 제대로 키우고 발달시키는 것이 되는 셈이다.

 

우리는 아이의 뇌를 제대로 키우고 발달시키는 것이 아이의 머리가 좋아지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어떤 것인지,

아이의 머리가 좋아질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불사할 태세이다.

 

태교나 영재교육에 목숨거는 이들에게,

뇌가 원하는 것은 노는것이고,

맘껏 놀때(free play,190쪽) 뇌가 가장 잘 자란다는 말을 들려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린이 놀이 운동가 편해문 선생님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돌려줘야 할 세가지라고 하여 다음의 것들을 꼽는다.

마음껏 놀 수 있는 안전한 장소, 마음껏 놀 수 있는 시간, 함께 놀 수 있는 친구(191쪽)

여기에 더하여, 미국 국립정신보건원의 제이 기드 박사를 비롯한 뇌과학자, 뇌연구자들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어라, 아이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라.'(170쪽)같은 우리 할머니들이 들려주셨던 것과 같은 조언을 한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하고 싶었던 것은,

아이의 뇌가 침팬지의 뇌와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것이었다.

아이의 뇌와 침팬지의 뇌에는 모두 언어를 담당한다고 여겨지는 특별한 신경회로가 있단다.

그런데 침팬지는 몇개의 단어를 이어붙일뿐이지만,

인간 아이는 단어와 문장, 무엇보다도 마음이 담긴 인간의 언어를 말한단다.

그러면서 저자의 시선은, 이런 반성과 통찰로 이어진다.

지금 우리는 아이에게 인간의 언어를 가르치고 있는지 반성해봐야 한다. 인간의 언어를 깃들게 하는 인간만의 풍부한 언어적 풍경이 과연 아이에게 주어지고 있는가.(215쪽)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있으니까 나 아닌 다른 사람, 개념을 확장시켜 다른 존재, 자연물 전체에도,

나처럼 마음이 있다는 것을 대입시킬 수 있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나 아닌 다른 사람, 개념을 확장시켜 다른 존재, 자연물 전체에 대한 통찰과 이해와 배려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대화에서 말이 차지하는 부분이 15~20%이고 나머지는 태도와 표정이라는 것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개념을 내 삶에 치환시켜보자면,

스트레스는

인간 아이 뿐만 아니라 인간 어른인 나에게 있어서 뇌발달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소였다.

 

현대인의 병은 진단을 내리기도 쉽지 않지만,

증상을 봤을 때도 주변 사람이 봤을때는 대단해 보이지 않고,

본인 스스로도 죽을 만큼 아프다던가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어느날 갑자기 블랙아웃되어 쓰러져 보기전까지는 상황의 심각성을 모른다.

그런데 해주는 처방이라고 해주는 것이 어찌보면 장님 뜬구름 잡는 격인 스트레스받지 않기, 마음 편히 먹기, 규칙적인 생활하기, 운동내지는 산책하기, 햇볕쬐기, 이런 변변치 않은 것들이다 보니까...설렁거리며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린다.

 

그러다가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려고 하고, 아침 저녁 출퇴근길에 잠깐 햇볕을 쪼여 주고 바람을 맞아주고, 살짝 다리를 움직여 걸어주고, 스트레스를 덜받고 웃으려 노력하고, 하는 마음만으로도...편안해지는 걸 경험하게 되고는 참 놀라워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일상에서 지키기가 어려운 게 아니고, 지속시키기가 어렵다.

그러니 방법은 계획을 너무 거창하게 잡지 않고 볼 일이었다.

 

다시말해, 인간아이이고 인간 어른이고 간에,

스트레스를 안 받는 유일한 방법은...'맘껏 놀기'인 셈인데,

이말은 바꾸어 말하면, '기꺼이'이고, '제 멋에 겨운' 것이 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공부가 경험이 되어 일상 생활에 녹아 들어 즐기면 될 것이고,

어른들은 즐기며 일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 먹기에 따라 천국도 되고 지옥도 된다고 하지 않던가?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겠고,

난 일이 놀이가 될 수 방법은 '마음에 맞는 사람'이더라.

 

최민식이 이순신으로 분한 영화 '명량'에선 이걸,

소박한 흰죽을 앞에 두고, 또는 토란 한알을 손에 쥐고선,

'함께 할 수 있어 참 좋구나' 라고 얘기하더라.

 

세상에는 말이 되지 못한 말도 많고,

말 같지 않은 말도 많다.

하지 않느니만 못한 말도 있고,

아니 들은만 못한 말도 있다.

 

마음에 담아두고 겉으로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더라도,

그게 뜻이 있고 염원이 담겨있다면 하늘을 움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아~,

이쯤 얘기했으면 알아들었겠지...

놀면서 쉬엄 쉬엄 합시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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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 - 스물넷에 장애인이 된 한 남자와 그가 사랑한 노들야학의 뜨거운 희망 메시지
박경석 지음 / 책으로여는세상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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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때 제일 이해하기 힘든 말이 '잡은 고기를 주지 말고 고기잡는 법을 알려주라'는 말이었다.

잡은 고기를 깔끔하게 손질까지 해서 주면 그보다 더 좋을게 없을것 같은데,

왜 구태여 고기잡는 법을 알려주느라 자신의 고기잡는 비법을 전수한답시고,

자기 자신과 상대방, 이중으로 시간과 노동력을 낭비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우리동네에는 새벽이면 신문을 배달하는 나이든 형아가 한명 있었다.

다들 날라 다니는 시간에,

이 형아만은 급할 것도 바쁠 것도 없다는 듯이 자기만의 느긋한 걸음걸이를 고수하였는데,

그게 깔끔한 외모, 단정한 옷차림과 더불어 이 형아를 새벽 골목에서 두드러지게 하였었다.

 

그런데 어느날 가만히 보니,

이 형아를 꼭 닮은 아저씨가 먼발치에서 시선으로 쫓고 있었는데,

그게 마치 오라(aura)를 형성한 것처럼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걸 발견하고는 난 가족들한테,

저건 아동학대가 아니라 청소년 학대라고...

저 오빠는 공부하라고 놔두고,

그 뒤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저 아저씨가 감독도 하고 배달도 하면 되겠다고 열을 올렸더니,

그때 가족들이 내게 했던 대답이,

잡은 고기를 주지 않고 고기잡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였다.

 

그때는 알 수 없었던 말의 뜻을 이제는 알겠는데,

그동안 잊고 지냈던 이 형아를 작년쯤 내가 사는 동네의 지하철역 입구에서 발견하였다.

아저씨가 된 형아는 여전히 외모도 깔끔했고 옷차림도 단정했는데,

하는 일만 신문배달에서 지하철역 입구에 철퍼덕 주저앉은 구걸로 바뀌어 있었다.

 

이 형아를 그림자처럼 따르던 아저씨는 아버지였는데 돌아가시고,

지적장애가 있는 이 형아 혼자 남게 된 것까지는 이 형 아버지의 예측대로였는데,

문제는 동네가 재개발되고 똑같이 성냥갑 모양으로 생긴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리라는 것을,

그리하여 간단한 글자나 숫자를 보고 구별해야 하는 날이 오리라는 것까지는 예측을 못하셨나 보다.

설상가상으로 인터넷이 발달되어 종이 신문을 보는 수요가 줄어들면서,

스피드와 정확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배달원이 필요하게 되었고,

걸어다녀 스피드도 떨어지는 데다가,

아파트의 동ㆍ호수도 읽을 줄 모르는 신문배달원은 경쟁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장애, 장애인이라고 하면 가장 쉽게 피부에 와닿는 말이 통신장애가 아닐까 싶다.

남녀노소 거의 모두가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는 요즘,

자신의 핸드폰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핸드폰이 잠시만 먹통이어서 연락이 안되게 되면,

불편을 느끼고 불안해 하는 이른바 스마트폰 중독자들이 많다.

 

장애(障碍, disability)라는 말을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찾아 보니,

'신체 기관이 본래의 제 기능을 하지 못 하거나 정신 능력에 결함이 있는 상태' 라고 나오고,

네이버 지식백과사전의 특수교육학 용어사전에서 다시 한번 찾아봤더니,

'질병이나 사고 등에 의해 지적, 정신적, 청각, 시각, 내장, 골격, 기형적인 면에 결함(impairment)이 생겨, 이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이 곤란하거나 불가능한 상태이다.
결함은 신체의 특정 부위나 기관의 기능이 손실되었거나 감소한 것을 의미하므로 의료적 지원이 필요하며, 장애는 손상으로 인해 특정 영역(읽기, 보기, 걷기, 듣기 등)에 능력 저하가 생기는 경우 교육ㆍ훈련적 지원이 필요하다'
라고 되어 있었다.

 

어쩜,

장애나 장애인들을 이런 통신장애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장애인들에게는 기가 찰 노릇이겠지만,

사람이란 몸소 경험하고 체험해 본 것에 대해서만 친밀감을 느끼고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거리감을 좁히려다 보니, 비교가 다소 억지스러울 수도 있겠다.

 

정작 장애인들은 이런 스마트폰은 고사하고,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 받지 못할 정도의 사람들도 있다고 하니,

장애인들의 현실을 무시한 비교인 것도 사실이니까 말이다.

 

나의 이런 노력을 어여삐 여겨주지 않고,

나는 스마트폰 등 '통신장비 의존도가 낮다'고 하면서 심드렁해져 버리면 할 말이 없는 것이고,

 

'뭐라는 거냐, 우리가 보는 장애인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느냐?'라는 정도로라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면,

더 심한 장애인, 소위 중증 장애인으로 분류되는 이들은 우리의 눈에 띄게 출몰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로 설명을 시작하고 싶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느낀 문제점이기도 한데, '장애인의 이동권'과 직결되어 있다.

이들의 대다수가 이른바 '방구석' 밖으로 자의로 나올 수 없는 이들이다.

자의적으로 나올 수 없으니,

교육의 기회를 가질 수 없고,

교육을 받을 수 없으니 직업을 갖기 위해 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난 그동안 저상버스를 가끔 편하게 이용하면서도, 장애인의 이동권이라는 측면에서 접근을 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지하철역에 리프트가 아닌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야 하는 타당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리프트가 되었을 경우, 한번에 한대의 휠체어밖에 못 움직이고,

여러명이 같이 움직여야 할 경우에는, 그만큼의 시간이 추가되는 것이다.

거기다가 휠체어는 타지 않았지만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노약자가 있을 수도 있다.

 

내가 더 충격을 받은 것은 이 책의 말미에 나와있는,

'밥 먹었니?'또는 '식사하셨어요?'라는 인사말과 관련해서였다. 

삶을 산다는 것은 거칠게 말하면 밥을 먹는다는 것인데,

자기 혼자서 밥을 먹을 수 없는 장애인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도움 받을 누군가를 구하지 못하면 배가 고파도 밥을 먹을 수 없는 것이고,

그러다보면 야학의 처지가 나은 선생님들이나 봉사 요원들은 한번 밥 먹이는데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장애인들의 식사수발을 들다보면 정작 자신의 밥때를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야학의 선생님이나 봉사요원 정도 되는 것 같은데,

한번도 사람이 보이는 곳에서 밥을 먹지 못하고 건너뛰거나 숨어서 몰래 먹고하다가 생으로 병을 얻게 되기도 하고 그랬나 보다.

장애인이 사회에서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누군가가 베풀어주는 시혜나 동정이 아니라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라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고 소외되지 않는 사회적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계획하고 사회자원의 분배와 집행을 구체적으로 행사해야 할 책임은 정부에 있다.(124쪽)

 

장애인도 사람이고, 의식주는 사람이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권리이다. 

기본권을 누려야 하는게 사람들의 권리라면,

기본권을 행사하는 주체는 국가이다.

 

기본권을 행사하는 주체가 '국가'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

엄격하게 말하면,

배고픈 사람들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어떤 조취를 취하지 않고 손 놓고 앉아 있는다는 것은,

살인까지는 아니어도 살인방조죄 정도는 적용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얼마전에 읽은 '미 비포 유'도 그렇고 '심장박동을 듣는 기술'도 그렇고,

소설 속의 그것이라고 밖에 얘기할 수 없고,

그런 의미에서 소설 속의 무대가 우리나라가 아닌 것이 완전 슬플 수밖에 없다.

 

좀 과한 비약이고 설정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우리 모두는 잠재적인 장애인들이라고 생각한다.

 

선천적인 장애를 갖고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불의의 사고를 만날지 알 수가 없다.

정신적 또는 육체적으로 제 기능을 못하면 '장애'라고 보아야 한다는 사전적 정의에 따른다면,

우리가 성인이라는 전제 하에(어린이의 시절을 건너왔으니 '장애아'는 아니지만),
어린이의 그것을 장애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제 기능을 스스로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제 기능을 하는 어른이나 부모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자라면서 또래에 걸맞는 정신적 육체적 기능을 하나 하나 배우고 익혀가면서,

어른이나 부모의 보살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또 장애인이라고 부르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이제 정신적ㆍ육체적으로 늙고 병들어 제 기능을 못하는 상태에 이를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세상에 태어난 이상, 한번은 늙고 병들고 죽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나 잠재적인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나의 이말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천년만년 젊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을 하는 사람이거나,

또는 복제양 돌리나 줄기세포 따위 첨단 의학의 힘을 빌리겠다는 사람들 일텐데,

복제양 돌리의 사망 이유는 '조로'였다는 걸 아시는지, ㅋ~.

 

심신이 손실되거나 감소하는 결함일때는 의료적 지원을 해주면 되지만,

장애는 손상으로 인한 능력저하가 생기는 것이므로 의료적 지원에 더하여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아직 노인들을 향하여 제대로된 의료적 지원을 해주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의료민영화를 얘기하고 있는 실정이니,

그들보다 수적으로든 처우로든 헐씬 열세에 있는 장애인들의 당연한 권리인 의료, 교육, 훈련에 관한 지원에 관해서는 말해 무엇하겠나?

 
앞에서 통신 장애를 예로 들었지만,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서 살아가는 세상에서,

다른 것이 장애가 아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과 공감이 단절되면 그것이 장애이다.

그런 의미에서 발달장애, 공황장애, 뇌병변 장애, 성기능 장애 등등...'장애'란 말이 접미사로 붙은 수많은 단어들을 보면,

적어도 소통과 공감을 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의 정의는 바뀌어야 할텐데,

다른 게 장애가 아니라,

공감과 의사 소통에 문제가 있으면 '장애'로 봐주어야 한다는게 나의 견해이다, ㅋ~.

 

그래서인지, 노들야학의 교장이시며, 이 책의 저자이신 박경석 님께서는...

다른 어떤 이론을 차치해두고, '함께하자'라는 실천적 구호를 함께 하고 계시다. 

그러면서, '함께한다는 것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하며,

노들에 오는 교사들에게  멕시코 사파티스타 원주민 여성의 말을 들려 주고 싶아 하신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97쪽)

 

다시말해, 장애, 장애인, 이딴 것을 책으로만 읽고 앉아 있을 수 없는 이유는,

이것들이 고착되어 있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런의미에서 난 다른걸 장애라고 하고 싶지 않고,

소통과 공감이 부재되었다면 모두 다 장애라고 하고 싶다.

자신의 삶만 쳐다보며 사는 세상의 속도는 너무 빠르지만 함께 살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포개려는 그 속도는 점점 느려져 간다. 이 땅의 사회적 약자들의 죽음 앞에서 제발 발길 멈춰주길 바란다.

그 발길 멈추고 내 삶만이 아닌 세상을 함께 바라볼 때, 함께 살 수 있는 그 방법의 첫 시작이 되지 않을까?

아직 보이지 않았던 당신, 살아남아 주길 ㆍㆍㆍ(276쪽)

 

같은 얘기의 반복이지만,

상처받기 두려워서라는 이유만으로 벽이나 담을 높게 쌓아 소통을 거부하고 틀 안에 머무리려 하는 자가 있다면,

그건 잠재적 장애인이 아니라, 자의적 장애인이 되는 것이니 명심하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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