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 개정판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난 정말 책이 좋다.

문자 중독, 활자 중독이라고 할 정도로 글로 쓰여진 형태를 취했으면 모든걸 다 주워 읽지만,

그런 나도 읽다가 내팽개치는 것들이 있는데,

학창시절 고전이라 불리우는 문고판 책들이 그랬었다.

 

도대체 뭐라고 하는건지 알 수 없었는데,

난 그걸 너무 어려서 글쓴이들의 정신세계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라거나,

정서적,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위로했었던것 같다.

 

그런 내가 또 한번 좌절을 겪었었던건, 장르소설 번역가로 알려진 K씨의 작품들을 접하면서였다.

내가 장르소설을 접했을때는 문고판 고전보다는 좀 커서였다.

그가 번역한 장르문학을 읽으며 나이먹어갔다고 할 정도로,

그가 장르문학 발전에 이바지한 공은 충분히 인정을 하지만,

그의 날림번역은 세월이 흘러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지만,

작품에서 날림을 잡아내는 내 눈은 점점 세심해져 갔다.

답답할 때도 있었고 속이 상할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나를 흥분시킨건

그런 그가 깨어있는 척하고 학술지등에 의견을 제시하는 등 활발하게 말만 할뿐,

십여 년동안 번역본을 손보고 탈고하는 과정을 통해서 행동으로 실천하는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없어서라면 새로운 번역물도 뜸해야 할텐데,

새로운 번역물은 꾸준히 쏟아내고 있어서,

급기야 그같은 급조된 날림 번역본을 읽을바엔,

'차라리 내가 장르소설 번역을 해보는게 어떨까?' 하는 마리앙토와네트 같은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다~--;

 

요번에도 그와 비슷한 경우이다.

사람이니까...번역의 오류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오역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번역자가 중간에 자신의 감정을 개입시키는 순간 탄생하는 작품은 더 이상 원작은 아니다.

1987년에 나온 작품을 25년 사이 세번이나 새로 번역하여 바로 잡았다고 김화영은 말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말이다, 이정서의 이 책을 끝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말이다.

김화영이 25년동안 작품을 번역하는 능력, 문학 작품을 해석하는 능력이 전혀 원숙하지 않았거나,

본인은 새로 번역하여 바로 잡았다는 그것이,

행동으로까지 이어지지 않고 머릿속으로만 이루어진 일이 아닌가 의문이 생길 것이고,

그러다 보면,

이정서가 그냥 명성과 권위에 대항하기 위하여, 또는 한 개인의 치부를 드러내기 위하여...

이런 작업을 감내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누군가는 세번을 읽어야 한다던 그렇게 어렵다던 까뮈가,

이렇게 쉬이 읽히다니...

어찌된건가 싶다가는,

무릇 노벨 문학상을 받은 대작이란 것들이,

그렇게 어렵고 난해한 작품이었던 적은 없지 싶었다.

보통의 사람들이,

보통으로 공감을 할 수 있는게,

그게 보통의 문학이 아닐까?

명성과 권위가 있는 몇몇 사람들만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어려운 소설이었다면,

전세계 널리 읽히지도 않았을 것이고, 노벨 문학상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요즘 알라딘 서재, 이동네에서 이 책을 놓고 좀 시끄러웠었다.

누군가는 노이즈마케팅이라고 뭐라고 뭐라고 하던데...

난 어찌되었든 '땡큐'다.

이렇게 시끄럽지 않았다면 난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 책을 읽지 못했을 것이고,

햇살 때문에 살해를 한줄 알았던 정신이상자 뫼르소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으로 재탄생시켜준,

아니 바로잡아준,

이정서에게 땡큐를 날리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정서의 노고를 칭찬하고 싶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좀 팔려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노이즈 마케팅이든 무엇이든,

충분히 감내할 의사가 있다,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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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4-04-15 16:18   좋아요 0 | URL
그런 의미에서, ThanksTo~ 양철나무꾼님^^

jlovek 2014-04-15 19:24   좋아요 0 | URL
김화영 교수의 불성실은 첫 페이지에서부터 나타납니다.

"그가 나에게 조의를 표해 주는 쪽이 오히려 마땅할 일이었다."(민음사판)

일단 우리말 문장이 안 됩니다. .... 쪽이 .... 일이었다? 주술이 호응하지 않은 비문입니다.
세 번이나 고쳤다는데 어찌 이런 일이?

이 구절의 이정서 번역은 이렇습니다.

"오히려 그가 내게 조의를 표해야 할 일이었다."(새움판)

그래서 저도 이정서 역자의 편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2014-04-16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창비시선 372
황학주 지음 / 창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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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바람결에라도 황학주라는 이름을 접한 적이 없었던 나는,

이 시집 제목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보고 레마르크를 떠올렸다.

레마르크의 소설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읽다보면,

'죽음의 현장은 도시에서 가장 생기있는 장소였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때는 전쟁통이었으니 그럴듯 하다 싶었지만,

왠지 이 시집의 제목을 접하고 시인과 일면식도 없는 난,

'극과 극은 통한다'는 엉뚱한 말이 하고 싶었으며,

그러고 보니, 시에서 언뜻 이영광 풍의 그것도 비친다.

아무래도 황학주가 시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이영광보다는 연장일테고,

그런 그를 향하여 '이영광이 비친다'는 말을 하는게 조심스럽지만,

난 이영광을 먼저 알게 됐을 뿐이고,

여지껏 이영광보다 삶과 죽음에 관해 치열하게 시를 쓴 사람을 보지못한 터라,

이말은 곧 삶과 죽음을 가열차게, 제대로 그려냈다는 얘기이기도 한데,

'가열찬'이란 말이 '한껏 힘을 뺀'이란 말로도 대치될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이영광의 그것이 죽음쪽으로 약간 치우쳤다면,

황학주의 그것은 오히려 삶쪽으로 치우친 것이,

인생은 살만한 것이다...라고 읊조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나는 겨울을 춥게 배우지 못하고

겨울이 모일 때까지 기다리지도 못했지만

 

누가 있다 방금 자리를 뜨자마자

누가 있다 깍지 속에서 풀려나와 눈보라 들판 속으로 들어가는

 

사랑이란

매번 고드름이 달리려는 순간이나 녹으려는 순간을 훔치던 마음이었다

또한 당신의 눈부처와 마주 보고 달려 있었다

 

이제 들음들음 나도 갈 테고

언젠가 빈집에선

일생 녹은 자국이 남긴 빛들만

열리고 닫힐 것이다

 

그때에도 겨울은 더 있어서

누가 또 팽팽하게 매달려 올 것이다

자유를 춥게 배우며

그 몸 얼음 난간이 되어

 

이 시를 참 아프게 읽었다.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상대를 특별하게 여기는 감정이지만,

상대의 눈 속에서 나를 바라보게 되길 바라는 감정이지만,

그 감정이 무게로 얹히거나,

눈물로 매달리기는 원치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그 상대를,

상대방도 같이 나를 귀히 여겨주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지만,

그건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껴가거나 번지수를 잘못찾은 어긋나거나 엇갈린 감정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사랑을 갈구하거나 구속하는 순간,

상대의 감정이 나와 같지 않을때,

그건 상대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감정은 내 안에서 충만하여 넘치거나,

결핍으로 눈물을 흘릴지라도 나에 관한 문제이며,

감정의 주체는 나여야 한다.

 

고드름은 녹아 없어지지 않는 이상,

제 스스로의 무게를 견딜 수 없으면 떨어져 나간다.

그게 고드름의 죽음이다.

 

고드름처럼 매달려오는 사랑이 있다면,

받아들일 것인가, 내칠 것인가?

그로 인하여 아름다운 구속을 경험할 것인가, 허허로운 자유를 누릴 것인가?

매번 고민하게 만드는 우리네 인생사를 닮았다.

 

 

어둑해져 도착한 마음은 붓끝을 꿈결에 두었다

감은사지의 뼈를 묻었는지

낮의 문장과 밤의 문장 사이 오래된 초승달이 떴다

 

가끔은 서로의 문장들 팍삭 깨지기도 하는

동탑과 서탑

심장을 싸맨 채 우는 날도 있겠으나

견딜 의사가 있는 자세로

돌 안에 타인의 악기를 둔 마음으로

 

저마다 감은사를 가진

세상에 나간 적 없는 바깥을 아득한 거리로 펼친

동탑과 서탑을 실로 묶으며 나는 돌았다

 

두개의 탑 사이엔 여전히

한번도 가진적 없는 문장이 놓여 있었다

행간, 이라는 말의 팽팽한 적요

문장 이전의 문밖으로

맨발을 조금 보여줄 뿐인

아~,

'행간, 이라는 말의 팽팽한 적요'라는 시구절은,

채워가질 수 없는 충만한 결여를 느끼게 한다.

 

이 아련함과 아스라함 속에서,

극과 극은 통한다는 자명한 이치를 깨우쳐갈 무렵,

'시인의 말'을 통하여, 이번 시집의 마침표를 찍는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쓸 수 없었을 것이고, 몹시 쓰고 싶지 않았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것이다. 얼마나 왔으며 얼마나 더 갈 수 있을까. 아무 그림도 그려지지 않는데, 눈밭을 걷는 당신들이 보인다.

 

비어있다는 것은 채워가질 수 있다는 거다.

그가 어떤 그림을 그림을 그려낼지,

그가 눈밭을 걷는 당신들의 자취를 좇듯,

나보다 한참 연상인 사람에게 이런 말은 안 어울릴지 모르지만,

암튼...그가 어떤 그림을 그려낼지 지켜보겠다.

부디,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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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그런 일이 거의 없어졌지만, 이곳 서재에서 처음 활동을 할때는 새벽 무렵에 깨어있을 때가 많았다.

아니, 새벽 무렵에 깨어있다 보니, 이곳 서재를 어슬렁거렸다가 인과 관계에 맞는 표현이겠다.

근데, 내가 새벽 무렵에 깨어있는 것은,

잠 없는 할머니의 불면증이랑은 좀 다른 그런것이었는데...

낮동안 육체노동에 가까울 정도로 몸을 혹사시키는 나로써는,

몸은 힘든데 정신은 말똥말똥 말똥을 굴리는 요사스런 것이었다.

 

다시말해, 몸의 상태로는 언제 어디서고 눈만 붙이면 쪽잠을 잘 수 있을 정도였지만,

정신상태로는 늘 깨어있으려고,

아니 늘 'Yes, I can.'의 상태로 스탠바이하고 있으려고 했다고 해야 할까?

그러다보니, 육체와 정신 사이에 괴리가 생겼고,

가끔 눈에 헛것이 보였으며, 급기야 헛소리도 하기에 이르러,

이러다가 임성한 작가의 '왕꽃선녀님'을 영접해야 하는게 아닌가 싶었었다.

 

그렇게 된 근원을 나름 분석해 보자면, 어린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어린시절 부모가 아닌, 조부모와 고모들 밑에서 자랐고,

당신들에게 아무리 귀하게 대접받으며 컸다고 하더라도,

그게 내 무의식 속에는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로 각인되었으며,

아빠의 나를 향한 그것은 애정이라고 하기엔 감당하기에 버거웠다.

 

모든 것에서 평범함 - 그 이상이 아니었던 내가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다시말해 그들에게마저 버림받지 않기 위해 할 수 있었던 일은,

무엇이든,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하고 나서는 것이었고,

그러다보니, 모든 일에 오지랖을 떨며 열심히 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몸은 힘든데 정신은 말똥을 굴리는 각성 상태로까지 이어지는 나날이었다.

 

간혹, 내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겠는 아픔이나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었지만,

난 그들을 비겁하게 비껴갔다.

내 자신이 아직 그 담굼질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한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나와 닮아도 너무 닮은 그 친구를 향하여 서슴없이,

영혼의 찜찌름한 냄새까지도 닮았다고 할 수 있겠고,

그 친구를 거울 삼아 날 비추어 보게 되었다.

 

묘하게도 그 친구의 상처에서 내가 본 것은,

상대방의 상처의 깊이가 아니라, 내 자신의 상처의 깊이였다.

내 자신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손수 닦아낸 후에야,

옹이가 훈장처럼 담담 또는 단단해질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얼마전 지인 하나가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나열하면서 내게도 장점과 단점을 얘기해보라는데 딱히 생각나는게 없는거다.

예전 같았으면 '다 잘해요'라든지 의욕이 앞서서 '뭐든지 잘할 수 있어요'라고 했을텐데,

이제는 장점이 하나도 없고 단점으로만 똘똘 뭉쳤어도,

그게 난데 어쩔 것인가, 내지는 나름 찌질한 단점이 매력이라고며 쿨하게 넘어갈 수 있겠다, ㅋ~.

 

암튼, 김형경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영 세 부터 삼 세까지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그 시기에 엄마가 기르지 않은 아이는 정신병자가 될 확률이 높고 강아지도 새끼 때 어미 품에서 떼어 놓으면 사망률이 구십 퍼센트나 되죠"

라는 말에 긍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 말의 조건에 꼭 부합하는 나는, 그동안 살면서 쉽게 맘을 툭 터놓고 무장 해제를 하지 못했었다.

 

실은 이 책을 몇 년 전에도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나이가 어려서 이 책 속의 사람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없고,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 책의 세진의 얘기는 또 다른 나의 얘기라고 할 정도로 나의 상처를 후벼팠고,

그리하여 감당할 수 없을만큼 아파서 잔뜩 움추러 들었던 것이었다.

"그 슬픈 얘기를 하면서 왜 웃어요?"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지며 가슴 밑바닥으로 슥 칼날 같은 것이 밀려들었다. 그것은 오래된 방식이았다. 나 자신이나 가족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나는 늘 웃으면서 되도록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스스로의 감정에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지적받기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발뒤꿈치를 땅에 붙이고 뻗대는 마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 다 지난 이야기를 하면서 아제 와 새삼스럽게 올어요? 이 나이에?"

"어리광을 부려본 적 없어요?"

"없어요."

"한번도?"

"네. 기억하는 한에서는 전혀."

"슬픈 애기를 할 때는 슬퍼해야 하잖아요."

"남 앞에서 울어본 적 없어요. 선생님은 남이잖아요."(1권, 79쪽)

 

나또한 '수도꼭지'나 '집을 팔아 벌금을 내야 하는 여자'라고 하여 '집.파.녀'라고 불리울 정도로 눈물이 헤프지만,

텔레비젼이나 책 속의 일이었지, 내 자신의 일로는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얼마전 이곳에서 알게된 친구 하나가 '애착의 변화'라는 설문을 의뢰해 왔다.

다른 많은 불특정 다수에게 부탁할 수 있는 '질문이 다소 길고 민감'한 것일 수는 있지만,

나의 이런 과거사와 가족사를 잘은 몰라도 대충이라도 알고 있는 상황이라면,

아무리 케이스스터디가 좋아도 쉽게 설문조사를 의뢰할 수 있는 그런 간단한 사안은 아니었을게다.

 

어떤 종류의 귀뜸도 없이 무방비로 노출되었다가 설문의 문항들을 보고,

'헉~'한동안 숨쉬기가 힘들었다.

내용이 다소 민감한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고,

이미 상처 입은 사람들이라면,

그 상처를 벌리고 헤집고 들쑤셔 놓는 꼴이었다.

 

상처를 일단 벌리고 헤집고 들쑤셔 놓아야, 치유책도 생긴다는 자명한 이치가 요번에도 몹시 아팠다.

난 직업적 소명도 내세우고,

병을 오래 앓아왔던 만큼 병의 내구력도 내세워 보고,

그동안 꾸준히 상처의 치유를 위해서 노력을 했던 만큼,

이내...상처의 치유와 봉합을 위해 이 책을 다시 펼쳐 보았고,

요번에는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이책에서 세진이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으로 나 또한 치유하고 치유받고자 하였다.

"ㆍㆍㆍㆍㆍㆍ스콧 펙의 <거짓의 사람들>이라는 책을 찾아봤어요. 혼자 나를 분석할 때는 그 사람 책이 많이 도움이 됐는데 그가 가장 최근에 낸 그 책은 귀신들림에 대해 다루고 있어요."

  저자는 자신이 지금까지 이룬 학문적 성과가 단숨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만한 절박함으로 그 문제를 연구하고 발표하게 되었다고 서문에 밝히고 있었다. 객관적 실체로서 사탄이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목사가 집전하는 엑소시즘 현장을 참관하고, 귀신들림의 원인과 증상, 해결책 등을 세밀하게 기록했다.

  "그 삶도 결국 그 길로 가는군요."

  "융이 말년에 그쪽으로 갔죠? 어쨌든, 그 책에서 다시 확인한  내용은 사탄이라는 존재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우연히 들어가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오랫동안 외로웠던 사람들, 지금도 외로운 사람들에게 깃들인다는 거죠."

  "나는 그 외로움에 한가지 더 첨가하고 싶어요. 적개심. 적개심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죠. 공격성이나 방어 의식."(1권, 196쪽)

 

그런데 말이다.

이 책의 세진이 나였다면,

이 책의 세진이 치유받은 그 방식으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나아졌다면,

그러기만 했다면, 그게 끝이었다면, 난 이 페이퍼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던 거야. 심리적인 공백감, 애정에 대한 허기, 보호받고 보살핌받고 싶다는 소망 같은 거. 물건을 사면서 나는 애정의 대용품을 구하고 있었던 거지. 내가 사는 물건을 내 존재와 등가품으로 여기기도 했을거야. 그랬으니까 동종 품목 중에서는 되도록 고가의 물건을 집어들곤 했겠지."(1권, 255쪽)

 

  "그런 이들은 대체로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야. 강한 의지로 목표를 향해 매진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지금도 성실하게 일상을 영위하고 있어. 이런 이들이 이성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구멍들을 하니씩 가지고 있는 거야. 이멜다의 구두나 재클린의 소핑 벽도 그런 예야. 목표 지향적으로, 이성적으로 사느라고 억압해둔 감정과 무의식 영역의 욕망들이 그런 식으로 이성에게 복수하는 거래."(1권, 267쪽)

왜냐하면,

어려운 심리학 용어로 도배를 하지 않더라도,

세상에는 순 외로운 사람들 천지이고,

그리고 그들은 대체로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얼마든지 사랑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고,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될 수 있는 사랑스러운 사람들인데,

실패하고 마음 아파하니까 말이다.

 

나는 한번도 연인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2권, 52쪽)

나도 남편이랑 6년을 연애하다, 결혼한지 올해로 19년인가 보다.

그런데 아무리 분위기 조성되고, 감성 충만하여도...사랑한다는 말을 해본적이 없었다.

남편이 하는 '사랑해'라는 말에 '동감이야'라든지 '나두'라고 소극적인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가까운 사이에서도 거절당할까봐 두려웠다.

 

이 외로운 세상을 외롭지 않게 사는 방법은 어쩜 아주 간단한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선택하는데는 특별한 기준이 필요할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을 선택하는데는 특별한 기준 따위는 필요없다.

내가 의미를 부여하고 흠뻑 담금질하고, 내가 주도적이고 주체적으로 사랑을 하면 되는 것이다.

예전에 후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언니, 밥 사줅게 나와 하면 거절하는데, 언니 밥 사줘 하면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온다고. 그러니까 저 사람을 불러내려면 무엇인가를 해달라고 해야 한다고. 그때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 넘겼던 말이 뒤늦게 목에 걸렸다.(2권, 175쪽)

다시말해,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

사랑을 하는 것도 나이고,

사랑을 하지 않는 것도 나 자신이 주체가 되는 것이다.

물건을 취하거나 버리는 것도 나의 자유 의지이다.

하지만,

물건과 달리 사람은 감정을 가진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취하거나 버리는 것은 나의 자유 의지이지만,

거기에는 꼭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

 

김형경의 이 책까지는 재밌게 읽었다.

근데, 근간 '남자를 위하여'는 모든 걸 다 안다...가 지나쳐 거의 우상화, 신격화 수준이다.

내가 원하는 건...

힘들때,

등짝 한번 툭~하고 두들겨 주고...

같이 술잔을 부딪히며

아무말없이 술병을 기울여주는 사람이지,

모든 걸 다 알아주는 신이 아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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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4-04-02 06:56   좋아요 1 | URL
상처를 들춰내고 들쑤시고 헤집어내야 그걸 치유할 수 있다는 말에 공감요. 자꾸 감추려고 할수록 상처는 더 깊어지는 것 같아요.
저도 수도꼭지에요ㅜㅜ
그리고 그 설문ㅜㅜ 저도 참 힘들게 답했어요. 그게 참 그렇더라구요.
사랑을 선택하는~ 이 책 오래전에 읽으며 많은 공감했던 기억이나요. 다시 꺼내 읽어봐야겠어요.
오늘 하루 좋은 일 행복한 일 많은 하루되시길~~

하늘바람 2014-04-02 13:18   좋아요 0 | URL
저도 그냥 가슴아픈기억이 살아나더라고요 근데 아닌척하며 해버렸다는
 

남들이 다 좋다는 책이 내게는 별로인 경우가 종종 있는데, 

안봐도 불을 보듯 명약관화한 경우가 일본 소설이다.

일본 소설이라면 정서가 우리와 비슷해서, 보통 쉽게들 감정이입을 하곤 하나본데,

난 어쩐 일에선지 영 불편하고 마뜩잖다.

 

 

 

 

 

 

 

 

그렇다고 일본 작가라고 하여 마냥 간과할 수만은 없는게,

내가 엄청 감동 받았던 '신들의 봉우리'를 썼던 '유메 마쿠라바쿠'의 경우,

'음양사' 라는 책은 어떨까 하였는데,

그야말로 귀신과 혼령이 블루스를 추는, 나로써는 감당 불가인 기괴한 소설이었다.

 

가만보면, 일본소설에는 혼령이랄까 영혼이라고 불러야 할 그것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등장하는데,

그게 내게는 낯설고 거부감이 생기는 거다.

 

SF소설에 등장하는 science fiction이나 social fantasy적 요소를 수긍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혼령이나 영혼이 시도 때도 없이, 어떤 기준이나 경계도 없이 등장하는게,

개연성을 방해함은 물론, 억지다 싶기 때문이다.

 

오히려 '존코널리'의 '모든 죽은 것' 정도가 되면 낫다.

혼령이나 영혼의 중간자로서의, 영매가 등장하는 거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데,

일본은 혼령이나 영혼을 하나의 전통이나 민간신앙 차원에서 흔하게 얘기하고 있다.

 

그런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한 '텐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의 경우,

내 기대에는 한참 못 미쳤다.

수도꼭지 끝에 맺힌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면서 울리는 것처럼, 외로워, 외로워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59쪽)

라는 표현 따위로 미루어볼때, 이사람의 감수성과 필력이 그렇다는게 아니라,

(하긴 내가 이 사람의 다른 것들을 평가할 깜냥은 아닌 고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사람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는지는 충분히 짐작하겠는데,

나와 코드가 안 맞을 뿐이다.

 

어차피 애도라는 것은 죽은자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부고가 난 이후부터,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사람들의 편의와 마음대로 꿰어맞추고 각색하고 해석하려든다.

 

왜냐하면 애도라는 것이, 죽은 자를 위한 것이라면,

"ㆍㆍㆍㆍㆍㆍ죽은 이들을 찾아다니는 동안, 인생의 본질은 어떻게 죽었나가 아니라, 사는 동안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사랑받고 어떤 일로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았는가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551쪽)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시시콜콜 인생의 본질이라는 허울 좋은 살아 있는 동안에 대해서, 가 아니라,

죽어서 어떤가 따위를 얘기해야 할텐데...

살아있을 때의 그(그녀)와 죽어서의 그(그녀)가 마치 별개인양 얘기하고 있다.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사랑받고 어떤 일로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았는가는,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자를 위한 살아있는 나날들의 마음가짐이나 행동강령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자신과 타인의 죽음은 따로 떼어서 생각하는 거야.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것과 죽은 사람과 자신을 같이 생각하는 건 달라.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일일이 감정을 이입해서는 안 돼.ㆍㆍㆍㆍㆍㆍ(264쪽)"

이렇게 산자의 삶 위주로 얘기하고 있다.

내가 생략해버린 저 말 줄임표 부분에는,

우리식으로 따지면 죽은자는 죽은자고, 어찌되었건 산 사람은 살아야지...하는 뉘앙스가 담기게 마련이다.

어차피 삶에 대해 얘기하는 거라면 죽은자를 위한 애도보다는 삶의 긍정적인 면을 보고 얘기하는게 낫지 않을까?

지지고 볶고 싸우고 다투더라도, 그게 삶의 온기가 바탕이 되어 비롯되는 그것 말이다.

죽은 자를 애도하느라 왕방울 눈물을 흘린다고 한들,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서 고마워할까?

눈물 흘리는 내 자신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게 아닐까?

애도의 목적이 내 카타르시스를 위한 게 아니라,

진짜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라면,

살아있는 동안 하루를 살아도 매순간순간을 가열차게 살 수 있도록,

사람의 단점보다는 작은 장점이라도 찾아내어 북돋워 주고 발휘할 수 있도록,

그러려고 애쓰느라고 흘린 작은 땀방울을 같이 나누는게 오히려 값지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니까 의미가 좀 애매모호한데,

사고사를 제외하고,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살고,

자신의 명대로 다산 다음,

자신의 죽음을 알고 준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혜경 외 지음, KBS 생로병사의 비밀 제작팀 엮음 /

 애플북스 / 2014년 3월

 

죽을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자면,

죽은 다음에 자신이 애도받고 못받고는 차후의 문제가 될 것 같고,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하는지의 여부가 우선이 될 거 같다.


KBS <생로병사의 비밀>에서 다양한 집단과 연령대의 국민들 총 165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단다.

이게 확률과 통계를 필요로 하는 역학조사라면, 165명이라면 대상이 좀 작은 감이 있지만,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니 충분하다고 본다.

 

이 자료를 보니, 품위 있는 죽음의 조건으로 응답자가 가장 많이 꼽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 이었고,

‘주변 정리’, ‘다른 사람에게 부담 주지 않음’, ‘통증으로부터의 해방’ 등이 그 뒤를 이었단다.

 

이걸 누구의 문제로 돌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나이들고 병들고 죽는, 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과정에서,

나이들고 병들고 죽는 걸 외면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언제부턴가 나이보다 어려보인다는 말이 인사치레가 되어버렸다.

건강함이란 몸과 마음, 심신이 균형과 조화되어야 한다.

나이보다 어려보인다는 것은, 균형과 조화가 어긋나는 것이니...건강하지 못하다는 의미이겠다.

 

그러니, 곱게 나이먹는다 내지는 나이값하고 산다는 게 제대로 된 덕담이다.

  

암튼, 오늘 하고 싶은 얘기는 그거다.

알지도 못하는 사돈의 팔촌, 조문을 가고 인사치레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나와 감정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이 품위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거다.

태어나는건 내가 어쩌지 못했지만,
나의 죽음은 예비하는 순간 많은 것들을 내 의지대로 처리하고 정리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게 아니라,

자신의 삶과,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의 죽음마저도 스스로 예비할 수 있다면 바랄 게없는 어른일게다.

동안을 부러워하지말고,

나이값하고 사는걸 부러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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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3-07 23:33   좋아요 0 | URL
나이가 넘 빨 리 들어서 그 값하기도 허걱되네요 저도 반성해요

Ralph 2014-04-03 10:15   좋아요 0 | URL
죽음을 안다는 것, 자신의 죽음을 안다는 것은 매우 힘든것처럼 생각됨니다. 대부분 자신이 죽는 지도 모르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 같습니다. 가족 이나 주위 사람이 안다해도 가르쳐주거나 도와주기도 어렵습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면 누구도 가르쳐주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어차피 자신이 알아야하고, 자신이 준비해야 합니다. 어쩌면 인생을 사는 것과 같겠지요.
 
늦은 일곱 시, 나를 만나는 시간
최아룡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사람들 사이에서 보대끼며 살아가기 마련이고,

그 관계 속에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기도 하고, 때로 다른 누군가에게 그 상처를 위로받고 치유받기도 한다.

 

유약한 성격 탓인지, 또는 소심한 성격 탓인지 자잘한 일에도 상처를 받고 눈물 흘리고 하지만,

그건 텔레비젼이나 책 속의 사정일 경우이고,

잔뜩 움추러들고 그리하여 더 단단하고 높게 벽을 쌓아 올릴 뿐, 누군가에게 얘기해본 적도 그러니 위로받고 치유받은 기억도 없다.

직업 상, 자기 몸도 돌보지 못하면서 누구를 치료하느냐고 할까봐 두려워서 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은 가정 교육을 그렇게 받아왔었던 것이고,

내 자신을 말끄러미 돌이켜보는 시간을 갖게 되면서 택한 것이 익명의 글쓰기였다.

 

책을 읽고 읽은 느낌이나, 거기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을 글로 옮겨 쓰는 행위를 통하여,

나를 돌아보고 나 자신도 몰랐던 나를 찾고,

무엇보다 배설해낸다는 행위를 통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었다. 나를 위한 해우소.

그러니까 이곳에서의 글쓰기가 누구에게 보이거나 말을 걸거나 소통을 위한게 아니었다.

만약 그런 기능이 있다면, 그건 파생적이다.

 

언젠가, 여자들의 관계는 수다에 의해서, 남자들의 관계는 네트워킹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기사를 본 것 같다.

하지만 그건 10여년전 기사이고 지금은 모든 관계가 네트워킹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관계라는 것이 상호적인데 반해 네트위킹이라는 것은 선별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여지껏의 관계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네트워킹에 의해 형성되는 관계는 피상적이고 표면적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의 관계도 일종의 네트워크이기 때문에 관계에 집중하다 보면 쉬이 공허해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즐찾 수나, 공감 수, 댓글 수 따위에 연연하다 보면,

내가 쓰는 글이나 내가 토해내는 고민, 들은 미미하게 느껴지는데,

빵빵한 즐찾 수나, 공감 수, 댓글 수, 들을 자랑하는 이들의 댓글과 덧글을 읽다보면,

전혀 본문의 내용과 상관없는 피드백도 있게 마련이다.

시인컨대, 나도 뜬금없기론 둘째가라면 서럽다.

나름 과도기를 겪었지만,

이젠 글쓰기는 행위 자체가 주는 카타르시스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무심할 수 있고, 그리하여 홀가분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참 좋은 책 한권을 읽었다.

장금이 버전으로 좋은 걸 좋다고 하는데 왜 좋냐고 물으시니,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다.

부제에 '요가'라는 단어가 들어가 지루할까 걱정할건 전혀 없어 주신다.

그렇게 따지면, 요즘 대세인 강신주도 '철학'을 매개로 '힐링'을 가장 싫어한다면서 힐링하지 않았던가?

체력이 약하면 강하게 만들면 되지 굳이 '저질체력'이라고 규정할 필요는 없다. 저질체력이라는 표현은 건강하고 활동적이고자 하는 마음을 반어적으로 보여준다. 언어는 사고를 규정한다. (19쪽)

요가가 연관된 내용은 딱 요기까지이고, 힐링 에세이라고 해야 한다.

글 자체로 치유의 힘을 지녔다.

 

이 책의 저자는 최아룡이다.

최아룡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치유의 힘을 지녔음을 아는 사람은 알것이다.

 

 

 

얘기는 다시 카타르시스, 해우소, 또는 대숲으로 돌아간다.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면 그 옛날에 대숲에 가서 구덩이를 파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를 외친 이발사가 있었겠는가 말이다.

타인에게 털어놓지 못하겠으면 나처럼 이렇게 글쓰기로 시작해 보는 것도 좋겠다.

네트워킹이 좋은것은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것이고,

다 털어놓을 필요 없이, 선별이 가능하니까 말이다.

 

중요한건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혼한스럽거나 정리가 안된 마음을 정리하거나 가다듬는 그 과정이다.

그러니까, 내 글을 읽을수도 있고 안 읽을수도 있는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얘기하면 된다.

 

마음(, 다시말해 자기 자신의 내면)을 정리하고 가다듬는 과정을 글쓰기를 통해서 하다보면,

언젠가는 사람을 상대로 할 수도 있게 된다.

 

나는 이제 사람은 독립적인 객체이면서, 상대적인 존재라는 걸 안다.

부부나 연인 또는 부모나 자녀 와의 사이에서 통용되는 진리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를 알때, 내게 맞는 상대를 택할 수 있는 것이고,

(어쩜 이건 거울에 비친 나의 또다른 상의 개념인지도 모르겠다.)

내 자신의 위치와 영역이 있을때, 상대방의 위치와 영역을 자리매김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로 전에 읽은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이 고전인 이유는,

그때는 깨닫지 못했던건데, 이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내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치유하고 싶은데,

상대가 없이는 나의 위치를 자리매김 할 수 없고,

상대가 있어야 나의 위치를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것, 그게 정체성이다.

 

치료를 업으로 하는 사람으로서, 이 책에서 얻은 가장 값진 교훈은 이거다.

사람 마음 속에 여러가지 감정이 있는데, 그 여러가지 감정 중에는 상처도 있다.

사람의 상처를 보고 맞닥뜨리는데는 힘이 필요하다.

자기자신을 객관화하는게 중요한 이유는,

자기 자신의 힘이나 상처의 크기를 알아야 상대의 그것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버틸 수 있는 힘보다 상처가 클때는 맞닥뜨리기가 힘들고 위험하다.

그러니까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는, 번짓수를 잘못 찾거나 오지랖을 부리지 말고 볼 일이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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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4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24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4-02-25 15:35   좋아요 1 | URL
작년에 어느 요가 영상을 보고, 내년에는 요가를 한번 배워볼까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핸드스탠드 즉 물구나무서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영상이었는데,
단번에 매료되었습니다.
언젠가는 꼭 그런 경지에 이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