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냥 버스기사입니다 - 묵묵하고 먹먹한 우리 삶의 노선도
허혁 지음 / 수오서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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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변덕이 죽 끓듯 한다고 하여야 할까, 때론 감정이 양가적인데,

어떤 때는 사람들에게 내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얼굴을 반쯤 가리는 커다란 선그라스를 끼고 일하고 싶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람들이 내감정을 알아줬으면 좋겠어서 신호등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단추를 가슴에 붙이고 일하고 싶기도 하다.

 

운전할 때 사람 말소리가 들리면 짜증이 난다. 그 말소리에 자꾸 끌려 들어간다. 무시하고 운전에 집중하면 좋겠는데 잘 안 된다. 더군다나 버스는 철판으로 둘려 있어 소리가 울리면서 증폭된다.(156쪽)

이 말을 내 식대로 바꾸자면,

환자를 치료할때, 하다못해 침을 꽂거나 매뉴얼을 할 때 말소리가 들리면 짜증이 난다.

게다가 당신의 몸을 만지고 있는데 큰소리로 전화 통화를 해버리면 대책이 없다.

이럴 경우 손 놓고 전화 통화를 끝내시면 말씀 하시라고 하면 대충 전화를 끊는 시늉이라도 하시는데,

심한 경우 '상관 없으니 그냥 하시라'고 하거나 '상관은 있으나 시간이 없으니 그냥 하시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예전엔 이 정도는 일도 아니어서 살살 구슬릴 줄 알았는데,

아들의 일이 있고 나서는 맘이 맘이 아닌고로 생각이 이리저리 널을 뛰기 일쑤이고,

그러다 보면 내 정신을 바짝 챙겨야 하기 때문에 누굴 구슬릴 여력이 없다.

 

나는 그냥 짜증만 내고 말았는데,

이 책의 저자 허혁 님은 분석까지 하신다.

모든 말소리가 다 짜증 나는 건 아니다. 개념 있게 조용조용 통화를 하면 기사의 귀가 딸려 들어갈 일도 없고 라디오 백색소음이 어느 정도 소리를 희석시켜주니까 신경이 안 쓰인다. 소리가 커도 '용건만 간단히'하면 문제가 없다. 어르신들의 투박한 말소리는 좀 길어져도 재미있을 때가 있다.

마음에 상처가 깊은 사람이 떨리는 목젖으로 큰 소리를 내어 말을 한다. 기사 역시 마음의 병이 깊어 승객 목소리에 화가 배어 있는 걸 금방 알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리라!(157쪽)

이쯤되면 나보다 윗질이어도 한참 윗질이다.

나를 찾아오는 이들이 어딘가는 아픈 환자들이란걸 알면서도 가끔 짜증이 나는데,

님은 그걸 분석하고 이해하려 들다니,

종교가 없으셔도 성불 하시고 복 받으실 게다.

 

정색을 하고 앉아 무게 잡고 읽을 책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설렁설렁 넘기며 읽기엔 아까운 책이다.

좀 늦게 이 책을 들여 읽게 됐지만,

이 책을 공들여 읽은 것은 아무래도,

있는 곳은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지만,

어르신들을 주로 대하는 것도,

사람과 보대끼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똑같은데,

체념하고 눌러앉기보다는,

나완 다르게 꾸준히 분석, 연구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좋아보였기 때문이다.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어서 나이가 들면 에고가 강해지기 때문에,

자신을 쉽게 바꾸려 들지 않는다.

자신은 그대로 있으면서 상대방 보고 바뀌고 변하라고만 한다.

그런데 꾸준히 분석, 연구하고 이해하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이 좋아보였다.

 

그러다 우연히 말을 내뱉는 해법을 터득했다. 좋은 의도로 먼저 말을 꺼내면 어두운 동굴에서 막 나온 것처럼 상태가 바로 환해졌다.

"아직 젊고만 기어 올라온대요?"

"아이고 기사님, 칠십이 젊어요!"

옆에서 다른 아주머니 말씀이 "여자들 나이 먹으면 다 그리요."

다시 기사 말이 "안 그런 분도 많더만요."

방금 기어 올라온 아주머니 말씀이 "젊었을 때 일을 하도 많이 히서 그리요."(45쪽)

이건 여간한 내공이 아니다.

이런 반어법을 구사할 수 있다는건, 말을 내뱉는 해법을 터득하는 건 '우연히' 이루어 질 수 있는 경지의 것이 아니다.

이런 반어법을 이해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는 것도 일이지만,

상대에 맞춤한 적절한 반어법을 구사하는 것도 대단하다. 

승객과의 관계를 가르는 본령은 크게 두가지이다. 하나는 성장 과정이 어땠느냐이고 또 하나는 경력이 얼마나 됐느냐이다. 성장 과정이 원만하고 젊어 고생을 통해 속이 찬 동료는 입사 초기부터 별 무리 없이 승객을 잘 대한다. 그러나 일정 시기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던 동료는 경력이 쌓여도 승객과 마찰이 있다. 보통은 처음 일이 년이나 이삼 년 동안 승객들 꼴을 못 봐 애를 먹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하는 수순을 밟는다.

내 경우도 '절대 진상'과 목소리 큰 전화질 빼고는 거의 적응을 마쳤는데 절대 진상을 조우하게 되는 것은 내 뜻이 아니고 운명인지라 민원을 감수하면 되고, 목소리 큰 전화질은 어떻게든 극복해야 할 남은 과제다. 경력이 오래되고 성장 과정이 무난해 보이는 형님에게 도대체 큰 소리로 전화질하는 연놈들을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자문을 하면 오히려 나를 나무란다.

"자네가 신경이 좀 예민헌 편이고만."(153쪽)

 

명상치료를 하면서 내가 나한테 속고 살았음을 알았다. 신념이니 자유 의지니 하는 것들이 뇌과학 앞에서는 모두 소설이었다. 화가 나 있는 상태이기도 한 높은 베타파가 습관화되어 내 삶을 끌어왔던 것이고, 그 예민함과 날카로움이 다른 사람과 대비되는 나만의 매력인 줄 알고 살았는데 그냥 울화병 환자였다.(47쪽)

위 문단은 많은걸 내포하고 있다.

거칠게 요약하면 '울화병 환자여서 명상치료를 받았다' 정도가 되겠지만,

조금만 깊숙히 들어가보면 내가 내자신을 '속이고' 살았다 정도로, '세뇌시키고 위장하다' 정도로 대치될 수 있겠다.

팽팽하게 긴장하여 내려놓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이렇게 팽팽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명상치료까지 했다는 것이 대견하기(?)까지 하다.

예민하거나 날카로운건 살이가면서 마모되거나 둥글리면 되지만,

팽팽한 것은 툭 끊어져 버리면 다시 묶을 수도 없고,

억지로 묶는다고 하여도 더 팽팽해져서 언제 끊길지 모르니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셈이다.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그래."

운전을 생업으로 하면 사고를 피할 수 없다. 내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닐 때 우리는 기도를 한다. 오늘도 무사히는 운전 기사들의 겸허한 신앙고백이다. 나와 내 가족 먹고사는 일이 사람을 해치는 일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문이다.

위태로운 생계의 다리, 양화대교 위에서 큰 아픔에 처한 동료에게 깊은 위로를 보낸다.(49쪽)

 

책에선 정말 열심히 살아야, 겨우 살아진다고 한다.

열심히 살아야겠지만,

나름 노력을 해도 안되는 일이 있을때는 기도를 하는 수밖에 없단다.

삶이란 그러고보면 자연이 실력을 행사하는 바,

내 의지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의 연속이니까 말이다.

 

이걸 저자 허혁은 '산다는 건 리듬을 타는 일(79쪽)' 또는 '움직이는 모든 사물의 배후에는 리듬이 있다.(112쪽)'고 얘기한다.

'부분은 전체를 대표한다'거나,

'단순한 구조가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복잡하고 묘한 전체 구조를 만든다'는 '프랙탈'을 얘기할 법도 하다.

 

그러니 세상을 살다가 일이 내 뜻이나 의지대로 되지않는다 싶을 때는,

삶을 적당한 거리를 두고 관조하다가 리듬을 집어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허혁 님은 버스를 운전하면서 그 리듬을 집어탔을 것이나,

아직 나는 어리석어 그 리듬을 알아채지는 못하였다. 

 

그렇게 그렇게 읽어가다가 이런 문장을 만났다.

이런 문장을 만나면 그 리듬에서 잠시 내려 멈춰서서 음미하여도 좋으리라.

 

중년의 봄은 애도의 봄인 듯하다. 생의 중심에서 아직 어린 마음이 어른 노릇 하기가 쉽지 않다. 몇 번 보지도 못했는데 마당의 매화나무에 꽃이 다 져 있다. 눈물을 콕콕 찍으며 집을 떠나는 어머니 뒤로 어머니의 다섯 평 텃밭이 더욱 작아 보였다.(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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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4 16: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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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4 17: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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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2-14 17:02   좋아요 1 | URL
저는 이동할 때 주로 버스를 많이 타요. 저도 예민한 성격이라서 버스 안에 있는 승객들의 말을 듣거나 그들의 행동을 보면 집중(?)하게 돼요. 큰 목소리로 전화 통화하는 사람들을 보면 짜증나요. 특히 그런 사람들 중에는 비속어를 써가면서 전화 통화를 하기도 해요.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눈꼴사나운 사람들을 많이 본 것 같아요.

sslmo 2019-02-14 17:33   좋아요 1 | URL
저는 옛날부터 운전을 하긴 했었는데,
그리 잘 하진 못하고,
오랫동안 공식화하여 익혀서 운전을 했었는데,
요즘은 생각이 너무 복잡하여 그마저도 관뒀습니다.

서울은 지하철이 잘 되어 있어서 지하철과 택시 내지는 가까운 거리는 걷습니다~^^

지하철에서 제일 싫은 사람이 ‘예수 천국 불신지옥‘ 외치시면서 칸을 넘나들며 전도하는 할아버지요~^^

서니데이 2019-02-14 17:14   좋아요 1 | URL
저는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는데, 그게 아무래도 제 성격과 맞지 않는 것 같아요.
과정과 결과에 좋은 점도 없었고, 그리고 계속 당기기만 하면 언젠가 끊어질테니까요.
그래서 이제는 적당히 대충대충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마음은 그런데, 한동안 ‘열심히‘의 습관이 있어서인지, 어떤 것 앞에는 꼭 ‘열심히, 더 열심히‘가 붙어요.;;
바꾸는 것도 큰일입니다. 하지만 진짜 필요하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아니지, 대충대충 살려고요.
지난 주말보다는 조금 덜 차갑지만 날씨가 꽤 차갑네요.
양철나무꾼님,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sslmo 2019-02-14 17:41   좋아요 1 | URL
저 텔레비전을 보다가 ‘눈이 부시도록‘이라는 드라마를 보게 됐어요.
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좋은 드라마 였습니다~^^

그간 이곳에서의 서니데이 님으로 미루어 무슨 말을 하시는지 잘 알것 같습니다.
‘열심히‘나 ‘적당히‘ 산다는 거,
말로 하기는 쉬워도,
몸에 밴 습관을 바꾸기는 힘든 어떤 것들이잔ㄶ아요.

전 님이 어떤 삶을 택하든 충분히 존중하고 지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님의 ‘적당히‘는 님만의 속도와 정도를 가지고 있다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네, 오늘도 춥지만...
그러나 올 겨울은 왠지 아주 추웠던 기억은 없는 거 같아요.
뭐랄까, 얼음이 쨍하고 갈라질 것 같은 쨍한 겨울 하늘이 그립달까요.
그렇지만 막상 쨍하게 추우면 그건 또 싫을 것 같아요.
님도 남은 오후 따뜻하게 보내세요~^^

2019-02-14 18: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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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9-02-15 14:43   좋아요 1 | URL
우하하~ㅡ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랑고백이라니,
이런 사랑고백이라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덕분에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
오래간만에 한번 웃으며 쉬어갑니다~^^

2019-02-14 21: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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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5 14: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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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5 07: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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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5 15: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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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5 14: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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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5 15: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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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9-02-15 15:27   좋아요 0 | URL

나무꾼님

네 맞아요

아무글도 안 읽었었습니다

그 어떤글도 안읽고 북플도 다시 온지 며칠 안되어서 그냥 인사만 하고 다녀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무꾼님
그저 마음만 님 근처 바람처럼 머물겠습니다

sslmo 2019-02-15 15:37   좋아요 0 | URL
님이 이렇게 말씀 하시면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다만 요즘 제 마음이 좀 그래서,
님께 안부도 여쭙지 못한 변명을 하려던 것이었습니다.

주제 넘지만,
바람도 한번씩 쉬어갈 수 있는 거처는 필요한 법이죠.
그냥 다니시다가 한번씩 잠시 쉬어가셔도 좋을 것 같아서요~^^

2019-02-15 15: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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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8 11: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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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0 09: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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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9 14: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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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0 08: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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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 전2권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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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사는 곳이 지옥이어서,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내 마음이 지옥이어서 어디서 살던지 그곳은 지옥일거라며 자조하면서 지내는 쪽이라,

언제부턴가 '행복하다'거나 '감사할 일이다'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 부질없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너무나도 가혹한 전쟁의 참상에 나도 모르게 '감사할 일이다' 라는 말이 나왔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그렇게 살 수는 없는 일, 

오늘 하루 이렇게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하고 지금 이순간에 충실해야 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이 책은 '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를 읽다가 서효인 님의 서평을 보고 읽게 되었다.

1권을 읽으면서 좀 지루했었고 몰입을 하지 못했었다.

문장이 너무 아름다웠는데,

그렇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되어지는 것들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몰입을 하지 못한 또 한가지 이유는 챕터를 달리하며 마리로르와 베르너 패닝으로 화자가 바뀌는데,

처음엔 화자가 바뀌는 것에만 집중했었는데,

읽다가 중간에 이상하여 확인해 보니 연도도 전ㆍ후로 넘나들었다.

연도가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가 뒤죽박죽인데,

이 두 화자가 어떻게 만나게 되는지 알게 되자,

책이 재밌다고는 할 수 없고,

아름답게 잘 쓰여진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 먼다는 것은 무엇인가? 벽이 있어야 할 곳인데 그녀 두 손에 닿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어야 할 곳에서 테이블 다리 하나가 그녀 정강이를 후벼 파는 것이다. 거리에서는 자동차가 으르렁거리고, 하늘에선 나뭇잎이 속닥거린다. 피가 그녀 귓속을 으스스 흘러 다닌다. 층계참에서, 부엌에서, 하다못해 그녀 침대 옆에서도 어른들의 목소리가 절망을 토로한다.(1권 49쪽)

이 구절을 다음 구절과 맞물려 눈이 먼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라고 얘기해도 좋을까?

눈으로 볼 수 없더라도 다른 공감각으로 느낄 수 있고,

그렇게 다른 공감각을 사용하여 느낄 수 있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에 비교하여도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말을 바꾸어 얘기하면 볼 수 있다는건 축복이고 사랑이다.

튤립 꽃밥 끝에 묻은 꽃가루는 가루라기보다는 아주 작은 기름 방울 같다. 무언가를 실제로 만진다는 것은 그것-정원의 유럽산 단풍나무 껍질, 곤충 전시관에 있는 표본 핀에 꽂힌 사슴벌레, 제파르 박사의 작업실에 있는, 껍질 안쪽을 세심히 윤나게 닦아 놓은 가리비-을 사랑하는 것임을 그녀는 배우고 있다.(1권 53쪽)

 

다음 구절은 이 책에 왜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

그리고 이 책을 통하여 무슨 얘길 하고 싶어하는지, 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뇌는 완전한 암흑 속에 갇혀 있습니다. 당연한 사실이랍니다. 어린이 여러분. 그 목소리는 말한다. 뇌는 두개골 속 깨끗한 액체 속에 떠 있지, 빛 속에 있는 게 절대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뇌가 정신 속에 지어 올리는 세계는 빛으로 가득합니다. 뇌는 색과 움직임으로 넘실거립니다. 그런데 어린이 여러분, 뇌는 단 한 점의 빛도 없이 살아가면서 무슨 수로 우리에게 빛으로 가득한 세계를 지어 주는 것일까요?(1권 80쪽)

 

 

그러나 거의 매일, 특히 날씨가 푸근할 때, 사는 것은 그를 녹초로 만든다. 나날이 막히는 교통과 거리의 그래비티와 회사의 정책이, 상여금과 수당과 초과 근무 때문에 툴툴거리는 모두가, 서서히 뜨거워져 가는 여름철, 새벽이 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시간에, 폴크하이머는 광고판의 모질도록 눈부신 빛 속에서 오락가락하며 이런 고독은 병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할 때가 가끔 있다. 훤칠하게 열을 지어 선 전나무들이 폭풍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속에서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2-411쪽)

이 책을 읽으면서 고독 속에 스스로를 유폐시키고 있는 나를 발견했고,

그런 의미에서 고독은 병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이 저 아래 식물원의 오솔길을 걸어 다니고, 바람은 생울타리를 누비며 송가를 부르고, 미로 입구에서 자라는 크고 늙은 삼나무들은 삐걱거린다. 마리로르는 그 옛날 에티엔 할아버지가 설명해 준 대로, 전자파가 미셸의 게임기 안으로 들어가고 또 빠져나오는 것을, 그들을 싸고 감도는 것을 상상한다.ㆍㆍㆍㆍㆍㆍ그밖에 우리가 국가라 부르는, 상흔이 남은 채 끊임없이 변하는 풍경 위를 오가는 항의 메일, 예약 알림 서비스, 주식 시장 업데이트, 보석 광고, 커피 광고, 가구 광고, 그런데 영혼도 그와 똑같은 경로로 돌아다닐지 모른다는 사실을 믿는 건 그렇게 어려운 걸까? 아버지와 에티엔 작은할아버지와 마네크 아주머니와 이름이 베르너 패닝이었던 그 독일 소년이 왜가리처럼, 제비갈매기처럼, 찌르레기처럼 무리 지어 다니며 하늘을 늘쑤실지도 모른다는 것을? 영혼을 실은 그 거대한 셔틀이 주변을 날아다닐지도 모르며, 희미하지만 귀를 바짝 가져다대고 들으면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굴뚝 위를 날아 다니고, 보도를 미끄러지고, 우리 재킷과 셔츠와 흉골과 폐 틈새를 스르르 통과해 반대편으로 빠져나가고, 도서관과 모든 생명의 기록이 담긴 공기, 내뱉어진 모든 말, 전송된 모든 단어가 여전히 그 안에서 울리고 있다.(2권 459쪽)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의미로 이 책을 추천했는지는 모르겠다.

전자파가 떠다니는 그곳으로,

여러종류의 메일과 예약 알림 서비스가 떠다니는 그 경로로, 영혼도 떠다닐지 모른다는 구절을 읽으며,

그래도 삶이 축복이라고 자위하는 건 마음 아픈 일이었다.

마커스 주삭의 '책도둑'이 연상되기는 했지만,

내겐 조금은 아쉬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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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02-07 12:24   좋아요 1 | URL
‘보는 것‘과 관련된 책이군요. 제가 이번에 본 영화에서는 눈을 통해 볼 수 있다는 능력만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파멸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는 설정이어서 특이했어요. 갈수록 너무 보이는 것에만 의존하고 보이는대로 믿고 그 이면은 생각하지 않는 현대 사회를 꼬집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고독도 병일까 저도 새삼 생각해보게 됩니다. 제가 과연 병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고독을 경험해보기나 했나 생각하니 경솔한 결론을 주워삼키게 되네요.
양철나무꾼님, 오늘 제 서재 친구 한분이 봄이 오고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우리 봄을 한번 기다려볼까요? 새로 움트는 봄을.

sslmo 2019-02-08 15:49   좋아요 0 | URL
어제 님의 서재 마실 갔다가 영화 3편 보고왔어요.
전 ‘버드박스‘도 잼나 보였지만, ‘우리, 별들의 세계로‘를 눈여겨 봤습죠.
고독은 병일까요?
제 경우엔 맞는 것 같습니다.
혼자 있는걸 두려워 하지만,
스스로를 유폐시키려는 경향 또한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병‘인지 아닌지의 척도는,
예전엔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놀았었고 혼자 노는걸 즐겼었는데,
지금은 혼자인 상태를 두려워한다는 겁니다.

고맙습니다.
봄을 기다려보자는 말이, 손 내밀어 주심이 따뜻한 온기로 전해집니다~^^

겨울호랑이 2019-02-07 12:29   좋아요 1 | URL
인사가 늦었네요. 양철나무꾼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한 2019년 되세요!^^:)

sslmo 2019-02-08 15:55   좋아요 1 | URL
매번 꼼꼼이 챙겨주시고 감사합니다.
연의 어린이가 올해 초등학생이 되려나요?
매번 연의 어린이 사진을 프로필로 보다가 고양이 사진을 보니 좀 낯설었는데,
다시 보니 잘 어울리는 것도 같고...
연의 어린이가 이제 초딩이 되어 초상권을 청구하려나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함 해보고...
암튼, 양질의 리뷰와 페이퍼 잘 보고있습니다.
올 한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19-02-08 17:22   좋아요 1 | URL
^^:) 네 연의가 이번에 초등학교에 진학합니다. 이제는 초등학생이 되어 저희 집의 막내가 된 귀요미가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네요. ㅋ 감사드리며, 저 역시 올 한 해 잘 부탁드립니다.

sslmo 2019-02-09 09:09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막내 귀요미 자리는 고양이한테 내어주었을지 몰라도,
아직까지 제 마음의 최고 귀요미는 연의어린이랍니다~^^
(프로필 사진으로만 본게 고작인데, 이렇게 뜬금 없는 애정고백이라니~--;)
초딩생활하느라 바쁘겠지만,
가끔 귀요미 근황도 알려주세요~^^

겨울호랑이 2019-02-09 09:35   좋아요 0 | URL
네! 양철나무꾼님 감사합니다^^:)

2019-02-09 0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09 0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09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13 1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9-02-13 18:34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도 화자를 둘로 나누어 놓은 거랑, 시간을 뒤죽박죽 해놓았던게 부편해서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같은 책을 읽고 비슷한 감상을 느낀다는게 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젯밤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봤는데, 그걸 보면서 열심히 행복하게는 아니더라도,
지금처럼 막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는 모르지만...저에겐 뭔가...찌리릭...하고 전기를 넣어 충격을 준 그런 느낌이랄까.
제가 먼저 찾아뵙고 인사드렸어야 하는데,
마실은 다녀도...댓글로 이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려야 할 것 같습니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왔어 우리 딸 - 나는 이렇게 은재아빠가 되었다
서효인 지음 / 난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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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아주 좋았어도,

좋아서 감동이 쓰나미로 몰려왔어도,

리뷰로 풀어내려야 낼 수가 없는 경우가 있다.

이 책 전에 읽은 '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를 읽을 때부터 그러하리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완전 팬이 되어 버렸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라는 속담에 한마디 보태자면 '아버지도 만들었다'정도가 되겠다.

사실 이렇게 곳곳에 '눈물' 코드를 장착한 책은 예전에도 잘 안 읽었고,

아들 일 이후론 더 안 읽게 되는데,

이 책은 꺼이꺼이 울면서 다 읽었다.

 

책 뒷표지에 보면 소설가 정용준 님이 이 책은 반성문으로 쓰였지만 러브레터나 최고의 시집이 될거라고 했는데,

나도 딱히 반박할 마음은 없다.

 

나는 내 선택이 아닌 선택이 온당하고 바름을 증명해낼 것이고 그 일을 성실히 잘하고 있음을 검사할 것이다. 날마다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삶은 은근한 지속에 더 가치가 있음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 결국 내키는 대로 사는 자가 이룰 일이다. 나는 이 일이 선뜻 내킨다.(53쪽)

이 말은 어찌 읽으면 중의적으로도 읽힌다. 중의적으로 읽어야 뜻이 선명해지고 그의 깊고 융숭한 속이 돋보인다.

 

시인의 어머니가 하셨다는 이 말은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려 두고 두고 되새겼다.

 

이틀 후, 고향에서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마침 술을 마시며 속이 상해 죽겠다고 다소 과장된 몸짓을 곁들이며 떠들어댔다. 주위가 시끄러웠다. 애기 혼자 두지 말고 일찍 다녀. 잘 들리지 않아 밖으로 나온다. 입김이 난다. 하얀 그것이 네온사인에 부딪혀 사라진다. 우리가 계절 앞 입김만도 못하게 느껴진다. 곧 취위 속에 사라질 것이다. 액체. 소량의 눈물. 내것인가? 진짠가? 엄마가 말한다. 왜 우냐. 우린 87년에도 울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면 다 살아지는 법이다.(57쪽)

 

난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시인의 팬이 되어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었지만,

이 구절을 읽고 시인의 어머니에게 무한감동 하였고,

시인이 깊고 융숭한 것은 다 어머니 덕분이지 싶었다.

실은 이 구절이 나 또한 다독이고 다잡아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아니 나는 언제부턴가,

한번 허물어지면 감당할 수 없게 될까봐 온 힘을 다하여 버티고 있었고,

누군가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스스로에게 '어떻게든 살면 다 살아지는 법이다'라고 하며 입안에 고이는 침을 눌러 삼키듯 눈물을 눌러 참고 있었다.

 

행복하니? 어머니는 가끔 묻는다. 나는 뭘 그런 걸 묻느냐고 답한다. 어머니는 당신의 손녀가 당신의 아들에게 커다란 짐이 될까 겁나게 무섭다고 했다. 그리하여 내가 불행해질 것 같아 불안해 죽겠다고 말했다. 매일 가는 등굣길을 앞에 두고 차 조심, 길 조심, 신신당부를 하던 보통의 엄마들처럼 그녀는 나의 어머니다. 그뿐이다.

 

어머니는 해외여행이나 가방이나 등산복을 원하지 않는다(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내게 행복을 요구했다. 역시 그뿐이다. 나는 내가 괜찮음을, 아이가 나에게 짐이 되지않음을, 아이가 나에게 괜찮은 존재임을, 아이가 나에게 있어 멋진 선물 꾸러미임을 증명해야 한다. 그를 위해 안방에서 혼자 몇 번 울지도 모르겠지만, 또한 그뿐이다.(148~9쪽)

 

이 구절을 읽으면서 존재로 인해 불행해지는 법은 없는 법이라고,

시인의 어머니에게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현명하게도 그 사실을 금방 터득하신 모양이다.

 

난 아들의 부재로 인하여 더 이상 행복할 일이 없음을 쓸쓸히 깨닫지만,

그건 알려드리지 않아도 좋을 듯 하다.

 

사실 저 구절을 읽을 당시에는 '어머니는 당신의 손녀가 당신의 아들에게 커다란 짐이 될까 겁나게 무섭다고 했다'는 부분의 말 뜻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나중에, 거의 끝부분-아버지의 등장 부분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도 같았지만, 뭐~(,.)

 

누군가가 그제는 'Gerald garcia'의 'Milonga'를,

어제는 '헨델'의 '울게하소서'를 권해주셨다.

그런데 나는 권해준 음악은 물론 들었고,

청개구리 기질이 발동하여 이런 음악을 덤으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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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4 1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24 1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24 1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9-01-24 18:26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전 서효인 님을 한번도 뵌 적이 없지만,
보지 않더라도 좋은 아들이요, 좋은 남편이요, 무엇보다 은재와 은재 동생에게 최고로 좋은 아빠라는걸 깨닫게 되었달까요.
아울러 매번 느끼는 건데,
모든 글은 그 사람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어머니 아버지까지도 모두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서효인 님의 글이 그렇듯, 글 속 어머니의 말씀 또한 제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으니까요~^^

카알벨루치 2019-02-01 23:20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명절연휴 즐겁고 행복한 시간되시곷늘 건강하십시오

sslmo 2019-02-02 11:1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님도 이제 시작하는 명절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서니데이 2019-02-02 21:49   좋아요 0 | URL
금요일 저녁부터 연휴가 시작되는 분도 계시겠지만,
양철나무꾼님은 어쩐지 오늘 오후부터 연휴 시작하실 것 같아서 주말에 인사드리러왔어요.
양철나무꾼님, 설연휴 즐겁게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sslmo 2019-02-07 10:58   좋아요 1 | URL
연휴 전에 댓글을 남겨주셨는데,
연휴가 다 지나고 댓글에 덧글을 다네요.

덕분에 설명절을 잘 지냈습니다.
조금은 쓸쓸하게 지냈지만,
비비고만두를 넣고 만둣국을 끓여서 먹었는데,
맛났습니다.

님도 원하는 대로 다 이루는 새해 되셔요~^^
 
시가 안 써지면 나는 시내버스를 탄다
이정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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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문집 역시 좋다.

그런데 읽다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깊은 상념에 젖게 된다.

오래된 기억이나 감정을 소환시킬 요량이라면 이 산문집만한 것이 없다.

이름은 산문집이지만, 시와 산문, 어머님의 스케치북 그림까지 있는 것이 종합선물세트 같다.

다른 사람의 시에 해설을 덧대고,

다른 시집으로 묶였던 자신의 시들을 불러온다.

한번 읽었던 시들을 다시 읽는 것이고, 한번 봤던 산문을 다시 보는 것인데도...눈물을 찔끔거린다.

펑펑 울지 않고 찔끔거리는 것은 울다보면 어김없이 낄낄거리는 대목을 만나기 때문이다.

맘 놓고 퍼질러 앉아 '엉엉~'거릴 틈을 주지 않는다.

그의 글들을 읽다보면 끝날때까지 끝난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반전이 도사리고 있다.

어머니의 입을 통해서 나왔을 해학이라고 하는 거, 골계미라고 하는 것들이, 적재적소에 버무려져 있다.

 

좋기는 하지만 한번에 내처 읽으라고 권하진 못하겠다.

정수만을 뽑아놔서 그런 것이겠지만,

밀려오는 감정의 후폭풍이 거세다.

찬찬히 아무렇게나 펼쳐서 한꼭지씩 아껴 읽어야 되겠다.

 

제목 '시가 안 써지면 나는 시내버스를 탄다'를 짐작하게 하는 그의 창작론도 겸손하기만 하다.

나는 감히 말한다. 시는 창작이 아니라 줍는 것이라고. 마트에는 물건이 있지만 재래시장엔 사람이 있다고. 대형 슈퍼에는 충동구매와 끼워팔기가 있지만 오일장에는 어우러짐과 덤이 있다고.(55쪽)

 

한편 한편 골라낸 시 뿐만 하니라 시평 또한 아름다웠는데,

이윤학 님의 '유리컵 속으로 가라앉는 양파'의 시평인 '모든 상처'는 처연해서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박상률 님의 '택배 상자 속의 어머니'는 처음 만나는 시였는데, 돌아가신지 햇수로 9년째인 시어머니 생각이 나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본인의 시 '의자'에 단 덧글의 '자석 브라자'가 정겨웠다.

'엄니 아버지'라는 제목의 글에 등장하는 구절도 좋았다.

지금 당장의 말이 아니라, 먼 훗날에 대련을 다는 품새 때문이다. 어떤 말은 넉달이나 지나서 깨우치고, 어떤 말은 30년 지닌 뒤에 무릎을 친다. 상대의 가슴에 상처를 처박는 말이 아니다. 어깨를  툭 치고는 먼 깨달음의 언덕길, 그 길가의 찔레나무 덤불 속에 꽃봉오리를 걸어놓는 넉넉한 말씀 때문이다.(205쪽)

 

언젠가 한번쯤 봤던 시나 산문이 많았는데,

이렇게 묶어 놓으니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5부 글짓기 대표선수의 글들 중 내가 그러께 맛을 들린 한창훈 님이 등장해 반가웠고,

내가 예전부터 눈독들였던, 나만 알고싶었던 시인 유용주 님이 등장해서 좋았다.

'개그장이', '반장이니까', '취미는 효도, 특기는 불효' 같은 글들이 새롭고 재미있었다.

 

당연히 가장 좋았던 건 6부 '시가 안 써지면 나는 어머니 스케치북을 본다' 꼭지이다.

그림이 하나같이 예쁘고 꾸밈이 없다.

미술 장학금으로 대학을 갈뻔했던 시인의 그림솜씨는 아무래도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것 같다.

좋다.

이래 저래 책에서 위로받는 요즘이었는데,

요즘 여러가지 의미에서 의로가 될 책들만 찾았는데,

이 책은 또 다른 의미로 위로가 된다.

움켜쥐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고,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라고 이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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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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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주변에서 접하고 한번쯤 생각해본 명제들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고 비틀어 꼬집기도 하고 그렇게 우리의 고착되었던 사고를 뒤흔들어 놓는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 생각의 전환을 갖는 방법으로 사유를 확장시킨다.

 

나는 그동안 일반론을 당연시하며 세상을 살아온 구태의연한 사람이어서인지,

처음진입하기가 좀 힘들었다.

차차 적응되어 그의 문체에 익숙해지자,

반어법과 비틀어 쓰는 그의 깊숙한 진심이 읽힌다.

 

일상에서, 학교에서,사회에서, 영화에서, 대화에서 라는 소단락의 주제에 맞게 묶인 내용들이 하나 같이 재밌게 읽혔다.

어느 하나 구태의연하지 않았고, 예상된 결말로 흘러가지 않았다.

문체도 통통 튀는 것이 경쾌했다.

다만 그의 모든 글들이 반어법을 사용하고 비틀어 애기하는 기법으로 쓰여 있어,

나도 그렇게 삐딱하게 읽은 것일테지만,

세상을 그렇게 읽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정도이지,

나도 강하게 동의한다고 하긴 힘들었다.

 

'영화에서' 코너가 좀 잘 읽혔는데,

홍상수의 그것은 좀 불쾌했지만, *표 주에 2003년 9월 '현대문학'에 실린 글이라고 하니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맨헌터', '양들의 침묵', '한니발'로 이어지는 한니발 렉터에 대한 글은 흥미로웠다.

난 이 시리즈를 책으론 읽었는데 영화로는 보지 못해서 이 영화평에 호의적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프롤로그의 이 구절이 인상 깊었다.

그리하여 나는 어려운 시절이 오면,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문을 닫아걸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불안하던 삶이 오히려 견고해지는 것을 느꺘다. 지금도 삶의 기반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그 감각이다. 생활에서는 멀어지지만 어쩌면 생에서 가장 견고하고 안정된 시간, 삶으로부터 상처받을 때 그 시간을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갈 수 있다고.(8쪽)

마찬가지로 에필로그의 이 구절 또한 여운이 길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야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와 닮은 전도연 씨. 이건 불장난이 아니라 오독을 피하려는 구마 의식이랍니다. 글에서 읽고 싶은 것을 읽는 것은 저자가 어찌할 수 없는 독자만의 특권일 터. 책을 출판하면, 둑자들이 너무 그럴싸한 메시지를 책에서 읽어낼까 두렵습니다. 전 인생의 확고한 의미에 대해서 설파하는 책이나, 한국을 부흥시킬 분명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책이나, 인류 문명의 향방에 대해 확실한 예측을 하는 책 따위는 읽고 싶지도 쓰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많은 것들에 대해 확신할 수 없죠. 저는 차라리 불확실성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며, 그나마 큰 고통 없이 살아가기를 원해요.(340쪽)

 

책의 마지막에 '신동아(2018년 11월호)' 송화선 기자와의 인터뷰가 실렸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와 겹쳐지는 부분이 있어서 옮겨본다.

각자 다르게 사유를 확장시키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만,

책을 읽는 이유만은 나와 겹쳐지는 부분이 있다.

그게 이 책을 끝까지 읽은 이유이다.

 

그렇게 책을 읽고 만화를 보고 더 많은 사람이 극장을 찾으면 세상이 좀 더 좋아질까. 한국 사회의 고통스러운 단면을 조명한 영화를 본 뒤라 이 질문을 하고 싶어졌다.

"적어도 각자의 삶은 좀 더 즐거워질 것이다. 아니, 즐겁기보다는 풍요로워진다는 표현이 맞겠다. 적어도 내 삶은 좀 더 풍요로워졌다."

김교수의 답이다.(338쪽)

 

거침이 없지만,

나와는 생각이 어긋나는 부분이 많았던,

그래서 고여있던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게 해준 자극적인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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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1-21 21:51   좋아요 0 | URL
인용하신 마지막 문장 마음에 들어요.
많은 것들이 저의 오늘과 내일을 조금 더 따뜻하고 즐겁게, 그리고 풍요롭게 만들어주기를 바랍니다.
소소한 즐거움이 되기도 하고, 따뜻한 위로가 되기도 하는, 오늘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끔씩 서로 낯설고 말이 통하지 않는 친구 같은 책도 있으니까요.^^;

양철나무꾼님, 따뜻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감기 조심하시고요.^^

sslmo 2019-01-23 09:35   좋아요 1 | URL
저 문장 말고도 매너리즘에 일침을 가하는 문장들이 많아요.
당신을 결혼했으면서 ‘결혼하고 말겠다는 이들을 위한 세가지 주례사‘ 같은 칼럼은 완전 아이러니컬해요.
맞아요, 책이 없는 삶, 음악이나 영화가 없는 삶...어떻게든 살아갈 수는 있겠지만, 삶이 무미건조해지겠죠.
오늘은 봄날 같아요, 내마음도 님의 마음도 그러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