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수고했어요 - 붓으로 전하는 행복, 이수동의 따뜻한 그림 에세이 토닥토닥 그림편지 2
이수동 지음 / 아트북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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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랖이 넓기로 치면 열두폭치마와 어울려서도 부족하고,

온갖 잡기에 관심을 보인게 어제, 오늘의 얘기는 아니다.

우물을 파도 한우물을 파야 한다는 옛말대로라면, 난 될 성부르기는 커녕 싹수가 노랗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3씨(마음씨, 솜씨, 맵씨)가 되어주시는 관계루다가,

좀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변덕이 죽 끓듯 한 관계루다가,

나의 잡기에 대한 관심사는 철철이로도 부족해, 달달이 바뀌는 실정이다.

얼마전까지는 헝겁으로 수제 인형을 만들어댔고,

친구가 저 대문에 걸린 그림을 그려 보내준 무렵과

된장님이 이 귀한 그림을 보내주신 후부터,

그림에 재미를 붙였다.

특히 내가 관심을 보이는 분야는 인물화인데,

연필로만 그려서 흑백과 명암 처리하기도 하고,

수채색연필을 써서 간편하게 채색을 하기도 하는데,

생각보다 어렵거나 번거롭지도 않을 뿐더러, 재미가 쏠쏠하다.

 

근데, 인물화랍시고 그리면서 깨달은게 하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얼굴에 대해서,

다시말해 보여지는 액면 그대로에 대해 기대치가 높다는 거다.

사실에 가까운 그림을 보여주면 만족하지 못하고,

못 그렸다는 둥,

구도가 이상하다는 둥,

노안이 벌써 왔냐는 둥, 해가며 놀려먹으면서,

사실과는 연관이 없이

만화그림이나 많이 보아왔던 일러스트 그림처럼 그려내면 잘 그렸다고 한다.

눈에 많이 익은 친숙한 그림체를 가지고는 이쁘다, 잘 그렸다, 해가며 설레발을 친다.

 

이건 그림을 평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의 얼굴을 그린 것이어도 적용되는 불문율이다.

 

때로 그림에 너무 집중해서,

선을 여러번 겹쳐그려서 주름살을 너무 많이 만들어 내면,

나이보다 늙어 보인다며 못 그렸다고 한다.

또 찰고무나 지우개로 하이라이트를 주어 주름과 올록볼록 엠보싱들을 지워내면 젊어보이는게 이쁘다고 한다.

 

내가 딴 그림까지 얘기할 깜냥은 안 되고,

이제 재미를 붙인 인물화만 갖고 얘기해 본다면,

인물과 닮게 그리는 게 좋은 것일까, 아니면 인물의 캐릭터를 잡아 개성있게 그리는게 좋은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고 그냥 이쁘게만 그리는게 좋을까?

저 '좋을까?' 자리에 '잘 그리는 것일까?'가 들어가면 느낌이 좀 달라진다.

 

옛날에 사석원이 그린 그림을 두고,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카드 그림이라고 폄하했단다.

근데 난 사석원의 그림들을 보면,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예쁘고 좋고 즐거운 것이,

마음 속에서 하트가 뿅뿅 생겨나고,

그리하여 희망과 행복을 얘기하고 싶어지는 것이,

인생은 살만한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화가가 또 한명 있는데, 이 책 '오늘 수고했어요'의 이수동이다.

이분 또한 무명시절을 보내다가, 그림이 텔레비젼 드라마를 통하여 알려지게 된 케이스다.

크리스마스 카드 그림이라는 소리는 안 들었을지 몰라도,

이분의 그림 또한 이쁘고 다정하고 정감있는 그림체를 가지고 있어서,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무한 위로가 된다.

게다가 요번 책엔, 전작에서 보여주던 자작나무나, 하늘과 나무와 꽃 등 이쁘기만한 정물 말고도,

인물에 대한 그림이 여러점 눈에 띈다.

 

요번 그림이라고 하여,

이쁘고 다정하고 정감있는 그림체라는 것에서는 예외가 없지만,

인물의 특징을 잘 잡아내서,

그림 만으로 충분이 말을 하고 메세지를 전달해 준다.

 

간혹, 사람들이 이렇게 이쁘고 만화같은 그림체를 가지고 있는 화가는,

사실적인 인물화를, 작품성 있는 그림이라는 말로 혼동하여, 못 그린다고 하던데,

이 그림을 보고 쓸데없고, 부질없이 지어낸 얘기라는걸 알게 됐다.

이 정도면 됐지, 무얼 더 바라겠는가?

 

또 한가지,

사석원도 그렇고 이수동도 그렇고,

글도 좋다는 거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이 이들의 그림을 이쁘기만 해서 좋아하는게 아니라,

그림의 깊이, 다시 말하면 이들 그림이 담고 있는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를 읽어내고 좋아하는 것 같다.

 

다시 나의 인물화로 돌아가,

사람들이 나의 그림을 보고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는건 어쩜,

보이는 그림만을 보고 좋다, 나쁘다 하는게 아니라,

그림이 담고 있는 마음까지를 읽어내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도 좋은 인물화를 그리고 싶다면,

사석원이나 이수동에게 그림 잘 그리는 비법을 사사받는 것도 좋지만,

아무래도 이들이 마음밭을 일구고 가꾸는 걸 엿보고 터득하는게 빠르겠다.

 

얼굴이 사람의 마음을 담고 있는 것도 당근이지만,

그림 또한 사람의 마음을 잘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이수동은 여러가지 점에서 나랑 닮은 것 같다.(언감생심~--;)

바쁜 일상에 쉼표를 찍을 줄 아는것도 그렇고,

무거운 몸과 마음을 비우고 산다는 게

어디 쉽습니까?

하지만 비우지 않고는

새로운 것들을 들여놓을 수 없습니다.

쉰다는 것ㆍ

그것은 앞으로의 멋진 일과 멋진 사람을 맞을,

'아주 즐거운 준비'의 다른 말입니다.

 

그러니, 비우시지요.

 

이춘풍을 닮고 싶어하는 풍류 또한 그렇다.

 

이춘풍

 

이 봄바람을 어찌할 거나?

나름 수양했다는 수양버들도

저리 흔들리는데,

대충 산 나야

                                     당연히 못 참고 달려야지.

 

구름 한점을 선물로 주는 호기로움도 닮고 싶고,

 

선물

 

바람 따라 가는 그대에게

선물 하나 드리겠습니다.

 

구름 한 점.

 

높은 곳에서 자유로우라는

나의 응원입니다.

 

그러나, 난 구름 한 점보다는, 마냥 넉넉한 햇살이고 싶다.

햇살 좋은 날,

나는 당신의 의자입니다

 

 

 

 

 

 

햇살 좋은 날,

일상의 무게를 내려놓고

잠시 쉬고 싶을 때,

나는 당신의 의자가 되겠습니다.

값비싼 의자는 아니지만,

늘 당신 곁에 있는 그런 의자

 

암튼, 이 책을 읽고,

어쭙잖게 인물화를 그리고 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그 사람이 먹는 것이 곧 그 사람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 사람이 보여주는 것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진심은...더디더라도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어떻게고 전달되게 마련이고, 전달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난,

행간을...

그림의 이면을...

읽을 수 있는 마음의 눈을 키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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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2-06 20:16   좋아요 0 | URL
즐겁게 살아가는 빛을 그림으로 환하게 담으시리라 믿습니다~

sslmo 2013-12-10 15:50   좋아요 0 | URL
요즘은 그림삼매에 빠져 독서를 게을리 한다는 웃지 못할 말도 안되는 핑계를~--;

하늘바람 2013-12-08 08:19   좋아요 0 | URL
아 넘부러워요 3씨 토끼인형 귀엽네요 저두 동참하고 파요 근데 정말 나무꾼 언니는 못하시는게 없네요

sslmo 2013-12-10 15:53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은 좋은 책을 쓰시고...
토깽이 같은 남매들도 키우시고...
만약 저한테 토깽이같은 남매가 지금 있다면 토끼인형을 만들면서 소일거리 하고 있지는 않을거라는, ㅋ~.

사람이 행복할땐 행복한 줄 몰라요.
토깽이 보물들, 잘 키우세요, ㅋ~.

그렇게혜윰 2013-12-08 08:39   좋아요 0 | URL
국민은행 달력 그림이 이수동 화백 그림이라길래 두 개나 얻었어요. 기분이 좋아지는 그림이에요.

sslmo 2013-12-10 15:55   좋아요 0 | URL
그렇게혜윰님, 국민은행 우수고객이신가보당~^^
전 근처에 국민은행이 없어서리~.
그리고 스마트폰으로 인터넷뱅킹 하다보니까 은행 갈 일이 잘 없어서리~

그 달력 저 하나주면 안되나요?헤에~^^

세실 2013-12-08 11:58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은 그래서 삶이 풍요로워 보여요.
전 요즘 재미있는 일 어디 없나하고 기웃거립니다.
그림도 독학하니 늘지 않네요.
이수동 그림 예쁘지요!

sslmo 2013-12-10 15:59   좋아요 0 | URL
저는 세실님이 왕부러운데요~^^(속닥)

제 그림도 당근 독학이구요.
제멋에 겨워 수작이랍니다.

전 오늘 '혜민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의 그림을 그린 '이영철'이란 분의 '그린 꽃은 시들지 않는다'란 책을 보고 있는데,
사석원, 이수동과 더불어 열광할 사람이 한명 더 생겼어요.

이렇게 열광할 사람, 한명씩 찾아내며 살아가는 거죠, 뭐 있겠어요~?^^

yamoo 2013-12-09 22:00   좋아요 0 | URL
우와~ 수제인형 끝내줍니다!
정말 못하시는 게 없습니다그려~^^

sslmo 2013-12-10 16:00   좋아요 0 | URL
저 못하는 거 많아요.
제가 청소도 못하고 그랬더니,
옆에서 운동도 추가하라는데요, ㅋ~.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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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면, 난 그동안 이윤기 님의 작품들을 좀 읽어주셨다.

읽으면서 좋다고 설레발을 친 경우도 있었지만,

어설픈 내눈에도 엉성한 번역들이 들어와서 툴툴거린 적도 있었다. 

내가 번역 오류를 잡아낸 건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은 격이었지만,

님의 작가로써, 번역가로써의 삶이 얼마나 가열차고 치열한 것이었는 지를 몰랐던 고로,

'비밀의 계절'개정판을 계기로 그렇게 그렇게 소원해 졌었다.

2010년 8월인가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별세하셨을 때까지만 해도,('애도하다'페이퍼 링크)

그의 글쓰기에 대한 열정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 책'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를 읽으면서 그의 그런 열정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게 되었고,

이젠 그를 진정한 작가인 동시에, 번역가로써 우러를 수 있게 되었다.

그 분의 따님, 이다희가 서문에서 밝힌,

때로는 원칙주의자처럼 말을 대하고,

때로는 언어를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기도 하고,

길을 따르지만 길에 갇히지 않는 말,

정교하고 섬세하면서도 살아 펄떡이는 말에 대한 집착, 을

이렇듯 한자리에 묶어 놓은건 우리같은 사람들을 일깨우는 데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글이란건,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즉 작가와 독자가 있어야 의미가 있을 수 있겠다.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서 쓴 작품도 비슷할 것 같다. 작품의 분위기가 작가 자신에게 너무 낯익은 풍경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투영되어 있는 작가의 미의식은 편애의 산물일 가능성 조차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글들을 많이 썼다. 그런 글들을 쓰고 나면 몸(존재리고는 하지 않겠다)이 가벼워지고는 했다. 나는 가사 좋은 유행가 부르기를 지금도 좋아한다. 그런 노래 몇 곡 부르고 나면 몸이 많이 가벼워진다.(20쪽)

예를 들어, 글을 쓰는 사람이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서, 어쩌지 못해서 글을 썼다고 하더라도...

글을 읽는 독자가 없다면 그 글은 별반 의미가 없다.

반대로, 읽는 독자가 없는 글이라면, 나무를 베어가며 아깝게 책으로 만들어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는, 여기서 구분지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추어라면,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서라면,

인터넷도 발달하였고 블로그도 활성화되었고,

스마트폰의 영향으로 웬만한 네트워크와 소통도 가능하니까,

책이 아니고도 얼마든지 인터넷 매체를 통하여 글을 쓸 수 있고,

글을 매개로 교류와 의사소통도 가능하니까 말이다.

 

프로의 글쓰기는 글을 쓰고나서, 본인의 몸이 가벼워지는 자기만족감 말고도,

글을 읽게 되는 독자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하고, 어떤 의미와 방향으로든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람의 삶은 나남의 삶에 간섭하면서 끊임없이 그 삶을 변화시켜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남의 삶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변화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나는 가정합니다.

  첫 번째는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것과 같은 물리적인 변화의 단계인데, 나는 이것을 '변형'이라고 한번 불러봅니다. 두 번째는 포도가 포도주가 되는 것가 같은 화학적, 연금술적 변화의 단계입니다. 이것은 '변성'이라고 불러보기로 합니다. 세 번째는 포도주가 그것을 마신 사람 안에서 성체가 되기도 하고 술주정이 되기도 할 때 일어나는 제3의 초물리적인 변화의 단계인데, 나는 이것을 '변역變易, transubstantiation'이라고 한번 불러봅니다. 이 변역의 특징은 끊임없이 변역의 연쇄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이라고 부르는 종교의 가르침이 여러 각도로 달리 해석되는데도 불구하고 연쇄 작용을 통하여 끊임없이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연쇄 작용을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나는 내가 경험하는 사물을 무엇으로 변화시키고 있는가. 저 사람은 저 사람이 경험하는 사물을 무엇으로 변화시키고 있는가.'

  이것은 내가 들게 된 화두이자, 나와 남이 지어내는 행위를 평론할 때 자주 써먹는 잣대이기도 합니다. 소설이라는 것이 변역의 역사에 가담하는 노릇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69~70쪽)

 

내가 이 곳 알라딘 서재에 둥지를 틀고 글을 올린지도 3년 반 정도 되었다.

이 동네에 있는 숨은 고수들에 비하면 '새발의피'이고, '언발에 오줌누기'정도이지만,

내가 이 곳에 글쓰기를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나이가 들면서 깜박깜박 하더라도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그 순간의 감동을 잊지않고 기록해 두고 싶어서 였고,

좋아하는게 책이다 보니 책관련 인터넷서점을 이용하게 되었다.

이곳에 글을 쓰면서 지키는 원칙이 몇가지 있는데,

첫째는 지나치게 어렵지 않은 말을 쓰고,

읽는 사람들을 생각하여 끊어 읽기 단위로 잘라서 문장을 만든다.

 

어법 운운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난 책을 낼게 아니고,

그냥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읽기 좋으면 그만이다.

 

또 한가진, 될 수 있으면 평점에 인색하게 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차피 나는 좋아서 책을 읽는 아마추어이고,

책을 낸 사람들은 적어도 직업적인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인데,

나의 평점이 인색하다고 하여 책을 읽을 사람들이 안 읽을 것은 아니고,

책이 아무리 별로라고 하여도 이미 책으로 만들어진 것은 나무로 되돌릴 수가 없으니 말이다.

정 후한 평점이 불편하다 싶으면,

개인적인 감상을 본문에 남기거나, 평점을 남기지 않는 페이퍼로 대신한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쓰기만 하면 초단은 된다. 이렇게 쉬운 것을 왜 여느 사람들은 하지 못하는가? 유식해보이고 싶어서 폼 나는 어휘를 고르고 멋있게 보이고 싶어서 제 생각을 비틀다 제 글의 생명이리고 할 수 있는 생각을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도올 김용옥의 글을 읽을 때 유의해야 할 것은 그가 구어체 문장을 쓴다는 점이다. 그의 책은 내용이 어려운데도 술술 읽힌다.

ㆍ이런 글을 읽을 때는 속어 비어에 묻어 있는, 쓴 이의 '껍진껍진한 느낌까지도 읽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문학동네 바깥사람이었던 조영남 형의 글을 꼼꼼하게 읽는 것은 시종일관,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쓰는 구어체, 즉 입말글이기 때문이다. 나는 까다로운 문법가들과는 달라서 구어체로 쓰인 문장의 부적절한 표현 같은 것은 문제 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구어체 문장에 실린 생각이지 글 자체는 아닌 것이다.(81쪽)

 

 

그러나 사전도 맹신할 물건은 못 된다. 아주 간단하게만 설명하면 그 까닭은 이렇다. 사전에 나오는 설명은 개념 이해의 길라잡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전 속의 말은 박물관의 언어이지 펄펄 살아있는 저잣거리의 말이 아니다. 사전적 해석만 좇아 번역한 문장이 종종 죽은 문장이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100쪽)

이 부분이 내가 이윤기 님을 다시 보게 된 부분이다.

중요한 것은 문장에 실린 생각이지 글 자체가 아니라는 말.

사전도 맹신할 물건이 못 되고,

사전 속의 말은 박물관의 언어이지 펄펄 살아있는 저잣거리의 말이 아니라는 부분.

 

평생에 거쳐 연구하고 노력하고,

이제사 그 연구와 노력의 결과물이 하나, 둘 씩 나와줘야 하는데,

그간의 연구와 노력이 아깝고, 안타깝다.

 

근데 이건 어디까지 남아있는 우리의 생각일뿐,

정작 본인은 학자나 연구가, 또는 문장가로써의 삶을 살고자 한게 아니라,

생각이 살아있는 글쓰기, 삶이 녹아있는 글쓰기를 구사하고자 했던 현역 작가이고 번역자이길 원했던 것 같다.

 

그러고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부끄러웠다고 고백하고, 그의 지적을 새 책에 반영해도 좋다는 양해를 얻었다. 정확한 지식과 예리한 눈을 겸비한 분이 감시해주고 있다는 것은 역자로서는 아픈 일이지만 우리 번역 문화에는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싶었다. 이렇게 가야 하는구나 싶었다. 철학자 강유원 박사께 나는 아직도 고마워한다.(110쪽)

 

'장미의 이름'관련, 이렇게 출판되어 나와 있는 책을 거둬들이고 다시 번역, 만들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번역가가 잘못을 시인하는 일은,

그가 본인의 개인적인 안위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우리나라 번역 문화의 발전을 생각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하겠다.

이런 일은 '장미의 이름' 말고도, '비밀의 계절'또한 본인이 세월이 흐른 후에 재번역하게 되는데,

결과는 차치하고라도 과정만으로 높이 살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접은 생각이지만,

한때 장르소설을 너무 좋아해서 장르소설 번역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원래의 정서와 감각 그대로 접하고 싶어서 꿈꿨었는데,

그 일의 핑크빛 분홍분홍한 부분만을 생각하고,

숨은 고통과 노력은 바라보지 못했었다.

 

근데, 어떤 번역자는 누가 목에 빨대를 꽂고 피를 들이키는것 같이 피가 바짝바짝 마른다고 했고,

또 다른 번역자는 평생 번역 생활에 얻어 가진거라곤 치질과 손가락 관절염이라고 했다.

정말 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아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쓴 글을 어디선가, 누군가 열광을 하며 읽어줄 독자도 존재하리라고 믿는다.

  외국어 번역 공부, 나는 참 어렵게 했다. 많이 고통스러워하고 많이 절망했을 뿐, 한 번도 만족을 경험하지 못했다. 길이 보이지 않는 곳을 많이, 그리고 오래 걸었다. 판화가 이철수는 길을 잃고 오래 걸으면 그게 곧 길이 되는 수도 있다고 위로하고, 시인 강연호는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고 격려하지만 그 위로와 격려는 들을 때마다 늘 슬프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절망하지 않아도 될 모양이다. 학원이라는 데서 몇 달만 수련하면 '초벌 번역'이라는 것으로 수입이 짭짤해질 모양이다. 하지만, 마무리 번역은 누가 하는데?(116쪽)

이렇게 돈 되는 초벌 번역만 하고 끝내라고 해도,

정말 쓰지 않고 못 배길 사람이라면 글의 마무리가 궁금해서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음을 알겠기 때문이다.

 

옛날에 전공이랑 관련하여 지방의 단과대에서 한학기동안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여러가지로 힘이 들었지만, 가장 힘이 들었던건,

수업을 하느라고 말을 쏟아내고 나면,

참을 수 없는 결여로 허덕였고,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책이나 들입다파는 걸로 그 결여를 매울 수 있을거라고 착각하곤 했었다.

 

누군가에게 가르치고 설명하는 것과 번역의 공통점은,

가르치는 자와 번역자가 중개자가 되어 소통을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다.

가르치는 자가 아무리 잘 알고 있어도 배우는 자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고,

마찬가지로 번역자가 번역하는 언어와 번역되는 언어, 둘다를 잘 알고 있어도 독자들이 제대로 알아 먹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는 것인데,

내가 보기에 이건 소통하려는 의지의 문제라기 보다는 눈높이에 관한 문제인것 같다.

 

예를 들면, 이윤기는 살아 움직이는 조르바를, 조르바를 춤추게 하기 위하여,

이윤기가 가장 자신 있는 특유의 사투리를 구사하여 번역한다.

조르바에게 생명력을 불어넣고, 살아나 춤추게는 하였지만,

이윤기가 구사하는 사투리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한국의 시골 촌놈으로 재탄생시킨다.

지난해 3월, 가까이 사귀어 모시던 한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당신의 소설에서 당신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져야 한다, 당신에게 너무 익숙한 풍경들이 당신의 소설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했다.(173쪽)

번역이나 소설일때는

"당신의 글에서 당신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져야 한다"

는 원칙이 통용되지만,

이런 종류의 글일때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이윤기의 개성이 잘 살아있는 이런 글들이야 말로 이윤기 님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높이를 맞추는 일이다.

이윤기는 번역을 하면서 원서를 집어 던진 적이 한두번이 아니지만, 글을 쓰고 번역을 하면서 가장 행복해 했다.

 

난 언제 가장 행복한가 돌이켜보니,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책을 읽은 느낌을 그 책을 읽은 또 다른 이들과 공유할때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번역은 내 몫이 아니지만,

적어도 좋은 책을 읽고 그 느낌을 공유할 때 난 행복함을 느낀다.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게 이윤기의 글쓰기라면,

이윤기의 글을 읽고 행복해 할 수 있는 독자인 것이, 오늘 고맙다.

 

춤을 출 수 없어도, 안분지족 할 수 있으니 이만 하면 됐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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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사이 2013-12-05 19:53   좋아요 0 | URL
'춤을 출 수 없어도, 안분지족 할 수 있으니 이만 하면 됐지 싶다.'
마지막 이 한 줄에 끄덕이며 공감하고 갑니다.


sslmo 2013-12-10 15:40   좋아요 0 | URL
근데 영화를 다시보기 하니, 조르바 댄스 왕 멋진걸요~^^
우리 어깨동무하고 "쉘 위 댄스~?" 흉내라도 내야겠어요, ㅋ~.

2013-12-05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3-12-10 15:49   좋아요 0 | URL
저도 나귀님도 알고, ㅋ~.
이윤기 님의 쪼갬번역 사건도 알고요, ㅋ~.

원래 고민은 웬만하면 기억되지 않는 법이고,
그리고 고인은 웬만하면 말이 없는 법이죠.

실은 저 혹시나 싶어 '장미의 이름' 다시 읽어 보려 하고 있는데...
좋은 것들만 기억하고 싶어요, ㅋ~.
 
수학자의 아침 문학과지성 시인선 437
김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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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이라고 하면 '마음 사전'으로 처음 만나고,

'시옷의 세계'라는 산문집으로 입지를 굳혀셔 그런지,

'수학자의 아침'이라는 시집을 읽는데, 왠지 낯설었다.

어렵지 않은, 일상의 흔한 낱말들을 시어로 썼는데도,

이상하게 다가오지 못하고 자꾸만 겉돌아서, 읽기가 좀 힘들었다.

 

처음엔 이게 '마음사전'의 그 방식이랄까 형식이 강하게 각인되었던 터라,

익숙한 예전의 산문형식을 구태여 운문 형식에 꿰어맞출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그녀가 낯설게하기 기법을 취한 건,

산문과 운문이라는 형식적인 면이 아니라,

단어나 낱말의 고정관념이 주는 선입견 같은 거였나 보다.

 

왜냐하면 요번의 그것도 시집의 형식을 취했지만,

시라기보다는, '정의 내리기'가 특징인 사전 형식으로 씌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냐 하면,

'자연이나 삶에 대하여 일어나는 느낌이나 생각을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글'이 시라는데,

이 시집의 것들은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라기보다는 대표성을 띤 것이,

살짝 관심을 분산시키면 중언부언 말이 길어지는 것이,

내가 보기엔 산문 형식에 가깝다.

 

오, 바틀비

 

  모두가 천만다행으로 불행해질 때까지 잘 살아보자던 맹세가 흙마당에서 만개해요, 사월의 마지막 날은 한나절이 덤으로 주어진 괴상한 날이에요, 모두가 공평무사하게 불행해질 때까지 어떻게든 날아보자던 나비들이 날개를 접고 고요히 죽음을 기다리는 봄날이에요, 저것들을 보세요, 금잔화며 양귀비며 데이지까지 모두가, 아니오, 아니오,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루를 견뎌요, 모두가 아름답게 불행해질 때까지 모두가 눈물겹게 불행해질 때까지, 온 세상 나비들은 꽃들의 필경사예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몰아쉬는 한숨으로 겨우 봄바람이 일어요, 낮달이 허연 구멍처럼 하늘에 걸려요, 구멍의 바깥이 오히려 다정해요, 반나절이 덤으로 배달된 괴상한 날이에요, 모두가 대동단결하여 불행해질 때까지 시들지 않겠다며 꽃잎들은 꽃자루를 꼭 붙든 채 조화처럼 냉정하구요, 모두가 완전무결하게 불행해질 때까지 지는 해는 어금니를 꽉꽉 깨물어요,

 

위 시는 문장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문장이 끝났나 하고 쳐다보면 쉼표가 단정히 박혀 있다.

심지어 문장의 맨 마지막 진짜 마침표가 오지 않을까 기대만발한 그곳까지 쉼표가 들어 앉았다.

 

낮달이라는건 어쩌면 때를 잘못 찾아 하늘에 걸려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달은 항상 떠 있는 것이고,

태양이랑 너무 가깝지만 않으면, 태양빛을 반사해서 비치게 되어있는  것이다.

암튼, 낮달은 푸른 하늘에 하얀 색으로 걸리는 것이고,

가끔 보는 낮달보다

늘 보는 하늘과 하늘빛이 오히려 다정한건 당연지사다.


이 시는 또 어쩔 것인가?

이 시 또한 어렵거나 처음 접하는 단어는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 고정관념과 선입견에서 탈피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

 

주동자

 

장미꽃이 투신했습니다

 

담벼럭 아래 쪼그려 앉아

유리처럼 깨진 꽃잎 조각을 줍습니다

모든 피부에는 무늬처럼 유서가 씌어 있다던

태어나면서부터 그렇다던 어느 농부의 말을 떠올립니다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을 경멸합니다

나는 장미의 편입니다

 

장마전선 반대를 외치던

빗방울의 이중국적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럴 수 없는 일이 모두 다 아는 일이 될때까지

빗방울은 줄기차게 창문을 두드릴 뿐입니다

창문의 바깥쪽이 그들의 처지였음을

누가 모를 수 있습니까

 

빗방울의 절규를 밤새 듣고서

가시만 남아버린 장미나무

빗방울의 인해전술을 지지한 흔적입니다

 

나는 절규의 편입니다

유서 없는 피부를 경멸합니다

 

쪼그려 앉아 죽어가는 피부를 만집니다

 

손톱 밑에 가시처럼 박히는 이 통증을 선물로 알고 가져갑니다

선물이 배후입니다

장미 꽃이 떨어지는 걸, 투신했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걸 보면 시인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닌가 보다.

그동안 노력을 하면 웬만큼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문학적, 내지는 예술적 감수성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닌가 보다.

노력으로 타고난 예술적 감수성과 자질은 어찌할 수 없더라도,

이렇게 다른 사람의 예술적 감수성을 많이 접하다보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난 간혹 어느 만큼 타고난 재능이고,

어느 만큼 노력에 의해서 연마가 가능한 부분인지,

혼란스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암튼 부럽다고 퍼질러 앉아 좌절할 것이 아니라, 꾸준히 노력하는 수밖에ㆍㆍ.

주제파악을 하고 나아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

그게 글 잘하는 사람의 공통점 아니던가?

난 노력하는 것 만큼은 자신있으니,

주제파악하는 능력만 키우면 될 듯~^^

 

수학자의 아침

 

나 잠깐만 죽을게

삼각형처럼

 

정지한 사물들의 고요한 그림자를 둘러본다

새장이 뱅글뱅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인겨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안겨 있는 사람을 더 꼭 끌어안으며 생각한다

 

이것은 기억을 상상하는 일이다

눈알에 기어들어 온 개미를 보는 일이다

살결이 되어버린 겨울이라든가, 남쪽 바다의 남십자성이라든가

 

나 잠깐만 죽을게

단정한 선분처럼

 

수학자는 눈을 감는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숨을 세기로 한다

들이쉬고 내쉬는 간격의 이항대립 구조를 세기로 한다

 

숨소리가 고동 소리가 맥박 소리가

수학자의 귓전에 함부로 들락거린다

비천한 육체에 깃든 비천한 기쁨에 대해 생각한다

 

눈물 따위와 한숨 따위를 오래 잊고 살았습니다

잘 살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요

 

잠깐만 죽을게,

어디서도 목격한 적 없는 온전한 원주율을 생각하며

 

사람의 숨결이

수학자의 속눈썹에 닿는다

언젠가 반드시 곡선으로 휘어질 직선의 길이를 상상한다

수학자의 삶은 시인이나 수필가의 그것과는 다르리라고 생각하지만, 선입견 되시겠다.

시인의 시어가, 수학자의 기호이다.

나름대로의 규칙과 논리를 가지고 있다.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쩜...자신의 논리와 가치관의 잣대를 가지고 타인을 평가하려 들지 않는 것 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잣대는 자신을 벼리고 다잡는 잣대로서만 효용을 발휘할 수 있다.

들숨과 날숨의 크기를 세어 이항대립구조를 만드는것 또한,

누구의 들숨과 날숨인가 라는 기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러워 하지도 않을 것이고, 낮추어 조롱하지는 더 더욱 않을 것이다.

위험해, 조심해, 괜찮아...하루에 한 가지씩이라도 과분하게 넘쳐나지는 않는지 말이다.

다독이는 대상이 자기 자신이든, 타인이든, 간에...

넘치지 않아야 잠재우고 다독일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 누구도

조롱하지 않는 사람으로 지내기로 한다

위험해, 조심해, 괜찮아,

하루에 한 가지씩만 다독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여행자' 부분)

이 시집의 발문은 황현산이 썼다.

'슬프지만 씩씩한 소연이에게'란다.

난 김소연의 시는 왠지 실험적인 것 같아서 불안했지만,

그래도 황현산 님의 발문은 신뢰가 간다.

혼자서

 

상가의 컴컴한 내부가 최대한 컴컴해진다

칼을 대어 틈새를 도려낸 듯 빛이 새어 나와도

 

간절함은 저렇게 표현돼야 한다

최대한 입을 꽉 다문 채

 

뺨에 접착된 핸드폰을 꼭 감싸고

최대한 고개를 숙인 저 사람처럼

 

귀는 아가미가 되었다

물고기가 되었다

흘러 다녔다

 

현수막은 최대한 환해진다

달은 관람차처럼 최대한 가까이 다가온다

 

저 마네킹은 눈동자가 있다

저 조각상은 눈동자가 없다

 

최대한 인간을 닮기 위해서

 

밤은 가장 춥다

분노는 이런 식으로 표현해야 한다

최대한 급진적으로

집은 구겨진다

쓰레기차가 쓰레기봉투를 쓸어 담듯

마지막 아버지를 최대한 쓸어 담고서

 

컴컴한 내일들이 박스처럼 쌓여 있다

오늘이 내일을 벼랑으로 데려간다

 

창문을 열면 바람이 들어온다

휙, 내 냄새가 난다

 

반대말

 

컵처럼 사는 법에 골몰한다

컵에게는 반대말이 없다 설거지를 하고서

잠시 엎어 놓을 뿐

 

모자의 반대말은 알 필요가 없다

모자를 쓰고 외출을 할 뿐이다

모자를 쓰고 집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게 가끔 궁금해지긴 하겠지만

 

눈동자 손길 입술, 너를 표현하는 너의 것에도 반대말은 없다

마침내 끝끝내 비로소, 이다지 애처로운 부사들에도 반대말은 없다

 

나를 어른이라고 부를 때

나를 여자라고 부를 때

반대말이 시소처럼 한쪽에서 솟구치려는 걸

지그시 눌러주어야만 한다

 

나를 시인이라고 부를 때에

나의 반대말들은 무용해진다

 

도시에서

변두리의 반대쪽을 알아채기 시작했을 때

지구에서 변두리가 어딘지 궁금한 적이 있었다

뱅글뱅글 지구의를 돌리며

 

이제 컵처럼 사는 법이

거의 완성되어간다

 

우편함이 반대말을 떨어뜨린다

나는 컵을 떨어뜨린다

완성의 반대말이 깨어진다

아니나 다를까?

쓸쓸함의 절정은 고고함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시들이 등장한다.

 

연두가 되는 고통

 

왜 하필 벌레는

여기를 갉아 먹었을까요

 

나뭇잎 하나를 주워 들고 네가

질문을 만든다

 

나뭇잎 구멍에 눈을 대고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나뭇잎 한 장에서 격투의 내력이 읽힌다

 

벌레에겐 그게 긍지였겠지

거긴 나뭇잎의 긍지였으니까

서로의 흉터에서 사는 우리처럼

 

그래서 우리는 아침마다

화분에 물을 준다

 

물조리개를 들 때에는 어김없이

산타클로스의 표정을 짓는다

 

보여요? 벌레들이 전부 선물이었으면 좋겠어요

새잎이 나고 새잎이 난다

 

시간이 여위어간다

아픔이 유순해진다

내가 알던 흉터들이 짙어진다

 

초록 옆에 파랑이 있다면

무지개, 라고 말하듯이

 

파랑 옆에 보라가 있다면

멍, 이라고 말해야 한다

 

행복보다 더 행복한 걸 궁지라고 부르는 시간

신비보다 더 신비한 걸 흉터라고 부르는 시간

 

포개어진 의자

 

앉을래?

의자가 의자에게 말했다

서성일래,

의자가 대답한다

 

나무들이 서 있길래

뉘어주려고 폭풍이 들이닥쳤다

우리는 누운 나무를 보며

재앙을 점쳤다

 

잠든 사람의 조금 벌어진 입술이 기어코 천진해질 시간에

계절이 바뀌었고

틈을 벌린 채 나무는 새에게

가지를 내어 주기 시작한다

 

의자 하나가 그 곁에 있고

나무의 그림자에서 의자가 쉬고 있다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의자에 앉는다

 

아주 잠깐 고달픔을 잊기 위해

찻집 창가에 앉아 있는 여자애에게

기어코 한 남자가 다가가듯이

 

의자가 되면 의자에 앉을 수 없게 된다

사람이 되면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된다

 

의자가 의자에 앉아 본분을 잊는 시간

우리는 재앙을 점치지만

열애처럼 사람은 떨어져버린다

입을 약간 벌린 채로

씩씩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새로운 형식을 취하면서도 당당하고 망설임 없이,

돌아가고 구부러진 곡선이 아니라,

직선의 형태로 시가 쓰여졌음을 일컫는 것 같다.

난 그렇게 해석하고 싶다.

 

때문에 김소연의 이 시집이 좋은 것은,

나에게 좋은 것은,

나도 노력하면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안겨주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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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12-03 17:49   좋아요 0 | URL
저는 개인적으로 김소연 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전 솔직히 김소연 시인이 별로 시인 같지가 않아요.
시가 주는 긴장감도 없고, 운율도 그닥 뛰어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김소연 시인은 시보다는 에세이를 잘 쓸 것 같아요.

sslmo 2013-12-05 17:03   좋아요 0 | URL
헤헷~^^
평점에 속으시면 안된다는 말씀.
그래도 이 시집 전 돈 주고 샀고,
읽느라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 만드느라고 베어넘겨진 나무를 생각하면,
평점이 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여, 죄송~(__)

20324010 2019-06-26 10:11   좋아요 0 | URL
두 분 다 수학자의 아침이라는 시가 얼마나 잘 쓴 시인지 모르시고 이런 농을 던지시는 것 같아서 놀랍고도 슬픕니다. 김소연 시인은 기본적으로 시를 잘 쓰는 시인입니다. 못 알아보셨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나중에라도 다시 한 번 시를 펼쳐서 읽어보셨으면 싶습니다. 긴장이 없고 지루하다면 그건 소설처럼 에세이처럼 시를 읽으려고 해서 그러신 것 같네요.

sslmo 2019-06-26 14:38   좋아요 0 | URL
님의 댓글 잘 읽었습니다.
님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저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거겠죠.
개인의 주관적인 감상을 강요받는다고 생각하니 썩 유쾌하진 않습니다만,
그런 의도의 댓글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하죠~^^
 
눈사람 여관 문학과지성 시인선 434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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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한옛날에...아들이 유치원을 다닐 때였다.

아들을 재워놓고 새벽녁에 밀린 공부를 하다보니 항상 잠이 부족했다.

잠을 쫒는데는 차가운 아이스크림만 한것이 없었고,

그날도 새벽에 냉동실 문을 여니,

내가 사다놓은 기억이 없는데...스티로폼 아이스크림 박스 안에 하얀 아이스크림 두덩이가 들어 있는거였다.

난 쫒아지는 잠을 쫒느라 맛을 느낄 새도 없이,
초코시럽 딸기시럽을 듬뿍 얹어 허겁지겁 먹었었다.

 

사달이 난걸 깨닫게 된건 다음날 아침이었다.

냉동실 문과 냉장실 문을 번갈아 열었다 닫았다 하던 아들이 대성통곡을 하는거다.
“너무 쓸쓸하고 외로워서...눈사람을 동생 삼으려고 했었는데, 냉장고가 고장났었나 봐. 으엉~ㅠ.ㅠ”
그 눈사람이 내 입 속으로 들어갔다는 건 영원한 비밀이고,

그런 사연이 있어서인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난 이 시집의 제목 '눈사람 여관'을 보자 '냉장고 내지는 냉동실?'하는 엉뚱한 연상이 지어졌다.

 

암튼, 옛날이나 지금이나 내 주변에는 입만 열었다 하면... 너무 쓸쓸하고 외로운 사람 뿐이다.

이렇게 나와 내주변의 쓸쓸함과 외로움도 버거운지라,

글 전반적으로 묻어나는 쓸쓸함과 외로움의 정서를 감당하기 힘들어 좀체로 안 읽으려드는,

이병률의 시집을 읽게 된건, 시집의 발문을  내가 애정하는 유희경이 썼기 때문만은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톡 까놓고 얘기하자면, 내가 이병률의 글에서 느끼는 정서를 그도 그렇게 느끼는지 궁금했다.

그 또한 그같이 느낀다면,

그에 미루어 감성적으로 한참 무딘 나는 감당해낼 만한 것을, 괜히 엄살 떨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서둘러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표현방식과 급은 다르지만 내가 느끼는 감정을 유희경도 비슷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내 무딘 감성을 시인과 비교하여 뭘, 어쩌겠는 거냐고 묻는다면 할말이 없을 따름이지만,

어쩌겠는가, 비교를 통한 경쟁심으로 전의를 불태우며,

그런 방법으로 여지껏 살아온 불쌍한 영혼인 것을~--;

ㆍ그가 뒤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따금 내가 앞서다가 뒤를 돌아보면, 그는 사라져버렸거나, 아주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내가 돌아보는 감각에서 찾아오는 여러 감정을 지우기 위해 늘 그를 배웅해야 했다. 먼저 가는 그는 돌아보지 않는다. 그때마다, 내 안에 바람이 불어온다. 그래서 구멍이 생기는 것을 안다. 이상한 비유이지만, 더 좋은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처음엔 이것이 아쉬움이라고 생각했다.ㆍㆍ그 감정은 그가 나를 돌아보지 않기 때문에, 나를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한 감정은 더 앞선 상황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언제나 잠시, 있는 사람이었다.(136쪽)

암튼 유희경 발문 속의 이런 구절에 기대어서 위로를 받으려고 했던 나는, 이내 먹먹해지고 말았는데...,

ㆍ그 자리엔 나도 없고 사실상 당신도 없다. 모두 잠시,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게 시인이 지우고 쓰려는 시일 수도 있지 않을까. 비밀인데, 사실 모두가 알고 있는 비밀이기도 하지만, 시인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시인은 듣는 사람이다. 듣고 적는 사람이다. 그렇게 언어의 변방에서 놀라운 속도로(혹은 이동으로) 중심에 닿는 이다.ㆍㆍ그들은 각자, 자신만의 울림통을 가지고 있다.(138쪽)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쓸쓸함의 정서는 당연한 것이라고 얘기하는듯 하기 때문이었다.

시인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고 적는 사람이니까,

발문을 쓰고 있는 유희경 또한 시인이니까,

독자가 되어 시집을 읽을때는 나와 같이 쓸쓸함을 느낄 수 있는거지만,

그 또한 시인이라는 자리로 돌아가면,

쓸쓸함을 흩뿌려야 된다고 얘기하는듯 해서 말이다.

 

내가 'ㆍㆍㆍ그들은 각자, 자신만의 울림통을 가지고 있다.(138쪽)'라는 문장에 집중해 있는 사이,

유희경은 이렇듯 나에게 다가오는 듯 비껴가 버리고 말았고,

난 태연을 가장하며 관심을 딴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책 뒷표지에 나오는

'아픈 데는없냐고 당신이 물었다.

 없다, 라고 말하는 순간

 말과 말 사이의 삶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물소리가 사무치게 끼어들었다.'

는 구절을 읽다가 '김선우시인'이 쓴 수필집 제목'어디 아픈데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가 떠올랐고,

이 시집 바로 전에 읽었던 이영광의 시집 속에도 비슷한 뉘앙스의 구절을 발견했었다.

적어도 이 세 시인들은 비슷하게 시작하는 발제를 가지고,

각자 자기만의 울림통을 가지고 수필로, 시로, 시집의 헌사 대신으로...만들어내는 것이 색다른 호기심으로 다가왔다.

가장 쓸쓸하고 외롭기로 따지면, 이영광 시 속의 '아직도 만나니?'하는, 내게는 절규로 들린 그 문장이었지만 말이다.

 

결국 유희경은 시집의 헌사라는 형식을 빌어,

시인들이란 존재는 어쩔 수 없이 쓸쓸함을 흩뿌리는 존재들이고,

그걸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느냐는 읽는 독자의 몫이다, 라고 얘기하는 듯 하다.

하지만, '추측이 깨달음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는지,

난 그의 이런 시들을 읽으면서,

한없이 쓸쓸하고 그리하여 씁쓸 또는 쌀쌀해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혼자

 

나는 여럿이 아니라 하나

나무 이파리처럼 한 몸에 돋은 수백 수천이 아니라 하나

파도처럼 하루에도 몇백 년을 출렁이는

울컥임이 아니라 단 하나

하나여서 뭐가 많이 잡힐 것도 같은 한밤중에

그 많은 하나여서

여전히 한 몸 가누지 못하는 하나

 

한 그릇보다 많은 밥그릇을 비우고 싶어 하고

한 사람보다 많은 사람에 관련하고 싶은

하나가 하나를 짊어진 하나

 

얼얼하게 버려진, 깊은 밤엔

누구나 완전히 하나

가볍고 여리어

할 말로 몸을 이루는 하나

 

오래 혼자일 것이므로

비로소 영원히 스며드는 하나

스스로를 당다걸고 스스로를 마시는

그리하여 만년설 덮인 산맥으로 융기하여

이내 녹아내리는 하나

 

'나비를 그리는데 나비가 왔다/시를 쓰는데 시가 오지 않는 것과 다르다'하는 '시는'을 읽다가는,

다락방 님, 이유경의 책'독서공감, 사람을 읽다'의 한구절이 생각났다.

그녀는 '바람의 잔해를 줍다'를 읽다가,

'내 가슴 속에 있던 고치가 찢어져 나비 한 마리가 날아가려고 날개를 활짝 펼쳤다'는 표현을 보고

소설가가 되는 걸 포기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읽으며 감탄하는 일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그걸 기록으로 남겼고,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책으로도 냈다.

그녀라면 '누에고치를 잘 키워 번데기를 탈피하고 한마리 나비가 되어 날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쓸쓸하기로 따지면, 몇몇 사람의 시가 쓸쓸한 것이고,

시가 아니고도 얼마든지 글이 쓸쓸해질 수는 있는것이지만,

모든 이의 글이 다 쓸쓸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꿈이나 희망 따위를 노래하는 글이었음 좋겠다.

 

실은 '다락방'님이 생각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는데,

그녀의 책 속에서 발견한 '결혼은 나의 선택이다'라는 문장을,

이 시인에게 슬쩍 바꾸어 적용하고 싶은 시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결혼은 하기 힘들겠다~--;'

 

면면

 

손바닥으로 쓸면 소리가 약한 것이

손등으로 쓸면 소리가 달라진다는 것을 안다

그것을 삶의 이면이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먹을 것 같지 않은 당신

자리를 비운 사이 슬쩍 열어본 당신의 가방에서

많은 빵을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을 삶의 입체라고 생각한다

 

기억하지 못했던 간밤 꿈이

다 늦은 저녁에 생각나면서 얼굴이 붉어진다

나는 그것을 삶의 아랫도리라 생각한다

 

달의 저면에는 누군가 존재한다고 한다

아무도 그것을 알 수는 없고

대면한 적 없다고 한다

 

사람이라고 글자를 치면

자꾸 삶이라는오타가 되는 것

나는 그것을 삶의 뱃속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다 똑같다.

먹고 싸고 지지고 볶고...그러고 살아가는거다.

먹지를 않으면 (화장실을 가려고) 자리를 비울 일도 없을거고 말이다.

먹고 싸고 지지고 볶지 않는 것은, '꿈 속의 그대'일 뿐이다.

평생 꿈같은 연애나 하고 사는 수밖에, ㅋ~.

 

낙화

 

그대가 일하는 곳 멀리 자전거를 세우고

그대를 훔쳐보는 일처럼

 

반쪽의 반쪽밖에 안 되는 나는

비겁이라는 꽃 이파리 머리에 꽂고

시시덕 시시덕 오늘도 얼마나 비겁했던가요

 

당신이 자전거 쪽으로 다가와

우산을 버리고 돌아설 때에도

나는 비겁을 뒤집어쓰고 몸을 돌려 서 있습니다

그 자리에 당신 그늘이 생깁니다

 

천 년에 한 번 사랑을 해서 그런 거라고

그게 아니라면 머릿속에 그토록 많은 꽃술이 매달릴 수가

천 년에 한 번 죽게 될 테니 그렇게 된 거라고

아니면 그토록 한사람의 독으로 서서히 죽어갈 수야

 

혼자인 것은 비겁하지 않은데

당신을 훔쳐보는 일은

당신 하는 일 앞에서 비겁한 일이어서

 

십 년을 백 년처럼

당신을 보러 이곳에 오고

당신은 어느 바다로 흘러가지도 않으며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주차할 수 없는 구역에

단독 주차하는 나를 위해

마냥 봄처럼 십 년을 당신이 있습니다

위 시는 해석은 불가능하지만, 왠지 좋았던 시다.

시의 행간에 뭔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

읽으면서 자꾸 목구멍으로 울음이 차올랐다.

침을 꼴깍하고 눌러삼키면서,

목구멍으로 치미는 울음도 같이 눌러삼켰다.

그는 '눈사람 여관'에서,

'나흘이면 되겠네요/영원을 압축하기에는/저 연한 달이 독신을 그만두기에는'이라고 했고,

어느 시인은 달이 한번 눈 질끈 감았다 뜨는 걸 한달이라고 하던데,

이 시의 화자도 바라만 보다 말 것이 아니라면,

부디 아련한 시간도 바삐 지나 갔으면 좋겠다.

 

붉고 찬란한 당신을

 

풀어지게

허공에다 놓아줄까

번지게

물속에다 놓아줄까

이 시의 또 다른 제목은 '낙화'정도 될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다지도 붉고 찬란한 당신을,

허공이나 물속에다 풀어지거나 번지게 놓아줄 수 있는가 말이다.

 

차라리, 비좁은 내 마음의 영토안에 가두어버리고 마는 한이 있더라도~--;

 

저녁길

 

문득 스승의 목소리가 악기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햇빛의 반대 방향으로 자라는

나무였다는 생각을 한다

 

봄 꿈을 데려오시었다가

봄꿈을 다 꾸지 못하고 가시는

 

한 사람 발소리가

홀로 두었던 빈 곽이 터지는

소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잘 도착하셨나 하여

자꾸 안쪽 먼 데를 들여다보느라

며칠째 문에 머리를 찧는다

 

책을 눌러놓으라시며

내게 돌을 주워 주시던

저녁 강가의 그 손길

 

그 후로 그 무엇이 아니라

몰래 나를 눌러놓고 있음을

이제는 아시는 그 눈길

 

위 시를 읽다가, 언젠가 친구가 준 작은 돌멩이를 꺼내들었다.

원래는 더 크고 뾰족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돌멩이였을 것이다.

뾰족하고 다듬어지지 않았기에 쓸쓸하고 외로웠었을 그 돌멩이가 이렇게 작고 동글한 조약돌이 되기까지는 많은 사연이 있을게다.

 

 

친구는 돌멩이를 통하여 우주의 정기를 받아들이고 자연과 소통을 하라, 뭐...그런 어려운 말을 했던것 같은데,

난 이 시의 돌멩이처럼 문진 대용으로, 내 자신을 눌러놓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얼마나 자주 만지고 주물러댔는지, 돌멩이는 이제 맨들맨들해져 있다.

근데, 돌멩이가 날 눌러놓은 것인지,

아님 내가 돌멩이가 날아가지 못하게 붙들고 있는 것인지,

알쏭달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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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11-30 20:43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전 냉장고 문을 열때마다 조심합니다. 혹시 아이들이 먹으려고 아내가 사다둔 것을 먹지나 않을까 싶어서요. 제가 멋모르고 한번 먹었다가 애들이 눈물을 글썽였던 기억이 있어서요.

sslmo 2013-12-05 17:05   좋아요 1 | URL
담배를 안 태우시는군요?
냉장고 문을 열고 군것질 거리를 찾으시는걸 보면, ㅋ~.

전, 무조건 어른이 먼저 먹어야 한다는 주의입니다.
왜냐 '늬들은 나중에 더 좋은 거 얼마든지 먹을 수 있잖아~^^'

[그장소] 2015-12-11 01:43   좋아요 0 | URL
좋군요 ㅡ잘 보고 갑니다 ㅡ
돌맹이가 예뻐요~^^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 - 다락방의 책장에서 만난 우리들의 이야기
이유경 지음 / 다시봄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행복할까, 해서 즐거운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더 행복할까?

그럼, 분명히 잘할 수 있는 일인 동시에, 해서 즐거운 일인걸 찾으라고 하겠지만...

안되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세상이 어디 그렇게 내 입맛대로 이던가 말이다.

 

암튼, 난 다락방님이 아주 부럽고 샘나고,

이곳 알라딘서재에서 나와 다락방 님은 댓글도 주고받는 사이라는게, 자랑스럽다.

그런 다락방 님과 공통점을 찾아보라면, 책을 좋아하는 것 정도 되겠다.

 

책의 독서 목록을 보니, 낯익은 게 많아서 뿌듯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다락방님의 리뷰나 페이퍼를 보고 잼나 보여 내가 마구 사들여서 이고,

아직 읽지 못하고 책탑을 쌓거나 테트리스를 하면서 보관중인 고로, 실상은 마냥 뿌듯할 수만은 없다~--;

나와 다락방님은 책이라는 같은 재료를 가지고 다른 음식을 만들어 내놓는 요리사마냥, 결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때로 내가 쌓아올린 책탑을 보면서 한숨을 쉬기도 하지만,

또 수중에 읽을 책이 없으면 마냥 불안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근데 궁금한 것이 무엇이든 정성 들여서 하면 어떤 의미로든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지는법인데,

책으로 공들여 쌓는 탑은 왜 자꾸 무너지는건지 모르겠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는 속담대로라면 내가 책탑을 쌓는데 공을 들이지 않았다는 얘기인데,

공을 들이는걸로는 이정도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것 같은데,

쌓는데 내가 모르는 나름대로의 소신과 내공과 철학이 있는 듯 하다.

그러면 무너지는 것이라도 제대로 무너져서,

테트리스를 하듯, 한줄을 빼곡 채우면 없어지는 규칙 따위는 통용되지 않는걸까?

안 읽어도 나름대로의 소신과 내공과 철학이 있다면,

'쓰윽~' 소리 소문도 없이 내지는 '뿅, 뿅, 뿅, 뾰옹~'소리를 내면서 한줄 줄어들어도 좋고 말이다.

 

그러고보면, 난 독서를 하는 행위 자체도 좋아하지만,

내가 책을 읽고 흔적을 남기는 것,

내가 읽었고, 읽을 책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그런 과정과 상태를 즐긴다.

독서를 한 기록을 남기는 것도 그 연장선 상이다.

그에 반해 다락방 님은, 독서를 통한 네트워킹을 즐기는 것 같다.

마실을 다니며 다른 사람들의 기록들도 찬찬히 읽고,

댓글과 덧글을 달기도 하면서,

독서로 인하여 파생되는 인간관계를 소중히 하고 또 즐기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책을 좋아하고 독서목록이 겹치는 것 말고는,

다락방님과 어떤 공통점도 없다는 걸 뼈 아프게 느꼈지만 말이다.

 

ㆍㆍㆍㆍㆍㆍ외출할 때는 지하철에서 읽을 책을 챙긴다. 그가 말한 것처럼 책은 세상에서 나를 격리한다. 나 역시 간혹 책 속의 세계에 푹 빠져서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갈 길을 돌아왔다 한들, 나에게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그 순간은 결코 포기할 수 없을 만큼 유혹적이고 또 소중하다.

  가끔은 그 작은 세계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읽고 있는 책이 마음에 든다면, 책에서 눈을 떼고 같은 지하철을 타고 있다는 우연에 기대어, 그 안의 누군가에게 그 책을 선물하는 거다. "이거 읽으면서 가세요." 또한 지하철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을 보면 무척 반갑다. 그래서일까. 책 읽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고 싶기도 하다.(48쪽)

 

암튼, 지하철이나 카페, 도서관처럼 타인이 있는 곳에서 독서가 더 잘된다는 걸 보면,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이거나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당당한 영혼인가 보다.

 

난 어디 짱 박힐 수 있는 곳,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혼자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 좋다.

때론 집에서도 책상위에 앉아서 보다는, 의자를 밀어내고 책상 밑으로 들어가 좁은 공간에 웅크리고 앉아있을때 집중이 훨씬 잘 된다.

 

게다가 다락방님은 독서를 통한 관계 형성- 네트워크를 즐기는 반면,

나는 독서를 통하여, 영혼과 더불어 독서하는 육체까지 쉬면서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독서는 내게 행위라기 보다는 쉼이라는 인식이 강하고,

또 이를 통하여 숨돌리고 한박자 쉬어갈 수 있는 여유를 갖는다.

 

그녀의 그것이, 독서를 통한 관계 형성- 네트워크라는 걸 알 수 있는 예가,

책을 읽다가 재미있으면, 가끔은 그 작은세계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48쪽)고 얘기하는 걸로 모자라서,

 '나도 책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한 편 상상해본다'고 하며 직접 쓴 단편소설을 보여주는데, 소설의 생명인 개연성도 확보됐고 실제처럼 리얼하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소설가가 되기를 꿈꿨었는데,

소설을 읽다보니, 쓰는 것보다 읽는 걸 더 잘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아서  소설가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게 너스레다.

내공이 보통이 아니다.

 

암튼, 다락방 님은 책의 '잘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이란 꼭지를 통하여, 그녀의 장점을 잔뜩 드러내는데,

이것 또한 내가 닮고 싶어 하는 바로 그것이다.

ㆍㆍㆍㆍㆍㆍ나는 하나의 전공조차 제대로 끝내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내게 주어진 능력은 아마도 학습보다는 사소한 순간들에 행복을 느끼는 게 아닌가 싶다.(235쪽)

 

책을 시작하면서는,

책을 좋아하고 독서목록이 겹치는 것 말고는, 다락방님과 어떤 공통점도 없다는게 뼈 아프게 느껴졌지만,

이젠 그녀와 책을 좋아하고 독서목록이 겹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를 읽고,

'독서는 근육과 같고, 자신은 그 근육을 발달시킨 것 같다고' 하는 내가 생각했던 구절을 근사(40쪽)하다면서 인용한 것도 좋고,

'책은 세상에서 나를 격리하는, 보호해주는 벽이다'(48쪽)라는 '해피패밀리'의 한민형과 '책을 읽고 있으면 문득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나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켜준다는 느낌이 든다'(50쪽)는 '한낮의 시선'의 한명재를 인용한 것도 좋다.

그녀가 '나는 그런 이야기와 표현에 감탄하는 것만을 잘하는 사람이다. 쓰는 걸 잘하는 사람과 읽는 걸 잘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세상에는 작가와 독자가 존재하는가 보다'(60쪽)라고 너스레을 떠는 것도 좋고,

'모두 그렇겠지만 나는 상대가 말해주지 않으면 그의 입장을 알 수가 없다. 내가 추측하는 것만으로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155쪽)고 말해주는 것도 좋다.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일기와도 같은 자신의 일상 얘기를 하면서...

자신을 기준으로, 자신에게 미루어 타인을 평가하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지사지'라는건 '겉보기만으로 관계가 쉽게 형성되는,

빠른 소통의 시대라고 하지만 어쩜 불통의 시대인것 같은 이 시대에는...감정의 폭력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이, 이 책을 쓴 다락방님이 좋은 또 하나의 이유를 굳이 대라고 한다면...

난 미사여구로 쓰여진 글이 아니라,

읽으면서 공감할 수 있는 쉬운 글들로 쓰여진 것을 꼽고 싶다.

그녀만의 경쾌하고 유쾌한 성격이, 곳곳에서 언뜻 언뜻 비춰진다.

 

모쪼록 다음 번엔, 그녀가 쓴 소설책으로 만나고 싶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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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1-28 15:25   좋아요 0 | URL
책탑을 잘 쌓으려면 책마다 다른 크기와 부피를 잘 가누어야 해요.
사이사이 받침종이를 작게 끼워넣어야
책탑이 높이높이 올라가면서도 튼튼하지요~

sslmo 2013-12-05 17:06   좋아요 1 | URL
이거 이거 괜찮은 팁인걸요.
이래서 책탑이 더 높아지면, 전 책탑에 갇힌 라푼첼이 되는건가여, ㅋ~.

감은빛 2013-11-28 16:15   좋아요 1 | URL
'사소한 순간들에 행복을 느끼는 게' 보통 능력이 아닌데, 부럽네요!
저는 오늘 주문했어요.
내일 받을 거예요. ^^

sslmo 2013-12-05 17:07   좋아요 1 | URL
지금쯤 완독하셨겠네요.
님의 재치발랄한 리뷰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여,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