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서재 - 길에서도 쉬지 않는 책읽기
이권우 지음 / 동녘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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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뉴스를 들으니, 박근혜 대통령이 프랑스에서 20여분간 불어로 연설을 한게 이슈더라.

박 대통령은 한국어, 중국어, 영어, 불어, 스페인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다고 소개되고 있었는데,

이번 불어 연설의 저변으로 40여년전 프랑스 파리로의 6개월 동안의 유학을 들고 있었다.

난 여기서 여러가지 딴지가 걸고 싶어지는데 꾹참고,

' 한 나라의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 자국어도 아닌, 현지어를 구사할 필요가 있었을까?'하는 것 하나와,

대한 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한국어를 구사하는 건 당연한건데,

저렇게 '한국어'까지 꼭 집어넣어서 5개국어가 되어줘야 하는건가...하는 두가지만 언급하겠다.

저 상황에서 박 대통령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그렇지 않고는...하나도 중요하지 않은것 같은데,

그럼, 바꾸어서...과연 박 대통령은 프랑스 현지인이 불어로 묻는다면, 말귀 알아먹고, 의사소통할 수 있을까?

나 혼자만의 쓸데없는 기우이기를 바란다.

 

난 익숙하고 길들여진 것에 연연해 하는 부류이다.

바꾸어 말하면, 낯선 여행이 번거롭고 서툴다.

'이권우'식으로 얘기하자면, '지적 호기심'이 영 꽝이다.

낯선 장소에 가서, 모르는 사람들과 안되는 대화를 하고,

그리고 정체 불명, 출처 불명의 이상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게 괴롭다.

 

차리리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맨날 먹던 음식을 먹고 내 형편과 분수에 맞춰 사는게 낫다.

 

물론, 내가 처음부터 '여행'을 번거로워 하는 부류는 아니었다.

덜 성숙한 나이에, 공부를 핑계로 외국에 체류할 기회가 있었고,

그때 '나를 제대로 번역'은 커녕 간단한 의사소통도 힘들어 손짓, 발짓을 동원하면서도 나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느꼈던 지독한 고독감은 그 무엇으로도 상쇄될 수가 없다.

 

누군가는 외로움은 외부적인 요소이고, 고독감은 내부적인 요소이다...라고 얘기하고,

또 누군가는 외로움은 Loneliness이고, 고독감은 Solitude로 표현하고 있으며,

또 누군가는 전자는 '혼자 있는 고통' 을, 후자는 '혼자있는 즐거움'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여행'이라는 사실(fact)을 가지고도,

누군가는 '혼자 있는고통'을 느낄 수가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혼자있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며,

나의 경우는 그게 고통이라는 중압감으로 다가왔었던 것이다.

 

내가 이렇게 구구절절 사설이 긴것은,

이 책이 '이권우'님의 책이 아니라면 내가 들춰볼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서둘러 답을 말하자면, 지식인에게 여행은 번역이구나 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행기 곳곳에서 번역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문맥마다 서로 다른 뜻으로 쓰고 있으나, 결국 지적인 여행을 한마디로 정의해준다 싶었다.

 

행간이 많고 품이 넓은 원작을 번역할 때 좋은 문구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까닭은 외국어 능력이 부족해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번역자가 모어母語의 풍부한 가능성을 충분히 체득하지 못한 까닭에 문장을 성숙하게 형상화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괴테는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언어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비슷한 의미에서 외부의 맥락과 부딪히는 와중에 내가 모어 사회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그러면 상대의 사회와 비교할 수 있는것처럼 모어 사회의 상황을 내가 대변하듯이 말해도 는지 ㆍㆍㆍㆍㆍㆍ  이때 상대의 사회와 모어 사회 사이에서 외관의 유사함에 의지하기를 거부하면서도 접점을 발견하려면 또 다른 번역 능력이 필요하다.

 

다른 말로 쓴 작품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느낀 바를 설명한 대목이지만,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재해석하면 이보다 좋은 여행론이 없을 듯싶다. 안에 있을 적에는 잘 알고 있다 싶으나 바깥에 나가야 비로소 깊이 알지 못했다고 깨닫는 법이다.ㆍㆍㆍㆍㆍㆍ "원작의 생명력을 보존하려면 번역자는 그 원작을 낳은 토양을 지반째 옮겨야 하지만, 결국 번역에서 가필하거나 새로 쓰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번역은 원문이 지니는 가능성의 폭 안에서 그 생명력을 되살려내는 금욕적 실천이다."(35~36쪽)

암튼, 지식인에게 여행이 번역이고 아니고, 의 여부를 떠나서,

번역이라는 말이 '지적인 여행'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말이고 아니고, 의 여부를 떠나서,

그동안 내가 출처를 알 수 없었으나, 늘상 마음 속에 새기고 살던 문장의 '원전'을 알 수 있게 되어서 의미가 있었다.

'행간이 많고 품이 넓은 원작을 번역할 때 좋은 문구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까닭은 외국어 능력이 부족해서만은 아니다.

오히려 번역자가 모어母語의 풍부한 가능성을 충분히 체득하지 못한 까닭에 문장을 성숙하게 형상화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라는 문장 말이다.

원전의 번역가는 얼마나 제대로인지, 훔쳐보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

근데, 얼마전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을 보면서도 느낀것이지만,

작가가 아무리 훌륭한 지식을 자랑하고 눌변이라도,

내가 거기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니까,

책이 재미없어 지기도 하더라~--;

때문에 이 책도 그렇지는 않을까 살짝 걱정이 된다.

 나는 주목한다. 그는 베이징을 여행하고 나서 그 체험을 중국연구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베이징에서 그는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과 닮은 사람들을 만났다. 혹은 실제로 살아가는, 자신의 고뇌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자 했다. 그의 모습은 지역 연구자인 내게 연구와 아울러 여행의 의미마저 다시 생각하도록 이끈다.

 

 무릇 지식인에게 여행이란 추상에서 구체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지식이란 어차피 회색을 띤 이론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 푸른 생명의 나무는 없다. 그러니, 박차고 나가 생명의 나무를 찾으려 할 수밖에. 물론 구체성으로서 여행은 다시 추상으로서 여행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두 범주의 충돌에서 우리는 특수성이라는 빛나는 대목을 만나게 된다. 여행기가 결국 문학의 한 갈래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41쪽)

위 단락은 그 연장선 상이기도 한데,

우리가 흔히 지식이라고 하는 것들,

그것들은 자신의 체험과 경험을 동반하지 않은 ' 것'이었을때는, 이론뿐인 추상에 불과하다.

무릇 책이 그렇다.

책의 내용들을, 책의 이론들을...

이해하고, 체화하여 내것으로 만들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것은 그냥 한낯 공허한 이론일 뿐이다.

 

아무리 훌륭한 이론과 공식과 지식이라도,

내가 거기 흠뻑 담굴질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내 것'은 아니다.

'번역자가 모어母語의 풍부한 가능성을 충분히 체득하지 못한 까닭에 성숙하게 형상화할 수 없는 문장' 인 동시에 '추으로서의 여행'에 다름아니다.

 

그렇다면, 여행이 왜 필요한가?

이 책에서는 '물고기를 잡아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그렇게 된다면 모국어의 고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세살의 여행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많은 걸, 깊게 생각하게 하는 구절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아래 인용된 책의 저자가,

아무리 세상에 따스함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소외 계층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문장은 화려한 수사를 사용하여 훌륭하기 그지없지만,

과연 모국어의 본뜻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세살 아이의 여행은 호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차라리 '세상에 따스함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소외 계층'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생각이 짧은 사람 정도로 치부해 버리면 됐을테니까 말이다.

 

세상에는 유희가 생략된 유년을 보내야 하는 아이들도 있단다. 따스함과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단다. 네게는 세 살부터 시작된 이런 여행이, 한평생을 다해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사치가 되는 사람들이 많이 많이 있단다. 나는 네가 그런 사람들을 부단히 많이 보아서, 끝없는 속도전에서 비롯되는 초조와 이기심으로 차갑게 마음이 식어버렸을 때마다 스스로 발광하는 태양처럼, 스스로 네 마음을 뜨뜻하게 덥힐 수 있기를 바란다. 가진 것을 느끼고, 가진 것에 감사하고, 감사한 마음으로부터 나누고, 함께함으로써 더 많이 채울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웅숭깊은 사람으로 자라주렴. 네가 살아있는 한 온 세상이 너의 것이다. 몸과 마음을 담그고 느끼거라. 그 안에 네가 안아줄, 너를 안아줄 모든 것이 다 한데 어우러져 있단다(115쪽)

 

책을 많이 읽게 되면, 어떤 얘기가 빈말이고 어떤 얘기가 알차고 충실한 얘기인지 체험하지 않아도 용케 알게 된다.

빈말은 아무리 성찬이어도 공허하고 배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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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1-06 03:40   좋아요 0 | URL
음... 세 살 아이한테 저런 말을 하면서 여행을 한다면... 좀 재미없지 않을까 싶어요 ^^;;;

세 살 아닌 여섯 살 아이하고 늘 이곳저곳 함께 다니는데,
아이들은 그저 뛰어놀기만 하면 넉넉해요.
스스로 뛰어논 적 없는 아이들은 사회를 읽는 눈도 떨어지리라 느껴요.

그나저나 이권우 님은 스스로 '지식인'이라 여기는군요.
지식인 아닌 '보통 사람'으로 여길 수 있으면
여행이 한결 가볍고 즐거울 텐데.

..

예전에 김대중 님이 대통령이 된 뒤에
미국에 가서 영어로 아주 '유창'하지는 않고 '전라도 사투리 섞은 말씨'로
기나길게 연설을 해서 신문마다 '칭찬'을 한 적 있어요.
아마 1998년이었지 싶어요.
어느 신문도 '한국말 냅두고 영어로, 게다가 통역자 냅두고 영어로 말한' 일을
나무라지 않더군요.

박근혜 님한테도 틀림없이 통역자가 있을 텐데
통역자가 할 일을 왜 그분들이 스스로 하면서
지식 자랑을 하려는지 참으로 안쓰럽지요.

1998년에 한국에 온 히딩크 감독은 네덜란드사람이라 네덜란드말 하지만,
네덜란드말 통역자가 제대로 통역을 못하니
영어 통역자를 붙여서 영어로 말했어요.

아마, 대통령들께서는 영어 통역자나 프랑스말 통역자가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11월이다.

滿山紅葉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온 산에 단풍이 들었다.

그런데 조금만 자세히 관찰하면 단풍이 꼭 붉게 물들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은행잎은 노랗게, 느티나무는 갈색으로...물든다.

그래도 우리는 '온산에 울긋불긋 단풍들었다'라고 표현한다.

이걸 대표성이라고 해야 할까? 아님 잘못 학습된 기억이라고 해야 할까?

 

언젠가 어느 책에서 읽은 구절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이런 구절이 있었다.

그들은 마음속에 뿌리박힌 생각을 포기하려들지 않았다. 믿음이 너무 강하면 믿음의 원래 내용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 온다. 그 믿음들이 뒤엉켜 고집이 된다.

이쯤되면, 나이들어 갖게 되는 '올곧음'은  '고집'으로 비취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하나보다...생각할 즈음,

이런 구절을 발견했었다.

신앙은 어리석을 수 있으나 우리를 끝까지 버티게 한다.

'고집'과 '신앙'의 공통점은 '올곧음'일까, 아님 '융통성 없음'일까?

어찌됐든 우리를 끝까지 버티게 하는 힘이다.

부러지거나 꺾이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게 되니까 낭패이다.

 

올 가을 마지막 단풍 구경이 될듯하여 주말에 과천 국립현대 미술관에 가볼 생각이었다.

게다가 내가 좋아라 하는 <데이비드 호크니 :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전시회가 열리고 있으니, 겸사 겸사 다녀오면 좋을 듯 하다.

 

근데, 난 아무래도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행가 타입은 아닌듯,

'데이비드 호크니'관련 책으로 모자라서,

단풍도 '강판권'의 '나무열전'을 들추고 앉았다.

 

거기 '바람 타고 열매가 날아가는 단풍나무(楓)'장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오는데...재밌다.

 

  가을 단풍을 보면 시인이 아니더라도 시상(詩想)을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단풍을 노래했습니다. 중국 당나라 최신명(崔信明)도 「풍락오강냉(楓落吳江冷)」, 즉 '단풍이 찬 오강에 떨어지네'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정세익은 이 시를 보고 명성이 높았던 최신명에게 실망했습니다. 정세익은 최신명의 시가 높은 명성과는 달리 보잘것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보는 바가 듣는 바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세상은 이러한 고사성어 같은 일이 흔합니다. 단풍만 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가을에 유명한 곳을 찾아갑니다만, 실제 가보면 실망하기 일쑤입니다. 때론 단풍보다 사람만 구경하고 오지요. 그러니 멀리 가기보다는 가까운 곳에서 단풍을 즐길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죠.

                                                                                                                  ('강판권'의 '나무열전'280쪽)

 

암튼, 가을 단풍을 봐서 였는지 어쨌는지...여기 시인이 아닌 시인이 한명 탄생했다, ㅋ~.

친구가 나에게 보내준 시인데(얼쑤~♬),

시어를 고른 품이나 생각의 깊이 따위, 내공이 예사롭지 않다.

 

단풍

 

붉을 단 丹, 단풍나무 풍 楓

단풍이라고 다 붉기야 하랴마는

오롯이 우듬지에 홍조띤 잎새 매달고

찬연한 햇살 누리는

가을 한낮

이 한 순간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은

사랑이 그토록 사무치면

이렇게 붉어질 수도 있음을 끄덕이리라

 

소나무 숲

단풍이 아니올시다

제선충 먹어

제 몸 태운 병마조차도

겉보기엔 화르르 타오르고 남은 재처럼

그리 보인다

 

가을이면 마지막 기운을

모두 모두어서

붉게 물들인 낙엽

가슴에 남기지 않고 뚝뚝 떨구는 우듬지 그 마음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닐수도 있구나

다 벗어버리고도

너에게로 벋어있는 짧은 팔들로도

사랑을 보여줄 수 있구나

 

사랑은

단풍처럼.

 

사진의 단풍은 또 딴 친구에게서 업어 왔다, ㅋ~.

가을 단풍마저도 나 혼자의 힘으론 즐길 수 없는 것인가, 정녕~--;

 

 

 

 

 

 

 

 

 

손철주의 <사람보는 눈>이란 책이 나와주셨다.

당근 설레발을 치며 구입했으나, 11월5일 배송 예정이다.

내가 딴건 나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없지만서도,

'사람보는 눈'은 '쫌' 있는것 같다.

시를 보내주는 친구, 사진을 보내주는 친구가 있어...

앉아서 가을을 즐길 수 있는 걸 보니,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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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3-11-01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풍이 산마다 들었더라구요! 페이퍼를 보니, 가까운 산에라도 가봐야 할 까봐요. 집에서 도보로 20분만 가면 관악산이라는^^
시를 보내주는 친구, 사진을 보내주는 친구...멋진 친구분들을 두셨네요.^^ 그만큼 양철님의 인덕이 깊어서 인듯합니다~
11월 아름다운 단풍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흠...위 단풍 사진을 보니 갑자기 이효석님의 <낙엽을 태우면서>가 생각납니다. 하하~

sslmo 2013-11-05 18:15   좋아요 1 | URL
관악산 아래 그동네 알아요, ㅋ~.
전 집에서 좀만 움직이면 북한산이고,
집 바로 뒤가 나즈막한 야산(약수터가 있는)인데...
십여 년을 살면서 한두번 올라갔다는...ㅋ~.

이 가을 가기전에, 11월 가기전에 우리 try to해보자구요.

노이에자이트 2013-11-01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을산은 온갖 빛깔이 다 모여있으니 울긋불긋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습니다.잘못 학습된 표현이 아니니 양철나무꾼 님도 마음껏 사용하셔도 좋은 표현입니다.

sslmo 2013-11-05 18:18   좋아요 1 | URL
노랗게 노랗게 물들었네,
빨갛게 빨갛게 물들었네,
파랗게 파랗게 높은 하늘,
가을 길은 비단길~^^

이래도 된다는거죠? 감솨~(__)

프레이야 2013-11-01 2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놀처럼 다층의 붉은빛 낙엽, 이곳엔 11월 중순까지도 절정이지요^^
이 계절에 걸맞게 이브 몽땅의 노래를 선사해준 양철님 쌩큐~~
참 좋아요^^

sslmo 2013-11-05 18:20   좋아요 1 | URL
엄머머~(버선발로...헐레벌떡) 프레이야님이시당~(부비 부비)
저도 알라딘 서재 활동을 그리 열심히 하지 않아서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지만,
그동안 넘, 넘, 넘,
적조하셨던거 아시죠~?^^
 
자연을 닮은 밥상 - 내가 먹는 것이 나를 만든다
이윤서 지음 / 위즈덤스타일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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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책을 읽었다고 하면,

날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채식이나 이른바 장수식품이라 불리우는 슈퍼푸드에 관심을 갖게 됐는줄 알테지만,

날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콧방귀를 끼며 곧이 들으려고 하지 않을것이다.

난 그야말로 음식에 관해서라면 수더분하다 못해, 맛만 있으면 불량식품도 불사하는 유형이기 때문이다.

결코 음식, 소위 입으로 들어가는 것 갖고 유난 떨지 않는데(그렇다고 편식을 안한다는 얘긴 아니다~--;)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어차피 사는 한평생, 몸에 좋은 것이 아니라 입이 행복해 하는 걸 먹고 살자는 주의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여기저기서 원성이 자자하고, 돌이 날아오겠지만, 뭐~--;

입이 행복해 하는게 몸에 좋은 것에서 크게 비껴가지는 않더라.

(그럼 '먹기싫은 음식이 병을 고친다'의 '임낙경'님 같은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하면 할말 없지만,

 그의 이론은 보편적인 이론은 아니다.)

 

실은 어디선가 마크로비오틱 Macrobiotic이란 단어를 접하게 되었고, 그래서 마크로비오틱에 대해 알아볼 요량으로 이 책을 보게 되었다.

마크로비오틱이란게, 일본의 장수요법에 뿌리를 두고, 인도의 아유르베다, 중국의 음양오행 등 동서양의 건강한 식문화를 아우르는 철학이란다.

때문에 여기저기 마크로비오틱에 대해 나와있는 책들은 많이 있지만,

설명이 중구난방, 우후죽순으로 흩어져 있다보니,

중심을 제대로 잡지못하면 난해하기 그지 없어진다.

 

마크로비오틱은 '음양조화, 신토불이, 일물전체, 자연생활' 등 4대원칙에 충실한 일종의 섭생법이자 요리법이다. 마크로비오틱은 가급적 식품을 통째로 먹는데, 그래야 식품이 가진 고유의 ' 에너지(氣)'를 그대로 섭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는 자신의 몸뿐 아니라 마음에도 반영되기 때문에 되도록 인위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은 신선한 식품을 먹어야 한다. 주로 유기농 생산농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재료 선택은 물론 조리법ㆍ활용법까지도 자연 친화적일 때 음식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마크로비오틱 섭생법의 기본은 음양의 조화를 추구하며 육식을 자제하고 유기농산물중에서도 곡류를 중심으로 한 채식을 하는 것이다. 발아 현미와 통곡물을 중심으로 제철ㆍ제 지역에서 나는 신선한 유기농 채소와 콩, 김과 같은 해조류, 된장, 절임채소 등과 같은 발효식품을 주식으로 포함하며, 육류, 계란, 유제품의 섭취는 지양한다(19쪽)

 

  채식을 시작했던 초반에는 재료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파스타 요리를 즐겨 먹었다. 그러다 마크로비오틱을 만나면서 파스타를 만드는 재료에 대해 좀 더 꼼꼼하게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마크로비오틱은 기본적으로 토마토, 가지, 감자, 고추 등의 가지과 작물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마크로바틱 과정 중 파스타를 배울 때에도 토마토나 고추, 가지를 써본 적이 없다. 보통의 경우 의문점이 생길 것이다. 건강에 좋다는 토마토와가지 같은 채소들을 왜 쓰지 않는 것일까?

  내 경우에는 만성 질환이었던 건선 치유 과정에서 가지과 작물의 섭취를 조심해야 한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유는 가지과 작물에 솔라닌이라는 유독한 성분이 있어 염증 증세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자에 싹이 나면 꼭 제거하고 먹어야 하는 이유도 솔라닌 성분의 유독성 때문이다. 마크로비오틱의 섭생은 음양의 조화, 중용의 정신을 강조하는데, 가지과 작물들은 산성식품이어서 잘못 쓰일 경우 음식의 균형을 깨뜨릴 수도 있기 때문에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토마토나 가지를 절대 먹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다. 마크로비오틱은 모든 것을 포함하되 건강하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생활방식이기에, '해서는 안 된다 Have to do not '의 사고방식이 아닌'지양한다 should not '가 어울린다. 때문에 마크로비오틱의 기본과 정석을 가르치던 학교에서 공부할 당시에는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식재료지만, 경우에 따라서 제철, 제 땅에서 자라난 가지과 작물이라면 섭취할 수 있다고 본다. 산성, 알칼리성 성분의 음식을 균형 있게 먹는 것은, 결국 음과 양의 조화,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38~39쪽)

 

이렇게 시작한 책이었기 때문에 자연 설렁설렁 넘겨보게 되었고,

또 이렇게 설렁설렁 넘겨보면서 뭔가를 궁구히 할 수있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하였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아니, 마크로비오틱 요리사 이윤서 님은 영화 얘기를 하면서 '라따뚜이'를 언급할 정도로, 이 영화 속에서 요리평론가로 나왔던 이가 라따뚜이를 먹으면서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던 걸 언급할 정도로, 나와 요리 철학이 비슷했다.

이윤서 님께 죄송하다, 내게 어떤 요리 철학 씩이나 되는게 있는 것처럼 표현하게 되어버렸는데ㆍㆍㆍㆍㆍㆍ

'자연에 가까운 재료를 사용하되 최소한의 가미'가 내가 추구하는 요리의 기본이다.

대신 과일과 토마토를 제외한 채소는 익혀 먹는다.

그걸 그녀는 책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ㆍㆍㆍㆍㆍㆍ 파스타 면을 돌돌 말아 입속으로 쏙 넣어 한입 먹는 순간, 오랜 시간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빗장이 열리고 따스한 햇살이 스며들 듯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에게 이로운 음식이 이런 것이 아닐까? 오랜 아픔, 슬픔을 어루만지고 영적으로, 정신적으로,육체적으로 이롭게 하는 음식.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군더더기 없이 소박하게 담아내는 조화로(43쪽)

그런데, 내가 이 책을 단순히 요리 책에서 삶의 철학이 담긴 책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사랑이라고 여겼던 것들은 관계의 안정과 감정의 충족에서 오는 일종의 헛된 욕망이었다. 그안에는 내 자신이 없었다. 20여년간의 오랜 만성 질환은 나 자신을 깊은 어둠 안에서 방황하게 만들었고, 어둠을 타인과의 사랑 안에서 찾았고, 의존적인 관계 안에서 사랑을 확인받고 또 소유하려 했다. 오직 관계를 통해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던 시절에는, 그 관계가 깨지면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큰 아픔을 겪었다.

 

  "아무것도 찾지 않고 내적으로 완전히 침묵할때, 거기엔 중심이 없다. 그러나 거기엔 사랑이 있다."

                                          -자두 크리슈나무르티-

2010년 여름, 어그러진 관계와 악화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때다. 운명의 종소리에 귀 기울이겠다며 떠났던 자연 치유 과정을 통해 섭생이 바뀌었고, 질병이 치유되어졌고, 몸과 마음이, 그리고 영혼이 치유되었다. 그러면서 비로소 내면의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내 존재의 여부는 누군가의 관계 속에서 규명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태초부터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내 에고를 재쳐내고, 다른 사람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것에서 사랑은 시작된다."  -루돌프 슈타이너-

 

 "비가 내려 나뭇잎에서 여러 날 쌓인 먼지가 씻기듯이, 마음은 생각없이, 강제없이, 책 없이, 선생없이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말하자면 아름다운 황혼을 만느듯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자두 크리슈나무르티-

 

내가 느낀 이 깨달음을 어떻게 해야 잘 설명하고 전달할 수 있을까?

그동안의 나는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타인과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 그에 맞추어 나의 위치도 설정된다고 생각했었다.

적어도, 타인으로부터 내가 사랑하는 것과 똑같은 만큼의 사랑을 받아야 관계가 형성되고 유지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타인한테 사랑받지 않아도 나는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타인의 마음 속에 나를 위한 자리가 있고 없고, 있으면 얼마나 크고...를 따지는 것 자체가 나의 욕심이다.

그냥 비가 내리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자연 현상이 그러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자연 현상은 아무 인과관계가 없는 것처럼,

나의 사랑도 그런 것이면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되면, 서로 경쟁할 일도 없고,

내가 더 많이 사랑하는 일이 기꺼웁게 된다.

 

자연과 대지의 기운이라는 걸 느끼게 되고,

내 스스로가 따뜻하고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기꺼이 담아줄 수 있다. 

 

말로 하기는 쉽지만, 참 어려운 얘기이다.

음식이나 요리를 통해서 이런 깨달음을 얻기는 더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오늘 이런 깨달음이 눈물겹게 귀하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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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
박수밀 지음 / 돌베개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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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책을 읽는 관점이 좀 바뀌었다.

그동안은 책을 곧이곧대로만 읽는것으로도 벅차,

책의 숨은 이면을 바라볼 수조차 없었는데...

이제는 책을 사람마냥 한걸음 떨어져서 관조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의 변화가 꼭 좋기만 한게 아닌 것이,

어떤 종류의 책들은 그렇게 한걸음 떨어져서 관조적으로 읽으면 읽을수록 알쏭달쏭하기만 해서,

 

채워가질 수 없는 결여로 허기와 갈증이 깊어져만 갔기 때문이다.

그 어떤 종류의 책들은 주로 우리 고전이었는데,

같은 책 같은 문장을 두고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해석이  가능했다.

 

예를 들면, 연암 박지원 같은 경우도...

사상가의 입장에서 봤을때와 문장가의 입장에서 봤을때 얼마든지 다른 견해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사상가로써의 연암과 문장가로써의 연암이 둘이 아니고,

그 둘을 아우르는 보편성으로 그를 바라보기 위해선,

그의 입장에선 '사상가'와 '문장가'라는 경계의 거품을 빼야 하고,

내 입장에선 관조적이라는 '간격'의 거품을 빼야 한다.

 

아직 내 깜냥으론, 보편성과 관조적이라는 단어를 하나로 아우를 수가 없는데,

그걸 개별성과 독창성으로까지 연결시켜 하나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만든 사람과 책이 있다.

박수밀이 쓴 '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이 그것인데,

제목은 '글쓰기'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은이는 연암의 그것을 병법과 전략에 비유하는 등,

온갖 것을 아우르는 삶의 총체로 보았다.

게다가 지은이의 문장 또한 수려한 것이,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한다.

예를 들면 이런 대구를 이루는 문장들 말이다, ㅋ~.

ㆍㆍㆍㆍㆍㆍ그의 글은 가벼운 듯 진지하고, 유쾌하다가 불쾌하며, 통쾌하지만 슬프고, 상식에 맞는가 싶더니 새롭다. 그의 글은 능글맞되 삼엄하다.ㆍㆍㆍㆍㆍㆍ('책머리에'부분 발췌)

 

이 책에는 '생태 글쓰기'라는 새로운 용어의 정의가 나오는데,

그 정의를 분명하게 해주는 것에서 '연암'에 대한 이해는 출발한다.

 

옛 문장가들은 늘 자연을 얘기했는데, 대개 인간과의 일치를 추구하거나 혹은 속세를 떠나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노래했다면,

연암은 자연을 변화와 창조의 공간으로 생각하고, 자연 사물의 원리를 들어 인간과 사회가 병들었으며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다는 것을 비판했다고 한다.

즉 사물의 생태로부터 얻은 깨달음을 인간 사회를 고발하고 교정하는데 활요해서 '생태 글쓰기'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내가 이 책의 제목은 '연암 박지원의 글 짓는 법'이지만, 연암의 삶을 총체적으로 아우르고 있다고 한 이유는 다음에서 엿볼 수 있다.

  진짜 글과 가짜 글의 차이는 무엇일까? 자기 자신의 언어를 쓰는가, 남의 언어를 쓰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연암 생각에 옛말을 모방해서 주어진 틀에 맞추는 글은 가짜 글이다. 고전 시대 글쓰기의 기준은 옛것을 본받으라는 것이었다. 옛글을 닮아라, 옛글과 비슷해지라는 것이 전통적인 글쓰기 규범이었다. 과거 시험은 정해진 경전을 달달달 암송하고 정해진 문체에 맞추어 썼다. 그런데 연암은 도리어 옛 언어를 표절하지 말고 나의 언어를 쓰라고 말한다. 비슷함을 좇는 것은 진짜가 아니다. 비슷하다는 말에는 이미 다르다, 거짓되다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다. 곧 연암은 중세 시대 보편적 지향인 '닮음의 미학'을 거부한다. 그는 작가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글을 써야 한다고 요청한다.(28쪽)

여기서 개념을 확장시켜 보면,

주자성리학으로 대표되는 유가의 자연관과 연암의 자연관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데,

주자성리학이 성행하던 조선시대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 실제의 산수가 아니라 푸른산, 흰구름 등 이상적인 공간이다. 

반면, 연암은 자연 사물에 애정을 갖고 자연 사물과 대화적 관계를 형성한다.

자연과의 교감은 사물과 인간을 평등한 관계로 만든다.자연 사물도 인간과 똑같은 감정을 지닌 존재라 여기고 사물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한다.

얼마전 읽은 '우주생명 오디세이'라는 책에 보면...우리가 이제는 많이 알고있는 인간과 침팬지의 DNA가 99%일치하며,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아보이는 바나나와 인간도거의 비슷한 성분으로 이루어진 멀지 않은 친척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조선시대의 연암이 선견지명이 있어서,

현대에 쓰여진 '우주생명 오디세이'의 내용을 미리 예측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닐테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이용후생이라는 것은 인간 우월주의나 문명의 利己에서 비롯된게 아니라,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 속에서 자연과 인간이 공생하는 방도로 제기된 걸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물과 타자의 입장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 중심의 단순한 사고방식을 깨우치거나 배타적인 우월의식을 허무는 글쓰기에서 잘 활용된다.(40쪽)

 

눈으로 볼 수 있는 코끼리도 그 이치를 알 수 없을진대 코끼리보다 훨씬 큰 세상의 이치를 어찌 일일이 규정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한다. 그리하여 사물의 관계는 상대적임을 말한다.(47쪽)

암튼, 그를 '사상가'나 '문장가'로 국한시킬것이 아니라, 그의 삶 전반에 걸쳐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것은,

어떤 현상을 놓고 봤을때 현상만 보지 않고 이편과 저편의 '사이'까지 꼼꼼하게 관찰하라고 한 '발승암 기문'과 그 해석을 보고 나서였다. 

이편과 저편의 '사이'가 됐을때 그 '사이'는 미미하게 작을지도 모른다.

사물과 사물의 '사이'가 됐을때 그 '사이'는 작아질 수도, 커질 수도 있을 것이며,

사람과 사람의 '사이'가 됐을때는 서로간의 친밀도나 정서적인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가감이 가능하겠다.

때문에, 이 '사이'를

'쉼표'로 생각할 것이냐,

또는 '틈'으로 생각할 것이냐,

또는 '가운데'로 생각할 것이냐,

또는 '이편도 저편도 아닌'으로 생각할 것이냐,

등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해석은 가능하게 되고,

 

그 때문에, 난 '사이'를 '쉼'으로 해석하고 싶지만,

어느 누군가는 '사이'를 '차이'로 해석하기도 할 것이다.

 

그걸 이 책에선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요컨대 연암은 사물과 사물 사이에 주목함으로써 기존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주변에 주목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쓸모없는 것, 버림받은 존재도 조건에 따라 모두 소중한 개체가 될 수 있으며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생명체임을 보여 주고자 했다.(60쪽)

암튼, 연암 박지원을 통해,
박수밀의 해석을 통해,
또다른 독서법, 또다른 삶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나 할까?

근데 혼란스러운 것이,
그동안의 난, 나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미루어 짐작하지 말자, 다름을 인정하자...그랬었는데,
오늘은 나와 상대가 다를것이 없다, 다 똑같은 존재이다...라고 한다.

이럴때 어려운 말로, 불일이불이(不一而不二)라고 했던거 같은데...
아닌가? 아님, 말고~(,.)

 

오행상생설에 의하면 나무는 불을 낳고, 불은 흙을 낳는다. 곧 나무는 불의 어미가 되고 불은 나무의 자식이 된다. 그러나 그(연암)에게 오행상생은 어미가 자식을 낳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힘입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이 서로 비추어 주는, 서로가 주고받는 공생의 관계다. 물질과 세계를 바라보는 연암의 세계관이 드러난다. 모든 존재는 서로를 의지하며 힘입어 살아간다는 것이다.(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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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3-10-29 17:07   좋아요 0 | URL
오행상생설에 의하면 나무는 불을 낳고, 불은 흙을 낳는다. 곧 나무는 불의 어미가 되고 불은 나무의 자식이 된다. 그러나 그에게 오행상생은 어미가 자식을 낳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힘입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이 서로 비추어 주는, 서로가 주고받는 공생의 관계다. 물질과 세계를 바라보는 연암의 세계관이 드러난다. 모든 존재는 서로를 의지하며 힘입어 살아간다는 것이다.(275쪽)

2013-10-30 00:02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안녕하셨어요? 혹시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으나 즈믄밤의꿈이라는... 글방을 열었다가 오래도록 자리를 비운 玄입니다. 선생님 글방에 들어와 풍요로운 독서의 성찬을 맛봅니다. 열정적인 독서와 글쓰기에 자극을 받고 힘을 얻습니다. 그럼 건강하시고요, 앞으로 자주 뵙도록 하겠습니다.^^

sslmo 2013-10-30 13:59   좋아요 0 | URL
돌아오셨군요, 반갑습니다. 와락~( )
저도 그리 열정적인 독서와 글쓰기를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우리 같이 분발하도록 하죠, ㅋ~.

숲노래 2013-10-30 04:52   좋아요 0 | URL
동양에서는 오행을 말하고 서양에서는 사원소를 말하곤 하는데,
쉽게 이야기하자면,

해(불+빛), 바람(공기), 물(비+내+바다), 흙(들+논밭), 풀(풀+나무)이에요.
동양에서는 '풀(나무)'까지 넣지만, 서양에서는 '풀(나무)'을 안 넣곤 해요.
'쇠'가 어디 갔느냐 할 수 있지만, '쇠'는 '돌'에 들며 '흙' 사이에 끼겠지요.

해, 바람, 물, 흙, 풀,
이렇게 생각하면
지구와 사람과 모든 목숨 이루는 바탕이 무엇인가를
한결 잘 읽고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sslmo 2013-10-30 14:08   좋아요 0 | URL
제가 저'오행상생설'을 '본문'에 빼먹어서 '댓글'에 적었었던건요~^^
제가, 저란 인간이 오행하면 상생과 상극, 보와 사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오행 상생이라는 것을, 모자관계가 아닌 상호공생의 관계로 본 시선이 낯설었고,
그렇지만, 꼭 기억해둘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였습니다.

님이 댓글 달아주신 오행, 사원소 개념이랑은 약간 거리가 있어보여서요, 헤에~^^

암튼, 늦었지만, 또 다른 오해가 생길까 싶어, 본문으로 올리겠습니다, 죄송(__)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창비시선 369
권혁웅 지음 / 창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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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시적 감수성을 가진것도 아니고,

감성적인 사람은 더더욱 아니지만,

함민복 님의 '긍정적인 밥'에 나오는 '시 한편에 삼만원'이라는 소리를 들은 후,

시집을 열심히 사들이고 있다.

 

근데, 권혁웅의 이 시집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를 처음 접했을때,

'권혁웅이 누구지~?@@'하며 한참 말똥을 굴렸었다.

권혁웅이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은데,

이상하게 그가 썼다는 시 한편의 제목은 고사하고,

그의 시 한구절도 떠오르지 않는거라~--;

암튼, 나이가 들어가면서 유독이 아니라,

내 기억력은 원래 소박하고 착했었던 터라...나이듦을 탓할 건덕지는 전혀 없다.

 

한참, 말똥을 굴리다가,

'이영광'의 '홀림, 떨림, 울림'에서 그의 시를 소개했었던 기억이,

그때 그의 시도, 시 해설도 너무 좋았었던 기억이, 났다.

(막막한 세상을 건너는 방법<--링크)

 

호구(糊口)

 

조바심이 입술에 침을 바른다

입을 봉해서, 입술 채로, 그대에게 배달하고 싶다는 거다

목 아래가 다 추신이라는 거다

 

이 짤막한 시를 통해서, 그를 각인시켜놔서 그런가...

시집 속의 시들을 보니 좀 낯설었다.

그는 이미 '미당 문학상'을 받는 등 시창착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는데,

그가 '문학평론가'라는 선입견 때문에 그런지 참여시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다고, 완전 참여시라고 하지도 못하겠는 것이,

참여시면 현실 비판적인 느낌이 들어야 할텐데,

그렇지는 않은 것이,

우리 주변 사람들의 지난한 일상사를 담고 있는데,

그 고달픈 하루하루를 객관적이고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있는게 아니고,

시인은 그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따뜻하고 눈물겨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인것 같다.

 

난, 시이고 수필이고 소설이고를 떠나서 언제부턴가 '화려한 수사'가 싫었다.

화려한 수사는 글을 돋보이게 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용을 반감시킨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취향일뿐,

적재적소에 적절하게 쓰인 수사야말로, 시를 시일 수 있게 만드는 요소인 것 같다.

그냥 단지 주변 사람들의 지난한 일상사를 곧이곧대로 전달하기만 할거라면,

굳이 '운율이 있는 언어'와 '함축적인 표현'을 취할 필요가 없을테니 말이다.

 

어떤 의미로 봤을때는, '운율이 있는 언어와 함축적인 표현'이야말로 '강한 여운'을 줄 수 있는 임팩트 있는 방법일 수도 있겠다.

 

궁정식 연애에 관하여

 

애인을 애마에 태워 밥 먹으러 갔지

식당을 지키는 풍선인간 하나

호들갑스럽게 우리를 맞네고삐를 맞기고 들어서자

전국에서 모여든 기사들

마상시합 전의 난전처럼 떠들썩하네

애인은 궁정식 연애의 주인공이 된 듯 들떠

우아하게 손을 들어 메뉴를 가리키네

불고기백반, 저건 우리의 사랑을 시험하는 거야

우리는 불의 시련을 통과할 거야

고등어자반, 저건 우리 경쟁자들의 운명이지

토막 난 채 소금에 절여진 패잔병이야

우리는 돌솥밥처럼 끓어올라

기사들 사이에서 사랑을 맹세했네

옆구리를 드러낸 자반 옆에서

달달한 불고기 국물 앞에서

기사들은 이쑤시개를 장창처럼 꼬나들고

혹은 자판기 커피를 성배처럼 받들고

청량리로 군자교로 혹은 장안평으로

너도 나도 흩어졌네

잘 아시겠지만 이 기사담의 결말은 누룽지,

눌어붙은 밥알들이 책임지는

물에 불은 한때의 고소함에 관한 이야기였다네

 

이런 걸 중의법이라고 하던가?

이렇게 재미있는 풍자는 오랫만이다, ㅋ~.

돈키호테와 로시난테가 풍차에 맞서 칼을 휘두르는 것만 '궁정식 기사도' 라고 할 수 있나?

때론 애인을 애마에 태운 다소 호들갑스런 그것이어도

기사들 사이에서 사랑을 맹세하면 '궁정식 연애'가 되는 것이다.

잘 아시겠지만...으로 끝나는 결구도 매력적이고 맛깔스럽다.

'궁정식 기사도'와 '궁정식 연애'의 공통점은 그러고 보면 누군가 '책임지는'사람이 있다는 건가 보다.

아, 이런 시도 참 재밌고 좋다~^^

 

'할머니가 익어간다'는 제목의 시도 그렇다.

'ㆍㆍㆍㆍㆍㆍ

아랫목에서 익어가는 청국장 냄새를 할머니 냄새라 말하지 마라

저승, 그 미지의 땅을 정복하러 가는 전사의 비상식량이다'

같은 발상 자체가 기발하기 짝이 없다.

그의 시는 아무래도 콩이 그렇듯,

달리지 않아도 이미 숨이 가쁜,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노랗게 굳은 요구르트가 그렇듯,

발효를 거쳐 장수를 누릴 기미가 보인다.

 

'첫사랑', '짝사랑', '포장마차는 나 때문에', '환절기'...다 좋았지만,

무슨 뜻인지 내용은 이해불가여도,

이상하게 분위기가 적당히 애잔한 것이 '서해에서'가 오래 내마음을 잡아 끌었다.

 

서해에서

 

인간이 버린 것들을 천천히 되밀어오는 해안

나의 해안선은 늑막염처럼 쓰리다

모래에 묻어둔 병은 담장에 박아둔 병과 똑같이

경계를 넘는 이들의 발을 베어버린다

나는 오래 일몰에 길들여졌다

필라멘트 끊어지기 전의 한순간

물에 던져 넣은 백열등 하나, 항응고제처럼 잦아든다

그러니, 그런 것이다, 누가 손을 넣어

가슴의 불을 끄는 때가 있는 것이다

상한 우유처럼 철벅이는 파도 앞에

드문드문 귀신들이 서 있다

자꾸 쓸려가는 자신의 그림자가 위태로워 못 떠나는가?

흔적과 연애하는 자가 귀신이다

파도는 스팸 전화처럼 자꾸 와서는

여보세요, 말하기 전까지 침묵을 지킨다

말도 안돼, 자백을 강요하는 장사꾼이라니

하지만 가당치 찮다고 할 때의 바로 그

얼토와 당토야말로 귀신의 영토다

지워질 때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강역이다

상한 우유처럼 나는 누설해야 한다

이곳은 너무 눅눅하다고

내일이 되어도 일출은 볼 수 없을 거라고

서성이던 귀신 하나가 다가와

아저씨, 불 좀 빌립시다, 말을 건다

흔적과 연애하는 자가 귀신이란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추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자가 귀신이라는 말과 같은 뜻일 수 있겠다.

모래 위에 그린 그림처럼 파도가 한번 휩쓸고가면 지워질 수 있는,

그렇게 쉽게 지워지는 흔적이 되어야 할텐데 말이다.

 

'ㆍㆍㆍㆍㆍㆍ자신의 그림자가 위태로워 못떠나는가?'는 자기애라기보다는 미련쯤 되겠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가슴의 유리병 속의 불빛은,

누군가 와서,

안되면 세찬 바닷바람이라도 불어와서,

또는 누군가가 가슴속에 손을 넣어 전원을 차단시키듯,

불을 끌 수 있도록 가슴을 내어놓는게 오히려 현명할 수도 있겠다.

 

'불 좀 빌립시다'가 결코 자신의 가슴 속 유리병 속 타오르는 그 불은 아닐것이므로,

아니, 아니어야 하므로...

 

무릇 서정시의 탈을 쓰고 말만 앞세우는 시들이 남발하는 시대에,

권혁웅의 시는 그런 의미에서 몸소 경험한 체험의 산물인듯 하여,

애착이 가고 미련이 남든다.

하지만, 흔적과 연애하는 자가 귀신이란다.

귀신 잡는 해병대가 될 것도 아닌 다음에야,

과거에, 흔적에 연연하지 말고,

지금 현재를 가열차게 사는게 우선일 게다.

 

사는 건 현재를 가열차게 살아야겠지만,

난 그래도 이 시인의 앞날이, 장래가 참 궁금하다, ㅋ~.

 

언제던가, 누가 써는걸 사주겠다고 하고는...날 어디 유명한 순대골목으로 데려갔던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순대를 써는 아주머니를 향하여,

"순대 썰지 말고 그냥 길게 통째로 주시구요. 포크랑 나이프 하나만 주시겠어요?"

라고 했었다.

그래서인가?

난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라는 제목을 자꾸 내맘대로 '애인은 순대를 토막내고 운다'로 바꾸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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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0-29 16:08   좋아요 1 | URL
언제나 시와 노래 즐겁게 누리시면서
하루하루 아름답게 일구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