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산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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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은 읽을 책을 어떻게 고르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때 그때 필 꽂히는 대로'이다.

은연중에 내 심리 상태를 반영하게 될텐데,

아무래도 나이를 먹다보니, 나이듦이나 죽음에 관한 책들이 많다.

 

생각나는 것들만 꼽아보자면,

좀 멀게는 '헤닝만켈'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있고,

최근 것으론,

전설의 편집자라는 '다이애너 애실'의 '어떻게 늙을까'부터,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내 이름은 루시바턴',

그리고 '필립 로스'의 이 책까지...

핸리 마시의 '참 괜찮은 죽음'이 대기중인데, 딴 책으로 분위기를 전환한 후 돌아와야 겠다.

침잠할까 두렵다.

 

정영목 님의 번역은 믿고 골라읽을 정도이지만,

필립 로스의 경우, 명성은 익히 들었으나,

책은 몇 권 소장 중이지만,

읽기는 처음이었다.

 

그동안 나이듦이나 죽음과 관련된 여러 명의 글들을 읽었는데,

본인의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그것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솔직했고,

그리하여 무방비 상태에서 '훅~!'하고 강하고 묵직하게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또 혼자 있었기 때문에 남자답거나 성숙하거나 철학적인 척할 필요 없이, 느끼는 대로 감정 표현을 할 수 있었다.(16쪽)

 

필립 로스의 아버지 하먼 로스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어떻게 살았고,

삶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다음의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여자를 원치 않아. 내가 여자를 위해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잖아. 나는 여든여섯이야, 하먼." "왜 이래, 나 참, 난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야. 누군가하고 즐거운 식사를 하고, 인간다운 사람들과 사귀는 얘기를 하는 거라고." (59쪽)

빌 위버라는 친구와 필립 로스의 아버지가 나누는 대화이다.

내가 만나는 환자들이 어르신들이 많아서 일테지만,

난 빌 위버의 심정도 하먼 로스의 심정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관계를 이어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빌 위버는 관계 자체가 버겁고 힘에 부친다는 얘기일 것이고,

하먼 로스는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 하먼 로스가 남은 노년을 이렇게 보내겠다는 다짐일 수도 있겠다.

 

책을 읽으며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필립 로스의 나이는 쉰 살 생일이 언급된 걸로 미루어,

쉰 언저리이고,

우리나라에 좀 늦게 번역되어 나온 것인가 보다.

1933년생으로, 올해 그의 나이가 이 책에 나오는 아버지 나이 정도이다.

 

필립 로스의 다른 글은 아직 읽지 못했지만,

그를 멋지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마음 씀씀이와 표현력 때문이다.

내 옆에 앉아 있던 빌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자랑스럽게 소곤거렸다. "말 한번 제대로 하는군."

"저 아시잖아요, 빌 - 늘 대중이 바라는 걸 알죠."

"역시 나의 필립이야." 빌은 말하더니 내 손을 잡고 음악가들이 악기를 들고 나타나 자리에 앉아 조율을 시작할 때까지도 놓지 않았다. 빌은 내가 아직도 일곱 살짜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일곱 살 때부터 알았기 때문에 손을 잡고 있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내가 그동안 얼마나 나이를 먹었건 얼마든지 내 손을 잡고 있을 권리가 있었다.(64쪽)

 

솔직히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허먼 로스의 죽음이 그리 아프게 와닿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그의 죽음을 무덤덤하게 넘겼다는 건 아니고,

폭풍 눈물을 흘렸지만, 뭐~ㅠ.ㅠ

 

이 책에 등장하는 상황이 1980년대 상황일듯 하고,

우리의 지금 현실과 비교되어 완전 부러웠다.

 

가장 부러웠던 것은 죽음 앞에서 무력해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삶을 주도했듯,

삶이 그러하였듯 죽음을 주도적으로 맞이한다는 것이었다.

 

또 부러웠던 것은 필립 로스 같은 효자 아들을 두었다는 것이고,

 

또 한가지, 허먼 로스가 보험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고 한다지만,

노후 생활이나 치료비나 병원비 따위를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랬다.

 

그 상황을 2017년 현재 우리나라로 옮겨 온다고 한다면,

노후 생활자금도 그러하지만,

병원비나 기타 비용 또한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어르신은 많지 않을것이다.

일정 부분 자식들에게 부담을 줄 것이고,

때문에 우리 옛 말에는 긴병에 효자없다는 말도 있는 것일게다

 

필립 로스와 관련하여서도 이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때,

대화를 나눌 친구가 있다는 점에서 부러웠었는데,

이건 필립 로스의 상황을 알게 되어 마음을 고쳐 먹었다.

때론 가까운 사이일수록 나누기 어렵고 껄끄러운 대화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럴때 대화를 나눌 (이성이든 동성이든) 친구가 있다는 건 부러운 일이지만,

관점을 살짝 비틀어 보니까,

이 무렵 필립 로스는 이혼을 하여,

본인의 심장 수술을 할때도 혼자 버텨내야 했던 걸 보면,

배우자나 부모, 자식과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게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어찌 되었건 간에,

이 책의 아버지와 아들을 통틀어 가장 부러웠던 것은,

이야기마다- 뉴어크의 다운넥에서 아일랜드인 불량배와 맞서던 이야기든 방과후에 사촌의 대장간에서 일하던 이야기든-의사는 초조함만이 아니라 그에 못지않은 호기심으로 귀를 기울였으며, 친절하게도 아버지가 할 말을 다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당면한 문제로 방향을 틀었다. 의사는 아버지에게 입천장을 통해 바늘을 찔러넣어, 종양에서 조직을 떼어내는 과정을 한 단계 한 단계 자세히 설명했다.(157쪽)

의사가 아버지가 어떤 얘기를 하든 다 들어줄 정도로,

환자 한명 한명에게 시간을 충분히 배정하고,

환자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상세하고 자상하게 설명을 해 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귀가 안 들리지는 않으나,

담 같은 걸 높이 쌓아올리고,

일정 영역 안으로 들어오면,

어느 순간 잽싸게 차단해 버린다.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감정적으로 엮이는 건 사절이다.

 

암튼 허먼 로스, 우리의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품위를 잃지 않고,

잘 살면서 죽음에 잘 다가간다.

 

필립 로스 또한 글의 곳곳에 유머 코드는 장착했지만,

아버지의 삶을 미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잘 그려내고 있다.

그가 아버지의 삶을 미화시키지 않고 곧이곧대로 그려내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 지는,

다음 구절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필립이 꼭 어머니 같아."

  나는 놀랐다. 처음에는 그것보다는 "꼭 아버지 같아"하고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으나, 아버지의 묘사는 사실 나의 상식적인 기대보다 더 통찰이 있는 것인 동시에, 훨씬 노골적이고, 뻔뻔스럽고, 또 부러울 정도로 자의식 없이 솔직한 것이었다. 그래, 아버지는 늘 나에게 뭔가, 관습적인 미국 아버지가 가르칠 만한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가르칠 만한 것이 아니라, 스포츠가 가르칠 만한 것이 아니라, 매력적인 남성이 되는 법 같은 것이 아니라, 예측 가능한 일이지만 허영심이 강할 수밖에 없었던 내 소년기 갈망, 교육받지 못한 아버지 대신 현명하고 위엄 있는 아버지가 나타나주기를 바라는 갈망으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상스러운 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나도 모르게 반쯤 창피해하면서도, 동시에 아버지의 공격받기 쉬운 면, 특히 반유대주의적 차별의 표적이 되기 쉬운 면 때문에 아버지와의 유대는 강해지고 아버지를 얕잡아보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는 단단해졌다. 나는 아버지에게 일상어를 배웠다. 아버지 자신이 바로 일상어, 시적이지 않고 표현이 풍부하고 바로 과녁을 노리는 일상어, 그 모든 뻔한 한계와 더불어 그 모든 끈덕진 힘을 지닌 일상어였다.(216쪽)

이 책이 아름다운 것은,

필립 로스의 아버지 허먼 로스가 죽을때까지 삶을 마주 대하는 품위 때문이고,

한가지 더, 필립 로스가 지금 그의 아버지 나이 언저리에 있기 때문이다.

 

돈이나 재산, 부동산 따위가 아니라,

어떤 기질 같은 것을 유산으로 받을 수 있다는 건 어쩜 축복이라는 생각이 드는,

조금은 쌀쌀하고 쓸쓸하기도 한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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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5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7-12-16 09:46   좋아요 0 | URL
좋은 말이지? 영광인거네.
우리는 어울려 살게 마련이고,
그러다보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또 받기도 하고 살아가는 것 같애.
그런데 문득 내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는 건,
내가 특별히 영향을 미치는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그대가 똑똑하고 기억력이 좋아서가 아닐까?

난 나이를 먹으면서 좀 느슨해지는 것 같애.
만남이나 모임을 점점 줄이려고 하기도 하지만,
모임 후까지 내가 무슨 얘길했고,
상대방이 무슨 얘길했고,
기억하지도 못 하지만,
기억할 필요도 못 느껴.
그냥 모임 자체를 즐긴다고 해야할까?

내 그대를 애정하는 마음에서 한마디 하자면,
때로는 분석 같은거 하지말고,
‘냅둬, 이대로 살다 죽게‘해봐.
한결 편안하고 살만해진다, ㅋ~.

실상 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일을 하긴 하지만,
일이 너무 힘들어 다른덴 신경 못 쓰는데,
오히려 그게 좋다~^^

마녀고양이 2017-12-19 11:51   좋아요 1 | URL
그렇게 느슨해진다니 반갑다~~~~
우리가 나이를 먹긴 먹는구나, 그것도 잘. ^^

분석이라고 하니 사고적으로 들리지만, 실은 내가 뭘 원하는 건지 인식하는 소리를 듣겠다는 거지.
자기의 특별한 말을 기억하기보다는 독특한 자기의 분위기들, 느낌들.
묘하게 중독적이라서 끊지 못하는. 아하하.

sslmo 2017-12-19 18:24   좋아요 0 | URL
ㅎ,ㅎ...내가 ‘쫌‘ 분위기와 느낌이 있어주시지~^^
난 한때 독특한 분위기와 느낌을 목소리에 축소시켜 적용하려 하고,
그게 컴플렉스였었지.
근데 이제 독특한 분위기와 느낌을 가졌다고 하면 고맙게 받아들여.
뭐, 이 나이쯤이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고치기가 힘드니까 말야.
이젠 컴플렉스를 넘어서, 칭찬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진화 중이라고나 할까?

난 요즘 칭찬 결핍이야, 칭찬 많이 해줘~^^

마녀고양이 2017-12-20 10:17   좋아요 1 | URL
다정함 지적이면서 엉뚱한 매력 자기만의 세계가 있어서 멋져보이고 따뜻하고 마음 약해서 다른 사람 잘 도와주고, 안 그럴 거 같은데 늘 그 자리에 있어주는게 가장 고마움~~

단발머리 2017-12-15 19:15   좋아요 1 | URL
저도 필 꽂히는 대로 읽는 편이예요. ㅎㅎㅎㅎ 양철나무꾼님도 그러시다니... 전 또 그게 무척 반가워요~~~~~

저도 이 책 읽고 리뷰 써야지 하고 있는데, 먹먹하기도 하고 할 말이 많기도 하고 해서 내내 미루고 있어요.
필립 로스처럼 효자 아들을 두었다는데 허먼 로스에게 축복이다 그런 생각도 들고요.
그의 다른 책에서 그가 그렇게 미워하고 벗어나고자 했던 그 아버지의 인간적인 모습을 이렇게 만나게 되니..
뭐랄까... 무척 복잡한 기분이 들었어요.

죽음과 부모. 부모의 죽음이 던지는 그림자 같은 것 때문에 전.. 조금 어지럽고.. 그렇게 읽었습니다.
좋은 책에 어울리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sslmo 2017-12-16 10:00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 님이 좋은 리뷰라고 해주셔서, 정말 좋아요.
전 이 책을 blanca님이랑 님 페이퍼를 보고 내처 읽게 됐는데,
님이 왜 필립 로스에 열광하는지 알 것 같아요.
그리고 님이 말씀해주신 복잡한 기분도 충분히 알 것 같고 말이죠.
무엇보다 친정 아버지가 내후년이면 팔십이셔서 더더욱이요.

전 주변에서 어르신들을 많이 봐서 나이듦이나 죽음 따위에 초연할 줄 알았는데,
제 ‘스스로‘가 나이드는걸 곳곳에서 몸으로 느끼게 되는데,
그건 또 속수무책으로, 손 쓸 수 없이 밀려오더군요.

그래도 이런 책을 읽으며,
뭐랄까, 워밍업 한달까,
위안 받는달까 그렇더군요.

그런 의미에서, 님의 이 댓글도 참 따땃하게 느껴지는 것이,
무한 위로가 됩니다.
감사합니다~(__)

sprenown 2017-12-15 19:29   좋아요 1 | URL
품위있는 죽음! 저도 쓸데없는 생명연장장치 쓰지 않고,사랑하는 가족의 배웅을 받고 편하게 죽고싶어요.죽음이 언제 찾아올지는 모르지만 평균수명까지 행복하게 잘살고..돈많은 이건희가 불쌍하죠.

sslmo 2017-12-16 10:12   좋아요 1 | URL
돈많은 이건희가 불쌍하다는 대목에서 살짝 웃었습니다.
돈으로,
이런 저런 기계를 붙여놓고,
기계의 힘으로 버텨내고 있는,
그가 불쌍한거, 맞네요.

돈 많은 사람은,
맘대로 죽을 수 조차 없다고 생각하니, 좀 씁쓸해지기도 하고 말이죠.

전 돈은 많지 않으니 맘대로 죽을 수 있을것 같고,
이제 건강 관리에 힘쓰고 노력할 일만 남았죠.

그런 의미에서,
날도 추운데 옷 뜨뜻하게 입으시고 감기 조심하시길~!^^

sprenown 2017-12-16 12:15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나무꾼님도요!

북극곰 2017-12-22 20:47   좋아요 0 | URL
이책이 나왔었군요. 저도 필립 로스 무척 좋아해요. 요즘 연말이라 쇈히 들떠서 책만 지르고 있는데 이 리뷰를 보니 안 담을 수가 옶네요.

sslmo 2017-12-26 10:12   좋아요 0 | URL
이 책이 완전 재밌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인간적 고뇌 따위를 실감있게 그려내는 점이 좋았어요.
님도 후회하지는 않으실듯~^^
 

 

 

 

 

 

 

 

 

 

 고마워 영화
 배혜경 지음 / 세종출판사(이길안) /

 2017년 11월

 

우주의 질서가 '저절로, 자연스럽게' 그러하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것 또한 그러한 것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조화를 '인연'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건 사람 뿐만 아니라 책이나 영화에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책만 하더라도 그렇다.

마구잡이로 들인다고 다 읽는 것이 아니고,

책과 나의 연이 맞아야 읽게 되는 것이고,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놓고 봤을때 난 영화와의 인연은 좀 소극적일 수 있는데,

시각적 충격을 주거나 잔상이 오래 남는 영화는 안(또는 '못') 보는 경향이 있다.

 

때로 리뷰를 쓸 수 없는 책들이 있다.

한때는 글을 잘 쓰고 싶어 안달을 한 적도 있으나,

이제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니 글쓰기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점점 더 즉흥적이 되어서,

그때 그때 느낌을 춘향이의 그이 이몽룡도 아니면서 일필휘지로 그려내는 지라,

리뷰라는 말이 송구하고 민망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리뷰를 쓰는 책들은 직접 사서 읽으려고 한다.

이 책도 서재 프로필에서 본 지는 좀 됐는데,

보내주신다고 하셨을때까지 알라딘DB에 뜨지 않았었다.

귀한 책을 읽을 수 없을까봐, 얼른 보내달라고 했다.

 

책의 내용들은 알라딘 서재를 통해서 봤던 내용들도 있고 해서 크게 낯설지 않았다.

 

알라딘 서재에 뜨문 뜨문 한편씩 올라오는 글을 읽는 것과는 다르게,

글을 쭈욱 연결해서 읽으니 저자의 개성을 알 수 있겠다.

글이 시원시원하고 군더더기 없이 흐른다.

내동 객관성을 유지한다.

설핏 저자의 개인사가 언급되는가 싶다가도,

저자는 영악하게 빠져나오고,

그 자리에 영화를 바라보는 객관적인 시선만 남는다.

 

내가 이 책을 두고 리뷰로 쓸 수 없다고 한 것은,

51편의 영화 중 내가 제대로 본 것은 10편 남짓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10편도 저자처럼 농밀하게 본 것이 아니라서,

말을 보태거나 훈수를 두기 민망한 정도이다.

 

그런데,

글씨 얘기는 좀 해야겠다.

난 글뿐만 아니라 글씨도 그 사람을 드러내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엄청 좋아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글씨에 모종의 패티쉬가 있는 것 같다.

(우리 남편에게 필이 꽂히게 된 것도 연습장 글씨를 너무 차근차근 잘써서 였다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비밀이다, ㅋ~.)

 

글씨가 큼지막할뿐더러 뻗는 획도 시원시원하다.

글씨가 그러하듯 글에도 군더더기 없는 것이 시원하다.

가슴이 뻥 뚫리고 시야가 훤히 트인다.

덕분에 나도 책은 물론이고 영화도 밝은 눈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 프롤로그를 보면 내가 위에서 얘기한 '인연'을 이렇게 적고 있다.

사람이 그렇듯 영화도 시절인연이 있다. 시의적절한 충고를 해주는 영화에서 빠져 나오면 조금은 나은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화 속 인물과 대사가 절묘한 처방약이 되고 풍경이 더없는 위안의 손길이 될 때마다 자작자작 마음 밑바닥이 젖어들었다. 넘어져도 덜 다치고 씩씩하게 다잡는 맷집도 생기는 것 같았다. 그러고 나면 둥지를 떠나는 새처럼 조금은 자라서 가볍게 날 듯했다. 영화는 그렇게 미욱한 나를 키웠다.(프롤로그 중에서)

 

차근 차근 아껴읽고 보다보면 나도 한뼘쯤 깊어지고 그윽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에필로그를 읽는 것은 또 다른 기쁨이다.

영화는 날마다 태어나고 행복은 그러므로 보장된 셈이다.

 

부디 날마다 행복하시라.

건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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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1 17: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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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6 10: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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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의 영혼 - 경이로운 의식의 세계로 떠나는 희한한 탐험
사이 몽고메리 지음, 최로미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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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읽은 지금 뿌듯함보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처음 제목만을 보고는 이런 발상을 하는것과,

이런 발상과 연구과정을 책으로 옮길 수 있는 것 자체가 기발하고 경이롭다고 생각 했었다.

다 읽고나서는, 뭐~(,.)

이 책은 남편 하워드 맨스필드(작가이자 편집자인가 보다) 덕분에 탄생한 책이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연구 대상으로의 접근 방법이나 실험 방법이 생소하고 신기했을 수도 있는데,

요즘 텔레비전에서 강아지 훈련법을 알려주는 프로그램도 있고,

강아지의 심리를 읽어내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도 등장해서,

거기다가 이 책을 쓴 '사이 몽고메리'로 말할 것 같으면,

돌고래, 유인원, 돼지 등의 동물과 교감을 나눈 전적이 있는지라,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뭐, 다른 점이라면 그동안 우리가 알던 건 척추동물이라는 거고,

얘네는 흐물흐물거리는 연체동물이라는 것 정도.

 

난 조카가 키우는 장수풍뎅이도 봤고,

소문이지만 달팽이를 키우는 사람들 얘기도 들었다.

마광수의 꽁트 속에서는 재주를 부리는 개미를 데리고 레스토랑에 갔다가,

종업원 앞에서 자랑을 하다가 압사를 당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고보면 내가 원했던 건,

문어가 혹 외계인이 아닐까 추측난무하는 '~카더라'통신이거나,

그냥 똑똑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신과 영접하여 로또 번호를 점지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ㅋ~.

 

이 책에는 '사이 몽고메리'가 만난 네 마리의 문어가 나온다.

아테나, 옥타비아, 칼리,카르마.

문어마다 개성이 다분하다, 는 얘기를 하면서,

문어는 인간 역시 개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고 한다.(27쪽)

그 이면에는 문어도 개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때문에 '문어는 누가 자신의 친구인지 파악하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28쪽)' 것이다.

 

'문어가 개체'라는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이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

 

가장 인상적이면서 감동적인 구절은 다음이다.

"소매를 걷어올리고 시계를 풀어놓으세요." 빌이 일렀다. "우리는 늘상, 문어 손가락은 무지 끈적끈적해서 어쩌면 우리 모르게 반지나 시계를 슬쩍 풀어갈 수도 있다고 우스갯소리를 하죠. 하지만 우리 역시 문어를 해칠 수 있는 까닭에 무엇이든 날카로운 물건은 몸에 걸치지 말아야 해요."(78쪽)

이 구절은 은연중에 인간중심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는 나를 겸허하게 만들어주었다.

칼이 나를 지키는 무기가 될 수 있는 동시에 타인을 해치는 흉기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문어가 가장 부러웠던 점은 멀티테스킹이 자유자재라는 점이다.

우리는 멀티테스킹이 쉽지 않으며,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하게 되면 산만해지고, 어느 한쪽 소홀해지기 마련인데,

문어는 여러 개의 팔을 제각각 뻗어 다수의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다.

문어는 모든 것들을 팔에 붙어있는 빨판들을 통하여 하고 있는데,

그 빨판 하나하나를 제각각 통제한다는 얘기이다.

 

암튼 문어는 무척 똑똑한 반면 개구장이인 모양이다.

고대 로마의 자연사학자 클라우디우스 아에리아누스란 사람은 문어를 이렇게 관찰했다고 한다.

"못된 짓과 술책은 이 생물의 특징이 분명해 보인다."(82쪽)

 

문어의 먹물에는 멜라닌 색소 외에도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여러가지 물질이 있단다.

'티로시나아제'라는 효소 얘기도 나오고,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 얘기도 나온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문어들을 계속 '그녀', '그녀'라고 인칭대명사로 받아버리고,

용어들도 지시대명사로 받아버리는데,

때로 이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 건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었다.

(그게 문어를 얘기하는 저자 시어 몽고메리를 얘기하는지, 그녀와 같이 연구를 한 친구를 얘기하는 지,

 지시대명사가 가리키는게 색소인지, 효소인지, 신경전달물질인지 혼란스러웠다.)

 

소싯적 영어를 배울때 마음이나 영혼 따위의 경계를 놓고 구분짓지 못했었다.

그때 'soul'을 이렇게 외웠었다.

'사람이 죽은 뒤에도 영혼은 계속된다고 믿는다'

이 책 'the soul of Octopus'을 보고 문어는 죽고나면 영혼이 어찌될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해봤다.

만약 문어가 죽은 후에도 영혼이 계속 된다면,

영혼의 세계에서는 사람이나 동물 따위,

또는 척추동물이냐 연체동물이냐, 를 구분짓지 않는, 그런 곳이 아닐까?

 

그러고보면 우리가 너무 의미를 부여하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서 그렇지,

사람이든 문어든 간에 저마다의 의식세계를 가지고,

나름 경이롭게 살아가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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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2-08 17:12   좋아요 0 | URL
옛날부터 문어를 ‘못된 짓’과 ‘술책’을 상징하는 동물로 생각했을 정도면 유럽인들의 문어, 낙지 공포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어요. ^^

sslmo 2017-12-11 17:15   좋아요 0 | URL
유럽인들은 아직도 오징어, 낙지, 문어 이딴걸 즐겨먹지 않는대요.
맛도 맛이지만,
왠지 과거 공포의 연장선인듯 해요~^^


2017-12-08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1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17-12-08 18:23   좋아요 0 | URL
아니 이 책이 그 자갈치 준다는 이벤트했던 책인가요. ㅋㅋㅋ 그 이벤트 보면서 엄청 웃은 기억이... 감동적이라고 인용하신 문장에서 저도 고개를 끄덕이고 갑니다.

sslmo 2017-12-11 17:22   좋아요 1 | URL
자갈치가 뭔가 봤더니 자갈치 과자네요.
전 못 받았어요~--;
이벤트 기간이 지났나 봐요.
전 과자라면 뭐든 다 좋아하는데, ㅋ~.

모든 자연을 만날때마다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실상은 ‘거대 자연‘을 만났을때나 경이로움에서 그리 되는 것 같아요.
저부터 반성해야 할듯~^^

서니데이 2017-12-08 18:46   좋아요 0 | URL
이제 문어 못 먹을지도요...
양철나무꾼님, 좋은 금요일 저녁시간 보내세요.^^

sslmo 2017-12-11 17:23   좋아요 1 | URL
거대 문어는 못 드시더라도,
작은 문어는 어떻게...ㅋ~.
문어가 여자 몸에 좋다네요~^^

오늘 완전 완전 추워요.
뜨뜻한 국물 드세요~^^

sprenown 2017-12-08 19:51   좋아요 0 | URL
우리 옛 선비들은 문어를 엄청 좋아했고 귀하게 여겼죠. 글월 문자를 쓰고 머리에 먹물이 가득 했으니까요.그래서 제사때는 빠지지 않는 제물이 지요.문어가 머리만 좋은게 아니라 신통럭도있어요 월드컵때 기억나시죠? 점쟁이 문어..^^

sslmo 2017-12-11 17:26   좋아요 0 | URL
그랬다는데,
저는 제사에 문어 쓰는 건 못 봤어요~--;
근데 제사가 아니라도 멜라닌 색소나 도파민 등 아주 유용하네요~^^
 

책에 물성을 부여해 끔찍이 아끼는 나는 독서를 할때 커버를 분리하였다가 다시 끼워서 보관한다.

한때 내가 모시는 유일한 신이 있다면 '酒님'도 아니고 '책 님'일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 내가 이런 조합이라니~--;

내 완벽한 콜렉션에 오점을 남긴다, 아흑~(,.)

 

 

 

 나사의 회전
 헨리 제임스 지음, 이승은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이런 책을 내가 구입했나 싶어 찾아보니,

내 손으로 직접 구입을 하긴 하였다.

 

책 등이야 '구라'를 치든 사기를 치든, 책이 재밌으면 그냥 넘어가겠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분위기는 언젠가 읽었던 '윌리엄 윌키 콜린스'의 '흰옷을 입은 여인'과 비슷한 것도 같은 것이 독특하다.

 

이 작품은 누가 작가 헨리 제임스에게 크리스마스 시즌에 적합한 유령이야기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쓰여진 것이라는데,

이게 인기를 얻어,

연극, 오페라, 영화, 드라마로도 만들어 졌다는데,

고딕 소설을 ('많이'는 아니어도) 좀 읽어주신 나로서는 그 인기의 요인이 쉽게 공감되기 않는다.

 

내가 번역의 완성도를 논할 깜냥은 아니어 주시고~--;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건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

번역의 완성도는 둘째치고 적어도 가독성은 있어야 하는게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로 달려오고 있는 두 권의 책은 나를 안심시키기에 충분하다.

 

 

 

 아버지의 유산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문어의 영혼
사이 몽고메리 지음, 최로미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6월

 

아참참, 그리고 이 책,

 

 

 

 집중과 영혼
 김영민 지음 / 글항아리 /

 2017년 10월

 

오래전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는데 책값이 좀 비싸다.

김영민 님은 뭐랄까,

내가 배우기 위해 다가가려 애를 쓰는데,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인 느낌이랄까.

언젠가 하루 두번 산책을 하고,

하루 한끼를 드신다는 글을 읽은 것도 같다.

그래서 인지 모르지만,

이런 나의 표현이 외람된 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좀 식물적인 느낌이랄까.

또는 솟대처럼 고고한 느낌이랄까.

 

 

한해가 이렇게 가고 있다.

뭐, 애써 성탄절 분위기를 내보려 하는데,

예전처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흥겨움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너무 깊은 곳에 있어서 올라오다가 여러 감정들에 막혀 '정체'중인지도 모르겠다, ㅋ~.

지금 이 순간도,

아프고 힘들 이들을 생각하며 책이나 읽으며 조용히 보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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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2-06 17:16   좋아요 0 | URL
책 사랑..그 마음이 느껴지군요. 책 소개 고맙습니다.^^..

sslmo 2017-12-06 17:21   좋아요 1 | URL
어떨 땐 책을 읽고 독서를 하는 그 행위 자체가 아니라,
종이로 만들어진 책, 그 책의 물성과 사랑에 빠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극복해야지 하고 노력한지는 좀 됐는데,
쉽지는 않습니다~--;

cyrus 2017-12-06 17:23   좋아요 2 | URL
민음사 판 ‘나사의 회전’도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평이 있어요. 전 열린책들 판본으로 읽으려고 했는데, 이것마저 가독성이 좋지 않으면 남은 건 시공사 판본이군요. ^^;;

sslmo 2017-12-06 17:29   좋아요 0 | URL
미리보기로 보니, 그나마 시공사 게 낫더군요~^^
전 실은 역자의 이력 사항에 쫌 실망을 하고 말았는데,
‘쾰른대학교에서 중국학과 일본학, 만주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라고 되어있더군요.
미국 작가의 책을 번역하는데, 독일의 쾰른이랑 저 ‘중국학, 일본학,만주학‘이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췟~(,.)
저런 이력은 안 적느니만 못 하지요.
개인적으로 ‘바른번역‘이란 곳 쫌 그래요~--;

2017-12-06 1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6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2-06 17:5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저도 같은 책은 여러 번 구매했습니다. 난감하죠.. ㅎㅎ

2017-12-06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6 1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slmo 2017-12-07 10:00   좋아요 0 | URL
메뚜기의 날인가, 메뚜기의 하루, 거금 100만달러 같은 책이 있네요.
열린책들 홍지웅 사장님의 마인드도 좋고,
책제본 하는 방식도 옛날 방식을 고수한다고 해서,
일부러 고르려고 노력했었느네,
이러면 일부러 제껴놓는 수밖에 없죠~--;

박균호 2017-12-06 22:08   좋아요 1 | URL
저의 경우는 책 장 넘길 때 성가셔서 띄지를 따로 두었다가 다 읽으면 띄지를 다시 쒸워서 보관하는 편입니다. 커버도 그런 편인데 띄지 마저 다시 쒸워두면 뭔가 책을 읽은 증거가 없어질 것 같아서 버리기도 합니다. 띄지의 현란한 광고 문구는 그 책을 구입한 제 순수하고 고매한 의도가 광고에 현혹된 충동 구매로 오해될 까 더더욱 버리는 편입니다. 그나저나 <집중과 영혼>은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다른 사람의 오랜 노력이나 기호를 공짜로 쉽게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니까요.

sslmo 2017-12-07 10:23   좋아요 0 | URL
전 언젠가 한 출판사 사장님으로 부터 띠지야말로 책의 꽃 같은거라는,
그야말로 화룡점정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때가 형광 연두색에 형광 핑크 띠지가 유행할때 였는데 말이죠.
서점 매대에 쫘악 깔려있으면 그런 책들이 눈에 띤다나 어쨌다나 그러시더라구요.
그후로는 띠지 하나도 허투루 못 버리겠더라구요.

그나저나 책은 잘 되십니까?
알라딘 통계를 보니까 올 한해 제가 사랑한 작가는,
님이 1순위, 조지수 님이 2순위(이분 수필집까지 싸악 구입했습니다, ㅋ~.)더라구요.
제가 건필을 응원합니다~!^^

비연 2017-12-07 08:45   좋아요 0 | URL
오늘 김영민님의 책을 보관함에 넣었는데... 이 분의 책을 한번도 본 적이 없더군요, 제가..ㅜㅜ
양철나무꾼님의 글에서, ˝내가 배우기 위해 다가가려 애를 쓰는데,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인 느낌이랄까˝
라는 문구가 마음에 남습니다. 조만간 사서 한번 보려구요.

sslmo 2017-12-07 10:27   좋아요 0 | URL
김영민 님이 처음이시라면 ‘동무와 연인‘이나 ‘봄날은 간다‘ 같은 걸로 워밍업 하시는것도 괜찮을것 같고,
이분 홈페이지에 들어가 글들을 둘러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요즘 글들은 조금 더 단단하고 높아진 느낌이라서 말이죠~--;

북극곰 2017-12-07 09:07   좋아요 0 | URL
김영민 님의 책에 대한 감상, 완전 와닿습니다. -.-; <문어의 영혼>, 저도 맘에 담아 두고 있어요. 표지도 참 멋지고요. ㅋ
연말에 저도 조용히 책읽으며... ^^

sslmo 2017-12-07 10:29   좋아요 0 | URL
이게 누구랍니까?
잘 지내시는거죠, 북극곰 님?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이렇게라도 안부를 여쭐 수 있으니,
이만하면 된걸까요?^^

‘문어의 영혼‘은 말이죠.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상살력과 기지가 너무 멋진것 같습니다~^^

북극곰 2017-12-11 11:42   좋아요 1 | URL
반겨주셔 감사해요! 네 잘 지내고 있어요.
올해 다른 일을 좀 벌이느라... 알라딘은 뻔질나게 들락거렸지만, 서재방문을 못했어요.

조금 여유가 생겨, 믿음직한 서재들을 방문하며 읽을 책들을 담고 있는 중입니다.
연말하면 알라딘이죠. 이러면서... ㅋㅎㅎㅎ
역시나 서재를 돌아댕기다보니 시간이 훌쩍이네요.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던가, 좀 오래전 '사랑과 전쟁'이라는 드라마였던 것 같다.

남자와 여자의 이별장면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아낌없이 주어 미련이 없다고 하는데,

그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때 난 '아낌없이 주어 미련이 없다'는 말의 이면을 들여다 보려 한 것 같은데,

아낌없이 주는 것은 좋지만, 그것으로 끝~!

떠나고 났을때 자기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여력은 남겨둬야 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했었다.

 

이 책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나는, 달링턴 경께 모든 걸 바쳤습니다. 내가 드려야 했던 최고의 것을 그분께 드렸지요. 그러고 나니 이제 나란 사람은 줄 것도 별로 남지 않았구나 싶답니다."(298쪽)

달링턴 경의 집사로서 그에게 모든걸 바친 것은 알겠지만,

이젠 미국인 페러데이를 모시는 입장에서 그에게 줄 것이 남아있지 않다는 말처럼 들려 씁쓸했다.

 

이러다 보니 생각은 널을 뛰어,

'아낌없이 주어 미련이 없다'는 것은 좋지만,

아낌없이 줄때도 '자기 자신'은 불살라버리지 말고 남겨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깐 해보게 되었다.

 

암튼 우리의 집사 스티븐스 씨는 달링턴 경 사후 미국인 페러데이를 새로 모시게 된다.

페러데이가 미국에 다니러 간 사이에 휴가가 주어지고,

페러데이의 적극적인 권유로 난생 처음 여행을 가게 된다.

여행의 목표는 한때 달링턴 가문의 총무로 있던 켄턴 양을 만나는 것이었는데,

그 여정에서 스티븐스는 자신이 섬겼던 달링턴 경을 부인하기도 하고,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 다소 허세로 비춰질 수 있는데 상당한 돈을 쓰기도 한다.

 

사실 난 이 여정이 자기 자신을 돌아다보는 계기가 되고,

그리하여 어떻게든 마음을 고쳐먹게 될 줄 알았는데,

돌아보기는 돌아본것 같은데,

그 과정이 시종일관 자기변명으로 일관된 것 같아 안타까웠다.

따라서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이 단정하고 싶다. 즉 ‘품위’는 자신이 몸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집사의 능력과 결정적인 관계가 있다. 모자라는 집사들은 약간만 화나는 일이 있어도 사적인 실존을 위해 전문가로서의 실존을 포기하기 마련이다.(57쪽)

 

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을 해보니,

그동안 그가 지켜온 품위로는,

그런 그의 삶을 돌이켜 반성을 하게 된다면,

여태까지의 삶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니까 쉽지 않은 일일것 같다.

 

이 대목을 읽고는, 심지어, 달링턴 경 밑에 있었다는 걸 부인하는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우리 세대는 임금이나 휘하 직원의 규모, 화려한 가문의 명성만을 고려해서 이직을 결정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직업적 권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인의 도덕적 진가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ㆍㆍㆍㆍㆍㆍ우리 세대는 세상을 사다리가 아니라 '바퀴'와 같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147쪽)

자신의 모든걸 걸었던 주인의 도덕성에 흠결이 있다는걸 깨달았을 때의 상실감을 충분히 짐작하겠다.

더불어 자신의 새주인 페러데이에게 이혼한 숙녀가 재혼하는 걸 들어 옛주인을 정당화하는 것도 이해하겠다.

"ㆍㆍㆍㆍㆍㆍ흔히들 이혼한 숙녀가 재혼하여 새 남편 쪽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 했을 때는 첫 결혼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요. 저희 직업에도 그와 유사한 관습이 있습니다, 나리."ㆍㆍㆍㆍㆍㆍ오늘날, 달링턴 경에 대해 어리석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여러분은 내가 그분과의 관계를 좀 난처해하거나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짐작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하지만, 그 어떤 것도 진실보다 깊을 수는 없는 법이다.ㆍㆍㆍㆍㆍㆍ나는 달링턴 경에게 35년을 바쳤다. 그리고 그 기간만큼은 나 자신이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 '저명한 가문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말하더라도 그리 부당한 주장은 아닐 것이라 믿는다. 내가 지금까지의 경력을 되돌아보면서 느끼는 만족은 주로 그 시절에 성취했던 것들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러한 특권을 누릴 수 있었음에 오늘도 나는 자랑스럽고 감사할 따름이다.(161쪽)

 

사실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이름이 일본식이어서,

소설이 그다지 영국적이지는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읽다보니 켄폴릿의 '20세기 3부작 시리즈'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 지극히 영국적이다.

그런 작가가 감정이입한 인물인 스티븐스 집사가,

여행 중에 이런 사람들을 만났을때, 혼란스럽지 않았을까 싶었다.

“ㆍㆍㆍㆍㆍㆍ왜냐하면 우리가 지난날 바로 그 권리를 위해 싸웠기 때문이지요.”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선생님, 에덴 씨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적인 면에서요. 지위 고하, 빈부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대화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제 생각이 옳은가요?“(233~234쪽)

 

마침내 켄턴양을 만나게 된 그가,

그 또한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영감님'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나이가 들었는데,

켄턴 양의 변화만 두드러지게 읽어내는 장면이 좀 아이러니컬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계속하는 사이에 더 많은 것들, 세월이 그녀에게 남긴 더 미묘한 변화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켄턴 양은 '약간 느려진' 것 같았다. 나이를 먹으면 사람이 대체로 침착해지니까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는데 실제로 나도 한동안은 그렇게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내 눈에 보이는 이 분위기는 삶의 고단함에 다름 아니라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지난날 그녀를 때로 들뜬 사람처럼 보이게 할 정도로 활기차게 만들었던 생기의 광체가 이제 사라진 듯 보였다.(285쪽)

 

이 책의 마지막에 보면 스티븐스는 낯선 노인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속내를 드러내는 듯도 싶다.

"하지만 이따금 한없이 처량해지는 순간이 없다는 얘기는 물론 아닙니다. '내 인생에서 얼마나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던가.'하고 자책하게 되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럴 때면 누구나 지금과 다른 삶, 어쩌면 내 것이 되었을지도 모를 '더 나은' 삶을 생각하게 되지요. (293쪽)

 

"ㆍㆍㆍㆍㆍㆍ만날 그렇게 뒤만 돌아보아선 안 됩니다. 우울해지게 마련이거든요. 그래요, 이제 당신은 예전만큼 일을 해낼 수 없어요. 하지만 그건 우리도 다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사람은 때가 되면 쉬어야 하는 법이오. 나를 봐요. 퇴직한 그날부터 종달새처럼 즐겁게 지낸답니다. 그래요, 우리 둘 다 피 끓는 청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계속 앞을 보고 전진해야 하는 거요."

그러고 나서 그는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300쪽)

 

하지만, 그는 새로운 주인 페러데이에게 부응하기 위하여 농담의 기술을 발전시키겠다는 다짐을 하며 이 애기를 끝내게 된다.

결국 그는 심기일전하여 '남아있는 나날'동안 새 주인에게 충성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 책은 스티븐스의 삶을 통하여 그의 지독한 고지식함을 '품위'라는 말로 설명하는데,

만약에 나라면,

품위 따윈 됐으니 개나 줘 버리고,

빌어먹거나 날품 팔이를 하더라도,

오늘 이순간, 나의 삶을 살겠다고 하겠다.

인간은 '홀로', '품위있게'는 살 수 없다.

감정을 느끼고 살을 보대끼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괜찮다고 자위하고,

새로운 주인 페러데이와 농담 코드에 맞추겠다고 세뇌시키지만,

그게 어긋나기라도 한다면,

그 상실감을 어찌할 것인가 말이다.

주제넘을지 모르지만,

남아있는 나날 동안 이젠 부디 자신의 삶을 살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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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2-05 20:56   좋아요 0 | URL
님 덕분에 좋은 소설을 알게 됐네요.. 소설의 힘을 믿습니다!

sslmo 2017-12-06 10:42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예전에 들였는데,
노벨상 수상했다고 하여 이제서야 보게 됐어요.
같은 이름의 영화도 있는데,
영화랑은 좀 느낌이 다른 것도 같아요~^^

2017-12-05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6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