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세트 - 전10권 삼국지 (민음사)
나관중 지음, 이문열 엮음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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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잘못된 윤리관을 가르칠까 크게 저어되는 위험한 삼국지이다...특히 학생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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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세트 - 전10권 삼국지 (민음사)
나관중 지음, 이문열 엮음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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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기대감을 가지고 읽었으나 실망감이 매우 크다. 

우선 평역이라는 말이 전해주는 기대감을 충족시키는데는 턱없이 부족하다. 평역이랄 것도 없는 수준이며 미량이나마 작가의 해석이 들어가 있는 부분이  너무 억지스럽다. 이 평역을 읽다가 책을 던져 버리고 싶은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책값 아까워 그냥 읽는 심정이라니...(이 미량의 견해를 평역이랍시고 넣었다는 점에서 평역이라는 말을 덧붙였다면 이는 독자에 대한 기만이다)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차라리 조용히 번역을 하는 수준에서 머물렀더라면 삼국지를 읽는 쏠쏠한 재미를 전하는 정도에서 만족스러웠을지는 모르겠다.   


여러장면에서 저자는 말도 되지 않는 잡설을 늘어 놓는데 그 중 가장 못 보아줄 대목은 아래와 같다. 


삼국지의 내용에서, 조조는 동탁을 살해하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도망을 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된다. 도망을 치는 도중 진궁을 만나 도움을 얻고 동행하게 된다. 도망을 치는 것을 두고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목숨을 우선은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대부분의 독자라면 다 아시겠지만 조조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여백사를 만나고 헤어지는 대목은 조조의 인물됨은 물론 그가 가지고 있는 윤리관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여 작가의 윤리관이 문제가 된다고 사적으로 생각하는 대목 중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
  갑작스런 조조의 방문을 받은 여백사는 조조를 반갑게 맞이하며 조조로부터 여차여차한 사정이야기를 듣는다. 부친과 친분이 있는 옛정을 생각하고 또, 그 때만해도 의협심이 있었던 조조를 높이 평가한 여백사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이번에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나랴 싶어 조조에게 있는 것 없는 것, 할 수 있는 최고의 대접으로 예우를 하려 한다. 


 여백사는 자식들에게 돼지를 잡으라 일러두고 자신은 먼 길을 걸어 술을 사러 나간다. 여백사가 한참을 지나도 돌아 오지 않자 원래 의심 잘하던 조조는 퍼득 자신을 밀고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밖으로 살살나가 상황을 살피다가는 여백사의 자식들이 돼지를 어떻게 잡을까 의논하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올커니 저놈들이 나를 잡으려 작당을 하는구나 싶어서, 진궁에게 저들을 잡아 죽이자 하고는 함께 칼을 들고나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혹시나 덜 죽인 사람이 있나 싶어서 집을 뒤지니 다 죽인 것 같은데 모두 8명이었다. 그렇게 일을 처리하고 나서 상황을 살펴보니 여백사의 형제들은 조조 자신에게 대접할 돼지를 잡으려고 준비중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본디 의심이 많았던 조조가 너무 성급하게 판단을 내리고 저지른 커다란 잘못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큰 실수가 일을 이지경으로 만들었지만... 

 

하여 조조는 자신의 막대한 실수를 알아차리고는 얼렁 도망쳐야 겠다 싶어 진궁과 함께 부지런히 도망치고 있는데, 집에서 벌어진 끔찍한 상황을 알리없는 여백사가 저만치서 조조를 알아보고는 오랫만에 만났는데 이리 서둘러가면 얼마나 섭섭하겠냐며 머물다 가기를 재차 권유한다. 찔려도 한참 찔리는 구석이 있는 조조는 갈길이 바빠그러니 그냥 가마하고 돌아 섰다가는....
여백사를 돌아보며, '백부님,  저기 오는 저 사람이 누굽니까?' 하니, 여백사가 '글쎄다....' 하는 사이에 뎅강 칼로 여백사의 목을 베어 죽인다...

진궁은 조조의 갑작스런 행동에, '아니, 맹덕, 이게 무슨 짖이오?' 하고 추궁을 한다. 진궁은 죄가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크나큰 불의가 아닐 수 없소 하면서 조조를 나무란다. 

 ========여기까지가 여백사를 만나고 그렇게 헤어지는 장면이다.

 

그럼 저자가 이 대목을 어떻게 평하고 있는지 평역을 좀 살펴보자... 

'조조가 의지한 것은 義의 크고 작음과 목적의 정당함이었다. 천하를 위한 대의 앞에서는 사사로운 은의(恩義)는 희생될 수도 있고, 만백성을 학정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용납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라고 쓰고 있고, 

 저자는 덧붙여, '忠孝仁義는 혼란의 시대에는 맞지 않으며, 혼란의 시대는 法家와 兵家의 통치술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는 충효인의는 혼란의 시대에는 맞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괴변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법가와 병가에서는 필요하면 義고 뭐고 가치가 없는 것이니, 죄없는 사람이라도 필요에따라 사정없이 죽여도 좋다고 가르치는가?' 라고 저자에게 묻고 싶다. 저자가 상앙의 제자도 아니고, 조조를 위한 변명을 하고 싶은 저자의 뜻은 알겠으나, 이건 애들도 코웃음을 칠 그런 궤변이 아니고서야 뭣이겠는가... 이 대목은 정말 아무리 너그럽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대목이다. 義에는 작은 의가 있을 수 있겠으나, 큰 義는  바로 그 작은 의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작은 의를 그토록 무가치하게 팽개치는 사람이 과연 큰 의를 펼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니던가. 이런 잡설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상앙이 되 살아난다해도 그런 궤변은 쏟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그야말로 궤변론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중국 대륙은 한 때 사회가 어지럽고 혼란스러기 그지없었전 적이 많다. 한 예가 춘추 5패와 전국 7웅들의 시대이다. 인륜이 무너지고 도덕과 인의예지신 충효 등이 모두 땅바닦에 떨어진 혼란한 시기 그 자체였다. 자고일어나면 한 지역의 주인이 바뀌는 일이 비일 비재했다. 백성들은 불안에 떨고 먹을 것은 없어 굶주리고 있는데 권력자들은 서로 다투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시기에 출현한 현자들을 제자백가라고 하지 않던가? 물론 법가의 사상이 출현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들이 출현한 근본적인 이유는 사회질서를 안정적으로 환원하기를 소망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고 인륜과 도덕, 인의예지신충효의 개념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러할진대 조조의 의리 없고 냉정하며 일신의 안위만을 위한 행동을 옹호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다니...이런 것을 두고 바로 개똥철학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물론 개똥도 때론 쓸데가 있다고들 한다. 언제 쓰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혼란스러운 시기라면 더더욱, 비록 작은 '의'라도 소중히여겨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라가 혼란스러웠던 춘추전국시대의 공맹은 왜 '인'과 '의'를 강조하고 나섰겠는가...나라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울 수록 인과 의가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는 말씀이 아니던가... 주원장을 명 태조로 등극시킨 유기에게 전무후무 제갈무후라 불린 제갈량이 왜 조조에게 출사를 하지 않았던가. 과거 원한에 사무친 조조와 그 군사들이 죄없는 백성들을 모조리 죽이며 학살하는 장면을 본 기억때문이 아니던가. 제갈량은 대의명분에 따른 전쟁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무고한 백성을 도륙내는 일은 그 어떤 명분으로도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제갈량도 법가의 치세술을 이어받은 인물이 아니던가. 한마디로, 능력자일지는 모르지만 인간성이 제대로 되먹지 못한 조조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조조에게 출사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반박할지도 모른다. 제갈량은 그렇다치고 수많은 모사들이 조조에게 몰려든 이유는 무엇인가 라고...이유는 단순하고도 간단한 것이다. 제갈량은 적어도 결코 사욕을 위해 출사한 인물이 아니다. 나름대로 뚜렷한 대의명분이 있었고 그 대의명분을 유비를 통해서 이루고 싶어했던 것이다. 제갈량이 2인자가 된 후에 묘사되는 제갈량의 가산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말단 공무원의 직급으로도 가능한 초라하기 그지 없는 재산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조에게 출사했던 대다수의 모사들은 제갈량과는 많이 달랐던 것이다.

 

조조에게 달라붙에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추구했던 인물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황제를 등에 업고서  힘있으며 돈이 많는 놈(조조)에게 달라붙어 떡고물이라도 떨어지면 얻어먹고 싶은 심정인이었던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조조에게는 매우 유능한 능력자인 모사, 순욱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순욱은 그러나 자신의 능력을 조조를 위해 펼치려 했다기 보다는 조조를 이용하여 자신의 뜻을 펼치치기 위해 사용 했던 모사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순욱은 조조가 천하의 주인이어야 했기 때문에 출사한 것이 아니었다. 순욱은 조조를 통해 타세력을 제압하고 한왕조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는 대의 명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그러한 뜻을 위해 또다른 능력자인 조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욱의 오판이었다. 알고보니 조조는 스스로 천하를 쥐고자하는 역모의 의지를 가진 인물이었던 것이다. 순욱과 조조는 동상이몽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럿듯 대의명분을 품었던 순욱과 사리사욕을 품었던 조조의 입장 차이로인해 순욱은스스로 자결하지 않았던가. 미련한 순욱인가 아니면 의로운 순욱이던가... 순욱은 사람을 잘못 보아도 한참을 잘못보았던 것이다.

 

또한 조조의 모사중에 '곽가'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곽가는 조조가 원소와 일전을 앞두고 있을 때 조조가 원소를 이길 수 밖에 없는 10가지 언급했다. 그 10가지는 도, 의, 치, 덕, 인 ...등 이었다. 곽가는 조조가 도, 의, 치, 덕, 인... 등에서 모두 원소를 이기고 있으니 전쟁에서 조조가 승리할 것이라는 뜻이었다. 곽가가 여백사를 그토록 허망하게 죽이고 죄없는 백성들을 대의 명분없이 살육했던 과거를 올바로 직시하고 있었더라면 과연 곽가는 조조에게 도,의,덕,인을 말할 수가 있었을까.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곽가가 조조를 섬기게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순욱이 정욱을 조조에게 추천하였고, 정욱이 곽가를 조조에게 추천하는 순서를 가진다. 조조에게 출사한 것은 곽가의 불행이라 할수 있거나 아니면 모사로서 좋은 재능을 가진 인재였을지는 모르지만 천지의 섭리를 깨닫지 못한 머리좋은 모사꾼에 불과한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곽가가 도와 의, 인, 덕을 아는 진정한 인재였더라면 조조에게 출사하는 일은 없었을 을 것이며 조조에게 그런 아부는 절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곽가는 머리는 있는 모사였으나 대의명분이 진정 무엇인지 몰랐거나 조조라는 인물됨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고 할 밖에...

 

흔히 조조는 인재를 아끼고 중용했다고들 한다. 그렇게 등용한 인재들이 조조에게 통일을 이루도록했고 결국 천하를 거머쥐게 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조조에게 몰려든 인재들은 물론 자신의 야욕에 동참하는 인재들이 었다. 기존의 왕조를 부정하고 황제의 자리를 탐하는 인간 조조말이다. 난세에 올바른 대의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키고 천하를 얻는 사람은 진정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다. 그러나 조조는 결코 그런 인물이 될 수가 없다. 말로는 대의 명분을 내밷었지만 자신의 사욕을 위해 인재를 기용하고 싸우도록 했으며 결국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는 본색을 드러냈다. 그렇게 찬탄할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은 조조의 가계가 그 어떤 비극적인 종말로 댓가를 지불받았는지 모든 독자들이 잘 알 것이다. 도, 덕, 인, 의...등등 곽가가 말했던 10가지가 정말 조조에게 합당한 말 이었다면 삼국지는 지금의 삼국지와는 달라졌어야 했던 것이다. 조조의 후예가 그렇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도와 의, 인, 덕...등 을 행한 인물의 자손들이 그리도 허망하고도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세상의 이치던가.

  

개인적으로 깊이 존경하는 남명 조식 선생님은 평생 '경'과 '의', 오직 두 글자만으로 인생의 지침을 삼아 공부하고 가르치며 일생을 보내신 분이다. 비록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은 듯 보이지만 사실상 퇴계 이황 선생님이나 율곡 선생님 못지 않은 분으로 알고 있다. 그런 훌륭한 분도 평생을 의지해온 글 자 중 하나가 '의'였으니 저자는 정녕 '의'라는 글자의 뜻을 알고나 저런 궤변을 늘어놓는 것인지...하도 해괴망칙한 대소의론인지라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이와 흡사한 억지와 궤변 일색의 평을 저자는 삼국지 내내 갈겨대고 있다고 생각해 보시라...억지도 한 두번이지 이건 정말 읽어주기가 곤혹 스러울 밖에....조조를 높여보고 싶은 저자의 심경은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조조를 높이 평가하는 그의 방식은 실소를 금치 못해 웃음이 터질 지경이다. 조조를 새롭게 조명해보고 싶은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분명히 6-70년대와는 다른 평가를 할 수 있는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기로서니 작가의 무작정 조조 띄우기 방식으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가치관이 몹시 흔들린 작가의 모습은 그동안 쌓아온 작가로서의 아성 뿐아니라 그 나이와도  전혀 걸맞지 않는다. 성장하고 있는 청소년도 아니고... 물론 인간은 평생을 배운다는 말을 들어보기는 했다. 그러나 작가가 아직 배워야할 윤리관이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결국 이 책을 읽으며, 이문열 이라는 작가가 이정도 밖에는 되지 못하는 소인배였던가 하는 의구심이 샘솟듯 한다.  결국 애꿎은 삼국지만 졸렬한 삼국지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한마디로 삼국지만 버린 꼴이 되어버렸다.

  또 다시는 이런 미숙하고도 어리숙한 평역을 내놓지 않았으면 한다. 이런 평역은 독자에 대한 기만이 아니던가. 그동안 이 책이 인기리에 팔렸다면, 아마도 정비석 선생의 삼국지나, 박종화 선생의 삼국지가 나온지 너무 오래되었고, 그 후로는 많은 삼국지 중에 그럴 듯한 삼국지가 없었기 때문 일 것이다(물론 최근 황석영도 삼국지를 섰다. 읽어볼 생각이다). 또한 많은 독자는 그동안 이문열이라는 작가가 작가로서 쌓아 올린 아성과 신뢰도가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아니면 삼국지라면 다 같은 삼국지겠거니 구입하는 독자들의 삼국지에 대한 믿음 때문일 것이다. '삼국지'라는 원작이 가지고 있는 아성을 등에 업지 않고서야 이 삼국지가 이토록 호평을 받으며 독자들에게 다가갈 리가 없다. 원작의 삼국지에 대한 호평인지 이문열의 삼국지에 대한 호평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경우의 리뷰들이 허다한 것을 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별을 한개라도 눌러야 하다니....   아...'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사람의 아들'이 그리울 뿐이다.  정녕,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를 끝으로 절필 했어야 했던가.... 

 

 이문열의 삼국지는  

미성숙한 윤리관을 가지고 있고, 

그리하여 서툴고 억지스러운 평역으로 일관하고 있어  잘못된 저자의 윤리관을 배우게되는 분이 없기를(특히 한창 배우고 있는 학생들), 또, 이 삼국지를 삼국지의 전형으로 알고 지내는 분이 한 분이라도 덜 하기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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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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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난중일기를 읽는 것이....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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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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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필법이 매우 특이하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다. 저자가 쓴 '남한산성'도 이 책 '칼의 노래'와 같은 필법인데, 두 책이 모두 무엇인가를 한 단계 높여 보려는 의도가 짖게 배어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문학의 질적 수준 향상에 그 목적을 두고 쓴 글이라면 나름대로 성공한 경우라 할만하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저자와 같은 스타일로 소설을 쓴 사람을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소설 문학의 한 장르를 개척했다고 나는 평가하고 싶다.  

저자의 필법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1) 새로운 소설의 서체를 독특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2) 주인공의 심리적인 묘사를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표현해 내고 있다 

3) 작품은 소설이지만 저자가 마치 한 편의 시를 쓰고 있다 

4) 전개의 과정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이 모두는 새로운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요즘들어 소설을 거의 읽지 않는 나로서는 새롭게 느꼈고, 흥미를 자극하는 서체였다. 위에서 느낀 점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  

1) 새로운 소설의 서체를 독특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이 느낌은 마치 작가가 새로운 화파의 선구자적인 존재라는 느낌을 받는다. 이점은 대단히 고무적이며 작가의 시도에 찬사를 보내마지 않는다. 그러나 화파는 그 선구자로 하여금 그 화파를 더더욱 발전해 가게하지만, 소설에서는 김훈의 서체를 따라가는 이는 영원히 아류로 남을 것만 같다. 즉, 김훈 고유의 영역에서 멈춰서는 한계를 가지는 것에 그치지는 않을지... 그것이 소설계의 생리가 될수도 있지 않을까...

 2) 주인공의 심리적인 묘사를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표현해 내고 있다 : 이 점은 김훈만의 서체가 주는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묘사해내는 상황들에서 나는 시간이 잠시 정지한 듯한 착각을 느끼곤했다. 이 느낌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숨소리는 물론 그 눈동자의 움직임까지도 전해주는 특성이 있었다. 더불어 이는 때로 지루하다는 느낌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이 점을 작가는 극복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작가의 소설이 가지는 장점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소설 분야에서는 꽝인지라 판단이 서질 않는다...

3) 작품은 소설이지만 저자가 마치 한 편의 시를 쓰고 있다 : 한 편의 시를 쓰는 듯한 느낌은 그 장면에 대한 세밀한 작업이라고 본다. 작가는 현미경으로 관찰 대상을 바라보고 그 관찰 내용을 매우 세심하게 독자에게 읽어주고 있다. 그러나 소설에서의 이런 방법은 소설이 주는 변화와 속도감을 배제한 방식인지라 장점이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는 듯 하다. 여하튼 매우 독특한 서체라는 점은 분명하다.

4) 전개의 과정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 작가가 전개의 과정에 신경쓰지 않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이 책이 역사 소설이라서 그런가 보다 하는 생각을 들게한다. 저자의 책을 읽은 것은 남한산성과 칼의 노래 딱 두 가지 뿐인데, 역사를 자신의 이야기로 풀어 서술하는데 전개 과정이 저자에게는 따로 필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역사적 시간의 흐름이 곧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구의 대상으로서 그 충분한 가치를 지닌 작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위의 독후감은 오직 이 책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을 읽은 후의 느낌일 뿐이다. 이런 느낌이라면 차라리 최근 완역된 '난중 일기'를 읽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순신 장군께서 직접 쓴 글이니 그 심정과 정황을 그 얼마나 잘 전달하고 있겠는가...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저자는 독특한 자기만의 영역을 그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은 시보다는 길이가 매우 긴 작품이다. 길기 때문에 독자를 매우 오랜 시간동안 즉, 작품을 읽는 내내 독자를 이끌고 가야한다는 의무감과 부담감이 공존하는 분야라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서 전해주는 특이점들은 그 영역이 저자의 한계가 될지, 아니면 저자의 완성된 서체로 그 독자적인 영역을 빛나게  할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섣불리 판단 하기에는 분명 아직 이르니까...  

 결론적으로는 매우 궁금증을 아자내는 작가이고 작품이다. 현재 작가가 지켜가고 있는 소설의 이러한 특징들을 작가는 계속 지켜갈 것인가. 아니면 끝내는 이러한 틀을 깨어 버릴 것인가... 기존의 틀 속에서 새로운 스피드를 장착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일까...아마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긴박감과 속도감은 현미경적인 묘사 때문에 떨어지는 요소는 아니라고 본다. 독자와의 유대감을 유지하면서도 빠르게 전개해나가는 소설만의 특징들...분명히 그 방법이 있을 것이다...    

어쨋든 저자는 신중한 작가이고 자신이 새로낸 길로 가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그런 점에서 별점을 4개 주고 싶다... 적어도 과거 새로운 화파의 거장들이 당대에 제대로 인정받은 적은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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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3대 논쟁
이재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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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자를 구별 하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매우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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