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가끔은 뜻밖의, 정말 의외의 책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 책을 만나는 순간 그 기쁨과 희열은 비할 수 없이 크다. 알라디너라면 그러한 책을 만난 적이 한 번 쯤은 있을 것이라 여긴다. 내게도 그런 책이 있다. 밀도 있고, 정렬적이며, 정성을 들였고, 온 힘을 쏟아부었구나 싶은 이 책이다. 사적으로 매우 귀하여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책, 바로 「생태주의 시학」이다.

 

생소한 제목의 책이지만 내용은 그만 감동을 금할 길이 없었다. 몇몇 우리의 시인들은 이미 생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걱정과 우려로 그들의 아픈 가슴을 시로 써 나아갔다. 지극히 대중성을 지닌 시들이지만 실제로는 대중적이지 못한 시들이 많다. 당시에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지만 어쩌면 그 제목들은 어디선가 들어보았음직 한 것들이기도 하다. 물론 별로 널리 읽히며  팔려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시가 그러했듯, 이 책 역시 별로 알려지지는 않은 듯하다. 10년이 지났지만 리뷰하나, 아니 페이퍼하나 없다. 이유는 자명하다. 저자가 돈벌이가 되지 않는 내용을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자본주의가 아닌 생태주의가 우리들의 뇌리 속에 뼛속 깊이 자리잡지 않은 탓이던가, 이토록 아름다운 책은 알려지지 못한 채 조용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생태, 친환경을 외치는 사회에 살고 있고, 썩은 물과 공기를 마시는 사회에 살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그것에 큰 관심이 아직은 없는 것이다. 그러하다보니 각 국가의 정책은 자본 중심이고 우리의 건강에 관심을 줄 여유가 없다. 이에 홀로 고독한 경종이라도 울리듯, 저자는 외롭고 쓸쓸한 생태주의를 노래한 시인들의 시를 정밀하게 분석해낸다. 역시나 고독하게..아, 시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런 것이었구나 싶은 감동의 물결이 가슴에 밀려온다. 모름지기 책이란 이처럼 저자의 땀과 피나는 노력과 정렬, 그리고 자신의 진정성을 가득 담아내는 것이어야 한다. 아니 독자로하여금 그것들을 느낄 수 있도록해야 한다. 사람들은 시를 어려운 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이 책은 그러한 관념을 산산히 부서주거나 혹은 역시나 겁나게 어려운 것이 시라는 생각을 더욱 공고히 해주거나!  어쨋거나 친환경이니 에코이니 하는 말은 이제 인문학의 영역으로 들어와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최근, 서울의 하늘은 평소의 하늘, 평소의 공기가 아니었다. 황사와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었고 그 공기는 우리들의 폐 속으로 고스란히 들어갔다. 숨을 쉬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의 대기가 숨쉬기에 좋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 더 과거에는 황사를 으레 그려니 했고 지금처럼 그리 폐해가 심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몇일 전의 공기는 정녕 최악이었다.

 

자연보호는 초중등학교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말이고, 매체는 에코, 그린, 혹은 친환경을 외치지만 이는 겉으로 드러낸 슬로건일 뿐, 그 내면은 마케팅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알고보면 환경에 해악을 끼칠 수 밖에 없는 상품에 기업은 죄다 그런 수식어를 가져다 붙이고 있으며, 정작 알아보아야 할 우리는 기업이 환경을 위해 애를 쓰는 줄로 안다. 학교도 기업도 말로는 자연보호를 외치지만 우리가 진지하게 자연을 생각해 본 적이 과연 있던가. 자연보호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전두엽을 손상시켜 인지능력을 현저하게 떨어뜨리고, 치매 혹은 암을 유발시킨다는 초미세먼지를 우리의 자녀들이 마시게 했다. 기성세대는 공범이나 진배없다.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물과 공기를 더럽혀왔으니 말이다. 아니 의식의 부재로 되려 오염을 부추겨왔다. 사실은 국가도 기업도 국민도 모두 공범인 것이다. 그러나 영문도 모르고 자신을 해치는 공기를 마시고 있는 저 어린 아이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조만간 중금속으로 가득 한 미세먼지가 한반도를 강타할 것이라 한다. 그들에게 이제는 생화학전용 방독면을 권해야 할 때가 온 것인가. 그들의 조상들이 만들어 낸 오염으로 찌든 공기가 폐로 들어가 그들의 온 몸을 병들게 하고 말 것이니 말이다.

 

동양에서는 이미 2500년 전 자연으로의 회귀를 외쳤고, 서구에서는 그 족보를 들추면 니체를 만날 수 있다. 니체는 정신 뿐 아니라 육체의 중요함을 설파했다. 육신이 병들면 그 정신이 온전할 수 있겠느냐 외쳤던 것이다. 동양은 본디 천지인을 하나로 인식했으니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겠다. 서구도 자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고 동양보다 더 자연을 생각하는 언론과 단체가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면 글쎄올시다 이다. 자연의 파괴는 산업혁명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의 노동력이 아닌, 기계의 힘을 이용하던 그 시점부터 자연의 파괴는 시작된 것이다.

 

이 책으로 니체는 정신만을 유독 지나치게 강조하는 서구의 사상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플라톤 이후 서구는 정신세계의 정수라고 일컫는 이데아의 사고속에서 같혀 살아왔다. 상대적으로 물질 세계를 경시했고 열등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렇게 철학이 정신의 미학에 도취되어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물질(자본)을 숭상하는 서구의 이율배반에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서구의 기형적 철학에 염증을 느껴던 것일까. 니체는 그 결과 편협된 사고의 불균형을 이제는 바로잡아야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서구는 도대체 왜 하.늘.을 날아다니는 독.수.리.만을 강조하고 주입시키냐고 반기를 들었다. 대.지.를 제 몸뚱이라로 기어다니며 인식하는 나의 친구 '뱀'을 홀대하지 말라 외쳤다.  짜라투스트라는 독수리의 눈과 뱀의 몸뚱이리가 조화를 잘 이루어야한다고 일갈했던 것이다. 니체에게 대지는 치유의 대지였다. 당시 서구는 짜라투스트라의 이러한 직격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에 깊은 감명을 받은이가 있었으니, 바로 Richard Strauss였다.  

자본주의가 피도 눈물도 없는 이념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양산해온 주범이며, 불평등의 최고 기여자라는 점도 그러하지만, 우리가 마시는 물과 공기를 오염시킨 주범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물론 있다. 자본주의는 '사람의 목숨보다 돈을 더 소중하고 귀중히 여기는 이념' 이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 '돈을 가장 숭상하는 이념'이다. 국가와 기업은 대중 앞에서는 사회로의 환원과 재분배 그리고 평등을 강조하지만 뒤로는 귀중한 돈을 쫒는다. 신을 숭상하는 종교는 사실은 역시 돈을 숭배한다. 물론 종교가 죄다 그렇다는 말 아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집단인 각 국가와 각 종교의 작동 원리는 알고보면 자본주의, 즉 돈이다.

 

생명은 물과 공기에서 온다고 했다. 과학자 ‘밀러’와 그 동료  ‘유리’라는 두 냥반은 물, 메테인, 암모니아, 수소를 사용한 실험을 했다. 일주일 간의 실험 끝에 그들은 탄소가 유기물로 합성된 사실을 알아냈다. 무기물로부터 유기물이 합성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중 미소량의 탄소가 아미노산의 한 형태라는 것이었다. 아미노산이 무엇이던가. 살아있는 세포의 단백질을 합성하는 생명의 중요 물질이 아니던가. 우리 신체내의 DNA는 아미노산을 특정한 위치에 배치시켜 단백질을 만들어내게 한다. 그렇다면 아미노산의 결핍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자명한 일이 아니던가.

 

원시 대기에서 그런 아미노산의 발생을 매개했던 것은 바로 물과 공기가 핵심이었다. 이제 생명의 근원인 그 물과 공기가 오염될대로 오염되어 더 이상 마실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공기도 곧 우리를 질식 시키려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물을 병에 담아 팔고 사기를 20여년 이상 해왔다. 기업은 그렇게 물로 돈을 벌고 있다. 우리가 마실 수 없는 오염수가 더 증가하고 지독해질수록 기업은 돈을 더 많이 벌어들일 것이다. 사실 물이 기름 값과 다름이 없는 가격이 아니던가. 이대로라면 앞으로 더 비싸질 것이 뻔하다.

 

우리의 처지가 이러하니 압축 공기주머니를 구매해야 할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가정집에 공기 정화기가 대세인 요즘이다. 앞으로는 개인 휴대용 공기 정화기 가지고 다니거나 공기 주머니를 차고 다닐밖에... 과연 양질의 공기를 얼마에 팔고 사게되는 것일까... 양질의 물과 공기가 더욱 희박해지고 고갈 될수록 그 값은 점점 더 비싸질 것이다. 물과 공기를 살 돈이 모자란 사람들은 중금속이 가득한 썩은 물과 공기를 마시며 그렇게 죽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마치 돈이 있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 은하철도 999를 타지만 그 고층 도시의 아래, 지독하게 오염된 곳에서 거리의 서민들은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던 그 은하철도 999말이다.

 

얼마 전의 언론 기사에 의하면 인도 인구의 절반이 질 나쁜 공기의 덕분에 3년의 수명이 단축된다고 한다. 이는 인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의 세상이 이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두어도 좋단 말인가....혹자는 말할 수 있다. 굶어 죽으나 썩은 물과 공기를 마시고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가 아니던가? 라고 말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생각해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오염수를 마시고 사는 물고기들의 몸이 변형되어 찌그러진 상태로 태어나고 돌연변이가 태어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방독면을 착용하거나 압축 공기주머니를 몸에 지녀야하는 세상에서 과연 우리가 살아야하는 것인가? 나아가, 우리의 자녀들이 앞으로 생산하게 될 미래의 우리 후손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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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5-02-27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운 챠트랑님 잘 지내시지요?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요즘 생수를 사먹는 것은 너무나 당연시 되어 버려서,
갑자기 초등학교 때 선생님께서 물을 사먹는 나라도 있다고 했을 때 다들
와아- 하고 웃어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해지지 않는 세상이 되어가네요.

그리고 사람이란게,
당연하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그 당연했던 것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나봐요.
저는, 가끔이라도 차트랑님이 이렇게 글을 올려주시는 자체가 안심이 됩니다. ^^

차트랑 2015-03-04 01:51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오랫만입니다
염려해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있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겠지요...

저는 북플을 하지 않아 소식을 제때 받지 못해
답이 늦어진 점 양해바랍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 소나무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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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서는 이퇴계를 이부자(李夫子)라 칭했다. 학문의 지고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성리학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조선의 선비로 평하고 존경했다.

 

사실 이퇴계는 학문 뿐 아니라 인품 또한 고매했고 언과 행은 일치했다. 안동을 중심으로 경상좌도의 학풍을 이끈 이퇴계는 인(仁)을 숭상했고 도학에 심취했다. 아마도 주희가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한 이퇴계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이퇴계의 가문은 부호였다. 부족함이 없는 가문의 자제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실록에 서얼 차별의 강력한 주장에 앞장선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이퇴계의 가문이 가지고 있던 노비의 수는 367명이었고 전답을 합치면 현대기준으로 34만 평의 규모였다. 그런 그가 집안의 노비들로부터 무척이나 존경을 받았다. 노비를 물건 취급하던 시절 그는 노비들을 사람으로 대했다. 둘째 아들이 일찍 요절하자 그 며느리를 재가시킨 일화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당시로서는 불가한 일이었기에 그가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 잘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그는 갑의 위치에 있었으나 결코 갑질하지 않은 조선의 몇 안 되는 선비 중의 선비였던 것이다.

 

 

겸손과 이해의 휴머니스트 이퇴계, 고봉에게 캐치볼을 던지다

 

편지로 먼저 연서를 보낸 이는 다름 아닌 이퇴계였다. 얼핏 기고봉께서 먼저 편지를 보냈을 법도 한데, 사실은 그 반대였던 것이다. 둘의 나이 차나 관직의 차이로 보아도 먼저 손을 내밀기란 양쪽다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이퇴계의 나이 58세(1501년생), 관직은 대사성(성균관 총장)이다. 1527년생인 기고봉의 나이는 새파란 32세로 명종 13년 막 과거에 급제하고 아직 관직을 수여받지 못한 선달(先達)의 신분이었다. 관직으로 보아도 하늘과 땅 차이, 나이 차이로 보아도 26년, 기고봉은 이퇴계에게 자식뻘 되는 젊은이였다. 게다가 이퇴계의 학문은 성숙할 대로 성숙해있었고 기고봉은 아직 새파란 젊은이였다.

 

조선의 대사성이 이제 막 급제한 젊은이에게 편지를 보낸다는 것도, 아직 9급의 관직조차 제수 받지 않은 선달이 지체가 높아도 한참 높은 이퇴계에게 먼저 편지를 드리는 것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지방 공무원이 임금에서 상소를 올리는 일이 더 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로서는 스승님으로 모시고 공부를 한 사제지간도 아닌, 선후배의 간극이 멀어도 너무나 멀기만 했다. (기고봉의 학문은 대개가 독학이라고 한다)

 

이렇게 극복해야 할 것들이 만만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퇴계가 기고봉에게 먼저 볼을 던진 것이다. 이퇴계가 보낸 첫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기고봉께서 이퇴계를 먼저 찾아 인사드리고 학문을 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고봉이 학문의 절정에 달해있던 이퇴계를 만나고 싶어 했을 것이고 이로서 13년간의 기나긴 캐치볼 성격의 서신 교환이 시작된 것이다. 1558년의 일 이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이퇴계는 학문으로 당대 중국에서조차 그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이었다. 반면 기고봉의 학문은 주로 독학이었다. 독학하며 궁금한 것도 많았을 것이고 의문을 가진 것도 많았을 것이며, 이미 널리 알려진 이퇴계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에 차이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를 보면 독학이 가르침을 받는 것보다 유연하고 창의적인 사고를 발달시킬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쨋거나 이것이 이퇴계를 찾은 가장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기고봉의 방문에 답하는 이퇴계의 짧은 편지는 정말 읽어보아야 그 맛을 알 수 있다.

 

기선달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씁니다.

병든 몸이라 문밖을 나가지 못하다가, 덕분에 어제는 마침내 뵙고 싶었던 바람을 이룰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요. 감사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아울러 깊어져, 비할 데가 없습니다. 내일 남쪽으로 가신다니 추위와 먼 길에 먼저 몸조심하십시오.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 하여 학업을 추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만 줄이며 이황이 삼가 말씀 드렸습니다. 退

 

편지는 이렇게 쓰는 거다. 편지를 잘 쓰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읽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연서도 이런 연서 또 없다. 특히, 이퇴계의 편지에 주목해도 좋다. 둘이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이퇴계가 기고봉보다 편지를 훨씬 더 잘 쓴고 느낄 것이다. 연애편지를 대필하고 밥을 얻어먹곤 하던 그 시절을 보낸 분들이 계실 것이다. 과거 「편지 쓰는 법」이라는 책이 집집마다 꽂혀있던 시절도 있었다.

 

각설하고, 이퇴계가 병이 났다하니 문병을 핑계삼이 이참에 찾아뵙고 학문을 논하고 싶었을 기고봉의 마음도 전해온다. 이퇴계가 “ 뵙고 싶었던 바람을” 이라고 쓴 것으로 보아 이미 기고봉의 학문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음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퇴계도 사실은 기고봉을 은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기고봉이 1등으로 과거에 합격했기 때문이 아니라 학문을 논할만한 사람이라고 퇴계는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벼슬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이퇴계의 행적과 학문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면 그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춥고도 추운 겨울 이퇴계의 부실한 몸에 병이 들었고, 이를 계기삼아 초면이지만 서로 만나 학문을 논하던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때만 해도 조선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를 13년간이나 주고받는 캐치볼을 하게되리라 이퇴계는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 하여 학업을 추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는 대목이 이를 말해준다. 이퇴계는 아직 기고봉의 학문이 설익었다고 판단하고 있음을 은근 알려주는 대목이 아니던가. 그러나 기고봉은 앞으로의 기나긴 그들의 개치볼을 직감했을 것이다. 볼을 먼저 던진이는 이퇴계였지만, 그 볼을 뜨겁게 달구어 낼 사람은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하기로 마음 먹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첫 만남에서 이퇴계가 이토록 애정이 절절히 배어나는 연서를 먼저 보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퇴계가 누구던가. 주자대전을 손에 쥐자마자 벼슬을 마다하고 낙향하여 학문에 정진하던 대가 중 대가요 선비 중 선비가 아니던가. 그런 선비가 이제 막 벼슬길에 오르려는 젊은이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의미심장한 것이 아닌가 한다.

 

기고봉의 문병에 대한 감사를 비롯, 그 인물됨을 한눈에 알아봤을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대견스런 자식을 대하듯, 혹은 미래가 촉망되는 인재를 알아보듯 했을 것이다. 학문에 정진하는, 장차 조선을 이끌어갈 인재로 보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사람답게 대하던 이퇴계였던 것도 사실이나 기고봉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하여 그는 세대 차와 관직의 차이, 한마디로 넘사벽을 무너뜨리고 기고봉을 학문의 벗으로 여겼을 것이다. 학자에게 학문의 벗만큼 좋은 상대도 없다. 학문은 학문을 그리워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 학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다음해 편지의 마지막에 뭍어나 있다.

 

 "------ , 기미년 정월 5일, 황은 머리를 숙입니다. 退"

 

 

이퇴계. 영혼의 밥을 짓다

이퇴계의 인물됨과 벗에 대한 그리움이 이보다 더 잘 배어나오는 대목이 또 있을까..이 순간 나는 잠시 글을 멈추었다. 어린 벗에게 머리를 숙이는 이퇴계를 생각해보시라. 그의 인품이 아름답다. 물론 여러 곳에서 이런 모습들이 잘 드러나 있다. 어디 이 한 줄 뿐이랴. 그러나 이 순간, 잠시 책에서 눈을 떼고 하늘을 우러러 볼 수 밖에 없었다. 역자가 원문을  함께 싣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쉽고 서운할 따름이더라...

 

최한기에게는 벗이라 칭하는 유일한 사람이 있었다. 古山子 김정호가 바로 그였다. 사람이 없어서 벗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딱 한 사람의 벗이면 족하다는 말도 있다. 그만큼 벗하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다. 이퇴계는 기고봉을 자신의 벗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동서양을 두루 살펴도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전설은 남아있지 않다. 오로지 조선 땅에 역사적인, 살아있는 전설을 남긴 두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이퇴계의 인물됨은 십여 년을 이어가는 편지에서 더더욱 빛이 난다. 후학을 대하는 대가의 태도를 배울 수 있으며, 이부자라 칭송받는 인물이었지만 자신의 생각을 굽힐 줄도 아는 진정한 대가의 자세를 배울 수 있다. 이 편지는 앞으로 진행될 실로 뜨거운 쟁점인 사단철정론도 담고있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학문의 절정에 달해있던 대가의겸허함과 신독(愼獨), 그리고 진정한 학자이며 선비로서의 자세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편지이기도 하다.

 

조선의 학문이 그 얼마나 왜곡되어있었고 편협되어있었던가. 선비들은 학문을 자신의 권력을 확보하고 지키는데 사용했다. 이상하게도 조선땅에 학문이 발달할수록 그 백성들은 더 배고프고 고단했다. 이것이 조선의 역사가 가지는 이율배반이자 딜레마이다. 학문과 백성들과의 괴리, 그 거리감은 너무가 컸다. 제 아무리 무슨 말로 변명을 해도 소용없는 역사가 이를 반증하고있다.  이퇴계는 그 사람이 누구이든 상대방을 사람으로 대했다. 자신의 노비들에게마저 그 인격을 존중했다. 관용과 존중, 학문을 추구하되 행동이 따랐던 인물, 이퇴계. 그의 이름은 권(權)과 학(學)의 표본을 우리에게 남기고 갔다. 갑질로 소외감을 느끼며 삶을 살아가는 세상, 이퇴계가 짓고 간 영혼의 식사를 마다해서야 되겠는가.

 

학문과 실천이 일치했던 사람, 이퇴계. 그의 후예인 대한민국은 이퇴계가 남기고 간 영혼의 식사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맛있게, 기꺼이 먹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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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마음과 몸을 위한 책을 만드는

민음사 출판 브랜드 판미동 입니다. :)


판미동에서 중국 최고 석학 장치청 교수의 건강고전 명강의를 담은

『황제내경, 인간의 몸을 읽다가 출간될 예정입니다.

(이에 출간전 가장 빠른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한의학과 건강, 특히 고전에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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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내경, 인간의 몸을 읽다』

중국 최고 석학 장치청 교수의 건강 고전 명강의



논어보다 황제내경을 먼저 공부하라!

"인간의 생명을 통찰하는 최초·최고의 경전"



중국 국학 최고 권위자 장치청 교수가 들려주는 건강 고전 강연으로, 

2500년이 넘는 고전 <황제내경>을 대중적으로 풀어낸 책이다. 

전인적인 몸 공부를 통해 자신을 읽어내고 삶의 조화로움을 찾는 방법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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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내경, 인간의 몸을 읽다』 서평단 모집 상세 내용



하나, 『황제내경, 인간의 몸을 읽다』 서평단 모집 포스팅을 개인 블로그에 스크랩 한 뒤, 읽고 싶은 이유 간단하고 성실하게 적어서 스크랩 링크와 함께 댓글로 올려주시면 응모가 완료됩니다.


둘, 응모 기간 2015년 1월 19일(월)부터 1월 26일(월)까지 입니다.


셋, 총 추첨인원 10명입니다. (최종 응모자 수에 따라 추첨인원이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넷, 서평단 발표일 2015년 1월 27일 화요일입니다.


다섯, 서평기간은 2015년 1월 30일(금)부터 2월 6일(금)까지 14일간입니다.

서평단에 선정되신 분은 1월 28일까지 개인정보를 비밀댓글로 적어야합니다.

1월 28일까지 개인정보 확인이 안되면 당첨이 자동취소됩니다.


마지막, 첨된 서평단 분들은 서평기간인 14일간 알라딘 블로그 및 개인 블로그에 서평을 작성한 후, 『황제내경, 인간의 몸을 읽다』 서평단 발표 포스팅 알라딘 개인 블로그 및 그 외 블로그나 외부 채널 등에 남기신 서평 링크를 댓글로 달아주셔야 최종 서평이 완료됩니다.



※ 해당 기간 안에 서평 및 서평완료 댓글을 작성하지 않을 시,

다음 서평단 모집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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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인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
백승헌 지음 / 하남출판사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리뷰보다는 어느 순간 페이퍼를 더 선호하는 입장에서 이 책은 고민거리였다. 생각 끝에 리뷰를 쓰기로 한 것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오류 때문으로 말미에 언급하기로 한다.

 

최근 한의원에 들를 일이 있었다. 실내에 들어서자 ‘사상체질’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사상체질에 관계하시는 분이로구나 싶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선생님, 저의 체질은 어떻게 되나요?' 라고 여쭈었다. 돌아온 답변은 뜻밖이었다. ’전에는 체질과 관련하여 진료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막상 진료를 해보니 단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재는 환자들에게 체질에 관한 언급을 피하고 있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내심 기대를 했다가는 적잖은 실망을 했다.

 

이제마의 의학적 관점인 사상의학이 독보적이라고는 하지만 東의학계에서 널리 인정받는 활용성을 점한 것은 아닌 듯 보이고, 대체의학계가 이를 수용하고 있는 입장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러나 현대에 의학계의 인정을 받든 아니든 간에, 이제마의 의학적 관점이 흥미로운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서의(西醫)와는 달리 동의(東醫)는 애초에 만병의 근원을 마음에서 오는 것이라 보았다. 타에 의한 마음의 상처 혹은 내적 발로의 상심은 당사자의 면역력에 관계하여 외부에서 오는 질병을 이겨내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스스로도 내적 질환을 만들어 낸다고 본 것이다. 양의에도 이를 흔히 스트레스, 즉 심인성 질환이라고 명명하고 있고 현대의 다양한 질환들이 이에 해당하는 실정이다.

 

우리말에 ‘환장(換腸), 단장(斷腸)’이라는 말이 있다. 환(煥)이라는 말은 ‘불꽃, 불빛, 빛난다’는 뜻이고 장(腸)은 창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두어야 할 점은 장(腸)이다. 창자를 뜻하는 장(腸)은 사실은 정(情), 즉 마음인 것이다. 한마디로 마음(정신)의 상태가 크게 격동하여(煥) 정신이 올바르지 않은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또한 당대(唐代)의 백거이는 장한가(長恨歌)에서,

야우문령장단성(夜雨聞鈴腸斷聲), 밤비에 울리는 풍경소리에 간장이 끊어지는 듯 하구나, 라고 읊었는데, 장단(腸斷) 즉, 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마음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어쨌든 동의는 인간의 감정을 중시했고, 인간의 감정을 나타내는 희노우사비경공, 즉 칠정(七情)의 불균형에서 병이 깃든다고 보았다. 칠정은 사정(四情)의 다른 표현으로 중용의 첫 장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희노애락지미발 위지중(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사람의 감정(희노애락)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를 中 이라고 하고,

발이개중절 위지화(發而皆中節 謂之和)

“발현하여 그 절도에 잘 들어맞는 것을 和라한다”

 

이를 중용이 아닌 동의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사람의 감정이 동요하지 않는 고요한 상태에 있다가 발현하여 그 절도에 잘 들어맞으면 和를 이루어 내는 법이지만, 발현하되 절도에 들어맞지 않으면 즉, 양극단의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사람의 몸에 병이 깃든다, 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지 싶다.

 

인간은 몸을 움직이는 동물이듯, 그 마음도 늘 함께 움직이게 마련이다. 하여 중용에서 말하는 칠정이 中의 상태에 있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항상 발현하게 마련인데 몸(體)과 함께 각각의 정(情)들이 활발하게 작용하기 시작한다. 하여 칠정 중 어느 하나가 그 임계치를 넘어서는 순간 몸이 상하게 되는 것이다.

 

 

기쁨이 지나쳐도 몸이 상하고, 노여움이나 슬픔이 지나쳐도 마찬가지다. 이제마가 중용의 사정(四情)에 착안하여 사상의학의 토대를 마련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사람의 체(體)와 질(質)을 4가지로 분류하여 임상 연구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100 여년이라는 짧은 역사가 말해주듯 사상의학은 매우 초보적인 단계라 할 수 있다. 하여 항간에는 8체질론이 나오고, 더불어 이 책에서처럼 28체질론으로 확장 보완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이제마는 체질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체(體)는 육체, 즉 몸이고, 질(質)은 정신, 즉 마음을 의미한다.” 106쪽

 

이제마는 몸과 마음(정신)을 하나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몸이 아프면 칠정도 상하게되고, 칠정이 상하면 몸도 따라 상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는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뜻밖의 사고를 만나 몸을 심하게 다치게되면 어디 짜증 뿐이겠는가. 쉽게 화를 내거나 노여워하고 때로는 낙심하여 풀이 죽는다. 부상의 정도에 따라 그 당사자의 심리 상태는 천차만별이 되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심적 스트레스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사람의 경우 또한 병이 깃들게 마련이다. 욕심이 지나쳐도 마음의 병을 만든다. 이는 칠정이 그 임계치를 넘어선 결과이며 칠정이 양극단으로 치우친 결과물이다. 하며 예로부터 만병은 마음에서 온다했던 것이다.

 

체질론을 읽어본 바에 의하면, 간장의 상태가 좋은 사람은 자녀가 달려가다가 넘어졌을 때 웃어 넘길 수 있지만, 간장의 상태가 나빠진 사람의 경우 넘어진 어린 자녀에게 화를 낼 수가 있겠구나 싶다. 하여 같은 사안을 두고도 어떤 때는 웃어 넘기다가도 다른 때에는 화를 내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의 간(肝)은 기쁨(喜)을 관장하는 장기이기 때문이다.

사상체질론은 사람의 체질을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으로 구분한다. 체질에 따라 장기의 크기와 그 기운이 다르다고 본다. 물론 사람의 성격도 그에 따라 다르게 된다. 하여 체질을 약물치료나 음식에 적용시켜가는 방식이다.

 

그러나 독자로서 첨언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사람의 장기가 선천적으로 크고 작음으로 실과 허가 정해진다고는 하지만 당시의 건강 상태에 따라 변화를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태생적으로 간이 튼실하고 폐가 상대적으로 약한 태음인이라지만 간장의 상태가 나빠질 수도 있지 않을까. 간장이 허한 순간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폐가 일시적으로 승증을 보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경우 간이 실하고 폐가 허한 사람으로 단정하여 치료에 임한다는 것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사적인 생각을 하게되었다.

 

체질론에 따르면 맛에 매우 민감한 소음인의 경우 비위가 태생적으로 약하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냄새에 더욱 민간해지는 순간을 만난다. 냄새에 가장 민감한 체질은 태음인이다. 태음인은 상대적으로 폐가 약해 공기 중의 산소율이 다른 체질의 사람보다 더 중요하다. 그러나 소음인이 맛 보다는 냄새에 더욱 민감해지는 순간을 맞는 것이다. 이는 비위보다는 폐가 매우 약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경우 비위보다는 폐를 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약재를 사용할 때, 단정적이기보다는 당사자의 몸 상태에 따라 적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보는 이유이다.

 

또한 체질론은 체질에 따라 음식을 가려먹는 것의 이점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분명 이점이 맞다. 그러나 건강이 매우 양호한 상태에서는 음식에 체질을 관여시키는 것이 꼭 중요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몸이 대부분의 음식을 잘 소화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체질과 맞지 않으며 기운이 강한 음식은 조심하는 것이 좋겠지만 말이다.  문제는 체력이 약해진 상태이거나 심신이 지쳐있는 경우가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 병중이라면 체질론에 따른 섭생은 중요하다고 본다. 음인이 병중 일 때, 차가운 음식을 먹는 것은 병세를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핵심은 항상 결정적인 순간이다.

 

사상 체질론의 또 다른 어려움은 체질의 판단이다. 저자도 그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수학의 공식처럼 똑 떨어지는 정답을 가진 경우라면 문제는 없다. 체질의 판단에 오류가 날 경우 치료는 되려 환자의 상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 정확한 체질의 판단은 과연 가능한 것인가. 책에서는 다양한 체질의 판단을 소개하고 있다. 이점 또한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체질론은 분명 흥미로운 의학적 접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역사가 짧은 만큼 연구의 깊이가 아직은 미약해 보인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제마의 체질론이 인간의 성정을 다루며 철학과 의학을 만나게 했다는 점이다. 이는 실로 독보적인 관점의 접근이랄 수 있다. 서의는 데카르트가 그랬듯이 애초에 정신과 육체를 분리해 연구했다. 그보다 훨씬 이전에 플라톤은 정신세계를 너무 애정한 나머지 물질을 중시하지 않았다, 아니 경시했다. 물질은 변덕스러운 존재인지라 믿음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하여 항구적이며 영원불변한 세계, 바로 정신의 지고한 세계를 애정한 결과 이데아론을 제창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데아론으로 동의에 접근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 동의는 변화 자체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변화를 자연의 이치요 애초에 본질로 본 것이다. 심지어 사람의 장기 상태가 감정과 생각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보았다. 장기(臟器)는 그 장(臟)이 가지는 고유의 기(氣)을 담아 두는 그릇이라는 뜻에서 알 수 있다. 해당 장기의 균형이 깨면 그에 해당하는 정기(情氣)가 이상을 일으켜 격동하게 된다. 한마디로 칠정의 이상 움직임은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인간의 감정 상태가 몸의 건강 상태와 직결된다고 보는 사상의학은 분명 독보적인 관점임에는 틀림이 없다.

 

친구네는 얼마 전, 화장실에서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갔으나 검사결과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고 돌아왔다. 사람은 죽겠는데 이상은 없다는 것이다. 서의의 특징은 병이 겉으로 드러나야만 치료에 임할 수 있는 의학적 특성을 지닌 듯 하다. 물론 요즘은 서의에서도 심인성, 즉 심리적인 요인에서 병인을 찾는 경우가 많다. 질병과 마음(情)의 상관관계를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겠다. 외적, 내적인 병인을 다스리는 의학의 발달을 기대해보는 이유이다.

 

조선의 동의학계에 걸출한 인물, 구암이 있지만 사상의학을 의학적 관점이 아닌 철학적 관점으로 바라보아도 좋은 이제마도 있음을 기억하고 싶다 . 각기의 장점들을 찾아 적절한 접목을 이루어 내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본 도서에는 아쉬운 점이 있는데 다음의 내용이다.

 

 

처음에는 이 책이 28체질론, 즉 사상체질의 확장인고로 내용이 달라진 것인가?하고 의아스럽고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책의 나머지 부분들은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하여 저자의 집필의 실수가 있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초판이 2002년임을 감안할때 그동안 전혀 수정을 거치지 않아 보인다. 앞으로 판본이 이어질 경우 교정이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매우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알라디너들의 건강을 위해 한마디를 첨언하고 싶다.

반후행삼십보 불용개약포 飯後行三十步 不用開藥包

한마디로 식사후 삼십보를 걸으면 약지어 먹을 일이 없다, 라고 이해해면 되겠다.

직접 실험을 해본 결과 300―500보 정도를 걸었을 때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개인 차이가 있기마련이겠지만...

 

아파본 사람은 안다. 건강을 잃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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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길에 올랐다.

자주 그리고 또 자주 찾아보아야하는 곳이지만,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은 일이 바로, 고향길이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이고, 부모님께서 살아계신 곳이며, 나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 고향이다. 나이가 어려서는 그 뜻을 잘 모르다가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서부터 아련한 단어로 변해가는 것이 고향이라는 단어인 것이다.

 

아버지를 뵈니 이제는 젊은 시절의 패기와 사내다움의 듬직함은 어디론가 사라져있고, 어깨는 연약하며, 시들어가는 꽃처럼 안타깝기만하다. 인생은 그런 것, 태어난 모든 것은 그 시기를 다하면 이처럼 쇠약해지고 나약해지는 법, 나도 때가 되면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가리라... 그러나 그 입가의 미소는 그 어느 꽃보다 더 포근하고 더 아름답지 않은가...그 여유있고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가 유일한 위안이 되어준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 생각났다. 당시 깊은 산골짜기의 시골 풍경이 크게 다르지 않았겠지만 학교에서 늘 문제를 일으키는 놈은 다름 아닌 공책이었다. 아니, 어쩌면 지우개가 주범이었는지도, 아니면 빈곤이 주범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공책에 글씨를 실수라도 하게되면 지우개가 없는 아이들은 손가락에 침을 발라 지우곤했다. 지우개가 있는 친구들이라고 크게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공책의 구멍이 바로 그 결과였다. 누가 더랄 것도 없이 공책도 지우개도 모두 저질이었다.  

 

침을 발라 연필자국을 지워보겠다는 지극히 단순한 생각의 결과물, 질 떨어지는 공책의 종이가 수분의 힘을 견디지 못했다. 그만 촌놈들의 몸에서 때가 밀려나듯 시골 촌놈들의 손가락에 공책의 살점들이 벗겨져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다음 쪽의 노트가 휑하니 들여다 보인다.

 

지우개의 사정은 때밀이와는 달랐지만 이도 큰 차이는 없었다. 힘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고사리 손을 가진 초등 1학년 생들의 생각과 결과는 전혀 원치 않는 것이었다. 이는 침바른 손가락보다 훨씬더 비극적인 결과를 간간히 초래했다. 어느 순간, 북~하고 공책의 한 면이 찢어져버렸으니 말이다. 연필 글씨 하나를 수정해보겠다고 애쓰다가는 공책을 찢어먹은 시골 어린 촌놈의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 표정...어이가 없는 멍한 그 표정 말이다...

 

이는 비단 공책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게는 미술시간에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문제는 손가락의 침도 아니요 지우개도 아닌, 바로 크레용이었다. 수업시간에 공책에 침발라 발생하는 일만으로도 스트레스인데, 즐거워야할 미술시간마저도 그러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크레용은 6색갈, 도대체 어떤 색으로 그림을 그려야할까. 빨강, 파랑, 검정, 하양, 노랑 그리고는 하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곱색갈 무지개도 그려낼 수 없는 이 색갈부족의 크레용은 색갈만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재질이 나빴던지 단단하기가 무슨 나뭇가지같았던 것이다.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려면 손에 여간 힘이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단단히 마음먹고 색칠을 할라치면 그만 크레파스가 먹질 않는 것이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색갈이 부족한 것도 불만 가득한 일인데 아 이넘의 크레파스가 도화지 위에 먹질 않네.

 

질 떨어지기는 마찬가지였던 도화지의 살점들이 때 밀리듯 크레파스에 뭍어나온다. 때로는 도화지가 되려 크레파스를 먹고 있었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 놈이 나 하나면 이 얼마나 억울하고 창피한 일이겠는가.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반에 나와 같은 처지의 아이들은 한 둘이 아니었다. 죄다 그런 놈들 투성이다. 크레파스를 이리 돌리고 저리돌려가며 겨우겨우 그림을 도화지 위에 채워가다가는 미처 다 채우지도 못하고 종이 울리는 것이었다. 미술시간을 겨우 마친 아이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하다. 즐거운 그림 그리기시간이 아니라 크레파스와 한바탕 시름을 한 것이다.

 

그렇게 스트레스가 하루하루 쌓여가자 나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날도 미술이 들어있는 날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폭발을 해버린 것이다. 무슨 큰 건수라도 잡은 냥, 씩씩거리며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버지 앞에 당당하게 선 것이다. 평소 아버지 앞에서 힘도 못쓰던 촌넘이 그날은 그렇게 단단히 용기를 낸 것이다.

 

이유를 모르고 눈을 똥그랗게 뜨고 바라보시는 아버지께,

 

"아버지~! 저 크레용 바까주세요~!"

"아내 왜?"

제 크레용으로는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요! 하도 단단해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러냐? 얼마짜리루?"

"오십원 짜리요!"

오십원씩이나??

 

아버지의 반응은 당시 우리집 가정의 형편을 정확하게 대변해주고 있었다.

 

같은 반에는 선장의 아들이 하나 있었다. 대부분 농사를 짖는 집안의 아이 들어었지만 그 친구의 아버지께서는 엔진이 달려있는 큰 배를 운용했던 모양이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세상에 듣도보도 못한 크레파스를 가지고 학교에 왔다. 색갈들은 셀수도 없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크레용이 아니었다.

 

부드럽기는 이루 말할 수 없어서 도화지 위를 날아가듯 스쳐가듯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손이 가는대로 색갈을 내주는 이 신비한 크레파스, 그 색감이 주는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느낌을 가진, 바로 파스텔이었던 것이다. 무지렁이 촌놈들이 파스텔을 처음 보고는 눈들이 똥그래가지고, 빙 둘어서서 그 친구가 조심스럽게 다루는 그 파스털의 색감에 감탄을 금치 못하곤 했다. 입이 딱 벌어지는 순간인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넘...이 친구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에 담겨있는 그 부러움 가득한 감정...그 오묘함은 파스텔보다 더 또렷하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께 떼를 써서는 열두가지 색을 가진 크레파스를 가지게 되었다. 그 값은 무려 오십원이었다!! 무지개를 그릴 수 있고, 도화지위에 색감이 먹히는 크레파스 말이다.

당시 짜장면  한 그릇의 값이 오십원이었다. 시내버스의 요금은 15원 혹은 20원. 지금 생각해봐도 대단한 가격의 크레파스는 아니었다. 그러나 짜장면 한 그릇 값의 크레파스를 부담없이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했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핵교) 5-6학년이 되니 담임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셨다.

"자기 집이 상위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봐~"

당연 손 드는 놈  하나없다.

"그럼 자기 집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봐~"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죄다 손을 든다.

눈치를 보는 넘도 가끔 있기는 하지만 약속이나 한 듯, 죄다 손을 번쩍 치켜들어 올리는 것이다.

"그럼 자기집이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을 드는 친구가 있을리 없다.

(이런 질문을 왜 했을까? 한마디로 가정 환경조사의 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기집이 중산층이라고 번쩍 손을 들던 넘들, 나를 포함하여 한마디로 거시기가 찢어지게 가난한 넘들이었다. 당연한 것은 서로 비교를 할 처지가 아예 되지를 못했다. 잘 사는 집안이라고 해봐야 겨우 작은 엔진 달린 통통 배를 가진 그 친구네 달랑 하나였고, 나머지는 서로 비교할것도 없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들 뿐이었으니 이런 촌놈들은 지네가 진짜로 중산층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집이 뭐가 가난한데?? 다른집이랑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옆집과 차이가 없는 가정, 바로 중산층이었던 것이다.

 

6학년이 되니 테레비가 있는 집 손들어봐, 냉장고가 있는 집 손들어봐,  하는 질문으로 바뀌었는데, 테레비가 뭔지, 냉장고가 뭔지 그 의미를 모르는 놈들에게 물어봐야 소득이 없다. 찢어지게 가난했으면서도 그것이 가난인 줄 모르고 지냈던 나의 과거는 차라리 아름다운 추억이지 싶다.

 

그렇게 나의 추억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동리는 많이도 변해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변해있고, 과거 깊은 산골의 적막함도 변해있고, 세상은 더더욱 변해있다. 오로지 변하지 않은 것는 하늘을 흘러가는 푸르른 저 구름뿐....

 

아니다. 하나가 더 있는데 그만 깜박했다. 언제나 변함이 없는 것이 하나가 더 있다. 바로 어머니 아버지의 마음이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 그것이다. 언제나 너그럽고 자애로운 그 마음 말이다... 결코 깜박할 일이 아닌데 자식은 늘 이렇게 깜박한다. 아름다운 그 마음에 어찌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말이다 내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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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08-04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트랑님의 글을 만날수 있어 좋네요

차트랑 2014-08-04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문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늘바람님,
아주 오랫만에 뵙는군요 건강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