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악성코드니 바이러스니 하는 것 때문에 정말 불필요한 시간들을 허비하는 일이 잦아졌다. 몇 일 전 불청객으로 고생을 했건만 또 같은 현상으로 애를 먹고 있다. 컴퓨터의 진화 과정을 나름대로 지켜본 사람으로 간과할 없는 것이 또한 바이러스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발전이라는 메커니즘에는 그 반대급부인 부정적 파생품이 꼭 따라다닌다. 트로이 목마라는 바이러스가 전국을 동시에 강타한 적이 있었다. 트로이 목마로 피해를 본 것은 트로이만이 아니었다. 국내의 컴퓨터 유저들의 피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도 그 피해자 중 한 사람으로 데이터를 모두 날려버리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했다. 복구비용으로 수 십 만원을 들였지만 파일들은 제대로 복구되지 않았다. 사라진 업무자료들을 수작업하여 입력하는 엄청난 일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하는 그 상황이란....
컴퓨터가 만들어지면서 그에 걸맞는 바이러스도 만들어졌다. 컴퓨터가 진화하면 덩달아 바이러스도 진화했다. 더욱 강력한 방화벽및 항바이러스 프로그램이 개발되면 또 그 방화벽이나 안티바이러스를 여지없이 관통하는 보다 강력한 바이러스가 나타난다. 마치 서로 더 강력한 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도 같은 이론이 이곳에서도 작동하는 모양이다.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누가 이기나 내기하는 것도 아니고...아... 유용한 그 무엇인가가 나타나면 여지없이 그 꼴을 못 보겠다는 듯이 반대급부의 그 무엇이 나타난다.
이는 비단 컴의 바이러스만이 아니다. 질병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치료법을 개발하고 나면 또 다른 알 수없는 강력한 질병이 인간을 괴롭힌다. 수퍼바이러스라는 녀석이 요즘 조용한데, 얼마 전까지 유럽을 공포의 도기니로 몰아 넣은 녀석이다. 흔히 약이 없는 바이러스가 수퍼바이러스인 것이다.
바이러스 못지 않은 중독 증후군
가만히 생각해보면 컴 바이러스나 인간의 질병인자인 수퍼바이러스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세계적인 IT강국을 목표로 한다고 공표한 적이 있다. 전국에 광 케이블을 깔아 초고속 인터넷 네트워크를 각 가정으로 연결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기업들은 그 목표에 따라 분주히 움직였고 초고속망을 이루어 냈다. 초고속이라는 엄청난 속도 덕분에 PC방이 생기고 온라인 게임의 장이 마련되었다. 매체에서는 프로 게이머들의 대결 이벤트를 마련하는가하면 방송으로 직접 내보내기도 했다. 한 때 프로게이머가 되겠다고 공언하던 학생들이 참 많았다. 그렇게 하여 대한민국은 온라인 게임의 천국이 된 것이다.
초고속 인터넷 망으로의 진화는 주변에 PC방을 생성시키는 결정적 요인되었다. 하여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은 이 음침한 피시방에서 엄청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법제도가 만들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어린이와 성인들이 옆자리에서 함께 게임에 몰두했다. 법제도는 늘 이런식이다. 문제가 발생한 후에야 불야불야 대책을 강구한다는....그 결과 어른들이 피워대는 담배연기는 어린 고사리 같은 초등학생들의 폐부 속으로 여과없이 들어갔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때는 이미 상당수의 피해 아동들이 양산된 후였다. 그리고 우리들의 청소년들은 서서히 인터넷 증후군으로 점점 깊이 빠져들어간다.
여하튼 이렇게 대한민국은 IT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그러나 한국의 IT 산업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우리들의 청소년들을 희생시켜야 했다. 드디어 인터넷 중독현상을 보이는 젊은이들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점점 그 규모가 커져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마치 컴퓨터가 진화할수록 유저들에게 침투하는 바이러스처럼 사회에 쟁점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매체에서는 인터넷 중독현상을 파악하는 여러 가지 지표들을 방송하기도 했다. 그렇게 병원의 첨단기기로도 검색되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진짜 수퍼 바이러스가 우리들의 청소년들은 감염시켜가고 있었다.
이는 어쩌면 무엇인가가 새로이 진화를 한 후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반대급부, 바로 그것은 아닐까...
주목받지 못하는 인터넷 증후군
한동안 TV에서는 인터넷 중독현상을 판단하는 여러 가지 팁에 관한 이야기들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방송하기도 했다. 신문 혹은 TV의 뉴스가 PC방에서 게임에 몰두하다가 쓰러져 사망하는 기사들을 내보낼 정도로 그 심각한 폐해가 드러났던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중독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가 큰 화제 거리였다. 각 가정에서는 자녀들을 중독현상에 빠지지 않도록 신경을 바짝 써야했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인터넷 채팅에 빠져 가정이 파탄 났다는 기사도 심심치 않은 가십거리였다. 대한민국이 인터넷을 타고 전파되는 바이러스에 단단히 결려들어 아파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 앓고있는데도 불구하고 요즘은 인터넷 중독 현상은 사회적 이슈가 되지 못하고 있다. 알라딘의 검색창에서 검색되는 관련도서의 수는 당면한 사회적 현상에 비한다면 턱없이 조명받고 있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이는 인터넷 중독이 사라져서가 절대 아니다. 그 정도는 점점 더 심화되고 있지만 이제는 만성이 되어버린 탓이다. 사회는 인터넷 중독현상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시간이 흐르다보니 무뎌진 것일까... 우리 사회는 어쩌면 인터넷 중독을 우리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치 암으로 사망하는 일이 흔하다보니 이제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는 더더욱 심각한 현상이 아니던가...
인터넷 증후군이 주목받지 못하는 또 다른 요인이 최근 부상했는데, 그것은 바로 스마트폰이다. 쉽게 말해 안드로이드 폰 덕분에 인터넷 증후군은 뒤로 밀려난 이슈가 된 것이다. 이제는 인터넷 중독은 기사나 보도거리가 되지 않는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이슈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분명 인터넷 중독으로 점점 더 병들어가고 있지만 매체는 한물간 인터넷 중독을 기사화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매체 자체가 뒤떨어져 보이기 때문이다. 언제 쩍 이야긴데...하고 말이다. 인터넷 중독현상은 어쩌면 회복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강자, 스마트폰 증후군, 그리고 소외
인터넷 증후군을 밀쳐내고 등극한 강력한 증후군은 바로 스마트폰 증후군이다. 어쩌면 안드로이드 증후군이라고 하는 것이 더 근접한 표혀일지도 모르겠다. 버스나 전철을 타보면 이 현상이 그 얼마나 생각해볼 만한 것인지 감지할 수 있다. 과거에는 신문을 읽거나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었다. 미처 신문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옆 사람의 신문을 슬쩍 넘겨보는 장면이나 옆 사람과 조용히 이야기하는 장면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물론 피로에 지쳐 잠든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의 지하철 모습은 예전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저마다 스마트폰으로 그 무엇인가를 열심히 한다. 같은 친구끼리 함께 지하철을 타고 있어도 서로 말을 주고받는 기회가 거의 없다. 스마트폰으로 그 무엇인가를 하느라 대화를 나눌 기회가 단절된 것이다. 이는 지하철에서 만이 아니다. 자신들의 가정의 모습을 상상해보시라...
한 때 TV가 가족 간의 대화를 단절시키는 주범이라고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실제로도 그러하다. TV를 보느라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는 것이 사실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 TV는 상대가 되지 않는 가족 단절 요인이 나타났으니 바로 안드로이드의 출현이다. 저마다 한 대씩 스마트폰으로 또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가족들...
물론 여전히 TV를 경계하는 도서가 있다. 어린 자녀를 두신 부모님들 께서는 한 번 쯤 필독하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전문가는 TV를 과연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그리고 부모로서의 생각과 함께 정리를 해본다면 아마도 더 없이 좋은 결론을 이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카카오톡이 되려 가족 간의 대화를 여는 기회가 되어주었노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언뜻 생각해보면 그럴 듯 한 말이다. 그러나 이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경우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동안 그 얼마나 가족간의 유대감을 상실하고 있었으면 카카오톡으로 그 연대감을 회복했노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또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과연 그러한 경우가 몇이나 될까... 자못 의심스러울 뿐이다.
스마트 폰은 이제 자신의 안드로이드가 되어버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자신을 나타내는 그 안드로이드 말이다. 눈앞에 없는 그 누군가와 연락을 주고 받기위해서 정작 자신의 눈앞에 있는 존재는 투명인간이 되어버린다. 안드로이드 증후군을 가진 사람은 말할 것이다. 그것은 안드로이드 증후군이 아니라 인간과의 끈임 없는 연대감을 주는 새로운 방식에 불과할 뿐이고 그 방식이 새로워졌으니 그에 적응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진화의 능력이라고... 물론 틀린 말은 아니나, 이는 안드로이드를 통해 그 누군가와 끊임없이 접촉하고 있다는 느낌이 자신을 단절된 존재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소외와 단절을 의식하지 못하는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더 무서운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어느 순간, 나에게 안드로이드 폰이 사라지는 그 순간...나는 그 누구와 연대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과연 나는 안드로이드 없이도 그 공허감이나 고립감, 그 철저한 단절로 인한 인간 소외를 느끼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끝없는 절망감을 느끼거나 두려움을 느낄 지도 모른다. 인간은 본디 사회적 존재이기에 혼자라는 느낌에는 익숙하지가 않다. 세상에 자기 혼자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을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개개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개개인의 단절은 결국 사회로 확산되게 마련이다. 점점 사회는 건조해지고 일시적인 관계를 형성해갈 가능성이 그만큼 더 커진다. 이는 지속적인 인간관계의 핵심이 신뢰라는 덕목을 망각하게 할 수가 있다. 순간적으로 불쾌해진 상대방과 문제점을 개선하려는 의지는 훨씬 미약해질 수 밖에 없다. 연락을 안 하면 그만이니까... 서로 부딪히고 몸으로 충돌하면서 살아가는 사회는 불편할 수는 있지만 그런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유대감을 형성하게된다.
그러나 사회적 불신 현상이 확산 될 때, 안드로이드 내에서의 신뢰감은 그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일종의 악순환을 연상케 한다. 물론 이것이 사회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면 모르겠지만, 아직은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것이 우리들의 사회이다.
이 책의 제목은 스마트폰 없는 사람들을 겁박하고 있다. 꿈도 꾸지 말랜다 ㅠ.ㅠ
TV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고 딱히 TV를 열심히 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TV는 늘 켜져 있는 것이다. TV가 꺼져있으면 왠지 불안해진다. 그래서 그냥 켜놓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분... 해당 용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TV증후군을 가진 분이다. 자신의 고립감, 단절의식을 망각하게 해주는 도구가 바로 TV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안드로이드 폰이 없으면 매우 불안해지다. 이 강도는 TV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안드로이드 폰은 늘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것이고 TV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 둘 수 있으며 훨씬 그 용도가 다양하고 무엇보다도 타자와 연결시켜주는 필수 도구이기 때문이다.
TV에서 고립감을 위로받는 경우보다 안드로이드에 더 의존적일 수 밖에 없다. 그 의존도가 클 수록 단절의식은 더 커지게 마련이다. 그 초조함과 불안감, 철저한 단절의식을 느껴보신 분이라면 스마트폰 증후군을 가진 분이다. 물론 이는 개인마다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화가 더 난다거나, 초초 및 불안, 손에 땀이 나는 분이라면 심각하게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아직은 스마트폰 증후군에 대한 매체의 반응은 크지 않은 듯 하다. 그러나 증상이 커갈 수록 사회적인 이슈가 될 것이고 그 탈출 방법을 소개하는 프로그램들이 제작될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상황에서는 모든 것이 시기적으로 늦어버린 다는 것이다. 환자의 병증이 이미 깊어진 후에나 제대로 된 인식이 형성되고 치료제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영혼을 잠식당하면 치료할 방법이 없다.
문명이 진화할수록 그 편익이 증가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내 놓아야 하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최근 내가 발견한 사람들의 모습은 걸어가면서도 스마트폰에 눈이 가있고, 건널목을 건너면서도 스마트폰에 눈이 가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자동차가 오는 것도 모른다. 양재천을 걷다가 자전거를 혼자 타고 가던 여성이 사고가 나는 장면을 목격했다. 저렇게도 혼자서도 사고가 나네 싶었다. 거리가 가까워 알게된 것인데 그녀는 양재천의 자전거도로를 달리며 스마트폰을 한 것이 사고의 원인이었다. 넘어진 상태에서 아픈 다리를 손으로 만지면서도 눈은 스마트폰에 가있었다. 이런...
거리에서 지나치는 많은 사람들은 마치 무슨 바이러스에 걸려있는 듯 보인다. 컴바이러스는 알약으로 잡으면 그만이고, 컴을 영 못쓰게 되었으면 다시 사면 그만이다. 컴은 단순한 도구이자 기계가 아니던가... 그러나 영혼을 잠식당한 인간 사회는 치료할 방법이 없다. 통신사에 문제가 발생하는 순간, 세상에 오직 나 혼자라는 두려움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완전한 단절과 고립을 느끼는 순간이 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