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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김현아 지음, 유순미 사진 / 호미 / 2008년 3월
평점 :
[두 여인과의 여행-새롭게 바라 본 그 곳]
일상에서 여행을 선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이들과 반복되는 일상, 그 가운데 내가 차지하는 자리에서의 일탈이 티안나는 것이면서도 부재로 인한 삐그덕거림과 약간의 불안정에 쉽게 용기를 내지 못하는 탓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흔들리는 지하철 안에서, 오고가는 차 안에서 내 손에 들려진 책 한 권은 나를 일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또 하나의 여행지가 되기에 늘 가까이 하게 되는 것 같다.
아무런 책에 대한 정보 없이 읽기 시작한 이번 책은 조금은 밋밋하면서도 전혀 꾸밈없는 겉 표지가 차분함을 갖게 했다. 마치 봄날 화려한 꽃밭이 아닌 황량한 대지를 날고 있는 나비를 바라보는 듯한 진중함을 갖게도 한다. 휘리릭 들여다 본 본문에는 알록달록한 칼러 사진 대신에 전면을 가득 채우는 몇 컷의 흑백사진이 표지에서 받은 이미지를 받아들이게 할 만큼 마음에 든다. 낯선 작가 김현아와 멋진 흑백 사진을 담아낸 유순미 사진작가..그들을 따라 이 여행에 동참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 역시 길을 나서본다.
경주-치술령-강릉-부안-수덕사-해남
그들이 여행지 속에서 찾고자 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고민하기 전에 내가 경험했던 곳들에 대한 기억으로 머릿속에 마구 채워놓고 있었는데 그녀들이 찾은 이 곳에서는 내가 알지 못하던 새로운 모습의 여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역사의 그늘 속에 가리워진 여성의 삶. 그것이 바로 이 여행에서 그녀들이 찾은 것들이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경주의 곳곳에 숨어있는 여왕들의 흔적을 통해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으로써 겪어야 했을 수많은 어려움을 되짚고 그런 가운데 세워졌던 문화의 흔적을 더듬어 보았다. 작년 여름 막연히 역사공부를 하겠다면서 찾았던 경주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감각으로 그녀들을 따라 경주를 훑어보았다.
치술령에서 만난 망부석이나 절개를 지킨 부안의 매창, 뛰어난 문장력을 지녔던 난설헌과 사임당이 숨쉬는 강릉, 신여성의 기치를 내걸었던 김일엽과 나혜석의 흔적을 따라갔던 수덕사, 시인의 마을 해남에서 만난 고정희..그녀들을 만나보는 과정에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움이 있었다면 그것은 남성 중심의 가치관에서 바라보았던 역사에서 빠져나와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여성의 삶이라는 것이다. 초반에서는 경주를 두루 여행하면서 왕비의 삶과 더불어 다양한 것에 눈을 돌리는 여유도 있지만 후반으로 갈 수록 여성!이라는 부분으로 점차 범위가 한정되는 듯한 느낌도 들었지만 결국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사회속에서 아직도 불리한 위치에 있는 여성이 여성에 대한 문제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할게다.
남성의 역사에서 묻힌 혹은 평가절하 된 여성이 어디 이들뿐이랴.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남성이 바라보는 여성도 그들의 시각에 갇힌 여성일 경우가 빈번하기에 여성이 바라본 여성의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느낌이다. 여자가 아니더라도 기존의 생각과 사고의 틈을 비집고 새롭게 주위를 바라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를 만나 충분히 두 여인의 여행에 동참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