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집에서 몇몇이 모여 송년회를 하고 있었다. 아이가 자꾸 보채자 친구는 이렇게 협박을
한다. "너 자꾸 이러면 '니모' 안틀어 줄꺼야!" 그러자 애는 잘못했다면서, 빨리 니모를 틀어달라고
조른다. 친구가 DVD를 넣어주자 100인치는 되어 보이는 대형 TV에서 니모의 한국말 버젼이
나오기 시작했고, 친구의 아들은 TV 앞에 앉아서 넋을 잃고 영화를 본다.
내가 물었다. "얘 그 영화 안봤어?"
친구의 대답이다. "열번도 더봤을 걸"
"그런데 왜 또봐?"
내가 애들을 키우지 않아서 몰랐을 뿐, 모든 애들은 본걸 또보고 또본단다. 하루에 두세번 보는
일도 있다나. 그 이유를 친구는 이렇게 설명한다.
"얘들은 영화에 나오는 하나하나의 캐릭터가 되어서 영화를 보니까"
진짜로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를 키우는 집에서는 DVD 판을 사는 게 별로 아까울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가 지루한 듯해서 친구가 다른 채널을 틀자마자 애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고, 몸을 흔들며 때를 쓰기 시작한다. 하여간 애들이란....

한때 만화랑 인연을 끊은 듯했던 디즈니가 새로운 형태의 애니메이션을 들고나온 것은
<인어공주>가 그 시초였을게다. 만화는 애들만 보는 것으로 알았던 나에게 내 또래의 사람들이
그 영화에 열광하는 현상을 난 이해하지 못했다. 혹시나 싶어 <라이온 킹>을 봤지만, 애들이나
좋아할 유치한 영화였다는 게 그때의 내 생각이었다. 친척 집에서 DVD로 본 <미녀와 야수>
역시 지극히 단조로운 스토리를 가진 애들만의 영화였다. 비록 내 또래의 여자애들 중에는
너무 감동을 받아 두번이나 봤다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니모를 찾아서>는 그런 류의 만화와는 확연히 틀린, 한마디로 말해 차원이 다른
영화였다. TV가 좋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영화를 지배하는 색상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재미가 있건 없건간에 TV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고, 보는 내내 내게 시원함을 선사했다.
주인공 격인 니모를 지느러미 하나가 짧은 장애인으로 설정한 것도 웬만한 사람은 생각하지
못하는 기발한 발상이다. 그런 영화를 통해서 아이들에게 장애인도 우리와 똑같은 친구라는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내가 어린 시절부터 <니모>를 봤다면, <오아시스>를
보다가 마음이 불편해서 꺼버리는 일은 없었을 텐데.
다른 캐릭터들도 살아 숨쉬는 듯, 영화에 생동감을 부여했다. 건망증으로 시달리던 파란 물고기는
어찌나 우습던지, 중년의 체면을 반납하고 킬킬거려야 했다.
니모아빠: 혹시 배를 보지 못했나요?
파란고기: 하얀 배 말이지. 봤어. 날 따라와.
파란고기는 헤엄쳐 가고, 니모아빠는 열심히 그 뒤를 쫓는다. 한참 그러다가 갑자기,
파란고기: 바다는 넓은데 왜 내 뒤만 따라와?
니모아빠: 방금 하얀 배를 봤다고 했잖아요. 장난해?
파란고기: 아, 하얀 배. 방금 봤어. 날 따라와.
두번 더 그러자 니모아빠가 화를 낸다. "지금 누굴 놀려?" 파란 고기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실은, 내가 건망증이 있어"
재미있지 않은가? 상어들이 나오는 장면도 재미있다.
상어1: 상어는 더이상 나쁜놈이 아니다. 물고기들의 친구다! 지난 주 어찌 지냈는지 발표해 봐라.
상어2: 난 지난 사흘간 채식만 했어.
상어1, 3: 와, 대단해!
이런 식의 얘기를 하고 있는데, 파란고기가 지느러미를 다쳐 피가 난다. 피 냄새를 맡은 상어1,
"내일부터 착한 상어 되고, 지금은 물고기를 먹을거야!" 하면서 니모와 파란고기를 쫓는다.
친구들이 포커를 치자고 해 보다 말았는데, 사실 난 포커보다 니모를 끝까지 보고 싶었다.
다행히 패가 잘 뜨는 바람에 9만원 정도를 따서 아쉬움이 조금은 줄어들었지만, 기회가 닿으면
비디오로 나머지 부분을 볼 생각이다. 커다랗고 선명한 TV로 보다가 내방 TV로 보면 재미가
없을 것 같긴 해도 말이다. 하여간 그 영화를 보면서 헐리우드의 무서움을 다시금 느낀다.
저렇게 재미있게 만드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극장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게 아닌가.
* 포커를 한번 잡은 적이 있다. 다른 친구는 9 풀하우스였는데, 내가 막판에 만원을 치자 그녀석이
2만원을 친다.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면 2만원 받고 3만원 더 쳤겠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서
2만원만 받고 패를 보여줬다. 그 친구는 그 이후부터 줄곧 잃기만 하더니 나중에 십만원 넘게
잃었다고 개평을 달란다. 역시 포커는 한방이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