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국에서 일년간 있다온 친구를 만났다. 뭐가 제일 먹고 싶었냐는 진부하고 상투적인 질문을 했더니 아주 진지하게 "떡볶이"라고 한다. 난 짜장면이라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하기사, 떡볶이도 한국인들, 특히 나같은 30대에게 옛날의 추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음식이니만큼 그렇게 대답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떡볶이는 겨울을 상징하는 음식이다. 여름이라고 떡볶이를 안먹는 건 아니지만, 뭐니뭐니해도 떡볶이는 추울 때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먹어야 제맛이 난다. 거기에 오뎅국물까지 곁들이면 정말 환상적이다. 어느 음식이나 다 그렇지만, 떡볶이는 맛있는 데서 먹어야 한다. 맵기만 한 떡볶이, 설탕을 많이 쳐 달디단 떡볶이는 먹고나서 기분만 나쁘다. 이 땅에서 36년간 살아오면서 나역시 많은 떡볶이를 먹었고, 거기에 얽힌 추억도 만만치 않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깊었던 떡볶이집 3곳을 소개한다.
1. 초등학교 때 그곳
초등학교에서 집에 가다보면 나무로 된 가건물이 있었고, 거기서 엄청나게 맛있는 떡볶이를 팔았다. 그집은 하교길에 떡볶이를 먹는 얘들로 늘 바글바글했는데, 당시 용돈이란 걸 받지 않았던, 그러면서도 얻어먹을 친구도 없었던 난 밖에서 그 광경을 물끄러니 바라보기만 했다. 아주 가끔, 별로 안친한 친구가 같이 먹자고 불러준 때가 있기도 했다. 그때의 환상적인 맛을 어디다 비교할까. 추억이란 건 약간의 과장이 섞이기 마련이지만, 그집 떡볶이의 맛을 점수로 평가하자면 10점 만점에 10점을 주련다.
2. 스케이트장
지금 얘들은 롤러블레이드를 타지만, 내가 어릴 적엔 스케이트가 유행이었다. 내가 살던 곳 근처에 공터가 있었는데, 겨울이면 물을 채워 얼린 후 스케이트장으로 사용했다. 스케이트를 재미있게 탔다는 기억보다 거기서 먹은 오뎅과 떡볶이의 기억이 훨씬 더 선명하게 남아 있을 정도로 맛이 일품이었는데, 아마도 운동을 하는 와중에 먹은 것이라서 웬만큼만 되면 무조건 맛있었을 거다. 점수를 따지자면 10점 만점에 9.5.
3. 홍대앞 극동방송국 옆
극동방송국 삼거리에서 조금만 가다보면 기업형 포장마차가 하나 나온다. 새벽 한시건 두시건 사람들이 빙 둘러 떡볶이를 먹는 모습은 장관이다. 내가 홍대앞을 자랑스러워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는 그곳은 말이 포장마차지 종업원 두명을 거느린 대형 떡볶이집이다. 늘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고 서있을 자리조차 없지만, 한번 가본 사람은 반드시 그곳을 다시 찾는다. 술을 먹고 집에 가기 전에 먹으면 최고다. 주인이 워낙 바빠서 사람들이 뭘 얼마나 먹었는지 관심이 없다. 그저 손님들이 먹었다고 하는 만큼만 돈을 받는데, 맛이 워낙 탁월해서 그런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지?). 강남에서도 그걸 먹으러 온다는 소문도 있고, 포장도 많이 해간다.
앞의 두곳이 추억에 의해 과장되었고, 뭘 먹어도 맛있는 성장기였던 이점이 있기에, 진정한 떡볶이의 지존은 바로 이곳이다. 10점 만점에 11점. 게다가 앞의 두곳과 달리 이집은 마음만 먹으면 지금도 먹을 수 있는, 즉 현실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게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처음 그곳을 갔을 때, 난 삼겹살에 소주를 먹고 2차로 맥주를 마신 뒤였다. 배가 불러 죽겠는데 무슨 떡볶이냐면서 끌려갔는데, 처음에 오뎅을 한개 먹어보고 기절할 뻔했다. 그러고나서 오뎅을 연속으로 7개나 먹었으니, 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알만하다. 입에서 녹는 떡볶이를 봤는가? 그집이 바로 그렇다. 거기 다녀온 후 난 한동안 입맛을 잃고 방황하기까지 했다.
홍대 근처에 누가 놀러오면 난 꼭 그집에 데려가고, 백이면 백 칭찬을 들었다. 그집은 아무리 배가 불러도 왕창 먹게끔 만드는 마력이 있다. 이건 관계없는 얘기지만 물도 좋아, 늘씬한 미녀들과 부딪혀 가며 떡볶이를 먹는 기쁨도 누릴 수 있다. 옛날 돈을 많이 벌어서 <낙산가든>이나 꽃등심으로 유명한 청담동 <무등산>을 인수할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은 그 떡볶이집을 인수하고 싶다. 그집만 인수한다면 여느 갈비집이 부럽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