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감미롭고 간절한 위픽
은모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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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모든의 소설을 읽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소설을 읽는 동안에도 마음은 햇살 좋은 날 빨랫줄에 널린 듯 깨끗하고 뽀송해진다. 소설 쓰기에 깊은 고민과 번민이 있는 자들이 읽으면 딱 좋은 소설이다. 어떤 소설을 써야 할까. 어떻게 쓰는 게 맞는 걸까. 그러다 은모든의 소설 한 편을 읽으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써도 좋다. 


『감미롭고 간절한』은 은모든의 멀티버스 확장판 중 하나이다. 민주, 은하, 성지가 다른 세계에서 또다시 날아왔다. 이번에는 공지천이 있는 춘천으로. 택시를 타면 현지인 맛집으로 안내해 주는 그곳으로. 생강 향이 나는 닭갈비 맛집 꿀정보를 조건 없이 알려주는 그곳으로. 기차 창가 쪽 자리에서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고 있으면 그곳으로 데려다준다. 


오랜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은하를 만나러 가는 민주. 언제 한 번 만나야지 만나야지 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친구가 절반일 텐데. 시간과 운이 맞아 민주와 은하는 춘천에서 접선한다. 소설은 그들의 이틀을 그린다. 첫 여정의 시작은 케이블카 타러 가기. 춘천 가는 기차를 틀어 놓고 낭만과 기억에 빠지기. 민주는 20대 중반에 일했던 메모리즈에서의 기억을 떠올린다. 


낭창낭창했던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훈과의 썸 아닌 썸 같은 썸을 타던 어느 시절. 그 자리도 은하가 소개해 줬다. 와인을 파는 곳이었고 몇 가지의 규율만 지키면 고난 없이 일할 수 있는 곳이었다. 민주는 어느 정도 일을 하면 돈을 모아 외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좌절되었다. 돈은 쉬이 모이지 않았다.  『감미롭고 간절한』은 심심하고 소심했던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와 만나는 순간을 그린다. 


다시 만나자는 말은 굳이 하지 않는다. 또 운 때가 맞으면 만나 닭갈비를 먹고 음악을 듣고 산책을 갈 수 있을 테니까. 『감미롭고 간절한』은 안부를 묻는 마음으로 썼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거면 된 거다. 소설은. 무얼 써야 하나 고민에 휩싸여 있을 때 단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 잘 지내고 있는지 안부를 묻는 기분으로 쓰면 된다. 


여행기나 여행 영상을 보는 게 좋다. 좀처럼 밖으로 나가지 않는 습성을 버리지는 못하겠지만 누군가의 설렘과 기쁨, 아쉬움을 대리로 느끼며 언젠가는.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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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방각본 살인 사건 1 - 소설 조선왕조실록 03 - 개정판 소설 조선왕조실록 3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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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달력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2023년이 채 3주도 남지 않았다. 이렇게 또 일 년이 가는구나. 주어질 2024년에는 지금보다 시간을 소중히 써야 하지 않을까 각성이 찾아왔다. 11월 말부터 지금까지 2주 동안 혼자만 바빴다. 일은 많이 주어졌고 혼자만이 쳐내야 하는 일이어서 퇴근 시간인 6시 이후에도 남아서 일을 했다. 


집에 돌아와 씻고 멍하게 있다가 책을 읽었다. 김탁환의 백탑파 시리즈 첫 번째 이야기 『방각본 살인사건』이었다. 1, 2권으로 나뉜 책은 나를 2023년에서 정조대왕 시절로 데리고 가주었다. 서자와 적자의 신분 차별이 엄연히 존재했지만 정조는 서얼도 중앙에 들이고자 노력했다. 성리학의 반성으로 실학이 등장했고 신분 때문에 실력이 있음에도 조정에 나아가지 못한 실력자들은 청나라로 눈을 돌렸다. 


신문물과 새로움의 시대 조선 정조의 시절은 그랬다.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김홍도가 백탑에 모여 서로의 꿈을 나누던 시절이었다. 김탁환은 이곳을 배경으로 추리 소설을 내놓는다. 찾아보니 2003년에 나온 소설이었다. 정세랑의 신작 미스터리 장편소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의 작가 후기에서 발견한 추리 시리즈였다, 『방각본 살인사건은』. 


백탑파 시리즈를 재밌게 즐겨 읽었다고 최애의 작가가 추천해 준 책이라 의심 없이 읽었다. 지금 회사의 최고의 장점은 직주근접이라(이 조건은 내가 선택해서 얻은 것이라 정말 뿌듯하다.) 늦게까지 일을 해도 그러려니 한다. 그래도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더 지치곤 하는 달팽이라 이불 속에 숨어들어 『방각본 살인 사건』을 천천히 읽어냈다. 


약관의 나이에 의금부 도사로 일하고 있는 이명방. 임진년과 병자년에 공을 세운 조부를 두고 있는 종친으로 그가 이 소설을 꾸려간다. 주인공은 따로 있다. 바로 그보다 한 살 어린 김진. 꽃과 학문에 조예가 깊은 김진은 명방을 도와 한양에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을 해결한다. 여성들이 목이 졸려 죽는 사건이 한양에 발생한다. 죽은 자들 곁에는 청운몽이 쓴 소설이 놓여 있다. 명방은 청운몽을 잡아 문초한다. 청운몽은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자백한다. 


자백만으로는 범인이라고 의심할 수는 없지만 청운몽의 자백에는 범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사건 현장의 디테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청운몽은 참형을 당한다. 이로써 사건은 해결되었을까. 아니지. 전혀. 청운몽이 죽은 뒤에도 여성들이 살해당하고 어김없이 그 곁에는 청운몽의 소설이 놓여 있다. 명방은 당황하고 이번에는 왕도 사건의 해결을 주시한다. 


연쇄살인사건을 파헤치는 형식이지만 『방각본 살인사건』은 소설의 현재와 미래를 정의하는 소설이다. 대설과 소설의 차이를 백탑파 서생들이 골몰하는 장면에서 왜 내가 소설을 좋아할까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다. 다양한 책이 존재한다, 세상에는. 어떤 책을 읽을지는 각자 알아서의 몫. 나는 소설은 읽지 않는다는 사람을 만나곤 한다. 그것도 그이의 몫. 작은 이야기에서 품어져 나오는 일상의 오라는 꾸역꾸역 살아가는 나를 빛이 나게 만들어 준다. 


요즘의 내가 하는 일은 소일이다. 작은 일. 나의 세계를 누군가 위에서 들여다보고 있다면 왜 저런 일에 진심인 거지 한심해 할 수 있는 일. 소일을 하는 내가 소설을 읽는다. 소설은 그래서 계속 읽혀야 한다. 소설이 사라질 뻔한 세계의 이야기는 간절하고 조마조마해서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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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고 고른 말 - 카피라이터·만화가·시인 홍인혜의 언어생활
홍인혜 지음 / 미디어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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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나를 예민하거나 소심하다고 말하지 말아 줘. 누군가의 한 마디에 상처를 받거나 기쁨을 느끼는 나 말이야. 일희일비를 즐겨 하는 나. 어떤 날은 좋았다가 슬펐다가 감정이 널뛰기 난리 블루스를 추는 나. 가시 돋친 말들을 기억했다가 집으로까지 가져오는 나. 그저 섬세하고 다정하다고 다시 말해주면 안 될까. 이왕이면 좋은 쪽으로 바람이 그대 쪽으로 부는 것처럼. 


귤 한 박스를 보내 줄게요. 무슨 문제 있으면 언제든지 저한테 전화 주시면 됩니다. 한 번 먹으러 가자. 최근에 들었던 다정한 말의 목록이다. 인생사 짧은지라 부드럽고 달콤한 말만 들으며 살고 싶다. 비꼬고 비아냥 거리거나 특정 의도를 남아 하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들어도 잘 벼린 칼로 쳐내고 싶은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싶다. 


홍인혜의 『고르고 고른 말』을 읽다가 아하 하고 눈이 번쩍 뜨이고 쓰린 마음이 풀어졌다. '신경 쓰다 와 신경 쓰이다'의 차이점을 알려주는 부분이었다. 신경 쓰는 건 내 의지의 문제, 신경 쓰이는 건 내 의지의 문제를 벗어난 초월의 영역이라는 부분에서였다. 이러니 인간은 책을 읽어야 한다.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지만 우린 모두 병들고 아프니까. 책을 읽으며 자연 치유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대개 통화를 자주 한다. 전화 공포증에서 전화 무섬증까지 증상이 완화되긴 했지만 그래도 전화 통화는 긴장된다. 상대의 얼굴을 표지 못하니 비언어적 표현의 정보를 얻지 못한다. 순전히 목소리만으로 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고도의 심리전을 벌여야 한다. 같은 말도 상대의 표정과 몸짓 정보가 있으면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그냥 하는 농담인지 농담을 가장한 조롱인지 전화로는 쉽게 간파할 수 없다. 


신경 쓰이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다가 『고르고 고른 말』을 읽으며 나의 문제가 아니다는 명쾌한 이론을 얻을 수 있었다. 뒤늦게 읽었지만 『고르고 고른 말』은 올해의 읽은 책 중 마음 따뜻하고 소중한 책 1위이다. 내 마음대로 어워드에서. 언어를 오래 다룬 사람의 안목으로 힘이 되어 주고 위로가 되며 이내 행복이라는 느끼기 어려운 감정까지 느끼게 해주는 말들을 책에 담아냈다. 


알겠지만 쉽고 간단한 말 한마디면 된다, 산다. 밥을 챙겨 먹고 새로 한 머리가 잘 어울린다. 새로 올린 보고서는 고심의 흔적이 엿보여서 좋았다. 다음에는 더 잘될 거다. 그냥 너라서 괜찮아. 너를 위해 쓰는 돈은 아끼지 말아. 이런 말들. 말은 하는 것보다 참는 게 미덕이다. 그럼에도 노동자로 살아가야 하는 이상 사회적인 인간으로서의 언어생활은 해야 한다. 


말을 하기 전 생각 하자. 나의 말이 상대에게 어떻게 가 닿아 내려앉을지. 거슬리는 것 없이 사라져야 한다. 내내 염두에 두자. 상식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독서를 부지런히 해야 한다. 『고르고 고른 말』을 읽으며 깨달았다. 위트 있고 다정하며 귀여운 친구가 들려주는 따뜻한 말의 목록만으로도 세상은 붕어빵의 온기와 향기로 가득해진다. 한 입 베어 물면 달콤한 팥의 풍미는 덤. 


오늘의 고르고 고른 말: 말보다는 편의점 봉투에 담긴 달다구리 한가득. 오다 주웠다의 상위 버전인 오다 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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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방방곡곡 여행 일기
마스다 미리 지음, 이소담 옮김 / 북포레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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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누워 있기만 하면 바보 될 수도 있으니까. 여행 가야지. 하고 행하는 건 여행기를 읽는 것이다. 일요일 오전에 떠나는 세계 여행. 마스다 미리의 『세계 방방곡곡 여행일기』를 집어 들었다. 1987년부터 2019년까지의 여행 기록이다. 목차를 보니 총 스물세 곳의 나라를 방문했군요. 그대의 열정에 건배. 


지금은 대유튜브 시대. 여행기를 읽어도 랜선 여행을 떠나도 즐겁다. 부지런하고 기발한 유튜버들이 보내오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여행 영상은 내가 간 것만 같은 착각을 준다. 몇몇 여행 채널을 구독했나? 아니군. 인터넷 세상에서도 내향인의 규칙을 지키며 한 여행 유튜버의 채널만 구독해놨다. 그 역시 내향형 여행 유튜버. 여행 가서 누워 있는 사람. 


일상 만화의 대가 마스다 미리의 첫 여행지는 이탈리아였다. 미술학교에서 간 첫 해외여행이었다. 무리해서 부모님이 보내준 여행이라 애틋한 나라이다. 유명한 장소에 가서 사진을 찍고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오래전에 찍은 사진을 보며 맞아, 그랬었군 기억을 떠올리는 부분도 있다. 『세계 방방곡곡 여행일기』 초반부에는. 


예쁜 포장지 느낌의 일러스트 배경의 타이완 일기는 읽는 것만으로도 선물을 받은 느낌이다. 함께 갔지만 따로 여행을 즐긴다. 현지 음식을 먹고 현지인들에게 받은 친절을 기록으로 남긴다. 한국에서의 기록도 있다. 디저트를 하나씩 시켜서 각자 먹는 것이 아닌 여럿이서 같이 먹는 문화를 즐거워했다. 비 오는 날에 먹는 부침개를 신기해하기도 한다. 


여행기 중간중간에 담긴 단상들. 다른 무엇도 생각하지 않고 오늘을 즐겁게. 여행은 그런 마음으로 가는 거라는 걸 배운다. 내일 출근은 어떡하지. 쌓여 있는 있은 어떻게 쳐낼까. 무례한 사람에게 웃지 않고 말하는 요령은? 같은 괜히 불안만 가중되는 생각을 여행지에서라면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여행을 떠나는 것일까. 짐작해 본다. 


오로라를 보러 가는 것만은 꼭 해보고 싶다. 북유럽이나 캐나다. 책으로 영상으로 봐도 직접 가서 보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 유명한 장소의 나열이 아닌 마스다 미리 엄선의 특별하고 느낌 좋은 여행지의 소개라서 『세계 방방곡곡 여행일기』는 행복한 책이다. 누군가의 행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의 느낌이 전달되니까. 기념품을 담은 사진과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과자, 초콜릿, 수프, 에코백 같은 것. 


어른의 세계, 어른의 느낌. 여행을 하면 어른의 세계와 느낌을 실감할 수 있겠구나. 여행다운 여행을 해보지 않은 나는 그래서 아직 어른이 아닌 상태. 그래도 좋다. 어른의 여행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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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6
문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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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K마을에 모인 다섯 사람이 있습니다. 이 톤은 드라마, 영화를 요약해 주는 어느 유튜버의 시작 멘트를 따라 해본 것이다. 늘 그렇듯 누워 있지만 요즘은 더 누워서는 유튜브 영상을 본다. 예전에 봤던 영화나 신작 드라마를 리뷰 해주는 채널이 많이 있어서 놀랍고 즐겁다. 이야기 요약하는 노하우를 배워야겠다는 건설적인 생각은 들지 않고 그저 신이 난 채 보기만 한다. 아무튼.


문진영의 소설 『딩』을 요약하자면 여기 K마을에 모인 다섯 사람이 있습니다가 적합할 것이다. 동해이면서 서핑의 명소로 떠오를까 말까 하는 K마을. 작가는 부러 지명을 노출하지 않는다. 그곳에 인물들을 모이게 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처음으로 만나는 인물은 지원. 인문학 출판사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가끔 불편한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 


드문드문 소식을 이어가다가 그가 암에 걸려 죽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서둘러 장례를 치르고 마을을 떠나왔지만 집을 정리해야 한다는 절차가 부채처럼 남아 다시 마을로 돌아간다. 오래 떠돌다 온 지원은 그곳에서 누군가 등대에 남겨 놓고 간 귤과 아직 남아 있는 친구를 만난다. 주미가 있다. 그녀는 가족이 운영하는 모텔, 지금은 호텔로 명칭을 바꾼 곳에서 일을 한다. 언젠가 그 모든 걸 정리하고 여행을 떠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재인. 하와이에서 어학원 강사로 일하는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 P가 있다. 한국으로 돌아간 P가 어느 바닷가 모텔에서 목을 매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살아있는 P를 만나기 위해서 끊은 비행기표는 P의 흔적을 쫓는데 사용된다. K마을에서 그녀는 주미가 일하는 곳에 거처를 잡고 카페에서 일을 시작한다. 영식과 쑤언이 있다. 아이를 잃은 영식은 오랜 방황 끝에 주미의 호텔 앞에서 포장마차를 차린다. 술이 필요할 것 같은 사람에게는 안주를 밥이 필요할 것 같은 이에게는 밥을 팔면서. 


베트남에서 일하러 온 쑤언은 동료를 화재로 잃었다. 곁을 내주기 않기 위해 애를 썼다. 타국에서 우정은 거추장스러운 장신구에 불과하므로. 반짝거리지만 이내 쓸모를 잃고 마는 것. 머물 곳이 없는 쑤언은 영식의 충동적인 결정으로 함께 머문다. 『딩』의 서사를 인물 중심으로 압축해 보았다. 하나로 이어질듯한 이야기는 다른 인물을 만나 다른 방식으로 섞여 들어간다. 지원이었다가 주미로 제인에서 영식과 쑤언으로. 상실의 고통을 겪은 그들이 만나는 건 K마을의 황량한 바람일까. 의도하지 않은 누군가의 선량함일까. 


딩은 서핑보드가 뭔가에 부딪혀 상처가 난 것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P가 제인에게 알려주는 말이다. 우린 모두 뭔가에 부딪히며 상처를 주고받는다. 상처를 가진 채 살아가는 게 인간의 숙명이라는 생각. 『딩』을 읽고 해보았다. 부딪히지 않아도 스스로 상처를 내며 살아가는 것 또한 우리의 운명. 『딩』에서 만나는 인물들이 가진 상처는 치유의 시간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겪으며 견딘다. 


이야기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일은 까다로운 작업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럼에도 『딩』에서 만난 지원, 주미, 제인, 영식, 쑤언의 서사를 되짚어 보고 싶었다. 나의 어두움, 불안, 불신, 분노의 원인을 그들에게서 찾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까 나만 힘든 건 아니다. 모두 각자의 고통과 슬픔을 가지고 있다. 상처를 바라보는 태도에는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고 『딩』은 전한다. 귤 하나를 놓아두고 미역국과 라면을 끓여 내어주는 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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