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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 ㅣ 밀리언셀러 클럽 10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데니스 루헤인의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 두 번째 이야기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에서 그들은 산전수전 다 겪으며 생기는 감정 이를테면 동료애, 연민, 슬픔을 서로에게서 느낀다. 추리 소설의 외피를 둘렀지만 알고 보면 로맨스 장르였던 『전쟁 전 한 잔』에서 켄지는 앤지를 향한 열렬한 구애를 보여주었다.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는 두 사람이 맞닥뜨린 추악한 진실 앞에서 총에 맞고 턱이 부러지고 얼굴에 상처를 입으며 서로를 남자와 여자가 아닌 존중 받아야 할 인간으로 여긴다.
하드보일드와 추리의 성격을 가져왔지만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는 상대를 향한 애틋함이 소설 전반에 가득하다. 의처증이 심한 남편 필에게서 벗어난 앤지 제나로는 켄지에게 들어온 사건을 함께 해결하면서 여자가 아닌 인간으로 성장한다.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필에게 자신을 아내가 아닌 전처라고 부르길 강요한다. 세상에서 앤지가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하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모든 관심을 열어두는 패트릭 켄지는 도체스터의 과거에 묻힌 진실을 찾아 나선다.
범죄학 수업을 수강한 인연으로 알게 된 에릭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탐정 소설의 시작은 대부분 이렇다. 의뢰를 위해 전화가 걸려 오거나 누군가 사무소로 찾아온다. 에릭의 전화가 걸려 올 때 우리의 켄지와 앤지는 고장 난 에어컨을 수리하고 있었다. 데니스 루헤인의 장점은 대화가 간결하고 그 속에 웃음 폭탄을 장착해 두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이런 식.
"에어컨 고칠 줄 아세요?"
"껐다 켠 다음에 다시 켜봤나?"
"예."
"그런데도 꿈쩍 안 해?"
"예."
"두 번 정도 패주지그래?"
"해봤어요."
"그럼 수리공 불러."
"기막힌 조언이네요."
하나 더.
"이 아이, 자네 고객의 아들인가?"
"제 아들은 아닙니다."
내가 대답했다. 프레디가 커다란 머리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러다 다친다, 꼬마. 아무한테나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아냐, 응?"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두 눈은 이제 아이스피크만큼이나 불편해졌다.
갑자기 울스웨터를 삼킨 것처럼 입안이 껄끄러웠다.
케빈이 숨을 죽이고는 조용히 키득거렸다.
약간만 보여주었다. 나머지는 책을 읽으며 웃으시길. 전자책 기준으로 500페이지 넘는 소설이 줄곧 무겁고 암울하고 잔인한 이야기만 흘러넘친다면 읽다가 지친다. 데니스 루헤인은 레이먼드 카버의 수업을 들은 사람이다. 간결하게 치고 빠질 줄 안다. 의뢰인에게 에어컨 고치는 조언을 듣고 의뢰인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만난 갱단 두목에게 말장난을 하는 탐정이 나오는 소설이라니 책을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다. 유머는 앤지도 만만치 않다. 그녀는 사건을 정확히 꿰뚫어 보면서 핵심에 다가가는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캐릭터다.
소설에서 만난 아름답고 유머를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런 캐릭터를 만들어낸 데니스 루헤인에게는 경배를. 에릭은 학교에서 알게 된 정신과 의사 디안드라가 받고 있는 협박의 실체를 밝혀줄 것을 의뢰한다. 모이라 켄지라는 패트릭과 성이 같은 여자가 찾아와 자신이 애인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고 했다. 애인의 이름은 케빈 헐리히. 패트릭과 같은 수업을 받고 동네에서 함께 자란 지금은 살인 기계 비슷하게 전락한 그 케빈 헐리히였다. 그가 디안드라의 집에 새벽 4시에 전화를 걸어와 온갖 더러운 얘기를 했다. 단지 모이라 켄지를 상담해준 것 밖에는 없는데 케빈은 디안드라에게 무자비한 말을 쏟아 낸 것이다.
디안드라는 자신의 아들 사진이 담긴 편지를 받았고 아들 역시 누군가에게 스토킹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녀는 켄지에게 아들 제이슨의 안전을 부탁한다. 켄지는 협박 전화를 걸어온 케빈과 두목 잭 루스를 만나 의뢰인을 괴롭히지 말라고 말해야 한다. 당연히 켄지는 앤지와 함께 사건 의뢰를 받아들인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동네 친구 부바에게 부탁을 한다. 보스턴 마피아 갱단의 대부 프레디를 만나게 해달라고. 뚱땡이 프레디를 통하면 케빈과 잭 루스도 얌전해질 것이다. 마피아 대부를 만나 켄지는 되지도 않는 말장난을 저렇게 뻔뻔하게 한 것이다.
단순히 협박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이야기는 패트릭 켄지의 과거, 즉 꺼내고 싶지 않은 소방관 영웅 아버지의 예전까지 거슬러 간다. 후반부로 갈수록 탄탄해지는 이야기와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긴장감으로 무장한 소설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는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잔인하고 망가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환경에 지배당한 인간일수록 폭력성은 두드러진다. 켄지도 그럴 수 있었다. 두렵고 슬퍼서 어둠과 손을 잡을 수도 있었다. 앤지 제나로를 만나고 사랑하고 가슴에 그리움을 간직하며 어둠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드보일드를 읽다가 너무 애틋하고 설레서 심장이 아플 수도 있음을 미리 알려준다. 그리고 웃음은 덤이다.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여 영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