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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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리언 반스의 문장은 나를 과거라는 별로 데려간다. 광활하여 모래바람만 불고 소리쳐 불러도 아무도 없는 고독의 기억만이 자리 잡은 그 별로. 문장을 읽어가다가 나는 별의 기억 속으로 소환된다. 머뭇거리고 전부 이야기할 수 없다는 식의 화자의 서술에서 뒷모습을 보여주며 걸어간다. 사랑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 『연애의 기억』은 우리에게 단 하나의 이야기가 존재한다면 그건 사랑이었다,고 말하는 소설이다. 소설의 끝으로 갈수록 독자는 헷갈릴 수도 있겠다. 사랑이었다면 죽음 뒤에 우리가 가져가야 할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사로잡힌다. 


  없다. 죽음이 우리 곁을 찾아와 머무는 순간까지도 사랑은 없다. 이제 우리는 순진하지도 않으며 열정은 내다 버린 지 오래다. 사랑의 순간에 머물렀던 기억이 남았다. 진실은 사라지고 기억만이 우리를 고독의 별로 안내한다. 열아홉 살. 케이시 폴은 어머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빌리지의 테니스 클럽에 가서 젊고 가문이 좋은 여자애를 만날 것이라는 기대 말이다. 폴은 어머니의 신념과 고집을 무너뜨리기 위해 애를 쓰지 않는다. 그저 한 여자를 만나 테니스를 치고 사랑에 빠질 뿐이다. 


  마흔여덟. 수전은 딸이 둘 있고 가끔은 정원사 흉내를 내는 남편과 결혼 생활을 유지 중이다. 각 방을 쓰고 있으며 남편의 눈을 본지 오래되었다. 폴은 테니스를 함께 친 뒤 수전을 집으로 데려다준다. 젊은 남자에게 부여되는 평판이라는 것이 있다면 폴의 어머니는 그가 이제 택시 운전사가 되었다는 말로 그 일을 비아냥거린다. 수군거림, 비아냥, 남의 시선을 뒤로하고 그게 있다 해도 무시해 버리고 그들은 스물일곱 살이라는 나이를 뛰어넘는 사랑에 빠진다. 


첫사랑은 삶을 영원히 정해버린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래도 이 정도는 발견했다. 첫사랑은 그 뒤에 오는 사랑들보다 윗자리에 있지는 않을 수 있지만, 그 존재로 늘 뒤의 사랑들에 영향을 미친다. 모범 노릇을 할 수도 있고, 반면교사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뒤에 오는 사랑들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도 있다. 반면 더 쉽게, 더 좋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 물론 가끔은, 첫사랑이 심장을 소작(燒灼) 해버려, 그 뒤로는 어떤 탐침을 들이밀어도 흉터 조직만 나올 수도 있지만.

(『연애의 기억』中에서, 줄리언 반스)


  세상의 통념과 형식을 깨는 그들의 만남은 폴과 수전을 알 수 없는 사실들로 가득한 시제인 미래로 데려간다. 폴은 오십 년도 더 지난 사랑의 이야기를 기억으로 어루만진다. 가끔 쓴 일기 속에서 떠올려 보기도 하고 인과 관계가 맞지 않는 기억을 풀어 놓기도 한다. 사랑은 구체성이 없는 행위라는 것을 그 자신이 스스로 증명해 보인다. 하나의 이야기에서는 폴은 기억을 이야기하면서 '나'라는 일인칭을 사용한다. 둘의 이야기에서는 객관화를 목표로 '너'라는 이인칭, 셋의 이야기는 '그'라는 삼인칭으로 거리 두기를 시도한다. 


  실패. 추측대로 폴은 사랑의 이야기 안에서 패배한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자 폴도 나도 실패의 예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사랑의 실패는 삶의 실패라고 말할 수 없다. 사랑, 삶, 구원에서 우리는 실패하기 때문에 죽음으로 갈 수 있을 뿐이다. 죽음이 연애를 갈라 놓은 것이 아니라 연애의 기억이 우리를 마지막에 부여받은 축복으로 안내한다. 그것이면 된다. 사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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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편지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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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원위안소에 있는 금자는 글을 몰라 종이에 편지를 쓸 수 없다. 대신 강가에 나가 물 위에 어머니께 하고 싶은 말을 적는다. 시골집에 있다가 공 씨가 비단 짜는 공장에 취직 시켜준다는 말에 따라갔다. 어머니는 아직 애기가 어딜 가냐고 말했지만 돈 벌어서 부쳐주면 어머니하고 동생들이 굶지 않을 것이라는 공 씨의 말에 따라나서기로 했다. 트럭에 올랐더니 맹순 언니도 와 있었다. 여자애들이 많았다. 대구역에서 기차를 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중국이었다. 열세 살 때의 일이었다.


  금자는 위안소에서 후유코로 불린다. 군인이 지어주었다. 겨울 아이라는 뜻이었다. 아버지가 지어준 금자 대신에 그녀는 후유코, 도시코, 모모코, 후미코, 아에, 미쓰코, 요시코, 히후미, 유키코로 다양하게 불린다. 군인들은 그들의 정혼자나 아내의 이름을 붙여가며 밤마다 찾아온다. 김숨의 소설 『흐르는 편지』는 열다섯 소녀 금자의 공간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일본은 대동아 전쟁 중이고 영문 모르고 위안소로 끌려온 소녀들이 있는 황폐한 그곳으로. 인간의 존엄은 무시되고 오직 전쟁과 추악한 욕망만이 존재하는 곳으로.


  김숨의 다른 소설 『한 명』에서는 위안부로 끌려간 노파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다면 『흐르는 편지』는 세계위안소를 거쳐 낙원위안소로 흘러온 소녀인 '나'의 상황을 그대로 들려준다. 전작에서는 노파의 회상에서 등장한 위안소의 모습은 『흐르는 편지』 안에서는 직접적인 배경으로 소환된다. 공장인 줄 알고 있는데 그곳은 군인을 받는 곳이었다. 위안소 주인 여자는 자신을 오카상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오카상의 뜻은 어머니. 금자는 말과 상황의 부조리함에서 의아함을 느낀다. 낙원위안소의 주인은 할아버지라는 뜻의 오지상으로 부른다. 오지상은 손녀뻘 되는 여자애들과 밤을 보낸다. 


어머니, 나는 아기를 가졌어요.


오늘 새벽에는 초승달을 보며 아기가 죽어버리기를 빌고 빌었어요. 변소에 가려고 마당에 나왔다가요. 초승달에 낀 흰 달무리가 몽글몽글 떠오르는 순두부 같아 나도 모르게 입을 벙긋 벌렸어요. 그것을 먹으려고요.


어머니, 나는 아기가 죽어버리기를 빌어요.

눈동자가 생기기 전에······.

심장이 생기기 전에······.

(김숨, 『흐르는 편지』中에서)


  금자는 누구 애인지도 모를 아기를 가졌다.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는 아기가 죽기를 바란다. 악순 언니는 아기를 낳았다. 키울 수 없으니 중국 여자에게 보냈다. 악순 언니는 밤마다 헛소리를 한다. 누구라도 미칠 수 있는 곳이었다. 미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곳이었다. 위안소에서 그녀들은 허기와 밤마다 달려드는 군인과 냄새와 죽음의 공포와 싸운다. 위안소에서 일을 해 나갈수록 쌓이는 빚은 전쟁이 끝나도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강물 위로 쓰는 편지는 어머니가 있는 남쪽 나라로 흘러갈 수 있을까. 편지라기보다는 일기에 가까운 말들을 강물에 토해낸다. 배가 불러오면서 아기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과 아기가 태어나면 살 수 있을까 궁금함이 금자의 가슴을 후벼판다. 차라리 이것이 완전한 소설이 되기를 바란다. 『흐르는 편지』는 위안부로 끌려간 그녀들의 육성이 담겨 있다. 김숨은 할머니들 곁에서 이야기 듣기를 계속했다. 증언이 이야기로 탄생해 세상에 나왔다. 완벽한 허구는 없다. 허구 안에는 밝혀야 할 진실이 숨어 있다. 『흐르는 편지』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슬픈 역사를 가져온다. 


  편지는 흐르고 흘러 2018년에 도착한다. 굽은 산을 타고 계곡 아래를 흘러 도착한 편지에는 이 모든 이야기는 거짓이라고 그녀들 스스로 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잘못을 바로잡는 목소리가 들어 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걸 몰랐다.

세계위안소 23호 방에 시체처럼 누워, 2, 30분 간격으로 밀려드는 군인들을 받으며 몸이 내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왼팔 팔뚝에 '冬子(동자)'라는 글자가 새겨지는 동안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먹물 묻힌 바늘이 살갗을 찔러올 때마다 손가락 하나도 내 게 아니라는걸.

(김숨, 『흐르는 편지』中에서)


  이름을 지우고 산 세월이었다. 이름과 나이와 기억과 고향을 버리고 살았다. 10억 엔을 주며 잊어버리라고 강요하는 사람들을 향해 매주 수요일에 모여 외쳤다. 사과하라. 용서는 그다음이다. 아기를 가진 금자는 죽으면 끝이라는 언니들의 말을 애써 무시한다. 죽고 싶지 않다고 아기와 함께 지옥을 빠져나가 살고 싶다고 어머니께 편지를 쓴다. 삶의 존엄이 파괴되어도 생명은 피어난다. 죽음 곁에서 타오르는 생명의 불씨를 살리기 위한 우리의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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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 제인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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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작 『섬에 있는 서점』으로 책을 통한 소중한 인연을 그린 개브리얼 제빈이 신작을 들고 찾아왔다. 소설 『비바, 제인』은 깊은 밤 잠이 오지 않은 당신이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면 초롱초롱한 눈으로 새벽을 맞이할 정도로 가독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찬란하게 뜨는 태양을 마주할 수 있다. 소설은 하나의 사건으로 얽힌 다섯 명의 인물의 삶을 세밀하게 표현해낸다. 인간을 향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은 투박한 독자의 마음을 울린다. 


  소설은 다섯 장으로 이루어진다. 레이철, 제인, 루비, 엠베스, 아비바의 시선으로 쓰인 소설은 정치인의 불륜 스캔들과 얽혀 들어간다. 큰 사건의 얼개는 이렇다. 레이철은 딸 아비바에게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아비바는 한때 이웃사촌으로 지냈던 엠베스의 남편 레빈의 의원 사무실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다. 엠베스의 남편은 하원 의원 선거에 출마했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아비바는 그와 사랑에 빠졌다. 레이철은 딸의 고백을 듣고 당장 레빈과의 관계를 끝나라고 말한다.


  자식이 부모의 말을 순순히 들으면 그게 자식일까. 아비바는 결국 레빈과의 관계를 서둘러 끝내지 못했다. 둘이 함께 타고 간 차에서 교통사고를 내는 바람에 관계가 순식간에 발각되고 말았다. 언론은 집요하게 아비바의 개인 신상을 물고 늘어졌다. 아비바는 인턴을 시작할 때 일에 대한 두려움과 혼란스러움을 털어놓을 때가 없었다. 그녀는 블로그를 개설해 익명으로 의원 사무소에서 있었던 일을 올렸다. 익명이었지만 레빈과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쓴 블로그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블로그를 없앴지만 구글신은 아비바가 쓴 글을 무한 증식 시키기만 했다. 그녀는 미국 전역에 이력서를 냈지만 구글에 그녀 이름을 검색하기만 하면 딸려 나오는 스캔들의 기사 때문에 어느 곳에도 취직하지 못한 채 엄마 레이철의 수영장에 누워 해리 포터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편지 한 장 만을 남겨 놓은 채 아비바는 잠적했다. 소설은 여성으로서 겪는 사회의 편견과 혐오의 시선을 사실적으로 그린다. 


아비바가 말없이 나가버렸다 한들 내가 뭐라 탓할 수 있겠는가? 사우스 플로리다에서는 아이가 건질 게 전혀 없었다. 사람들은 재수 없는 온라인 미팅남 루이스처럼 생각한다. 몇몇 자극적인 문구만 기억한다. 자신이 한 사람의 인간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자신이 누군가의 딸자식의 대해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바, 제인』中에서, 개브리얼 제빈)


  세상을 둘로 나누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우리가 아닌 나와 너로 부르며 갈등으로 끌고 간다. 『비바, 제인』은 여성과 남성으로 나누어 대립하지 않는다. 우린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인간이라고 외치는 소설이다. 소설의 문장은 유머가 넘치며 인물들은 암담한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며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농담과 웃음이 우리 곁에 있는 한 타인을 향한 소외를 물리칠 수 있다. 우리를 외롭게 하는 건 우리가 가진 편협함이었다. 남을 인정하고 긍정하려는 노력 없이 좁은 세계에서 안주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며 살아가려는 안일함이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개브리얼 제빈이 『비바, 제인』을 통해 던지는 이 질문에 이제 우리가 답해야 할 차례다. 레이철, 제인, 루비, 엠베스, 아비바는 소설을 통해 자신들의 이름을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우리의 이름은 VIVA! 서로에게 격려를 들려주며 아름다운 연대를 향하여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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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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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수아를 읽는다는 것. 경제를 가르치던 선생이 어느 날 교단 위에 한 권의 책을 따로 올려 두는 걸 유심히 봤다. 그녀의 수업은 정직했고 아이들은 자주 졸았다. 수업 이외의 말은 잘 하지 않았다. 교과서와 같이 들고 온 책은 배수아의 『이바나』였다. 딱딱하고 빨간 책. 내가 그 책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은 그즈음 나 역시 배수아를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와 『붉은 손 클럽 』같은 책을 한 권씩 사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들을 읽어 갔다. 머리는 좋지 않았고 평범했다. 평범함을 문학적인 것으로 가리려고 했다. 내가 읽던 책들, 읽고 있는 책으로 말이다. 평범한 아이로 살고자 했으면서도 모두의 관심을 원하는 이중적인 시기였다. 


  대학에 오자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고 쓰면 좋겠지만 사는 곳의 위치와 우울함의 강도가 높아진 것 외에는 변화가 없었다. 소설을 쓰고자 하는 마음은 주눅이 든지 오래였다. 도서관의 어두운 곳에서 숨어 있었다. 마음에 들어 한 이가 말해준 사실 하나. 배수아는 소설을 쓰기 전에 공항 입국 심사대에 앉아 여권에 스탬프를 찍어주는 일을 했었다는 것. 처음으로 쓴 소설로 데뷔를 했다는 것. 그동안 읽어온 배수아의 이면에 그런 일들이 있었다니 지금까지 내가 읽은 건 무엇인가. 어쨌든 나는 그 이야기를 해준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배수아를 더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자주 꿈을 꾼다. 어쩌면 꿈을 꾸기 위해 잠드는 일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꿈에서 나는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뺨을 얻어 맞고 소리를 지르는 등의 난폭한 행동을 한다. 꿈에서도 이건 꿈이니까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라며 이상하게 군다. 꿈에서 나는 죽은 엄마와 대화를 하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이에게 다가가 욕을 퍼붓기도 한다. 한동안 누운 엄마와 이야기를 했는데 말을 하는 도중에 엄마의 얼굴은 검게 썩어 들어가기도 했다. 깨고 나서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하면 동생은 아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생전에 엄마가 남긴 말 중에 기억이 나는 게 있다. 점쟁이가 그랬는데 네가 열세 살을 넘기면 살고 못 넘기면 죽는다고 했다. 다행히 나는 열세 살에서 한참을 살고 있다. 대신 엄마가 떠났다.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

(「1979」中에서, 배수아.)


  교사인 '나'는 매일 아픈 동생에게 전화를 건다. 네 명의 소녀를 모아 매주 시골집에서 소풍을 갖게 해주고 싶은 나는 반 아이들 중 한 명인 키카 큰 소녀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 그 소녀는 주변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유독 키가 작은 아이인 리우진과만 만난다. 네 명의 소녀를 모으는 일은 키가 큰 소녀를 집에 초대하기 위함인데 아이는 네 명을 모으지 못한다. 전화를 건 나에게 동생은 어린 시절은 모두 망상의 형태임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배수아를 읽던 고등학생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가.


  그랬을지도 모른다. 경제 선생에게 저도 배수아 좋아해요라고 말해 보았지만 선생은 못 들은 척 교실 밖을 나갔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해와 공감을 얻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우리가 배수아를 안다는 것을 함께 하고 싶었다. 배수아의 소설집 『뱀과 물』은 지독한 꿈과 불길한 환상을 연주한다. 인물들은 현실에서 이탈한 채 기차를 타고 침목 위에 누워 있거나 도시 밖으로의 탈출을 꿈꾼다. 유원지 안의 컨테이너 안에 '나'를 버리고 간 아버지를 찾는 여행은 꿈속으로 경로를 우회한다. 학교에 나오지 않은 친구의 소식은 죽음이라는 비밀 암호로 둘러싸인 편지로 수신된다. 


  전학을 간 학교에서 꿈을 꾸는 여교사를 만나 환상에 빠지고 유방암을 앓고 있는 자신이 나의 엄마라고 우기는 여자의 머리맡에 놓인 두 개의 썩은 달걀을 보기도 한다. 문장은 소설의 서사를 따라가기 위함이 아닌 인물의 내면에서 쏟아져 나오는 대로 쓰인다. 자주 집을 잃고 책가방에 책과 옷가지를 싸는 일이 1분도 걸리지 않은 묘기를 부릴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나는 그 문장을 읽어간다. 살 곳을 찾아 기차와 버스를 타고 검은 바다 앞에 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리던 시절로 『뱀과 물』의 세계는 데려간다. 


산다는 것은 그냥 거울 속에서 영원히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 저절로 있다가, 언젠가 그레이하운드를 타러 가게 될 것이라고.

(「도둑 자매」中에서, 배수아)


  꿈과 현실의 서사는 뒤섞인다. 인과 관계를 따지는 것보다 문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따라가는 것이 좋다. 배수아를 읽을 때에는. 공항 입국 심사대에 앉아 사람들의 여권에 도장을 찍는 모습을 상상하면 배수아의 문장이 낯설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세계를 떠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한 때의 시원으로 첫 소설은 탄생한다. 배수아의 소설이 책장에 꽂히는 걸 볼 때마다 질투와 환희가 동시에 찾아왔다. 


  거울 밖으로 탈출한 소설 속 인물들은 반대편에서 우리에게 그 자신의 꿈을 들려준다. 죽은 자들의 세계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잠이 들기 전 꿈을 꿀 수 있도록 비는 것이다. 나는 이제 어린 시절이 없다. 유년의 기억을 죽은 엄마가 전부 가져가 버렸다. 종종 꿈에서 우리는 만난다. 이곳의 고민을 이야기해보지만 죽기 직전의 고통스러운 얼굴만을 보여준다. 가혹한 세계에서 만나 비밀을 나눠 가지고도 오래 함께 할 수 없었다. 꿈의 자리를 더듬으며 현실로 돌아온 배수아의 인물들에게 나는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조각들을 받아 든다. 


  어쩌면 배수아를 좋아하고 소설책을 사서 모으던 사람과는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대화는 내가 만들어낸 망상일지도 모르겠다. 여기 이 작은 세계에서 소설은 자주 왜곡된다. 나는 배수아의 소설을 오독하는 것으로 꿈의 세계로 들어가는 비좁은 입구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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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김신회 지음 / 놀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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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오른손의 통증을 느낀 작가 김신회는 일을 쉬기로 한다. 쉬지 않고 달려온 시간을 보상하기라도 하는 듯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통증의 원인을 찾기 위해 보낸 날의 기록은 한 권의 책이 되어 나왔다.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라는 제목을 달고서. 그런 시간과 날이 있다. 몸의 통증 혹은 정신의 아픔으로 그냥 그 자리에 멈춰 서야 할 때가. 각자의 방법으로 상처의 시간을 견딘다. 우리는 견디거나 이겨내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한 팩에 이만 원 하는 딸기를 사서 먹기도 하고 동네 맛 집을 스스로 찾아내어 매일 그곳에 들르는 기쁨을 만끽하기도 한다. 프리랜서로서의 불안한 삶은 잠깐 정지했다. 손이 아프니 자판을 두드릴 수 없었다. 하루를 겨우 보내면서 느낀 짤막한 감상을 두 손가락으로 천천히 쓸 뿐이었다. 오래 만난 사람과 잦은 헤어짐이 일어났으며 사과하는 타이밍을 놓쳐 늦은 후회를 한다. 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느끼는 어른으로서의 불안감을 겪어 냈으며 사람들의 무례한 질문에도 과민한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굉장한 일을 하지 않는다. 나로 인해 세계가 흔들리거나 바뀌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바쁘고 지치고 피로하다. 나의 삶을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어느 날 신은 다가와 잠깐 멈춤이라는 신호를 준다. 그동안 바쁘고 아팠으니 방구석에 드러누워 있기도 하고 오후가 되면 동네 산책을 가라고 해준다. 신호를 받은 이상 나는 휴식을 취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계속 나아갈 수 없음을 알고 있으니까. 


  타인과 사소한 신경전을 벌이고 들어온 날에는 상황의 이해보다는 나의 감정을 먼저 살피라고 조언한다. 상대에게 무심하게 했던 위로의 말을 다시 살펴 보기도 한다. 자신이 쓰는 에세이의 서평과 댓글을 일일이 확인한다는 솔직함을 보여준다. 요가를 다니고 영어 과외를 하며 몸을 추스르고 두려움을 벗어난다. 자기 계발서를 읽으며 보내는 독서의 효용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에 남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쫓기듯 오늘을 보내며 내일을 맞이하는 하루하루에서 잠깐 이탈한 기록에 공감을 보낸다. 행복을 정의하지 않는다. 이렇게 살아야지 충고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다가올 수 있는 멈춤의 순간에서 한 발 나아가기를 보여 주며 힘을 내보라고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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