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걸어도 나 혼자
데라치 하루나 지음, 이소담 옮김 / 다산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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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톨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부부든 친구든 같이 있다고 '둘'이라는 새로운 무언가가 되지 않는다. 그저 외톨이와 외톨이일 뿐이다.

(『같이 걸어도 나 혼자』中에서, 데라치 하루나)


  도리스 레싱의 단편 「19실로 가다」의 주인공 수전은 쌍둥이가 학교에 들어가는 날만을 기다린다. 그래야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밖에서 보낼 수 있다. 그 시간 동안 그녀는 가정이 아닌 자기만의 삶을 꾸려나가고 싶었다.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임신을 했다. 아이들이 클 때까지 그녀는 단 한순간도 혼자였던 적이 없었다. 셔츠나 원피스를 다림질하고 케이크를 만들어 먹는 자신의 모습을 창가에 앉아 들여다보는 동안 외로운 여인이 있다는 걸 실감했다. 집안 곳곳에 적이 도사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남편에게 말해보았지만 병원에 가보라는 말만 돌아왔다.


  쌍둥이들의 방학 동안 그녀는 화를 내고 소리를 질렀다. 방학이 끝나고 좋아졌지만 두 달의 방학이 다시 찾아오자 그녀는 불안해져서 욕조에 앉아 심호흡을 해야 했다. 꼭대기방을 청소하고 그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혼자만의 방이라고 해도 그곳은 집이었다. 꼭대기방은 가족실로 변했다. 방이 필요했다. 집이 아닌 곳에서 혼자 쉴 수 있는 방. 수전은 작고 조용한 호텔을 발견했다. 낮에만 방을 빌리고 싶었다. 하룻밤 숙박료를 지불하고 방을 빌렸다. 그곳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혼자라는 느낌에 빠졌다. 


  소설의 결말을 이야기하지 않겠다. 중요한 건 우리는 각자의 방이 필요하다는 것이니까. 19호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당신의 상상대로 과격하고 뻔하게 흘러갈까. 수전은 단지 방 하나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데라치 하루나의 소설 『같이 걸어도 나 혼자』는 두 여성의 삶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19호실 같은 공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유미코는 서른아홉 살이다. 아이는 없고 남편과는 별거 중이고 계약직 사원이었지만 계약 기간이 끝나 일자리를 찾고 있다. 수예 교실에 다니면서 친해진 선생님의 아들을 소개받아 결혼을 했다. 한 번 결혼한 경력이 있다는 걸 들었을 때는 이미 그가 좋아진 뒤였다. 


  딸이 하나 있는데 전처가 데려갔다. 아이가 크자 이것저것 말썽을 피웠다. 친엄마가 아닌 유미코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와 해결해 달라고 했다. 남편은 딸아이의 전화를 받으면 곧장 달려 나갔다. 관계가 조금씩 틀어지고 이혼을 하기 전 별거를 권한 건 시어머니였다. 그 뒤로 유미코는 집에서 나와 이름만 예쁜 메종 드 리버 맨션에서 살아가고 있다. 


  유미코가 이사 올 때 옆집에 사는 카에데는 그녀가 궁금해서 계속 쳐다보았다. 단정하고 담백하게 생긴 여자였다. 음식을 자주 해먹는지 맛있는 냄새가 났다. 카레 냄새에 취해 맛있겠다고 혼잣말을 하고 있을 때 유미코가 같이 먹을래요라고 말해줘서 그때부터 친해졌다. 요코지 절임에서 오 년 넘게 일했다. 마흔한 살인 카에데는 혼인 신고는 하지 않은 채 남자와 살았었다. 결혼 예정인 남자가 전근하게 되면서 따라왔다. 당시 남자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셔 당분간 입적은 안된다고 해서 그대로 따랐다. 동거하는 동안 사이가 나빠졌다. 서로의 안 좋은 점만 보였다. 싸움의 횟수는 잦아졌고 이대로 헤어져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연애 센서를 작동해가며 심각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보통이라고 부르는 삶이 아닌 채 살아가는 그녀들은 여행을 떠난다. 목적은 유미코의 행방불명된 남편을 찾아가기. 두 여성은 함께 여행을 떠나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꼬여 있는 삶의 타래를 풀어간다. 그 나이가 되도록 결혼하지 않느냐는 질문. 결혼했는데 아이는 왜 갖지 않느냐는 걱정을 가장한 의문. 기분 나쁜 물음표를 바로 펴서 느낌표로 만들어가는 여행에서 나는 그녀들과 하나가 된다. 성별과 종교, 인종과 빈부로 구분 짓는 인간 세계의 냉혹함에서 벗어난다.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 볼 수 있는 용기와 실천을 『같이 걸어도 나 혼자』를 읽는 동안 얻을 수 있었다.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유미코와 카에데가 바다를 바라보며 일상으로 돌아올 결심을 했듯이 나 역시 묵묵히 삶의 정면을 응시할 것이다.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게 아니다. 하나와 하나가 만나 둘이 된다. 말할 것도 없이 그 둘에게는 각각의 19호실이 필요하다. 그래야 같은 곳을 보며 걸어갈 수 있다. 사람들이 말하는 보통이라는 틀에 묶이지 않은 그녀들이 살아가는 '메종 드 리버'로 초대한다. 그곳에는 튀긴 것을 좋아하고 혼자 산책하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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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E. W.
김사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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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는 썩었다. 부조리하고 불평등하다.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의 이면에는 불의가 도사리고 있다. 파괴된 세계에 남아 있는 건 서로를 미워하는 인간들이다. 바퀴벌레도 있다. 인간이 바퀴벌레가 된 건지 바퀴벌레가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인간과 바퀴벌레는 끝이라는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공존한다. 절망을 숨기고 상대가 쥐고 있는 손에 희망이라도 남아 있을까 두려워하는 인간이 그리는 세계, 김사과의 장편 소설 『 N.E.W. 뉴』는 핏빛으로 물든 지독한 현실을 그리고 있다. 


  1991년생 정지용의 탄생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한 인간을 둘러싼 가능하지 않은 세계를 조망한다. 정지용의 아버지는 게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루머를 전해 들은 정지용의 엄마 은미라는 일찍 산통을 했다. 여자들 곁에서 태어난 정지용은 아무 부족함 없이 자랐다. 게이라는 소문도 불사하고 다시 회사를 살린 아버지 덕분이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설계된 인생대로 정지용은 교수를 부모로 둔 최영주와 결혼을 했다. 


  최영주 역시 부유한 집안의 자식이었다. 당당하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거나 들어본 일이 없는 여자였다. 완벽한 부부의 조합. 신혼여행을 다녀와 호텔에서 잠시 지내다 정지용의 아버지가 지은 집으로 들어간다. 일이 있다고 나가는 정지용은 사실 운동을 다니는 것이었고 무료함을 달래려 최영주는 백화점 쇼핑을 다닌다. 그들이 살아가는 주거 공간은 특이한 곳이었다. 5평짜리 원룸에서 200평에 달하는 펜트하우스까지. 입주민들의 동선과 생활 방식은 CCTV와 센서로 통제된다. 지나친 소음, 냄새, 공공장소에서의 소란을 기록한다. 경고가 누적되면 거주인 전용 웹사이트 사용이 제한된다. 이러한 조치는 75평 이하의 주거민들에게만 해당한다. 


  가난한 자와 부자는 섞여서도 안되지만 떨어져서도 안된다는 정지용의 아버지, 정대철의 신념이 담긴 주거 빌딩 안에서 유령이 탄생한다. 이하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공부도 못하고 뚱뚱한 친구가 인터넷 방송을 하며 유명해졌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술김에 방송을 시작한 이하나는 자동수면녀라는 컨셉으로 대박을 쳤다. 한 달 수입은 2~3백만 원. 고시원을 탈출해 정대철이 설계하고 만든 메종드레브의 5평 원룸으로 들어간다. 


  서민과 부자가 어울려 산다는 기이한 메종드레브 안에서 예감했겠지만 정지용과 이하나는 만난다. 반경 5킬로미터 안에서 모든 이들이 고개를 숙이며 허리를 펴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살아가는 정지용은 가정부 차림을 하며 돌아다니는 이하나를 호기심 있게 관찰한다. 뜬금없는 정지용의 고백으로 이하나는 그의 세컨드가 된다. 스물여덟의 정지용과 스물둘의 이하나가 보여주는 한 편의 로맨틱 코미디는 피와 구덩이가 등장하는 잔혹 복수 호러로 장르가 바뀐다. 

 

  김사과의 소설에 서사가 더해진 것이 반갑다. 그가 그리는 세계는 친절하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억지로 화해를 요구하거나 용서라는 위악을 떨지도 않는다. 욕망에 충실하고 욕심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천오백만 원짜리 팔찌를 사서 상자는 못생겨서 버렸다고 말하며 건네주는 인물에게서 연민을 느끼지 않아도 다행이다. 돈보다는 사랑이라고 권태에 찌든 채 이제 와 울고불고 매달리는 인간에게 통쾌함까지 느끼게 한다. 


  신경학 neurology, 전기 electricity, 제2차 세계대전 World War 2이 현대 세상을 결정했다는 정대철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볼까. 이에 덧붙여 본다. 소설 novel, 교육 education, 감시 watch가 미래의 판을 짠다. 이 세계는 더 이상 새롭지 않으며 진짜의 얼굴을 가장한 가짜가 난립한다. 발전, 혁신, 개혁을 말하는 자를 경계하라, 김사과의 소설은 합법적인 가짜의 얼굴로 말한다. 비뚤어진 청춘의 얼굴을 빛 속으로 끌어내는 『 N.E.W. 뉴』의 세계는 참담해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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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집
디디에 반 코뵐라르트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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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그시 미소를 짓는다. 그녀가 아무리 의심해도 나의 확신은 더욱 굳건해져만 간다. 마그리트가 옳았다. '환상은 우리가 믿는 곳에 있는 게 아니다.' 마르타 베크만의 진정한 삶은 말기 환자를 위한 침상이 아니라, 그림 속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산산조각 난 존재, 덧없기 짝이 없는 운명에게 비상탈출구를 열어주고 또 다른 세계를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들의 역할이 아닌가.

(디디에 반 코뵐라르트, 『빛의 집』 中에서)


  예술은 죽어가는 자를 위한 선물이다. 예술가란 삶의 빛이 꺼져가는 이들을 저세상으로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육체는 왜소해지고 정신은 흐릿해져 갈 때 우리 삶의 남은 힘을 모아 예술에 투사한다. 뇌의 착각 말고 과학적인 증명으로 밝힐 수 없는 지점에 예술이 침투해 들어간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상태의 영혼은 그림과 문학, 음악으로 장르를 넘나들며 시공간을 파괴한다. 디디에 반 코뵐라르트의 소설 『빛의 집』을 읽고 든 생각이다. 


  제레미 렉스. 네 살부터 열두 살까지 잘 나가는 인기 아역 배우였다. 스물다섯인 지금은 일한 지 삼 일 만에 해고되었고 제빵사 자격증이 전부인 청년이다. 퀴즈 프로그램에서 우승해 2인 여행권을 얻었다. 사랑하는 여인 캉디스와 함께 그녀가 좋아하는 그림인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을 보러 갈 꿈에 부풀어 있었다. 사소한 다툼으로 결국 킹사이즈 침대 하나를 차지한 채 그녀에게 보낼 편지나 쓰고 있는 처지다. 곤돌라끼리 부딪쳐 필리프 네케르라는 남자를 만났고 그도 최근에 연인과 안 좋은 일을 당한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제레미는 그에게 레스토랑 디너 이용권을 함께 사용하자는 낯 뜨거운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같이 저녁을 먹는 대신 휴대 전화 번호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제레미는 혼자 '빛의 제국'을 보러 가서 이상한 경험을 한다. 그림 속에서 빛나고 있는 주황색 불이 그의 눈앞에서 꺼진 것이다. 이층에는 두 개의 창문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그 창의 불 하나가 꺼졌다고 경비원에게 말했지만 곧 폐관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빈 집에 살고 있는 유령이나 영혼을 탐지하는 일을 하는 필리프 네케르에게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분명 창문에 불이 꺼졌다고. 다음날 미술관으로 다시 그림을 보러 간 제레미에게 놀라운 일이 펼쳐진다. 검은 머리의 젊은 여자가 그림 속 창문을 열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제레미는 같이 온 필리프 네케르를 찾았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다. '빛의 제국'의 그림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제레미는 그 순간 자신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각몽 안에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감사해 하면서. 그는 르네가 싫어하니 창문으로 들어오라는 여자의 부탁에 응한다. 검은 머리 여자는 자신을 마르타라고 소개한다. 르네가 누드화를 그릴 때 모델이 되어 주었다고 한다. 그림 안에서 멍하게 앉아 있는 남자를 보기도 한다. 마르타는 그가 오류 때문에 말을 듣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마르타는 그에게 감미로운 밤이 되길 바란다고 말하며 사라진다. 제레미는 캉디스를 처음 만나던 순간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이 처음 그녀를 만나던 장소의 질감으로 펼쳐져 있었다. 방금 만든 크루아상을 가지고 그녀 방으로 들어설 때의 느낌이 살아났다.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발현되어 사랑으로 이어진 순간으로 돌아간 것이다. 장면은 다시 이년 후의 시간으로 바뀌고 날선 공방과 서로를 향한 원망이 없는 시절로 제레미를 데리고 간다.

  

  사분 삼십 초 동안 제레미는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간 시간동안 그는 완벽하게 죽어 있었다. 그림 속에서 캉디스와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고자 제레미는 기이한 실험실로 찾아가 머리에 뚜껑을 쓰고 전극을 붙인다. 식물로 환각을 일으키고 다른 세계를 넘나들 수 있다는 전력 공사의 직원의 집에 가서 궐련을 피우기도 한다. 


  제레미는 '빛의 제국'의 그림 속으로 도피한다. 지금의 현실은 제빵사이긴 하지만 가끔 빵을 만들고 캉디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첼로 연주를 시작했지만 그마저도 끝을 보지 못했다. 심장 전문의로 성장한 캉디스의 꿈을 위해 3만 달러를 투자했지만 그가 그림 앞에서 심장 이상으로 쓰러지자 골칫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 돈을 돌려받는다. 어째, 점점 캉디스와의 관계는 멀어지고 이별할 것 같은 조바심이 춤을 춘다. 제레미는 마르타만이 그가 처한 현실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빛도 어둠도 완벽하게 지배하지 않는 시간. 지상에는 어둠이 깔려 있어 가로등에 불이 켜지고 이층의 방 두 개에도 주황색 불빛이 들어온다. 하늘은 아직 청명하다.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불온한 시간을 그린 그림 안에서 벌어지는 이상 야릇한 일을 그린 『빛의 집』은 시종일관 유쾌하다. 사랑에 빠진 자만이 벌일 수 있는 황당무계한 사건의 연속으로 결국 그림 속비밀을 밝혀가는 추리적인 재미까지 소설은 선사한다. 


  사랑에 빠진 자의 눈빛을 본 적이 있는가. 총명한 눈의 생기는 반쯤 흐려지고 그 혹은 그녀를 향한 집착으로 불이 꺼진다. 내가 이만큼 상대를 갈망하는데 반응이 없을 때 스스로 빛을 끄고 심연으로 들어간다. 사랑을 잃어버리고 있는 자의 행동이다. 제레미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그녀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한 예술가가 남긴 그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한다. 누군가의 호출이든 구원의 외침이든 낮은 목소리에 반응한다. 


  완벽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무시와 냉대를 감내해야 한다. 『빛의 집』은 죽음으로 이르는 길에 예술이 있다면 고통과 절망에서 비껴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으로 쓰였다. 젊은 시절 화가의 뮤즈로 문학 속으로 침잠하는 시기로 완벽한 죽음에 이를 수 있다. 예술은 인간의 절망에 화답한다. 제레미가 그림 안에서 캉디스와 만났던 시간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였다. 그는 좋았던 시절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미래의 행복한 순간을 미리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의 감정은 실존이고 현재로 기억된다. 과거는 흐릿해지고 미래만이 남는다. 마르타의 과거는 그녀 침실의 대형 거울 뒤에 숨겨진 채 보존된다. 현재는 죽음으로 건너가기 위한 단 하나의 장치로 발견되기를 기다린다. 절망과 사랑의 공통점은 그 끝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절망해서 죽거나 사랑해서 죽는다. 죽기 위해 절망하고 사랑한다. 완벽을 가장한 죽음이 우리 곁에 머물기를 바랄 때 예술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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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
조경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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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자 세 개가 놓인 책의 표지를 열고 작가 약력을 들여다본다. 5년 만의 신작 소설집이라고 간결하게 적힌 띠지를 벗겨 낸다. 책을 읽을 때 그런 것은 신경이 쓰이므로. 전부 읽었구나. 조경란의 책들을 빠짐없이 읽었다니 새삼 감개가 무량하다. 『식빵 굽는 시간』은 두 권 사서 읽었다. 한 권을 사서 읽고 꽂아 두었는데 잃어버려서. 그런 때였다. 책이란 책은 모조리 나의 책장 안에 들어와 있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살던.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에 실린 소설 「저수하樗樹下에서」의 주인공 '나'는 책장만 열일곱 개를 가졌다. 그 책장을 이고 이사 다닐 집을 구하고 있다. 


  책장 열일곱 개를 가진 마흔여섯의 소설가는 가까운 곳에 산이 있고 재래시장이 있는 이층 집을 마음에 들어 한다. 보증금 8천에 월세 80인데 모자란 보증금 생각은 하지 않고 월세 낼 걱정만 한다. 집을 옮길 때는 턱없이 모자란 집값 생각은 하지 못하고 어떻게 그 안을 꾸밀까 현실도피만 하기도 한다. 곧 그 집에 들어가 살 것처럼 굴기도 한다. 소설가의 모든 책을 사서 읽고 책장에 꽂아두는 것만으로 행복하던 시절에 조경란을 열심히 읽었다. 대화가 거의 없고 문단이 거의 나누어지지 않은 소설의 문장들을 따라갔다.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쓰인 소설을 묶자 한 권의 책이 완성되었다. 흘러가는 시간을 묶으면 책이 된다. 잊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있기 때문에 소설을 쓴다. 조경란은 기억에 충실한 소설가이다. 서울 거리를 걷다가 외국의 낯선 곳으로 날아가 걷는다. 짐을 풀고 집의 상태를 확인하자 하는 일이 거리의 지형을 익히는 일이다. 야채가 싼 곳이 어디이고 서점과 화장실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 낯선 곳을 가고 걸을 때 필요한 건 물과 화장실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의 인물들은 로마의 거리를 충실히 걷는다. 지치지도 않은 채 일상을 살아온 이들이 내일을 포기하고 선택하는 일은 걷기와 그마저도 힘들어지면 버스를 타는 일이다. 받아올 것이 있다며 어머니의 부탁을 듣고 아들이 하는 첫 번째 일도 버스를 타는 일이다. 외국의 도시에서 유료 화장실을 찾아내는 일을 무리 없이 할 때까지 걷고 버스를 탄다. 


  구립 도서관까지 걸어가서 일을 하고 책을 반납한다. 시장에 들러 반찬거리를 사고 밤에 몰래 고무나무를 보기 위해 내려오는 아이를 만나 산책을 한다. 허리가 아파 다리를 꼬고 앉을 수 없을 때도 걷는 것으로 병증을 이겨낸다. 평지를 걷고 서서 글을 쓰는 일. 여름휴가 열흘 동안 비어 있다시피한 온천에서도 한낮 동안 미술관에 가기 위해 걷는다. 


  조경란 소설의 화자들이 움직이는 공간은 낯설지 않다. 집 주변과 시장 근처, 일로써 떠난 외국의 거리. 그 거리마저도 집의 풍경과 닮아 있다. 난민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쓸쓸한 하루를 걱정하는 일도 돌아갈 집이 있다고 해서 덜어지지 않는다. 실 팔찌나 카펫을 사는 일은 쉽다. 외국에서라면 추억이 될 테지라는 감정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사지 않고 그 곁을 지키는 '나'는 조국을 떠나온 그와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시장 좌판에 놓인 양말, 가짜라서 더욱 반짝이는 반지, 빨아서 써도 좋을 에코백. 헐거운 지갑을 가진 이라도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물건이다. 서랍에 신지 않을 양말이 쌓인 모습을 보는 하루. 조경란이 그리는 인물은 하루치의 행복을 사서 서랍에 넣어두는 일로 내일을 기약하는 사람들이다. 서랍이 닫히지 않아도 양말과 천 가방, 손수건을 사서 넣어 둔다. 고민 없이 이층집을 계약하지는 못해도 찬이네 반찬에 가서 미역국을 교보 문고에 가서 『염상섭 문장 전집』을 살 수 있는 하루면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언젠가 떠내려가는 집에서』 의자 세 개에 앉아 있다. 


  비어 있는 의자를 바라본다. 누구든 걷다가 지치면 앉을 수 있는 의자 세 개를 가진 사람으로 살고 싶은 이들을 그린 소설집을 5년 만에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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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돼가? 무엇이든 -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 이경미 첫 번째 에세이
이경미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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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소설가 위화가 라디오 방송에 나왔을 때의 일이다. 진행자가 당신의 성공 비결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단숨에 운이 좋아서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통역사도 진행자도 함께 웃었다. 열심히 했다, 좋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뻔한 말이 들려올 줄 알았다. 위화는 그저 운이 좋아서라며 담백하게 말했다. 진행자도 손뼉을 치면서 맞다, 자기 계발서에 나오는 내용은 다 믿을 수 없다. 성공하려면 운이 좋아야 한다며 크게 웃었다. 원래 좋아하던 작가였는데 그때 이후로 더 좋아져서 책을 찾아 읽었다. 


  원래는 치과 의사였다. 공산주의 국가라 수입은 시원치 않았다. 맨날 썩은 이를 들여다봐야 했다. 당에 속한 작가들은 놀러 다니면서 창작 활동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부러워서 글을 썼다. 계속 썼는데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진 못했다. 두 번째 장편 소설 『살아간다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후에 장이머우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유명세를 떨쳤다. 


  어쩌다가로 시작한다. 하늘의 기운, 우주가 도와줘서라는 허황된 소리 말고 운이 좋아, 어쩌다가 성공한다. 성공의 정의도 주관적이라서 그저 잘 데 있고 하루 세끼 따뜻한 밥 먹을 수 있을 정도여도 성공으로 여긴다. 더러 자기 계발서를 읽기도 한다. 성공하는 자의 습관이라고 읽어보면 나와는 거리가 멀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메모 열심히 하고 항상 긍정적인 사고를 하라고 한다. 반대다. 늦게 일어나고 일기도 겨우 쓰고 매사 부정적인 생각으로 하루를 보낸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걱정하고(7월에 쓴 전기의 양을 계산하면서 얼마 나올지 고민하고 의료보험은 왜 아직까지 안 나오나 연체되면 돈 더 내야 하는데 같은 비루한 걱정들) 타인의 표정을 살피며 나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건가 멍청한 생각이나 하고 있다.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 ≪아랫집≫의 각본을 쓰고 연출한 이경미 감독의 에세이 『잘돼가? 무엇이든』을 읽으며 이거 내 얘기임? 내가 쓴 거 아니야?라는 공감이 마구 들었다. 이십 대 시절 첫 직장에서 겪은 일들이며 때려치우고 영화 학교에 들어가 안 되는 시나리오를 쓰기까지 어찌어찌 영화는 만들었는데 흥행이 안돼서 절망에 빠진 최근의 일까지 담담하고 솔직하게 그려 냈다. 영화를 보기만 했지 영화를 만드는 세계를 알지도 못하는 한국 영화 애호가인 나는 이런 이야기가 좋다. 짤막하게 쓰인 일기의 문구들이 마음에 와닿는다. 쓰레기를 쓰겠어라고 다짐하니 쓰레기가 써진다는 일기. 


  여신 이영애가 처음으로 단편 영화에 출연한다는 기사를 봤는데 이경미 감독의 작품이었다. 영화 ≪아랫집≫의 모티브는 감독의 실제 이야기였다. 제발 베란다와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아 달라는 부탁의 글을 절절히 썼는데 아랫집 남자는 감독을 뻔뻔함으로 쩔쩔매게 만들었다. 여자 혼자 살면 다 그러진 않겠지만 무서운 일이다. 전화번호 알아내서 매일 금연 일지를 보내고 밥 먹자고 연락하다니. 세상 끔찍하다.


  홍조 띤 얼굴로 열연하던 공효진의 분신은 감독 이경미였다. 딸의 행방을 찾으며 가위를 손등에 쑤셔 박고 갈비뼈가 부러지면서도 뛰어다니던 손예진은 이경미 감독의 일부였다. 이영애가 헬스 기구를 타며 아랫집을 공격하는 장면은 윗집 여자 이경미의 소심한 복수를 영화화 한 것이었다. '방구석 1열'에 나와 자신의 영화 이야기를 하며 행복해하던 감독 이경미는 불면증을 달고 살 때 엄마가 보내준 문자를 지우지 않고 아직도 읽는 사랑스러운 딸이었다. ≪비밀은 없다≫이야기를 했으니 ≪미쓰 홍당무≫를 한 번 더 소개해 달라며 웃는 이경미는 고기를 좋아한다. 


  성공했다고 말하진 못하겠다. 8년 동안 쓰고 준비한 영화가 잘 안돼서 절망에 빠져 있었다. 집 안에 틀어박힌 감독을 임필성 감독이 데리고 나갔다. 고깃집에서 ≪비밀은 없다≫를 좋아한다던 영화 기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결혼도 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이런 상투적인 고사성어까지는 안 쓰려고 했지만 딱히 비유할 말이 없다. 감독이 밝힌 대로 300만 명을 잃고 한 명을 얻었다. 나쁜 일 뒤엔 좋은 일. 좋은 일 뒤에는 좋은 일이 있으면 좋겠지만 고사의 이야기처럼은 쉽게 흘러가지 않는다, 인생이란 게. 


  몸에 좋다는 약을 때려 먹고 박찬욱 감독의 마늘 액기스도 훔쳐 먹는다. 전세 난민이 되어 우울해 있다가도 거금 4만 4천 원을 들여 장을 본다. 『잘돼가? 무엇이든』은 성공한 감독의 성공기가 아니다, 절대. 절대라는 부정은 이경미 감독이 성공을 안 했다는 것이 아니고(긁적긁적) 내가 이만큼 되기까지 이런 좌절을 겪고 이겨냈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되지도 않는 감정 과잉의 기록이 아니란 소리다. 오해하지 마시라. 


  이 책은 사회성이 떨어지고 영양제 폭식을 일삼고 내 테이블에만 물을 가져다주지 않아 분노가 나려다 이게 아닌가 다시 소심해지는 한 사람의 괴랄한 기록이다. 인생의 낭비가 있다면 지나온 시절을 함부로 쓰고 방치하고 내버려둔 청춘을 보낸 기억이다. 박민규의 수필 「푸를 청 봄 춘」에 나오는 구절처럼 아직 우리에게 청춘은 오지 않았다. 청춘을 허무맹랑하게 보낸 자들이 청춘을 살 준비가 되어 있다. 쓰레기라도 쓰고 싶은 심정으로 시나리오를 쓰며 영화를 준비하는 청춘의 시절은 끝나지 않았다. 여기, 무엇이든 잘 돼가고 있는 청춘들에게 보내는 책이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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