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를 그만두는 날
가키야 미우 지음, 고성미 옮김 / 레드박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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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이 죽었다. 슬프지 않다. 15년을 함께 살았다. 시집 식구들은 그런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다행히 고모는 울지 않는 '나'를 걱정해 준다. 차라리 우는 사람은 걱정이 덜 된다는 것이다. 망연자실한 채 있는 사람이 가장 위험한 법이라고. 어렸을 때 엄마는 '나'를 주산 학원에 보냈다. 남들처럼 피아노나 바이올린 학원이 아닌 단순히 가게 단골손님이 주산 학원 원장이라는 이유로. 그 덕분인지 암산이 빠르다. 


  자식이 없는 남편이 남긴 소액 보험금. 남편의 사망으로 갚지 않게 될 주택 융자금. 지방지의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동안 벌 수 있는 월급. 장례식장에 앉아 돈 계산을 빠르게 하고 있다. 여전히 울음은 나오지 않는다. 함께 사는 동안 남편은 외근과 야근으로 함께 저녁을 먹는 횟수가 드물었다. 기념일은 넘어갔고 서로에 대해 불만 사항이 있어도 말하지 않았다. 


  남편이 죽은 날도 도쿄로 출장을 갔다고 믿었다. 회사 직원이 알려온 장소는 살고 있는 도시의 호텔이었다. 충격. 장례식을 가까스로 치르고 시댁에 불려 갔다. 시어머니는 남편의 불단을 최고급으로 주문해 놓았다.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나'의 집에 들여놓겠다고 한다. 짐이 적은 곳이고 언제든 찾아가 들여다보고 싶다는 이유였다. 할 수 없이 다다미 방에 크고 무거운 불단을 들여놓았다. 


  가키야 미우의 소설 『며느리를 그만두는 날』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나'의 이름은 다카세 가요코. 결혼과 동시에 이토우라는 성 대신 남편의 성을 따랐다. 직장에서도 피트니스센터에서도 다카세 씨라고 불리는 게 어색하지 않다. 가요코는 남편의 죽음과 동시에 비밀을 떠안게 됐다. 죽은 남편은 호텔에서 급사했다. 남편의 동료가 사실을 알려왔다. 도쿄 출장지가 아니었다. 왜 호텔에 간 것일까. 


  남편의 분향을 이유로 사오리라는 청순한 여자가 찾아와 오래 기도를 한다. 왜, 왜 저러는 것일까. 기도가 끝나고서 한다는 말이 남편의 유품으로 잠옷을 달라고 한다. 기막히다. 순간 거짓말을 한다. 잠옷은 내가 입고 자서 안 된다고. 불길한 예감은 적중한다. 남편의 유품 상자에서 꾸준히 사오리에게 송금한 내역이 담긴 통장을 발견한다. 도대체 무슨 사이였길래 적지 않은 돈을 보냈단 말인가. 


  생각 하나마나 그들은 부인인 나 몰래 바람을 피웠던 것일게다. 남편의 죽음 이후 시어머니는 가요코가 살고 있는 집에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린다. 불단에 분향을 한다는 이유로. 불도 켜지 않고 남편의 서재에서 남편 옷을 끌어안고 울고 있어 깜짝 놀랐다. 치매가 분명한 시아버지, 히키코모리 시누이, 집안의 명예를 중시하는 시어머니에게서 가요코는 며느리 역할을 졸업하기로 한다. 


  남편이 죽은 후에 배후자의 친족과 인연을 끊고 같은 묘에 묻히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인척관계종료신고서'를 제출하기로 결심한다. 가요코는 결혼 전의 성으로 돌아가기 위한 '구성회복신청서'도 함께 낸다. 아침 드라마 같은 구성으로 한 번 읽으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계속 읽을 수밖에 없는 소설  『며느리를 그만두는 날』은 생활 밀착형 소설이다. 


  가요코가 걱정하는 일상이나 고민이 낯설지 않다. 부유한 가문의 일원으로서 살아온 시부모님은 가요코의 파트타임 일을 가볍게 여긴다. 성탄절을 함께 보내자고 하고 일하는 곳에 이야기해서 이탈리아 여행에 가주기를 바란다. 시아버지의 코골이가 심해 각방을 쓸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남들 눈에 이상해 보이지 않느냐는 이유다. 며느리와 함께 자면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시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가요코는 산소가 부족하다고 느낀다.


  며느리를 그만두는 날이 올까. 시월드에서 현명하게 바다가 보이는 빨간 예쁜 집으로 완전하게 돌아올 수 있을까. 남편의 비밀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악당도 완벽한 착한 사람도 나오지 않는 소설에서 독자는 공포와 스릴을 느낀다. 일상이 이토록 무시무시한 비밀로 이루어진 것이었나. 


  담백하고 쉬운 문체로 우리의 오늘을 그리는 작가 가키야 미우의 소설 『며느리를 그만두는 날』을 통해 그럼에도 당신의 내일에 박수를 보낸다는 따뜻한 응원을 받는다. 책을 덮고나서야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중간에 읽다가 고구마 열 개를 먹은 듯 답답해질 때가 있다. 사이다 한 잔을 시원하게 들이키고 읽다 보면 소심하게나마 파이팅이라고 가요코 씨에게 말해줄 수 있다. 


  소설은 며느리, 부인, 딸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기만을 바라는 사회적인 편견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이름을 가진 '나'를 찾아가는 고군분투기를 그리고 있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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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
곽재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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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기 책을 읽으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을 가지며 책을 읽지는 않는다. 『유혹하는 글쓰기』, 『문장 강화』든 읽고 나면 문장과 단락을 쓸 때 멋진 기술 하나를 얻지 않으려나 호기심이 생기는 정도이다. 대부분 실패. 시 창작과 소설 창작 책도 읽어 봤지만 시 한 줄 소설 한 문단을 제대로 쓰지 못하기 일쑤였다. 최근에 읽은 책은 김중혁의 『무엇이든 쓰게 된다』, 제목으로 독자에게 무엇이든 쓸 수 있을 것이라 희망을 주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 무엇이든 쓰게 된다, 된다, 된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게으르고 얻고 싶은 것만 많은 사람이 글쓰기 책을 읽는다고 해서 바른 글쓰기 습관이 잡히지 않는다. 대게 글쓰기 책을 읽는 이유는 영업 노하우를 알고 싶어서이다. 좋아하는 작가는 하루 중 언제 글을 쓰나. 그가 앉아서 작업하는 책상의 형태는 어떠한가. 펜으로 쓴다면 어떤 펜을 쓰나. 글쓰기는 빼고 주변적인 걸 알고 싶어서 읽는다. 『무엇이든 쓰게 된다』를 읽고 블랙 윙 연필을 한 다스 샀다. 


  『가장 무서운 이야기 사건』을 읽고 괜찮다,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난 건 아니고 계속 누워서 괜찮다, 잘 쓴다고 생각한 작가 곽재식의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를 읽었다. 글쓰기 책이라고 책상에 앉아서 꼼꼼하게 메모를 하면서 읽지는 않았다. 늘 그렇듯 옆으로 누워서 읽었다. 저자 소개에 '화학자 출신 소설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글을 쓰며 6개월간 단편 4편을 완성하는 곽재식 속도 1을 유지하고 있다'라고 쓰여 있다. 


  속도 1을 유지하는 작가의 글쓰기 비법이라. 다음 장으로. 어렸을 때 비디오 대여점 마니아였다고 한다. 비디오 커버에 적힌 영화 소개 글을 읽고 영화를 골라야 하는데 어느 날부터는 고를 것도 없이 그냥 빌려봤단다. 그러면서 망한 영화에서도 소재를 찾을 수 있다는 글감 찾는 팁을 알려준다. 망한 영화라. 세상에는 망한 영화와 흥행 영화로 나누고 있구나. 이분법에 감탄한다. 영화를 보는 기준은 배우다. 혹은 한 감독을 따라서 본다. 조니 뎁이 나온 영화를 다 찾아보기도 하고 이창동이 그랬다. 영화는 그저 생각 없이 멍하게 보곤 했는데 그곳에서 글의 소재를 찾으라니, 이제부터 생각을 좀 하고 봐야겠다.


  나에게 도움이 됐던 부분은 두 번째와 네 번째 챕터였다. '경험과 변주-재미있게 이야기를 꾸리는 법과 생존-꾸준히 쓰는 힘을 기르는 법'.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서 작가가 가장 쓰고 싶은 부분을 먼저 쓰라고 말한다. 영감이 떠오르고 이 장면은 최고야 하는 부분에서 시작하는 게 좋다는 것. 인물 소개하고 배경 설명하는 지루한 시작을 할 것이 아니라 쓰고 싶은 부분을 첫 부분으로 하면 작가가 신나서 재미있게 쓸 수 있다. 우리에겐 워드프로세서가 있기 때문에 쓰고 싶은 장면 먼저 쓰고 자르고 붙이고 이어서 쓸 수 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좋은 글을 쓰려고 하지 말고 개떡같이 써놓고 나중에 고치자', '마무리 짓기 쉽도록 일단 짧은 글로 시작하자.' ~자로 끝나는 청유형 문장에서 당신도 할 수 있어가 아닌 같이 해보자는 응원이 느껴진다. '일단 쓰자'라는 보기에 무책임한 표현도 있지만 써야 고치고 완성하고 공모전이든 낼 것이 아닌가. 가장 중요한 비법이 있다. '백업을 잘하자'


  여러 글쓰기 책을 읽었지만 이런 중요한 노하우를 알려주는 책은 없었다. 백업. 딱 한 번 있었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 글이 나를 쓰고 있는 것인지 모를 순간을 경험한 적이. 저장하기를 누른 순간 화면이 까맣게 변하면서 컴퓨터가 재부팅 되었다. 알고 있는 욕은 다 했다.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김첨지의 심정으로 다시 글을 써 보았지만 멍청한 기억력의 소유자라 복원할 수 없었다. 이메일이든 외장하드든 백업을 해놓자. 수시로 저장하기를 눌러야 한다. 


  글쓰기만으로 생존을 할 수 없다고 사실 그대로 일러주기도 한다. 생계를 유지할 수단을 확보해야 한다. 이런 책 백날 읽어봐야 도움이 되겠어라는 부정적인 생각도 들겠지만 좋아하는 작가는 어떤 방법으로 글을 쓰나 들여다보는 재미가 암울함을 이긴다. 다음 책은 『사기꾼의 심장은 천천히 뛴다』로 첫 페이지를 읽었는데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대로 중요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어떻게든 글쓰기는 어떻게든 읽기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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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커스 나이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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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다는 것은 이제 더는 만날 수 없다는 것. 

꿈에서 만나 그 기척을 느낄 수 있어도, 그건 위로밖에 되지 않는다.

이제는 없는, 그런 매일을 살기 위해 떨쳐 버리는 것.

(요시모토 바나나, 서커스 나이트 中에서)


  모든 사람은 죽는다.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한 번 태어나고 한 번 죽는다. 공평한 일이다. 누구도 두 번 태어나지 않고 두 번 죽지 않는다. 살아가면서 죽었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어도 몸은 두 번 죽을 수 없다. 사후 세계를 경험하고 믿는 사람에게는 무리일 수 있는 말이지만 다들 한 번씩 살고 죽는다. 이제 겨우 한 번 살고 있다. 죽음을 옆에서 바라본 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함께 말이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서커스 나이트』의 인물들은 죽음을 지켜보고 생의 빛을 향해 걸어간다. 어두운 곳에서 빛으로 뚜벅뚜벅. 누구의 손에 등 떠밀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한 걸음을 내딛는다. 고요하고 가만한 빛의 소설 『서커스 나이트』는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주문 같은 소설이다. 


  어렸을 적 비행기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사야카. 쌍둥이 형의 죽음을 자라는 내내 간직해야 했던 이치로. 진행성 위암으로 곧 죽어갈 운명에 처한 사토루. 아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마쓰자키 부인. 아버지 사토루의 죽음과 함께한 어린 미치루. 인물들은 죽음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서로를 미워하지도 죽어간 이를 과장되게 그리워하지 않는다.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고 이어서 분침 조금 있으면 시침이 움직이는 것처럼 각자의 삶의 바퀴를 굴린다. 


  사야카는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사물을 만지면 기억과 느낌을 알 수 있다. 사이코메트리. 완벽하지는 않고 틀릴 때도 많지만 사건 수사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딸 미치루는 엄마의 그런 능력을 좋아한다. 신기해하거나 불쾌해 하지 않는다. 미치루뿐만 아니라 소설의 인물들은 사야카의 능력을 존중해준다. 


  소설을 흐르는 분위기는 조용하고 차분하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지켜본 그들은 상대에게 책임을 묻거나 마음에 상처를 내지 않는다. 우연히 날아온 편지 한 장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불안하고 어두웠던 사야카의 내면을 빛으로 인도한다. 스무 살의 사야카는 사랑을 했다. 부모님을 잃고 발리에서 살아가던 그녀는 세계 일주를 하고 머물 곳을 찾아다니는 여행자였다. 


  이치로의 가족이 운영하는 신사에 머물게 되면서 현명하고 타인을 배려하면서 자신만의 신념으로 살아가는 이치로에 반해 연애를 한다. 이치로의 가족 모두 사야카를 한마음으로 보듬어 주었다. 부모님을 동시에 잃는다는 것에서 치유되지 않은 사야카는 가족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겨우 빛으로 걸어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엄지손가락의 마비를 겪고 밤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밤 속을 헤매다 오랜 친구로 지낸 사토루의 느닷없는 고백과 제안을 받아든다. 사야카는 사토루와 결혼을 하고 미치루를 낳는다. 사토루는 어린 미치루를 힘껏 좋아해 주고 천국으로 간다. 소설은 남아 있는 자들이 삶과 함께 부르는 위로의 노래로 가득하다. 죽어간 자들이 그곳에서 지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앞날을 축복해준다. 죽음은 무섭고 슬퍼지는 감정 속에서 살아가는 게 아닌 자주 기쁘고 고요함으로 버티어 나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이다. 


  남아 있다, 아직 여기에. 산소포화도가 0으로 떨어지고 심정지를 알리는 그래프가 평행선을 그리는 장면에서. 하늘에서 만난 그들이 있어 남아 있는 우리는 위로 비슷한 감정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이상한 이름의 가족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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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평전 - 문익환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판 문익환 평전
김형수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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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 가능한가. 만나서 이야기 한 번 나누지 못한 사이면 더더욱 알 수 없지 않을까. 시인이면서 소설가이기도 한 김형수에 의해 쓰인 『문익환 평전』을 집어 들면서 든 생각이다.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알고 싶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특별판 『문익환 평전』이 나올 때 한반도는 평화의 물결로 요동쳤다. 세상의 날 선 비판을 가하고 온몸으로 민주화를 끌어안은 그의 호 늦봄에서처럼 우리는 늦봄, 걸어서 두 정상이 만나는 꿈같은 장면을 마주했다. 


잠꼬대 아닌 잠꼬대 

-문익환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 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 

가기로 결심했다구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 

모란봉에 올라 대동강 흐르는 물에 

가슴 적실 생각을 해보라고 

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 

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푸는 거지 

얼어붙었던 마음 풀어버리는 거지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동무라는 좋은 우리 말 있지 않아 

동무라고 부르면서 열 살 스무 살 때로  

돌아가는 거지 

  

아 얼마나 좋을까 

그땐 일본 제국주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이천만이 한마음이었거든 

한마음 

그래 그 한마음으로 

우리 선조들은 당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쳤잖아 

  

아 그 한마음으로 

칠천만이 한겨레라는 걸 확인할 참이라고 

오가는 눈길에서 화끈하는 숨결에서 말이야 

아마도 서로 부둥켜안고 평양 거리를 뒹굴겠지 

사십 사 년이나 억울하게도 서로 눈을 흘기며 

부끄럽게도 부끄럽게도 서로 찔러 죽이면서 

괴뢰니 주구니 하면 원수가 되어 대립하던 

사상이니 이념이니 제도니 하던 신주단지들을 

부수어버리면서 말이야 

  

뱃속 편한 소리 하고 있구만 

누가 자넬 평양에 가게 한대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구 

  

객쩍은 소리 하지 말라구 

난 지금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산다는 것 말이야 

된다는 일하라는 일을 순순히 하고는 

충성을 맹세하고 목을 내대고 수행하고는 

훈장이나 타는 일인 줄 아는가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구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을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 

  

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사는 거지 


  신학자, 목회자, 시인, 번역가, 언어학자, 시대의 꿈과 사상을 실천하는 예언자. 늦봄 문익환의 앞에 붙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그가 일흔두 살에 쓴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대로 그는 평양에 갔다. 비록 걸어서 가지는 못하고 베이징 공항에서 평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지만. 그는 갔다. 1989년 3월 25일의 일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그들을 괴뢰, 인민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동무라는 가장 예쁘고 친근한 말로 그들과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눌 것이라고 했다. 


  윤동주와 시 공부를 하고 그가 문익환이 쓴 모자를 부러워하자 호떡 몇 개와 바꾼 일화는 유명하다. 그가 쓴 시를 윤동주가 그것도 시인가, 말해서 그는 시를 포기했지만 그의 안에 있는 시의 열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만으로 쉰셋에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해 쉰여섯에 첫 시집 『새삼스러운 하루』를 출간해놓고 순수하게 기뻐하던 모습을 시인들은 기억하고 있다.


  늦봄. 히브리어 성서를 번역하고 목회자의 길로 가던 그가 시대의 부름을 받게 된 것은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 이후였다.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으면 좋겠다던 전태일은 노동 현장의 가혹함을 알리고자 온몸에 불을 질렀다. 그가 죽으면서 끝까지 외쳤던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지금 2018년에도 유효하다. 늦봄은 그렇게 더디 시대를 건너왔다. 날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유신 체제에서 독재의 부당함을 알리는 곳에 그는 늦게 온 봄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남과 북이 하나의 길로 가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던 그는 온밤을 꼬박 새워 시를 쓰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잠꼬대 아닌 잠꼬대로 그는 시의 운명을 받아들고 걸어갔다. 평양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인간의 명이니 시간의 흐름이니 따지지 않고 그와 함께 2018년의 늦봄을 맞이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걸어서 우리는 만났다. 마주 잡은 손을 흔들고 가슴 설레는 말을 그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생애를 전부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의 길을 안내하는 대로 책장을 넘길 뿐이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김형수의 언어로 쓰인 『문익환 평전』은 소중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출생과 죽음 사이의 길을 따라 걷는 작가의 운명 또한 늦봄의 계절과 만나 평화의 길로 안내받는다. 한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고 서로를 그리는 마음으로 걸어서 평양으로 신의주로 가는 여정에 늦봄과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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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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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읽는다. 이것은 질병과도 같다'로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자전적 이야기 『문맹』은 시작한다. 산문의 제목은 「시작」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문학의 원형은 읽는 행위로 출발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네 살 때부터 글을 읽었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어머니는 오빠와 그녀가 너무 시끄럽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보낸다. 그곳에서 그녀는 '완전히 우연한 방식으로 독서라는 치유되지 않는 병에 걸린다.'


  매일 읽는 병에 걸린 그녀는 열네 살에 기숙사에 들어간다. 이백여 명의 여자애들과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학습실에서는 절대 침묵이 강요된다. 숙제를 하고 '필독' 도서를 읽는다. 재미없는 책을 읽는 대신 그녀는 쓴다. 일기를 쓰고 비밀 문자를 만들어 쓴다. 읽는 행위에서 쓰는 행위로 전환된 문학이라는 불치병 판정을 받는다. 


뭔가 읽을 것이 있을 때면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나는 계속 읽고, 그러고 나면 울면서 잠든 밤 사이에 문장들이 태어난다. 문장들은 내 곁을 맴돌다, 속삭이고 리듬과 운율을 갖추고, 노래를 부르며 시가 된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문맹』中에서)


  아버지는 감옥에 가 있고 어머니는 도시에서 쥐약을 포장한다. 신발 수선을 맡길 때면 학교에 가지 못하는 그녀. 가난함이 습관처럼 베어 있던 시절에도 그녀는 읽고 쓴다. 읽고 울다가 잠든 밤 사이에 태어난 문장을 적는다. 그것은 시가 된다. 시계 수리공 시절에도 그녀는 시를 쓴다. 작업이 단조로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으며 기계는 시의 운율에 맞춰 반복된다. 저녁마다 노트에 깨끗이 시를 정리한다.


  스물한 살에 넉 달 된 어린 딸을 업고 그녀는 숲을 건넜다. '월경 안내인'을 따라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국경을 넘는 그녀의 손에는 두 개의 가방이 들려 있다. 한 가방 안에는 젖병과 기저귀, 아기에게 갈아입힐 옷이 있고 다른 가방에는 사전들이 있다. 헝가리에는 작문 노트와 처음 쓴 시를 놓고 왔다. 부모님과 남동생, 오빠에게 작별 인사를 하지도 못했다. 스물한 살의 그녀는 모국어를 잃어버렸다.


  스위스에서 그녀는 헝가리어로 시를 쓴다. 헝가리 문예에 글을 보내고 희곡 두 편을 완성한다. 라디오에 원고를 보내고 전문 배우들이 그녀의 글로 연기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글로 쓰고 한 편의 글을 완성한다. 큰 딸에게 글의 완성을 알리고 세 군데에 작품을 보낸다. 그중 한 군데에서 출판하고 싶다고 연락이 온다. 


어떻게 작가가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된다. 우리가 쓰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은 채, 끈질기고 고집스럽게 쓰면서.

(아고타 크리스토프, 『문맹』中에서)


  스위스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그녀는 프랑스어를 읽고 쓰지 못한 채 살아갔다. 스물여섯이 되어서야 그녀는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다. 초급반에 가서 다른 외국인들과 공부한다. 2년 후, 그녀는 우수한 성적으로 교육 수료증을 받는다. 다시 읽을 수 있다는 기쁨. 아이들이 어떤 단어의 뜻을 물어볼 때 모른다 대신 한번 확인해볼게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노력.


  『어제』, 『아무튼』,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으면서 느꼈던 건조한 문장들. 수식어를 배제한 짧은 문장에서 아름다움과 참혹을 경험했다. 세계와 스스로 담을 쌓고 지내는 인물들이 하는 단 하나의 행위는 읽고 쓰는 것이었다. 힘든 노동 후에도 그들은 읽고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한 권의 책을 쓰는 작가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이 가진 유일한 희망. 


  헝가리 국경을 넘을 때 가지고 간 가방 안에 들어 있던 유일한 책은 사전이었다. 모국어를 잃지 않고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하는 난민의 서글픈 운명을 그녀는 예감했으리라. 사 년 동안 그녀는 프랑스어를 읽지도 쓰지도 못한 시간을 가져야 했다.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문맹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작가가 되기로 스스로의 삶을 결정지은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문맹을 선택한다. 언어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시간 동안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프랑스어로 쓰는 것'


   프랑스어로 쓴 짧은 문장 안에는 헝가리어로 쓰지 못한 기억과 사연이 숨어 있다. 전부 쓰지 않고 적어(敵語)에 숨겨둔 비밀은 소설이 되었다. 모국어를 잃어버리고 새로운 언어를 배워서 쓰고 읽어야 했던 한 작가의 담담한 슬픔과 마주할 준비를 한다. 국경을 넘는 순간 우리는 『문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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