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걷는사람 세계문학선 1
오야마다 히로코 지음, 한성례 옮김 / 걷는사람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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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야마다 히로코의 『구멍』은 마스다 미리의 산문집 『그렇게 쓰여 있었다』를 읽으며 알게 된 소설이다. 마스다 미리는 소설 『구멍』을 읽고 있다고 산문집에서 쓰고 있었다. 좋아하는 작가가 읽는 소설이라면 당장에 읽고 싶다. 찾아보니 '걷는사람'이라는 출판사에서 세계문학선1권으로 나와 있었다. 예스24에서 작은 출판사 응원 프로젝트로 중쇄를 찍게 하자는 이벤트도 한다(http://www.yes24.com/campaign/01_book/2017/1017Publish.aspx?EventNo=4&CategoryNumber=001). 외국 소설의 경우 번역이 되어 있지 않으면 책을 읽을 수가 없다. 다행히 이 출판사에서 나온 오야마다 히로코의 『구멍』이 있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소설  『구멍』에는 세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표제작인 「구멍」의 이야기는 기묘하다. 실려 있는 세 편의 이야기들은 기이하고 환상적이다. 「구멍」은 남편의 전근 때문에 시집 근처로 이사를 하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녀는 비정규직으로 직장에서 이름 말고 성인 마쓰우라로 불린다. 정규직과 보너스는 21배 차이가 난다. 촌지라고 쓰인 봉투에 담긴 돈을 가방에 쑤셔 놓고 쓰지도 않은 채 이사를 한다. 일을 그만둔다는 말에 동료 여성은 부럽다고 말한다. 일을 하지 않고 집에만 있는 생활을 하고 싶다는 동료의 말에 마쓰우라는 일을 하지 않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아 선뜻 대꾸를 하지 못한다. 

  정규직이 아니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급여 차이는 심각하다. 마쓰우라는 불편한 교통수단이 아니더라도 더 일을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고민을 나눌 동료도 한 사람 밖에 없다. 그마저도 심각한 고민이 아니라 잡담 수준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회사 안에서는 사람들과의 교제조차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눠진다. 일을 하는 여성으로 묘하게 활달한 시어머니가 있고 말이 없는 시아버지, 고령이신 시할아버지가 있는 본가로 들어가면서 마쓰우라의 일상은 전보다 한가해진다. 

  일을 하지 않는 자신의 일상과 맞닥뜨리면서 마쓰우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남편의 월급만 받아서 사는 건 옳은 일인가 생각에 빠진다. 시어머니가 집을 빌려줘서 생활비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집세를 내지 않아서 비용은 절약되지만 어쩐지 자신이 한심하게만 느껴진다. 시어머니의 부탁으로 편의점에 공과금을 내러 가다가 검은 짐승을 본다. 짐승을 따라가다 구멍에 빠지는 마쓰우라. 그 앞에 옆집 여자가 나타나 그녀를 구해준다. 자신만 본 것만 같은 짐승을 따라 구멍에 빠진 이후 그녀는 이상한 만남들을 가진다.  그녀는 구멍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공장」은 카프카의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을 만드는지 모르는 거대한 공장 안에서 일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젊은 작가는 이 세계의 비인간적인 모습들을 세밀하게 나열한다. 정규직으로 알고 면접을 보러 왔지만 일은 이상하게 진행되어 비정규직으로 그것도 문서파쇄실에서 일하는 스물여섯의 여성 우시야마. 대학교수의 추천으로 옥상녹화사업과 이끼 연구회라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업무를 맡은 후루후에.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정리 해고를 당해 공장에서 나오는 모든 서류의 교정 작업을 맡게 된 서른한 살의 남성 우시야마. 

  문서파쇄실에서 일하는 여성과 교정을 보는 우시야마는 남매다. 같은 집에서 살지만 서로 어떤 곳에서 일하고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오빠는 동생이 비정규직인 게 불안하고 동생은 오빠가 여전히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점심시간에 우연히 오빠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었구나 알게 된다. 공장은 거대하다. 각종 편의시설이 있고 버스가 북쪽과 남쪽을 옮겨 다닌다. 출입증의 줄 색깔로 직급을 나눈다. 고토라는 인사 담당자가 이들을 채용하고 업무를 맡기뿐이다. 정확히 그들이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설명을 하지 못한다. 그곳은 거대하고 바쁘고 수시로 사람들이 바뀐다. 

  이끼 연구회라는 일을 추진하는 후루후에는 초등학생이 쓴 공장에서 서식하는 동물 보고서를 받는다. 초등학생은 보고서에 '회색뉴트리아', '세탁기도마뱀', '공장가마우지'의 생태를 자세히 적어 놓았다. 배수구와 세탁기, 공장의 하늘에 사는 그들을 자세히 관찰하는 공장 사람들은 없다. 원래 그것들이 공장에서 살아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할 뿐이다. 

  오빠 여자친구에게 험담을 들은 우시야마는 반차를 쓰고 공장을 산책한다. 걸어서 다리까지 건너간다. 그곳에서 새의 사진을 찍는 후루후에를 만나 점심을 같이 먹는다. 후루후에가 공장에서 하는 일을 듣고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아 질문을 한다. 당신의 일이 공장에서 어떻게 진척이 되고 성과를 보이는지에 대해서. 성과도 보이지 않는 일을 하면서 정규직으로서 비정규직이 누리지 못하는 복지와 혜택을 받고 있는 것에 비난으로 들리는 것 같아 후루후에는 긴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오야마다 히로코가 그리는 세계는 정규직으로 살지 못하는 비정규직의 암담한 오늘의 세계이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름과 나이를 알려주지 않은 채 몇 살로 보이느냐는 질문을 하고 끝내는 이름과 나이를 말해주지 않는다. 업무를 알려줄 때는 친절한 얼굴을 꾸미지만 그 이후에는 잡담조차 하지 않는다. 일하러 갔는데 잡담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는 반문도 들지만 알지 않나, 말이 없는 침묵의 시간들을 견디다 보면 일이 아니라 정신이 먼저 지친다는 것을. 말을 걸어 주지 않는다. 그들의 대화에 낄 수 없다. 어쩌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생각과는 다르게 말이 엇나가서 꼬투리를 잡힌다. 그러다 보면 말을 할 수 없다. 점심도 혼자 먹어야 한다. 비싼 점심을 사 먹지 않는 그들은 도시락을 싸와서 먹는다는 사실조차 알려주지 않는다. 

  문서파쇄실에서 일하는 우시야마는 회식 자리에 참석한다. 고기 대신 내장만을 주문해 먹는 그 자리에서 자신은 그동안 악의에 노출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표정이나 말투에서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 그 정도는 아는 것이다. 우시야마는 언제까지 종이를 넣고 파쇄하는 그 일을 할지 모르지만 이 일이 자신의 일이 아님을 안다. 함께 일하는 동료의 이름과 나이를 모르는 그곳에서 보람이나 노동의 의미를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일을 해야 의미가 있다, 사람은 번듯한 직장을 가져야 한다. 이런 말들이 요즘 시대에는 폭력으로 다가온다. 일본이나 한국 사회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은 갈수록 심각해진다. 파견 사원, 계약직 사원, 비정규직은 다른 단어처럼 들리지만 그들은 같은 일을 하지만 정규직과는 다른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다. 직원 전용 식당은 들어봤지만 정규직 전용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 보너는 21배 차이가 난다. 「구멍」의 마쓰우라도 「공장」의 우시야마들도 비정규직의 구멍에 빠져 결국엔 공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공장 안에서 서식하는 공장 동물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마쓰우라가 본 검은 짐승은 공장에서 서식하다 이탈한 공장 동물의 하나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자신이 점점 공장 동물로 변하는 체험을 하는 사람들. 오야마다 히로코의 직장은 쓰무라 기쿠코의 직장보다 더 암담하고 오늘의 오후마저도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는 공포로 가득한 곳이다. 

  매일 구멍에 빠졌다가 동물로 변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지상 위로 올라온다. 마쓰우라는 다시 비정규직인 편의점에 일을 한다. 도처에 널려 있는 비정규직이라는 구멍을 피할 수 없다. 그 구멍에 빠지게 되면 공장으로 이어지는 길로 안내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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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창비시선 417
장석남 지음 / 창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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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古代))에 가면

-장석남


말 타고 가다가

순한 돌처럼 가라앉을래요


사랑을 면제받는 기도를

하늘빛 어느 소(沼)에 가서는 매일매일 씻기겠어요


말 길러 말 타고 가다가

열매를 면제받은 꽃으로 가벼이 떠내려갈래요


말 타고 가다가

물의 빛으로 갈아타겠어요


  그 마을은 기차도 차도 다니지 않을 것이다. 길조차 제대로 나 있지 않아서 걸어가거나 말을 타고 가야 할 것이다. 먼지는 날리고 가도가도 길의 끝이 보이지 않는 곳. 문득 끝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했나 의심이 들 때 마을은 나타난다. 물을 얻어 마시고 연못에 들어가 발을 씻고 더러워진 나의 얼굴을 마주본다. 한없이 가라앉는 마음을 그곳에 버려두고 다시 길을 떠나온다. 순한 돌로 열매를 면제받은 꽃으로 물의 빛으로 나의 시간은 탈색된다. 


입춘 부근

-장석남


끓인 밥을 

창가 식탁에 퍼다놓고

커튼을 내리고

달그락거리니

침침해진 벽

문득 다가서며

밥 먹는가,

앉아 쉬던 기러기들 쫓는다


오는 봄

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

발이 땋에 닿아야만 하니까


  2월인데 아직도 왜 이렇게 추울까. 한 줌 볕이라도 더 들어오게 하려고 창문을 열어두었다. 내일이 입춘이라는데 기상 예보는 역대급 입춘 한파라고 알려온다. 오는 봄, 와야 할 봄. 그 봄에서 시인은 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 나는 한낱 휴일과 휴일 사이의 일들을 가늠하느라 어지럽기만 한데. 발이 땋에 닿아야 살 수 있으니까. 그 길을 걷고 무심코 꽃이라도 밟는 날에는 마음이 내려앉을 일을 걱정하는 시인의 언어를 나는 조심히 옮겨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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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어비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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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진의 소설집 『어비』는 잘 읽힌다. 아홉 편의 소설들이 실려 있는데 그 이야기는 하나같이 나의 어느 하루를 옮겨 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소설의 문장은 단문으로 끊어지다가도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난해한 묘사와 서술은 없다. 인물들의 뒤를 착실히 따라가는 문장은 나를 광화문이나 대한문 근처로 데리고 간다. 단 한 번 가본 그곳은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데도 천막이 들어차 있었고 그 안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서명을 하고 모금함에 작은 돈을 넣었다. 기억은 자꾸만 흐려졌지만 김혜진이 부려 놓은 소설의 풍경은 현실의 일들과 맞물린다. 

  인터넷 서점의 물류 창고에서 일하는 '나'는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가 나중에 운영하는 인터넷 방송에서 자신의 닉네임을 어비라고 지은 것을 보고 그렇게 부를 뿐이다. 어비는 물류 창고 앞마당에 부려 놓은 개의 이름이기도 했다. 「어비」에서 '나'는 그의 이름을 끝내 부르지 못한다. 사는 곳과 일상의 일들을 질문했으나 그는 단 한마디도 돌려주지 않는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어비는 열심히 일하지만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 때문에 근면함이 가려지는 사람이다. 먼지를 먹고 짧은 휴식을 가지며 사람들과 불필요한 대화를 이어가는 일들을 하다 보면 조장이 되기도 하고 팀장이 될 수도 있지만 '나'는 좀 더 일 다운 일을 찾으려 그만둔다. 어비는, 음식을 먹고 불 꺼진 창고가 우주 센터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이상한 방송을 진행한다. 그 일은 그래도 되는 건가, 그렇게 돈을 벌어도 되는 건가 의심이 드는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나'는 한다. 

  20년 동안 일한 직장에서 해고된 엄마를 도우는 「아웃포커스」의 '나' 역시 잠깐 머물다 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편의점에서 일한다. 1인 시위를 하는 엄마를 위해 박스로 핸드폰을 만든다. 할머니의 묏자리 문제로 가족 모임에 대신 나가려고 편의점 사장에게 무수한 양해를 구한다. 양해를 구하다가 결국엔 나오지 말라는 연락을 한낮의 거리에서 듣는다. 철거 용역으로 일을 나섰다가 반대 시위를 하는 여자를 해결하라는 말에 산에 올라가 여자에게 겁을 주는 이야기, 「한밤의 산행」. 치킨 배달을 갔다가 원룸에 사는 사내의 자살을 도와주는 배달원의 실패기를 담은 「치킨 런」. 

  김혜진의 소설속 인물들은 남이 고개를 끄덕일만한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단기 알바를 하거나 편의점, 철거 용역, 배달원, 백수, 취업 준비생으로 불확실한 미래만을 소유한 자들이다. 그들은 생판 모르는 남에게 일다운 일을 하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그저 산책을 다닐 뿐인데 무슨 일이냐는 질문을 받고 엉뚱한 대답을 하는 사람들이다. 모국어로도 영어로도 대화할 수 없는 그들은 대화를 하다 정작 몇 개의 단어로도 소통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닫힌 문을 열기 위해 어려운 어휘와 문법이 필요 없음을 알지만 만남은 더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나는 지하철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런 날에는 그녀도 줄넘기에 몰두하고 있지 않을까. 나는 골목 귀퉁이에서 묵묵히 줄을 돌리는 그녀를 상상했다. 지구를 벗어났다 되돌아오는 그녀의 실루엣은 고독했고 그때야 나는 우리가 고독을 나눠 가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둘은 한때 우리였다가 이제 우리를 벗어나는 중이었으므로. 우리가 나눠 가진 고독의 무게 또한 비등할 것이었다. 한 번에 하나, 그렇게 계속하다 보면 이단 뛰기가 가능해지고 삼단뛰기도 능숙해지지 않을까. 하나, 하나, 하나. 줄은 공중에서, 바닥에서, 수시로 정지했다. 

(줄넘기 中에서)


  「줄넘기」의 '나'는 삼 년 동안 만난 그녀에게 지겹지 않냐는 질문을 끝으로 헤어짐을 통보받는다. 그가 하는 일이란 밤의 공원에 나가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둘러보는 것이다. 한밤중에 선글라스를 끼고 줄넘기를 하던 노인이 말을 걸어온다. 10년째 줄넘기를 하고 있다는 노인은 그에게 줄넘기를 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한다. 700개를 뛰고 노인과 대화를 하면서도 '나'는 노인이 왜 선글라스를 끼는지 눈치채지 못한다. 

  사람들의 표정을 들여다보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다. 대화를 할 때 상대의 눈을 보고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데 어떤 사람의 눈은 쉽게 쳐다볼 수가 없다. 눈을 보고 표정을 살피는 대신 딴 곳을 응시하고 고개만 기계적으로 끄덕인다. 김혜진의 소설 속 인물들은 상대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한다. 그들의 대화는 어긋나고 어떤 순간에는 해야 할 말조차 하지 못하는 지점에 다다르기도 한다. 바로 앞 상대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게 만드는 그들이 가진 생활의 우울과 피로들을 상상한다. 

  한 번에 하나,  「줄넘기」의 노인은 '나'에게 줄넘기 넘는 요령을 그렇게 알려준다. 노인이 왜 선글라스를 끼고 한 밤에 줄넘기를 하는지 노인의 동호회 회원들을 만나고 나서 알게 된다. 헤어진 연인의 집 앞에 가서 우편함에 들어있는 고지서를 확인하는 '나'. 그 요금들을 다 내주면 더 좋겠다는 연인. 세상의 비밀과 놀랄만한 이치를 한꺼번에 알 수 없다. 줄넘기를 돌리다 보면 줄넘기를 돌리는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세상의 뒷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뒷면 같은 김혜진의 소설들. 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내가 미처 들여다보지 못한 사람들의 오늘이 소설의 뒷장에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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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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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주 먼 섬』의 문장은 인물들의 상처받은 속내를 다독이느라 머뭇거리고 주저한다. 정미경은 그 자신이 소설과 인물을 만들어내는 자라도 그들을 대하는데 조심스럽다. 섬에서 살고 섬으로 도착한 자들의 사연을 쉽게 말하려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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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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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을 부른다. 낙엽이 짓밟혀 흔적조차 남지 않은 마른 길을 걸어갈 때. 마주 앉아 밥을 먹다가 말이 끊어질 때. 붉은 달이 뜬 걸 보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오늘을 쉽게 넘기려 들 때. 타인에게는 결코 보여줄 수 없는 표정을 숨기느라 속이 타들어갈 때 고요히 이름을 불러본다. 두 음절의 단어를 뱉고 나면 바람이 불어와 젖은 마음들을 말려주고 떠난다. 불안은 잠시 수그러들고 고통의 얼굴을 외면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시간은 착실히 적립되어 달력을 찢어내는 일이 가장 귀찮은 일이 되곤 한다. 어떤 나무들은 벌거벗은 제 몸을 드러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데 나는 딱딱한 가면을 쓰고도 눈을 맞추지 못하고 말을 더듬기만 할 뿐이다. 언어는 빈 공간으로 사라지고 이야기의 파장이 남는다. 무지개색으로도 나의 산 영혼을 위로하지 못하는 빛의 공허함이 번진다. 

  어깨에 들어차는 한기를 이기지 못한다. 한파 뒤에 찾아온 영상의 날씨에도 춥다는 착각에 빠져 산다. 춥지 않다. 이불 두 어채가 바닥에 깔려 있고 버튼을 누르면 온수가 쏟아져 나온다.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언제나 자신은 공평했다는 듯 태양은 자신의 열기를 우주 밖에서 쏘아 주고 있다. 빨래는 반나절만에 마르고 빛이 들어온 자리에 발바닥을 대고 있으면 따뜻하다. 추웠다. 그 겨울의 긴 날들은 수도가 터지고 얼지 않은 수도에서 길어온 물을 데워 씻었다. 남극의 펭귄들이 허들링을 하며 추위를 이기는 다큐를 보면서 이곳은 도대체 왜라는 의문이 들 만큼 그 방은 한기로 가득했다. 전기난로 불이 새어 나가지 않게 여름 이불로 창문들을 막았다. 붉은빛을 보고 문을 두드려 난로를 쓰고 있느냐는 주인의 방문을 받고 싶지 않았다. 새어 나갈 빛도 들어와야 할 빛들의 자리조차 마련할 수 없었던 겨울의 긴 시간들 때문에 지금 춥다. 

  소설가 정미경의 『당신의 아주 먼 섬』은 살아 있는 자들이 안고 가야 할 기억에 관한 질문과 대답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바닷물이 쓸려 나가면 건너서 섬과 사이를 갈 수 있는 포도알을 뿌려 놓은 듯한 섬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서 기억들은 만난다. 지하철과 빌딩으로 들어찬 도심 속에서 수업이 시작됨과 동시에 잠이 드는 텅 빈 시간 속에서 도망친 지친 기억들은 섬에서 만난다. 말하고 싶지 않아도 떠들어야 하고 듣고 싶지 않아도 신중하게 듣고 있다는 포즈를 취해야 하는 작위의 공간에서 벗어난 그들의 이야기는 소금밭에서 풀어진다. 

   『당신의 아주 먼 섬』의 문장은 인물들의 상처받은 속내를 다독이느라 머뭇거리고 주저한다. 정미경은 그 자신이 소설과 인물을 만들어내는 자라도 그들을 대하는데 조심스럽다. 섬에서 살고 섬으로 도착한 자들의 사연을 쉽게 말하려 들지 않는다. 독자에게 충분히 호흡하고 생각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문장의 템포를 늦춘다. 느린 문장의 결을 더듬어 따라가면 현실의 시간은 밀려나고 우리가 살았던 겨울의 과거로 이주해 있다. 과거에서 만나는 이우와 정모, 판도의 기억은 어느새 섬 안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섬에서 마주한 그들은 서로의 표정을 살피고 식사를 챙기고 읽었으면 좋을 책들을 건네주는 것으로 과거를 보듬는다. 


"아니, 색깔이 아니라 빛. 투명하고 눈부시고 설레는."

"사랑했구나."

"사랑? ······사랑인 줄은 어떻게 알아?"

"글쎄, 어떻게 알까."

"한 번도 안 해봤어?"

"그럴 리야."

"아저씨,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걸까?"

파도 소리가 한소끔 지나갔다.

"죽는다는 건 영혼이 우주 저 멀리로 날아가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 데칼코마니처럼 여전히 곁에 있는 것 같아. 나란히. 엄마 말처럼, 내가 정말 미친 건가?"


  이우의 시간은 태이와 함께 했던 과거의 시간에 묶여 있다. 현재를 사는 이우에게 밤은 불면을 이기지 못하고 바닷속으로 밀려 들어가고 싶은 어두움이다. 빛없는 밤을 견딜 수 없는 이우는 섬 안으로 들어와 미래의 자유와 꿈들을 유보하고 있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판도와 만나 밤바다의 파도 안에서 자신의 시간이 사라지길 바라고 있다. 태생이 불분명한 이우와 판도는 섬 안에서 존재의 불안을 나눠 가진다. 서커스에서 곡예를 배우다 버려진 판도는 이삐 할머니와 살게 된다. 누구라도 판도 앞에서는 비밀과 고민을 털어놓는다. 이우와 판도는 손바닥에 글씨를 쓰면서 언어와 온기를 주고받는다.

  소금 창고에 도서관을 짓겠다는 정모의 미래는 다가올 어둠으로 들어찰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내일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천국이 도서관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보르헤스의 전언은 정모가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빛이다. 막막하고 막연한 삶의 절망을 등 뒤로 섬으로 들어온 태원의 시간조차도 섬에서는 쉽게 밝아지지 않는다. 실패한 사랑의 흔적을 섬 안에서 발견하는 핏빛의 시간, 태원이 선택하는 미래를 섬은 조용히 덮는다. 

  '지나고 보니 아픈 것도 낙이고 힘든 것도 낙이'라는 이삐 할머니의 두서없는 소리를 듣고 이우는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 앞에서조차 울지 못하고 병원을 돌면서 불면증을 약을 타 먹어야 했던 이우에게 이삐 할머니는 살아가는 것의 당위를 무심히 흘려준다. 정미경이 그려내는 인물들은 생의 불안을 온몸으로 껴안는다. 과거의 시간으로 촉발된 고통으로 그들의 오늘은 형편없음으로 쓰인다. 날짜는 지워지고 기억은 더욱 선명해진다. 견딜 수 없는 기억과 실패를 가진 그들이 선택하는 것은 사랑이다. 너덜너덜하고 얼룩이 잔뜩 묻어 있는 오래된 책 같은 사랑. 정미경이 마지막까지 쓰고자 했던 섬 안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 『당신의 아주 먼 섬』. 문장 한 줄을 종이에 쓰고 빈 화면으로 옮기는 지난한 작업을 했을 소설가 정미경의 작업실에서 발견한 『당신의 아주 먼 섬』. 

  그 안에는 이제는 누구의 입에서도 말하지 않는 사랑을 손바닥 위에 쓰고 웃음 짓는 사람들이 있다. 기억에서 자유로워진 그들은 바다 위에 도서관을 짓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그 겨울의 방에서 빛을 모으고 싶었던 나는 견딜 수 없는 죽음의 고통을 사랑으로 바꾸고 떠난 정미경의 소설에서 이 생을 살아야 할 뜨거움을 받아 들었다. 이별하지 않고 이 별에서 사랑을 나누겠다. 이름을 부르고 함께 했던 아프고 힘든 순간들을 떠올리는 것으로 삶을 밀고 나가겠다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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