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지키려는 고양이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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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여러 번 이사를 다니면서도 끝까지 지키려고 했던 물건이 있었다. 책이다. 책. 상자에 넣으면 무게 때문에 찢어질 수도 있다는 이삿짐센터 아저씨의 조언에 따라 노끈을 사서 묶었다. 묶고 또 묶었다. 책은 마당을 점령했다. 압도적이었다. 큰 가구는 없었지만 트럭을 두 대나 불러야 했다. 책 때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다시는 책을 사지 않아야지 마음먹었다. 소설가 김연수는 책이란 꽂혀 있을 때는 모르지만 바닥으로 부려두면 그 양에 놀랄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맞다. 방바닥으로 마당으로 나온 책들은 주인도 모르게 자가 증식을 한 것처럼 불어나 있었다. 주인도 모르게라지만 주인이 전부 사다 나른 책들이다. 한심한 주인은 읽을 거라는 마음가짐으로 책들을 사서 모았지만 다음날이면 신간을 기웃거리기나 하면서 전에 사둔 책들을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방의 개수가 늘어나면서 책장도 같이 늘어났다. 어느 날, 사람이 먼저다, 책 때문에 공간 활용이 안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책들을 정리했다. 

  나쓰카와 소스케의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를 읽으면서 내가 정리한 책들의 운명을 생각했다. 그 책들은 어느 미궁에서 길을 헤매고 있을까, 주인을 만나 좋은 자리에 꽂혀 있기나 할까 걱정이 되었다. 책에도 운명과 길이 있다. 작가들을 사랑해 자신의 필명에 나쓰메 소세키, 가와바타 야스나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쓰메 소세키의 단편 「풀베개」 에서 각각의 이름을 따온 작가 나쓰카와 소스케는 책이 가지는 무한한 힘을 믿은 작가임에 틀림없다. 의사이면서 소설도 쓰는 작가는 책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읽히는지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 통해 드러내고 있다. 이름이 얼룩인 고양이는 책을 지키기 위해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는 린타로를 불쑥 찾아온다.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나쓰키 서점'에서 함께 살고 있는 린타로는 책을 좋아하는 고등학생이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할아버지와 살고 있다. 고서점을 운영하는 할아버지는 린타로에게 문학적 스승이다. 잘 팔리는 책이 아니라 선별하고 오래되어도 가치가 있는 책들을 취급하는 서점에서 그들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간들을 보낸다. 린타로의 일상이 흔들리게 되는 건 할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잠을 자면서 죽음을 맞이했다. 한동안 학교를 가지 않고 고서점을 정리하면서 보내는 그에게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말을 걸어온다. 자신을 얼룩이라고 밝힌 그 고양이는 갇혀 있는 책을 구해 달라고 말하면서 린타로를 미궁으로 데려간다. 

  책의 힘을 믿는가. 아니, 당신은 책에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린타로와 얼룩이 갇힌 책을 구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이 책은 인간의 말을 하는 고양이가 나온다는 판타지적 요소가 들어가 있을 뿐 우리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상황 설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많은 책을 읽는 게 목적인 남자, 읽은 책의 권수로 유명해지고 읽지 않은 책마저 과시용으로 장식장에 넣어두는 남자는 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그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린타로의 말을 들으며 가둔 책들을 해방 시킨다. 

  매일 쏟아져 나오는 신간들과 누구나 다 알만한 고전을 읽기에 사람들은 바쁘다. 그들을 위해 책을 읽는 것이 아닌 책의 줄거리를 요약하고 속독하는 방법만을 연구하는 학자. 책을 자르며 한 권의 책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내는 학자. 책의 처음과 중간, 끝이라는 과정을 알지 못하는 그는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책의 해체를 하는 사람이다. 린타로는 그가 듣는 베토벤의 음악을 빨리 감기한다. 음악을 빨리 감아서 들을 수 있는가. 그렇게 들은 음악을 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학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책이 무엇인지 깨닫자 책 자르기를 멈춘다. 

  책과 책 읽기에 관한 우화 같은 이 책의 인물들은 모두 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책을 좋아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도 사실은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책을 이용한다. 책이 살아남기를 바라며 인기 있는 책들만 골라 출판하는 출판사 사장. 이천년이 지나도 책의 효용만을 따져 본질을 외면당하며 괴로워하는 책 자신도 사람들이 자신을 읽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고양이 얼룩과 린타로가 감행하는 모험의 이유는 책이다. 일그러진 마음들 때문에 갇혀 있거나 잘리거나 버림을 받는 책들의 해방을 도와주는 그들은 책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들의 의무를 알고 있는 자들이다. 

  린타로는 책에는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는 말로 마지막 미궁을 빠져나온다. 이천년이 흐르고 다시 이천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 책이 남아야 할 사명을 제시한다. 어리석은 주인을 만나 정리당하고 폐기된 책들에게 그동안 고마웠다는 감사 인사를 담아 보낸다. 책을 읽었기 때문에 책들이 가진 마음에 위로받았고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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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무래도 아이는 괜찮습니다
사카이 준코 지음, 민경욱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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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윗집 아이들은 뛴다. 뛰다가 넘어졌는지 울고 문을 쾅쾅 닫는다. 음악도 텔레비전 소음도 없는 우리 집에서 그 소리들은 선명하게 들린다. 소리를 지르기도 하는데 목이 쉴까 봐 걱정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웃으면서 인사해 주고 싶은데 얼굴 근육이 망가졌는지 웃질 못한다. 가깝거나 먼 사람들의 프로필 사진들에는 어김없이 아이들이 등장한다. 특별한 날을 기념하는지 놀이동산에 가 있거나 꽃밭에서 활짝 웃고 있다. 아이들은 금방 자라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갔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그렇구나, 초등학교에 들어가 소풍을 가고 운동회를 할 나이들이 된 것이구나.

  아는 분이 가끔 일하는 곳에 아이를 데려온다. 처음에는 웃으며 놀아주고 안아준다. 방긋방긋 웃는 모습이 귀여워 질문을 한다. 웅얼웅얼 말하지만 신기하다. 오분 정도 지나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위험한 물건을 만지는 것을 막아야 하고 내 얼굴이 무서운지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를 감당할 수 없어서이다. 사카이 준코의 산문집 『아무래도 아이는 괜찮습니다』에서 그녀는 자신의 조카를 '와도 좋고 가도 좋은' 존재로 표현한다. 자신의 아이가 아닌 남의 아이는 오면 좋지만 가면 더 좋은 것이겠구나, 아이를 귀여워하는 척하는 나는 그런 공감을 한다. 

  독신이고 아이도 낳지 않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생활상을 글로 써내는 사카이 준코의 『아무래도 아이는 괜찮습니다』를 다 읽고 나면 제목을 잘 지었구나 생각한다. 아무래도이다, 아무래도 우리에게 (독신 혹은 아이가 없는 사람들) 아이는 괜찮은 것이다 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사카이 준코는 오랜만에 만난 모임에서 연하장을 두 가지로 만든다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이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가족사진을, 없는 이에게는 사진이 빠진 글만 적어서 보낸다는 것이다. 아이가 없는 이를 배려한다는 취지이지만 정작 옆에 앉은 아이가 없는 사카이 준코는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있다. 아이가 없는 이를 불쌍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들은 그녀는 가족사진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여긴다. 

  일본 사회는 심각한 저출산에 시달리고 있다. 정부가 나서서 출산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이 만만치 않음을 절감한 젊은이들은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으로 하고 있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재력과 친정의 조력이 필요한 일임을 우리 모두 알고 있는데 정부만 모르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유교 사회의 뿌리를 가진 일본은 출산과 양육을 둘러싼 의견들이 점점 우경화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소노 아야코 작가는 출산하면 일을 그만두라고 여성은 아이가 태어나면 퇴직해 몇 년 동안은 양육에만 전념해야 한다, 출산휴가 제도를 두고 회사 입장에서는 손해를 너무 많이 본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여성 지식인들의 이런 오른쪽으로 치우친 발언들이 출산과 양육의 길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아베 내각에서 장관으로 임명된 여성들을 소개한 신문 기사에서는 그녀들의 자녀의 수를 명시했다. 일하는 여성으로서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본 사회의 모습을 지적한다. 페이스북과 블로그에는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모습들을 공개하는 것이 출산율을 올리는 것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진지한 분석도 한다.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들이 그 모습들을 보면서 나도 낳아서 훌륭하게 키워 볼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성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상실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과거에는 결혼한다 아이를 낳는다 아이를 훌륭하게 키운다가 공식처럼 되어 있지만 현재는 그것들이 선택 사항으로 변해 있다. 결혼을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이를 낳는 것도 키우는 것도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국가가 강제할 수 없는 사항이 된 것이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에 대해 걱정과 안쓰러움을 받아야 하는 피로를 사카이 준코는 이 책에서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직장에서 아이를 가진 여성들을 차별했지만 앞으로는 아이가 없는 여성들을 차별하는 날이 올지' 도 모른다는 문장에서 경악했다. 아이를 키워 본 경험이 없는 여성에게는 경험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미래 사회. 미래가 아닌 오늘의 사회에서 제도권 안으로 들어갈 시도조차 하지 않는 누군가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질문 세례를 받고 안타까움의 시선을 느끼고 있다. 

  자식이 없어 죽으면 장례를 치러줄 사람이 없어 하나밖에 없는 조카에게 그 일을 맡겨야 한다는 걱정에 시달리고 독신 여성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를 알고 싶어 오키나와에 가서 장례 풍습을 공부한다. 사나 죽으나 혼자라는 것을 터득하고 아이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를 실천하는 사카이 준코. 동물을 키워 볼까도 생각하지만 살아 있는 것에 책임을 질 수 없는 자신을 떠올리며 그만둔다. 선인장도 죽였다는 고백과 함께. 아이들은 귀여운 아이와 귀여워해 줄 수 없는 아이가 있다는 것을 가감 없이 말하고 사촌이 갖고 싶다는 조카에게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견디라고 말하는 그녀는 아무래도 아이는 괜찮다고 결혼과 출산을 강요하는 사회에게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다. 

  오늘도 윗집 아이들은 뛰지만 새 나라의 어린이들인 듯 일찍 잠자리에 들었나 보다, 조용하다. 자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귀엽다는데 볼 빵빵 그 모습을 상상해본다. 굿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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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시선 K-포엣 시리즈 4
허수경 지음, 지영실, 다니엘 토드 파커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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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눈 속에 가끔 달이 뜰 때도 있었다 여름은 연인의 집에 들르느라 서두르던 태양처럼 짧았다

당신이 있던 그 봄 가을 겨울, 당신과 나는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 우리의 계절은 여름이었다


(레몬 中에서, 허수경)


  시를 읽는 밤은 어두웠다. 바람을 막느라 헌 이불을 창문 위에 걸어 놓고 난로 불을 들키지 않으려고 붉은 전등을 켜두었다. 바깥에서 보면 방 안의 붉음은 희미했다. 눈이 침침해져 눈물을 흘렸다. 슬프지 않은데도 눈물은 자주 터져 나왔다. 슬프지 않아서 눈물은 더욱 억울했다. 저녁의 허기를 달래려고 시장에 갔다가 서점에 들어가 몇 만 원어치의 시집을 사서 돌아오던 밤이었다. 시인이 되지 못했기에 시를 읽었다. 시인이 되는 것의 의미를 지워갔다. 내가 쓴 시들이 아니어도 시집은 내 것이었다. 한 끼 식사와 맞바꾼 시집들에 이름을 적고 날짜를 적었다. 책꽂이에 꽂힌 시집을 꺼내 들면 겨울의 기억이 와락 몰려왔다.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나이를 먹고 내야 할 세금의 액수가 불어났다. 건강보험료가 오르자 공단에 전화를 걸었다. 재산 없음, 직업 없음, 자동차 없음을 증명하고 나니 하루가 지나있었다. 얼굴을 알지 못해도 이야기는 술술 나왔다. 없음이라는 항목에 체크를 하기 위해 나의 가난과 나의 어리석음을 증명했다. 시집을 꺼내 밑줄을 쳤다. 난해한 시는 읽지 못했다. 읽어도 알 수 없는 시들은 관공서에 내야 할 서류의 문장들 같았기 때문이다. 열심히 들여다보아도 서류 속 문장들을 독해할 수 없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을 고르는 것으로 시를 읽었다. 시어에 동그라미를 치고 시인의 말을 여러 번 읽어나갔다. 시집 뒤에 실린 해설을 읽다가 잠드는 것으로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였다. 

  전화를 기다렸다. 간단한 안부 문자라도 좋았다. 광고 문자도 오지 않아 종일 전화기는 잠잠했다. 침묵을 강요당한 사물들을 바라보며 서쪽으로 지는 해를 아쉬워했다. 서쪽을 보고 있는 집에서 겨울 해는 짧았고 여름 해는 길었다. 춥고 더웠다. 지구의 자전 방향을 바꿀 수 있다면. 따뜻하고 시원할 것이었다. 책들이 사방의 벽을 에워쌌다. 여름이 되자 낡은 책들을 꺼냈다. 마당 위의 평상에 놓아두고 읽었다. 지붕 위에 물을 뿌리면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연습장 한 권을 꺼내 오늘의 시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한 편을 쓰면 너도 한 편을 쓴다. 두 편의 시를 나눠가지는 오늘. 

  

서는 것과 앉는 것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까

삶과 죽음의 사이는 어떻습니까

어느 해 포도나무는 숨을 멈추었습니다


사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살았습니다

우리는 건강보험도 없이 늙었습니다

너덜너덜 목 없는 빨래처럼 말라갔습니다


(포도나무를 태우며 中에서, 허수경)


  내륙의 여름은 전쟁이었다. 개미에 물려 허벅지가 부풀어 오르고 냉장고 안의 음식이 상했다. 땀을 흘리며 밥을 먹는 대신 시집을 냉장고 안에 넣었다. 차가운 시집을 꺼내 말랑해진 종이를 넘기며 시베리아를 상상했다. 비에 젖은 책들을 들여놓고 토란 잎들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가지고 싶었다. 실체가 있어도 만져지지 않는 비애였다. 그리움은 숨길 수 없었다. 그때까지 아무도 연락해오지 않았다. 뚱뚱한 사람은 슬픈 사람이다. 고독과 외로움이 쌓인 사람이다. 당신이 혼자라는 것을 잊기 위해 맹렬히 음식을 사랑한 사람이다. 사랑은 그늘로 당신을 데리고 간다. 처진 뱃살을 주무르며 태양을 바라본다. 우주 안의 먼지, 출발선에 서서 뛰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나중에 도착한 별빛.

  숨어서 단팥빵을 먹으며 문학을 시작한 뚱뚱한 어린 소녀, 허수경 시인의 산문집에 그려진 그 소녀의 저녁. 시인의 어린 시절 속 모습에서 출발한 문학이라는 실존. 숲속 나뭇잎에 적혀 있을 것 같은 시들. 허수경의 시는 참혹한 아름다움을 시를 쓰지 않고는 보낼 수 없는 한 시절을 그리고 있다. 붉은 불빛 아래에서 읽었고 벌레들과 싸우며 시집 여백에 경상도 사투리로 적힌 시를 옮겨 적었다. 진주 남강의 저녁은 더위를 피해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국어로 쓴 시들은 영어로 옮겨졌다. 어떤 이에게 한국어는 그림으로 보일 것이었다. 독일에 사는 시인이 모국어와 고향의 말을 잊지 않기 위해 가끔 우리에게 '술 냄새가 나는 오래된 날씨를'(돌이킬 수 없었다 中에서, 허수경) 보내온다. 술 냄새 나는 날씨를 받아들고 고개를 숙이고 가로등이 없는 길로만 걷는다. 기차역에 앉아 도착하지 않은 소식을 기다린다. 퇴근이 늦은 누군가의 집에 불이 켜지자 안심한다. 불이 켜지고 어두워지는 순간을 목격하는 일들이 허수경의 시를 읽는 이유가 된다. 켜졌다가 꺼진다. 세계의 뉴스는 전쟁과 소요의 일들을 기록하느라 시 한 편 실을 수 없었다. 어린 소녀와 죽어가는 인간의 말을 해독하려는 안간힘이 시인의 기록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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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읽는 시
김남희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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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가는 먼 집  


                                                                                                         -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던 여권을 꺼낸다. 알고 있다. 내가 가진 여권으로는 어디로든 갈 수 없다는 것을.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구한 기념으로 만든 여권이었다. 나 취직했어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하기도 애매한 곳에 일자리를 얻고 마음이 허전했다. 생활비를 받을 수 있는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부랴부랴 구한 곳이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해야 하는 곳. 교통비가 한 달 집세보다 많이 나왔다. 취업 기념 파티 대신 사진관에 들어가 사진을 찍고 시청에 가서 여권을 만들었다. 적금을 부어 여행을 가야지. 가장 긴 유효 기간을 가진 여권을 발급받았다. 

  기간 만료일로부터 일 년이 지났다. 십 년 동안 나는 아무 데도 가지 못했다. 가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고 싶지만 가지 못했다는 것이 맞다. 과감하게 일을 그만두고도 이불 속에 웅크리고 집 바깥을 나가지 않았다. 현실은 벅찼고 감당해야 할 미래의 일들이 나를 아둔하게 만들었다. 해야 할 말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벽에 붙은 세계 지도를 한동안 쳐다보곤 했다. 여행 가방을 꾸리고 비행기 표와 숙박 시설을 예약하는 나를 상상하기도 했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여행기를 읽었다. 그 책들 안에는 북반구의 오로라가 펼쳐지고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낯선 이방인과 나누는 대화가 실려 있었다. 도둑 맞을까 허벅지에 돈을 숨기고 국경을 지날 때 총을 찬 군인들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했던 순간들이 들어 있었다. 초점이 흔들린 풍경들을 바라보며 나는 열패감에 시달렸지만 글자로 그려지는 여행의 장면들을 상상하면서 일상을 견뎠다. 달은 늘 우리에게 같은 면만 보여준다. 지구인인 우리는 달의 뒷면을 목격할 수 없다. 달은 공전과 자전을 같이한다. 지구라는 별을 바라보며 달은 혼자 하루와 일 년을 돈다. 나는 달이다. 나는 묵묵히 내일을 바라보며 일하는 모습만을 보여주며 돌고 있다. 

  일 년을 일하지 않고 집에서만 지낸 적이 있다. 가까운 일본을 가볼까.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유럽으로 떠나볼까. 고민했지만 가지고 있는 돈을 아껴서 쉴 수 있을 때까지 쉬기로 했다. 낯선 곳에 가서 길을 헤맬 용기도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외로움을 맛볼 자신도 없었다. 책상 서랍 속에 숨겨둔 여권의 기한은 줄어들고 여행기는 쌓여 갔다. 국경을 넘는 게 생각보다 쉬웠다고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며 스스로를 반성했다는 여행기의 기록으로 떠나지 못하는 나를 다독였다. 

  여름휴가가 다가오면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고 싶어서 그들의 대화에 끼고 싶어서 제주도로 놀러 갈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 말을 꺼낼 때 나는 제주도에 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항공사 사이트에 들어가 회원 가입을 하고 날짜에 맞추어 비행기 시각을 알아봤다. 제주도 지도를 신청했다.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다. 휴가 계획을 듣고 행선지를 이야기 하는 그 대화 속에서 함께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여러 번 일을 옮겨 다니는 동안 나는 말수가 줄어들고 관계라는 것을 믿지 않게 되었다. 내가 한 말들과 행동들이 나를 향해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상황들을 반복적으로 겪었다. 그때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당황하면서 지냈다. 표정을 숨길 수 없어 화장실에 들어가 오래 앉아 있었다. 

  가장 가까운 이에게 제주도라도 가자고 호기롭게 말했지만 그 해 여름 집에 앉아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새로 나온 책들을 읽은 것이 전부였다. 책은 그렇게 언제나 내 거짓말을 받아주고 허풍을 들어주었다. 가지 못한 길들이 책 안에서 펼쳐지는 것을 보며 나는 자유를 느꼈다. 물리적인 거리를 가늠하지 않아도 되고 시간을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책 안의 길 위에서 나는 당신과 만날 수 있었다. 

  김남희의 책 『길 위에서 만나다』는 시가 우리 삶에서 어떤 화학 작용들을 불러오는지 생의 순간들마다 어떤 얼굴로 우리를 길 위로 데리고 가는지 알 수 있는 책이다. 시를 읽으며 작가는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길에 오를 때 작가의 여행 가방에는 시집이 들어 있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시와 편지들을 공책에 적어 보냈다. 지평선 밖에 볼 수 없는 길 위에서 모래바람 밖에는 느낄 수 없는 길 안에서 여행자는 시를 읽으며 이 별에서의 여행을 계속한다. 노래는 시가 되어 사랑이 남긴 이별의 고통을 잊게 해주고 혼자 먹는 밥상을 위로해준다. 내 방 여행자인 나는 상상한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순한 얼굴과 불면으로 뒤척일 지구 반대편에서 여행자가 느꼈을 고독의 무게를. 

  『길 위에서 만나다』는 특별한 여행기이다. 한 편의 시와 여행에서 느낀 생각들이 정갈한 언어로 쓰인 이 여행기는 지구라는 푸른 행성의 반짝임을 활자 속에서 느끼게 해준다. 시집에 밑줄을 긋고 마음에 닿는 문장들이 나오면 여백에 옮겨 적었다. 마침표가 찍히지 않은 단어들이 나를 고통과 환희의 골목으로 데려가 주었다. 시를 이해하기 보다 오독했다. 시를 쓰기에 나는 지극히 산문적이고 모자랐다. 직관력 대신 지구력만 좋은 사람이었다. 

  허수경의 시 「혼자 가는 먼 집」을 읽으면 당신 이라는 말 다음에 나오는 킥킥 때문에, 시인의 출생지 진주 남강의 불빛을 걸으며 손을 잡았던 기억 때문에, 나는 환해진다.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어 나는 당신이라는 행성을 꾸준한 주기로 돌고 있다. 나의 앞면은 당신이 볼 수 있는 최대치이다. 그 앞면에 쓰인 나의 이야기를 당신이 읽어주길 바라면서 시를 읽고 습작을 했다. '그러나 킥킥 당신'은 나의 뒷면으로 다가온 유일한 탐사선이다. 뒷면에 쓰인 장황하고 비문으로 얼룩진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준다. '무를 수도 없는 참혹' 앞에 선 우리는 길에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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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쓰게 된다 -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
김중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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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중혁의 소설들을 좋아한다. 『펭귄뉴스』부터 시작해서 『가짜 팔로 하는 포옹』까지 출간된 소설들을 모두 사서 읽었다. 산문집은 더 좋아한다. 소설가들의 산문집이란 허구의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들려주는 내밀한 수다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설가가 들려주는 생활의 이야기들, 즐겨 듣는 음악과 감명 깊게 읽은 책과 본 영화들을 알아가는 즐거움을 산문집에서 찾고자 한다. 『뭐라도 되겠지』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지은 제목 같기도 해서 좋아한다. 『모든 게 노래』는 제목처럼 책의 빛깔이 노랗다. 세상 모든 게 노래, 그래 어떤 날은 세상이 노랗게만 보일 때가 있다. 

  『좀비들』은 두 번 읽었다. 종이책으로 읽고 전자책으로도 읽었다. 소설 속 인물인 뚱보130을 좋아한다. 한 작가에 대한 글을 쓰면서 좋아한다고 여러 번 쓸 수 있어서 좋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별게 있나.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이 나올 때 서점사에서 주는 파란 공책의 굿즈를 받았다. 글을,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응원이 담긴 파란 공책. 필기도구와 좋아하는 소설들이 소개되어 있었던 공책. 중혁 작가는 소설을 쓰기 위한 방법들을 몇 가지 아주 조금 제시해 놓고 (더 알면 다친 다는 듯) 이 정도 알려줬으니 당신도 한 번 써보라는 듯 줄 조차 없는 백지들을 남겨 놓았다. 

  써보라고, 인물을 만들고 줄거리를 생각하고 손에 쥐기만 하면 술술 써질 것 같은 필기도구들을 알려줬다. 그 공책에 이야기를 적었으면 좋았겠지만 한동안 책꽂이에 꽂아두고 다른 책들을 읽고 딴생각에 잠기곤 했다. 파란 공책에서 못다 한 중혁 작가의 창작의 비기와 연장들, 시험을 풀듯 다음 대화를 생각해야 하는 문제들이 담긴 창작서가 나왔다. 역시 제목도 무한 긍정과 초사이언적인 희망이 담겨 있다. 『무엇이든 쓰게 된다』. 한때 거실 곳곳에 걸려 있던 하면 된다 라는 가훈처럼, 뭐라는 거야, 하면 된다니 차라리 라면 된다가 더 웃기겠군 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제목으로 오인받을 수도 있는 제목으로 창작서를 내놓을 수 있는 대체 불가의 당당함을 좋아한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문장들이 거슬린다. 작가는 『무엇이든 쓰게 된다』에서는 한 문장 안에 같은 단어들이 들어간 문장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뿐이다. 이 책은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하고 구성과 인물을 만드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는지 세세하게 나열하지 않는다. 다른 소설 쓰기의 창작서와는 다르게 이 책은 작가가 글을 쓸 때 사용하는 도구들로 시작한다. 연필과 독서대, 모니터, 공책과 메모롤, 사용했던 컴퓨터들의 역사로 출발한다. 근사하다. 나랑 비슷하다. 내 책상 서랍에도 연필과 펜들이 색깔별로 가득 들어 있다. 색이 연하고 곧 품절될 것 같아서 형광펜은 같은 색으로 세 개에서 네 개씩. 펜텔 그래프와 유니 샤프, 누를 때마다 샤프심이 쓰기 좋게 나온다는 구루토가, 스테들러는 당연히 샤프와 연필이 같이 있다. 수첩과 포스트잇, 핸디 테이프, 메모지, 공책은 서랍과 책꽂이를 점령했다.

  쓴다. 쓸 것이다. 언젠가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나는 쓰고 싶은 사람이니 당연히 쓸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글쓰기 연장들을 사서 모았다. 좋은 글을 쓰려면 많이 읽어야 한다. 샀다. 읽을 것이다. 샀는데 계속 신간이 나온다. 또 산다. 책이 쌓이고 있다. 어느 순간 책이 쌓여 가는 걸 즐긴다. 머리맡에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이 놓여 있다. 겨울이라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쳐도 바람이 들어온다. 도서관 책들은 커튼을 눌러줘서 바람이 들어오는 걸 막아준다. 책의 쓸모를 발견한 순간이다. 쓰고 읽는다. 읽고 쓴다. 

  『무엇이든 쓰게 된다』는 여느 창작서와는 다르다. 일단 재미있다. 작가의 연장들을 구경하는 재미, 글쓰기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작가라는 사람도 나와 다르지 않구나 생각하게 하는 재미, 글쓰기 책인데 실전 그림 그리기라는 부분이 있어 그림을 못 그려도 그려보라고 부추겨서 우스운 그림을 그리게 만드는 재미, 수능 영역처럼 만들어진 대화 완전정복 문제를 풀면서 역시 나는 찍기도 못하구나 답 사이로 막 피해 가는 멍청함을 한 번 더 확인하는 재미. 

  소설을 쓸 것이라고 잘난 척만 해댔지 맞춤법, 비문 없이 문장 쓰기, 문법, 인물 묘사, 구성 짜기, 문단 나누기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이게 문제다. 알지 못하면 열심히 배우면 되는데 잘 알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배우지 않는다.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라고 어물쩍 넘기는 것이다. 대신 나는 많이 읽잖아. 대가들이 그랬어, 무조건 읽으라고. 열심히는 읽는데 머리를 쓰지 않으니 고급 기술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작가들이 쓰는 창작서들을 읽곤 했는데 읽고 나서는 잊어버렸다. 잊고 비문을 써대고 마음대로 문단을 나누고 묘사는 귀찮아서 진술로만 썼다.

  '창작의 비밀을 알아내려는 마음과 창작의 비밀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 사이의 에너지가 글을 쓰려는 동력이 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라는 문장을 읽고 감동했다. 소설 작법서들을 읽으며 알고 싶었던 창작의 비밀을 무식한 나는 알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소설을 못 쓰는 것이다, 하지만 기술 따윈 몰라도 된다, 쓰고 싶은 대로 쓰는 현실이 절망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무엇이든 쓰게 된다』에서 확인했다.

  『무엇이든 쓰게 된다』의 예언은 맞았다. 『무엇이든 쓰게 된다』를 읽고 나는 나만 즐거운 이 글을 썼다. 남들이 읽어주지 않아도 전기 낭비를 하고 있어도 차라리 이러고 있을 시간에 인기 드라마라도 보지 그래라는 핀잔을 들어도 쓰고 싶은 문장들이 있는 것이다. 문장들은 대책 없는 낙관적인 나의 미래에 주문을 걸어온다. 뭐라도 되겠지 그러니까 무엇이든 쓰게 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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