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달의 영휴
사토 쇼고 지음, 서혜영 옮김 / 해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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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토 쇼고의 『달의 영휴』 속 주인공 루리 씨는 그녀의 애인 미스미에게 자신은 시험 삼아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2017년 나오키 상을 받은 『달의 영휴』는 흔하디흔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루리 씨는 자신이 죽을 때 유서를 남기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 소설은 루리 씨의 아름다운 유서 같은 소설이다. 영휴라는 말은 차고 기울다는 뜻이다. 생소한 단어이지만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이 단어가 소설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죽음의 방식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나무처럼 씨를 뿌리고 자손을 남기고 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달처럼 죽었다가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나고 죽는 것이다. 루리 씨는 책에서 본 죽음의 이야기를 미스미에게 들려준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과 그 순간들을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인물들을 그리는 사토 쇼고는 전작 『 Y 』에서도 집요한 사랑의 방식을 이야기한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사랑을 하는 것은 다른 세계에 살아 있는 내가 이루어낸 것이라는 기발한 발상을 보여주었다. 추리 소설인 줄 알고 읽었다가 추리 소설을 가장한 사랑 이야기를 풀어 놓는 소설적 구조에 놀랐다.
  『달의 영휴』는 이야기가 복합적으로 이어져 있다. 오사나이는 두 모녀를 만나기 위해 도쿄 스테이션 호텔로 향한다. 자신을 보고도 거리낌 없이 말을 걸어오는 루리라는 이름의 소녀와 그녀의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이 가져온 물건을 건네준다. 오사나이의 과거의 시간들이 펼쳐지면서 루리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들의 믿기 힘든 일들이 펼쳐진다.
  우리 모두는 죽어본 적이 없다. 죽어본 경험이 없는 우리는 죽은 후의 일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 소설은 죽은 다음에 인간은 어떻게 될까라는 의문으로 이야기들이 쌓여간다. 첫 번째 이야기의 시작은 미스미의 연인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이다. 비 오는 출근길 그는 가게 앞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여자를 발견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티셔츠를 내밀어 머리를 닦게 해준다. 사랑은 이렇게 시작한다. 의미 없는 일들이 모든 의미로 다가온다. 미스미는 한 번 더 그녀를 만날 것을 기대한다. 영화관에서 재회한 그들은 이름을 주고받는다. 그녀의 이름은 루리. ‘루리(瑠璃)도 하리(瑠璃)도 빛을 비추면 빛난다’의 루리의, 한자를 쓴다. 이 말은 이후에 그들이 재회하는데 단서가 된다.
  그들은 이름을 알고 다시 한 번 만나서 영화를 보고 밤의 길을 걷는다. 사랑은 시작되지만 그들 앞에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놓여 있다. 루리 씨는 남편이 있는 유부녀이고 미스미는 대학 신입생이다. 그녀는 자신의 문제를 털어놓진 않지만 미스미에게 그들이 가지는 만남의 어려움을 우회적으로 돌려 표현한다. 미스미가 자신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면 시험 삼아 죽어 볼 것이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좀 더 젊은 미인으로 태어나 새로운 만남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한다. 얼마 후 루리 씨는 지하철에서 사고에 휘말려 죽게 된다. 이후 미스미는 방황과 좌절의 시간을 보낸다.
  도쿄 호텔로 두 모녀를 만난 오사나이 씨는 오래전 자신의 아내와 딸을 사고로 잃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딸이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갑작스러운 고열에 시달린다. 아내는 딸이 아프고 나서의 행동이 이상하다고 오사나이 씨에게 말하지만 그는 흘려듣는다. 루리라는 이름을 가진 그 딸은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역에 가기도 한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자유롭게 여행을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루리에게 해준다. 터널에서 죽음을 맞은 두 모녀는 다른 지역으로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오사나이 씨 앞에 시간이 흘러 미스미가 찾아오고 젊은 날 자신의 연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사나이 씨의 딸과 이름이 같은 연인의 이야기를. 루리 씨는 죽었지만 같은 이름을 가질 수 있는 여자아이로 태어나 환생했다는 믿기 힘들 이야기와 함께. 오사나이 씨의 딸 루리는 열병을 앓고 나서 인형에게 미스미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이의 눈빛이 아닌 어른의 눈으로 자신을 본다는 아내의 이야기로 떠올린다. 어린아이 답지 않은 행동들을 보였던 것들도 기억해 낸다. 오사나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아이의 이름도 루리. 전생의 기억들을 가지고 태어난 루리들은 병을 앓고 나서 젊은 날 만났던 미스미를 만나기 위해 가출을 감행한다. 삼대에 걸쳐 태어난 루리들은 모두 젊은 날 루리 씨의 기억으로 살아간다. 첫번째와 두번째의 루리는 죽었고 마지막일지 모르는 루리가 오사나이 씨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야기가 마지막으로 흘러 갈수록 이 소설의 핵심은 죽어서도 이루고 싶은 사랑의 집착을 달의 환생에 빗대어 아름답게 표현했다는 것에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쌓여 있는 이야기를 하나씩 끄집어낼수록 진부한 주제와 소재를 치밀한 구조와 구성으로 풀어낸 소설이라는 것에 놀라움을 더한다. 읽은 재미를 선사하면서 사랑의 이면을, 우리는 결코 볼 수 없는 달의 뒷면을, 『달의 영휴』는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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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쓰여 있었다 - 어렸을 적이라는 말은 아직 쓰고 싶지 않아, 일기에는…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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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스다 미리의 산문집 『그렇게 쓰여 있었다』의 서문은 '이 세상에는 자신을 닮은 사람이 최소한 세 명은 있다고 한다'로 시작한다. 과연 그럴까 하고 생각해보니 마스다 미리처럼 나와 닮은 사람으로는 엄마가 떠오른다. 말하는 것과 생활 방식이 똑같다. 그리고 카카오 프렌즈의 라이언이 생각난다. 안경 쓴 라이언은 나랑 정말 닮았다. 생각이 없을 것 같은 멍한 표정이 비슷하다고 친구가 말해주었다. 자세히 보니 닮았다! 오래 보고 자세히 봐야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이 진짜다고 느낀다. 하나를 더 찾아야 하는데 이건 다시 고민해봐야겠다. 
  

곳곳에 나를 닮은 사람과 물체가 존재하는 모양인데, 그 수가 세 명 또는 세 개를 훌쩍 넘는다.
하지만 나라는 인간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밖에 없다. 세계 어디를 찾아봐도 진짜 나는 하나인 것이다.


  비슷한 나들은 많지만 정작 나라는 인간은 한 명뿐인 것이다. 닮은 것들이 나를 만들어간다. 이 세계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있고 좋아라고 느끼면 그만이다. 왜 좋아하고 왜 집착하는지 이유를 물어온다면 담백한 대답을 해줄 수가 없다. 나와 닮은 것들을 찾아가는 여행,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 세계를 살아가야 하는 이유들의 대답을 듣는 것이다. 마스다 미리의 글과 만화를 읽는 동안 나는 좋아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기쁘다.
  그녀가 좋아하는 달고 예쁜 모양의 디저트를 알아가는 것이 즐겁고 운동화계의 롤스로이스는 무엇인지 확인하고 위시리스트에 담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일기장처럼 가벼운 책, 『그렇게 쓰여 있었다』를 읽으며 마스다 미리의 일상과 시간들을 한국의 독자인 나는 나라와 언어를 초월해서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일기를 매일 쓴다. 사소해서 나만이 볼 수 있고 나만이 쓸 수 있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고등학교 때 쓴 일기장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데 가끔 들춰보면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진다.


"'어렸을 적'이라는 말은 아직 쓰고 싶지 않아."
내 일기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 말을 쓰게 되면, 어른의 세계로 밀려날 것 같아 두려웠던 걸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교복 입는 것이 싫어서 일부러 체육복을 입고 등교했던 비뚤어진 나. 정문 앞에 계신 선생님을 모른 척할 수 없어 불량한 표정이어도 인사는 열심히 했던 나. 어른의 세계로 먼저 들어 싶어 또래 친구들과는 어울리지 않고 겉돌기만 했던 나. 일기장에는 그때의 불안과 반항이 쓰여 있었다. 아이의 세계에서 어른의 세계로 밀려나도록 스스로 등을 떠밀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는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 불안정해서 지구의 자전축만큼이나 모나고 기울어진 시간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어른이 돼서도 감정의 축은 기울어져 있으나 그때보다는 덜하다. 누군가는 아이의 시간을 추억하기도 하는데 나로서는 어른이 된 지금이 더 소중하다. 알고 있다. 불안하고 어두워도 아이의 시간을 거쳤기 때문에 밝고 환한 어른으로 살게 된 것이라고. 지나고 나면 추억이고 그리운 것이라고. 
  어른의 세계에서 시간은 빠르다. 1월 1일과 12월 31일은 가깝고 나이의 앞자리 수는 금방 변한다. 일기장을 빼곡히 쓰면서 우울을 달랬던 아이는 책을 읽으며 나를 스쳐 갔을지도 모를 고통을 잊어버리는 어른으로 바뀌어 있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살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면 됐다고 가난한 나를 위로한다. 


"저기, 립스틱을 사러 왔는데요. 좀 골라주실래요?"
밝게, 그리고 정중하게 말한다. 상대방이 친절하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타인에게는 과하게 친절하다. 모르는 사람일수록 더욱 친절하게 말한다. 굽신거린다고 비아냥을 듣기도 하지만 마스다 미리의 말처럼 상대방이 친절하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다. 백화점 매장에 가서 옷이 아닌 화장품을 사기로 한 그녀는 점원의 친절한 응대에 화장품 세트를 사버리고 만다. 물건을 팔기 위한 친절이지만 상대가 나에게 진심을 다하고 있구나 생각하면 수고로움까지 생각해 나 역시 물건을 모두 사버린다, 적정한 가격에 한해서라면. '어른다운 쇼핑'을 한 그녀는 '요즘 스타일'의 화장을 한 얼굴로 집에 간다. 
  대도시의 큰 백화점에 간 적이 있다. 사람들과 물건들로 빼곡한 그곳에서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너무 광활하고 넓어서 내가 과연 물건을 골라 살 수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압도당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반짝이는 물건과 향기와 열심히 들여다봐야 헤아릴 수 있는 가격에 대해. '어른다운 쇼핑'은 하지 못하고 아이보다는 큰 청소년다운 쇼핑을 했다. 전부 사 버리기엔 돌아갈 길이 걱정이기도 했고 계획하지 않은 지출을 하기엔 지갑의 상태는 어른답지 못했다. 친절한 응대에 사야 할 것들은 샀다. 집으로 돌아와 정리를 하고 집 앞 마트에 가서 익숙한 배치에 놓인 물건들을 보며 편안함을 느꼈다. 
  마스다 미리의 작업실에는 두 개의 책상이 놓여 있다. 『그렇게 쓰여 있었다』의 에필로그에 그렇게 쓰여 있다. 남쪽에는 글을 쓰는 책상, 북쪽에는 만화를 그리는 책상. 두 개의 책상에서 왔다 갔다 하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그녀의 하루를 상상한다. 우리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그녀와 나 사이에는 닮은 점들이 놓여 있다. 나에게도 서랍이 세 개 달린 가로 1800짜리 책상이 있다. 그림 실력이 형편없는 나는 주로 이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바닥에는 언제든 누워 잠들 수 있는 이불이 깔려 있다. 나와 닮은 것 중의 마지막 하나는 마스다 미리의 글과 일상이다. 그녀의 일상과 나의 일상이 만나 세계는 우리와 닮은 것들로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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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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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이다. 한국 소설을 읽으면서 읽고 나면 책이 언제 출판되었는지 확인을 한다. 출판된 날과 책이 쓰이고 있는 시기는 다르겠지만 확인을 하고 나면 위로가 된다. 예전에는 그냥 읽었다. 읽고 잠깐 생각하거나 아무 생각 없었다. 뭐 그런 날들이었다. 뉴스는 잘 보지 않았다. 정신 건강상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 속에 살고 있었다. 현실의 이야기는 들여다보지 않았으며 허구 속 세상으로 도피했다. 소설을 읽고 인물들의 생각과 상황들로 잠깐 현실의 나의 지금을 대입해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세상은 너무 빠르고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멍한 얼굴로 길을 걷고 있으면 남녀 둘이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곤 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두 여자가 나에게 팸플릿을 건네곤 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쉽게 다가와 말을 건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좋은 곳이 있으니 같이 가서 말씀을 듣자는 것이었다. 지친 영혼을 달래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좋은 곳이 있으면 댁들이나 가시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으로 거절의 뜻을 대신했다.
  나는 남을 잘 믿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길을 걷는데 누군가 다가오면 무섭다. 길을 물어보는 사소한 일인데도 긴장을 한다. 여건이 된다면 누워서 밖에 나가지 않고 책 읽고 낮잠 자다가 일어나 밥 먹고 다시 자고 싶다. 택배 받느라 간간이 문이 열리고 바깥공기 잠깐 집으로 들여보내면 좋겠다. 나의 세계에는 심심하고 무료해서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영향을 끼칠 일이 없다, 고 믿는다.
  『보건교사 안은영』을 신나게 읽었다. 읽다가 이런 문장을 만났다. 
 
  그날 보충수업이 있었던 아이들, 특히 옥상에 있었던 아이들은 뭔가 잊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음을 알고 있었으나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될 거 같았다. 인표는 학부모들이 항의해 올 경우, 강바람을 타고 강 건너 공간에서 환각 유발 물질이 날아온 것 같다고 변명할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학생들부터 잘도 믿어 주었다. 고등학생이면 벌써 다 큰 것 같지만 그래도 비이성적인 상황에서 어른들을 그만큼 잘 믿기도 힘들다. 믿지 말아야 할 어른들까지 철석같이 믿어 버린다. 아직 남아 있는 순수한 표정과 열려있는 눈동자가 선생님들을 버텨 내게 하는 힘이기도 했다.


  산 사람이 풍기는 에로 에너지를 감지하고 죽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보건교사 안은영의 신기한 능력을 다룬 소설이라고 생각하며 읽다가 멈추었다. 멈추고 언제 책이 출판되었는지 봤다. 2015년 12월 7일. 숫자 몇 개가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가 스스로 신이 나서 썼는지 고행하면서 썼는지 예측이 될 때가 있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전자에 해당한다. 죽은 사람을 보고 산 사람에게 붙은 이상한 영혼을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으로 해치우는 안은영, 별명은 아는 형. 기괴한 것들을 본다고 해서 우울하거나 자신의 능력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산 사람들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죽은 영혼들을 장난감 칼로 흩뜨려 놓는다. 원어민 교사 메켄지가 학교에 들어와 정체불명의 씨앗을 심고 한문 선생 홍인표의 강력한 보호 기운을 가져가려고 하자 맨발로 뛰어와 그를 무찌른다.
  놀이터에 가면 머리에 피가 고인 아이가 맨 먼저 달려와 안은영을 반긴다. 아이들은 서로를 재빠르게 파악해 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어린아이들 사이에서도 은영은 혼잣말을 하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는 아이로 통했다. 머리에 피가 고인 아이는 죽은 아이이고 은영이 다 커서도 아파트 놀이터에 가면 그 자리에 있다. 과자를 사서 그 아이가 먹게 한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혼자 지냈다. 김강선은 혼자 지내는 안은영과 짝꿍이다. 각자 문제적 시간을 지내면서 재수 없는 것들이 계속 앉으면서 서로의 결핍을 파악해 간다. 영혼 퇴치를 위해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이라는 그럴듯한 연장을 쥐여준 것도 김강선이었다. 아무 무기도 없이 앉아 있는 아이의 등을 털어내는 것보다 날아오는 불온한 영혼 덩어리 때문에 다치는 것보다 도구를 쓰면서 코믹 발랄로 장르를 바꾸라고 조언해 주는 것도 김강선이었다. 
  사립 학교 보건 선생으로 자리 잡은 뒤 학교에 굴러들어오는 불온한 영혼 덩어리를 퇴치하면서 한문 선생 홍인표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코믹 발랄 로맨스로 바뀐다. 짝사랑을 이어준다던가 전학생 혜민이 옴 잡이로 살지 않고 매번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환생을 경험하지 않게 해준다. 학교 지하실에 묻혀 있는 짝사랑에 실패한 영혼을 풀어주고 인표가 잘못 만난 여자가 묻어둔 사악한 기운을 몰아낸다. 학교를 지켜주는 보건교사 안은영은 학교 아이들을 지켜주는 -아는 사람만 아는 그 아는 사람은 한문 선생 홍인표 뿐이지만- 아는 형으로 활약을 한다.
  학교는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으로 이루어져있다. 언제가 떠나는 아이들은 잠깐 머물려 있는 장소로 생각할 수도 있다. 지긋지긋해 하기도 하고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여기며 모험을 감행하는 아이들도 있다. 교실에서 자는 아이들도 교실에서 혼자 있는 아이들도 보건교사 아는 형의 눈에는 지켜줘야 할 아이들이다. 
  작가의 말을 읽고 내 예상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정세랑은 이 소설을 오로지 자신의 쾌감을 위해 썼다고 한다. 작가가 신나게 쓰면 읽는 독자도 신난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재밌다. 한문 선생 홍인표의 보호막을 슬쩍 훔쳐 오고 싶고 영혼과 싸우는 안은영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 허리 디스크를 때려주는 안은영. 나의 그 사람이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에너지를 풍기며 옆에 지내는지 바스러져 사라져 갔는지 물어 싶은 아는 형.
  작가는 학교에서 어둡거나 복도 끝에 있는 보건실에서 약을 처방해주거나 아이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보건교사의 존재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는 추측을 해본다. 아는 형이라 불리는 신기한 능력을 가진 안은영 선생이 그 아이들에게 붙어 있던 죽음의 기운들을 비비탄 총으로 없애버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것. 배를 타기 전 홍인표 선생의 손을 잡고 빵 빵 총을 쏘면서 안개를 걷히고 불꽃놀이를 보며 좋아했을 뒷이야기를 숨겨 놓았을 것이라고 추리를 한다. 아이들은 그런 상황에서 방송에서 나오는 어른들의 말을 믿었다. 말 잘 듣고 착하다는 이유 때문에 돌아오지 못했다. 아는 형의 활약이 필요했고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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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1 - 김종광 장편소설
김종광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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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일기를 쓴다


  기록을 남긴다. 고대 동굴 벽화에도 인간은 그림을 그렸고 그들만의 문자를 남겼다. 사냥과 성공의 기원을 담은 그림을 남겼고 활 쏘는 모습과 춤추는 사람들을 그렸다. 역사는 기록과 사실로 남는다. 인간은 남기기 위해 살아간다. 불안한 오늘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염원을 각자의 자리에서 기록한다. 어떤 것은 일기가 되거나 사료로서 존재 가치를 가진다. 혹은 일기라고 쓴 것이 역사 기록으로 후대에게 남겨져 감동과 교훈을 만들어 낸다. 
  전쟁터의 참혹함 속에서도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병사들을 걱정하고 적군의 동향을 살폈던 어느 장군의 일기는 후대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회자된다. 그는 자신이 쓰는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지 몰랐으나 기록으로 남아 우리는 과거를 소환할 수 있다. 독일인들을 피해 숨어 있던 어린 여자아이는 자신의 생활과 초조함을 꼬박꼬박 써 나갔다. 그녀가 죽고 얼마 후 독일은 패망했고 남겨진 일기는 전쟁의 광기를 여실히 보여주는 기록으로 남았다. 
  남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살아남을 수 없다. 슬프지만 자명한 사실이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오늘, 우리는 오늘의 일기를 쓴다. 2014년의 봄을 쓰고 2016년의 겨울을 남긴다. 여기 1763년 8월 3일 조일전쟁 후 떠난 11차 통신사의 기록이 있다. 5백 명으로 꾸려진 통신사 일행에는 온갖 계급의 남자들이 모여 있었다. 정사부터 제술관, 격군까지. 신분을 막론한 사람들이 일본으로 떠나기 위해 배를 탔다.


이야기의 운명은 무엇인가


  전란이 끝나고 모내기 법과 상품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농민들은 부유해진다. 서민 문화가 발달을 하고 부농들은 자식을 서당과 향교로 보낸다. 한문과 한글을 익히면서 문화가 꽃피운다. 장터에서는 판소리와 탈놀이, 마당극이 펼쳐지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전기수가 등장한다. 이야기를 짓는 작가들 역시 나타나면서 구비 문학은 기록으로 남는다. 중국의 소설들을 베껴서 색다르게 들려주고 짓는 작가가 있는 반면에 박지원은 양반임에도 양반을 조롱하고 풍자하는 글을 짓는다.
  통신사 일행에 오른 변탁과 변박은 필명이 있는 작가였다. 그들은 배에 오르기 전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고 일본에 가서 보고 들은 것들 중 신기하고 기이한 것들을 글로 남길 것이라는 장담을 한다. 세책점 뒷마당에 모인 사람들은 그들이 쓸 작품에 투자를 한다. 소동 임취빈은 그 판에 등장해 자신 역시 이야기를 쓸 것이라고 말한다. 남의 나라 이야기를 짜집기 하는 작가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자신 역시 통신사 일행에 따라가는 자로서 이야기를 쓸 수 있으니 투자를 하라고 한다. 
  중국과 외국의 기행문은 한문으로 쓰면 번역이 잘 되지 않아 그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다, 언문으로 쓰되 쉽고 재미있게 읽힐 수 있는 여행기를 쓸 것이다고 말한다. 세책점 주인은 남자 오백 명이 일 년 동안 여행한 기록을 누가 읽고 싶겠냐며 통박을 준다. 임취빈이 쓰려는 이야기에는 임금도 반란 수괴도 위대한 정치인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읽었다. 일 년 동안 남자 오백 명이 일본으로 떠나고 그곳에서 만나고 본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임취빈의 글쓰기는 작가 김종광의 『조선통신사』로 환생했다.


전주 방각본업계 쾌가 어음을 써주었다. "재능 있어 뵈는데 뭘. 꼭 써야 한다. 살해일왕 어쩌고 그건 접어두고 먼저 얘기한 거 말이다. 동고동락한 거. 네 진심이 절반만 발휘되어도 읽으만하지 않겠느냐?······원래 좋은 이야기는 많은 이에게 읽히지 않는 법이란다. 나라와 주군께 충성하고 어버이께 효도하자, 삼강하고 오륜 하자, 좋은 놈 잘되고 나쁜 놈 망한다, 사랑은 숭고하다, 이런 도덕 염불로 도배된 이야기나 팔리지. 진짜 이야기는 알아먹는 사람이나 알아먹는 것인지라 안 팔리는 게 당연하다. 자기계발, 처세술 책보다 안 팔리는 게 진짜 이야기야. 대중이 못 알아먹거든. 하지만 진짜 이야기도 필요한 법이란다. 너에게 희망을 건다."


  임취빈은 제문을 쓰고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다. 이야기는 완성된다. 김종광이 그려내는 마당극 같은 이야기판은 곳곳에서 벌어진다. 이름 없는 민초들이 아니라 양반이 멋대로 지워준 그들의 이름에도 한자를 달아준다. 그렇게 등장한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원하게 펼쳐놓는다. 임취빈에게 어음을 써준 이가 한 말은 지금의 현실과도 통용된다.
  성공할 것이라는 자기 암시를 늘어놓는 책과 혼자 살아가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고 거짓 위로를 하는 책들이 베스트셀러로 올라가는 이 판국에 김종광의 『조선통신사』는 이야기란 어떤 운명인가를 우리에게 묻는다.
  거창한 걸 쓴 게 아니다. 몇 월 며칠, 어느 곳을 향해 가고 무엇을 먹고 사람들은 왜 죽어 갔으며 무엇을 봤는지 썼을 뿐이다. 그들의 기록이 남아 책이 되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들은 충실히 자신들의 하루를 기록했다. 갔다면 보고 보았다면 남겨라. 살아남은 자들의 의무는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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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5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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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한 권의 책이 나온다. 시간이 흐르자 그 책은 세계에서 사라진다. 헌책방을 순례한다. 주인에게 다가가 은밀하게 묻는다. ···········있나요? 주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헌책 마니아들을 그토록 애타게 했던 책은 2005년에 재출간된다. 그리고 다시 2017년에 표지와 저자 후기를 달고 새롭게 나왔다. 소문의 그 책은 읽은 사람들 속에선 전설로 통했고 이상하고 이상한 대화와 서술들로 아직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가 바로 그 책이다. 작가가 밝힌 대로 이 책은 소설임에도 야구 코너에 가 있기도 했다. 새롭게 나온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는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후기가 실려있다. 표지는 푸른색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책의 판형은 작아졌고 띠지에는 '소설 마니아들을 헌책방 순례에 나서게 한 화제의 책!'이라는 한동안 절판돼서 소설 마니아들을 절망케 했음을 출판사 스스로 밝히고 있다. 
  다시 읽었다. 다시 읽어도 황당하고 우습다. 1985년 한신 타이거즈의 우승 이후 우리가 하는 것은 야구가 아니다는 자각으로 선수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야구가 사라진 세계에서 야구를 꿈꾸고 야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아 이 세계에서 야구를 추억한다. 일곱 편의 단편이 실린 이 책에서 야구는 우아하고 감상적인 부분으로 남아 세계를 이루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매일 야구에 관한 기록을 찾아 공책에 옮기는 남자가 있고 큰아버지가 가르쳐준 야구를 배우고 싶어 하는 소년이 있다. 모든 책들에는 신기하게도 야구에 관한 기록이 있고 카프카는 야구를 사랑하는 작가로 남았다. 소년은 큰아버지의 특훈 아래 야구를 배운다. 야구시 900편 쓰기와 야구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포르노 100편을 본다. 어떤 타자는 수비에 들어가서 짝수 이닝에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타자는 야구를 한다. 고독한 자들은 서로를 알아보기 때문에 심판도 선수를 깨우지 않는다. 
  한신 타이거즈의 감독은 정신병원에 들어가서 환자들을 모아 놓고 야구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일본 야구의 시작을 들려주다가 잠을 자러 가고 잠에서 깨 다시 야구 이야기를 들려준다. 매일 야구 기록을 찾아 공책에 베끼는 남자는 자신이 쓴 소설이 <박물지>와 점점 비슷해져 간다는 것에 절망한다. 야구가 시작되는 스타디움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야구에 관한 감상에 빠진다. 공이 너무 잘 보여서 공을 칠 수 없다는 수위타자가 등장하고 한자를 읽지 못하는 여자와 결혼을 해야 하나 고민에 빠지는 남자가 있다.


봇물이 터지듯이 내게 야구 정보가 흘러 들어왔다
"주의해. 귀를 기울여. 이 세상에서 야구와 관계없는 건 하나도 없어."
나는 귀를 기울이고 눈을 크게 떴다. 아아, 얼마나 나는 무지했던가. 이 세계는 이렇게나 야구로 가득 차 있었는데.


  야구 소년은 고민한다. 야구가 사라진 세계에서 어떻게 야구를 시작할 것인가. 야구를 같이 하자고 소녀에게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은 소년을 소년원으로 보내버린다. 귀를 기울이고 눈을 크게 뜨면 야구는 이 세계에 가득한데 사람들은 야구가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소년의 야구는 시작되고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는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는 줄거리를 요약해서 들려주는 것이 무의미한 일이다. 무의미한 것은 무엇인가. 의미가 없는 일이고 의미가 없는 일에서 이 세계에서는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무의미란 의미가 없다는 것인데 우리는 의미를 강조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 시민으로서 일본 소설을 읽고 의미를 찾아 해석해야 한다. 소설에 들어 있는 무수한 암시, 즉 은유와 비유를 찾아 들려주어야 하는 이 세계에 얼마 남지 않은 소설 마니아로서 다카하시 겐이치로가 쓴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에서 야구란 무엇인가와 더불어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의 효용을 밝혀 내야 한다. 이것은 야구에 관한 이야기 인가. 야구로 빗댄 일본 문학에 관한 담론인가.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에서 야구를 모두 문학으로 바꾸면 의미가 생긴다. 환호하는 소리가 들린다. 드디어 의미를 찾은 것이다. 야구를 문학으로 대체해서 읽으면 의미 찾기와 의미 부여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봇물이 터지듯이 내게 문학 정보가 흘러 들어왔다
"주의해. 귀를 기울여. 이 세상에서 문학과 관계없는 건 하나도 없어."
나는 귀를 기울이고 눈을 크게 떴다. 아아, 얼마나 나는 무지했던가. 이 세계는 이렇게나 문학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야구가 사라진 세계에서 야구를 기록하고 야구를 추억한다. 문학이 사라진 세계에서 문학을 기록하고 문학을 추억한다. 쓸모없는 일이다. 문학은 이미 설자리를 뺏기고 문학이 없어도 사람들은 가상 화폐에 올인하고 주식에 투자하거나 부동산을 모으는 일에 삶의 생기를 부여하고 있다. 베스트셀러라는 수식어로 책들은 팔려 나가고 팔리지 않은 작가들의 책은 번역이 되는 일이 요원해진다. 어렵게 출판돼도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처럼 곧 사라진다. 
  문학이 사라진 세계에서 문학 소년과 문학소녀들은 문학을 기록하는 노인들을 찾아 나선다. 오래전 소설가로 활동한 소설가는 정신병원에서 자신이 쓴 소설들을 낭독하고 잔디밭을 돌고 잠에 빠진다. 매일 소설을 쓰지만 그것은 새로울게 없는 내용이고 자신이 쓴 작품이 다른 작가의 소설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한 반복되는 소설 쓰기는 전광판에 표시할 수 없는 이닝으로 승패를 알 수 없게 된다. 혼자 창밖에 서서 소설 쓰기를 꿈꾸는 전직 소설가. 그 혹은 그녀는 자신이 쓰려고 했던 이야기를 끝내지 않고 계속 쓸 것이라는 다짐을 한다. 
  소설이 사라진 시대에 소설은 이야기를 부풀리고 있다. 「사랑의 스타디움」에 자리 잡은 아이들의 호기심을 끌어들이는 정체 모를 형체는 이야기인 것이다. 자꾸 커져가는 이야기는 야구 관리인이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상상과 망상을 비롯한 허구 속으로 빠져 들어갈 것을 주문한다. 소설이 시작되고 장내 아나운서는 새롭게 출간될 소설의 목록을 읽어야 한다. 한자를 모르고 조사와 형용사만 읽을 수 있는 여자가 있고 소설이 너무 잘 보여서 소설을 쓸 수 없는 작가가 있다. 무의미한 곳에서 의미는 존재를 숨기고 있었다. 


야구소년의 우울
데라야마 슈지
 
 
1. 스트라이크 죤을 기술할 의도
 
다이캅은 말했다. 스트라이크 죤은 타격연습을 하지 않을 때도 언제나 마음 속에 그림을 그리고 있어야 한다, 라고. 그날부터 나와 이 입방체는 언제나 함께 있었다.
 
 


 

그것은 나의 옆구리 밑에서 무릎사이, 홈베이스 위의 공간으로 형성되어 있고 홈베이스의 오각형을 저변으로 하고 있다. 높이 약 90센티, 너비 30센티의 입방체인데 투명하여 육안으로 볼 수는 없다. 중력이 없기 때문에 휴대하는데 아무런 고역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형태가 아닌 영역이고 나에게 공을 던지려고 하는 상대와의 사이에서만 공유되는 하나의 세계상태였다.
 
나는 이 스트라이크 죤에 공이 통과하는 것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나의 인생을 불리하게 하는 것이고, 때로는 나의 죽음마저도 뜻하는 것이 된다, 라고 심판은 말했다.
 
만원의 지하철 차내에서, 나는 때로는 나의 스트라이크 죤에 침입하는 이와 같은 다른 사람의 가방이나 종이 봉투, 다른 사람의 엉덩이 등을 의식하고는, 그것들을 죤 밖으로 밀어 버렸다. 그 성역을 지키기 위해서 때로는 술주정꾼을 밀어낸 적도 있다.
 
나는 이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스트라이크 죤을 형상화할 것을 생각하고, 일요목공입문서를 사오고 즉시 3센티 4방각목 5개, 두께 1센티 베니어판 5장으로 된 상자형태의 죤을 만들어 보았다.
 
공이 왜 이곳을 통과하려 하는가. 나는 왜 이 죤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것이 한 번도 논의된 적은 없었다. 어쨌거나 20년 긴 세월동안 이 스트라이크 죤을 계속 지켜왔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독신인 것이다.
 
아마 노년이 되면 나는 나의 이 스트라이크 죤을 개집처럼 꾸며서 그 속에서 잠자겠지. 그리곤 귀를 쫑긋 세우고 언젠가는 꼭 찾아올 공의 울림을 계속 기다리겠지.
 
2. 세컨드 플라이는 언제 떨어질까
 
화물창고 계단을 반쯤 내려온 곳에 걸터앉아 떨어질 세컨드 플라이를 기다리고 있는 사나이.
시합은 20년 전에 끝났고 배트도 핏쳐도 가정의 피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대전도 있었고 파산도 있었다. 남자, 47세, 직업 보험회사 외무원, 아내 병사, 취비 빠찡꼬, 월수입 12만원, 위장병, 그러나 떨어져오는 플라이만은 꼭 잡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야수의 임무이며 <교대>를 기다리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역사의 저물녘 다 낡은 신사복 차림의 세컨드를 둘러싼다. 거리에 런너는 없다. 사물은 의식에 리―드되고 있다. 투아웃이지만 아직 위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3. 9명의 벙어리 이야기
 
두 명의 외로운 벙어리가 있었다. 한 사람은 핏쳐라는 이름, 또 한 사람은 캣쳐라는 이름이었다. 두 사람은 언어 대신에 공을 던져 서로의 情意를 확인하곤 하였다. 두 사람이 서로 흐뭇하고 원만히 지낼 때, 공은 똑바로 왔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크게 빗나갔다. 그런데 이 두 벙어리를 질투하는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두 사람의 관계를 흩어놓고자 배트라는 여문 몽둥이로 두 사람이 주고 받는 대화인 공을 두들겨 다른 세계로 날려 보내 버렸다.
 
공을 잃은 두 벙어리는 망연자실 서 있기만 하였다. 몽둥이로 공을 날려버린 사나이는 악마처럼 팔을 올리고 두 사람의 둘레를 빙빙 돌았다. 한 바퀴 돌 때마다 숫자가 기록되고 그 숫자가 불어갈수록 두 사람의 불행지수는 높아갔다. 거기에 이 두 사람에게 공을 돌려 주려는 7명의 벙어리가 몰려 왔다. 그들은 몽둥이를 든 남자를 죽이기 위하여 <태양이 빛나는 땅>에서 왔는데 왼손이 특별하게 컸다.
 
<왼손> 세로 30.5센티 이하, 엄지 손가락 밑부분 안쪽에서 새끼 손가락 밑부분 바깥쪽까지 <손바닥 너비> 20.3센티 이하, 엄지손가락과 집게 손가락과의 간격은 손가락 끝에서 11.4센티 이하, 손가락 밑부분에서 8.9센티 이하
 
이 이야기는 너무 길어서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광장 여기저기에서 세계 도처의 벙어리들이 몰려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이어 갈 것인가에 대해서 의논을 하는 것 같지만 나는 이제 언어를 익혀버린 뒤라서 그들 곁으로 돌아 갈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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