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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사실 사는 거 별거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루 일 다 해 놓고 누워 있다가 슬픈 소식을 들을 수도 있고 길 가다가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갈 수도 있다. 비관적인 사람도 냉소적인 사람도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제멋대로 삶을 정의 내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사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인과 관계는 없다. 어느 날 갑자기,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으며 웃고 싶지 않아도 억지웃음 짓고 있는 나 자신이 슬프게 느껴졌다. 상대의 말에 반박도 하지 못하고 네 네 네만 연달아 말하고 집에 와서 짜증이 나 잠이 오지 않을 때도, 겨우 이거였어? 산다는 게? 회의감이 몰려왔다.
무시당하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숙이고 말도 안 되는 높임 표현으로 문법을 무시하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말은 하면 할수록 실수가 늘어났고 상대는 내 말을 듣는다기보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내기 위해 듣는 척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눈치를 보며 사는 걸까? 말도 안 되는 자격지심과 피해 망상의 원인은 무엇인지 고민해보았다.
고민할 것도 없이 나를 둘러싼 사건의 원인은 나로부터 출발한다. 남 탓으로 돌리고 싶었지만 나라는 사람은 구제불능이었다. 단단하지도 못하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흔들리기 일쑤였다. 사기꾼에게 카드를 내밀고 주민등록증을 복사해 달라는 말에 네 네 그럴게요, 부정문을 내뱉지 못하는 얼간이였다.
"너 회사 잘 다니게 해달라고. 덜 힘들고, 덜 속상하고, 덜 지치면서, 사회생활 잘하고, 무사히 월급 받아서 나 맛있는 거 많이 사달라고."
『82년생 김지영』 씨에게 남자친구는 떨어지는 눈송이를 잡으며 소원을 빈다. 힘들고, 속상하고, 지치지만, 많이는 아니고 덜 힘들고 덜 속상하고 덜 지치게 해달라고. 감정이 너덜너덜해지도록 힘들겠지만 화장실에 들어가 눈이 빨개지도록 울음을 참겠지만 무사히 월급 받아서 맛있는 거 사달라고. 알아냈다. 눈치 보고 억지로 웃고 더러워도 참고 가식으로 좋아요를 말하는 이유는 월급 때문이었다.
김지영 씨는 나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다. 흔한 이름이다. 초등학교 때 아토피를 심하게 앓아 손과 얼굴이 빨간 아이, 피아노를 잘 쳐서 집에 놀러 가면 곧잘 피아노를 쿵쾅 거려주던 내 친구의 이름도 김지영이었다. 한 반에 큰 지영, 작은 지영이 있을 정도의 흔한 이름. 『82년생 김지영』의 소설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제목을 보니 보편성으로 승부하려는 느낌이 들 뿐이었다. 책을 읽기 시작했다.
지영 씨는 평범한 여성이다. 평범한 게 어떤 건데라고 따져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이제 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여성으로 딸 하나와 남편이 있는 주부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홍보대행사에서 일을 하다가 아이를 낳으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고 있는 지영 씨에게 평범하지 않은 일이 찾아온다. 빙의가 된 것처럼 죽은 선배와 지영 씨의 어머니의 말투로 말을 하는 것이다. 남편 정대현 씨는 술에 취해서 혹은 웃기려고 지영 씨가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넘긴다. 추석이 되어 시댁에 갔을 때 지영 씨는 모두를 기겁하게 할 말로 대현 씨가 병원을 찾아가게 만들었다.
"사돈어른, 외람되지만 제가 한 말씀 올릴게요. 그 집만 가족인가요? 저희도 가족이에요. 저희 집 삼 남매도 명절 아니면 다 같이 얼굴 볼 시간 없어요. 요즘 젊은 애들 사는 게 다 그렇죠. 그 댁 따님이 집에 오면, 저희 딸은 저희 집으로 보내 주셔야죠."
소설 내내 김지영 씨는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담는다. 남녀 차별에 관한 보고서라고 해도 무방한 이 소설은 김지영으로 대변되는 여성의 말들을 억압하는 사회를 향한 빈정거림이다. 김지영 씨는 허구의 인물이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구조는 신문기사와 보고서를 인용하여 각주를 달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사건을 전달한다. 지영 씨의 삶을 연도별로 나누고 지영 씨가 겪는 일들을 감정을 배제한 채 들려준다.
짝꿍이 괴롭히는 것은 지영 씨를 좋아해서라는 선생님의 말을 지영 씨는 이해할 수 없고 관대한 얼굴로 지영 씨를 씹다 버린 껌으로 정의하는 남자 선배를 똑바로 볼 수 없다. 인간적인 예의를 갖춘 것뿐인데 흘리고 다녔다며 한밤중 지영 씨를 쫓아오는 남학생, 19금 농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 거래처 사람들은 술을 마구 권한다. 남자 동기들과 연봉이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출구 없는 미로에 갇혀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뭐든지 구분하고 편을 나누길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82년생 김지영』을 페미니즘 소설로 규정하겠지만 이 소설만은 성격을 나누고 정의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하라고 만들어 놓은 입 일 텐데 하고 싶은 말도 못하면서 마음에도 없는 말만 내뱉고 있는 불쌍한 입들에 관한 슬픈 전설 같은 이야기, 『82년생 김지영』이 이룩한 업적은 거룩해서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만 좀 떠들고 입 좀 다물어, 지영 씨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다들 상대의 궤변에 시원하게 쏘아붙이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침묵을 강요 당하는 사회에서 말하기는 정신줄을 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미친 사람이 돼서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학도 나오고 부모한테 사랑도 받고 남한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배불러가며 일 다니고 지하철로 이동하는 지영 씨의 모습은 이게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나의 현재이고 미래의 모습이다. 정말 사는 거 별거 없어서 미래 따위는 생각도 안 하지만 소설에서 만난 지영 씨의 삶은 없는 미래마저 암울하게 만들었다.
같은 언어로 생각을 전달하면 되는 대화는 자주 어긋나고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어느 지점에서 상대가 화를 내는지도 모르는데 나 화났어라는 불편한 감정을 여실히 드러낸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성차별은 이런 것이다. 대 놓고 말하진 않지만 화가 나고 감정이 상했다는 것을 분위기로 전달한다. 혹시 화난 거 아니에요?라고 물어보면 아닌데요, 제가 화가 난 것처럼 보이나요? 아님 말고 할 수도 없는 게 누가 보더라도 상대는 화가 나 있다. 혹시 차별하는 거 아닌가요? 아닌데요, 제가 차별하는 사람처럼 보이나요?
한국 사회에서 여성차별은 드러내지 않고도 상대를 모멸감과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치심을 주는 음침한 자라지 못한 어른들의 입들이 벌이는 짓이다. 타인의 입을 빌려서야 말하기의 자유를 얻은 김지영 씨는 82년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