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 가족 호칭 개선 투쟁기
배윤민정 지음 / 푸른숲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배윤민정의 에세이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는 제목에 끌려서 읽었다. 책의 부제 '가족 호칭 개선 투쟁기'는 보지 못했다. 제목만 봤을 때 직장에서 겪는 상하관계에 따른 고충을 다룬 책이라 짐작했다. 요즘의 단상은 호칭으로 인한 거북함이었다. 나름 직급이 있음에도 무슨 무슨 씨라든지 누구야로 불리고 있어서. 자리 욕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불리니 기부니가 좋지 않았다.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는 부제 대로 시가 쪽 식구들의 호칭을 바꿔보자는 '가족 호칭 개선 투쟁기'를 그린다. 결혼. 요즘 또 결혼에 대한 단상. 가을이라 결혼을 많이 하더군요. 그래요. 축하해요. 축하는 하는데 너무 먼 곳에서 식이 열리네요. 훌쩍.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배윤민정은 동거인 두현과 결혼을 하면서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호칭 때문이다. 남편의 형에게는 아주버'님', 남편의 형의 아내에게는 형'님', 남편의 남동생에게는 '도련님', 남편의 여동생에게는 '아가씨'로 불러야 한다. 왜? 오랫동안 그렇게 불렀으니까. 언어의 사회성으로 말미암아. 아주버님, 형님, 도련님, 아가씨로 부르기로 했으니까. 


민정은 의견을 제시한다. 호칭 대신 이름 뒤에 님자를 붙여서 부르자고. 자신은 아주버님으로 부르는데 아주버님은 민정을 제수'씨'로 부른다. 아무래도 '씨'라는 호칭은 다소 낮춤의 경향이 있기에 공평하게 서로를 님을 붙여 부르기로 말이다. 민정은 남동생의 부인을 부르는 호칭도 바꿔보기로 한다. 이 같은 경우에 민정은 남동생의 부인을 올케라고 부른다. 허나 올케의 기원은 '오라비+겨집'이 줄여서 된 말이다. 허허. 오라비의 계집이라니.


며느리의 뜻도 알고 나면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며늘+아이'의 줄임말인데 며늘은 덧붙여 기생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며느리는 아들에게 덧붙여 기생하는 아이라는 의미이다. 시부모가 며느리를 부를 때 쓰는 새아가 역시 하대의 의미가 있다. 남자는 새 아가로 불리지 않는데 여자는 새 아가로 불린다. 새 아가는 가르치고 품어줘야 하는 정서가 깔린 말이다. 


단지 결혼을 했을 뿐인데 남편에게 덧붙여 기생하고 가르치고 품어줘야 하는 존재가 되다니. 민정은 며느리, 새 아가, 제수씨라는 호칭 대신 이름 뒤에 '님'자를 붙여 달라고 시가에 이야기한다. 민정님으로 불러 달라고 자신 역시 이름 뒤에 님을 붙여 부르겠다고. 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될까.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는 호칭 하나 바꾸자고 했을 뿐인데 이야기가 스펙터클하게 흘러간다. 장르는 가족액션심리스릴러.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정말 이렇게 전개된다고?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를 다 읽고 작가의 다른 책도 읽고 싶어서 찾아보았다. 다음 책의 미리 보기를 하고 올해 가장 놀랐다. 진짜 이렇게 흘러갔다고? 투쟁 이후의 날들이 이렇다고? 


『아내라는 이상한 존재』, 주문 갈겼다. 민정은 시가에서 민정 님으로 불릴 수 있게 되었을까. 약간의 스포를 하자면 민정은 포기하지 않는다. 민정 님으로 불리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한다. 누군가의 고군분투를 보는 것만큼 힘들고 슬픈 일이 없다. 


힘들고 슬프기 때문에 응원한다. 남들도 다 그렇게 부르니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고 의문하고 공론화해보자. 제가 왜 그렇게 불러야 하죠? 제가 왜 그렇게 불려야 하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 창비청소년문학 122
이희영 지음 / 창비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제 가을이다. 라는 문장을 쓰기까지 참 많이도 힘들었지. 무더웠지. 그래도 아직 여름이라는 애는 고집쟁이라서 미련쟁이라서 문 앞에 서성이고 있어. 이제 정말 떠나도 되는 걸까. 자꾸 물어보면서. 짧은 옷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언덕을 오르고 내려갈 때는 아직 땀이 나는 10월의 어느 날에 쓴다. 우주를 떠도는 어떤 전파에 가닿을까 주파수를 이리저리 맞춰가며. 우연에 기댄다. 꼭 닿지 않아도 괜찮을 마음을 차곡차곡 담는 일도 좋아.


목소리가 아쉽다. 통화 녹음 기능이 있는 휴대전화를 그때는 왜 쓰지 않았을까. 지금이야 자동 녹음 설정을 해 놓아서 고객센터에서 걸러오는 전화도 녹음이 되는데. 내 이름을 부르는 힘이 없는 목소리. 이런저런 얘기 끝에는 이번에 얼마를 보내니 반찬과 과일을 사 먹으라는 당부가 있었다. 한글을 몰라 나에게 편지나 메모를 써주지도 못했지. 그래도 기억하고 있다. 전화부 수첩에 쓰인 자음과 모음이 불균형해서 이상하게 커진 글씨가. 


이희영의 장편소설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에서 엄마는 죽은 형의 동영상, 사진, 메일, 메시지를 모은다. 열여덟 짧게 살다간 아들의 흩어진 흔적을 하나로 모은다. 가상 공간에서 죽은 형을 다시 부활시키기 위해서다.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드는 일이었지만 엄마는 그렇게 해서라도 형을 다시 만나고 싶어 했다. 마지막에 가서는 철회했지만. 그렇게 만나는 아들은 진짜 아들이 아니란 생각에서. 


아들의 흔적과 기록은 외장 하드에 담겼다. 소설은 열여덟에 죽은 형을 열여덟이 된 동생이 다시 마주하는 시점에서 출발한다. 형이 다녔던 고등학교에 입학한 동생. 형 선우진과 동생 선우혁은 깜짝 놀랄 정도로 체형과 외모가 흡사했다. 교복을 입은 혁을 보고 엄마는 진이 떠올라 눈물을 보인다. 열세 살 차이 나는 쌍둥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혁은 수업 시간에 가우디라는 집 짓기 게임에 대해 듣는다. 그 시절 형도 가우디 게임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 방에 들어가(그때까지 엄마는 형의 방을 남겨두었다.) 낡은 XR 헤드셋을 집어 든다. 헤드셋을 착용해 가상 공간으로 들어간다. 여러 번 시도 끝에 형의 아이디로 가우디에 입장한다. 무려 4,140일 만이다. 혁은 형 JIN이 만든 정원과 집을 둘러본다. 빠르게 유행하는 메타버스 안에서 JIN의 공간은 여전히 존재했다. 공유 친구인 누군가 캐시를 들여 가꾸었다는 뜻이다.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는 한 사람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소설이다. 후회와 자책이 남는다.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좀 더 다정하게 대할 순 없었을까.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그런 식이다. 버스 정류장에 비슷한 사람이 앉아 있는 것만 봐도 가슴이 내려앉는다. 왜 우리는 같이 늙어갈 수 없었을까. 가끔은 환하고 이내 어두워진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달래는 길은 없어서 그대로 내버려 둘 때가 많다. 


혁은 진이 남겨둔 흔적을 따라간다. 형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형의 이야기를 듣고 형이 남겨 두고 간 가우디에서 오랜 시간 떠나지 않고 공간을 가꾼 이를 찾아낸다. 후회의 마음 때문이다. 현실에서 타인의 불행을 보면서 나의 상황에 안심을 하는 일은 꼴불견이다. 그런 내색조차 쉽게 하면 안 된다. 다만 책이라는 공간에서는 어떨까. 너는 나보다 낫다는 생각을 마음껏 할 수 있지 않을까.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에서 진은 떠났지만 진의 음성과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에 부러움을 느꼈다. 나는 아무것도 없다네. 그 흔한 통화 녹음이나 메모지 한 장 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네. 언제고 너는 진의 목소리를 듣고 진을 기억하는 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잖아. 이런 속 좁은 생각을 책을 읽으면서는 나눌 수 있었다.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는다. 책의 세계에서의 규칙이다. 오직 등장인물들만이 나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 


누구에게도 나의 슬픔과 후회를 털어놓지 않는다. 각자의 슬픔과 후회만으로도 벅찰 테니.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작가가 만들어 놓은 가상 공간인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라는 세계에서 마음껏 죽음의 기억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는 일이다. 너에게는 여름의 귤이, 나에게는 가을의 사과가. 명절이 되면 사과 한 박스를 산다. 가장 크고 비싼 사과를 고른다. 사과를 사 놓고 나를 기다리던 풍경의 기억 속으로 달려가기 위해. 


안녕. 


아주 오랜 시간 내내 안부를 물을게요. 


잘 지내요. 


떼쟁이 여름 때문에 가을이 문을 열고 들어오지 못하고 있지만 장난기 가득한 여름을 살살 달래는 중이라 곧 들어올 가을을 먼저 당신에게 보낼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금목서 향이 퍼지고 있지요. 


고마워요. 


내가 나일 수 있게 만들어주어서. 


우리는 언제든 함께임을 잊지 않을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꼭 내일이 있는 사람처럼 살았다. 내일도 모레도 그다음 날도 내게 찾아오리라는 터무니없는 믿음이 있던 시간이었다. 그야말로 아등바등의 형태로. 하나의 죽음을 목도하고 더 이상 삶은 유한하지 않다는 걸 몸소 체험하고야 깨닫는다. 내일은 없다. 오늘만이 유효할 뿐. 오늘을 살아내자. 단순한 문장만을 곁에 두어야 한다는 것 역시. 


지나친 걱정의 끝에는 피로와 불안이 있을 따름이다. 최진영의 장편소설 『단 한 사람』은 오늘을 살아내는 일의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소설이다. 삶과 죽음은 따로 있지도 멀리 있지 않음을 알려준다. 내가 아무렇게나 흘려보내는 오늘은 어제 죽어간 자가 그토록 원하던 시간임을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모든 시간에 의미를 부여할 순 없지만 그래도 하루에 한 번쯤은 살아 있음에 안도를 느껴야 한다. 


소설은 작은 섬에 두 그루의 나무 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태초에 나무가 있었고 시간을 견뎠고 뿌리를 나눠 가졌고 사람들이 찾아왔다. 나무가 자라면 베어졌다. 남아 있는 나무는 인간사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다음 장은 장미수와 신복일의 다섯 남매의 서사로 넘어간다. 일화, 월화, 금화, 목화와 목수. 나무의 시간처럼 다섯 남매는 서서히 자란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쌍둥이 목화와 목수를 데리고 금화는 산으로 간다. 일요일이었고 언니 월화가 다른 데로 가서 놀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언니 월화는 진짜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동생들은 일요일의 무료함을 이기기 위해 산에 올랐다. 그들은 깊은 곳으로 갔고 커다란 나무가 휘청거리면서 금화의 몸 위로 쓰러졌다. 목화는 어른들을 부르기 위해 산으로 내려갔다. 


울면서 어른들을 데려왔지만 상황은 이상하게 변해 있었다. 깔린 사람은 금화였지만 금화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목수가 있었다. 목수는 그날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게 금화는 사라졌다. 목화에게 기이한 일이 일어난 건 열여섯 살의 봄이었다. 꿈을 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꿈속에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목화는 사람들이 죽지 말라고 기도했지만 누군가 말을 걸었다. 떨어지는 사람을 받으라는 음성이었다. 


꿈이 아니었다. 그날부터 목화는 사람을 구했다. 사람들이 아닌 사람을 구했다. 죽어가는 이들 중에 오직 단 한 사람만을 구해야 했다. 왜 단 한 사람인가. 목화에게 사람을 구하라고 말하는 이의 정체는 무엇인가. 목화는 끔찍한 자신의 운명을 처음에는 비관했다가 나중에는 그 일을 중개라 부르며 단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일의 의미를 찾아 나간다. 


어떤 운명의 신이 혹은 운명의 장난이 오늘 나를 살게 하는 것인가. 오늘 살아 있는 나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건 아닌가 『단 한 사람』은 의문한다. 왜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인가의 물음.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자연재해나 인간의 힘에 의해 베어지지 않는 이상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나무의 힘 때문이 아닐까. 나무의 명령을 받은 누군가들이 지켜낸 단 한 사람에 내가 있었다. 그러니 살아가야 한다. 소중한 단 한 사람의 운명으로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 수첩 - 금은방 강도 사건부터 도깨비집 사건까지, 기이하고 괴상한 현대사
곽재식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곽재식의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 수첩』을 읽어가면서 느낀 점은 와 나 한문 공부 다시 시작해야겠네였다. 갑자기? 뜬금없이?는 아니고 대한민국의 기이한 사건을 신문 기사를 통해 정리해 주는 방식이라 인용된 신문 지면은 조사 빼고는 전부 한문이었다. 더듬더듬 기억을 떠올리며 문맥에 맞춰 읽어가려 했지만 포기. 그렇다고 한 글자씩 찾는 정성은 부족해서 신문 기사는 얼렁뚱땅 읽었다.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 수첩』은 미스터리 잡지 『미스테리아』에 기고된 대한민국에서 오래전 일어난 기이한 사건을 다룬 연재물 중에 열다섯 편을 추려 모은 책이다. 일제강점기에서 1970년대 사이에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사건 중에서 당시에는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건을 다룬다. 서문에서 곽재식은 실화이므로 사건을 호기심 측면에서만 다루지 않겠다고 밝힌다. 


지금이야 언론, 방송, 유튜브 채널이 활성화되어 사건이 일어나면 전후사정이나 사건 정보도 쉽게 알 수 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못했다. 가령 「어린이를 죽인 괴물」편을 보면 마을에서 백주대낮에 어린이가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한마을에서 연달아 세 명의 아이가 사라진 것이다. 두 명의 아이는 끔찍한 주검으로 돌아왔고 한 아이는 끝내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CCTV. 현대 사회에서 범죄가 발생하면 바로 확보해야 하는 물증 중에 하나이다.


당시에 그런 게 어디 있겠는가. 마을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호랑이가 잡아갔다더라. 소문이 퍼져 굿을 하기에 이른다. 끝내 범인을 밝혀내지 못한 채 사건은 종결된다.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 수첩』에 실린 사건 중에는 범인이 밝혀진 사건 보다 미제로 끝난 사건이 더 많다. 범인이라고 확신했지만 범인이 아니었고 신문 기사의 자료만으로는 그 사건의 끝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는 사건도 있다. 시대적 상황과 배경이 그러했다. 


가장 황당했던 사건은 「남대문 금은방 권총 강도와 영어 학원」편이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사건의 진상을 밝힐 수 없는 점 이해 부탁한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다 다시 내려오기에 알 수 있는 점은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 점차 잔혹하고 끔찍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범죄의 동기가 점점 모호해지고 있는 지점이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범인을 잡아 범행 동기를 물어보면 동기가 명확했다. 황당하지만 서글픈 동기라도. 바로 「남대문 금은방 권총 강도와 영어 학원」의 범인처럼. 


한자가 없는 지금의 신문을 읽는다. 사건의 개요부터 종결 과정까지 한글로 자세히 나와있다. 방송에서도 한국말로 알려준다. 그런데도 과거 한자로 범벅된 신문 기사를 읽는 것만큼 이해가 쉽지 않다. 도대체 왜 범행을 저지른 것일까. 설명이 되지 않는 동기들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의 사건은 미스터리가 되어 버렸다. 범인이 잡혀 형을 살고 있는 사건임에도 말이다.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 수첩』에 실린 사건에 숨겨진 가슴 아픈 시대적 배경처럼 오늘날의 사건도 대한민국의 배경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노동소득으로는 집을 사지 못하고 아예 취업을 포기해버리는 젊은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 악성 민원에 시달리다 끝내 생을 버리고 일터에서 갑질과 부당한 대우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을 통해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염원이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 수첩』에 담겨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건널목의 유령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겪은 초자연적인 현상은 차에서 자다 깨 멀리서 본 하얀 형상이 전부이다. 가로등도 없는 산길을 가고 있었다. 분명 아무도 없어야 했는데 멀리 하얀 물체가 아른거렸다. 꽤 어린 시절의 기억인데 아직도 궁금하다. 뭐였을까.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의 혼령이었을까. 다시 생각해 보면 어렸고 자다 일어났고 그때까지 들었던 괴담의 영향이 정신에 미쳤을 거였다. 


그 후로는 없다. 가위눌림이 몇 번 있었지만 공부하면서 받은 스트레스가 뇌에 이상을 일으킨 거라 기이한 일에 해당하지 않는다. 요즘엔 일하는 가위를 눌린다. 몸은 이곳에 있는데 정신이 사무실에 가서 일을 하고 있다. 짜증 나서 빨리 깨고 싶은데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그러다 다시 잔다. 피곤이 가위를 이긴다. 바위가 아니고.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가 다가노 가즈아키의 『건널목의 유령』은 제목 그대로 유령을 다룬다. 전작과는 다른 결이라 제목만 이러겠지 했는데 본격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가답게 본격 유령 서스펜스 추리소설을 오랜만에 발표했다. 무려 11년 만이다. 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추가되었다. 과작을 하는 작가의 신작을 기다리는 것. 아쉽게도 하라 료의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는 더 이상 못 읽는다. 다음 편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건널목의 유령』은 시모기타자와역에서 찍힌 사진과 동영상의 실체를 추적한다. 인명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 역에서 기차가 몇 번이나 급정거를 했다. 기관사는 건널목에서 철로로 들어오는 형체를 보기도 한다. 프리랜서 잡지 기자 마쓰다는 독자 제보로 들어온 촬영된 사진과 동영상을 보고 의문과 호기심을 느낀다. 곧장 취재를 시작하고 자신도 이상한 체험을 하기에 이르는데. 


사건의 진실을 알아갈수록 놀라움과 안타까움의 연속이다. 단순히 잘못 본 것이라고 여기기에는 현상이 명확했다. 철로 주변을 확인하다가 한 여성의 형체와 마주하고 새벽 1시 3분에 여성의 신음 소리만이 들리는 전화를 받는다. 처음에는 자신이 과거의 기억을 안고 살고 있는 탓에 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건널목에 유령은 건널목의 사건이 된다.


추리소설과 유령이라니. 이 조합은 대체 무엇인가. 대체로 사회가 어둡고 망가져 가는 때에 기담과 괴담이 성행한다고 한다. 지금이, 그렇다. 90년대 중후반에도 그랬다. 방송사마다 귀신을 소재로 다큐와 드라마를 내보냈다. 어린 나는 그걸 보면서 무서워했고. 문을 열었는데 검은 한복을 입은 여자 귀신은 역대급으로 무서웠다. 한동안 방문을 열지 못할 정도. 


그러고 보니 괴담의 주인공은 여성이 많다. 약하고 차별받는 주체였지 않은가. 오래전부터. 『건널목의 유령』 역시 고전적인 서사를 따라간다. 기차를 급정거하게 만드는 유령의 실체는 여성이었다. 마쓰다는 끈질긴 취재를 통해 사건의 진실에 가닿는다. 죽어서까지 유령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여성의 서사는 서글펐다. 죽음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다른 세계로 무사히 가기 위해 살아 있는 자의 노력이 필요하다면 나타나주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