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어휘력 (양장) - 말에 품격을 더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힘
유선경 지음 / 앤의서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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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괜찮지 않아요?라는 물음에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두어 번의 통화를 했을 뿐이었다. 한 번 사람을 보고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이나 성향을 파악하기에 나에게는 직관이나 통찰력이 없다. 여러 번 자주 오래 보면서 말투와 행동을 보고 겨우 짐작 할 뿐이다. 잘 모르겠고 제게 괜찮은 사람은 한 사람뿐입니다라고 애매한 말을 했다. 


좋은 면만을 보려고 해본다, 사람에 대해. 처음에는 장점을 들여다보다가 그렇지 좋은 면이 있네 하는 식으로 대충의 인간관계를 유지한다. 그럼에도 실패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좋은 모습이 하나도 없나. 파도 파도 괴담뿐인 사람이 실제 있다. 그럴 때는 마음의 문을 닫는다. 먼저 말을 걸지도 우스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내가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에 갇혀 있을 때 조차도 상대는 평온하다.


알겠지. 마음은 숨길 수가 없어서 내가 싫어하는 걸 알면 상대도 나를 싫어하게 될 거다. 어쩔 수 없다. 이유 있이 싫게 된걸. 말과 행동을 조심하려고 한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싫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기에. 우연히는 아니고 어쩌다 책 축제에 갔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부스를 만들어 놓고 출판사 별로 책을 팔고 있었다.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 차려 보니 내 손에는 책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초록 초록한 표지의 책 『어른의 어휘력』을 골라 들었다. 나이만 많이 먹었지 어른도 아니면서 어른인 척 살고 있는 나에게 딱 맞춤한 책이 아닐는지. 논다고 흥청망청까지는 아니고 이때 아니면 언제 써보겠어, 돈 이러면서 소비에 심취해 있다가 드디어 죄책감을 덜어줄 아이템을 만났기에 고민 없이 책을 샀다. 


맞춤법 공부하고 문장력도 기르고 싶어 문법책을 잔뜩 샀다가 어려워서 포기했더랬다. 『어른의 어휘력』도 조금 읽다가 덮겠지 하면서 읽었다. 아니었다. 이른 아침에 눈을 떠서 출근 시간 전에 틈틈이 읽고 집에 와서도 짬짬이 읽었다. 글을 쓰기 위한 문장력 강화나 외워야 할 것 같은 문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었다. 타인과 대화할 때 필요한 마음가짐과 공감을 길러야 하는 이유 같은 어른으로서 갖춰야 할 소양을 일러준다. 


작가 유선경의 과거 힘들었던 시절의 이야기도 들려준다. 어휘 책에서. 내 영혼이 오래되고 낡았을 때 나를 일으켜 주던 한 마디의 기억까지도. 문장, 어휘, 문법책에서 읽을 수 없었던 감성이 『어른의 어휘력』에 있다. 그리하여 나는 오랜만에 문법책이라고 하는 책을 완독할 수 있었다. 괜찮고 좋은 사람의 기준은 다른 데에 있지 않다. 


그 사람의 말투와 쓰는 어휘력을 보고 판단한다. 말을 할 때 습관처럼 욕설을 쓰지는 않는지 상대의 말을 귀담아들을 줄 아는지. 상대의 나이와 성별, 직업을 알고 무시하는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는지. 『어른의 어휘력』을 읽다 보니 내가 사람과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을 정확한 표현과 문장으로써 얻을 수 있었다. 아름다움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까지도 나는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삶. 사랑. 사람. 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인 세 가지를 가지고 괜찮은 타인으로 남아야겠다. 닫힌 마음의 문은 놓아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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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꿈과 토템
은모든 지음 / 민음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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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여름인 것 같은 착각에 문을 열어두고 있다. 그러다 재채기를 연속으로 하는 순간 아, 가을 말하면서 문을 닫는다. 이미 여러 벌 가지고 있는 비슷한 패턴의 셔츠를 사놓고 몇 번 입지도 못했다. 아, 겨울 이러겠지. 휴일에도 청구서는 날아오고 숫자를 한참 바라보다 찬물을 마신다. 자고 일어나면 여전히 등은 아프고 다리는 조금씩 붓다가 가라앉고 있다. 


책 읽기는 더딘 반면에 책 사기는 미친 속도를 자랑하고 있다. 누워서 그나마 힘을 내어 할 수 있는 일은 책 읽기와 책 사기. 오늘은 책 사기에 더 집중한 하루이다. 힘들고 지칠 다음 주의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집에 돌아오면 고지서와 택배가 쌓여 있겠지. 은모든의 소설집 『꿈과 토템』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은 매일 지치고 매일 짜치고 매일 슬픈 나를 위로한다. 


도대체 누가 훔쳐 간 건지 모르겠다, 나의 집중력. 멍하니 앉아서 한 곡의 음악만 반복해서 듣는 것 외에는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내게 『꿈과 토템』에 실린 간략하고 짧으면서 온기 있는 소설들은 괜찮아 네가 이해 못 해도 내가 너를 이해하고 있단다 하고 말해준다. 다중우주의 세계 속에서 오늘은 네가 졌지만 다른 세계에서 오늘의 다른 너는 이기고 있다고도. 


「꿈은, 미니멀리즘」을 읽으면서 여름옷 정리하자 생각했다. 번아웃에 가까운 상태의 주인공은 집 안에 불필요한 짐들을 정리한다. 그 모습에 나 역시 동기부여받아서 버리자, 정리하자 생각만 했다. 실천은 아직. 생각만 한 게 어디야. 이런 생각들이 쌓여 겨울이 오기 전에 정리하겠지. 「모닝 루틴」의 그녀들. 은하와 민주, 성지를 다시 만나면서 명절이 별 건가. 마음 맞는 이들과 만나 맛있는 거 먹으면서 깔깔깔 웃으면 되는 거지. 기분 좋은 마음이 들었다. 


「친구가 되어드립니다」에서는 연애를 시작할까 말까의 망설임이 묻어나 흐린 일요일의 배경색을 밝게 칠할 수 있도록 만든다. 어떤 오해와 어긋남 때문에 시작할 수 없는 만남은 반드시 만날 수밖에 없다는 필연이 작용해 연애의 길로 이르게 한다. 『꿈과 토템』 속 이야기는 너무나 사소한 일상의 풍경을 그리고 있어서 너무나 예쁘고 소중하다.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이 분출하는 하루하루라면 심장과 폐는 남아나지 않겠지. 계속 기쁠 수도 계속 슬플 수도 없다. 직장에서 있었던 부당한 일을 이야기해도 가만히 들어주는 친구. 하기 힘든 기름진 음식을 잔뜩 싸 들고 오는 친구. 좀비떼가 습격해도 집에 모여서 음식을 나눠 먹을 수 있는 가족. 은모든의 다중 세계의 우주에서는 세상에서 구하기 어렵다는 그 모든 다정함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번역 없이 노벨문학상의 소설들을 읽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오늘 나의 슬픔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게 사실로 밝혀졌다. 요즘 자주 꿈을 꾼다. 잠에서 깨면 무슨 의미였지 생각해 보지만 다시 잠에 빠진다. 분주한 낮을 보내고 밤에 이르면 꿈의 잔상들이 남지만 그것 또한 피곤함에 잊힌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아무래도 이야기뿐이리라. 내가 말하지 못하고 숨기고 있는 비밀 이야기를 사랑 느낌으로 변환해 들려주는 작가들에게 오늘을 기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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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
송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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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책을 읽었다. 처음으로 오랫동안 바다를 마주했다. 내 기억 속 바다는 구정물이었다. 쓰레기가 파도에 밀려와 백사장에 깔려 있었다. 가까이 가기 싫어서 멀찌감치 서서 일별했다. 당연히 그 바다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발을 담그면 나의 생애가 잠겨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눈치 보지 않고 눈치 볼 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연차휴가를 붙였다. 그래도 아무도 누가 내게 뭐라고 말하는 이가 없다는 사실에 잠깐 놀랐다. 나 너무 눈치만 보며 살았잖아. 바다를 보러 가자. 동해의 푸른 바다를 만나러 가보자. 송지현의 에세이 『동해 생활』의 영향이 살짝 있었다. 소설가의 소설은 안 읽고 에세이 먼저 읽다니. 좋잖아.


동해로 이사를 가고 생활에 필요한 약간의 돈을 벌면서 친구들이 놀러 오면 방을 내어주고 해수욕을 한다. 저녁에 술은 덤덤덤. 또 아주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언덕은 여전히 가파르구나. 한국소설 코너에서 오래 머물다가 읽고 싶었던 책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를 발견했다. 그치. 나 이 책 읽고 싶었지. 『동해 생활』을 읽었으니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를 읽어야지 했었지.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에 실린 아홉 편의 소설을 읽는 동안 눈에 담아온 동해 바다의 푸르고 거친 파도가 배경으로 떠올랐다. 작가의 말에서 송지현은 동해에서 월화는 카페에서 일하고 목금토일은 이마트 시식코너에서 일한다고 밝힌다. 소설가의 삶. 소설을 쓰기 위한 삶에는 직업이 필요하다는 것. 자기만의 방을 넘어서 자기만의 집이 필수이며 돈은 당연히 있어야 되는 것. 


소설집에 실린 아홉 편의 소설이 전부 좋다니,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의 감상이다. 이럴 수가. '언니가 집 안에 있는 모든 약을 먹은 건, 여름이 끝날 무렵이었다.'라는 다소 경박한 호기심을 드러내도 괜찮을 것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선인장이 자라는 일요일들」부터 돈이 되지 않을 의뢰만 들어오니 그 일만 하는 탐정 사무소의 사계절을 담은 「탐정과 오소리의 사건 일지」 시리즈까지. 


송지현의 소설은 송지현의 문장은 송지현의 세계는 너의 삶이 그렇게 힘들단 말이지? 그렇다면 나는 좀 더 다정하고 쉬워질 거야 하며 손을 내민다. 그 손을 나는 덥석 잡는다. 잡고 송지현으로 들어간다. 좀비가 되어도 일을 하러 다니고 사우나에서 만난 이모들과 여행을 가고 애인과 이별해도 다시 집에 돌아와 살아간다. 망해가는 대여점에서 일을 해도 오늘 정도는 긍정한다. 내일은 모르겠고!


바다 정도는 보이는 곳에서 살수 있잖아. 노랗게 바랜 벽지를 보면서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창문을 열면 하얀 포말을 그리며 달려들다가 멀어지는 파도를 배경으로 책을 읽다가 던져두었다가 다시 읽으면서. 이를테면 프롤로그의 방식으로 내 삶의 판을 다시 짤 수도 있다고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는 속삭인다. 바다가 보이는 집을 얻기 위해 망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한 번 망했다가 새로 괜찮아지기도 하더라고. 그런게 삶이라고 꼰대처럼 말하기는 싫고 눈치만 보지 말자고 잔소리는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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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취미는 사생활 은행나무 시리즈 N° 15
장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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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중순을 넘어 하순을 향해 달려가는데 아침저녁으로 에어컨 틀고 있는데 이게 맞는 거임? 비가 오는 토요일에도 습한 기운에 에어컨을 틀어야 할 것 같아서 조금 우울. 다음 달에 관리비 100억 나오겠네. 통장에 99억 5천 있는데 5천만 원 더 모아야겠네. 이런 헛소리를 하는 건 다 더위 때문임. 잘 자고 있었는데 업무 전화받고 열받아서 이러는 거임. 


이상한 소설을 읽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이상하다는 느낌에 읽지 말까 하다가 이 이상함이 나를 소설의 끝까지 끌고 갔다. 장진영의 『취미는 사생활』에 관한 느낌이다. 처음엔 소설의 화자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걸 시점이라고 한다지. 소설의 후반부에 가면 다중 우주의 개념이 사알짝 나온다. 다중 우주의 시점으로 읽으면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해석하면 소설의 화자가 왜 모든 걸 다 알고 있는지 결말의 상황까지도 이해가 되어 버린다. 


위층과 아래층에 사는 다정한 이웃의 일상 이야기인 줄 알았지. 아이가 무려 넷이나 되는 은협을 도와주는 선량한 이웃 언니의 따뜻한 이야기인 줄 알았어. 그랬어. 그랬는데 이게 뭐야. 장진영이 그려낸 일상은 선의를 의심 또 의심 주의 관찰해야 하며 이 세계에서 다정함이란 교묘한 사기에 다른 이름이라는 거다. 나는 사기당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지만 막다른 상황에선 달라진다. 


『취미는 사생활』은 나를 숨기는데 최적화된 주인공이 이웃의 불행함에 뛰어들면서 벌어지는 부동산 누아르 장르물이다. 누구라도 의심해라. 『취미는 사생활』의 주제를 요약하면 이렇게 되겠다. 타인은 나에게 조건 없이 잘해줄 수 없다. 인간은 그런 존재이다. 무언가를 바라고 원하니까 다가오는 거다. 너무 인류애가 없는 거 아냐 반문할 수 있지만 사랑에서조차 등가교환의 원칙이 작용한다.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거 정말 편리하다. 문을 닫으면 나의 공간은 차단된다. 옆집에 윗집에 아랫집에 누가 사는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쓸데없는 인간관계를 만들지 않아도 되니 감정 소모를 할 필요도 없다. 제일 좋은 건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 장소가 따로 있다는 거. 여름 관리비는 조금 무섭지만 쉬지 않고 일하는 이유를 관리비를 제때에 내기 위함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 되니까.


아직 장진영의 소설을 전부 읽어보진 않았지만 소설의 분위기를 기괴하게 만들면서 가독성 있게 끌고 가는 힘이 대단하다. 다음 작품도(아직 한 작품 더 남았다. 게으름뱅이야. 부지런히 읽자.) 그러지 않을까 은근 기대 중이다. 제목에 대입해서 나에 관해 떠벌리자만 나의 취미는 내 생활이다. 물어보기 전엔 절대 내 생활 말하지 않고 물어보더라도 화제 돌리기. 


집이란 무엇인가. 엄근진의 무드로 물어보면서 독자의 연약한 팔 안쪽을 꼬집고 도망가 버린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해주다가 너 정말 속았어 너 나한테 당한 거야 황당한 기분을 느끼게 하면서 말이다. 내가 지금 너한테 잘못 걸린 거지? 그렇지만 아니라고 말해줘. 거짓말인 거 아니까. 다시 내게 돌아와 줘. 구질구질하게 매달리게 된다. 『취미는 사생활』을 읽고 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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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천국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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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게 아닌데. 정유정의 신작 장편소설 『영원한 천국』을 받아들고 몇 장 읽어가다가 든 생각이었다. 종합소득세 못 내고 근로소득세 내는 사노비의 하루의 끝에는 책 택배가 와 있었다. 다행이다. 이렇게라도 나 스스로를 (얼마 안 되는 돈으로) 구원할 수 있어서. 책 한 권일 뿐인데 상자에 온다고? 뽁뽁이 담긴 비닐이 아니라. 상자를 열어보고 책 두께에 압도 당했다. 『7년의 밤』보다 더 하잖아. 


책의 앞부분을 읽다가 다시 덮었다. 그러니까 그날은 그런 날이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조차도 쉽게 머릿속으로 진입해 들어오지 않던 날. SF 인가. 그럼 나 좀 취약한데. 힘든데. 말하는 앵무새와 드림시어터와 가상세계라니. 오로지 현실만을 바라보고 현실만을 그리며 사는 나한테 정유정은 SF 소설을 내민 건가. (이런 생각도 웃긴다. 작가의 자유이지 않은가. 뭘 쓰든.)


지역 도서관에서 보내온 알림이 아니었다면 『영원한 천국』을 신속하게 펼칠 생각을 하지 못했을거다. SF 분위기니까 이번에는 좋아하는 작가를 응원하는 마음에 책을 샀다는 사줬다는 것에 의미를 둬야지 어쩌겠어. 나 사는 것도 거시기한데. 그런 마음이었으니까. 도서관에 정유정 소설가가 강연하러 온단다. 예전에도 소설가가 왔었는데 평일 오후 두 시에 온다고. 


그렇게 평일, 오후 두 시면, 나는 못 가잖아. 가고 싶은 마음을 접었다. 이번에도 그러겠지. 했다가 평일은 평인인데 저녁 일곱 시에 온단다. 어쩌면 나 갈 수 있겠네. 아니지 가봐야지. 접수를 했다. 이러다 안 갈 수도 있어. 나는. 약속이나 일정 잡아놓고 가야 한다는 압박이 제일 싫은 사람인데. 다가오는 그날에 내가 분위기가 온도가 습도가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영원한 천국』을 다시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제발 책 좀 가볍게 만들어주세요. 팔이 아파서 책 읽는 자세 찾느라 엄청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징징대지만 『영원한 천국』은 정유정의 소설답게 한 번 읽으면 손에서 팔에서 놓을 수 없다. 내가 걱정했던 SF 적 분위기가 아주 살짝 가미되어 있지만 『영원한 천국』은 사랑 이야기이다. 그것도 아주 지독하고 어렵고 더럽게 슬픈. 


경주와 해상, 제이, 지은. 『영원한 천국』의 문을 닫고 나오면서도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마음에 우울하고 미안하다. 영원히 그곳에 두고 나온 것 같은. 나만 간신이 현실로 돌아와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지구를 파괴하겠다는 각성 없이 에어컨을 하루 종일 틀어 놓는다. 삶도 죽음도 없는 롤라에서 헤매고 있을 그들을 그냥 그렇게 두고 왔어도 되나. 


죽음 없이 인간이 행복할 수 있을까. 죽음이 없으면 인간이 행복해지지 않을까. 『영원한 천국』은 이런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한 소설이다. 삶에는 마지막이 없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죽음에만 마지막이 있다. 삶과 죽음을 따로 놓고 보기 시작하면 두려움도 분노도 사라진다.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 각자의 길로 가면서 묵묵히 소임을 다해라. 삶과 죽음아. 


몸을 두고 기억을 가진 영혼이 업로드되어 살아가는 세계 롤라에서 드림시어터에서 나는 영원히 죽지 않음에 기쁨을 누릴 수 있나. 가상세계 롤라에서 홀로그램의 형태로 나의 기억을 가지고 영겁을 살아야 한다. 『영원한 천국』은 그런 식의 영원한 천국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길고도 박력 있게 고민한다. 해상의 롤라와 경주의 삼애원에서 펼쳐지는 쪼다들의 액션 활극은 팔의 고통을 잊게 만든다. 


그리하여 『영원한 천국』은 인류 보편의 불편의 가치, 누구도 딴지 걸 수도 없는 주제인 사랑 이야기로 나를 울리고야 만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그래서 사랑이라는 거다. 『영원한 천국』은 나를 있는 힘껏 구석으로 몰아서 이런데도 너는 사랑 없이 사랑을 따위로 여기며 소홀해하며 팽개치며 살아갈 거냐고 따져 묻는다. 나는 목이 졸리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혀 말한다. 저는 누구보다도 사랑에 충실한 인간입니다. 그러니 이제 놓아주세요. 사랑하러 가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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