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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스 고스트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소미미디어 / 2023년 5월
평점 :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걱정을 하고 불안해하는 건 내 특기다. 비가 세차게 오기라도 하면 집 뒤에 산이 무너져 토사가 쏟아지지 않을까부터 해서 10일까지 계산서 발행 안 해주면 어쩌나까지. 다 쓸데없는 걱정인 거 안다. 산사태 방지 공사를 했고 10일까지 안 끊어줘도 올해 안에 발행해 주면 된다. 올해가 아니면 다음 해라도. 이월해서 장부를 맞추면 되니까.
그래도 걱정이다. 모든 게. 걱정을 잊기 위해 딴짓을 해본다. 그러다 지쳐 잠든다. 이사카 고타로의 장편 소설 『페퍼스 고스트』에도 딱 나 같은 걱정쟁이 인물이 등장한다. 이름하여 고지모 사냥꾼, 고양이를 지옥에 보내는 모임에 가담한 자들을 찾아가 벌을 주는 러시안블루가 그에 해당한다. 사냥꾼에는 한 명이 더 있다. 아메쇼. 둘은 고지모 회원들을 처리해달라는 고용인의 의뢰로 일을 한다.
러시안 블루와 아메쇼는 당연히 가명이다. 고양이 품종에서 따왔다. 러시안 블루는 줄여서 시안. 그가 걱정쟁이 캐릭터다. 핵무기 실험을 하는 기사, 태양이 8억 년이 지나면 소멸한다는 이야기에 마음을 졸인다. 그에 반해 아메쇼는 당연히 시안과는 반대되는 성격이겠지? 소설이니까. 하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지만 약간 심드렁하고 얼렁뚱땅 말장난을 좋아한다.
시안과 아메쇼 이외에 중요 인물인 단 선생님이 나온다. 그는 특이한 능력을 타고났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는데 남과 비말 접촉 시 타인의 시점으로 미래를 본다. 아버지와 단 선생님은 그걸 '선공개영상'으로 부른다. 미래를 본다고 해서 대단한 활약을 펼치지는 못한다. 공공장소에서 누가 재채기를 하면 침이 묻을 수도 있다. 생판 모르는 남의 미래를 보고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단은 약간의 무력감을 가지고 자신의 능력을 받아들인다.
단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 마리코의 소설을 읽는다. 순전히 그가 국어교사라는 이유로. 시안과 아메쇼는 학생이 쓴 소설의 주인공이다. 소설 속에서 그들은 고지모 회원들을 찾아가 과거 그들의 행적을 상기해 주고 고양이가 당한 짓을 그대로 돌려준다. 단은 사토미라는 학생과 상담을 하다가 재채기 때문에 선공개영상을 본다. 사토미가 위험에 처하는 미래를 보고 점술가라는 허구의 인물을 내세워 조심할 것을 알려준다. 그 일로 단은 사토미의 아버지와 얽히고설킨다.
'페퍼스 고스트'는 연극 용어로 조명과 유리를 사용해 다른 곳에 있는 물체를 관객 앞에 보여주는 수법이다. 마리코가 쓴 소설 속 인물인 시안과 아메쇼는 분명 다른 공간에 있었다. 소설을 읽는 우리만이 그들의 서사를 따라갈 수 있다. 소설 속 다른 현실을 사는 단 선생님은 시안과 아메쇼와 만날 수 없다. 그들은 단이 읽는 소설 속 인물이니까. 『페퍼스 고스트』는 조명과 유리를 살짝 움직여 단 선생님에게 시안과 아메쇼가 사는 세상을 열어준다.
시안과 아메쇼, 단이 한 공간에 모이면서 『페퍼스 고스트』는 사건 해결을 위해 신나게 질주한다. 소설을 읽는 동안 이사카 고타로의 바람처럼 현실의 걱정은 잠시 사라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설 속 인물이며 소설가에 의해 조종당하는 거 아니냐고 끊임없이 의심한다. 의심은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도 전염된다. 소설을 읽고 있는 나 역시 소설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물 아닌지 하는 의심 말이다. 나의 결말은 소설가에게 달려있다는 허무주의적인 생각은 덤.
똑같은 고통의 삶이 반복된다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등장인물에 대입해 보았다는 이사카 고타로의 작가의 말은 『페퍼스 고스트』의 주제에 가닿는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겠지만 살짝만 각도를 비틀어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보여주면 우리의 미래는 다르게 변할 수 있다. 똑같은 고통을 겪으며 반복된 삶을 살바엔 다른 고통을 겪으며 사는 게 낫지. 걱정만 하다가 사는 결말이 정해져 있는 소설 속 세상에 살고 있으면 어때. 어떤 걱정은 아무도 죽지 않는 결말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