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천국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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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게 아닌데. 정유정의 신작 장편소설 『영원한 천국』을 받아들고 몇 장 읽어가다가 든 생각이었다. 종합소득세 못 내고 근로소득세 내는 사노비의 하루의 끝에는 책 택배가 와 있었다. 다행이다. 이렇게라도 나 스스로를 (얼마 안 되는 돈으로) 구원할 수 있어서. 책 한 권일 뿐인데 상자에 온다고? 뽁뽁이 담긴 비닐이 아니라. 상자를 열어보고 책 두께에 압도 당했다. 『7년의 밤』보다 더 하잖아. 


책의 앞부분을 읽다가 다시 덮었다. 그러니까 그날은 그런 날이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조차도 쉽게 머릿속으로 진입해 들어오지 않던 날. SF 인가. 그럼 나 좀 취약한데. 힘든데. 말하는 앵무새와 드림시어터와 가상세계라니. 오로지 현실만을 바라보고 현실만을 그리며 사는 나한테 정유정은 SF 소설을 내민 건가. (이런 생각도 웃긴다. 작가의 자유이지 않은가. 뭘 쓰든.)


지역 도서관에서 보내온 알림이 아니었다면 『영원한 천국』을 신속하게 펼칠 생각을 하지 못했을거다. SF 분위기니까 이번에는 좋아하는 작가를 응원하는 마음에 책을 샀다는 사줬다는 것에 의미를 둬야지 어쩌겠어. 나 사는 것도 거시기한데. 그런 마음이었으니까. 도서관에 정유정 소설가가 강연하러 온단다. 예전에도 소설가가 왔었는데 평일 오후 두 시에 온다고. 


그렇게 평일, 오후 두 시면, 나는 못 가잖아. 가고 싶은 마음을 접었다. 이번에도 그러겠지. 했다가 평일은 평인인데 저녁 일곱 시에 온단다. 어쩌면 나 갈 수 있겠네. 아니지 가봐야지. 접수를 했다. 이러다 안 갈 수도 있어. 나는. 약속이나 일정 잡아놓고 가야 한다는 압박이 제일 싫은 사람인데. 다가오는 그날에 내가 분위기가 온도가 습도가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영원한 천국』을 다시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제발 책 좀 가볍게 만들어주세요. 팔이 아파서 책 읽는 자세 찾느라 엄청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징징대지만 『영원한 천국』은 정유정의 소설답게 한 번 읽으면 손에서 팔에서 놓을 수 없다. 내가 걱정했던 SF 적 분위기가 아주 살짝 가미되어 있지만 『영원한 천국』은 사랑 이야기이다. 그것도 아주 지독하고 어렵고 더럽게 슬픈. 


경주와 해상, 제이, 지은. 『영원한 천국』의 문을 닫고 나오면서도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마음에 우울하고 미안하다. 영원히 그곳에 두고 나온 것 같은. 나만 간신이 현실로 돌아와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지구를 파괴하겠다는 각성 없이 에어컨을 하루 종일 틀어 놓는다. 삶도 죽음도 없는 롤라에서 헤매고 있을 그들을 그냥 그렇게 두고 왔어도 되나. 


죽음 없이 인간이 행복할 수 있을까. 죽음이 없으면 인간이 행복해지지 않을까. 『영원한 천국』은 이런 물음에 답을 하기 위한 소설이다. 삶에는 마지막이 없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죽음에만 마지막이 있다. 삶과 죽음을 따로 놓고 보기 시작하면 두려움도 분노도 사라진다.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 각자의 길로 가면서 묵묵히 소임을 다해라. 삶과 죽음아. 


몸을 두고 기억을 가진 영혼이 업로드되어 살아가는 세계 롤라에서 드림시어터에서 나는 영원히 죽지 않음에 기쁨을 누릴 수 있나. 가상세계 롤라에서 홀로그램의 형태로 나의 기억을 가지고 영겁을 살아야 한다. 『영원한 천국』은 그런 식의 영원한 천국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길고도 박력 있게 고민한다. 해상의 롤라와 경주의 삼애원에서 펼쳐지는 쪼다들의 액션 활극은 팔의 고통을 잊게 만든다. 


그리하여 『영원한 천국』은 인류 보편의 불편의 가치, 누구도 딴지 걸 수도 없는 주제인 사랑 이야기로 나를 울리고야 만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그래서 사랑이라는 거다. 『영원한 천국』은 나를 있는 힘껏 구석으로 몰아서 이런데도 너는 사랑 없이 사랑을 따위로 여기며 소홀해하며 팽개치며 살아갈 거냐고 따져 묻는다. 나는 목이 졸리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혀 말한다. 저는 누구보다도 사랑에 충실한 인간입니다. 그러니 이제 놓아주세요. 사랑하러 가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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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바보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선영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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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 방기한 유튜브 선생님이 추천해 준 노래가 있으면 한 곡을 반복해서 듣는 게 요즘 나의 힐링의 순간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데이식스의 〈 congratulations 〉를 무한 반복해서 듣고 있다. 소리를 광광 크게 틀어 놓고 멍하니 있으니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싹 사라지는 건 아니고 어느 정도 엷어지는 기분이다. 연속 재생해서 가사를 외울 때까지 들어보자. 


이사카 고타로의 소설을 좋아해서 한동안 목록을 적어 놓고 읽던 시기가 있었다. 그 후로도 이사카 고타로의 신간이 나오면 냅다 주문부터 갈긴다. 책이 오면 바로 읽는다. 이사카 고타로의 소설은 그런 힘이 있다. 읽고 있으면 힘이 난다. 소설 곳곳에 이상한 용기를 심어 놓고 위로를 한다. 『종말의 바보』는 예전에 읽었지만 늘 그렇듯 그때 좋았고 지금은 기억에 나지 않았다. 


넷플릭스에서 드라마가 나오고 다시 한번 읽어볼 요량으로 책을 찾았지만 이게 뭐야 품절이란다. 비싼 중고책이라도 사서 읽어보려고 했지만 여러 번 주문취소 당해서 잊어버리고 있었다. 또 늘 그렇듯 일하다 마음이 좋지 않아 서점 앱을 열어 신간 목록을 훑었다. 어 어 어 뭐지 했는데 『종말의 바보』가 올라와 있는 게 아닌가. 나 같은 독자들이 많았구나.(드라마로 나오자 원작을 읽어보고 싶은 문학적인 소양이 풍부한.)


병원 갔다 바로 집에 가기 싫어서 카페에 들러 『종말의 바보』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 중 네 편을 읽었다. 커피 내리는 소리 사람들의 대화 소리 주문을 받고 알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천천히 느릿느릿 소설을 읽어 갔다. 묘하게 집중이 잘 되었다. 오늘의 걱정과 내일의 불안은 『종말의 바보』를 읽어가는 동안 흐릿해져 갔다. 8년 후에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한다는 설정의 이야기이니까.


죽는 건 무섭다는 게 아직까지도 기본값이다. 가끔씩 아플 때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을 때 이게 죽는 건가 겁쟁이는 그런 생각에 빠진다. 좀, 많이 무섭구나.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다. 이사카 고타로의 『종말의 바보』는 겁쟁이 바보에게 죽음이란 네가 생각하는 게 아니란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자상하게 말해주는 소설이다. 


결코 무섭고 공포스럽지 않다. 8년 후에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한다. 사람들은 패닉에 빠진다. 방화와 약탈, 살인이 일어난다. 소설의 배경은 센다이 북부에 있는 '힐즈 타운'이다. 어느 정도 소란이 가라앉은 시점으로 소행성이 충돌하기까지 3년여의 시간이 남았다.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고 후회하는 사람이 있고 종말의 시간에도 아이를 낳아 길러 보겠다는 마음을 갖는 사람이 있다. 


비디오 연체자 명단을 뽑아서 그들을 찾아가고 복싱을 배우며 하루하루를 소중히 보낸다. 좋아하는 사람을 찾고 싶어 하고 가족을 연기하며 유사 가족을 꾸리기도 한다. 매일 종말의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어떨까. 그런 마음을 강요하는 건 아니고 나에게만 그렇게 해보라는 거다. 내일 죽는다. 너는 어떻게 오늘을 보낼래? 좋아하는 음악을 반복해서 듣고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읽고 좋아하는 사람의 연락을 기다린다.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바보라서 이런 다짐을 잊어버리겠지만 좋아하는 걸 한정 없이 좋아하는 걸로 종말의 시간을 유예하기로 한다. 예전에 읽었던 소설의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바보라는 것도 좋다. 새로운 마음으로 책을 읽는 시간을 나에게 선사해주는 거라서. 바보야 오늘도 잘 지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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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마음만 먹으면 트리플 5
장진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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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식으로 울기 좋은 밤이 또 어디 있었을까. 울고 싶은데 눈물이 나오지 않는 날도 있었지. 울음을 참으려고 했지만 터져 나오는 울음에 순종한 적도 있었지. 오늘이 울기 좋은 날이면 울어야지. 참으려고 하지 않고. 그렇게 울어 버려서 코가 막히고 축농증이 찾아오고 향기와 악취를 구분하지 못했다. 좋았던 건 음식물 수거차가 지나가도 인상을 쓰지 않은 것. 싫었던 건 책상 위에 놓아둔 디퓨저의 향기를 상상만 해야 했던 것. 


장진영의 소설집 『마음만 먹으면』을 읽고 제목을 가져와 나에 대해 말해본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음 음. 아차. 나는 마음을 먹기까지의 과정이 긴 사람이지. 마음을 먹으면 실천하고 행동하는 적극적인 면모를 보여야 하는데. 나는 웬만해선 마음을 먹지 않는 사람이야. 그래 그런 사람이야. 계속 오래 생각만 한다. 그래도 한 번 마음만 먹으면 빠르게 움직이죠? 물어도 마음을 먹어도 그 마음에 대해 오래 생각한다는 대답을 들려줄 뿐이다. 


『마음만 먹으면』에는 세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곤희」와 「마음만 먹으면」, 「새끼돼지」. 세 편의 분위기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이렇게 말하는 거 무책임한 거 아는데 읽어보면 느낄 수 있다. 우울의 무드 안에서 이상한 발칙함이 소설 곳곳에 깔려 있다. 자신의 불행을 전시하기를 즐기는 곤희를 잠깐 보살피며 나를 돌아보는 이야기 「곤희」를 통과하면 섭식장애를 가진 주인공이 정신 병동에서 지내는 일상을 그리는 「마음만 먹으면」이 손을 흔든다. 어서 와 이런 불편한 바이브는 처음이지?


「새끼돼지」까지 읽고 나면 더 마음이 답답해진다. 친척 아이와 함께 지내면서 느끼는 어색함과 불안함까지. 장진영의 특기는 어색함, 불편함, 고단함, 냉소의 마음, 비꼬고 싶은데 참아내는 숨 막힘의 정서를 표현해낸다는 것이다. 일단 책을 많이 사서 쟁여 놓는 이유는 책이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한 권씩 읽어내며 어디 내 마음을 표현해 놓은 문장이 없나 찾기 위해서이다. 


책을 펼쳐볼 힘조차 없을 때는 울 준비를 한다. 어제의 분노는 사라지지도 않고 오늘로 적립되었고 치사하게 구는 내가 싫은데 그대로 놔둔다. 나의 부족함과 미성숙함은 미래에도 계속될 것 같아서 속상하다. 『마음만 먹으면』에는 소설 말고 에세이가 한 편 더 실려 있다. 소설이 끝나버려 섭섭한 마음을 금할 길 없는 없는 독자를 향한 애교 같은 에세이. 모두 아파도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아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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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 제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문미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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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괜찮을까.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낸다거나 극복해낸다거나 하는 마음 없이도. 문미순의 장편소설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이다. 소설 속 인물인 명주와 준성이 처한 현실이 가혹해서 빛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지나고 있어서 과연 그들이 오늘을 버텨낼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소설을 읽는 동안 가슴이 아파서 끝내는 눈물이 터져 나와서 힘들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아닌 일은 아니다. 매 순간 힘들다. 매 순간 지친다. 가끔 괜찮고 가끔 힘이 난다. 가끔의 순간이 매 순간을 버티게 해준다. 나만 힘든 건 아닐 거야. 그러다 나만 힘든 거 아니야?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으려고 하지만 기분은 기분이니까. 기분에 충실해지기도 한다. 이런 나의 감정의 상태를 '짜친다'는 말로 표현한다. 


짜쳐 있는 나는 문미순의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을 읽으면서 반성했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기대어서 말이다. 비겁한 방식으로 나의 힘듦을 털어낸 것이다. 명주와 준성이 처한 현실에 비하면 나의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은 말한다. 치매에 걸린 엄마가 죽었다. 죽은 엄마를 발견한 명주는 간신히 생각을 부여잡는다.


엄마의 사망신고를 하고 장례를 치르게 되면 엄마 앞으로 나오는 연금을 받지 못한다. 명주는 아마포와 나무관, 방습제를 사서 엄마의 시신을 작은방에 모신다. 엄마가 살아 있는 것처럼 꾸며서 연금을 계속 받으려고 말이다. 이혼하고 혼자 살면서 생계를 꾸려 가던 명주는 급식실에서 일하다 발에 화상을 입는다. 50대, 여자, 명주는 그 후에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한다. 


명주 옆집에 사는 준성은 스물여섯. 고등학교 3학년에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아버지를 간호하느라 학교는 자퇴했고 검정고시로 겨우 대학에 진학한다. 물리치료학과를 나왔지만 돈을 버느라 시험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대리기사로 일하면서 아버지가 받는 연금에 돈을 더해서 생활을 이어간다. 형이 있지만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사라졌다. 


명주와 준성은 각자의 부모를 간병하느라 자신의 꿈과 희망을 유예한다. 꾸역꾸역 하루를 버틴다. 온전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서 말이다. 명주는 엄마의 시신을 작은방에 놓아두고 나온 연금으로 화장품을 산다.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사지 못하던 명주는 잠시나마 불온한 해방감을 맛본다. 접점이 없을 것 같은 명주와 준성의 기묘한 연대가 시작된다. 


소설의 제목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을 오래 되뇌어 보았다. 내가가 아닌 우리가.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이라니. 소설의 내용에 기대어 제목으로 독자를 울게 만든다. 빛이 없을 것 같은 긴 터널을 지나는 것만 같은 그들의 하루가 끝내는 미약한 불빛으로 밝아진다. 한참의 어둠 뒤에 나타난 빛은 오늘에 이어 내일을 살게 만든다. 그거면 됐다.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내일을 만들어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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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칵테일, 러브, 좀비 안전가옥 쇼-트 2
조예은 지음 / 안전가옥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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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이 세계에는 어둠과 슬픔만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나의 기분마저도 내가 어쩌지 못할뿐더러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무느라 한여름인데도 입이 텄어요. 음식을 먹으려고 할 때마다 양쪽 입가가 아파서 입을 다물게 됩니다. 조금씩 먹고 느리게 삼킵니다. 어떤 하루에는 밥을 먹지 않기도 해요. 귀찮죠. 귀찮아요. 내 입에 들어가는 음식을 내가 구해야 하다니. 차라리 안 먹고 말죠. 


그럼 이건 어떨까요? 말을 하지 않아도 나의 기분을 알아주는 이야기와 문장을 만나는 것. 참을 수 없는 현실에서 도망치는 것. 먹을 걸 사는 돈을 아껴 책을 사는 일로. 입가가 찢어지는 고통을 외면해 보는 일. 고통과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은 없는 것 같으니 그런 감정에 나를 놓아두고 허구의 세계로 도피하는 거죠. 그 세계에서 나는 관전자가 됩니다. 


가만히 조용히 말없이 먹지도 않고 인물의 고통을 지켜봅니다. 조예은의 소설집 『칵테일, 러브, 좀비』 속 세계로 나를 끌고 들어갑니다. 남자친구의 평가에 힘들어하는 여자가 있어요.(「초대」) 그녀는 이별을 준비 중입니다. 그렇죠? 안전 이별이 될 것 같진 않죠. 「초대」의 여성 주인공들은 다릅니다. 그녀들 스스로 악당이 되어 자신을 지켜냅니다. 응원합니다, 저는. 


맙소사. 귀신들의 사랑이라니.(「습지의 사랑」) 너무 애틋해서 나 죽어요. 물귀신과 숲귀신의 썸 그리고 연애 과정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려옵니다. 개설레기도 하고요. 숲귀신의 작업 멘트, "내일도 올게. 숨지 말고 인사해 줘. 알겠지?"를 듣는 순간 나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어요. 이를 어째. 숲귀신이 자신의 명찰을 물귀신에게 주는 장면에서는 기절인 거죠. 


좀비 바이러스가 퍼져도 출근을 해야 한다니.(「칵테일, 러브, 좀비」) 현실에서 도망친 나를 무섭게 만드네요. 좀비로 변한 아버지 역시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을 갖고 행동합니다. 소름 끼치네요. 아니죠. 현실에서도 아침이면 좀비로 변신해 출근하는 내가 있었네요. 무섭고 소름 끼치는 게 아니라 일상의 일입니다. 엄마와 주연이 계속해서 행복의 빈도를 늘려가면서 지냈으면 해요.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말이죠.(「오버랩 나이프, 나이프」) 어린 시절 그 밤들에 우리가 가장 먼저 했던 건 흉기가 되는 물건을 치우는 일이었어요. 기억나죠? 달리기가 빠르지 못해 도망가는 건 포기하고 담벼락 밑에 숨어 있었어요. 시간을 돌리는 일 따위는 상상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생각도 못 했죠. 어서 빨리 이 밤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정도였죠. 소설은 그런 밤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칵테일, 러브, 좀비』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내가 좋아요. 어둡고 축축하고 이상한 사랑을 말하는 『칵테일, 러브, 좀비』의 세계관을 나는 사랑할래요. 이 세계와 그 세계의 사랑이 다르지 않잖아요. 낡고 누덕누덕 기운 사랑의 옷을 입을래요. 술에 취해서 하는 말들을 농담으로 여기지 않아요. 사랑은 어디에도 없었고 어디에나 있어요. 인간의 기억을 읽은 좀비가 되어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소멸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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