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마음대로 살아보겠습니다 - 현실은 엉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원지 지음 / 상상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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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텔레비전 중독자니까. 추가하자면 어느새 유튜브에도 스며들었으니까.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여행 유튜버 원지의 하루를 알게 된 계기는 한 현대인의 중독에서 시작되었다. 원지 씨만의 여행 스타일을 묻는 질문에 불통이라고 답한 부분에서 확 끌렸다. 스몰 토크를 하지 않기 위해 눈을 안 마주치거나 어딘지 모르게 시선을 둔다는 말에도. 


그렇다면 당장 유튜브를 켜고 영상을 볼까. 영상은 방대했고 여행 유튜버가 올린 여행 영상이 아닌 나는 그가 노랑 동굴이라고 부르는 방 안에서 하루 종일 누워 있거나 누워 있는 영상을 홀린 듯이 보고 있었다. 시작은 어둠침침한 방에서 판소리 비슷한 앓는 소리를 내는 것으로 시작하는 영상을 내내 보았다. 본인도 방 안에서 칩거하는 영상을 찍으면서 대체 이걸 왜 보고 있냐고 웃었다. 


검색해 보니 책도 있었다. 영상을 계속 보면 되는데 활자에도 중독된 자 답게 당장 책을 주문했다. 『제 마음대로 살아보겠습니다』는 방송에서도 나온 유년 시절 판잣집에서 살았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자신만의 공간이 간절했던 그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아프리카라는 꿈을 꾼다. 내 꿈은 오늘부터 너야라고 박연진에게 말하는 문동은처럼 원지의 하루의 꿈은 아프리카가 된다.


아무것도 안 하고 꿈만 꾼다고 꿈이 이루어질 리는 없다는 거 다들 알고 있으니까. 졸업작품만을 끝내놓고 휴학을 한 그는 구두 매장에서 일을 한다. 쉬지 않는 스타일의 점장 밑에서 하루 종일 서서 일을 했다. 쉬는 시간은 점심시간뿐이었고 주먹밥을 얼른 먹고 비행기 표, 비자 발급에 대해 알아보는 나날이었다. 월급에 99%를 저금해 800만 원을 모았고 드디어 아프리카로 떠났다. 


영상을 보면 원지의 하루 만의 특이한 말투에 매료된다. 길을 건널 땐 자신이 만든 독특한 의성어 호롤룰로를 말하며 건너고 화 마이나따를 추임새처럼 던진다. 미쳐, 안 미쳐, 어떠한 상황에도 갖다 붙이면 특별해지는 대무슨무슨시대라는 말을 듣고 있으면 나 역시도 일상에서 원지의 하루 말투를 따라 하고 있다. 음식을 찍을 땐 카메라를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마싯는거를 말한다.


『제 마음대로 살아보겠습니다』는 여행 영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아프리카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여행 유튜버로서 자리 잡기까지의 원지의 하루하루가 궁금하다면 책을 읽으며 궁금증을 풀어나가도 좋겠다. 세부적인 계획을 짜서 여행을 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여행을 시작한다. 피곤하게 자신을 몰아붙이는 스타일도 아니다. 


누워서 이동시켜 주는 걸 제일 좋아한다는 카페라테를 즐겨 마시고 노랑 동굴 안에서도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 분기마다 침대 매트리스를 뒤집는 원지의 하루. 인간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말을 발랄하게 하는 원지의 하루. 그러면서도 여행은 꼬박꼬박 간다. 계획했던 일은 실패하고 뜻하지 않은 일에 휘말리는 대원지시대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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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 MBTI 테마소설집 1
정대건 외 지음 / 읻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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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A형. ISFP.


이렇게 밝히면 나에 대해 다 알 수 있나. 다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짐작은 가겠지. 소심하고 소심하고. 집에 있어도 집에 가고 싶고 누워 있어서 넘나 행복한 사람. 누워서 내일 뭐 해야지 계획하지만 막상 일어나면 계속 누워 있다. 일어나니까지 두 시간이 넘게 걸린다. 할 말이 있는데 울음이 먼저 터져서 못하고 이박 삼 일 동안 앓아누우면서 그때 그 말을 했어야지 대본을 쓰고 있다. 


알라딘에서 독자 펀딩 한다고 푸시 알림을 보내왔다. 내가 전화기에 이런 설정을 해놨던가. 아무튼. 토끼와 호랑이 일러스트 표지가 깜찍한 무엇보다 이서수의 단편이 실려있다는 말에 홀린 듯 펀딩에 참여한 책, 『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에 뒷장에는 내 이름이 있다. 펀딩에 참여해 줘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혈액형 성격학의 시대가 가고 바야흐로 MBTI의 시대가 도래했다. 


성격을 정의하는 단어는 500개가 넘는데 빠르고 간단한 걸 좋아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게 알파벳 16개로 상대의 성격을 알 수 있는 MBTI는 인기가 있나 보다. 하도 MBTI MBTI 하길래 나도 검사해봤다. 결과는 ISFP. 인터넷에서 잇프피에 대해 찾아보다가 마치 점쟁이 앞에서 맞아요, 맞아, 제가 그랬어요 하는 것처럼 되더라. 나도 날 잘 모르는데. 알파벳 네 개는 나에 대해 친절하고도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는 각각의 MBTI 유형들을 주제로 묶은 테마소설집이다. 인티제부터 인팁, 엔팁, 엔프티 등 여섯 개의 MBTI 유형의 인물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잇프피는 없나. 잇프피는 이 소설집에는 없고 2권에서 소설가 이주란이 그린단다. 그때까지 존버. 사회적인 동물로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이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데 처음 만난 사람과 무람없이 할 수 있는 대화의 주제란 날씨와 날씨. 그 외 다른 걸 물어보는 걸 극혐하는지라 어색해지고 만다. 


그럴 때 MBTI를 물어보는 건 더 최악이겠지. 80년 대생 티 나게 혈액형이 어떻게 되세요는 트렌드에 뒤처지는 자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어 MBTI가 더 나으려나. 확실한 자기 의견이 없고 글을 쓸 때도 단정 짓는 걸 어려워하는 잇프피라 지금도 이랬다저랬다 하고 있다. 그래도 최근에는 내가 잇프피라는 걸 알았고 아이와 이의 성향 차이 정도는 구분할 수 있어서 물어보곤 한다. 


이서수의 소설 「알고 싶은 마음」의 내용처럼 알고 싶어서 좀 더 다가가고 싶은 마음에 MBTI를 물어보는 거라면 귀엽게 봐줄 수도 있지 않을까. 테마소설집을 읽으면 좋은 게 하나의 주제로 다른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의 개성과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이야기. 한 작가를 좋아하면 거의 사찰 수준으로 좋아하는데 MBTI까지 알 수 있다니 어찌 펀딩 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잇프피답게 주말 이틀도 누워 지냈다. 여행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좋아하죠, 여행, 내방여행이요라고 했다가 갑분싸해졌지만 잇프피들은 누워서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닐 수 있다. 책으로 여행 지식 쌓고 유튜브로 본 여행지의 감성을 대신 느끼며 눈 오는 날은 밖에 나가지 않고 눈이 내리는 풍경을 화면에 띄워 놓은 채 초콜릿을 까먹는 아주 훌륭하고 방구석스러운 분위기를 느끼느라 피곤하다. 


책에는 소설집에 참여한 작가들에게 자신의 MBTI에 대해 인터뷰한 글이 있다. 잇프피면서 인프피 소설을 쓴 김화진 소설가의 답변이 웃겼다. 잇프피 영화 하나 추천해 달라고 하는데 답변이 자신이 없어서 거의 울고 있다고. 어쩜. 잇프피들은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를 절대 하지 못하는군. 같은 인류를 만나서 웃기고 반가웠다. MBTI 그게 뭐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 각박한 세상에 잠시 어색함을 내려놓고 웃을 수 있다면 MBTI 할아버지라도 믿을란다. 


나 잇프피니까 싫은 소리는 하지 말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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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디 얀다르크 - 제5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염기원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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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될 때마다 귀가 가렵다. 더러운 거 아는데 그럴 때마다 손가락을 넣어 귀를 판다. 피가 나고 나중에는 염증이 생겼다. 병원 가기 싫어서 몇 년 전에 처방받은 연고를 면봉에 묻혀서 임시 조치를 했다. 감기에 걸려서 어쩔 수 없이 병원에 갔을 때 석션으로 코를 뚫고 그전에 코로나 검사도 하고 음성이어서 속으로 다행, 다행 그러면서 의사에게 귀에서 피가 난다고 했다. 의사는 귀 건드리지 마세요 했다. 네네네.


다행히 위병은 없는 듯. 역류성 식도염 그런 것도 없고. 불면증도 없다. 너무 잘 자는 게 문제. 베개에 머리가 닿으면 침을 질질 흘리면서 잔다. 그러고도 주말에 낮잠을 기본 세 시간 때린다. 염기원의 장편소설 『구디 얀다르크』의 주인공 사이안은 직장에 다니는 내내 불면증에 시달린다. '야근해도 정시출근, 회식해도 정시출근, 야근과 회식이 없어도 새벽 네 시가 되어야 잠드는 생활을 수없이 반복했다.' 이안의 불면증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구디 얀다르크』는 센스 있는 자라면 알겠지만 구로디지털단지, 이안과 잔다르크를 줄인 말이다. 과거 경공업 중심의 산업화 시절에 구로공단은 섬유 및 의류공장으로 가득했다. 지금은 지방으로 공장이 이전하고 IT 기업, 벤처 중심의 스타트업 회사들이 들어섰다. 이름도 구로디지털단지로 바뀌었다. 그곳에서 불면증 때문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이안이 IT 회사에 입사하고 그 또한 불면증 덕분에 업무에 쉽게 적응한다. 


발주 물량을 맞추기 위해 각성제를 먹어가며 일하던 여공은 잠을 자고 싶어 수면제를 먹으며 미싱 대신 컴퓨터 앞에 앉은 이안으로 21세기에 도착해 있다. 술자리에서 하는 불행 배틀은 지겹다. 쇼미 더 불행도 아닌데 다들 술만 마시면 자기 살아온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영혼 조금 담아 호응을 해주지만 힘들다. 여기 안 힘든 인간이 어딨냐. 내가 썰을 안 풀었다 뿐이지 장난 아니다.


책으로는 괜찮다. 이안 역시 한 불행했다. IMF 때 은행에 다니던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그 일 이후 엄마는 키친드렁커가 되었다. 엄마는 헌신했던 교회에서도 버림받았다. 시집 식구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이안은 불면증을 힘 삼아 공부를 하고 대학에 간다. 힘들어하는 엄마를 외면하며 대학 생활을 즐기지만 이마저도 엄마의 잘못된 선택으로 어려워진다. 이안은 간신히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간다. 


회사에 들어가면서 고통은 증폭된다. 업무는 그렇다 치고 인간들은 왜들 그러는지. 다들 퇴사의 이유 중에 하나가 인간관계 때문인 거죠. 『구디 얀다르크』는 IT 회사와 스타트업에서 벌어지는 악독한 근로 환경을 고발한다. 이안은 산전수전 다 겪으며 노조를 설립한다. 이안이 아침에 일어나는 걸 힘들어하면서도 꾸역꾸역 회사에 다니는 장면에서 그게 싫어 회사를 차려 대표가 되었지만 월급날이 기다려지는 게 아닌 무서워하는 장면에서 사는 건 별거 없다. 그저 죽을 때까지 죽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농협 간부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의 기사를 보게 되었다. 젊은 나이였다. 그가 남긴 글과 지인들의 이야기는 슬프고 힘들었다. 『구디 얀다르크』의 결말이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자주 내가 아닌 것처럼 굴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육성으로 파이팅 외쳐주는 누군가가 옆자리에 있으면 좋겠다. 잘 싸우자, 잘 싸워라. 너도 나도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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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이해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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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수영을 이해했다. 아니 이해하고 말았다. 감히 이해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혁진의 소설 『사랑의 이해』는 제목만 들으면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처럼 사랑 담론서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데 소설의 형식을 취한 이해 불가능한 사랑을 네 남녀를 등장시켜 풀어낸다. 풀어낸다고 썼지만 매듭을 지을 수 있는 건 소설을 끝까지 읽고 오랫동안 상수, 미경, 수영, 종현을 잊지 못하는 독자의 몫이다. 


건조한 문체의 소설이다, 『사랑의 이해』는. 간단하게 말하면 은행에서 벌어지는 네 남녀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인데 간단하게 말해지지 않는 소설이다, 『사랑의 이해』는. 그 옛날 《사랑의 스튜디오》 버전 식으로 얘기하자면 네 남녀가 쏘는 사랑의 막대기는 어긋나기만 한다. 상대가 관심을 표하면 일단 받아들인다. 그러고 생각한다. 내가 저이를 사랑하는 걸까. 


관심과 위로에 목말라 있는 현대 사회에서 나누는 애정결핍으로 가득 찬 연애를 그리고 있다. 다시 안수영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드라마로 만들어져 방영되고 있어 원치 않아도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뜬 《사랑의 이해》 클립을 보고야 말았다. 덕분에 책을 읽기도 전에 여주인공의 이미지를 획득했다. 그래 그건 좋고. 활동하지 않는 뇌세포를 굳이 깨울 필요 없게 도와준 거니까. 


문가영=안수영으로 가고 유연석=하상수로도 가면서 『사랑의 이해』 속으로 쉽게 쉽게 진입할 수 있었다. 소설 다 읽고 드라마 봐야지 했던 건 결말을 미리 알고 싶고 한 권의 소설을 16부작으로 늘였으면 이야기 진행이 더딜 것이라는 짐작 때문이다. 이제 나는 결말을 알고 주인공의 미래까지도 아는 전지적작가시점으로 드라마를 볼 수 있는 권한이 생겼다. 『사랑의 이해』를 읽으므로써. 


아. 안수영. 이제 진짜 안수영 이야기. 소설의 결말로 나아가면 안수영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염려가 든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생각했다. 상수는 끝까지 수영의 행동을 이해 못 한듯싶다. 왜, 왜 그랬어? 수영아를 묻고 싶지만 참는다. 나는. 수영이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었다. 경향신문 젠더기획팀이 지은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차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설명하기 어려워졌을 뿐이다.'


은행에서 벌어지는 직장 로맨스 성격을 띠는 『사랑의 이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느 직장에서나 벌어지고 있는 차별 서사도 다루고 있다. 수영은 창구 직원인 텔러이고 종현 역시 계약직 청경이다. 상수나 미경은 행원으로 분명하게 계급이 나누어진 채 사랑을 시작한다. 수영을 두고 회식에서 나누는 쓰레기 같은 대화들. 능력이 있음에도 외모와 언행으로 말해지는 수영의 업무. 자신을 뻔히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아는 상수 앞에서는 할 말을 다 하지만 집세와 생활비를 생각하느라 정작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술자리에서의 수영의 머뭇거림. 


그런 수영의 머뭇거림을 알아채고 부당함을 부당하다고 알려주는 인물의 등장. 그래서 수영은 새벽에 전화를 건다. 


가장 솔직해져야 할 사랑 앞에서 자신의 진심을 감추고 왜곡하는 인물들을 통해 이제 사랑조차 중산층만 가능해질 것이라는 예언을 한다. 조건과 조건을 따져가며 조건 밖에는 남지 않는 연애의 끝은 쓸쓸하다 못해 허무와 후회에 자책이 뒹군다. 사랑의 이해라고 했지만 사랑은 이해가 가능하지 않다는 걸 내내 외치고 있다. 이해하려 할수록 알 수 없게 되는 정답 없이 오답풀이만 가득한 사랑이라는 난제를 받아든 우리는 상대에게 무얼 줄 수 있을까. 


준다고 해봤자 오해하기 딱 좋은 이상한 진심 밖에는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이해하려고 하지만 수영이라는 인물을 초반부에 그리는 방식은 여전히 전형적이고 틀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중간과 끝으로 가기 위한 빌드업이었겠지만 이는 작가가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상수는 수영을 이해하지 못했다. 수영도 그걸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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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서머스 1~2 세트 - 전2권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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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페인트칠을 하다가 미칠 집에서 배운 게 있다면 이 세상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이렇게 둘로 나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TV를 보며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이 세상은 셋으로 나뉘었다. F.W.S. 멀킨 보안관보가 내게 가르쳤던 것처럼 가끔 참아 가며 사이좋게 지내는 사람들이 세 번째 부류다. 이 세상 사람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하는 회색 인간들이다. 그들은 (최소한 일부러는) 나를 해치지 않지만 나를 돕지도 않는다. 네 마음대로 살되 하나님의 가호가 있길 바란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세상은 각자 알아서 살아가야 하는 곳이다.

(스티븐 킹, 『빌리 서머스』中에서)


대체 스티븐 킹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한계란 게 있긴 한 걸까. 킹의 신작 소설 『빌리 서머스』를 읽으며 든 생각이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경이와 찬탄이 들었고 소설이 끝나갈 때는 슬픔에 빠졌다. 초자연적이고 불가해한 상황을 주요 소재로 쓰며 호러킹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문학킹, 이야기킹, 서사킹으로 바뀌어야 한다. 대중소설가로 각인되어 있지만 그의 소설 안에는 문학의 아름다움이 한가득이다.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을 위한 마음을 잃지 않는. 


전직 해병대 출신 저격수 빌리는 호텔 로비에 앉아 만화책을 손에 든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만화책은 사람들에게 바보 빌리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고 실제 그는 『테레즈 라캥』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두 남자가 빌리를 태우러 오고 빌리는 닉의 집으로 간다. 닉은 빌리의 나이를 묻고 그가 은퇴하기 전에 한 건을 더 하기를 제안한다. 한 건이란. 청부 살인이다. 


보수가 200만. 50만은 착수금, 나머지는 이후에 지급하는 조건이다. 빌리는 휘파람을 불고 닉에게 상대가 나쁜 놈이냐고 묻는다. 일을 하기 전에 늘 하는 빌리의 질문. 빌리는 나쁜 놈만 처단한다. 킬러에게도 신념이 있다면 그런 것이다. 나쁜 놈만 죽인다. 닉은 설명한다. 타깃은 빌리와 같은 일을 하는 직군. 대신 그는 상대가 좋은 놈인지 나쁜 놈인지 가리지 않고 죽인다. 조라고 지칭한 그는 학교에 가던 열다섯 살짜리를 제거한 전적이 있다. 


저격수가 저격수를 저격해야 하는 상황. 빌리는 조의 만행을 더 듣고 일을 착수한다. 그때부터 빌리는 신분 위장을 하고 대기한다. 빌리라는 이름 대신 데이비드 로크리지로 저격수라는 직업 대신 작가로 위장한다. 조를 저격하기 위해 대기하는 장소에서 빌리는 작가 행세를 한다. 처음에는 일을 의뢰한 일당들을 속이기 위해 글을 썼지만 나중에는 글쓰기라는 구원자를 만난다. 문장과 어법을 엉터리로 쓰면서 시작했지만 글을 쓸수록 바보 빌리가 아닌 그냥 빌리를 불러낸다. 


『빌리 서머스』 초반 줄거리의 내용은 이렇다. 어떤가 읽고 싶지 않은가. 킬러가 글을 쓰기 시작한다. 어쩌다가 그가 킬러가 됐는지 궁금하죠. 은퇴 전에 맡은 마지막 일을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내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대하소설이 될 거라고. 엄청난 일들이 닥쳤고 나는 그걸 이겨냈다고. 그런 사람들치고 진짜 글을 쓰는 사람은 없는 거죠. 『빌리 서머스』의 빌리는 해낸다. 조를 쏘기 전까지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작가 행세를 했지만 그는 진정한 작가로 거듭난다. 


작가면 작가지 진정한 작가가 무엇인가. 소설이 끝나면 등장인물들의 내일은 어떻게 될까. 작가가 정해준 결말대로 끝이 나는 건가. 『빌리 서머스』의 빌리는 킹이 정해준 결말대로 살지 않을 것이란 암시가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행복한 결말이 이제는 통용되지 않고 열린 결말로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는 게 트렌드라고 하는 시대에 스티븐 킹 역시 『빌리 서머스』의 결말을 열어준다. 


빌리의 말처럼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으면서 나를 해치지도 않지만 도와주지도 않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빌리는 어떤 사람이냐면. 소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빌리는. 


초자연적이고 이해 불가능한 건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현상 아닐까. 스티븐 킹은 그걸 깨달은 듯하다. 어린 시절 무서워하던 존재가 어른이 되어서도 나타나고 불이 저절로 켜지고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인간이 있는 일 보다 곤경에 처한 이를 구해주는 일이 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말이다. 


빌리 만세, 스티븐 킹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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