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마중 마음산책 짧은 소설
문진영 지음, 박정은 그림 / 마음산책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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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진영의 짧은 소설집 『햇빛 마중』을 다 읽고 목차를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너무 좋은 사람〉, 〈한낱 사람으로 우두커니〉, 〈계절은 우리와 관계없이〉, 〈우리는 우리의 궤도를 따라〉라는 큰 제목 아래 짧은 소설이 모여 있다. 단순히 제목만 놓고 보자면 〈계절은 우리와 관계없이〉라는 말의 어감이 좋았다. 시간이란 한 방향으로 흐른다고만 생각했다. 일직선상에 과거, 현재, 미래가 순서대로 놓여 있어 착실하게 각자 할 일을 다한다고. 


과거라고 생각되었던 시절은 과거가 아니게 되는 순간을 여러 번 맞이하게 되었을 때 시간의 흐름은 일방적이지 않다고 깨닫게 되었다. 현재는 과거가 되기도 미래는 현재가 되기도 하는 뒤죽박죽된 세계라는 걸 받아들이면 편안해진다. 지금은 겨울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봄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계절은 우리와 관계없이' 흘러가고 잊힐 것이다.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말이 있었다. 건물의 앞이 아닌 뒤에서 고등학교 1학년을 보냈다. 앞 건물에 가려져 그 교실에서는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안 그래도 추운 곳이었는데 체육복 바지를 입어도 다리가 시렸다. 쉬는 시간은 짧아서 구름다리를 건너 앞 건물에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가끔 햇빛이 쏟아지는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던 아이들의 등을 보는 것으로 따듯함을 대신 전해 받았다. 


『햇빛 마중』에는 사람, 동물, 오후, 계절, 장소에 관한 이야기들이 있다. 처음 만난 이와 쉽게 가까워지지는 못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연락처를 물어보기도 하고 엄마와 여행을 떠나 웃지 않아도 괜찮은 사진을 찍기도 한다. 우는 이유를 몰라 묻고 싶지만 그러지 않기로 하고 위로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고 전한다. 고맙고 미안한데 단순한 말로 전할 마음이 아니라서 묵어 두었던 그 말들을 하기 위해 쓰인 것 같은 『햇빛 마중』이다. 


기억이나 회환이 몰려올 때 소설가 문진영은 소설을 쓰고 집안을 정리 정돈하는 것으로 버티며 이겨내는 것 같다. 상처 입었음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인물을 만들어 추억의 장소로 데리고 간다. 손을 잡고 햇빛이 있는 쪽으로 걷는다. 나의 온기를 네게 전해주는 것으로 불안하고 불순했던 과거를 다른 세계로 옮겨주고 싶다는 마음이 소설 곳곳에 놓여 있다. 


오랫동안 어둠 안에 갇힌 자들이 있었다. 태양이 남중해 있는 정오에 만나자. 『햇빛 마중』을 읽으며 두 시간 후를 기다리자. 오후 두 시에는 태양이 지표를 달구느라 가장 따듯해져 있을 테니까. 햇빛과 소설이 나눠준 온기를 기억하며 언젠가의 계절로 넘어가자. 어둠 속을 탈출하기 위한 작은 손전등 같은 책 『햇빛 마중』을 들고 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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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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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인생 목표를 바꿔야겠다. 이렇게 말하면 거창하고 근엄한 인생 목표가 있었다고 착각할지 모르겠다. 그런 건 애초에 없었고 그저 하루하루 울지 않고 마음 상해하지 않으며 사는 정도의 소소한 목표가 있었더랬다. 세운다, 인생 목표. 꼭 해내고 싶다, 오늘부터의 인생 목포. 


죽기 전에 스티븐 킹을 꼭 한 번 만나고야 말겠다는 인생의 목표. 만나서 아임 유어 빅 팬이라고 《엑스파일》에 멀더 요원이 자신의 우상을 만나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한 것보다 조금 더 격앙되게 말하며 가지고 있는 책에 사인을 받는 것. 스티븐 킹의 최근작 『나중에』는 책을 읽는 재미란 이런 것이구나를 오랜만에 느끼게 해줬다. 


어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자, 가자, 가즈아를 외치며 읽었더랬다. 소설에서 계속 강조하는 것처럼 『나중에』는 공포 소설이다. 공포 소설인데 애틋하고 서글프다. 소설의 주인공은 스물두 살의 제이미 콘클린이다. 소년에게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 죽은 사람을 볼 수 있다. 산 사람들 사이에서 죽은 이를 알아보고 그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제이미에게는 아버지가 없고 엄마와 외삼촌이 있다. 출판사에서 저작권 대리인으로 일하는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다. 외삼촌은 이른 나이에 치매에 걸려 자신의 사업을 엄마에게 넘기고 요양원에 들어가 있다. 여섯 살의 제이미는 엄마와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문 앞에서 방금 죽은 이웃 여자를 만난다. 모나라는 그 여자는 죽어서 자신의 남편 곁을 맴돌고 있었다. 


모나는 제이미가 그린 칠면조 그림에 대한 품평을 늘어놓고 뇌졸중으로 죽기 전 반지를 놓아둔 장소를 알려준다. 제이미는 엄마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엄마는 반지를 찾아준다. 제이미가 다른 아이들과 다른다는 걸 알았지만 이 사건을 이후로 엄마는 제이미의 특별한 능력을 믿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죽은 이가 산 사람에게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깜찍한 상상력을 동원해 이야기한다. 


죽은 자를 볼 수 있고 그에게 진실만을 캐낼 수 있다면으로 가정한 『나중에』는 어린 소년의 성장 서사를 다루는 동시에 어른들의 추악한 이면을 그린다. 부와 명예를 가지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의를 외면하는 어른을 제이미는 자신의 특별한 능력으로 해치운다. 거대한 반전이 소설의 후반부에 기다리고 있다. 소설의 제목인 '나중에'라는 말은 더럽고 치사한 세상을 살아가는 지침이 되기도 한다. 


지금의 고민, 지금의 슬픔, 지금의 고민은 나중의 문제. 아득한 죽음의 세계로 건너가기 직전 죽은 자들이 들려주는 진실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소년의 활약상을 보며 뭐든 다 괜찮을 거라는 위로를 받았다. 차마 밝힐 수 없는 비밀이라고 죽은 자들은 쉽게 진실을 털어놓았다. 진실의 무게를 견디는 건 산 자들의 몫. 스티븐 킹이 여전히 살아 있어 공포 성장 소설을 써주어서 고맙고 감격스럽다. 


속편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은 예감이다. 어른이 된 제이미가 죽은 자들을 괴롭히는 알 수 없는 존재와 다시 대결하는 이야기로. 꼭꼭 써주세요. 한국의 빅팬이,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다립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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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의 자세 소설Q
김유담 지음 / 창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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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공중목욕탕에서 우는 여자들을 본다'라는 첫 문장으로 김유담의 『이완의 자세』는 시작한다. 문장을 읽고 목욕탕만큼 울기 좋은 장소가 또 있을까를 생각했다. 집에 샤워 시설이 따로 없던 시절 공중목욕탕을 다녔다. 늦은 일요일 오후에 아직 햇살이 있기 전에 세면도구를 챙겨 갔다. 오후의 목욕탕은 아침의 분주함이 빠져나간 이후라 한적했고 아직 훈기는 그대로인 상태였다. 문을 열면 안경에 습기가 차 한동안은 앞을 볼 수 없었지만 감으로 로커 앞에 찾아가 옷을 벗고 탕으로 들어갔다. 


그다음 문장은 이렇다. '유난히 세수를 오래 하는 여자들, 그들은 하얀 김이 서린 흐릿한 거울 앞에 웅크리고 앉아 물을 세게 틀어놓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다.' 대체 어떤 사연들이 몸을 씻으러 온 곳에까지 다가와 울게 만드는지 부러 궁금하게 여기지 않아도 알 것 같다. 혼자만의 목욕 공간을 가질 수 없지만 얼마간의 돈을 주고 더운물을 마음껏 쓰면서 몸을 씻을 수 있다는 안도 뒤에 밀려오는 서글픔을 여자들은 그렇게 조용히 해결하는 것이리라. 


『이완의 자세』는 한때 잘 나갔지만 사기를 당해 '24시만수불가마사우나'에서 자칭 자영업 일명 때밀이, 세신사 간간이 여탕이라 불리며 일을 하는 엄마 오혜자와 그녀의 딸 김유라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삶에 관한한 억척과 기민함으로 무장한 엄마는 다단계 사기를 당하고 며칠 안방에 누워 있다가 다시 일어난다. 딸 유라를 데리고 선녀탕 이후에 만수불가마로 이름이 바뀐 곳에서 사람들의 때를 밀어주며 살아간다. 목욕탕에서 인형을 씻기고 있던 유라는 동네 무용 학원 원장에 눈에 띄어 고전 무용을 시작한다. 


초반에 오혜자 씨가 사람들 때를 미는 기술을 익히려고 유라를 데리고 실험하느라 유라의 몸은 누군가의 손길만 닿아도 굳어버리게 되었다. 무용을 할수록 몸에 힘을 빼고 선생의 손길을 받으며 자세를 교정해야 하는데 유라의 몸은 경직되고 결국. 이후의 이야기는 『이완의 자세』를 읽으면 알 수 있다. 소설은 두 모녀의 과거에 이르러 현재까지의 모습을 그리며 삶을 살아가는 자세를 이야기한다. 


사무실 의자는 목 받침이 없다. 등 받침까지만 있다. 처음에는 뒤로 젖혀지지도 않았다. 안 그래도 쉽게 긴장하는 스타일인데 의자까지 딱딱하니 집에 돌아오면 등이 아파 앉아있을 수도 없었다. 긴급하게 다이소에서 산 등 지압기로 등을 꾹꾹 누르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야 알았다. 의자 밑에 동그란 쇠를 돌리면 의자가 젖혀진다는걸. 잠깐 틈이 있을 때 뒤로 등을 펼 수는 있지만 목은, 내 목은? 여전히 경직된 자세로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눕는다. 


유라는 몸에 힘을 빼고 살아가는 단순한 일을 하지 못한다. 유라뿐만이 그럴까. 모두들 힘을 바짝 주며 어딘가로 내몰리지 않기 위해 긴장하며 살아가고 있다. 수심을 알 수 없는 깊은 물속으로 떠밀리지 않기 위해 몸에 힘을 풀지 않은 채 버티고 있다. 사우나 오너의 아들 만수 역시 유라와 비슷한 기로에 서 있다. 어른들은 말하지. 한 번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하고 이건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소리라고. 끝이라고 말하면 끝이라고 받아들일 순 없는 걸까. 유라는 끝을 이야기한다. 『이완의 자세』는 꿈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건 절망이 아닌 새로운 가능성이라고 말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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탬버린 - 김유담 소설집
김유담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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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탬버린』에 담긴 김유담의 여덟 편의 소설을 읽는 동안 나의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재생되는 느낌이었다. 화면 분할로 왼쪽에는 과거가 오른쪽에는 현재가. 과거 쪽 영상을 보고 있으면 기이한 슬픔이 차올랐고 현재 쪽 영상에서는 헛웃음이 났다. 부끄러움과 모멸을 번갈아가며 느꼈다. 탬버린의 주인공 은수가 타의로 대표를 만족시켜주기 위해 탬버린을 흔들며 노래를 열창할 때. 아버지의 전신에 퍼진 암을 치료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전 애인이 들어준 보험금을 떠올릴 때.


소설 속 장면들을 따라가면 과거에 내가 한 후회와 오늘의 내가 한 잘못이 겹쳐지는 과몰입의 상태를 경험했다. 그만큼 『탬버린』의 소설들은 일상적이고 현실적이다. 지방을 벗어나 서울로 상경한 여성 화자들의 모습에서 삶의 고단함과 안쓰러움을 보여주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살기 시작한 여성들이 겪는 수모와 자기 비하는 오늘이 어제보다 나아지기는커녕 후퇴만 일삼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공선옥이 80, 90년대의 누구나의 가난을 그리고 있다면 김유담은 2020년대의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이들의 가난을 보여준다. 그때는 누구나 가난했다면 지금은 어떤 이들만 가난하고 슬퍼한다. 집에서의 경제적 지원은 바랄 수도 없고 오히려 힘들게 번 아르바이트비를 다시 부치지 않는다는 것에 만족하는. 누군가는 죽어야 8평 오피스텔을 얻고 포도밭을 살 수 있는 목숨 값에 빚지며 평생을 살아야 하는. 하루 종일 도자기에 전사지를 붙이고 점심값 내는 게 부담스러워 밥을 굶는. 첫 데이트 때 남자친구에게 돈을 빌려서까지 가방 하나를 사려고 하는. 


과거의 나를 불러내어 그때의 장면을 보여줄 때 상대가 보이는 의아하다는 반응에 『탬버린』속 여성 화자들은 후회를 시작한다. 성인이 되기도 전에 책임감의 무게에 짓눌려야 했던 청춘은 나이만 먹는다. 아등바등해도 현실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소설은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그리워하는 마음을 단념한 채 끝이 난다. 나를 괴롭히는 건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이라는 걸 깨달으면서 말이다. 


취업은 번번이 실패하고 어렵게 들어간 직장에서도 회식 자리에서 탬버린을 흔들며 노래를 해야 한다. 자율학습을 빠지며 친구와 함께 노래방에서 갈고닦았던 추억의 탬버린은 현재로 불려 나와 서글프게 흔들린다. 학교 폭력에 시달린 언니를 보호하느라 지친 동생은 어느 날 말없이 찻잔과 에코 가방 하나만을 들고 떠난다. 평범하고 싶다는 건 이제 누구나의 소망이 되어버린 시대. 평범해지기 위해서는 특별해져야 한다는 걸 사명처럼 여기며 사는 청춘의 모습을 『탬버린』에서 만날 수 있다. 


기이할 정도로 그들과 나의 과거는 비슷하고 현재의 모습도 그다지 다르지 않아 아득한 슬픔에 머무르는 겨울이다. 


(김유담의 청춘 삼부작은 『탬버린』, 『이완의 자세』, 『커튼콜은 사양할게요』이다. 뭐,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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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콜은 사양할게요
김유담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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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담의 장편소설 『커튼콜은 사양할게요』의 주인공 연희가 직장에서 겪는 수모는 이런 식이다.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출근해서 옆자리 성대리의 컴퓨터의 전원을 켜 놓고 팀장의 메신저 프로필을 주기적으로 들여다보며 기분을 눈치채는 일. 이름이 있지만 야, 막내로 불리며 팀장의 차를 세차하러 맡기러 다니고 어느새 내 일로 넘어온 일을 하느라 수시로 야근을 한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전공보다는 동아리 연극 활동을 더 열심히 한 연희. 소설은 꿈보다는 현실에 밀려 출판사에 취업한 연희의 오늘과 꿈만으로도 가득해서 찬란했던 연희의 과거를 교차해서 보여준다. 연희는 박봉에 과다 업무, 잦은 야근을 견디기 위해 자신에게 신입사원 1이라는 역할을 부여한다. 비록 신입사원답게와 신입사원 같지 않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지만. 


회식을 끔찍하게 여기는 이유 중에 하나는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생각보다 말이 먼저 나가는 오두방정을 시전하기 때문이다. 나는 정상적인 사회인이다, 지각 있는 사람이다를 수없이 되뇌어도 분위기에 휩쓸려 조롱과 냉소가 담긴 나름 위트 있는 농담이랍시고 툭툭 말을 내뱉다가 아차 하는 순간을 여러 번 맞이한다. 연희 역시 워크샵이라는 말이 일의 능률을 위해 기술, 교육을 나누는 장이라고는 하지만 주말을 반납해야 하는 추진한 이의 삼대를 멸문지화를 처하게 해도 모자란 곳에 가서 술을 먹고 팀장과 대리에게 꼬장을 부린다. 


『커튼콜은 사양할게요』는 꿈을 꾸는 자와 현실에 순응한 자의 대비를 통해 청춘을 살고 있는 이들의 오늘과 내일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고민하는 책이다. 연희와 연극 동아리에서 함께 활동했던 장미는 취업이라는 선택지 대신 연극 활동을 이어 나간다. 연희는 직장에서 수모와 모욕을 당하면서 자신이 선택하지 못한 길을 걷고 있는 장미를 부러워하면서도 한심해한다. 한때 열렬했던 꿈의 모습이 달라지면서 연희와 장미의 관계는 미묘하게 어긋난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현실이라는 무대로 넘어와 상영된다. 전형성을 가진 인물이라고 여겼는데 입체적으로 변모하고 놀라울 정도로 각성을 해서 신입사원 1의 연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고전소설의 특성인 권선징악과 행복한 결말은 현대 소설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 빌런이라고 여겼던 팀장과 대리는 느닷없이 선한 사람으로 배역을 수정하고 결말은 꼭 그래야만 했을까 싶게 슬픔을 안겨준다. 


술만 마시면 자꾸 과거가 떠오른다.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열망으로 부풀었던 과거가. 현재의 나는 무엇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을까를 기억하지 않은 채 살고 있다. 연희가 깨달은 것, '꿈꾸던 시간조차 지워버린 나'로 살면 안 된다는 것에 무한한 공감을 보낸다. 어떤 결말로 극이 마무리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런 걸 알고 싶지도 않다. 지금 여기 배역을 부여받고 또박또박 대사를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내가 있다. 허무와 냉소로 상대 배역을 당황하게 만들지만 퇴장까지는 남은 시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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