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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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되는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나면 가슴 한 쪽이 뻐근해진다. 결코 살아 있을 때는 몰랐던 한 사람의 사정과 속내를 죽고 나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부모라는 존재는 내내 살아 있을 줄 알았다. 추임새처럼 내가 죽고나면이라는 말을 들어도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저 늘 하는 말이겠거니 정도. 죽음 후에야 무심결에 흘려들었던 말이 떠오르고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장면이 펼쳐진다. 한참 말을 잊고 새삼 후회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곱씹게 된다. 다정하게 말 할 걸 그것도 못했다면 화는 내지 말 걸. 후회는 미련과 닮았다는 걸 깨닫는다. 전직 빨치산이었던 고상욱 씨를 아버지를 둔 고아리의 서술로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유쾌하고 짠하게 흘러간다. 


빨치산 출신으로 감옥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는 『새농민』을 읽으며 농사를 짓는다. 그야말로 농사를 글로 배웠어요를 실천한다. 차가 끊겨 집에 가지 못하는 여인을 집에 재우는가 하면 동네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혁명을 하는 바람에 공부를 잘하는 조카가 신분조회에 걸려 출세를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집안의 괄시를 받아도 말 한마디 하지 못한다. 고상욱 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기적처럼 딸 하나를 얻는다. 그 아이가 자라서 글을 쓰고 지방 시간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평생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한 적 없는 아버지. 빨갱이, 빨간물이라는 놀림과 무시를 당해도 어려운 일을 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는 인맥, 없는 인맥 동원해서 도움을 주는 아버지. 왜 저렇게 살까 고상욱 씨 딸 고아리는 의아해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아버지가 죽고 삼일장을 치르며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을 그린다. 가깝지만 멀고도 어려운 관계인 아버지와 딸은 죽음 앞에서야 화해의 악수를 나눈다. 한 사람은 바람에 날아가고 한 사람은 땅 위에 우뚝 선 채.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소설은 고상욱이라는 인물의 생애를 삽화 형식으로 들려준다. 사회주의자로서 평생 유물론을 외친 아버지의 생애는 살아남은 우리들에게 여운을 남긴다. 


열심히 사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지 몰라 헤맬 때, 고상욱 씨가 실천한 유물론적인 행동을 보면서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도 꿋꿋하게 버틸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인생은 고통이야라고 해도 다정한 몇몇의 사람의 선의로 살아갈 수 있다. 아버지 고상욱 씨의 장례식장에 찾아온 사람들의 이력을 보고 있으면 말이다. 정치적 동료의 친구의 아들, 선생의 아들의 지인, 아들이나 다름없는 아들. 아리가 품었던 의문에 대한 답을 그들이 들려준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 일은 미안할 일이 아니다. 삼일의 시간은 그이를 추억하고 못되게 굴었던 일에 대해 사과하는 시간인가 보다. 다른 무엇도 아닌 나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이었던 그이를. 웃다가 울다가 한숨을 쉬다가 누군가의 등을 어루만지다가 전복죽을 나눠 먹다가.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의 성가심을 알고 한 걸음에 달려와 처리해 주는 걸 보면서 죽은 자의 삶을 추측해 본다. 외롭지 않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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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나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2
이주란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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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처럼 쓰인 이주란의 소설을 읽다 보니 어떤 글이든 지금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의 나』의 첫 문장은 '모르는 사람들이 내게 괜찮다, 말해주네'이다.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모임에서 만난 언니와 함께 사는 88년생의 유리가 소설의 주인공이다. 유리는 언니 방문 앞에 포스트잇에 쓰인 글을 보고 안심한다. '누군가 언니에게 괜찮다고 말해주었'다는 사실에. 


하루는 괜찮은 일과 괜찮지 않은 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괜찮은 일이 하나면 괜찮지 않은 일이 아홉이 되어 이상한 균형이 맞춰진다. 하나의 괜찮은 일이 힘을 발휘하여 아홉의 괜찮지 않은 일을 무찌르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어떤 하루는 괜찮고 어떤 하루는 힘이 든다. 『어느 날의 나』 속의 하루들은 그럭저럭의 힘으로 괜찮다. 


휴무에는 할머니랑 살았던 동네에 가는 유리. 두유와 과자를 사서 동네 할머니에게 주기도 하고 전기계량기 속 숫자를 보고 주인집 아줌마에게 알려준다. 문을 두드리는 게 예의 없는 것 같다고 무작정 기다리는 아줌마를 위해서. 그런 휴무를 지나 일을 하고 돈을 벌어서 월세를 내고 밥을 사 먹는다. 동네 친구 재한 씨와는 가끔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쓰는 게 처음엔 살기 위해서였는데 이제는 좋아서 쓴다고 유리는 말한다. 어떤 마음이 되면 글을 쓸 수 있을까. 사는 걸 포기하는 게 쉬울 수도 있는데 유리는 어떤 마음을 먹고 살기 위해 글을 쓴다. 심심한 소설이네. 아무 사건도 긴장도 없어 나의 하루를 그대로 적은 것 같은 이야기네. 주 5일이 아닌 주 4일만 일해도 적금 넣고 공과금 내고 고민 없이 배달음식을 시켜 먹으면 좋겠다고 내내 생각하는 하루. 


어느 날의 나는 모욕을 당해놓고도 다른 사람의 기분이 좋지 않을까 염려하는 멍청한 짓을 했고 그대로 집에 돌아와 잠이 올 때까지 SF 요소가 살짝 가미된 드라마를 잠이 오기 전까지 보면서 진짜로 드라마 속 현실이 재현되면 아싸, 일 안 해도 되지 않을까 공상하는, 그런 시간 속의 나였다. 『어느 날의 나』에서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언니의 동생은 냉동실에 한참이나 있었을 음식을 선심 쓰듯 주고 간다. 언니는 미련 없이 음식을 버린다. 생각을 하지만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누군가 했을 때 쾌감을 느끼지 않은가. 동네 산책을 위해 가벼운 운동화를 살 생각에 소설 한 편을 완성하고 대학원 원서를 넣었다는 언니의 말에 오늘의 괜찮음이 내일로 연장된다. 모르는 사람이 아닌 아는 사람이 괜찮다고 말해주는 하루는 언제든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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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가을 2022 소설 보다
김기태.위수정.이서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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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힘드니?

사영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저었다. 언니가 그랬잖아. 이 세상엔 안 힘든 일이 없다고.

나는 그랬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엔 안 힘든 일이 없고, 안 힘든 일을 찾아보는 일조차 너무 힘들어서 곧바로 포기하게 되었다. 우리는 힘들게 살아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그렇더라도 쌓이는 울분과 스트레스는 어찌할 수가 없었고, 간간이 만나서 전시를 보거나 술을 마시는 것으로 풀었는데 그마저도 1년 전부터는 뜸해졌다.

(이서수,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中에서)


10월인데 습한 상태를 참지 못하고 에어컨을 틀었다. 10월에 청구되는 관리비는 9월에 사용한 내역이다. 감히 예상을 해보자면 지금껏 낸 관리비 중에 최고치를 찍을 것 같다. 불길한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으니까. 그럴 것 같다. 어쩔 수 없지. 사용한 만큼 나오고 사용했으니까 내야지. 한 달에 150만 원 받을 때는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때보다 30만 원 더 받는 지금은 악착같은 마음이 사라지고 쓸 땐 써야지 내가 이것도 못 사는 건 아니라고 하는 기분에 펑펑까지는 아니고 얼마를 모아야겠다는 의지 없이 쓴다. 은행 앱으로 든 적금을 깼다가 다시 채워 넣기를 반복한다. 모으는 건 힘들고 쓰는 건 참 쉽네. 유지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고. 의도 없는 선물을 받을 때 기분이 확 좋아지기도 한다. 


『소설 보다 : 가을 2022』에 실린 이서수의 단편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에서 사영은 '나'에게 가방에서 스팸 여덟 개를 꺼내준다. 그 순간 '나'는 사영에게서 느꼈던 거리감이 줄어든다. 서일페에서 사영이 산 물건들을 줄 때는 '놀라울 정도로 금세 화가 수그러'든다. 이런 장면들. 서울에서는 집을 구하지 못하고 군산이나 고흥에 집을 알아보고 삼천만 원이 있으면 아파트를 살 수 있다는 걸 서로에게 알려주는 모습들. 상대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스팸과 굿즈를 받아들면서 사그라지는 이야기에서 안도를 느낀다. 


「오후만 있던 일요일」에서 위수정은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 감정에 대해 들려준다. 나이가 들 수 있을까. 과연 이런 뭣 같은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나이를 먹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지만 소설에서 그럴 수 있다고 하니까 미래의 시간을 상상해 본다. 내게는 요양원, 노후, 여든여섯이라는 단어가 낯설다. 모처럼 쉬는 일요일은 무얼 한지도 모른 채 오후만 남아 있어 허무하고 서글프다. 소설은 노후의 시간이 우리가 늘 살아가는 일요일 오후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고통이나 불안, 의아함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김기태는 「전조등」에서 삶의 모순 따위를 느끼지 않는 인물을 만들어 낸다. 소설에서 그리는 모든 것이 완벽한 형태의 인간을 만나지는 못했다. 그런 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 주변에는 없다는 것. 인생을 하나의 도전 과제로 삼는 듯한 태도의 인물인지라 주변에 없다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겨울의 소설이 도착할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 모두 스트레스 받지 말고 개소리를 들어도 잊어버리자. 겨울의 소설이 오면 읽어내고 누가 먹지 않고 쓰지 않는 물건을 줄 때 환하게 웃자. 안 힘든 일을 찾는 게 어려워도 끝까지 찾아내서 안 힘든 일을 하고. 힘들게 살아야 하는 현실 따위는 없으니 울분과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면 안녕, 잘 있어 손을 흔들고 네, 전 자유입니다 멘트 날려주고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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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 아래
이주란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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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란의 『수면 아래』를 읽다가 잠들었고 꿈을 꾸었다. 꿈에서 나는 서류를 찾아야 했다. 서류가 든 캐비닛은 비가 오는 길거리에 있었다.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캐비닛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야 했다. 걸어가면서도 더는 못 걷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류를 한참이나 찾는데 여자 두 명이 다가와서 서류가 젖지 않도록 캐비닛 문을 잡아 주었다. 그 순간 그들이 보인 친절에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잠에서 깨어난 나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게 다 이주란의 소설을 읽다가 잠들어서 이런 꿈을 꾸게 되었다고 해버리자. 며칠 전 나는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들었고(전임자와 나를 비교하는 말, 책임은 누가 지느냐, 회사의 이익을 생각해서 행동해야 된다 같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고 해도 무의식에 박혀 있었고 실제 나는 서류를 찾느라 허둥대면서 깊은 빡침과 현타가 한꺼번에 몰려와 힘이 들었다. 


『수면 아래』의 인물들 해인과 우경, 장미, 유진, 우재, 성규를 생각한다. 그들이 소설 안에서 나누는 대화와 살아가는 모습이 이후에도 오래 마음에 남을 것 같다. 소설은 별다른 사건 없이 흘러간다. 해동중고에서 전화를 받고 물품을 세척하고 물건 파는 일을 하는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 해인. 회식 자리에서 부장님이 우는 장면에 마음이 쓰이는 우경. 독서실에서 일하는 장미. 오래전 모임에서 만났다가 다시 만나 해인과 관계를 이어가는 유진. 우경의 동생 우재. 해인과 우경의 친구 전직 마술사 성규.


소설의 제목처럼 수면 아래에 사는 듯 말을 하지만 들리지 않고 겨우 입만 벙긋대면서 서로의 마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인물들이 한가득 나온다. 어찌어찌 숨은 쉬지만 물속이라 말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들리지 않지만 최선의 몸짓을 한 상대의 진심을 이해하려는 착한 인물들. 해인과 우경은 부부였지만 지금은 이혼했고 그래도 산책을 하고 밥을 먹고 수시로 안부를 주고받는다. 그들이 왜 이별을 했는지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심심한 소설이다. 만나면 잘 잤냐고 어제는 무슨 꿈을 꾸었냐고 묻고는 국물이 있거나 온기가 있는 음식을 먹으러 간다. 그들이 주고받는 질문과 답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중요한 건 이게 전부라는 생각이 든다. 잘 잤고 무슨 꿈을 꾸었는지에 대한. 그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상처 난 마음의 면적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소설은 조금 갑작스럽게 끝난다. 정말 끝일까 하는 기분을 느끼게 만들면서. 그래서 마지막 문단을 읽고 또 읽었다. 해인의 당부와 부탁이 내게도 닿길 원하면서.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면서. 아침에 눈 뜨고 몸을 씻고 서로의 무사함을 확인하는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기, 『수면 아래』는 그런 일들이 괜찮은 마음을 갖게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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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은 장미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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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소설집 『장미의 이름은 장미』에 실린 네 번째 단편 「아가씨 유정도 하지」의 주인공 유정은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은 자기의 현재에 살아야지'라고. 이 말은 유정의 입버릇이기도 하다. 그녀는 팔십이 넘었지만 활동적이다. 환갑이 넘어서 운전면허를 땄고 불교대학에서 컴퓨터를 익혔다. 시니어 요가 대회에 나가 본선까지 올라갔다. 혼자 있는 것보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소설집에 실린 네 편의 이야기 속 배경은 뉴욕이다.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는 팀원들의 커피를 사러 나왔다가 친구 민영이 올린 언제든 환영이라는 글에 응답한 승아의 뉴욕 이야기가 펼쳐진다. 정규직 채용이 불분명한 상태인지라 승아는 열흘의 휴가를 연차까지 붙여 충동적으로 뉴욕으로 날아간다. 승아는 민영이 올린 게시글과는 상황이 다른 현실에 당황한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에서는 마흔여섯이 된 '나'가 잠시 세계에서 이탈하는 기분으로 어학연수를 온다. 그곳에서 마마두를 만나 우정 비슷한 감정에 사로잡히지만 한시적인 상황에서 느끼는 기분이라는 걸 깨닫는다. 누군갈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은 여행자들이 느끼는 고유의 권한이라는 것도. 변화와 변화하지 않음에 지친 '나'는 연수에서 돌아와 새로운 시작을 시도한다.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곳에서라면 새로운 기분을 느끼고 뭐라도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양과 시계가 없는 궁전」에서 현주는 희곡을 쓰기 위해 사촌 언니의 소개로 만난 로언이 있는 곳에서 머물지만 귀의 염증만 심해질 뿐이다. 미묘하게 느끼는 문화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로 로언과의 만남은 이후로 예정되지 못한다. 「아가씨 유정도 하지」의 유정이 말한 대로 사람은 현재에 살아야 하지만 『장미의 이름은 장미』속 인물들은 과거에 매몰되어 있는 상태로 지낸다. 


여기가 아닌 거기, 그곳에서라면 이곳의 구질구질함과 실패를 벗어던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모호한 기대는 무참히 깨진다. 소설은 실패를 극복하기가 아닌 들여다보기를 통해서 아픔을 방치한 채 내일로 나아가는 이상한 씩씩함을 보여준다.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불안감인지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도약 내지 멈춤의 행위를 하도록 유도한다. 


인물들은 은근한 차별과 멸시가 존재하는 뉴욕에서의 경험을 안고 한국으로 돌아오거나 돌아올 준비를 한다. 무얼 시작하기도 포기하기도 애매한 자신의 현재를 안고서 말이다. 포기가 답이라면 포기를 하고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시작하는 것.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게 삶의 비극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오랜만에 읽은 은희경의 문장은 술술 잘도 읽히고 여전히 은희경은 그때의 은희경이라서 안심이 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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