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 개정판 탐정 코델리아 그레이 시리즈
P. D. 제임스 지음, 이주혜 옮김 / 아작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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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코델리아의 동업자 버니는 유서에 탐정 사무소와 비품 전부를 그녀에게 넘긴다고 남겼다. 전부라는 단어에는 밑줄을 그어 강조했다. 스물두 살의 코델리아는 뛰어난 이해력과 지성을 가졌다. 그걸 버니는 부러워했다. 젊음과 지성. 버니는 그 점을 높게 사 동업 제안을 했고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던 코델리아는 명판에 자신의 이름 뒤에 '양'을 빼달라고 설득하면서 일을 시작했다. 


암에 걸린 버니는 손목을 두 번 그어 목숨을 끊었다. 사람들은 이제 코델리아가 무슨 일을 할지 당연하게 궁금해했다. 코델리아는 그 점이 이상했다. 공동 대표가 죽으면 다른 대표가 사업을 이어 가면 될 일 아닌가. 자신 바로 그녀 코델리아가. 사람들은 탐정 일은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그럴 때마다 코델리아는 이 일은 당신이 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코델리아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사람들은 침묵한다. 방금 내가 무얼 들었지 하는 분위기를 풍기며. 대꾸를 하지 않은 이유는 그럴 거다. 코델리아의 말을 듣고 자신의 편협함에 반성하느라 잠시 말이 나오지 않는 거. 그랬으면 좋겠다.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라니. P. D. 제임스의 장편소설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은 1970년대 영국에서 쓰였다. 50년을 건너서 달려온 소설은 감동을 넘어 전율을 느끼게 했다. 


버니가 죽어도 탐정 사무소의 일을 이어가겠다는 코델리아의 행동에서 감동을. 사건 의뢰를 받고 죽을 위험에 처하면서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건의 진상을 밝혀가는 코델리아의 집념에서 전율을. 새로 온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이상한 사실을 확인했다. 여자, 결혼, 아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자꾸 취업이 안 됐다고. 


1970과 2022년 사이에는 변화가 없었던 걸까. P. D. 제임스는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나는 용감하고 영리한 젊은 여주인공이 삶의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다들 해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일에서 기필코 성공을 거두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버니의 죽음을 처리하고 탐정 사무소에 혼자 있을 때 코델리아는 극적으로 사건 의뢰를 받는다. 


자신조차 자신의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순간에 코델리아는 혼자 일을 착수한다. 내일을 생각할 여유는 없으니 당장 오늘의 일부터. 학업을 마치지 않고 정원사 일을 하며 오두막에서 살아가던 한 청년의 죽음의 실체를 밝혀가면서 코델리아는 성장한다. 여자라는 조건 앞에 붙은 편견의 장벽을 허물지는 못하지만 실금을 내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일을 하면서 한 번씩 느끼고 좌절한다. 내가 여자라는 것 때문에.


P. D. 제임스는 소설을 쓰겠다는 의지로 평생을 살았다. 일을 하면서도 새벽 시간에 글을 썼다. 근무 중 여자라서 느꼈을 어이없는 상황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근사한 제목을 가진 소설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 탄생했으니까. 모종의 불합리함과 불공정을 이겨낼 수 있는 단서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힘을 끌어모아 써서 2022년의 여자들에게 남겨 주었다. 


자신을 낳고 한 시간 만에 돌아가신 엄마에게 코델리아는 상상으로 묻는다. 이 일이 어떻냐고. 상상 속에서 '엄마는 이 일이 여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직업이라고 말'한다. 코델리아는 그 말을 자신의 힘으로 증명해낸다. 모든 일은 여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직업이다. P. D. 제임스는 말하고 코델리아는 보여준다. 여자라서가 아니라 상대가 가진 치졸함과 치사함 때문에 좌절을 느끼는 거다. 분명히 해야 한다. 


당신이 문제라고 느끼도록 몰아가는 그들이 문제다.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의 결말은 완벽하다. 이런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걸 보여주지만 우리의 친구 코델리아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으리라는 자세를 취한다. 앞으로의 일은 모르겠고 오늘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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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코다 이발소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로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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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곳은 한적하다. 길을 나서면 차보다 고양이들이 더 많이 보인다. 동네 강아지 두 마리와 친해져서 안 보이면 내가 마음대로 붙인 이름을 불러본다. 가끔 기적처럼 내가 부르는 소리에 강아지가 멀리서 다가온다(나도 참 한심. 이런 걸 기적이라고 부르다니).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집으로 걸어올라 온다. 자주 가는 편의점에는 어미가 버리고 간 고양이, 길에서 구조한 아픈 고양이가 상자 속에서 잠들어 있다. 처음 보는 고양이가 있으면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우유를 사면서 물어본다.


여기는 어디일까. 모두들 일찍 잠이 드는 것 같고 저녁 7시가 되면 신호등의 불이 꺼진다. 어쩌다 산비탈에 있는 곳에 집을 구해서 살고 있을까. 차가 없어 장을 보면 이고 지고 올라온다.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한 듯. 조용하고 사람 없는 곳에 살고 싶다는 염원이 저 푸른 하늘에 닿은 듯. 경사가 높다는 것만 빼면 모든 것이 좋다, 만족한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관심이 없는 곳.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무코다 이발소』의 배경은 쇠락하고 재정이 파탄 난 홋카이도 중앙부에 있는 도마자와 면이다. 과거에는 탄광이 있어 인구수도 많고 번성했지만 에너지 정책이 바뀐 탓에 인구 절벽인 상태다. 젊은 사람들은 도시로 나가 대부분 노인들이 남아있다. 그곳에 야스히코가 운영하는 무코다 이발소가 있다. 야스히코 역시 젊은 시절에는 도시에서 회사원으로 일했다. 그러다 아버가 편찮으셔서 장남인 그가 도마자와로 돌아와 가업을 잇게 되었다.


손님은 많지 않다. 단골이 있어 월 매출은 일정하다. 시골 동네에서 이발소를 하며 아내와 별일 없이 지내는 야스히코. 어느 날 그의 장남인 가즈마사가 회사 생활을 접고 도마자와로 돌아와 무코다 이발소를 물려받겠다고 한다. 딱히 아들에게 가업의 중요성을 설파하지도 않았는데. 야스히코는 가즈마사의 선택이 어리둥절하지만 특유의 부드럽고 이해심 많은 성격으로 그러려니 한다. 조용한 동네 시골 마을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상을 그린 『무코다 이발소』.


젊은이들이 떠난 농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결혼을 하지 못해 의기소침해하고 마을에 새로운 사람이 오자 흥분하고 영화 촬영팀이 오면서 조용하던 겨울 풍경이 바뀐다. 사람들이 적다고 하나 마을은 마을인 법. 소란이 생기면 남의 말을 잘 듣고 험담을 하지 않는 성격의 야스히코가 중재자가 된다. 소설을 읽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바쁜 것 없고 사소한 일에도 즐거움을 표하는 느리고 평화로운 일상의 모습 때문이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라는 말을 노래처럼 중얼거린다. 음소거를 한 채 밖에서 나를 보고 있으면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겠다. 왜 저렇게 종종거리고 다니나. 그래봐야 받는 건 최저시급 정도의 돈인데. 아침에 일어나면 주문을 건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생각하자. 억지로 애쓰지 말고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자고. 그렇게 되뇌어도 일이 안되면 당황하고 허둥지둥한다. 한숨을 푹푹 쉬고 표정은 썩어 있다.


무코다 이발소에서 마주한 풍경. 서로를 아껴주고 잘못이 있으면 알려준다. 있는 그대로 사람을 받아들인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다정하게 알려준다. 사는 건 힘이 들지만 살아가려면 힘을 내야 한다. 애써서 힘을 내는 일. 나를 미워하지 않으며 살아가고 싶다. 그래야 타인을 대하는 마음이 공손해진다. 도마자와 면은 여전히 조용하겠지만 그곳에는 서로를 아껴주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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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 김누리 교수의 한국 사회 탐험기
김누리 지음 / 해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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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저쨌거나 뉴스는 안 보고 있다. 다시 뉴스를 볼까 하다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막 뉴스는 가끔 본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틀어준다. 그곳에는 트럭에 실린 소주 병과 맥주병이 쏟아지면 시민들이 출동해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유리조각을 치우고 사라진다. 이상한 세계에 이상한 사람들이 묵묵한 얼굴로 살고 있다. 


그래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알아야 하기에 뉴스 대신 책을 읽는다. 뉴스는 아직 힘들다. 김누리의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는 한국 사회 전반의 문제점을 다룬다. 교육, 사회, 정치, 문화, 역사. 코로나19가 불러온 문제는 만만치 않았다. 숨기고 싶은 어두운 얼굴을 한 낮에 마주 봐야 했다. 더럽고 냄새나서 외면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가감 없이 드러났다. 


섣부른 희망이나 그렇다고 대놓고 절망스러움에 대해 논하기에도 섣부른 시대를 살고 있다. 그저 다 잘 될 거라는 믿음을 말하는 사람들이 의심스러운 시대.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는 희망이 없다고 해서 절망의 편에 손을 들어주지는 말자는 쪽이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는 문제가 있었다. 문제와 싸우는 동안 정작 본질을 망각했다. 인간을 존중하는 마음.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정치의 민주주의도 일상의 민주주의도 실패했다.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는 감히 그렇게 말한다. 불의와 타협하는 대신 좀 더 쉬운 길로 누군가의 절망은 외면하는 길로 민주주의는 붕괴되었다. 공공연한 자리에서(이제 나는 이것마저도 하지 않는다. 누군가와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정치에 대한 비판은 가능하지만 본인이 일하고 있는 회사의 잘못은 숨기려 드는 야만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 교육은 가진 자들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는 대학이 가진 문제점과 학벌 계급사회를 비판한다. 독일에서는 대학생들에게 등록금 전액과 생활비 일체를 지원한다. 대학의 서열은 없고 누구나 원하는 공부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남의 나라 정책을 부러워만 해서는 안된다. 


책의 제목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절망할 권리가 없다는 말. 누구도 함부로 삶을 포기하지 말자는 격려처럼 들렸다. 낮은 출산율에 비해 자살률은 세계 최고인 나라. 대한민국의 미래를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를 통해서 잠깐 걱정해 본다. 나머지 시간에는 나의 내일을 고민해야 하므로. 계속 나빠지고 형편 없어질 것 같지만 이제는 뉴스를 보는 것으로. 방관자보다는 목격자로 살아남아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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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마스크 - 코로나 미니픽션 짧아도 괜찮아 7
박사랑 외 지음 / 걷는사람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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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아이들에게 이상한 유머를 하면서 나 혼자 웃고 있었겠지. 여전히. 웃기지? 웃기지 않아? 안 웃어도 된다. 나만 웃으면 되지. 배를 잡고. 깔깔깔. 시험 기간에는 주말에도 출근해 초과 수당 그게 뭔지도 모른 채 일하고 있었겠지. 인생사 새옹지마. 좋은 날이 있으면 궂은 날이 있고 다시 좋은 날. 다들 그렇겠지만 산다는 건 답 없는 문제를 매일 받아들고서 끙끙대는 거 아니겠어. 이 문제만 풀면 되겠지. 희미한 희망을 품고서. 


출판사 걷는사람에서 나온 짧아도 괜찮아 시리즈 일곱 번째 소설집 『마스크 마스크』의 주제는 '코로나19'이다. 2019년에 최초 발견된 바이러스이지만 우리나라는 2020년 1월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바이러스가 퍼졌다. 기억하시는지. 마스크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공공장소에서 재채기도 조심스럽게 했다. 사람이 많은 곳은 의식적으로 가지 않았다. 불안불안했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견디는 힘은 그것이었다.


연일 확진자 수가 늘어나고 거리 두기가 확대되었다. 그토록 좋아하던 일이었는데. 직장이 문을 닫았다. 교과서에 나와서 가르친 용어인 재사회화를 내가 하고 있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사회화 과정을 거친다. 마스크를 쓰고 반 년 가까이 수업을 들었다. 가르치던 입장에서 가르침을 받는 입장이 되어 보니 앞으로 더 겸손하고 예의 있게 굴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역지사지. 


『마스크 마스크』는 일곱 명의 작가들이 코로나19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인 인물들의 이야기를 펼쳐 놓은 책이다. 교실이 아닌 각자의 집 컴퓨터 앞에 앉아 수업을 듣는 고3 아이들이 있고 마스크를 쓴 탓에 안 그래도 무서운 밤에 괴한인 줄 착각해 혼자 스릴러물을 찍는 여성이 있다. 생활비에는 위생과 방역용품비가 추가되었고 온 가족이 코로나에 걸려 방과 방 사이에서 불안한 하루를 사는 가족이 있다. 해외 여행길이 막히자 기발한 여행 상품을 내놓아 불황을 극복하려는 사람까지. 


언제쯤이면 좋아질까.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암담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거리 두기를 지키며 더워도 마스크를 벗지 않으며 시간을 보냈다. 문학은 현실을 반영하기에 『마스크 마스크』는 제시간에 맞춰 도착한 책이다. 너무 늦지 않게 와줘서 고마웠다. 코로나에 걸린 이들은 어떤 마음이었고 어떤 모습으로 감염병을 이겨냈을까. 궁금했다. 원룸에 사는 이들은 쓰레기 처리가 고민이었겠구나 책을 읽고서야 알 수 있었다. 비대면으로 생활이 전환됐기에 배달 수요가 늘어났다. 


코로나 때문에 직장을 잃어도 생계는 이어가야 했기에 『마스크 마스크』 속 가족들은 배달업에 뛰어든다. 조심한다고 하지만 코로나에 걸려 자가격리에 들어간다. 미각과 후각을 잃었을까 봐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까나리 액젓을 먹인다. 웃으면 안 되는데 극한 상황에서도 가족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행동 때문에 미소가 지어졌다. 웃음, 미소, 폭소, 배를 그러앉고 넘어지는 포복절도.


3차 백신까지 맞았지만 불안쟁이는 그래도 불안해서 여름휴가를 집에서만 지내기로 했다. 이렇게 쓰면 코로나 전에는 여기저기 신나게 놀러 다닌 줄 알겠지만 여름과 가을, 겨울, 봄 그러니까 사계절 내내 집에만 있는 나의 정체는 집순이. 누군가의 오늘은 코로나 때문에 슬프겠지만 누군가의 오늘은 코로나 덕분에 괜찮을 수도 있다. 슬프다가 괜찮다가. 딱히 코로나가 아니어도 우리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다. 전부 괜찮을 순 없지만 조금이라도 괜찮다면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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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긴 방 마르틴 베크 시리즈 8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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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여덟 번째 이야기 『잠긴 방』을 사랑에 관한 소설이라고 우겨도 될까. 아니 우길래. 완벽한 복지를 자랑하지만 실상은 춥고 쓸쓸하고 강력 범죄가 만연한 국가 스웨덴. 그곳에 생각이 깊고 어지간해서는 웃지 않는 형사 마르틴 베크가 있다. 경정으로 승진될 거라는 소문이 있지만 마르틴 베크는 신경 쓰지 않는다. 사건을 수사하다 죽을 뻔했지만 다시 살아났고 현재는 혼자 산다. 


『잠긴 방』은 두 가지 사건을 놓고 이야기를 끌고 간다. 대낮에 은행이 털린 사건. 한 남자가 밀실에서 죽은 사건.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두 이야기는 소설의 끝에 가서야 느닷없는 기분을 느끼게 하면서 만난다. 소설은 한 여자가 비장한 얼굴로 은행에 들어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은행원에게 총을 겨누고 쇼핑백에 돈을 담으라고 말하는 여자. 돈만 들고나가려 했지만 영웅 행세를 하고 싶은 남자를 총으로 쏘아 죽인다. 


오랜만에 출근한 마르틴 베크를 위해 동료 형사 콜베리는 살인 사건 파일을 환영 선물로 준다. 완벽한 밀실 상태에서 남자가 죽은 사건이었다. 악취 신고를 받고 출동한 두 명의 순경은 잠긴 방 앞에서 고군분투한다. 열쇠공을 불러도 문을 열 수 없었다. 결국 힘으로 나사를 뜯어서 간신히 문을 열었다. 끔찍한 냄새를 풍기는 시체가 있었다. 부패가 심했다. 보고서를 다 읽은 마르틴 베크는 자신도 경찰이지만 경찰이 하는 일처리에 한심함을 느낀다. 


1970년대 스웨덴의 사회상을 가감 없이 『잠긴 방』은 보여준다. 물가는 오르고 일자리가 부족한 상태에서 국민들은 불안과 고통을 일상처럼 느낀다. 소설에서 다루는 두 사건은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다.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의 특성상 전모를 밝힐 수는 없지만 은행 강도 사건과 남자의 변사 사건의 진상을 알고 나면 슬픔에 빠진다. 피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았기 때문에 죄를 얻은 인물 때문이다. 


일부러 천천히 엉망진창으로 쓰인 보고서를 읽고 하나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화를 걸고 걷고 낯선 집에 찾아가는 마르틴 베크. 『잠긴 방』을 사랑 이야기라고 우기는 이유는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마르틴 베크가 보인 행동의 특이성 때문이었다.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남자는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무시했다. 그래서 그가 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랑 때문에 사건을 해결하고 사랑 때문에 범인이 되고.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는 모종의 합의를 한다. 소설의 결말을 의문문으로 남겨두면서 복지 국가 스웨덴이 저지르고 있는 잘못을 세계에 알리기로. 계속 섬세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야기에서 이야기가 아닌. 문장과 문장 사이에 생략된 인물들의 감정을 추측하며. 타인이 느끼는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소설로 배워서 현실 세계로 가져와 대입하는 식으로. 경찰 소설을 읽으며 주제가 사랑이라고 제멋대로 떠들게 만드는 것. 『잠긴 방』의 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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