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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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말을 하라고 했다. 글쎄. 나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마지막이라고 하니까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말이 나왔다. 미안하고 사랑해. 그렇게 한 사람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화장을 해서인지 죽은 것 같지 않았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스티븐 킹식으로 해석하면 다른 세계에서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슬프고. 김중혁식으로 삶도 죽음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자문하며 의미 없음에 의미를 두면서 슬퍼지지 않으려 애쓰면 되고.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기에 책을 많이 읽었다. 좋은 이야기도 아닌데 죽은 사람에 대해 자주 말하면 누가 좋아할까. 이야기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책을 읽었다. 소설은 삶보다는 죽음을 자주 다루고 있었다. 몰랐다. 내가 겪기 전까지는 모를 일이었다. 비로소 경험하고서야 겪어 내고서야 알 수 있었다. 모든 건 그랬다. 공감이란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네 상처. 네 억울함. 네 분노. 그것에 대해 쉽게 동조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김영하의 『작별인사』는 자신을 인간이라 믿는 소년이 나온다. 이름은 철이.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연구소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아간다. 학교에는 가지 않고 집에서 공부한다. 배경은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는 어느 미래 시대. 사람들은 상점에서 원하는 기능의 로봇을 자유롭게 산다. 샀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집 한 쪽에 넣어두거나 폐기한다. 아버지는 철이에게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한다. 아버지를 마중 갔다가 철이는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수용소로 보내진다.


자신을 인간이라고 믿었던 철이는 수용소에서 진실을 마주한다. 소설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시종일관 묻는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가. 수용소에서 만난 친구들과 철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고민한다. 로봇과 인간이 함께 사는 미래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오지 않을 것 같지만 이미 기계가 인간의 일을 대신하고 있는 시점에 인간다움은 무엇으로 증명해야 하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작별인사』에서 기계의 죽음은 전원 코드를 빼는 것, 전기가 없어 더 이상 충전할 수 없는 상태라고 표현한다.


기계에도 감정이 있다면. 전원이 나간다고 해서 감정과 지능까지 없어지는 걸까. 소설은 철이가 몸을 여러 번 바꾸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나약함을 고발한다. 인간의 죽음은 육체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육체가 사라지고 영혼은 어떻게 되는 걸까. 철이가 보여준 것처럼 인간의 영혼도 이곳저곳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면. 작별인사는 왜 한 걸까. 마지막이 아니고 단지 우리가 느낄 수 없을 뿐 죽은 자는 여기에 있는데.


『작별인사』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너무나도 많은 죽음이 있었다. 그걸 나는 소설로 신문으로 누군가의 경험담으로 듣기만 했다. 오만하게도 극복, 담담함, 받아들임이라고 첨언했다. 죽음이라는 건 극복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 죽음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고통은 쉽게 이겨낼 수도 잊어버릴 수도 없다. 떨쳐내려고 할수록 기억은 짙어진다. 해마 안에 잘 묻어두었다가 뛰쳐나오면 그러려니 해야 한다. 숨을 크게 내쉬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거라고 이야기해줘야 한다.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매일의 안부를 묻는 일. 작별 인사가 될 수도 있는 말이니 나의 일상의 언어를 다듬어야지. 날카로운 말은 둥글게 둥글게. 김영하식으로 죽음이란 영혼의 유영이다.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그래서 그 말은 마지막 인사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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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
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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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세계는 그립지 않았다. 이따금 생각이 날 뿐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무언갈 삼키고 문을 닫고 걸어 내려가는 일만으로도 하루치의 에너지를 다 써버린 기분이었다. 게으르게 살고 있는 죄책감에 빠질 때면 책을 펴는 게 아니라 유튜브를 봤다. 그곳에는 일을 하고 자기 계발을 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어떤 알고리즘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상 브이로그의 주인공은 여자들이었다.


얼굴을 가리고 하루를 보여주는 브이로그도 있었고 얼굴을 드러내면서 하루를 공유하는 브이로그도 있었다. 택배를 뜯고 정갈하게 음식을 차려 먹고 아침 출근길에 거울 앞에 서서 출근룩을 보여주었다. 퇴근 후에는 영어를 공부하거나 자격증 시험에 도전하기도 했다. 보여주어서 봤다. 결코 나는 할 수 없는 일을 보면서 자극을 받아야지 했지만 이번 생은 그냥 망한 걸로.


한정현의 장편 소설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는 등장인물이 대부분 여성이다. 한정현 소설의 세계에서 여성은 단지 성별 구분을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여성/남성 구분 자체가 필요 없다. 여성이되 여성이 아닌 사람들이 있다. 소설을 떠날 수는 없어서 하루의 마무리를 하는 의식으로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의 몇 페이지를 읽었다. 어떤 날은 읽었다는 일로도 죄책감이 덜어졌다. 무엇으로부터의 죄책감일까. 자꾸 생각하면서.


소설은 한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건드린다. 성소수자, 여성, 불법 촬영, 성폭력 피해자, 빨치산, 여성 외모 비하. 일본에서 교원으로 일하는 설영에게 셜록으로부터 메일이 온다. 셜록은 한때 설영과 친밀했던 지연의 별명이다. 설영은 일본으로 오기 전 사고로 8개월 동안의 기억을 잃어버렸다. 기억을 잃은 후 지연인 셜록과도 연락이 두절되었다. 함께 살았지만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설영은 셜록의 메일을 토대로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나선다.


한국에서 연정은 성형외과 의사로 일한다. 강남의 병원에서 여자들의 얼굴을 고치면서도 회의감이 든다. 무엇이 여성들을 병원으로 오게 하는가. 연정에게는 자신이 낳진 않았지만 목숨 보다 귀한 아이가 있었다. 친엄마의 뜻을 친한 엄마라고 하며 연정을 따르던 아이였다. 그 아이가 동급생들에게 레즈 페미인척한다는 이유로 성폭행을 당하고 물탱크에 버려졌다. 연정은 도영이 좋아했던 추리 소설을 읽으며 하루를 버틴다. 일본과 한국에 사는 설영과 연정은 셜록에 의해 만난다.


아름다움의 상징이자 추앙의 대상이었던 마릴린 먼로는 소설을 좋아했고 지적이었다.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보고 싶은 면만 보려 한다. 보고 싶지 않은 면이 발견되면 가차 없이 버리거나 조롱한다. 특히 여성들에게는 더욱 가혹하다. 자신과 같은 기준을 가지고 살기를 바라며 강요한다. 다른 삶의 행보가 보이면 지적하고 간섭한다. 셜록이 연구소에서 당한 일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서 끔찍했다.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서사를 추리소설의 형태로 다룬다.


평등을 부르짖으며 빨치산이 된 자들이 있었다. 그곳에서도 폭력이 있었다. 산에서도 산을 내려와서도 여자들은 성범죄의 대상이 되었다. 소설 속 인물 김춘희는 자신을 강간한 남성과 결혼했다. 나이가 든 김춘희는 딸의 생부가 따로 있다고 굳건히 믿는다. 폭력은 사람을 멀쩡한 모습으로도 미치게 만든다. 내가 보는 브이로그이 영상 속 여자들은 대부분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목 아랫부분이 나올 뿐이다. 그녀들은 부지런하다. 그리고 대부분 말랐다.


한정현이 제안하는 우리들 자신을 마릴린 먼로라고 명명하자고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가 멸시와 조롱이 되어 버리는 건 순식간이다. 셜록이 아닌 지연이 설영에게 하는 말 그래도 살아내자는 말 먼저 죽은 자들에게 해줄 서사를 가득 품고서 살아내자는 말은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며 다른 이름이 되더라도 이 세계를 버텨내자는 뜻이었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나는 나이다. 사람들이 여자에게 하는 말. 마르고 귀엽고 머리는 길어야 하고 부지런해야 한다.


내가 내가 될 때 저 말들을 간단하게 물리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는 세계의 단면을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는 슬프고도 아프게 그려낸다. 겪어보지 않고 누군가의 상처에 쉽게 극복하라고 할 수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소설의 세계에서. 진실을 찾으려고 고군분투하는 추리의 세계에서. 부지런하지 못한 내가 탐미하는 브이로그의 세계에서. 답은 있을까.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는 답을 찾아간다. 어떤 세계에서든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정답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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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7-08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당선도 축하드려요 *^^*
 
유진과 데이브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0
서수진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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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가 환호하는 순간은 그런 때이다. 현실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을 말로도 글로도 표현하지 못하는 걸 책에서 정확한 문장으로 쓰여 있는 걸 본 순간. 아, 내가 이상한 인간은 아니구나. 나 말고 다른 사람도 뭣 같은 기분과 감정을 느끼며 살고 있구나 안도하기에 이른다. 서수진의 소설 『유진과 데이브』의 주인공 유진은 사귄 지 얼마 안 된 남자친구 데이브의 집에 인사를 간다. 밥을 먹고 난 후의 설거지거리를 본 순간 고민한다.


자신이 사용한 컵만 씻을까 하다가 '얌체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꽉 조인 원피스를 입고 설거지를 하려고 한다. 데이브의 가족은 경악을 하지만 유진은 그들이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얼른 이해하지 못한다. 유진은 한국인이고 데이브와 그의 가족은 호주인이다. 한국에서라면 유진은 밥을 먹음과 동시에 일어나야 하고 자연스럽게 주방에 들어가 싱크대 앞에 서 있겠지. 당연하게도 뼛속까지 한국인인 유진은 호주에 유학 와서도 한국인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뒤늦게 입시 미술을 준비하고 미대에 들어간 유진. 엄마는 추가 근무까지 하며 일을 했지만 유진의 유화 물감 값까지는 감당하지 못한다. 유진은 학교에 다니면서도 일을 해야 했고 자신의 그림을 그린다는 꿈은 포기했다. 미술 학원에서 일을 하다 호주로 유학을 갔다. 그곳에서도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카페에서 일을 하고 일이 끝나면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는 게 그나마 호주 유학 생활의 낙이었다. 그곳에서 데이브를 만났고 결혼 생각도 없는데 집에 인사를 갔다.


『유진과 데이브』는 한국인 유진과 호주인 데이브의 연애기를 그린다. 문화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사고방식도 다른 그들은 자주 싸움을 한다. 데이브의 가족은 편하게 옷을 입고 있는 반면에 유진만 차려 입고 가서 불편하게 밥을 먹는다. 과자로 나온 음식이 식사인 줄 알고 유진은 그것으로 배를 채웠고 나중에야 식사가 준비된다는 걸 알았다. 통창이 있고 거대한 집에서 데이브의 가족은 전쟁과 난민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 유진은 불편하고 기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유진이 한국에 들어오고 그걸 계기로 데이브도 한국에 와서 머문다. 나이 서른이 넘은 유진은 한국말이 서툰 데이브의 한국 생활을 도와준다. 집도 잘 살면서 데이브는 뷰가 좋다는 이유로 옥탑방에 집을 마련한다. 그곳은 택시도 갈 수 없다면서 돌아가는 곳이다. 유진의 엄마와 언니, 형부를 만나는 자리에서는 철물점에서 발견한 빗자루를 선물로 사겠다는 데이브. 유진은 간신히 말린다. 데이브가 사들고 온 건 작은 화분이었다.


언뜻 보면 『유진과 데이브』는 국적이 다른 여자와 남자의 연애 갈등사를 다루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논쟁이 숨어 있다. 유진 자신은 호주에서 인종 차별을 겪지 않는다고 천진난만하게 말하지만 아직 차별을 제대로 경험하지 않았거나 경험했더라도 외면하고 싶어서 하는 이야기였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유진은 한국식의 제대로 된 차별을 당한다. 인간은 어떡하든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 예전보다 덜 불행하고 싶어 하기도 하고. 자신의 노력이든 아니든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해보자. 만족할까.


욕심은 끝이 없어서 다른 이의 행복을 탐하며 자신의 오늘이 불만족스럽다. 한국보다 호주가 낫겠지. 유진은 호주로 돌아가지만 그동안 외면했던 차별의 현장에 도착했을 뿐이다. 원하는 그림을 그리지만 직장은 얻지 못한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더 얻고 싶다. 인간의 마음이다. 얻은 하나에 만족하기 보다 얻지 못한 하나에 서글프고 우울하다. 연인 간의 불화를 반복적으로 그리는 듯하지만 『유진과 데이브』는 인간이 삶에서 느끼는 불만족의 풍경을 경쾌하게 드러낸다. 꿈을 이룬 순간에도 마음껏 행복하지 못하는 나, 한국인의 애처로운 얼굴이 담겨 있다.


『유진과 데이브』에는 각종 클리셰가 없다. 유진의 엄마는 데이브를 있는 그대로 본다. 언니와 형부도 유진보다 더 데이브를 포용한다. 유진만 한국 정서에 과몰입해서 데이브를 한국화하려고 한다. 소설은 유진과 데이브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는 균등한 시각으로 쓰였다. 유진 편을 들고 싶다가도 데이브에게도 마음이 기우는 식이다. 다들 그러고 있진 않은지. 회사에서 내 물컵 씻으러 갔다가 싱크대에 놓인 컵과 그릇을 본능적으로 씻고 있진 않은지. 애인 집에 가서도. 설거지 그거 안 해도 뭐라고 하지도 않는데 내가 찔려서 '얌체처럼' 보이기 싫어서.


진짜 눈치가 있는 사람은 눈치가 없는 척을 한단다. 『유진과 데이브』의 주인공 유진은 한국에서 살아남느라 없는 눈치 있는 눈치 다 끌어모아 가며 살았다. 그걸 호주에서도 써먹으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공부도 많이 하고 배울 만큼 배워 더 배우기 위해 유학도 간 유진이 남의 집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려는 모습이 짠하고 좀 그렇다. 이때만큼 남보다 뛰어나다는 공감 능력이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나, 여성, 한국인, 받고 호주인 더블로 지구촌에 사는 우리들. 상처를 내면화하기보다 다소 거칠더라도 드러내면서 치유하는 과정을 『유진과 데이브』는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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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즙 배달원 강정민
김현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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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작가가 꿈인 정민이 스타업인가 뭐시긴가 하는 회사에서 얄궂은 그림을 그려 번 돈은 모두 오빠의 결혼 자금으로 사라졌다.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엄마는 정민에게 재테크가 무엇인지 보여줄 테니 월급 통장을 맡기라고 했다. 정민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3년을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돈을 좀 모아서 나만의 그림을 그려볼 테다. 꿈이 있었다. 왜. 도대체 왜. 오빠가 결혼하는데 정민이 자금을 보태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정민 자신도 모르게.


글 작가를 섭외해서 정부 지원금을 받았다. 영화 공부를 한다는 글 작가는 정민에게 술을 마시며 서로를 알아가야 한다는 헛소리를 했다. 조짐이 좋지 않았는데 왜 항상 틀린 예감은 맞는 걸까. 글 작가는 먹튀했다. 지원금 천만 원을 고스란히 정민이 갚아야 했다. 서른이 넘은 정민은 온갖 곳에 이력서를 냈지만 돌아오는 답은 우리 회사의 인재상과는 맞지 않아. 거절, 거절 그리고 또 거절.


이상 김현진의 장편소설 『녹즙 배달원 강정민』의 주인공 강정민의 사연이다. 이렇게만 들어도 가슴이 답답한데 책을 읽는 나는 고구마 백 개, 구운 계란 백 개를 먹은 답답함이 느껴졌다. 정민이 쌔가 빠지게 모은 돈 오천만 원을 오빠 결혼 자금에 엄마가 갖다 바친 장면에서는 에라이 책을 덮을 뻔했다. 정민은 그 돈으로 한동안 생활비 걱정하지 않고 공부해서 웹툰 작가가 되려고 했다. 인생사, 세상사 내 뜻대로 되는 게 어디 있겠는가. 그리하여 정민은 녹즙 배달원이 되었다.


나이와 연륜과 뻔뻔함과 강철 멘탈로 무장한 여사님들 사이에서 정민은 고군분투한다. '사무실분'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건 예사. 한 달에 오만 원 하는 녹즙 값을 1년 동안 떼먹은 인간도 상대해야 했다. 몰랐다. 소위 '사무실분'들이 이렇게나 싸가지가 없는지를. 소설가 김현진은 2년 동안 녹즙 배달을 했단다. 체험이 잔뜩 묻어 있는 소설은 그래서 현실적이고 슬프다.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오늘에 정민은 술이라는 환각을 들이붓는다.


배달원은 노동자가 아니란다. 특수고용노동관계. 녹즙 값이 한 달이라도 밀리면 돈을 받지 못한다. 정민은 1년 동안 수당을 받지 못했다. 『녹즙 배달원 강정민』은 나와 당신 우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딸이라는 이유로 집안의 지원은 꿈도 꾸지 못하고 당연하다는 듯 생활비를 내야 하고 월급은 고스란히 남자 형제에게 쓰인다. 어렵게 면접의 기회가 생겨 한껏 차려 입고 갔는데 업무 질문은 없고 결혼과 애인 유무, 출산 예정에 대한 나아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지지 않는다는 힐난만 받고 돌아온다.


모르겠다. 뭐가 옳은지. 그른지. 전부 틀린 것만 같은 세상이다. 정답은 없고 오답만 가득한 세계. 덜 괴롭고 싶어 소설을 읽는데 더 괴롭고 서글프다. 정민이 개같이 일해서 번 돈을 가족이 털어가서. 녹즙 값 그거 얼마나 한다고 떼먹고 도망가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한테 그런 험한 일을 왜 하냐는 쓸데없는 질문을 해서. 내 칭구 같은 정미니를 힘들게 해서.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었지만 그 속에 두고 온 정민을 생각한다. 유쾌하게 끝을 맺었지만 내일은 또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다.


정민. 나 여기 있어. 그러니까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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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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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나의 카톡 상태 메시지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였다. 김중혁 소설 『나는 농담이다』의 주인공 송우영의 독백 대사였다. 때론 단순한 문장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다. 사람이 죽고 다치고 사라지기까지 하는데 아등바등 살아서 악착같이 돈은 모아서 뭐 하냐 그런 생각들을 마구잡이로 하던 때 만난 문장이었다. 죽음이라는 걸 실감하기 전에는 옹졸하고 갑갑하게 살았다. 지금도 뭐 여전히 다르지는 않지만. 그때보다는 지금이 아주 조금 어 리를 마음이 넓어졌다.


신작 소설집 『스마일』에 실린 「휴가 중인 시체」의 주인공 주원 씨가 하는 말 '우리 힘으로는 안 되겠네요'로 상태 메시지를 다시 바꿨다. 한동안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였다가 이제 '우리 힘으로는 안 되겠네요'로. 관심도 없겠지만 그래도 누군가 본다면 이 사람 참 부정적이다 싶겠다. 원래는 「왼」에 나오는 케빈의 '그 의미를 찾는 게 우리가 할 일이야'로 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에서 '그 의미를 찾는 게 우리가 할 일이야'로 하면 앞과 뒤의 연결이 자연스럽겠지만 남의 프로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누가 하겠는가. 나만 신경 쓰면서 살고 있는 거지. 그리하여 내가 발견한 김중혁 소설 세계관의 변화는 이런 것이다. 무슨 의미가 있냐고 질질 짜다가 먹고살려고 정신 차리다 보니 의미가 생기고 그 의미를 다시 찾아가는 과정을 『스마일』은 보여준다. 여행 유튜브 곽튜브를 보다 보면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자막이 있다. '무슨 의미?' 대개 어떤 여성이 친절을 보여줄 때 곽튜브가 즐겨 쓰는 말이다. 여행도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의 일종이니까. '무슨 의미?'하면서 다니는 것도 의미가 있다.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보고서 그가 웃고 있다는 걸 발견한 남자의 이야기 「스마일」로 의미 찾기를 시작해서 경비행기에서 추락해 플라스틱 섬에서 표류한 조이의 생존기 「심심풀이로 앨버트로스」, 왼손잡이 부족을 관찰·연구하면서 악수의 의미를 되새기는 「왼」, 별장으로 가다가 자신의 자동차가 해킹 당해 곤란을 겪는 설정의 「차오」, '나는 곧 죽는다'라는 글귀를 써서 여행 중인 사람과 동행하는 논픽션 작가의 회상기 「휴가 중인 시체」까지 『스마일』은 살아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담한 문체로 그린다.


어쩌면 살아 있다는 건 우리의 거대한 착각이 아닐까. 『스마일』은 질문한다. 실수로 아이를 죽일 수도 있었다는 걸 받아들이느라 버스 한 대로 여행을 하는 주원 씨는 차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나'에게 무심하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힘으로는 안 되겠네요' 그리고 '사람은 얼굴이 답안지예요. 문제지는 가슴에 있고 답안지는 얼굴에 있어서 우리는 문제만 알고 답은 못 봐요. 그래서 답은 다른 사람만 볼 수 있어요. 사람과 사람은 만나서 서로의 답을 확인해 줘야 한대요' 그러고선 '나'의 얼굴에서 29라는 답을 도출한다.


일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한 번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나니 모든 게 아니 일정 부분은 가벼워지고 시시해졌다. 까불이라서 염세주의자까지는 되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도 의미를 부여하면서 정당성을 찾는 행위를 그만하게 되었다. 그냥 그렇게 됐고 그럴 수도 있으며 그래도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김중혁의 소설은 답답하고 무거운 기운이 나를 감싸고 있을 때 귀신같이 알고 찾아와 시원한 바람이 부는 그늘로 데려다준다. 단어로만 알고 있던 청량감을 느끼게 해준다.


소설의 내용은 시원함, 그늘, 청량감과는 멀고도 먼 데. 나만 그렇게 느낀다. 한 문장이. 한 문장씩을 던져 나를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간다. 살려둔다. 일단 여기에 있어. 허튼 생각은 하지 마. 소설로써가 아닌 실제 인물로서 김중혁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도서관에 강연을 온다는 것이었다. 갈 수도 있었지만 가지 않는 걸 선택했다. 새로운 곳에서 일한 지 한 달이 되지 않아 연차가 발생하지 않았고 그랬는데 평일에 하루 쉬겠다고 말할 수 있는 뻔뻔함의 기능이 내 몸엔 장착되지 않았다.


주원 씨가 버스에 붙인 글 '나는 곧 죽는다'는 '나 다'로 바뀐다. 죽고 나서야 나다움을 찾는다는 의미일까. 그렇다면 억울하고 기가 차고 슬플 일. 아니 나는 그냥 나라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여러 의미를 붙여 나다움을 만들어 내지 말라는 뜻. 단순하게 생각해 사는 동안 내가 어떤 인간인지만 알면 좋겠다. 문학은 소설은 그걸 가능하게 해준다. 너는 곧 죽을 거고 그전에 네가 어떤 인간인지만 알면 된다.


『스마일』은 소설 속 다양한 인간 군상의 면면을 보여주면서 다른 형태의 삶을 제시한다. 이를테면 「왼」의 마지막 장면은 어떨까. 대안이 될까. 김중혁 소설의 특징은 인간적인 따뜻함을 엉뚱한 곳에서 느낄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죽음이 두려울수록 삶이 간절한 인물이 내미는 손을 잡는다. 웃으며. 오랫동안 잡은 손을 놓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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