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프 미 시스터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극복은 영화에서나 나온다. 현실에선 불가능하다. 극복이 아니라 참는 것이다.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이다. 그 일에 매몰되어 생계를 내팽개칠 수 없으니까 잊은 척하는 것이다.

(이서수, 『헬프 미 시스터』中에서)


이서수의 장편 소설 『헬프 미 시스터』의 주인공 수경은 회식 자리에서 끔찍한 일을 겪었다. 옆자리 동료가 수경에게 수면제인 졸피뎀을 먹인 것이다. 수경이 성과를 세워 다들 축하하는 즐거운 자리였는데. 평소 친절하고 예의 바른 동료였는데. 수경을 업고 모텔로 들어오는 걸 수상하게 여긴 여사장의 신고로 미수에 그쳤다. 그 일 이후 수경은 직장을 그만두었다. 사직서를 낸 날 팀장과 팀원들은 안도하는 듯했다. 피해를 당한 건 수경이었는데 수경이 일을 하지 못하게 됐다.


그래도 더 끔찍한 일을 당한 건 아니지 않느냐고 넉 달 동안 일도 하지 않고 집 바깥으로 나가지 않은 건 심하지 않냐고 수경의 가족과 친구들은 그런 마음조차 품지 않는다. 묵묵히 수경을 바라봐 주고 더 늦기 전에 수경에게 불을 켜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너만 힘든 게 아니라고 모두 힘들다고 하나 마나 한 말을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어 한다. 분노해 주고 보듬어 주고 싶어 한다. 『헬프 미 시스터』의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다.


인물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 이상한 욕심이 있는 작가였다면 수경이 졸피뎀을 먹고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더 안 좋은 일을 겪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서수는 그렇지 않았다. 고통은 크기에 상관없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걸 섬세하게 보여준다. 수면제를 먹었지만 여사장이 신고해서 그 뒤의 일은 당하지 않았으니 괜찮은 것 아닌가라는 소시오패스적인 생각을 차단한다.


수경은 범죄를 당했고 가해자는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하며 보호받아야 할 사람은 수경인데 법과 사회의 도움을 받지 못한 수경이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는 과정을 『헬프 미 시스터』는 그린다. 그깟 일 좀 당했다고 그러고 있어? 이렇게 말한다면 입을 때려야 한다. 쌍욕을 듣고 맞은 건 아니었다. 일처리 늦다고 쪼이고 자기가 묻는 말에는 무조건 대답해야 하고 그러니까 1분에 한 번씩 물으면 1분마다 대답을 해야 한다고. 너의 업무는 나의 비위를 맞추는 거라고.


당신의 행동과 말은 갑질이고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여러 번 말했다. 아니란다. 자신은 잘못한 게 없고 나의 성격이 문제라고 나 스스로를 한심하게 만들었다. 문제를 알리려고 여러 번 이야기를 했다. 믿지 않는 것 같기에 아니 짐작은 했으나 사실로 받아들이기엔 골치가 아플 것 같은 포즈를 취하기에 녹음까지 했다.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일을 그만두었다. 피해자는 난데 직장을 잃어버렸다.


수경은 극복이 아니라 참는 걸 선택했다. 먹고살기 위해서. 극복도 시간과 돈이 있어야 한다. 극복하기 위해 치료받으려면 시간과 돈이 있어야 한다. 공과금이 월세가 식비가 극복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내가 벌지 않으면 이 집의 생계는 누가 책임지는가. 주식 투자에 올인하는 남편과 사기당해 집 날려 같이 사는 부모와 남편의 조카들은 누가 돌본단 말인가. 수경이 그 일을 겪고도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일을 다니는 이유다.


『헬프 미 시스터』는 말해준다. 네가 겪은 그 일은 상처이며 충분히 고통스러웠을 거라고. 물리적으로 맞지 않았을 뿐이지 정신적으로는 심한 학대를 받은 것이라고. 마음을 두들겨 맞았다고. 매 맞는 아내가 된 것 같았다. 매일 때리지는 않는다. 하루 걸러 때리고 때리고 나면 자기 변명을 한다. 이런 패턴으로 일을 다녔다. 아침에 눈 뜨는 게 끔찍했고 걸어가는 동안 사고가 났으면 좋겠다고 매번 생각했다. 죽음을 자주 떠올리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언니 나 좀 도와줘. '헬프 미 시스터'를 번역하면 이런 뜻이겠지. 수경과 그녀의 엄마 여숙은 자차로 배송을 하다가 구직자와 의뢰인이 모두 여자인 앱 서비스 '헬프 미 시스터'에 등록해 일을 한다. 그곳에선 다양한 일을 의뢰한다. 결혼식에서 어머니와 언니 역할을 해 달라는가 하면 제사 음식 하는 자리에 가서 앞으로는 음식 하러 오지 않겠다고 말해달라고 하기도 하는. 같이 책 읽거나 아침 체조하고 사표 대신 내달라고도.


수경의 남편 우재의 말대로 '헬프 미 시스터' 의뢰의 핵심은 "나는 누군가 필요합니다."이다. 누군가 필요하다. 덫에 걸린 쥐를 잡아야 하는 일부터 이별 통보를 해야 하는 일까지. 겨우 그런 일로 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도움이 간절히 필요하다. 여자의 도움이 여자는 필요하다.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서수는 『헬프 미 시스터』에서 느리고 힘이 없는 희망을 보여준다. 가난하냐 가난하지 않느냐의 기준이 먹고 싶을 때 고기를 먹으면 가난하지 않다고 말하는 가슴 아프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말을 담담하게 쓰느라 이서수는 입술을 깨물었을 것 같다.


너도 알겠지만 누군가 어떤 일을 하고 있을 땐 말이야. 그 일이 맞아서 하는 것도 아니고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서도 아니야. 그냥 견딜 만하니까. 단지 그 이유로 계속하고 있는 거야. 그럴 수도 있는 거야. 수경은 속으로만 답했다.

(이서수, 『헬프 미 시스터』中에서)


나는 아직도 그놈이 나에게 소리를 지르고 고함을 치던 상황 속으로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간다. 나는 여전히 그놈이 나를 비꼬고 무시하는 말을 웃으며 하는 상황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나는 자주 그놈이 책임 회피를 하기 위해 사람들 앞에 나를 세워놓고 일의 책임을 나에게 돌리는 상황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자다 깼을 때 어둠 속에서.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업무라서 실수했을 때. 자료 입력을 하다가 오타를 쳤을 때. 가방을 메고 길을 걸어갈 때.


수경의 아버지 양천식 씨와 남편의 조카 지후인 그 둘이 걸어가면서 하는 대화가 잊히지 않는다. 어린 지후는 할아버지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어떠한 일을 하든 자신이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다정한 몸짓을 하며 말을 한다. 그런 지후에게 양천식 씨는 꼬북칩을 사주고 싶어 한다. 작은 도움과 말 한마디가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


여기 아니면 네가 갈 곳이 어디 있겠어. 지금보다 한참이나 어렸을 때 나는 저 말을 들었었다. 나보다 몇 살 안 먹었으면서. 어딜 가나 다 똑같다. 내가 괴롭다고 했더니 참으라며 들려준 말이 고작 저 정도였다. 나보다 훨씬 나이를 많이 먹었으면서. 나이가 많다고 해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고는 이제 생각하지 않는다. 어린 지후가 할아버지를 도와주는 장면을 읽으면서 나는 감탄했고 울었다. 지후의 손을 꼭 잡아주고 싶었다. 지후의 현실적인 도움이 바람을 타고 널리 퍼져 나갔으면 좋겠다. 앞이 막막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들의 앞으로.


괴롭힘당해서 그만두는 건데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서 미칠 것 같아서 그만두는 건데 그놈은 사직의 이유를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말하라고 강요했다. 현실에 '헬프 미 시스터' 앱이 존재한다면 의뢰를 했을까. 나 대신 화 좀 내 달라고. 사람을 이렇게 함부로 대해서야 쓰겠냐고. 자격증 따고 면접 봐서 힘들게 들어온 직장인데 이런 식으로 못 다니게 했었어야 했냐고. 안 그래도 업무 시간 내내 일만 하던 애한테 이것도 못 하냐고 네가 해야 할 일까지 떠넘기면서 일을 더 하게 만들었으면서 노력하지 않는다는 개소리를 쉬지 않고 하면 어떡하냐고.


수경 씨와 여숙 씨라면 떨거나 울지 않고 말도 더듬지 않으며 했을 거다. 자신들이 힘들게 살아서 남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공감했을 사람들이기에. 돈을 받고 하는 의뢰지만 최선을 다해 언니와 엄마의 마음으로 심지어 과몰입 하면서 화를 내줬을 거다. 『헬프 미 시스터』는 너의 고통스러운 지난 시간을 극복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당장 먹고살게 급해 일을 하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씩씩한 어조로 말해준다.


견딜만한 일을 하다 보면 삶도 견뎌진다. 기적이라고 생각하면 기적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돈이 없지 웃음이 없냐고. 웃다 보면 웃어진다. 그러니 웃어봐. 가난한 서로를 미워하는 대신 가난한 서로의 어깨를 주물러주는 소설 『헬프 미 시스터』. 서수 언니. 수경 언니를 소개해 줘서 고마워. 덕분에 여숙 언니도 알게 되었네. 여전히 사는 건 지치겠지만 도움이 필요할 땐 손가락을 움직여서 『헬프 미 시스터』를 열게. 언니들 그곳에 항상 있어 줄 거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별과 고양이와 우리 창비청소년문학 87
최양선 지음 / 창비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집 앞 편의점에는 동물들이 산다. 계산대 뒤 쪽에 마련된 공간에 고양이들이 있다. 조그만 캣타워와 방석이 있다. 그 위에 한 마리씩 자리를 차지하고 대부분 자고 있다. 물건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갈색 고양이가 다가왔다. 다가오니까 무서워하면서도 안 그런 척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처음 알았다. 고양이의 혀가 까칠하다는걸.


집 앞 상가 건물 도로에는 늘 두 마리의 개가 있다. 한 마리는 흰둥이 한 마리는 누렁이. 흰둥이는 대부분 퍼질러져 있고 누렁이는 다가왔다. 다가오니까 무서워하면서도 안 그런 척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쯤에서 눈치챘겠지. 사람이든 동물이든 내게 다가오면 피하지 않는다. 선의와 악의를 구분하지 못해 애를 먹지만 다가오면 반갑다.


동네 초등학생 덕분에 알게 되었다. 누렁이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는데 길 가던 초등학생 둘이 다가왔다. 과자를 손에 든 채로 누렁이를 만졌다. 그러면서 알려 주었다. 누렁이의 이름은 누룽지라고. 여기 목줄에도 쓰여있지 않냐고. 진짜 그랬다. 목줄에 누룽지라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있었다. 여기 편의점 강아지예요. 저기 흰 강아지는 반찬집 강아지고요.


동네 사정에 밝은 초등학생 덕분에 많은 걸 알게 되었다. 편의점에서 기르는 고양이들은 임보 중이란다. 임시보호. 얼마 전에 한 마리가 입양을 갔고 나머지는 기다리고 있다고. 자식. 편의점에 무진장 많이 갔나 보네. 학교 끝나는 시간에 보면 그 편의점 안에는 초등학생들로 가득했다. 녀석들도 나처럼 고양이들을 보러 가는 거였구나 짐작한다.


편의점 입구에는 상자가 놓여 있다. 고양이들의 집. 한 마리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털은 숭숭 빠져 있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질질. 어디가 아픈 걸까. 그런데도 바깥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최양선의 소설 『별과 고양이와 우리』의 주인공 유린은 혼자 살면서도 길고양이들의 밥을 챙겨 준다. 할아버지와 둘이 살았던 그 애는 이제 혼자가 되었다. 난방 용품이라곤 전기장판 하나 달랑 있는 옥탑방에서 산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한다.


먼저 세민의 이야기가 있다. 분식집을 운영하는 부모님은 아들 세민이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원한다. 그 바람대로 되고 싶지만 어느 날부터 피아노만 치면 귀에서 이명이 들린다. 자신을 연주자로 만들기 위해 알바하는 누나도 내보냈는데. 그리고 지우의 이야기. 공부를 잘하는 지우. 망원경이 있는 언니 방에 들어가 별을 본다. 언니가 남겨 놓은 물건들 틈에서 별자리 이야기가 담긴 공책을 발견한다. 여든여덟 개의 별자리. 하늘을 바라보며 언니를 그리워한다.


세민, 지우, 유린은 별자리 음악 캠프에서 만난다. 서로가 서로에게 별이 되어 주는 게임에서 세민은 지우의 별이 된다. 지우는 유린의 별이 되고.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유린은 지우를 지켜보고 지우는 세민을 지켜본다. 편지를 전해주면서 서로를 알아 간다. 고민 많은 열여덟은 서로가 서로를 발견하면서 친구가 된다. 내가 가장 마음이 쓰인 친구는 유린이었다.


자기 먹을 것도 못 사면서 고양이들의 사료를 사고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하는 유린. 도움을 요청할 어른이 없는 유린. 『별과 고양이와 우리』는 세 아이들의 성장담이다. 쉽게 쉽게 마음을 열고 마음을 보여주는 시기라서. 머뭇거림이 있지만 공통점을 하나 발견하면 먼저 다가갈 수 있는 나이라서. 부럽고 애틋했다. 『별과 고양이와 우리』를 읽으면서 편의점에 있는 고양이들을 떠올렸다. 내게 먼저 다가온 아이는 한 쪽 눈이 아팠다.


다친 거겠지. 차마 왜 한 쪽 눈이 없는지 물어보지는 못하고 짐작만 한다. 내가 걸어가는 걸 유심히 보던 아이는 털이 빠지고 침을 흘리고 있고. 어딘가에서 상처를 받고 어떤 우연에 의해 편의점에서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 세민, 지우, 유린이 친구로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별이 되어 서로를 지켜주려는 모습처럼 다친 고양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 많은 주인과 간식 좋아하는 초등학생들의 귀여움을 받으며 잘 지냈으면 좋겠다.


제목에 '우리'라는 단어가 있어서 근사했다. 나와 너로만 존재하는 세계가 있었다. 왜 나와 너는 우리가 될 수 없을까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포기한 순간이 떠올랐다. 현실에서의 포기가 소설에서는 극복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너희들은 앞으로 우리라고 말하겠지. 그거면 됐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
강지희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동안의 점심은 이랬다. 반찬집에서 사 온 3,000원짜리 반찬 서너 개. 월급 받거나 기분 좋은 날에는 5,000원짜리 반찬도 샀다. 집에서 왕창 해온 밥. 물 한 컵. 묵언수행하는 사람들처럼 밥을 먹었다. 신속하게 먹었다. 10분 이내로. 정말 정말 끔찍했다. 처음엔 무슨 말이라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그마저도 쓸모없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의 에너지를 여기에 쓰면 안 되겠구나, 깊은 현타가 찾아왔다.


물건을 챙겨 나오면서 잊지 않고 밥통도 챙겼다. 반찬은 놔두고 왔다. 알아서 하라지. 지금은 이야기를 나눈다. 반찬은 사지 않는다. 반찬을 사려면 그 동네로 가야 한다. 트라우마. 한동안 그쪽으로는 가지 못할 것 같다. 생각만 해도 숨이 가빠 오고 심장이 두근댄다. 대신 제일 잘하는 김치볶음밥을 싸 간다. 파리바게뜨에서 샐러드를 사가기도 한다. 같이 먹으려고 맥모닝을 사 오기도 해서 고맙다고 여러 번 말했다.


이야기를 한다. 점심을 먹으면서. 듣기와 말하기의 비율을 적당히 조절해가면서. 어디를 가도 똑같다고 말한 그 입을 때리고 싶을 정도로 여기는 괜찮다. 똑같지 않고 더 좋을 수 있다는 걸 지금 괴롭고 힘든 이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참지 말고 버티지 말고 아닌 건 아니라고 나를 설득하면서 나오기를. 처음이라 일을 많이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게 느껴진다. 시간이 지나면 업무량은 많아지겠지만 일단 해보는 거다. 이야기가 있는 점심을 위해서.


산문집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은 작가들의 점심 단상을 모아놓았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먹는 점심. 회사 업무를 하다가 먹는 점심. 급하게 먹어야 하는 점심. 산책을 하기 위한 워밍업으로의 점심. 누군가들의 점심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한 시간의 점심시간. 급하게 밥을 먹고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어깨가 무지 아팠다. 등도. 벌칙의 시간인 것처럼 느껴지던 점심시간이었다. 여유도 온기도 없는 점심시간을 가졌었다.


책에서는 다양한 점심시간의 이야기가 나온다. 구내식당을 사랑하고 집에서 정성 들여 먹기도 한다. 여러 형태의 점심시간의 모습이었지만 나는 그 시간에서 쓸쓸함을 느꼈다. 일을 하기 위해 먹는 밥인데 먹어야 일을 할 수 있으니까 먹는 밥인데 점심시간은 노동 시간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어떤 곳은 중식비가 나오지 않기도 한다. 분명 둘이 먹는 점심인데 내내 혼자 먹는 지독한 외로움의 시간이었다.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을 읽으며 힘이 나길 바랐다.


나만 이상한 게 아니라는 따뜻한 시선이 필요했다. 솔직함에 대해 생각한다. 요즘 나는 산문집을 주로 읽는다.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솔직함을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쉽게 드러낼 수 없었던 과거의 어떤 기억을 꺼내 놓는 걸 보면서 나의 과거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눈가가 촉촉해지지 않고도) 말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기대한다. 유통기한이 지난 비비고 전복죽을 용기 내어 끓였다. 다행히 상하지 않았다. 조금 짜서 밥을 더 부었다. 3분의 2는 먹고 나머지는 반찬통에 옮겨 담았다. 다음 주 어느 하루의 점심을 위해서.


밥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찾아온다면. 점심시간인데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할 것 같은 시간을 겪고 있다면. 과감히도 아니고 그냥 담담한 마음이 되어 나왔으면 한다. 그곳이 최선이 아니라는 신호를 수신해야 한다. 힘이 나지 않을 땐 힘을 내려고 하지 말고. 영화 《벌새》의 영지쌤 말대로 손가락 하나를 움직여보기를. 손에 잡히는 리모컨이나 휴대전화에 깔려 있는 배달 앱을 눌러 보기를. 이상하게도 힘이 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튼, 인기가요 - 오늘 아침에는 아이유의 노래를 들으며 울었다 아무튼 시리즈 39
서효인 지음 / 제철소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렇다. 나 역시도 라디오에서 카세트테이프에서 시디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으로 그 시절을 살았다. 맘만 먹으면 불량소녀 정도는 될 수 있었는데. 아닌가. 불량소녀 맞나. 아침에 학교 가기 싫어서 그대로 버스에서 안 내리고 도서관으로 가고 야자 빠지고…. 그랬는데. 그 불량은 저 불량과는 달랐을 테지. 저 불량을 저지르기에는 소심하고 겁이 많았다. 눈에 띄지 않는 정도로 일탈을 감행했다.


여름방학이었다. 보충 수업은 가지 않았고 문을 열어 놓고 음악을 들었다. 라디오를 틀어 놓으면 시간 가는 줄, 알게 된다. 음악이 끝나면 디제이의 멘트가 끝나면 시보가 나왔으니까. 시간 가는 줄 알면서 듣는 음악은 이러했다. 인기가요들. 산타나의 〈Smooth〉. 이승철의 〈오직 너뿐인 나를〉. 임재범의 〈너를 위해〉. 라디오 채널이 바뀌어도 이 세곡은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그중에 토이가 있었다. 감성 변태라고 불리던 유희열이 진행하는 《음악도시》. 느지막이 일어나서 《두시의 데이트》를 듣고 중간에 밥 먹고 잘 나오지 않는 텔레비전을 겨우 달래서 보다가 누워서 책을 읽다가 《음악도시》까지 달렸다. 펫 매스니, 카디건스,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 브라이언 맥나잇. 한국의 지방 도시에서 문화적 혜택을 1도 누리지 못하던 불량소녀는 덕분에 문학소녀가 될 수 있었다. 뜻도 모르지만 분위기는 묘한 노래를 들으면서 일기장을 채울 수 있었다.


마이마이가 있었다. 충전은 잘되지 않아 건전지를 옆으로 달고서 음악을 들었다. 테이프를 A 면과 B 면으로 수동으로 바꿔줘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파나소닉으로 갈아탔다. 테이프를 한 번 넣으면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B 면으로 돌아갔다. 찰칵. 찰칵이 있었다. 찰칵하는 소리가 나면 음악이 바뀌면서 보고 있던 세상의 빛깔도 달라졌다.


그러니까 노래는 기억을 불러오는 주술과 다름없는 것이다. 중학교 2학년은 대체로 용감하고 대책 없고 삐딱하고 뜨거워서 무슨 기억이든 아주 오래 머리와 몸에 남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열다섯 살에게는 실수하지 않는 게 좋다.

(서효인, 『아무튼, 인기가요』中에서)


『아무튼, 인기가요』는 어눌하고 소심하고 그러나 반항심에 찌든 그때의 나를 파나소닉의 카세트테이프 돌아가는 소리인 찰칵과 함께 재생 시켜 주었다. 인용한 부분의 말처럼 열다섯 살에게는 실수하면 안 된다. 모조리 다 기억한다. 세상의 중심은 나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나이이므로. 학교 앞에는 레코드 점이 있었고 시내로 나가면 신나라 레코드가 있었다.


급하면 학교 앞으로 갔고(대개 신보가 막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침에 지나가다 매직으로 쓴 종이를 보았을 때 포스터 증정까지라는 문구가 있으면 빛에 이끌리는 좀비처럼 들어가서 빨간색 딸기 지갑에서 돈을 꺼내 테이프를 샀다. 돈이 더 있는 걸 확인하면 시디도 샀다. 같은 가수의. 참으로 비효율적인 소비 패턴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여유가 있으면 신나라 레코드로 갔다. 그곳은 뭐랄까. 입구부터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곳이었다. 시내 중심가라지만 걸어서 오분이면 이 끝과 저 끝을 왕복하는 시내에서 유일하게 도시적 세련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규모만 다를 뿐 음악이 넘쳐흐르는 곳에서 듣고 샀던 가수의 음반 리스트를 『아무튼, 인기가요』에서 조우했다. 아.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지역만 다를 뿐 비슷한 음악을 들으며 말도 안 되는 교육을 받으며 살았구나. 반가움도 있었다. 지금 듣는 음악 리스트는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동년배. 오마이걸의 〈Dolphin〉을 들어보라고 하기에 들었다. 스포티파이를 구독하는데 한 번 오마이걸을 들으니 비슷한 음악으로 추천해 준다. 고오맙다. 취향에는 차이가 있으니까. 그걸 존중해야 하니까.


다시 원래 듣던 음악으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지금은 무얼 듣냐면 백예린과 권진아와 볼빨간 사춘기와 위위와 롤러코스터와 S.E.S. 스포티파이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고 하니까 90년대 베스트 음악을 추천해 주었다. 아닌데. 나 2020년대를 사는 사람인데. 웬 90년대? 그래도 들어볼까 한 번 들어보지 뭐 하다가 중독되었다. 아주 미쳐버리겠다. 왜 나 가사 다 아는데? 영턱스클럽과 언타이틀과 듀스와 서태지와 아이들과 핑클과. 말을 말자. 모두 내가 산 음반의 가수들이다.


내가 돈이 없지 감수성이 없냐. 식으로 엄마 일하는 곳과 엄마 사는 곳에 가서 돈을 뜯어 음반을 샀다. 엄마 미안해. 엄마도 힘들었을 텐데. 그래도 돈 줘서 고마워. 소니가 있었다. 아무래도 테이프는 불편했다. 파나소닉으로 계속 가고 싶었지만 좋아하는 음악을 반복해서 듣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했다. 뒤로 감기를 하고 멈춤을 눌러야 하는 정확한 타이밍을 익혀야 하는 노력과 기술.(나중엔 그걸 잘했다. 뒤로 감기 버튼을 부르고 삐리릭 테이프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잠깐 쉬었다가 정지 버튼과 재생 버튼을 동시에 누르는.)


엄마 찬스를 쓰자. 엄마 또 미안해. 소니 시디플레이어를 사니 부드러운 파우치를 주었다. 알지? 양쪽 줄을 잡아당기면 복주머니 스타일로 되는. 소중한 소니. 리피트 버튼을 눌러 놓으면 무한 반복으로 한 곡을 들을 수 있었다. 한 곡이 있었다. 가방에 넣고 이어폰 줄 한가운데에 있던 조작 버튼을 눌러가며 학교와 집을 다니던 키 작은 내가 보인다. 롤러코스터와 윤상을 들었다. 〈어느 하루〉와 〈우연히 파리에서〉. 교과서 보다 열심히 봤던 가사집. 가사집을 보면서 노래를 들었으니 안 외워질 리가 없었다.


그러니 90년대 베스트 추천 음악을 들으면서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는 거다. 『아무튼, 인기가요』를 읽는 내내 그립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시절을 떠올렸다. 내가 피해를 받을망정 남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하는 지금의 내가 있다. 한동안의 플레이리스트는 이러했다. 출근할 때 힘이 나는 노래. 쉼이 필요할 때 듣는 음악. 뇌의 휴식을 주는 노래. 아무리 진정하려 해도 진정이 되지 않아 심장이 두근대고 호흡이 힘들었다. 버텨야 한다고들 하는 데 그럴 필요 없다. 버티면 죽는다. 잘 새겨 들어. 문학소녀가 말하는 거니까.


오마이걸의 〈Dolphin〉 받고 위위의 〈멀어지지 않게〉 그리고 임재범의 〈이 밤이 지나면〉.



#플레이리스트


이승철


오직 너뿐인 나를


산타나


Smooth


본조비


It's my life


롤러코스터


어느 하루


윤상


우연히 파리에서


백예린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야


권진아 


다 알면서(feat. 박재범)


위위


멀어지지 않게


S.E.S


너를 사랑해


카디건스


Carnival


이규호


머리끝의 물기


임재범


이 밤이 지나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튼, 술 -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무튼 시리즈 20
김혼비 지음 / 제철소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동안 잘 다니던 마트가 있었다. 금요일 밤에 주로 갔다. 주말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먹고 놀려고. 어느 날 마트 계산원이 알은체를 했다. 참 건전하게 사신다고. 네? 다른 사람들은 술도 많이 사 가는데 그런 게 없다고. 네에. 하고 이제는 안 간다. 그냥 매주 보니 반갑고 매주 무얼 사나 들여다보니 내적 친밀감이 생겨서 말을 건넨 것일 텐데. 좀 부담스러워져서 안 가고야 말았다.


계산원이 궁금해했던 거. 술. 금요일 밤. 어리바리하게 생긴 이 사람은 술을 사지 않는다. 두부, 어묵, 과자, 햄, 콜라. 가끔 싸게 나왔다 싶은 사과를 사서 나간다. 한때는 술 좀 마셨다. 해지는 거 보고 들어가서 해 뜨는 걸 보고 나와 세수하고 아침 수업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제는 코로나 시국이라 그렇게 하지도 못할뿐더러 술만 마시면 지구의 자전을 온몸으로 느끼느라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냉장고에 술을 일렬종대로 세워 놓은 모습과 텔레비전을 보면서 배달 음식과 술을 마시는 모습이 신기할 뿐이다. 그에 비해 나의 냉장고 안에는 각종 우유와 한 달 전에 사 놓은 빵, 김치가 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마시는 건 진한 초코 우유. 김혼비의 산문집 『아무튼, 술』을 읽다 보면 마트 주류 코너에도 한 번씩 가볼까 고민이 든다. 그땐 그랬지. 어디든 앉기만 하면 술자리가 됐었지. 물처럼 마시면서 엄청 웃어댔지. 그리운 건 절대 아닌 약간의 부끄러움이 깃든 추억이 떠오른다.


요즘 나는 문자를 자주 보낸다. 나이/성별/사는 곳/경력. 슬래시가 섞인 사무적이고 무미건조적인 문자. 대체로 답문은 없다. 전화가 오기도 해서 이력서를 들고 갔다. 잠깐만 앉아 있으라고 해서 앉아 있었는데 20분이 되어 가는데도 나한테 오지를 않았다. 나를 뻔히 보고 있었는데도. 나중에서야 면접 보는 걸 잊었다는 식의 이해 불가한 말을 했다. 평소 자주 가던 매장이었는데 이상한 행태로 단골손님을 잃었네.


김혼비의 『아무튼, 술』에서 내가 책갈피를 하고 오랫동안 들여다본 일화는 「술 마시고 힘을 낸다는 것」이었다. 인생의 암흑기를 건너가던 시기 김혼비는 그래도 즐거운 척 그러다 보니 즐거워지면서 술을 마셨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굳이 힘들다고 말하지 않고 힘들어서 마시는데 마시다 보니 즐거운 날. 치과 치료를 했지만 치료한 부위에는 술이 닿지 않게 나 자신 칭찬해 하며 기술적으로 마시고 노래방까지 갔다. 기억은 거기까지.


다음날 아침. 노래방 리모컨이 현관에 떨어져 있고 가방에 지갑은 없다. 김혼비는 드문드문 기억을 꺼낸다. 택시에서 벌인 광란의 질주가 떠오른다. 오락실 운전 게임인 줄 알았는데. 착하고 수다스러운 택시 기사님 덕에 지갑을 찾고 고맙다고 문자를 보냈다. 기사님은 김혼비에게 짧은 문자를 보내온다. '네. 힘내세요.' 김혼비는 기사님의 문자를 친구에게 이야기해주다 운다. 힘내세요 라니.


슬래시 가득한 문자를 보내고 그렇게 보내라고 해서 보냈지만 짧은 인사도 하지 않은 예의를 밥 말아 먹은 것 같은 문자를 보낸 나 자신이 한심하다. 그런 문자에 '네. 힘내세요.'라는 글이 전송되어 오면 나도 김혼비처럼 울까. 사람이 마음에 안 들어도 그렇지 20분을 앉혀 놓고 있다니. 내 시간은 묻지도 않고 언제까지 오라는 틀린 하십시오체로 시간 변경을 두 번이나 해놓고 막상 갔더니 불법을 아주 자랑스럽게 한다는 식의 멘트를 뻔뻔하게 날리다니. 코로나로 어려운 건 님만이 아닙니다.


노래방 리모컨을 운전대로 착각할 만큼 술을 마실 사연은 아니지만 암막 커튼을 다시 쳐 놓고 부드러운 이불 속에서 잠시 숨어 있고 싶은 일이다. 며칠 동안의 일. 김혼비는 택시 기사님의 문자를 받고 결심한다. 평소에는 효용성이 떨어져 쓰지 않던 힘내라는 말을 자주 쓰기로. 힘을 내라고 하지만 도저히 그 말로는 힘이 나지 않아 있던 힘도 떨어지게 만드는 힘내라는 말을 매번 해보기로. 암흑기를 지나고 있던 시기에 뒤에 후광을 달고 나타나 잃어버릴 뻔한 지갑까지 찾아주면서 성스러운 멘트를 날린 천사 같은 택시 기사님을 만난 이후로 김혼비는 힘을 낸다.


나의 귀염둥이 펭수는 힘내라는 말보다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둘 다 좋은 말이다. 매번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말이다. 『아무튼, 술』에는 주류 이야기와 비주류 이야기가 잘 말은 소맥의 비율처럼 적절히 배합돼 계속 읽어 보고 싶도록 만든다. 글이 들어간다. 쭉쭉쭉. 읽어라. 읽어. 언제까지 어깨 춤을 추게 할 거야. 페리 안에서 술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헐레벌떡 달려와 같이 듣자고 말하는 평생의 동반자가 있는 한 암흑기는 없다는 아니고 있어도 이게 어두운 거 맞아 하면서 지나갈 거다. 그럴 거다. 꼭. 그래야 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