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
정세랑 외 지음 / 창비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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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그거 아세요. 처음 만나 밥을 먹을 때 호칭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 물어봤잖아요. 그냥 언니라고 해요. 해서 그렇게 부를까 하다가 반감이 들었어요. 다른 직원들은 있지도 않은 직급을 만들어서 성 뒤에 붙여 부르는데 왜 당신만 언니라고 불러야 할까. 얼마 동안은 언니라고 부르다가 다른 직원들에게 하는 것처럼 직급을 붙여 불러요, 이제는.


정세랑 작가의 말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책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를 먼저 읽었더라면 당신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게 괜찮을지도 몰랐겠어요. 그랬다면 지금 언니, 언니라고 부르며 좀 더 친해졌을지도 모를 일이겠지요. 아시죠. 직장에서의 관계란 일시적이고 사나울 수밖에 없다는 걸.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웃긴 글을 봤어요. 직장에서의 정신 승리법. 9시에서 6시까지 힘든 약속 있다고 생각하며 가기. 컴활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가기.


직장에 관한 유머를 읽어도 좀처럼 좋아지질 않아요. 나는 감정이 없다. 이 사람과는 저녁 6시 이후에 볼 일이 없다. 되뇌어도 화나고 억울한 마음은 사라지질 않아요. 언니는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서 오랫동안 일을 했나요. 직접 물어보고 싶지만 하진 않을래요. 질문을 던진다고 해도 우리 사이에는 진솔한 이야기가 오고 갈 시간도 여유도 없으니까요.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를 일주일 내내 읽었어요. 언니의 나라에서도 행운의 편지라는 게 있었나요. 어느 날 문틈에 끼인 하얀 편지 봉투를 발견했어요. 누가 나에게 편지를 보냈을까. 두근거리며 봉투를 열었을 때. 손글씨로 쓰인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일 년에 한 바퀴를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고 지금은 당신에게로 옮겨진 이 편지는 4일 안에 당신 곁을 떠나야 합니다. 이 편지를 포함해서 7통을 행운이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 주셔야 합니다. 복사를 해도 좋습니다. 혹 미신이라 하실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라는 문장을 읽자마자 던져 버렸어요.


행운은커녕 짜증만 나는 편지였어요. 행운이라는 게 운이라는 게 7통의 편지만 써서 받을 수 있다면 7통이 문제겠어요. 앉은 자리에서 70통이라도 쓸 수 있겠지요. 장난과 익살이 담긴 한때의 유행 같은 거였어요. 요즘에도 행운의 편지를 쓰는지. 편지를 받고 고민에 빠지며 7통의 편지를 쓰고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사주고 싶어요. 그만큼 절박하고 외로운 이일 테니까요. 정세랑 작가는 언니들의 연대 안에서 자신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몇 백 년 전에 살았던 언니들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곳에 남아서 자신들을 지켜주고 있다고. 언니들의 미약한 힘이 모여 용기와 온기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건네주고 있다는.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에는 언니가 언니를 응원하고 지지해 주는 글로 가득해요. 여기에서 말하는 언니의 성별은 전부 여자예요. 책을 읽으면서 만약에 이런 형식의 글을 쓴다면 누구를 호출할까 생각해 보았어요.


여자만 언니가 될 수 있을까. 아니에요. 채만식의 소설 「이상한 선생님」에는 성별이 다른 형제를 언니라고 부르는 대목이 나와요. 그러니까 남자인 동생이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않고 언니라고 부르지요. 광복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주인공이 남자 형을 대석 언니라고 불러요. 언니라는 호칭은 여성과 남성의 구별이 없는 거라는 걸 알게 되면서 다양한 언니들을 부를 수 있구나 즐거웠어요.


창비에서 이걸 알았다면 언니, 오빠, 형 할 것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쓴 편지를 책으로 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해요. 저는 좀 무식해서 논쟁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없어요. 싸우고 분노하는 일에 소질이 없어요. 감정을 숨길 줄 만 알았지 드러내는 법을 배우질 못했어요.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상대가 날 싫어하지 않을까는 걱정으로 의견을 내는 걸 극단적으로 두려워해요. 남녀 구별하지 않고 인간으로 서로를 바라보면 어떨까요. 이런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으로 버텨요.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를 읽는 순간에는 온갖 상념이 떠올라서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이걸 써야지 했어요. 막상 책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니. 휴. 한숨만 나오네요. 어두운 길을 걸어 올라와 집에 불을 밝히고 씻고 누웠을 때 언니들의 곁에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가 있었으면 해요. 짧은 에세이 형식이라 길어야 5분 정도 시간을 들이면 한 편씩 읽을 수 있어요. 오지은 님의 글이 유독 기억에 남았어요.


이상한 사람이 있으면 의심이 들면 자신에게 말하라고 하네요. 알지요. 말을 해도 해결이 되지 않는 일이 태반이라는걸. 그럼에도 말을 하면 나의 슬픔이 옅어질 수는 있어요. 나만이 나의 어려움을 알아선 안된다는 걸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해요. 쓰레기장을 청소하다가 책 몇 권을 가져왔어요. 아주 오래된 책 들인데요. 어렸을 때 읽었던 기억 때문에 그냥 놔둘 수가 없었어요.


먼지를 털고 물티슈에 소독약을 묻혀 닦았어요. 종결어미가 -읍니다로 끝나는 책. 쓰레기장에 앉아 문학이 무얼까 고민했어요. 책을 읽고 버리고 그걸 나 같은 사람이 주워가고. 문학은 책에만 학교에만 있다고 생각한 시절이 부끄러웠어요. 얼른얼른 배워서 작가가 되겠다는 쓰레기 같은 마음을 먹었던 시절까지도요. 문학이 아니면 안 되는 시간에서 문학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지금 여기까지. 도착했어요.


내가 말하지 못한 감정을 정확한 문장으로 표현한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어요. 편지를 썼지만 부치지는 못할 듯해요. 우리에게 알 수 없는 행운이 찾아오기를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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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활발발 - 담대하고 총명한 여자들이 협동과 경쟁과 연대의 시간을 쌓는 곳, 어딘글방
어딘(김현아) 지음 / 위고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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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글을 읽다가 어딘을 알게 됐다. 어딘 글방에서 글을 쓰며 수련을 했다는 이슬아. 매일 한 편의 글을 쓰는 부지런함이 그를 작가로 만들었다. 글을 써본 자는 안다. 첫 문장을 쓰기까지의 숱한 망설임. 쓰면서도 이게 글이 될까 나까지도 의심하게 되는 나날들. 기껏 써 놓고도 부끄러워서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하고 내 문서 폴더 안에 잠자고 있는 글, 글들. 작가가 될 거예요 선언조차 힘이 들어 마음속으로만 간절히 작가의 꿈을 키우고 있는 문청의 옆모습.


김현아가 이끄는 어딘 글방에서는 서로를 닉네임으로 부르는가 보다. 현실의 이름이 아닌 자신이 선택한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며 매주 한 편의 글을 써서 다정한 혹은 혹독한 이야기를 나누는 어딘 글방. 그곳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다룬 『활활발발』은 90년 대생들의 글쓰기 스승이 쓴 글답게 쉽고 아름다웠다. 왜 글을 쓰는가. 묻는다면 명확하고 확실한 답을 할 수 있을까. 글쎄요. 어쩌다 그렇게 됐네요 식의 하나 마나 한 대답을 하다가 다음 주제로 넘어간다.


어딘 글방에 찾아와 글을 쓰고 함께 어울려 밥을 먹는 그들은 글을 쓰게 된 이유를 글을 쓰면서 설명한다. 외국 학교를 다니면서 받은 차별, 가난했던 어린 시절, 학교에서 당한 왕따, 성소수자로서의 시간, 우울증에 빠져 지낸 나날. 처음에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조차 어려워하던 글방의 친구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무람없이 자신의 어려움, 고통, 가난, 두려움을 쓴다. 글쓰기의 이론은 모르겠고 좋은 글의 기준을 한 가지만 꼽으라면 솔직함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함은 양날의 검이다. 솔직해서 좋고 싫다. 이 글은 솔직하다고 평가할 때 과연 그 글은 솔직한 걸까. 어디까지 드러내고 감춰야 할까. 매번 실패한 글쓰기를 하는 이유다. 작정하고 솔직하게 쓴다고 할 때 검열관은 나 자신이다. 『활활발발』 안에서 펼쳐지는 글쓰기는 솔직함의 끝판왕이다. 어딘 글방에 모인 그들은 솔직해지기 위한 사명감으로 찾아온 이들 같다. 말로는 할 수 없는 개인사를 고르고 고른 단어와 문장으로 풀어낸다. 어딘은 그들이 써온 글을 읽고 중요한 말을 해준다. 앞으로 글을 계속 쓸 수 있도록 위한.


『활활발발』을 읽는 동안 마음이 뜨거워져 혼났다. 누군가 알아주기는커녕 나조차도 미심쩍어서 그만 둘까 생각하는 글쓰기를 누군가는 이토록 열렬하게 계속하는 모습들 때문에. 의심하며 쓰는 글은 자신을 위로하고 버틸 수 있게 해주었다. 존버는 승리한다를 어딘 글방에서는 몸소 보여준다. 쭈뼛쭈뼛 쓴 글은 혹평과 응원이 모여 책이 되었다. 작가 지망생은 작가가 된다. 어딘 글방에서 글을 쓰던 이들은 자신이 주체가 되어 새로운 글방을 연다. 어딘 글방에서 받았던 위로를 나눠주는 일을 한다.


책 뒤편에는 어딘 글방의 글방러들의 글이 실려 있다. 모든 글이 좋았지만 유독 조개의 글 때문에 심장이 다시 뜨거워졌다. 글을 쓰고자 하는 열망, 주수원 정신과에서 나눈 이야기, 작가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의 혼란, 그러거나 말거나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사는 것의 기쁨. 금요일 저녁, 괜찮아졌던 마음은 불시에 어두워졌다. 원하지 않았는데도 오늘 일어난 일을 복기하면 나 자신을 훼손하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에 밀려오는 열패감을 미리 떠올리기도 하면서.


잡일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주수원 샘의 말을 기억해야겠다. 영어로 잡은 직업이니까. 잡일을 직업의 일로 바꿔 생각하면서 그 일을 하는 나는 직업인이다 의식해야지. 나이 많고 경력 없는데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고 간혹 연락이 왔던 건 A4 종이 한 장을 가득 채운 자기소개서 덕분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글을 쓸 수 있도록 그냥 쓴다. 쓸 수 있는 상황이 오면 쓰기 위하여. 어딘 글방이 지척에서 열린다고 해도 나는 가지 않겠지. 대신 그곳에서 연마하며 쓴 글이 책으로 나오면 읽는 사람은 되겠지.


작가가 되겠다 하던 마음은 엷어지고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남아 글을 읽고 그 글에 대하여 쓴다. 좋았어. 그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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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딱 하루만 잘 살아 볼까?
김중혁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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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말하자. 김중혁이니까 샀다. 굿즈 받고 싶은 마음에 신간 목록을 보다가 『오늘 딱 하루만 잘 살아볼까?』라는 제목의 책을 보았다. 참 나 뭐야. 하고 스크롤을 내리다가 저자 이름을 봤다. 뭐야. 김중혁이잖아. 왜 그랬지? 하면서 책 정보 클릭. 도대체 뭔데, 띠지에는 '북유럽, 대화의 희열 MC 김중혁'이라고 적혀 있었다. '2022 필독서'라고도.


그건 누가 정한 건데. 계속 의문형으로 시비를 걸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장바구니에 담았다. 한 번 애정 한 작가는 평생 애정 한다는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있다. 간혹 얼굴 보고 이야기를 나누며 에이 별로네 하는 작가가 있어 그 후로 책을 사지 않는 경우 빼고는 쭉 애정하고 지지한다. 귀여운 유리컵과 함께 『오늘 딱 하루만 잘 살아볼까?』가 왔다.


다시 제목을 보니 괜찮았다. '딱'이라는 부사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명사 하루 뒤에 붙은 조사 '만'도. 오늘 하루 잘 살아볼까보다는 오늘 하루만 딱 잘 살아볼까는 어제는 꽝이었지만 오늘 하루는 어떻게든 괜찮아져 보자는 격려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김중혁의 소설 『좀비들』을 좋아한다. 2000년대 들어서 유일하게 두 번 읽은 한국 소설이었다. 뭐든 나쁘게만 보지 않으려는 착한 시선이 담긴 소설이다.


『오늘 딱 하루만 잘 살아볼까?』는 사용 설명서가 따로 있는 책이다. 하루에 한 편씩 읽으며 일상을 바꿔보자고 한다. 첫 번째 사용법에는 꼭 책을 사서 읽으란다. 사서 읽었으니까 이건 통과. 차례는 꼼꼼하게 읽지 말고 제시된 방법을 따라 해보라고 한다. 술술 읽히는 바람에 누운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청개구리 같은 나 같은 독자도 있어야 빨리 읽고 리뷰를 써서 검색하면 책이 나오겠지. 한 번 쭉 읽고 눈에 띄는 곳에 책을 놓아두고 집 안을 돌아다니다가 아무 곳이나 펼쳐서 읽고 책의 제안대로 따라 해보는 것도 좋겠다. 『오늘 딱 하루만 잘 살아볼까?』에서 소개한 영화 《노매드랜드》를 보기 시작했고 쓸까 말까 한 가계부도 써보기로 했다. 혹시 아나. 가계부를 쓰면 절약을 해서 부자가 될지.


『오늘 딱 하루만 잘 살아볼까?』는 김중혁 표 자기 계발서다. ~보자로 쓰인 제안은 크게 어렵지 않다. 가구를 바꿔보고 하루의 기분 그래프를 그려 보라고 한다. 창의력을 기르고 우울감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들이 읽으면 큰 도움까지는 아니고 소소하게나마 기분 전환이 된다. 돈 드는 건 별로 없다. 무엇이든 외우고 집 안에 핸드폰 금지 구역을 만들어 보자고 하니까.


잠을 자고 일어난 하루가 굉장한 기쁨이라는 걸 잊고 산다. 당연하게 눈을 뜨고 왜 눈 뜬 건데 짜증 나 이러고 산다. 길을 걷다가 앞에서 파마한 단발머리 할머니를 만날 때 아연해진다. 일하러 가는 길이니까 속으로 욕하면서 걸어가고 있었는데 10년만 더 살면 좋겠다고 말한 엄마가 떠올라서. 바보 같은 생각을 한 나를 꾸짖어 주러 온 건 아닐까 할 정도의 닮은 꼴의 할머니를 만나고서야 생각을 고쳐먹는다.


소중한 하루다. 감정이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고 일기에 오늘 하루도 참 재미있었다를 쓰기 위해 애를 써보자. 하루'만'이 모이면 하루'도'가 된다, 『오늘 딱 하루만 잘 살아볼까?』는 그렇게 되기 위한 제안서다. 김중혁의 어떤 마음이 이 책을 쓰게 했을까를 짐작해 본다. 책을 읽는 동안 소설가 김중혁이 아닌 일상인 김중혁을 떠올려 보았다. 신나게 사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어둡고 불안하고 무서워서 숨을 쉬기 힘든 지경까지만 가지 않으면 된다.


책을 펼치자마자 놀랐어요. 사인이 되어 있기에. 인쇄한 사인이 아니라서 더 놀랐어요. 미지의 독자를 상상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갔겠지요. 그 누군가 모든 제안 중에 하나만이라도 해보면 좋겠다는 마음 아니었을는지요. 일단 저는 영화를 보고 가계부를 쓰면서 힘을 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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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 마음산책 짧은 소설
박서련 지음, 최산호 그림 / 마음산책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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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그냥 여기 있을게요. 여기까지 물 차기 전에는 구조되겠죠."


"그렇겠죠?"


(박서련,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中에서)



금요일 밤에는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원래는 퇴근하자마자 벨 소리를 무음으로 돌려놓는데 일이 있어 깜빡하고 말았다. 다행이었다. 그 전화를 받기 위해 건망증 세포가 활약했나 보다. 유일하게 전에 일했던 곳에서 알게 된 사람 중 연락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상대의 말을 못 알아듣고 이해 못한척하고 싶어서 일부러 통화 소리를 줄여 놓은 탓에 귀를 바짝 대고 이야기를 나눴다. 재빨리 전화기 옆에 달린 볼륨 버튼을 누르면 될 텐데 순발력이 부족한 탓에 그마저도 못했다.


내 블로그를 보고 있다고 해서 조금 놀랐다. 그렇구나. 글을 쓰고 있다는 잘난 척을 하고 싶어서 내 블로그 주소를 알려주었구나. 그래놓고 잊어버리고 주절주절 내 일상을 쓰고 있었구나. 책 리뷰를 틈틈이 쓰면서도 나를 아는 누군가 혹은 모르는 누군가 관심 있게 블로그를 보고 있다는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자기애가 심한 편인 나는 그저 기록 보관용으로 쓴다. 말이 되든 안 되든 문법에 맞든 안 맞든 글쓰기 감각을 잃고 싶지 않아서 이기도 하고.


마음산책에서 나온 짧은 소설 시리즈 중 박서련의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를 읽고 글을 쓰기 위해 서점 사이트로 들어갔다. 예스24는 구매 리뷰를 쓰면 적립금을 준다. 짧은 평은 50원, 긴 평은 300원. 리뷰를 쓰기 싫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350원 벌어야지 하면서 쓴다. 차곡차곡 모아서 5,000원이 되면 환전을 한다. 작품 설명을 보다가 소설가 박서련이 홍보용으로 출연한 영상을 보았다. 에고 서칭을 한다고 한다. 자신의 이름을 검색창에 넣어 본다고.


독자들의 후기를 꼼꼼히 본다는 말에 얼른 내 블로그로 돌아와서 박서련을 검색해 보았다. 검색 결과 5건. 뭐야. 나 박서련 좋아한 거야? 허접하고 제멋대로인 리뷰를 봤을까 싶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설마 이런 것까지 봤을까 싶은 독자 후기도 읽었다고 하니 봤겠지. 보면 어때. 전체 공개로 해 놓은 글을. 혼자만 보고 싶었으면 비공개로 해놔야지. 나도 참 이중적이다. 써 놓고 읽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 읽으면서 빡쳤으면 어쩌지 하는 소심한 마음.


내가 이렇게 열심히 썼는데 이런 분석 밖에 못해? 책 이야기는 없고 순전히 지 이야기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다. 그래도 전 한국문학을 애정 하는 독자랍니다.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의 첫 문장. '그만둘 거야. 진심. 하루 이틀 하는 생각도 아니지만 이번엔 진짜로.' 뭐야, 나 지금 사찰당한 거야. 홀리듯 읽어 버렸다.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가 나왔을 때 고민했다. 마음산책 짧은 소설 시리즈는 화가와 콜라보 한 작품이다. 소설과 그림이 함께 있는 책이다.


종이책이냐. 전자책이냐. 종이책을 사야 컬러로 된 그림을 함께 볼 수 있다. 전자책으로 산 이유는 완전히 누워서 보고 싶어서이다. 옆으로 누워서 따뜻한 색온도를 즐기며 오늘 하루도 잘 참아냈네 다독이면서,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를 읽었다. 첫 이야기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에서 주인공은 만화 카페에서 진짜로 때려치울 각오로 일하고 있다. 오늘은 그만둔다고 말해야지 하면서 친절하게 손님을 맞는다. 서비스직의 비애.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비가 오고 카페에 물이 차면서 손님과 주인공은 고립된다. 탈출을 해야 하는데 그냥 남아 있기로 한다. 나가봐야 갈 데가 없다. 카페니까 먹을 것도 넉넉하겠다. 물에 잠기기 전까지는 버틸 수 있겠지. 죽으려고 해도 떡볶이는 먹고 싶고 그만두려고 해도 자본주의 미소 날리며 일을 하는 반어의 상황을 그려낸다. 그러고 가슴이 웅장해지는 이야기는 「제자리」였다. 박서련은 나를 알고 있는가 하는 생각 때문에.


내가 왜 탈출해야 할까 하는 이유를 나도 정확히 몰랐다. 「제자리」는 나 대신 탈출의 이유를 알려주는 소설이었다. '같은 팀 장이고 주임이고 대리고, 다들 말을 윽박지르듯 해서 지수 씨는 매번 약간 울듯한 심정으로 대화에 임했는데, 종종 남자 직원들은 여자 직원들이 울어버릴까 봐 무슨 말을 못 하겠다며 엄살을 피웠다.' 출산휴가를 간 심 대리의 책상을 옮겨 놓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 지수 씨.


좋은 소설이란 무얼까를 생각하다가 김중혁의 산문집 『오늘 딱 하루만 잘 살아볼까?』(그렇다. 나는 주말 아침에 일어나 부지런히 독서를 했다.)에서 답을 찾았다. 주인공의 내일이 궁금해지는 소설. 이야기는 끝나도 주인공의 내일과 모레가 궁금해지면 좋은 이야기가 된다는 답. 「제자리」는 그런 점에서 위로가 되는 좋은 소설이다. 심 대리와 지수 씨의 내일이 평탄하지는 않겠지만 응원한다. 윽박지르듯 말하는 사람들이 득실대는 그곳에서 버티지 않아도 된다고.


종영이 된 《무한도전》의 짤을 경전 읽듯 본다. 아닌 게 아니라 없는 게 없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시절을 예상하기나 한 듯 그들의 말, 자막은 어느 상황에 갖다 놔도 꼭 들어맞는다. 그중에 하하의 짤. '정신 차려 각박한 이 세상 속에서'가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를 읽으며 떠올라서 웃었다. 웃으면 안 되는 이야기도 있는데 웃음이 났다. 각박한 이 세상에서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정신을 놓고 싶은 소설 속 세계 때문에. 놓친 정신줄을 들고 웃고 있는 나를 만난다.


다시 금요일 밤의 통화로 돌아오자면 내가 어디에서 일해요라고 하니까 단박에 그곳의 빡셈을 알아주었다. 우리를 일으켜 주는 건 말 한마디와 이야기 한 편에 담긴 공감이다. 나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해해 주고 말이 되게 설명해 주는 일. 전자책으로 읽은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는 멍청하고 무력한 나를 일어나게 해주었다. 비록 예쁜 색감의 그림을 즐기지는 못 했지만. 내가 약한 게 아니라 그들은 약한 나를 더 약하게 만드는 이상한 인류라고 말해준다. 누구든 코믹 헤븐에 들어가는 순간 뭉친 어깨가 풀린다. 다정과 공감과 이해가 판치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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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나의 3천 엔
하라다 히카 지음, 허하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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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2022년 새해 첫날 한 일은, 두둥. 전달 실적에 따라 멤버십 등급이 올라간 걸 확인하고 환호. 새로 주는 쿠폰을 다운받아서 물건을 사는 일이었다는 것이었다는 것이었다. 뭐 대단한 걸 샀냐면 그것도 아니고 진짜 필요한 거다. 나랑드 사이다, 이디야 오리지널 아메리카노 150T·오리진 브라질 180T, 아토베리어 365 크림, 바디피트 한결 슈퍼롱 40개. 원래는 한 품목만 사려고 쇼핑앱에 접속했다. 다들 그렇지요?


그게 될 리가 있나. 새해맞이, 감사맞이, 호랑이해 맞이, 온갖 맞이의 기념으로 싸게 판다니까, 쌀 때 사 놓고 계속 쓰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얼마 이상이면 쿠폰이 된다니까, 통신사 할인도 된다니까. 샀다는. 그러고 정신 차리고 책을 읽었다. 누워서 하는 일이라고는 쇼핑과 책 읽기니까. 쇼핑했으니까 책을 읽어야지의 수순. 방금 내가 무슨 짓을 저질러버렸나. 소비 지옥에 빠진 나를 친절한 얼굴로 꺼내준다. 하라다 히카의 『할머니와 나의 3천엔』은 그런 책이다.


할 말이 있는 게 위에 적은 품목을 봐서 알겠지만 생필품이다, 사치품이 아닌. 물론 보디로션 큰 거 한 통 사서 몸과 얼굴을 바르면 되지 않냐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겨울 보습에 짱 좋다는 점원의 말을 믿고 산 크림은 훌륭했다. 한 번 그걸 썼으니 내 얼굴도 크림의 효능을 기억하고 있을 테지. 몸의 주인인 나는 발라서 지친 얼굴을 달래줘야지. 커피는 무슨. 보리차 끓여서 이건 커피다, 쓰다 생각하고 먹어라 하면 먹겠지만. 슬프네.


『할머니와 나의 3천엔』은 단순히 절약해, 지금부터 허리띠를 졸라 매야 해, 강압하는 책이 아니다. 삼대에 걸친 세 여성과 주변 인물들의 절약 일상을 보여준다. 반려동물을 키우고 싶은 미호, 아이가 대학에 갈 때까지 학자금을 모으고 싶은 마호, 일흔이 넘었지만 구직 활동을 시작한 고토코, 갑자기 병에 걸리자 현재 삶의 위치가 불안한 도모코, 프리터로 돈이 모이면 여행을 떠나는 야스오.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인물들이다.


왜 돈을 모을까. 원하는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빌린 집에서는 반려동물을 키울 수가 없다. 남편 혼자 돈을 벌기 때문에 아이의 미래를 불안정하게 놔둬서는 안 된다. 연금만으로는 노후가 보장되지 않는다. 여행을 가기 위해서라면 힘든 일도 참고할 수 있다. 그들이 돈을 모으는 이유는 응원해 주고 싶을 정도로 소박하다.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불안함을 느낀다. 여유가 있는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과감한 투자를 하지는 못하고 오로지 근로 소득에 기대야 한다.


하라다 히카의 작품을 처음 읽어봤다. 소개 글에서처럼 일상을 그리는 재주가 뛰어나다. 한 번 잡으면 나의 현실을 사찰한 듯한 현실감에 손을 놓을 수 없다. 매일 아침 스타벅스에 들러 커피를 마시는 게 낙인 미호. 은행 금리를 따지며 남아 있는 돈을 헐어 쓰지 않도록 노력하는 고토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을 주저하는 야스오. 『할머니와 나의 3천엔』은 3천 엔이라는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각자의 인생이 달려 있다는 선언으로 시작해 행복의 목적이 무엇인지 나중에야 알려준다.


속보로 뜨는 소비자 물가 지수 상승률의 숫자를 보고 있어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러다 마트에 가서야 깨닫는다. 딸기 한 판에 이만 원이 넘네.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에서는 매년 1월 1일이 되면 몸집이 커지는 세포를 재치있게 보여주었다. 연초가 되면 유미가 결심하고 작정하면 그에 따라 커지는 세포들. 그중에 자린고비 세포가 커지는 걸 보고 환호했다. 이를 어쩌냐. 커진 세포들은 3일이 되면 다시 원래의 크기대로 돌아온다. 작심삼일의 풍자.


고토코 할머니는 가계부를 쓰라고 말해준다. 쓴 돈을 파악하는 일만으로도 절약이 된다고. 그리하여 팔랑귀인 나는 버거킹에서 만 원 이상 사면 주는 달력에 오늘 쓴 돈을 적기로 했다. 아뿔싸. 달력의 칸이 모자라네. 『할머니와 나의 3천엔』을 읽고 책상에 앉았다. 똑똑한 나의 컴퓨터는 지난번 내가 방문한 사이트를 기억해 내고 화면에 띄워주었다. 각종 서점사들. 알라딘, 뭔데. 왜 또 유리컵을 굿즈로 주는 건데. 내열 유리컵 받으려고 9 권의 책을 지른 지가 비유가 아니라 진짜 엊그젠데.


어린 왕자 유리컵은 특별하니까. 소혹성 B612호에서 혼자 사는 그 애는. 근데 왕자님은 좋겠다, 별 하나가 자기 소유인 거 아니야. 컵을 사면 책을 준다기에 굿즈의 노예는 오후에 종이책 4권을 질렀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열 유리컵 사고 싶은데. 컵만 사면 좀 그러니까. 이왕이면 책도 사고 컵도 받을 수 있는. 여기까지, 새해가 되자 카카오뱅크 저금통까지 헐어 물건을 산 자의 비겁한 변명이었습니다.


진짜 왜 그랬냐면요. 『할머니와 나의 3천엔』을 읽고 절약해야지 하는 마음보다는 행복해야겠다 낙관적인 올해의 바람이 생기게 되었거든요.


종이책 5만 원에만 해당하는 줄 알았는데 전자책 3만 원도 유리컵 굿즈를 준다는 거 방금 알았네요. 알라딘, 내 통장을 텅장으로 만들러 온 나의 구원자. 그래서 얼마면 돼? (애처롭게 쳐다보며) 3만 원이요.


정말이었군요. 할머니. 할머니 말이 맞았어요. 3천엔(우리나라 돈으로 대략 31,020원)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말. 어린 왕자님 유리컵에는 시원한 보리차 따르고요. 고흐의 그림이 그려진 컵에 아침에 산 이디야 커피 타서 마시면 성공한 사람의 느낌이 날 수도 있겠다. 성공까지는 아니어도 커피 타서 책상에 앉으면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건 아니고 내가 쓰고도 우와 내가 이걸 쓴 거야 착각하게 만들 정도의 놀라운 글을 쓸 수도 있겠다. 어쩌면 다음 리뷰 글 사진에는 보일 듯 말 듯 책 옆에 유리컵 두 개가 찍혀 있을 것 같다는 예언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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