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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나의 3천 엔
하라다 히카 지음, 허하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2월
평점 :
그러니까 2022년 새해 첫날 한 일은, 두둥. 전달 실적에 따라 멤버십 등급이 올라간 걸 확인하고 환호. 새로 주는 쿠폰을 다운받아서 물건을 사는 일이었다는 것이었다는 것이었다. 뭐 대단한 걸 샀냐면 그것도 아니고 진짜 필요한 거다. 나랑드 사이다, 이디야 오리지널 아메리카노 150T·오리진 브라질 180T, 아토베리어 365 크림, 바디피트 한결 슈퍼롱 40개. 원래는 한 품목만 사려고 쇼핑앱에 접속했다. 다들 그렇지요?
그게 될 리가 있나. 새해맞이, 감사맞이, 호랑이해 맞이, 온갖 맞이의 기념으로 싸게 판다니까, 쌀 때 사 놓고 계속 쓰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얼마 이상이면 쿠폰이 된다니까, 통신사 할인도 된다니까. 샀다는. 그러고 정신 차리고 책을 읽었다. 누워서 하는 일이라고는 쇼핑과 책 읽기니까. 쇼핑했으니까 책을 읽어야지의 수순. 방금 내가 무슨 짓을 저질러버렸나. 소비 지옥에 빠진 나를 친절한 얼굴로 꺼내준다. 하라다 히카의 『할머니와 나의 3천엔』은 그런 책이다.
할 말이 있는 게 위에 적은 품목을 봐서 알겠지만 생필품이다, 사치품이 아닌. 물론 보디로션 큰 거 한 통 사서 몸과 얼굴을 바르면 되지 않냐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겨울 보습에 짱 좋다는 점원의 말을 믿고 산 크림은 훌륭했다. 한 번 그걸 썼으니 내 얼굴도 크림의 효능을 기억하고 있을 테지. 몸의 주인인 나는 발라서 지친 얼굴을 달래줘야지. 커피는 무슨. 보리차 끓여서 이건 커피다, 쓰다 생각하고 먹어라 하면 먹겠지만. 슬프네.
『할머니와 나의 3천엔』은 단순히 절약해, 지금부터 허리띠를 졸라 매야 해, 강압하는 책이 아니다. 삼대에 걸친 세 여성과 주변 인물들의 절약 일상을 보여준다. 반려동물을 키우고 싶은 미호, 아이가 대학에 갈 때까지 학자금을 모으고 싶은 마호, 일흔이 넘었지만 구직 활동을 시작한 고토코, 갑자기 병에 걸리자 현재 삶의 위치가 불안한 도모코, 프리터로 돈이 모이면 여행을 떠나는 야스오.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인물들이다.
왜 돈을 모을까. 원하는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빌린 집에서는 반려동물을 키울 수가 없다. 남편 혼자 돈을 벌기 때문에 아이의 미래를 불안정하게 놔둬서는 안 된다. 연금만으로는 노후가 보장되지 않는다. 여행을 가기 위해서라면 힘든 일도 참고할 수 있다. 그들이 돈을 모으는 이유는 응원해 주고 싶을 정도로 소박하다.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불안함을 느낀다. 여유가 있는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과감한 투자를 하지는 못하고 오로지 근로 소득에 기대야 한다.
하라다 히카의 작품을 처음 읽어봤다. 소개 글에서처럼 일상을 그리는 재주가 뛰어나다. 한 번 잡으면 나의 현실을 사찰한 듯한 현실감에 손을 놓을 수 없다. 매일 아침 스타벅스에 들러 커피를 마시는 게 낙인 미호. 은행 금리를 따지며 남아 있는 돈을 헐어 쓰지 않도록 노력하는 고토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을 주저하는 야스오. 『할머니와 나의 3천엔』은 3천 엔이라는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각자의 인생이 달려 있다는 선언으로 시작해 행복의 목적이 무엇인지 나중에야 알려준다.
속보로 뜨는 소비자 물가 지수 상승률의 숫자를 보고 있어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러다 마트에 가서야 깨닫는다. 딸기 한 판에 이만 원이 넘네.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에서는 매년 1월 1일이 되면 몸집이 커지는 세포를 재치있게 보여주었다. 연초가 되면 유미가 결심하고 작정하면 그에 따라 커지는 세포들. 그중에 자린고비 세포가 커지는 걸 보고 환호했다. 이를 어쩌냐. 커진 세포들은 3일이 되면 다시 원래의 크기대로 돌아온다. 작심삼일의 풍자.
고토코 할머니는 가계부를 쓰라고 말해준다. 쓴 돈을 파악하는 일만으로도 절약이 된다고. 그리하여 팔랑귀인 나는 버거킹에서 만 원 이상 사면 주는 달력에 오늘 쓴 돈을 적기로 했다. 아뿔싸. 달력의 칸이 모자라네. 『할머니와 나의 3천엔』을 읽고 책상에 앉았다. 똑똑한 나의 컴퓨터는 지난번 내가 방문한 사이트를 기억해 내고 화면에 띄워주었다. 각종 서점사들. 알라딘, 뭔데. 왜 또 유리컵을 굿즈로 주는 건데. 내열 유리컵 받으려고 9 권의 책을 지른 지가 비유가 아니라 진짜 엊그젠데.
어린 왕자 유리컵은 특별하니까. 소혹성 B612호에서 혼자 사는 그 애는. 근데 왕자님은 좋겠다, 별 하나가 자기 소유인 거 아니야. 컵을 사면 책을 준다기에 굿즈의 노예는 오후에 종이책 4권을 질렀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열 유리컵 사고 싶은데. 컵만 사면 좀 그러니까. 이왕이면 책도 사고 컵도 받을 수 있는. 여기까지, 새해가 되자 카카오뱅크 저금통까지 헐어 물건을 산 자의 비겁한 변명이었습니다.
진짜 왜 그랬냐면요. 『할머니와 나의 3천엔』을 읽고 절약해야지 하는 마음보다는 행복해야겠다 낙관적인 올해의 바람이 생기게 되었거든요.
종이책 5만 원에만 해당하는 줄 알았는데 전자책 3만 원도 유리컵 굿즈를 준다는 거 방금 알았네요. 알라딘, 내 통장을 텅장으로 만들러 온 나의 구원자. 그래서 얼마면 돼? (애처롭게 쳐다보며) 3만 원이요.
정말이었군요. 할머니. 할머니 말이 맞았어요. 3천엔(우리나라 돈으로 대략 31,020원)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말. 어린 왕자님 유리컵에는 시원한 보리차 따르고요. 고흐의 그림이 그려진 컵에 아침에 산 이디야 커피 타서 마시면 성공한 사람의 느낌이 날 수도 있겠다. 성공까지는 아니어도 커피 타서 책상에 앉으면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건 아니고 내가 쓰고도 우와 내가 이걸 쓴 거야 착각하게 만들 정도의 놀라운 글을 쓸 수도 있겠다. 어쩌면 다음 리뷰 글 사진에는 보일 듯 말 듯 책 옆에 유리컵 두 개가 찍혀 있을 것 같다는 예언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