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형에 관한 기록
단야 쿠카프카 지음, 최지운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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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코패스 살인자에게 서사를 부여 하지 말라지만 이 이야기는 너무 슬펐다. 주인공이자 연쇄살인마였던 안셀이 부모의 학대로 살인마가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아마도 생물학적으로 혹은 뇌과학적으로 사이코패스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 네 살 이전에 동물을 잔혹하게 살해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이 그를 살인자로 몰았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가부장제의 희생양이자 잔혹한 아버지와 유약한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피해자였다.
어쨌든 이 소설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형수가 된 안셀파커를 2인칭으로 불러 현재를 서술하고, 안셀과 관련된 여성의 입장으로 과거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독특한 방식의 소설이다.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로 한 챕터씩 교차하고 현재는 안셀이 사형을 당하기 전으로 시간을 죽이며 흐른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과거의 일은 서술된다.
안셀의 아버지는 살인은 저지르지 않았지만 끔찍하고 잔혹한 가정폭력범이었다. 농장에 가족을 가두고 최소한의 양식만 제공했다. 엄마 라벤더는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도망친다. 안셀은 가까스로 구조되지만 생후 2개월된 동생은 죽었고 그는 계속 어린아기 울음소리에 시달린다. 버림받은 후유증과 갖고 있던 살해욕구, 어기 울음소리 환청에 지속적으로 시달리다가 소녀 셋을 죽였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 사건을 쫓는 형사가 9년만에 나타나는데 그건 바로 어릴 때 고아원에서 같이 자란 사프란 싱. 그녀는 안셀이 끔찍하게 죽인 다람쥐와 여우를 봤다는 이유만으로 잔혹한 표적이 되었던 경험이 있다.

더이상의 상세한 설명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하지 않겠지만 이 소설을 놀라운 점은 인물들이 많이 나오는데 여러 가지로 긴밀하게 연결 되어 있다는 것과 안셀 이라는 한 남자의 인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 여러명의 여자가 있었다는 것과 살인자는 이미 감옥에 있는데도 마치 거대한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날 것처럼 굉장히 긴장되고 긴박하게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장르 소설처럼 결과에만 집중해 달려가는 소설이 아니라 서스팬스와 함께 드러나는 소녀들의 이야기가 다 다른 공감을 이끌어 낸다. 처음에는 작가가 남성인가 싶었는데 읽을수록 여성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남성 범죄자의 이야기지만 잘 들여다보면 여성서사가 짙고 구조받지 못한 빈곤에 대한 문제의식이 나타나 있다.

몰입해서 읽을수록 두려운 마음이 더 커졌던 소설이다. 어떻게 이런 전개를 생각했을까 놀랍다.
너무 잔혹한 소용돌이에 읽기 힘든 구간도 있었지만 유의미하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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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체조 닥터 이라부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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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그네]에서 이미 저명한 상담 실력을 뽐낸 적 있는 의학 박사 이라부가 다시 돌아왔다길래 얼른 신청하였다. 17년이나 지났는데 늙지도, 죽지도 않고 또 온 우리의 괴짜의사! 생각보다 더 전문적으로 변해 돌아온 이라부 이치로에게 이번에도 당했다. 참아보려해도 푹푹 터지는 웃음에 근엄한 자세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번에는 한술 더 떠 평소 말 없이 큰 가슴과 우악스러운 주사만으로 압도적 존재감을 자랑하던 마유미 짱이 자기도 한목 거들며 솔루션을 제시한다. 그것이 비록 자기의 밴드를 홍보 하는 일이거나 소속 밴드의 재산을 늘리는 일일지라도. 이 유쾌한 의사와 간호사의 작당 모의는 내담자로 하여금 어이 없음과 공포와 허탈함을 주지만 자기도 모르게 병이 나은 걸 경험한다. 화를 못 내서 공황장애 빠져 버린 남자, 시청률의 목매다가 자기를 잃어버린 남자, 얼떨결에 부자가 됐지만 히키코모리가 되어버린 남자, 공항공포증에 갇혀 버린 여자 등등.

아무튼 재밌다. 기발하다못해 거의 도라이 수준의 해결책을 내리는 정신과 의사 이라부는 둘리나 아이언맨만큼 판타지지만 기실 이런 엉뚱발랄함이야 말로 꼭 필요한 삶의 자세 중 하나다. 마유미는 성분을 알 수 없는 비타민 주사를 놓고, 이라부는 변태처럼 그걸 바라볼 뿐이지만 서슴없이 같이 출발해주고 환자에게 직접 방문해주고 주저없이 데굴데굴 굴러주는 이라부의 기상천외함 때문에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면서 환자 스스로가 병증을 해결해 나가고 있었다. 역시 답은 내 안에 있는 건가. ㅎㅎ

이런 치료도 있는 거지. 고름은 째서 짜버려야 빨리 낫는 법이야. 피도 조금 같이 나오긴 하지만.

[공중그네] 중에서

예전에 심리상담을 받아 본 적이 있다. 한참 이야기 하는 중에 스스로 답을 찾은 나를 발견하면서 놀랐다. 상담사는 그냥 들어주었고 간혹 어떠한 질문을 던졌을 뿐인데. 물론 살면서 그 정도로 해결이 안 나는 문제도 존재할테고 입에 쓴 약을 굳이 먹어야 낫는 병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게다가 내 곁에는 도대체가 한량 같지만 적재적소에 나타나 뜨악스러운 처방으로 환자를 헷갈리게 하는 의학박사 이라부는 아예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답은 내가 알고 있다. 그것이 삶의 신기한 점이다. 내 이야기를 털어 놓을 용기만 있으면 자정은 충분히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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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을 비는 마음
김혜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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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작가의 단편 소설집을 읽었다. 이름만 들으면 바로 읽고 싶어지는 작가 군(群)이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김헤진 작가다. 이름만으로도 기대 되는 소설가, 김혜진 작가.

[축복을 비는 마음]이라는 제목 안에 8편의 단편이 실렸는데 그 중 2편은 이미 읽어본 적 있었다. 이 소설들은 모두 '집'에 관한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다. 하긴 집을 빼놓고 인간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그 '집'에 얽힌 사람들의 생각과 위기와 비참한 마음과, 안정을 갈구하는 욕망과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가져야 하는 자세와, 아무리 의연해지려고해도 터무니없는 가난으로 미끄러지고 마는 사회 구조를 소설에서 만나기에는 김혜진 소설이 매우 적합하다.

예전에 김혜진 작가의 [중앙역]을 읽었다. 거리의 부랑아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주인공이 강제철거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이 집 없으면 우리는 길로 나앉아요'라고 말하는 세입자에게 냉소를 짓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개발이라는 욕망의 반대편에선 강제 퇴거의 지옥을 몸소 감내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분화되어 있지 않고, 언젠가 개발이 되겠거니 하며 온 영혼을 끌어모아 빌라를 구매하고 그것이 4년 5년이 지나 8년이 될 때까지도 아무 소식이 없어서 끝내 그 집을 포기해야만 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길거리에 나 앉을 수 밖에 없는 만옥 같은 사람도 존재하는 것이다. (<목화맨션>)개발의 욕망도, 퇴거의 위기도 모두 감당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희생양이 있다. 그것은 세입자인 순미도 마찬가지다. 안정과 부유와 내 집 마련의 꿈은 그렇게도 멀리 있다. 도무지 잡히려고 하지 않으니까.

길을 사이에 두고 집 값이 천차만별 벌어지고 그것이 마치 사람의 표식인양 차별하고 반목한다. 아이들은 그런 중에 성장하며 금맥이 어디로부터 흐르는지 말해주지 않아도 배운다.(<20세기아이>) 노인은 갈 곳이 없고, 형편이 조금 나아졌기로서니 다른 이를 독촉해 내 돈도 아닌 돈을 받아내야만 한다.(<산무동320-1>) 할머니가 손녀 딸 셋방의 크기를 늘려주기 위해 보험사기를 감행하기도 한다. (<자전거와 세계>) 손녀 딸은 그 돈을 받아들고는 익숙하지 않은 자전거를 끌고 꾸역꾸역 길고 긴 다리를 넘는다. 너무 슬펐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로 올라갈 수 없는 세계에 우리는 놓여있다.

부동산의 구조적인 문제를 제외하고도 '집'과 관련된 문제는 많다. 김혜진 작가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감각적으로 잡아내는 사람이다.

인상 깊었던 작품 두 가지는 <사랑하는 미래>와 <축복을 비는 마음>이다. <사랑하는 미래>는 언뜻 보기에 사랑과 소통의 이야기인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집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혼자 일 때 너무 들어가기 싫었던 집이 동거인을 받아들였을 때 사랑의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또 혼자였던 시간이 그리워 놀이터에 오래도록 앉아 있다가 들어가는 주인공, '주인'의 모습은 가족이 있지만 때로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우리와 닮아 있다. 이 커플은 국제커플인데 서로의 언어가 유창하지 않아서 때론 답답하다. 심지어 오래 산 가족은 언어적 장벽이 없는데도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다. 나의 예상과는 달리 '주인'은 기어코 사랑을 선택하는데 '집'이라는 개념이 '가정'이라는 개념으로 드러난 유일한 소설이 아닐까 싶다. 이름이 '주인'이라는 것도 특별한 장치다. 주인된 삶을 산다는 것은 어쩌면 외로운 일 아닐까. 내 자리를 조금이라도 내어주고 불편해도 부대끼며 살 때 조금은 피곤해서 훨씬 덜 외로워지는 게 사람아닐까? 1인 가구가 유행인 시대에, 같이의 가치를 망각하기도 하는 세태에 반가운 소설이었다.

<축복을 비는 마음>은 짧고 맨 마지막에 겨우 넣었으면서 왜 표제작일까 생각했는데 읽고나니 그러므로 이 모든 소설이 작가가 '축복을 빌어주는 마음'이었다는 결론이 났다. 이 단편은 특이하게도 집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집을 청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청소업체 정직원(?)인 '나'와 일용직인 경옥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 노동자가 겪는 한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부당을 말하지 않았던 '나'가 직설하는 경옥을 통해 변하는 모습까지만도 좋았지만 홀로 일을 시작한 '나'가 전하는 메시지가 뭉클해 가장 좋았던 작품으로 꼽았다.

나는 누구에게 그럴 수 있을까?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해 전전긍긍하면서 불합리함을 그저 세상 탓으로 쉽게 돌리고 끙끙 앓았으면서도 타인에게 축복을 비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걸까? 어쩌면 안정을 찾지 못한 건 축복을 비는 마음이 없어서인 것은 아닐까?

리뷰를 쓰는데 눈이 온다. 지붕이 없어 슬픈 모든 곳이 얼어붙지 않았으면...

연말에 읽어보기 참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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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냄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9
김지연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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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후유증이 후각과 함께 미각을 잃는 것이라고 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막상 걸렸을 때 정말 냄새가 나질 않아서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 [태초의 냄새]도 그런 내용이다. 코로나에 걸린 K가 냄새를 잃어버린 이야기.

출판사에서 '후각을 잃는다면 그래도 기억하고 싶은 냄새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나는 김치찌개 냄새라고 대답했다. 순식간에 허기지게 하면서도 식탁의 온기를 온전하게 떠올리게 하는 음식으로 나는 자주 김치찌개를 꼽는다. 그래서인지 그 질문이 도착하자마자 김치찌개가 생각났다. 하지만 소설은 김치찌개의 온기보다는 모밀국수보다 더 차가운 어떤 마음이 흐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면 무슨 감각이든간에 고장나기 마련이다.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떠난 사람에 대한 부채감이 남아, 곁에 있는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게 한다. 그렇다고 싹 다 잊어버리고 새로운 사랑에 전념하자니 이미 뻥뚫려 시린 가슴을 어쩌지 못하겠다. 그래서 그를 기억할 무언가를 남겨두려고 했던 게 아닐까. 하지만 기억할 수 있는 게 후각 밖에 없는 지금 그것마저 잃고 겨우 맡을 수 있는 냄새란 지독한 악취뿐이니 이 상황을 어쩔까.

하지만 주인공 둘이 처한 나쁜 상황은 코로나로 후각을 잃은 것뿐만이 아니다. 죽은 S를 사랑과 우정이란 이름으로 공유했던 상황과 온전하게 인정받지 못하는 둘의 관계도 소설의 서늘한 감각을 만드는데 일조한다. 코로나 시국에 집에 있어야 했는데 둘만의 여행을 감행한, 그마저도 자꾸 어긋나버려 하다못해 준비해 간 삼겹살 하나 제 때 구워먹을 수 없었던 P와 K의 상황은 계속 불안하다.

그러나 문득 등장한 남자 청소년은 이상한 환기를 이끌어낸다. 조모와 둘이 사는 와중에 코로나에 걸려버린 학생은 격리라는 방역지침을 어기지 않고자 폐건축물에서 며칠밤을 보낸다. 집은 너무 좁아서 노쇠한 할머니가 병이 옮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건물은 고2짜리 아이가 홀로 밤을 보내기엔 위험하다.

그러고보니 격리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죽지 않고 살아 남아서 다행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경제학박사 이상헌은 자신의 저서에서 '바이러스의 물은 높은 곳에는 미치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흘러 처절하게 적신다'고 말했다. 우리가 코로나 우울증을 말할 때 안전을 담보로 하는 비참이 많은 곳을 적시고 있다는 걸 왜 알려고 하지 않았을까.

김지연 작가의 소설은 평범하게 보이지만 읽기를 마칠 때면 어딘가 건드려져 읽기 이전으로는 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술수(?)가 있다. 강물에 발을 담구고 있지만 어제의 강과 오늘의 강이 다른 것처럼 같은 데 다른 어떤 지점에 나를 데려다놓고 생각의 배신을 요구한다. 그 바람에 나는 무방비로 소설을 읽다가 그만 가슴이 찌릿하고 만다. 이번에도 그랬다.

유령냄새 때문에 방황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누가 붙들고 놔 주지 않는 것처럼 답답했다. 소설가는 그것을 환후라고 불렀지만 나는 상실이라고 부르고 싶었고 괜히 슬펐다. 하지만 김지연 작가의 소설은 마지막엔 늘 희미한 희망이 있다. 나는 K가 애쓰고 있다고 믿었다.

핀시리즈 소설선에 김지연 작가가 이름을 올려서 정말 너무 읽고 싶었는데 기회가 좋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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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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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시끄러운 날 최은영을 만나면 등장인물과 같이 줄줄 울고 속이 시원해지는 걸 경험한다. 얼떨결에 획득한 후 한번도 버린 적 없었던 어떤 자리를 보전하느라 위장에 구멍이 날 정도로 힘들었던 독자에게 너 이리와 같이 울자, 하며 건넨 이야기 때문에 멈춰서서 같이 펑펑 울었다. 그러고나니 어느새 반투명한 유리 사이로 햇살이 비친다. 아직 투명까지는 되지 못했으나 눈물 닦고 바라보니 지독한 불투명만은 아니었다. 이 상황이, 이 무게가. 그러니까 영원히 가닿지 못할 마음의 무게를 조금씩 털어놓다보니 깜깜하지만은 않더라는 걸 기꺼이 같이 눈물 흘려줄 밝은 낮이 있더라는 걸 알게 됐다. 최은영 소설은 나한테 그런 존재다. 무거운 마음의 궁둥이를 누가 턱 받혀주는 느낌. 실제로는 소설이 한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이룬 회복인데 왜 나는 소설을 읽고나서야 비로소 위로를 받는가! 신기하다. 삐걱삐걱 음이탈을 낸지 오래된 늙은 악공이 젊은 조율사를 만나 튜닝받는 기분이기도 하다. 연주할 힘이 차올라.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단편집이지만 모두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특히 가족 이야기 세편은 부모자식이 아니지만 책임지고 돌봐야 하는 다른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꽤나 슬펐다. 각기 다른 먹먹함으로 오래도록 멈춰있던 기억이 난다.

또, 앞의 세 편은 타인과의 관계를 말한다. 무엇을 배우기 위해 만난 사람, 학창시절에 알게 된 사람, 직장 생활에서 만난 사람. 잠깐의 유대가 열린 마음으로 향하게 했는데, 따뜻함을 기대하게 됐는데, 소소한 오해가 커져 서로를 멀어지게 만들고 말았다. 그점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로 다가와서 그러려니 해야하는 비감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단편은 늙어가는 사람으로서 쓸쓸했다. 자식이 나에게는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데 타인에게 도움을 바라는 것을 볼 때의 서운함이란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에서 마이크가 할머니의 희망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이크는 할머니를 닮았다. 그 다정함을 가지고 매정하고 사나운 부모 밑에서도 사랑을 잃지 않고 잘 자라주기를 바란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을 읽다보면 등장인물을 자꾸 응원하게 된다. 그 응원을 그들이 들을리 없지만 자꾸 그렇게 힘주어 잘살길 기도하는 이유는 인물 면면에 내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 관계의 합주에서 자꾸만 음이탈을 내는 부족한 내가 보여서는 아닐까. 하지만 어느새 마음을 다잡고 한음씩 더 노력하는 나를 본다. 위로의 심포니가 이 소설에 있다. 합주는 근사하게 마무리 되었다.

너무 좋았다. 곧장 다시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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