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집
래티샤 콜롱바니 지음, 임미경 옮김 / 밝은세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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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집래티샤 콜롱바니임미경 옮김밝은세상

[세갈래 길]로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래티샤 콜롱바니의 신작 [여자들의 집]을 읽었다. 뜻모를 슬픔이 차올라서 그저 읽어내려갔다.

전국적으로 밀어닥친 끝없는 주택난의 가장 비참한 희생자들이

바로 여자들이었다.

그들이 빈곤의 제일선에서 총알받이가 되었다.

p.183

책의 내용은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집을 잃은 여성들의 쉼터인 '여성 궁전' 에서 일어난 내용을 담았다. 집을 잃었다는 개념은 단순히 거주지를 잃었다는 의미가 아닌 것을 새삼 깨달으며 너무 슬픈 가운데서도 내가 이렇게 거주의 자유가 포박당하지 않은 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다.

래티샤 콜롱바니는 프랑스에 실제로 존재하는 구호단체 '여성 궁전' 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썼고, 이야기를 전개 하기 위해서 두가지 방법을 차용했다.

하나는 변호사 출신 작가 솔렌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여성궁전의 설립자인 블랑슈의 이야기를 교차 편성해 두었다. 다만 솔렌은 현재를 살고, 블랑슈는 1920년대에 이미 50대를 넘겼으므로 과거의 사람이다.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작가는 여러가지 재능을 가진 자 답게 영리하게 시간을 100년의 시간 속을 사는 두 인물을 교차편성해 놓음으로 이 소설의 매력을 배가 시켰다.

내가 원하는 일, 그래, 그런 일을 해야 해.

마흔 살이나 되었지만 솔렌은

스스로를 잘 안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p.82

솔렌은 의뢰인의 투신자살을 목격하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병세가 호전돼 퇴원했지만 변호사는 다시 되기 싫고 어릴때부터 좋아하던 글쓰는 일을 해보고 싶어한다. 그런 그에게 글쓰기 봉사활동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것은 여성 빈민의 보호소인 '여성 궁전' 에서 대필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솔렌은 유년시절에 부모에게 좋은 딸이 되고자 공부했을 뿐 세상에 대한 별다른 감흥 없이 살아오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차츰 변한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되고, 평범이라고 불렀던 것들이 흔들리는 경험을 겪으며 진짜 어른이 되어간다. 그들의 빈곤이 나에게 옮아올까하여 전전긍긍하던 솔렌, 그래도 거지에게 적선은 해야 마음이 편했떤 솔렌이 이제 여성 궁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과 춤을 추고 눈물을 흘려주었다. 그들의 귀가 되고, 손이 되고 있었다. 궁전이외의 빈곤한 거지에게도 마음을 주고 있는 자기를 발견했다. 진정한 나눔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가난은 친숙한 무엇이 되어있었다. '취약성' 은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라

빈타, 비비안, 크베타나의 모습으로 구체화 되었다.

p.261

우리는 '빈민 구호!' 라고 생각하면 무엇부터 해야할지 모른다. TV를 틀면 나오는 빈민구호 프로그램을 보면서 불편해 하는 사람도 있고, 막상 도와주려고 해도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나마 기부라도 한다면 좀 더 마음이 따뜻하다고 생각한다. 기부도 안하면서 문제가 터지면 내가 그럴줄 알았다고 빈정거리든지, 기부한다고 다 불쌍한 사람 돕는거 아니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비난하기도 한다. 그런데 일찍이 어떻게 도울지, 누구를 도울지 알고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빈민 구호에 힘쓴 사람이 있다. 바로 블랑슈! 그리고 든든한 조력자 알뱅, 그녀의 남편이다.

블랑슈의 헌신은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것이었다.

그 헌신에 회의나 망설임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빈곤과 고통에 맞서 수행하는 전투에서

일신의 궁핍과 주위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p.51

가톨릭이 주를 이루던 1920년대 유럽사회에서 구세군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던 여자 블랑슈는 우연히 거리의 부랑자 산모를 마주쳤다. 그녀는 아기를 낳았지만 갈 곳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어린 아기도 마찬가지. 블랑슈는 가진 돈 모두를 털어 숙박시설을 빌려 그 여자를 쉬게 한다. 그러나 일시적인 도움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프랑스에 크지만 비어있는 주거 건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보여준 약속의 땅 같은 건물이었다. 블랑슈는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곳을 여성부랑자를 위한 공간으로 삼기로 한다.

내가 이 글을 쓰기 며칠 전에 본 기사가 있다. 제주에 사는 한 아기엄마가 낳은지 삼일 된 아기를 중고판매 어플에다가 20만원에 판다고 올린 것이다.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고, 엄마는 연행되었다. 손가락질하고 욕을 했지만 오죽하면 여북하랴는 말이 떠올랐다. 가난은 인간성을 아주 쉽게 증발시켜버린다.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환경 역시 마련돼야 한다. 주거가 흔들리면 삶의 모든 것이 흔들려 사회가 무너지고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사실을 블랑슈는 알았다. 그래서 모금을 시작했다. 그녀의 몸은 점점 병으로 쇠약해져 가고 있었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 '여성 궁전' 이 바로 그 블랑슈의 헌신으로 지어진 곳이었다. 블랑슈는 이제 큰 과업을 달성하고 떠났다. 그 자리에는 필요한 여성들이 둥지를 틀 수 있게 되었다. 2020년을 살면서 부랑자는 여전히 있지만 그래도 100여년전에 한 여성이 했던 헌신이 수백명의 여성들을 쉴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여성 궁전에 살고 있는 여성들은 비단 가난해서만 오는 것은 아니었다. 배우지 못해서도 오고, 남편으로부터의 학대를 피해서도 왔다. 솔렌이 가장 먼저 마음을 열게 된 빈타는 아프리카 사람으로 딸만 데리고 국경을 넘었다. 아직도 자행되는 여아 할례를 딸에게 되물려줄 수 없어서였다. (리뷰를 적는데도 너무 슬퍼 눈물이 났다.) 지구상에 아직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니. 전족도, 순장도 인권유린이라며 폐지된 문화인데 왜 아직도 이런 구습과 악습이 자행되는가. 겨우 네살짜리 어린 딸에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종교이고 관습이라는 역겨운 이름으로 행해지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다. 아무튼 그래서 빈타는 도망와서 이 곳에 있지만 두고 온 아들에게 너무 미안했던 빈타는 솔렌에게 편지를 부탁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러 가면서 최신식 노트북을 떡하니 들고 갔던 솔렌은 무너진다. 그녀는 울면서 그 이야기를 듣고, 솔렌의 아들에게 여덟장이라는 긴 편지를 수기로 작성해서 가지고 간다.

나는 아마 솔렌 같은 사람일 것이다. 도울줄은 안다. 어지간한 도덕심과 공명심도 있다. 하지만 헌신을 결정함에 있어 대단히 밍기적거리는 편이다. 자꾸만 합리화하고 귀찮아한다. 빈자를 볼 때 솔렌과 블랑슈가 얼마나 다른지 본문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나는 이런 대조의 기법이 너무 흥미로웠고, 콜롱바니가 정말 필력과 구성력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개인적으로 [세갈래길] 보다 더더 좋았다)

여러분은어떤 생각을 가지고 빈민을 대하는가.

100년전 블랑슈의 행동과 100년 후 솔렌의 생각은 별반 다르지않다. 그러나 블랑슈는 행동했고, 솔렌은 행동하지 않았다. 블랑슈는 저 말 뒤에 좌절하다가 우연히 신문에서 그 주거단지를 발견하고 머릿속에 재빨리 여성 빈민이 살 곳을 그린다. 그리고 실천한다. 그러나 솔렌은 자기의 책임을 공동체의 책임으로 환원해버린채 등을 돌린다. 고작 몇 푼 던져 준 것은 자기의 마음이 편하길 위해서일 뿐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읽다보니 생각이 너무 많아졌다. 나의 자세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결말은 아직 읽지 못한 독자를 위해서 남겨둔다. 처음부터 끝까지 움직였던 여자 블랑슈, 처음에는 미온했지만 결국 적극적으로 헌신을 가담하게 된 솔렌. 어느쪽이어도 좋으니 우리도 생각해보면 좋겠다. 이제 곧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세월을 뛰어넘는 여성들의 연대를 다룬 작품, 정말 꼭 한 번 읽어봤으면 하는 작품 [여자들의 집]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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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박물관
오가와 요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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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찾는 건 그 육체가

틀림없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가장 생생하고 충실하게

기억하는 물건이야.

p.47



섬세한 문체로 각광받는 오가와 요코의 신작 [침묵 박물관]이 작가정신에서 나왔다. 처음 접하는 작품이라서 작가는 잘 몰랐다. 그렇지만 읽으면서 문장 하나하나가 섬세하고 유려하다고 생각했는데 작가가 그런 문체로 정평이 나 있다고 하니 좀 더 이해가 됐다. 작가정신에서는 표지도 예쁘게 그렸지만 책날개에 친절하게 작가 설명을 해 놓았다. 일본소설이지만 일본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지의 산간지방 이야기 인 것처럼 느껴졌는데 나혼자만의 생각일까? 몽환적이고 신비롭기 이를데 없다. 게다가 침묵박물관이라니?


주인공 '나'는 박물관 설계를 의뢰받고 한 마을로 간다. 의뢰인 노파는 굉장히 날카로우면서도 깐깐하며 괴팍한 성격을 가졌다. 노파는 죽은 자의 물건을 취득해 보관하고 있다. 보관상태는 형편없었고, 그 목록과 수집과정은 더욱 기괴했다. 죽은 자나 유족이 허락한 적도 없는 은밀한 물건을 훔쳐오는 것. 그 과정에서 거짓말은 필수였다. 이건 정말 사기와 도둑질 아닌가? 나는 그녀의 뻔뻔함과 안하무인, 막무가내 식의 화법에 기가 질리고 말았다. 뭐야, 이게?


 그런데 희한하게도 '나'는 그의 의뢰를 받아들인다. 어쩌면 신비롭고 아름다운 소녀 때문일까. 노파의 의붓딸인 소녀는 노파를 따르면서도 '나' 를 도와 박물관에 넣을 물건 관리는 물론, 수집, 도열을 맡는다. 외과의사가 죽으면 그의 집도실에 몰래 숨어들어 그가 부정하게 부를 취득할 수 있도록 도왔던 귀 자르는 메스를 훔쳐오고, 화가가 죽으면 그녀가 죽기 전까지 먹었다는 물감을 가지고 온다. 물론 유족들 모르게. 결국 '나'는 주머니칼까지 쓰면서 절도에 합류한다.


 '나'는 10살 차이나는 형이 있다. 원문에서도 존대어를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형에게 존댓말로 자꾸 편지를 쓰니 좀 어색했다. 나이차이가 많이나서 그럴 수도 있고. 암튼 그 형을 굉장히 좋아한다. 형이 결혼해서 아기를 낳자 그 아기에게 줄 선물을 고르러 가기도 한다. 그런데 선물을 고르다가 갑자기 의문의 폭발이 일어났고 '나'는 고막이 파열되는데서 그쳤지만 소녀는 온몸에 유리가 박혔고, 그 마을의 유명인(?)인 침묵 전도사가 죽는다. '나'는 습관처럼 침묵 전도사의 물건을 훔쳐온다. 역시 박물관 소장용이다.


 처음에 제목을 보고 엄청 기대했더랬다. 내가 박물관을 좋아하니 더 그랬을 수도 있다. 지나간 시간을 붙잡아 한 곳에 모아두고 후대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 너무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책에서 살짝 내비친 것처럼 물건 입장에서 봤을 때는 시간이 되면 풍화되듯 사라져버리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소독을 하고, 건조를 시키고, 유약을 바르고, 빛을 차단해서라도 그것들을 보관하고 싶어한다. 절대로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을 박제하고 싶어한다. 나는 그것이 생물이 아니라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죽은 자의 물건을 훔쳐오는 것은 반대다. 심지어 고인의 눈을 벌려서 의안(義眼)을 빼오는 것을 어째서 정당한 행위라고 보는가.


박물관에 존재하는 물건들은 보통은 역사적 사료가 될만한 것들이다. 물론 범인들의 물건도 얼마든지 역사가 될 수 있다. 개인의 모든 시간은 역사다. 하지만 훔쳐서 취득한 것은 별개다.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서 수집해야만 모든 사람들에게 가치있는 물건을 선보일 수 있다는 박물관의 의의가 설립된다. 노파도 정상적인 방법을 통해서 충분히 수집할 수 있었을텐데 그가 원하는 물건이 상당히 비이성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마도 절도라는 방법을 취득했을 것이다. 이것들에 대해 로망을 부여해 미화시켜놓은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비판적이다. 일본소설의 클리셰인가.


 독특한 설정이긴 했다. 마을 사람들의 유품을 모아 전시한다는 것. 그것이 영리의 목적도 과시의 목적도 아니지만 오랜세월이 지나 후손들이 봤을 때 좋아할 수도 있다. (물론 여기서도 '의안(義眼)' 은 아닌 듯)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마을에 의문의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젊은 여자가 살해당한 후 유두부분이 도려내진 채 유기되는 엽기적인 살인사건이다. '나'는 유품을 수집하러 피해자의 집이나 가게에 가지만 이렇다할 유품을 수집하지 못하고 돌아온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태도다. 그는 피해자를 잘 드러낼 수 있는 물건이 바로 유두라며 그것을 갖지 못한 것에 안타까워한다. 나는 그 부분에서 구역질이 나왔다. 노파가 가지고 있던 광적인 수집욕이 '나'에게도 전가되는 시점은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그 전에는 노파의 서슬에 놀라서 도둑질까지 했다면, 이번에는 광적인 수집욕에 선뜻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그것은 누구의 강요도 아닌 본인의 선택이다.


결말을 더 설상가상이다. 지속되는 사건에 범인을 발견하게 된 '나' !! 그러나 박물관을 세울 욕심을 지닌 모든 일들이 연쇄살인쯤은 헤프닝이라고 여기는 말도 안되는 사건들 속에 봉착한다. 결국 '나'는 박물관을 선택한다.


이 기괴하고 기묘한 이야기들이 독자에게 주는 바는 무엇인가. 일본소설이 아무리 독특하고 , 발상이 엽기적일 때가 많다고는 하나 생명 자체를 이토록 경시해도 되나? 죽은 이를 기리기 위해 산 자를 죽여도 되나? 제물도 아니고 이게 무슨 경우지? 그리고 침묵 전도사들의 역할은 또 뭐지? 거기에 털어놓으면 절대적 비밀이 된다는 허무맹랑한 의식들은 어디에서 오는거지? 대단히 궁금하였다. 왜 하필 알공예품일까, '나' 의 형은 또 왜 그렇게 됐을까? 폭탄은 또 누가 설치한 걸까? 개연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작품이다. 메타포라면 별도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독자마다 이해와 공감의 진폭이 다르므로 스릴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읽어보길 권한다. 작가의 문장력은 가독성을 증가시키는 묘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같은 독자를 위해서 소설가의 변이나, 역자의 말 정도가 들어가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다.

다 읽고 난 뒤에 더 무서운 소설 [침묵 박물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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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어 필 무렵 - 드라마 속 언어생활
명로진 지음 / 참새책방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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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필 무렵명로진참새책방


제목만 보고 떠오르는 드라마가 있다면? 

맞다! 바로 그 <동백꽃 필 무렵>

혼자 아이를 키우고 사는 동백(공효진 분)의 고충과 사랑과 모성을 그린 화제의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커버해 제목을 지은 명로진의 에세이 [동백어 필 무렵]을 읽었다.

이 책은 간단히 말하자면 드라마 속 말하기 방식을 통해 현대인의 삶에 대해 엿보고 저자 본인의 생각을 들어볼 수 있는 에세이다. 부제처럼 '드라마 속 언어생활' 에 대해 재밌게 엮어놨다.

저자는 기자출신 배우 명로진씨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작품들에 출연했고, 처음 알았지만 다수의 저서도 집필한 작가였다. 현재는 대학에서 글쓰기 강의도 하고 있다고 하니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받아 읽었다.

차례부터 눈을 휘감는다. 전국민이 재밌게 보았던 명 드라마들이 총망라 돼 있기 때문이다. 이름은 들어봤지만 사실 책 좀 읽는다고 소홀히 했던 드라마들도 간략하면서도 특징적으로 써머리 돼 있어서 너무 좋았다.

스물 다섯개의 챕터마다 드라마에 대한 정보가 귀여운 그림과 함께 적혀있고, 그 뒤에는 드라마에 대한 간략한 내용 설명이나 특별히 저자가 친분이 있는 연예인과의 짤막한 일화도 들어가 있다. 읽어보면 재밌다. 드라마 출연진들의 훈훈한 스토리는 귀감이 되기도 하고 몰랐던 모습을 알게 돼서 입덕의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 드라마들을 보니까 내가 본 것들은 본 것대로 추억이 되고 못 본 드라마는 찾아서 보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다. 아 안되는데 나 책 읽어야 하는데^^

또, 챕터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문제지만 불편해서 모른체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회적 이슈나 통념들을 드라마를 통해 소개하고 저자의 생각을 담아 논리적으로 펼쳐나가고 있다. 읽다보면 수려한 문장들과 위트있는 말하기 방식들에 매료돼서 자꾸만 다음 작품이 궁금해진다. 읽을수록 재밌다.

중간에 들어가 있는 그림들도 예뻤다. 하루에 한 꼭지씩 읽어둬도 So Good!!

세상을 살다보니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고 그렇다고 관계 속에 빚어지는 온갖 문제 상황들에게서 자유로울 수도 없다. 혼자 진지하자니 인생이 너무 고달프고 기피만 하기엔 또 내가 너무 못났다. 그럴 때 드라마나 영화처럼 허구의 것들로 문제를 바라보면 좀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다. 몰랐던 것을 알게 돼서 행동으로 옮기는 좋은 습관이 생길 수도 있고. 사실 드라마는 보는데 책은 안 읽는 사람도 많고, 책은 읽는데 드라마는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 사이의 간극을 이 책이 충분히 줄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든 일을 직접 겪을 수 없기 때문에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 남의 경험을 보고 배우고 산다. 미디어와 인쇄물을 잇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동백어 필 무렵] 같은 에세이가 감당할 것이다. 다만 언어생활에 관한 책이므로 저자도 단어 선택에 유의를 해줬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지잡대' 같은 언어는 조금 불편했다. 그럼에도 아이디어가 빛났다. 이런 류의 책이 더 많이 나오면 좋겠다!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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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유전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강화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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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유전강화길아르테


서로를 돌보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고통은 함께 경험한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p.17


이 책은 구성이 특이하고 좀 어렵다. 세밀하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이게 무슨 소리지 싶을 수 있다. 이해한바로는 해인마을이라는 깡시골에 사는 두 소녀가 대학에 안정적으로 붙기위해 백일장에 참가하고 싶어하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민영과 진영은 모두 백일장에 참가하고 싶어한다. (안타깝게도 학교에서는 단 한명만 내보내준다. ) 그래서 서로 글을 지어 학우들에게 보여주고 누구 글이 좋은지 판가름하기로 약속을 한다. 그리고 끼어드는 스토리들은 다양히다. 교통사고가 난 여자이야기, 옹주로 태어난 여자의 일생이야기, 데이트폭력에 시달리는 한 여자의 이야기, 가난하고 무능한 남편과 결혼해 힘들게 살아온 여자이야기 등.


누구의 이야기인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민영의 이야기고, 진영의 이야긴지 알지 못하겠다. 복잡하고 지난한 꿈을 여러편 연달아 꾼 기분이다. 잦은 변주 속에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숨이 너무 짧아서 속상했다. 더 깊이 빠지고 싶은데 맛만 봤다고 할까? 그러나 썰매를 탄 것처럼 쭉쭉 미끄러져갔다. 더 읽고 싶었다. 손안에 잡은 책장이 수시로 넘어가는 건 비단 책이 작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도서 설명에 있는 것처럼 이 책은 감정의 기록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겪은 수치심, 모멸, 행복, 고통, 괴로움, 궁금함, 열병, 배신, 치욕 등의 감정들이 고밀도로 들어차 있는데 기록하지 못해서 변비처럼 꽉 들어차 상처로 발현돼 있다. 강화길의 소설은 다르다. 여자들의 삶이 문자로 기록돼 '너도 그러니? , 나도 그렇다.' 하고 있다. 무거운 이야기지만 덜외로운, 그러니까 결코 혼자가 아닌 이야기들이 묵직하게 담겨있다. 누가 '작은 책' 이라고 했을까.


누군가는 불쌍하다는 말을 쉽게 했고,

또 누군가는 삶이란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소리를 지껄였다.

가능한 아프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것이 좋았다.

우리는 시련이 삶을 더 단단하게 해준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p.88


소설은 숙명처럼 삶을 비춘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여성의 유대와 연대를 말하고자 했을까, 아니면 교감을 말하고자 했을까, 아니면 의지와 운명을 말하고자 했을까. 모두 다 일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다양한 인생을 만나며 내 삶을 정돈하고 정립해 보는 것은 대단히 필요한 일이며, 소설로 만났기에 물리적 흉터없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강화길 작가의 세계관에 대해서 불쑥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것은 내겐 이 소설이 첫소설이기 때문이다. [화이트 호스]도 사두고 못 읽었는데 조만간 읽어봐야겠다. 이 책이 다르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아무튼 가벼운 책 무겁게 잘 읽었다.




아르테 출판사에서는 한국 소설선을 '작은책' 시리즈로 함께 하고 있다. 이미 7권의 작은 책이 출간됐고, 강화길의 책은 여덟번째다.

작은책 시리즈는 인간성을 탐구하고 인간성을 지키는 것이 소설의 본질이라고 본다. 그래서 더 많은 소설을 독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이 작은책들을 출간하고 있다.

게다가 이 소설들은 책을 사랑하는 셀럽들의 목소리가 녹음된 오디오북으로도 들을 수 있다. 특별히 [다정한 유전]은 색깔있는 배우 이유영이 낭독을 해 화제를 낳고 있다. 감상을 원하는 독자는 <팟빵>, <밀리의 서재>, <네이버 오디오클립>에서 소리책으로 함께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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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는 건 - 내게 살아있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 야생에 대하여
김산하 지음 / 갈라파고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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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는 건 / 김산하 갈라파고스


평소에 생태에 대해서 설명하는 책을 좋아한다. 몇 번의 생태수업을 듣고나서였을까? 처음 이 책을 생태학자가 썼다는 설명을 보는 순간, '이 책은 내가 읽어야 함.' 하고 선뜻 선택했다.

저자 김산하는 서울대학교 동물자원과학과를 졸업해 같은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우리나라 최초의 자바긴팔원숭이를 연구한 영장류학자다. 늘 말하지만 과학자가 글 잘 쓰는 것은 반칙인데 예술적 감성과 인문학적 소양을 두루 갖췄다는 책날개의 설명대로였다.

이 책은 생태학자가 사회학자처럼 사회를 바라보면서 자연과 비교해 말하고자 하는 인문학서다. 저자는 인간사회가 당면한 문제점들의 해결책을 동물과 식물에서 찾는다.

저자는 코로나19가 우리가 생태를 함부로 파괴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대단히 공감하는 바이다. 이런 물리적인 것 말고도 동물들의 삶과 사람의 삶의 대조적인 모습을 통해 공존의 의미를 피력하고 있다. 읽어보니 술술 넘어가고 재미있다.

우리가 흔히 잠을 잔다는 행위를 나태의 산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잠이야말로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에너지를 충전하는 대단히 평화로운 행위라고 말한다.

동물은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삶의 무대는 현재이니 지금에 집중하자고도 말한다.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일이다. 모든 존재의 기본은 '다름' (p.73) 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는 게 외로운 일이다. 그러나 외롭지않자고 다 똑같은 틀에 넣는다면 싸움이 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흑백논리는 더 문제가 있다. 저자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지양한다.

우리는 이제 호흡이 안전하지 못하다. 코로나 이전에도 황사, 미세먼지 할 것없이 인간의 호흡을 공격해왔다. 그러나 식물은 공기의 흐름이 있어야만 번성할 수 있다. 식물에게 호흡은 생장과 발전의 원동력이다.

동물은 삶의 우회로를 걷지도 않고 먹고 사는 일을 위해 그 무엇도 미루지 않는다.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공간은 자유가 허락되는 곳이다. (p. 195) 쉼이 필요할 때는 아무 것도 하지 말자. 등등

저자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관철시키기 위해 환경을 예로 들기도 하고, 비교하기도 하고, 미래를 전망하기도 한다. 바라보는 눈이 부단히 논리적이고, 휴머니즘적이다. 관찰력이 좋은데다가 사회구조 자체에 관심이 많고 해답을 자연으로부터 찾으려고 한다.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체에 반응한다는 점을 필두로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말보다는 실천에 주력하자고도 말한다.

지나친 스마트폰의 폐혜, 환경오염, 이분된 극단, 무분별한 유행 등을 지양하고, 특히 어린이들의 사라지는 놀이문화를 안타까워한다. 엄마로서 상당히 동의하며 반가운 시각이기도 했다. 손가락 하트도 싫어하는데 그건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웃겼다. 아마 무분별한 사랑의 남발보다는 진정한 배려와 사랑을 하자고 말하는 것 같다.

저자의 자세는 전인류적으로 좋은 자세다.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며 그렇다고 미래를 염세적으로 바라보지도 않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런 책은 읽고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과학이 미처 보지 못했던 작은 존재들의 고유함도 열심히 이야기 해준다. 솔직히 처음에는 완전한 생태학인줄 알았다가 좀 더 사회학적인 것을 보고 실망했더랬다. 하지만 다 읽고나니 이런 이야기들도 좋더라 생각하며 괜찮은 문장들에 줄을 박박 그었다.

만나서 참 다행이다. 소확행 같은 책!


원래 자연에 '길' 이란 없다.

코끼리가 지나 간 곳이 잠시 길처럼 되는 것이지

이미 난 길을 코끼리가 걷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만든 길 위에서는 많은 문제가 양산된다.

자연에는 통과만을 위한 공간은 없기에

자연에 사는 이들은 인간이 만든 길 위에서

당황하는 것이다.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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