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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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오스트레일리아 작가, 리처드 플래너건(Richard Flanagan 1961~)의 작품이다. 요 전에 읽은 <화이트 타이거>도 인도 작가의 4번째 수상인데, 이 소설도 호주 작가로는 4번째 맨부커 수상이다. 작가가 호주의 섬 태즈메이니아 출신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몇 해간 정말 좋은 작품들이 맨부커상을 받았지만, 올해 수상작은 그야말로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은 이 작품은 몇몇 북플 친구분들의 리뷰를 읽고 알게 됐지만, 결정적인 건 쓸쓸한 느낌의 제목이 주는 어떤 강함 끌림이었다. 2019년 12월에 산 책을 이제야 읽었는데, 난 왜 책을 사서 바로 안 읽는지 자괴감이 든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동남아 정글에서 일본군 포로가 되어 타이-미얀마 철로 건설에 강제로 동원된 오스트레일리아 포로 병사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도리고 에번스는 호주 태이메이니아 섬 출신으로, 바로 이 '죽음의 철로' 라인에서 살아남은 군의관이자 장교로 현재 유명한 외과의사이다. 포로수용소에서 '병사 천 명을 이끄는' 지휘관으로서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살리려고 애쓴 그의 노력은 그를 전쟁 영웅으로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77세의 노년에 이른 도리고 에번스. 보통 쇠퇴기라고 불리는 이 시기에 그는 '세월과 비극의 대중적인 상징'으로 다시 환한 조명을 받는다. 

그러나 '행복한 사람에게는 과거가 없고, 불행한 사람에게는 과거만 있다.'(p.15)라는 어디서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이 말을 그는 떠올린다.

"세상은 그냥 그런 거야. 원래 그래, 아들."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과 함께...

평생 그를 따라다니는 과거의 기억은 그의 삶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가 전쟁에 나가기 전 우연히 알게 된 여인 에이미와의 격정적인 사랑의 기억, 일본군 전쟁 포로로서 겪은 잔혹한 경험의 기억은 노년에 이른 그에게 고통이자 기꺼이 떠 안아야할 자신의 삶이다. 


일본은 1941년 말 하와이 진주만 공격을 시작으로 홍콩에 있는 영국 해군기지, 필리핀 미국 공군기지, 싱가폴 영국 해군 공격의 잇다른 성공으로 동남아 일대를 장악하게 된다. 이런 승승장구 속에서 사기가 오를대로 오른 일본은 자신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일본 정신'만 믿고 설치다 미국의 2차 대전 참전을 야기했고, 1942년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는다. 


'1943년 무렵 능력 이상의 일을 벌인데다가 자원 부족에 시달리던 일본'은 버마(미얀마)를 통해 중국 국민당에게 무기를 제공하는 미국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인도를 손에 넣기 위해 415km에 달하는 철로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세우는데, 이때 도리고를 비롯한 천 명의 호주 포로병사들이 이 일본의 야심찬 프로젝트에 투입된다. 물론 이 철로 건설에 6만명의 연합군과 25만 명 이상의 민간이 투입되었다고 하나 이 책에서는 호주 포로들만을 다룬다. 


패색이 짙었던 일본은 철로를 지을 돈과 기계, 시간도 없었다. 오직 여기저기서 강제로 데려온 포로들과 그 잘난 '일본 정신'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닷새 동안 강철 차량에 갇히고 또 이틀동안 트럭을 타고 정글에 도착한 포로들에게 일본군 장교는 다름과 같이 말한다.


"천황 폐하를 위해 철로 건설을 도우려고 먼 길을 와줘서 고맙다. 포로로 잡힌 것은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일. 좋다! 천황 폐하를 위해 철로를 건설해서 명예를 되찾아라. 굉장한 명예다. 굉장해!" (p.61)


오스트레일리아 병사들에게 저 말은 어떻게 다가왔을까...천황, 명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제대로 된 장비는 커녕 식사도 나치 수용소를 방불케 하는 열악한 상황에서 많은 포로와 민간인들이 죽어나간다. 그들에게 제공된 도구라고는 '밧줄과 장대, 망치와 쇠지레, 짚바구니와 괭이 뿐' 포로들은 심각한 굶주림 상태에서 거의 벌거벗은 몸으로 저 도구들을 가지고 '정글을 베어내고 바위를 부수고 흙을 옮기고 침목과 레일을 운반'한다. 


'아픈 사람, 심하게 아픈 사람, 죽어가는 사람'만이 있는 이곳에서 군의관이자 포로병사들의 지휘관인 도리고는 일본군 장교, 나카무라에게 철로공사에 나갈 수 있는 인원을 날마다 보고해야 한다. 그는 한 명의 병사라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의약품은 커녕, 콜레라와 이질, 각종 질병으로 병사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단축된 공사 기일에 강도 높은 노역을 요구하는 일본군 장교와 한 명이라도 더 살리려는 도리고 대령간의 '흥정'은 참으로 기가막히고 슬프다.


"363명입니다." 

"고햐쿠!" (500)

"380명"

"용햐쿠 규쥬고" (495)

그는 다시 한번 환자 수를 언급하고, 그들의 다양한 병을 자세히 설명하며 400명을 제시한다. 

"400명 이상을 데려가봤자 천황 폐하를 위해 아무 일도 못 합니다. 몸이 좋아지기만 하면 훨씬 쓸모 있을 사람들이 죽을 겁니다. 400명이 우리가 끌어모을 수 있는 최대한이에요." (p.273)


이런 도리고의 간곡한 부탁에 일본군 장교는 통역을 시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헌신하라", "일본의 정신을 이해하라" (p.274)


그 순간 사열해 있던 한 명의 포로가 쓰러지고 에번스는 말한다. "399명입니다."

나카무라는 도리고의 뺨을 사정없이 갈긴다. 계속 날아오는 따귀를 맞으며 도리고는 속으로 병동에 있는 환자 수를 다시 계산한다. 그는 속으로 406이라는 숫자를 생각하지만 입밖으로 말하진 않는다. 계속 날라오던 따귀가 멈추고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응시한다. 이 팽팽한 시선 속에서 '삶과 죽음을 거래하는 이 기묘한 시장의 흥정'은 다시 시작된다. 


"430명, 천황폐하의 뜻이다."

"압니다. 429명" (p.277)


이렇게 협상은 끝난다. 나카무라가 애시당초 제시한 500명에서 마지막 한 명까지 깍아 얻어낸 숫자 429명...71명을 깍았으니 이긴 것인가...아니면 도리고 자신이 쥐어짜서 겨우 제시한 숫자보다 66이 늘어났으니 진 것인가...아무리 자신이 최선을 다해도 그는 매일 좀더 많은 것을 잃는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아닌 '다른 사람들의 목숨'이다. 


이 소설에는 한국인으로서 잊을 수 없는 인물이 한 명 나온다. '고아나'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그는 조선인 포로 감시원으로 본명은 '최상민'이다. 일본군 꼭두각시로 포로들에게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 그는 벌 받아야 마땅한 가해자이지만, 작가는 역사의 거대한 압력 속에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그의 기구한 인생도 들추어 냄으로써, 전쟁이 빚어내는 비극을 세세하게 그려내 나를 놀라게 했다.


포로들에게 천황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릴 것과 최상민과 같은 경비원들에게 포로들을 무자비하게 학대하라고 지시한 고타 대령과 나카무라 소령은 처벌받지 않고, 조선 식민지에서 강제로 징집된 '최상민'과 같은 낮은 계급의 사람들만 희생양이 되어 교수형에 처해지는 전범재판의 불공정함과 모순은 분노를 자아낸다.


아무것도 모르는 16살짜리 조선인 청년은 일본이 약속한 매달 50엔의 봉급은 커녕, 일본군의 교육으로 점점 감정이 없는 '포로들을 후려갈기면 갈길수록 그들이 점점 인간 이하의 존재가 되어가는 모습'에 쾌락을 느끼는 괴물로 변해간다. 그는 '천황의 도구'였을 뿐임을 나중에 깨닫지만, 자신보다 더 악랄한 짓을 한 자들이 목숨을 건지는 모습은 이해할 수 없다. 


포로들을 때림으로써 '대단한 인간이 된 것 같다는 확신' 이 확신이 그를 점점 더 짐승같이 만들었고 '그런 짐승같은 모습이야말로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인간적인 모습'(p.401)이었음을 그는 나중에 이해한다. 교수형을 앞두고 감옥에서 받은 마지막 식사를 보며 그는 '어머니가 담근 매콤한 김치'(p.423)를 간절히 그리워하는데, 이 '김치'라는 단어를 보며 나는 미칠것만 같은 가슴 떨림을 느꼈다. 눈물이 났다. 이 시대에 자신의 삶에 단 한 번의 확신도 없이 미쳐 피기도 전에 사그라든 삶이 얼마나 많았을까...김치를 그리워하며 죽어간 영혼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이 소설의 제목은 일본 시인 바쇼의 기행문인 <오쿠로 가는 좁은 길>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책은 사람 목 자르기를 좋아하는 고타 대령이 이 책 '한 권에 일본 정신의 천재성이 요약되어 있다'(p.162)고 칭송한 책이다. 

질병과 굶주림으로 수많은 포로들이 죽어 나가는 수용소에서 느긋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하이쿠를 읊어대는 고타대령과 나카무라 소령은 엽기적으로 보인다. 바쇼의 글에 빗대어 지금 자신들이 건설 중인 철로가 바로 '바쇼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일본의 정신을 버마까지 이어줄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이라며 자아도취 속에 나누는 대화는 기괴하면서도 예술의 아름다움과 함께 묘한 슬픔이 밀려온다.


사람의 목을 자르고 다시 태어나는 기분을 느꼈다는 고타 대령이 즉석에서 읊은 하이쿠.


만주국에 있을 때도

목을 보면

나는 만주국이 그립다. (p.165)


이런 글같지도 않은 글을 이 곳에 쓰기가 싫지만 당시 일본장교의 정신 상태를 보여주고 싶어 어쩔 수 없이 옮긴다.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이 고타 대령은 혈액은행의 간부가 되고 선(禪)명상가가 되어 잘 먹고 잘 살다 급기야 죽어서는 '살아있는 부처'가 되고자 하니 참으로 기가 차다.

혈액은행의 창립자는 전쟁 때 생체해부를 한 악마로 전쟁이 끝나고 일본에서 대단한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는데, 이들이 외국인 포로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생체해부 이야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다. 


작가 리처드 플래너건의 아버지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군인으로 일본 포로수용소 생존자이다. 책의 맨 앞부분에 '335번 포로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쓰여있다. 물론 '335번 포로'는 아버지이다. 작가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토대로 소설을 구상했고, 이 소설은 평생 참혹한 전쟁의 경험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아버지, 즉 '한 인간의 영혼을 문학으로 잊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출판사 해설)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주인공의 과거와 현실을 넘나드는 기억의 두개의 축은 전쟁과 사랑이다.

나는 사랑 이야기보다는 전쟁 이야기에 더 깊은 인상과 감동을 받았기에 사랑 이야기는 다루지 않았지만, 참혹한 전쟁의 기억이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반면, 유일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운 사랑의 기억은 그를 지옥같은 세상을 살게 하는 버팀목으로 작용한다. 

'발아래에는 진흙이, 머리 위에는 더러운 하늘'(p.543)이 있다해도 사랑 이야기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도리고의 깨달음은 이 책의 첫 장에서 도리고가 본 최초의 빛과 연결된다.


처음에 이 책을 몇 장 넘기면서 '아...이건 무조건 별5개다' 라는 생각과 함께 너무나 부족한 독자이지만, '이 책은 정말 잘 읽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작가가 전쟁과 관계된 모든 인간들 하나하나에 세심한 생명을 불어 넣어줬는데, 나는 그것을 간결하고 능숙하게 담아내질 못하니...

다만 요리를 못해도 맛있는 건 알듯이 훌륭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내가 읽은 부커상 수상작 중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과 함께 이 작품을 최고라고 생각한다. 참 묵직하면서도 아름답고 때로는 가슴 아픈 눈물이 흐르게 만드는 좋은 작품이다.

무엇보다 완성도 있는 작품을 향한 작가의 노력이 정말 많이 보여 독자로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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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5-14 16: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있게 읽은 책입니다. ㅋㅋㅋㅋ 잘 읽으셨다니 반가워요!

coolcat329 2021-05-14 17:54   좋아요 3 | URL
폴스타님 리뷰가 좋은 책 고르는데 늘 많은 도움을 주셔요~

scott 2021-05-14 16:4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발아래에는 진흙이, 머리 위에는 더러운 하늘‘]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헌사 같은 이책 ,잔혹한 전쟁의 희생자들의 목소리가 담긴 사가(saga)라고 맨부커상 심사위원들이 이책을 선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책을 쓰는 동안 고통스러웠던 작가에게도 고맙지만 아룬다티 로이 작품을 비롯해 부커상이 주목하고 선정하는 작품들의 리스트들(롱/숏 리스트) 상당수가 소수자, 약자의 목소리에 집중해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세상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볼 기회를 마련해 줘서 개인적으로 맨부커상이 선정하는 책들은 항상 챙겨 읽으려고 노력 한답니다.

coolcat329 2021-05-14 17:53   좋아요 3 | URL
아 정말 그러네요~제가 읽은 부커상 작품이 거의 다 차별과 억압을 받는 약자들의 이야기였어요. 앞으로 부커상은 꼭 챙겨 읽고 싶습니다. 스콧님 댓글 감사합니다 ~^^

새파랑 2021-05-14 17: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자괴감과 부커상 최고라니 이것도 안읽을수 없네요~!! 이런 직설적인 추천 완전 좋아요^^

Falstaff 2021-05-14 17:12   좋아요 3 | URL
이건 읽으셔야.....
세상의 모든 인류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리처드 파워스의 <오버 스토리>와 함께요. ^^

coolcat329 2021-05-14 17:58   좋아요 3 | URL
자괴감은 책을 사놓고 1,2년 지나서야 읽으니 늘 느낍니다ㅠ
리뷰를 책의 품격에 맞게 시처럼 쓰고 싶었으나 저같은 초짜는 그저 솔직한게 최고인듯 싶습니다. 🤭
많은 사람이 읽어야 한다는 폴스타프님 의견에 저도 동감입니다.

coolcat329 2021-05-14 17:59   좋아요 4 | URL
폴스타프님 <오버스토리> 매번 펼쳤다가 너무 무거워 다시 내려놓네요. 하지만 올해 꼭 읽을거에요~!!!

페넬로페 2021-05-14 18:2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어떤 책은 내용을 모르더라도 제목으로 확 끌리는 느낌이 있어요~~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이 그랬는데
아직 읽지 못하고 있어요^^
coolcat님의 리뷰로 꼭 읽어야겠어요**

coolcat329 2021-05-14 18:57   좋아요 3 | URL
네 저도 제목이 참 끌리더라구요~~감사합니다 😊
 
화이트 타이거 - 2008년 부커상 수상작
아라빈드 아디가 지음, 권기대 옮김 / 베가북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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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의 인도에는 천 개의 카스트와 천 개의 숙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딱 두 개의 카스트만 남았어요 : 배때기가 커다란 남자들, 그리고 배때기라곤 없는 남자들.

그리고 숙명 또한 딱 두 가지뿐이랍니다 : 먹거나, 먹히거나. (p.85)


<화이트 타이거>는 인도 출신 작가 아라빈드 아디가(Aravind Adiga 1974~ )의 작품으로 2008년 부커상 수상작이다. 이 소설은 북플 친구 '레삭매냐'님의 리뷰를 읽고 기억해 둔 책인데, 작년 말 중고서점에서 발견, 바로 구입해 쟁여 둔 책이다. 

살만 루시디, 아룬다티 로이, 키란 데사이에 이어 인도 출신 작가의 4번 째 부커상 수상이었고, 최연소 수상이었기에 더욱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발람 할와이라는 기업가가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전기를 인도를 방문하는 중국의 총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전개, 스토리와 구성이 독특한 소설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인도의 실상이 여과없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데 인도 입장에서는 이 소설이 굉장히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주인공 발람의 조롱과 풍자, 신랄한 위트가 처음부터 끝까지 시니컬한 목소리로 전개된다. 


착하고 순진한 사람은 살아남을 수 없는 정글과도 같은 인도,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과 열심히 정직하게 일해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나라에서 과연 어떻게 해야 이 인간 이하의 삶을 탈출할 수 있는가... 이 소설은 이런 신분과 빈부격차의 속박을 깨부수고 나오는 한 인간의 결단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준다.


발람의 눈에 비친 인도의 모습 중 인상적인 대목을 옮겨본다.


여기 인도에는 독재라는 것이 없답니다. 비밀경찰도 없구요.

우리에겐 닭장이 있잖아요.

인류 역사의 어느 장에도 이처럼 소수의 인간들이 이처럼 대다수에게 이처럼 많은 것을 빚지고 있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지아바오 선생님. 이 나라의 몇몇 안 되는 사람들이 나머지 99.9 퍼센트를-어느 모로 봐도 그들에 못지않게 강하고, 못지않게 재능 있고, 못지않게 똑똑한 나머지를-훈련시켜서 영원한 예속의 상태에서 살도록 만든 거죠. 그것은 얼마나 튼튼한 속박의 굴레인지, 그의 손에 해방의 열쇠를 쥐어주더라도 그는 욕설을 하며 그걸 되던져버릴 정도입니다.(p.204)


발람의 수탉장 이론이 나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수탉장이란 것이 어째서 먹혀들어가는 걸까? 어떻게 해서 수백만의 인간들을 그처럼 효율적으로 가둬놓을 수 있는 거지?' (p.205) 


이 질문에 그는 '인도의 가족'을 그 원인으로 든다. 만약 인도의 하인이 주인의 돈을 훔쳐 달아나면 어떻게 되는가...도망친 하인의 대가족은 몰살을 당하게 된다. 주인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지 못한 하인과 그의 가족은 '쫓기고, 두들겨 맞고, 산 채로 불타 죽임을 당'하기에, 이런 모든 것을 '볼 각오가 된 사람만이 닭장을 부수고 나올 수가 있다'(p.205) 고 말한다. 

따라서 '정상적인 인간'은 닭장을 빠져나올 수가 없고 '괴물'이 되거나 '비정상적인 성격'이라야 가능하다는 것. 

가족을 위해 인력거를 끌다 결핵에 결려 돌아가신 아버지, 결혼하고 그런 아버지의 모습처럼 변한 형 키샨을 보며 발람은 한 인간의 실존을 위협하는 인도의 가족주의를 거부하고 분노한다.


0.1%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인도 사회의 냉혹한 현실과 그들의 지배 하에 닭장에 갇혀 자신이 갇힌 줄도 모르고 사는 99.9%의 인도 국민들, 인도 사회에 너무나 뿌리깊게 박혀있는 부정부패는 이 사회를 점점 더 병들게 한다.

세 차례나 유죄판결을 받고 감옥에 갇힌 장관, 그러나 장관직은 그대로 유지되는 나라에서 국민들은 하인의 숙명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 급식이 나오지만 발람은 한 번도 그 음식을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선생님이 그 급식 보조금을 '쓱싹'하기 때문. 근데 선생님도 이유가 있다 6개월간 봉급을 못 받았기 때문에. 

가난한 시골학교에 정부가 교복을 지원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교복을 보지 못한다. 그 교복은 일주일 뒤 시장 장터에서 볼 수 있다.

아버지를 업고 병원에 갔으나 의사는 보이지 않는다. 치료도 한 번 못 받아 보고 죽은 아버지, 그러나 정부의 기록에는 '아버지의 결핵은 완벽하게 치유'되었다고 쓰여있다. 

시골병원에 의사들이 정기적으로 가는지 감독하는 의료감독관은 의사들로부터 월급의 삼분의 일을 받고 병원에 다녀온 걸로 처리해준다.

발람은 선거가 있을 때마다 투표를 한다. 그러나 그는 기표소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투표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기표소 안을 본 적이 없다.


이처럼 기막힌 실상에 웃음이 나오지만 그 웃음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잘못된 세상, 그 속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99.9%의 사람들 속에서 백 년에 딱 한 번만 나타난다는 동물, 화이트 타이거. 발람은 바로 '이 험한 정글의 화이트 타이거'이다.


"할머니, 전 남은 인생을 우리 속에 갇혀 살 수는 없어요. 미안해요." (p.317)


자신이 '화이트 타이거'임을 발람은 어떻게 증명해 보일까...

닭장을 탈출하고자 그가 시도하는 '모종의 기업가적 행위'(p.28)는 자신이 도둑맞은 것들을 되찾기 위한 최후의 몸부림이며 자유를 향한 외침이다. 


"인도의 젊은이들이여, 그대 혁명의 책은 바로 그대들의 뱃속에 들어있도다. 그것을 배출해내서 읽으라! (p.344)


<화이트 타이거>는 '소수의 인간들이 그 많은 대다수에게 진 빚을 고발하는 소설'(p.367 작품해설)이며 거대한 인도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관습과 불합리함, 부패를 폭로한다. 

'갠지스강의 시커먼 진흙탕 속에 산처럼 쌓여 썩어문드러질 이름 없는 육신으로 삶을 마감하지 않'기 위해, 어둠의 세계에서 조금이라도 빛을 보기 위해 촌구석 소년이 어떻게 변신해 가는지 그 과정이 매우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 책을 덮고 나서도 마치 내가 인도의 대도시 한복판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 소설은 현재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데, 그저 읽고 싶어서 집어든 책이 작년에 영화로 만들어져 올해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로 올랐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놀랐다. 조만간 영화로도 볼 생각이지만 책의 재미를 절대 능가하지 못하리라 본다. 책을 펼치자마자 9페이지에 걸쳐 전 세계에서 쏟아진 찬사를 볼 수 있는데, 그 수많은 호평이 결코 허풍이 아님을 책을 읽다보면 알 수 있다. 

주인공 발람의 입담에 끌려가다보면 어느새 책장이 한참 넘어가 있어 아쉬운 마음까지 든다.

국내에 번역된 작가의 유일한 작품이라 많이 아쉽다. 다른 작품도 번역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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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5-05 15: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의 전염성이 날로 커져가는 듯 합니다!ㅋㅋㅋㅋ
저도 바로바로 찜~♡

coolcat329 2021-05-05 16:13   좋아요 3 | URL
네~기회되시면 꼭 읽어보셔요~~제가 스토리는 말하기가 아까워서 일부러 안했습니다🙊

scott 2021-05-05 16: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화이트 타이거 전 영화로 봤는데!
원작의 생동감 넘치는 묘사와 대사가
영상은 많이 생략되어서 ㅎㅎ

coolcat329 2021-05-05 17:12   좋아요 2 | URL
그쵸. 소설이 워낙 생생한 날것 그대로라 영화로 다 담아내기가 힘들었을거 같아요. 스콧님 역시 보셨군요~!

새파랑 2021-05-05 17:2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인도가 저정도의 실상이었다는 걸 몰랐었네요. 이거 리뷰만 읽으면 혈압 오르네요ㅡㅡ 하지만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coolcat329 2021-05-05 19:36   좋아요 1 | URL
읽다보면 답이 안보여 하...이를 어쩌나 한숨이 나오기도 합니다.ㅠㅠ

페넬로페 2021-05-05 18:2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인도에 부커상을 받은 작가가 네 명이나 있군요~~
인도라는 나라의 실상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책으로 잘 접하지는 않는것 같아요~~저도 찜합니다^^

Falstaff 2021-05-05 18:36   좋아요 3 | URL
세상에 영어를 사용하는 인구로 따지면 부커 상을 거의 일년 건너 한 번 씩 받아야 하는 나라가 인도일 겁니다. ㅋㅋㅋㅋㅋ
인도 출신 (한국 법인 상무를 거쳐)본사 사장, 파키스탄 출신 본사 회장을 겪었는데, 장난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영어를 일부러 무지하게 빨리 발음하는 거였고, 다음이 십대 중후반teenage에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는 거였고, 무지 중요한 것이, 두 명이 지독하게 닮은 것으로, 자기보다 계급 낮은 임직원은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거였습니다. 카스트 제도가 낳은 희망적 미래상이라고 우리 평범한 것들이 이해하곤 했습니다만. ㅋㅋㅋㅋ

페넬로페 2021-05-05 18:41   좋아요 4 | URL
폴스타프님!
제가 참 무식한게 인도에 대해 좀 안다고 하면서 그들이 영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걸 까맣게 잊었습니다~~그렇군요 .말로만 듣던 카스트 제도의 실상이 현대에도 고스란히 드러나군요^^
정말 이 책 빨리 읽고 싶어졌어요**

coolcat329 2021-05-05 19:33   좋아요 3 | URL
인도 상류층 자식들은 무조건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을 가더라구요. 사람들이 똑똑한지 어학에도 능통하고 영어는 기본. 저는 카스트가 단순히 4개로 나뉘어져 있는줄 알았는데 이 책 보니 천개로 세분화되어있고 꽤 복잡하더라구요.
다 그렇진 않겠지만 상류층은 아래계급을 인간취급도 안하고 아래계급은 또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런 사회를 작가는 풍자한 듯 싶네요. 근데 이 작가도 부잣집 아들이었는지 호주에서 고등학교 나오고 옥스포드, 콜럼비아대학에서 공부했네요. ㅎㅎ

han22598 2021-05-07 07:01   좋아요 2 | URL
인도사람들끼리는 Last name만 들어도 살았던 지역이나, 계급의 거의 알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일반적으로 라스네임이 길면...상류층이고, 라스트 네임이 길도록 상류층에 가깝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예전에 만났던 브라만 여자애가 하는말에 의하면 (본인이 브라만이라고 커밍아웃하더라고요 ㅋㅋ), 여전히 다른 계층간의 결혼도 허락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coolcat329 2021-05-07 07:54   좋아요 1 | URL
네~주인공 성이 ‘할와이‘인데 대대로 과자굽는 일에 종사한 집안이라고 사람들이 성 듣고 딱 알아보더라구요. 근데 대대로 해왔던 그 과자가게도 부패한 경찰의 도움으로 다른 카스트 사람이 빼앗아 버리니 주인공 아버지가 인력거를 끄는거에요.ㅠ 이 카스트제도도 다 썩어서 이젠 ‘먹거나 먹히거나‘ 둘 중 하나라는 거죠.

레삭매냐 2021-05-05 2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화이트 타이거>의 넷플릭스
버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영화는 구비해 두었으니 한 번 감상
해 봐야겠습니다. 아이, 빨랑 마저
<인도로 가는 길>부터 끝내야 하는
데 이거 유혹이 보통이 아니네요.

인간다움, 여전히 미스터리입니다.

coolcat329 2021-05-06 07:17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진걸 알고 놀랐어요. 😮
 
에콰도르 라 파파야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2년 6월
평점 :
품절


어린이 날 아침 여유롭게 드립으로 내려 마시는 한 잔의 커피. 오랜만에 마셔보는 알라딘 커피는 그야말로 5월에 어울리는 맛. 입안 가득 퍼지는 5월의 향기와 차분한 화사함, 부드러운 산미가 휴일 아침을 기분 좋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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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5-05 09: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커피 구매하려고요! 기대됩니당

청아 2021-05-05 09: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알라딘 커피 안마셔 봤는데 이 리뷰는 참을 수 없게 하네요!👍조만간 마십니다 꼭^^♡

새파랑 2021-05-05 10: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 받기 어렵다는 🌟 다섯개를 커피가 받는군요. 얼마나 맛있길래 궁긍합니다^^

coolcat329 2021-05-05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부드러운 산미와 싱그러운 꽃향기가 5월에 딱입니다~♡
 
피그말리온 열린책들 세계문학 176
조지 버나드 쇼 지음, 김소임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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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 의 희곡을 처음 읽었다. 그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그 유명한 묘비명 뿐이었는데, 소설보다는 희곡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고 1925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으로 알았다. 

평생 60여편의 희곡을 발효할 정도로 희곡으로 유명한 작가인데 나는 그저 이름만 알고 있었던 것.

아! 그리고 정말 새로 안 사실은 이 희곡이 오드리 헵번 주연 뮤지컬 영화 <My Fair Lady>(1964)의 원작이라는 것이다. 


"천박한 영어를 하는 저 아이를 보십시오. 저 영어는 죽는 날까지 저 아이를 빈민굴에 처박혀 있게 할 겁니다. 자, 선생, 저는 석 달 안에 저 아이가 대사의 가든파티에서 공작 부인 행세를 하게 할 수 있어요. 저 애가 보다 수준 있는 영어를 요구하는 귀부인의 하녀나 가게 점원 자리를 얻게 할 수도 있습니다." (p.36)


<피그말리온>은 사람의 말소리만 듣고도 어디 출신인지 귀신같이 맞추는 음성학자, 헨리 히긴스가 길거리 하층민 소녀를 교육시켜 기품있는 숙녀로 만든다는 이야기이다. 

길거리에서 꽃을 팔아 하루하루 살아가는 소녀 일라이자 둘리틀은 꽃집에서 일하고 싶지만 자신의 천박한 영어로는 그 일을 할 수 없기에 길에서 우연히 알게 된 히긴스를 찾아와 품위있는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한다. 


영국 영어는 상류층이 쓰는 Queen's English 와 런던 이스트엔드 하층노동자가 쓰는 Cockney 로 나뉘어 진다고 하는데, 일라이자는 당연히 코크니를 사용, 다음 일라이자의 대사를 보면 왜 그녀가 꽃집에서 일할 수 없는지 알 수 있다. 


"Ow, eez yeooa san, is e? Wal, fewd dan y'de-ooty bawmz a mather must, eed now bettern to spawl a pore gel's flahrzn than ran awy atbaht pyin. Will ye-oo py me f'them?" 


아, 저 사람이 아줌니 아들이에유? 글씨, 아줌니가 에미 노릇을 지대로 했더라면, 저 인간이 불쌍한 여자애의 꽃을 다 망쳐 놓고 돈도 안 주고 도망치지는 않았겄지유. 물어 줄 거지유?(p.23)


생각보다 너무 심한 사투리아닌가...저 중에 아는 단어가 몇 개 보이지도 않고 런던에 살지 않는 사람은 영어권이라도 이해하기 힘들 듯 하다. 작가는 이해하기 힘든 그녀의 말을 이런 식으로 계속 쓰는 '필사적인 시도'를 포기하겠다면서 다음 문장부터는 보통 영어로 표기하겠다고 말한다.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예술가가 자기가 만든 작품과 사랑에 빠진다는 그리스 피그말리온 신화에서 그 제목과 모티프를 가져왔다. 

'노르웨이의 극작가 입센의 영향을 받은 쇼는 <피그말리온>에서 신분, 언어, 교육, 빈곤, 여성 등의 사회 문제를 본격적으로 극화한다.'(p.230 작품해설)


특히 영국의 신분사회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주는데 일라이자가 사용하는 하류층 영어는 그녀의 신분을 결정짓는 잣대이며, 개인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한다. 일라이자는 9년 동안의 의무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어구사 능력과 발음이 엉망인데, 이는 영국 공교육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버나드 쇼는 이런 영국 교육을 비판하고 있다. 


또한 중산층 위주의 비합리적인 사회보장으로 일라이자와 그녀의 아버지는 극한의 빈곤 상태에서 생활한다. 난방도 안되는 집에서 추위를 막기 위해 밖에서 입던 옷을 그대로 입은 채로 누더기 천이 겹겹이 덮힌 침대에서 잠을 잔다. 평생 목욕을 해 본 적이 없다며 욕조에 들어가 몸을 씻으면 죽는다고 생각할 정도이니 매일 씻는 나로서는 상상하기가 괴롭다. 이렇게 열악한 생활 환경 속에서 엉터리 의무교육을 마치고 생계를 위해 길거리로 나와 꽃을 팔며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그녀에게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은 어느새 삶의 당연한 일부분이 된다. 


괴팍한 음성학자 히긴스와 예의바른 신사 피커링 대령의 내기로 시작된 '하층민 소녀 숙녀만들기 프로젝트'는 이런 일라이자를 변신시키는데 성공, 이런 상황 설정은 낭만적이며 재미있다. 

길거리 소녀가 아닌 꽃집 점원으로서의 자신을 꿈꾸며 히긴스의 지도를 받아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며 숙녀로 변신한 일라이자...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되어 행복해야 하지만 곧 자신의 처지를 알게된다. 

"난 무엇에 어울리는 사람이죠?" (p.149) 라고 물으며, 자신이 피나는 노력을 해서 얻게된 '숙녀의 언어와 몸가짐으로는 영국 사회에서 적극적인 경제 활동을 하기 어렵다는 것'(p.233 작품해설)과 차라리 거지같은 차림으로 길에서 꽃을 팔 때가 더 자유롭고 독립적이었음을 깨닫고 분노한다.


"나는 꽃을 팔았지 나를 팔지는 않았어요. 당신이 나를 숙녀로 만들어 버려서 나는 이제 어떤 것을 팔아도 어울리지 않아요. 나를 발견했던 그곳에 그대로 놔두지 그랬어요."(p.151)


"아! 꽃이나 팔던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당신하고 아버지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독립해야만 했는데! 왜 내게서 독립을 빼앗아 갔어요? 나는 뭘 위해서 그걸 포기한 거죠? 이제 좋은 옷이 아무리 많아도 노예와 마찬가지예요." (p.193)


이런 그녀에게 히긴스는 지극히 상류층 남자가 할 수 있는 말을 한다. 자기는 일라이자가 원하면 돈을 주고 양녀로 삼을 수도 있으며 아니면 피커링 대령과 결혼을 할 수도 있지 않냐며, 일라이자가 무엇때문에 걱정하고 고민하는지 그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일라이자는 돈을 원하는 것도 결혼 상대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주는 그 '약간의 친절'을 원했을 뿐인데, 히긴스는 그 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일라이자는 히긴스의 가르침은 '멋지게 춤추는' 기술을 가르쳐 준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녀를 진정한 숙녀로 바로 서게 해 준건 피커링 대령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였다고 고백한다.


"제게 진정한 교육을 시작한 게 뭔지 아세요? (...) 제가 윔폴 거리에 처음 온 날 저를 둘리틀 양이라고 불러 주신 거요. 그게 제게는 자기 존중의 시작이었어요. (...) 진실로 숙녀와 꽃 파는 소녀의 차이는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대접을 받느냐에 달렸죠." (p.180,181)


'어떻게 대접을 받느냐' 이 차이가 자신을 변화시켰다는 일라이자의 고백은 인간 관계에서 예의의 중요성과 그런 예절도 배우고 몸으로 익혀서 습관으로 만들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뮤지컬, 영화로도 만들어져 대중의 사랑을 받은 이 극은 일라이자라는 한 하층민 소녀를 통하여 신분차별과 성차별, 빈부 격차등, 영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여러 사회문제들을 풍자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시대의 '변화와 발전을 꿈꾼' 작가의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일라이자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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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4-30 10: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좀 엄한 이야기지만...

제가 어울리지도 않게스리 작은
대리석 조각상을 하나 개지구
있답니다. 오래 전에 친구가 생일날
선물로 사준 거였는데, 바로 피그말
리온과 갈라테아가 키쓰하는 장면
이지요...

리뷰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퍼뜩
생각이 나서 몇 줄 적어 보았습니다.

coolcat329 2021-04-30 11:57   좋아요 3 | URL
어머 조각상 저도 갖고 싶네요. 😍볼 때마다 제 안의 낭만성이 살아날거 같아요.

새파랑 2021-04-30 11: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보니 재미있을거 같아요~오랜만 희곡 도전~5월에 읽어야겠네요~!!

coolcat329 2021-04-30 12:00   좋아요 2 | URL
네~저는 읽은 희곡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데 그래도 읽을 때마다 재밌고 여운이 오래 남네요~~4월도 다가고 5월 새파랑님의 활약 기대할게요~

청아 2021-04-30 12: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영화 너무 재밌게 봤음요~♡ 책도 이뻐?서 사두었는데 쿨캣님 리뷰보니 노벨 문학상도 탔네요!!

coolcat329 2021-04-30 13:07   좋아요 3 | URL
저도 유툽에서 오드리 영화 조금 봤는데 웃기더라구요. 초반 우악스럽게 말하는 오드리 연기가 넘 웃겼어요.

Falstaff 2021-04-30 12: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일라이자.... 세상을 정복한 위대한 충청도 사투리여!!! ㅋㅋㅋㅋ

coolcat329 2021-04-30 13:08   좋아요 2 | URL
아는 충청도 분이 왜 소설 속 사투리는 다 충청도냐고 가끔 기분나쁘다고 했어요. ㅋㅋㅋㅋㅋ

scott 2021-04-30 15: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채털린 부인의 사랑에도 충청도 사투리로 번역 되었는데 ㅎㅎ
피그말리온에서도 영쿡식 Cockney 번역체로 ㅎㅎ

실제로 런던 웨스트엔드 연극중 가장 먼저 매진 되는 뮤지컬이
‘마이 페어 레이디‘
그런데 현재 영국에서 Cockney말투 그중 억양을 구사하면(도시노동계층)
100퍼센트 런던 토박이라고 합니다. ^.^

coolcat329 2021-04-30 16:13   좋아요 3 | URL
아 그렇군요 ~~그래도 일라이자처럼 심하진 않고 많이 희석됐겠죠?
 
슬픈 짐승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9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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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카 마론(1941~)이라는 작가를 이 책을 통해서 처음 만났다. 

그녀의 삶은 독일 역사의 분단, 통일과 그 흐름을 같이 한다. 1941년 베를린 출생, 분단 후 서베를린에 살다가 양아버지를 따라 1951년 동베를린으로 이주, 동독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교육을 받고 대학에서 연극학과 예술사를 전공했다. 졸업 후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 1976년 전업 작가가 된 후 1981년 첫 소설 <분진>을 발표한다. 그녀는 작품 속에서 동독과 서독의 분단 상황, 특히 동독 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글을 주로 썼고, 1988년 임시비자를 받아 서독 함부르크로 이주해 통일이 될 때까지 머물다가 현재는 베를린에서 살고 있다. 


1996년 발표한 <슬픈 짐승>은 '모니카 마론의 작품 세계에서 새로운 전환점으로 평가받는 소설'(p.198 작품해설)로 통일 직후의 베를린을 배경으로 과거 자신의 사랑을 회상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동독 베를린 자연사 박물관의 고생물학자인 '나'는 어느 날 길을 걷다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고 발작을 하다 실신하게 된다.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발작을 겪고 나서 그녀는 생물학자로서 믿었던 진화론에도 의심을 품게 되고 심적으로 불안감에 빠지게 된다. 

그녀는 죽을 수도 있었던 내가 삶에서 '놓쳤던 것이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을 하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다가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p.20)는 결론을 내리게된다.


그리고 1년 후, 그 사이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나'는 서독 출신의 프란츠를 만난다. 

박물관 내 거대한 브라키오사우루스 모형이 내려다보는 그 자리에서 "아름다운 동물이군요." 라는 말과 함께 다가온 프란츠.


결혼해서 남편과 딸 하나를 두고 '평균적인 삶'을 살고 있던 그녀의 삶은 그 날 이후로 모든 것이 변한다. 남편과 딸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인생에서 사라지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도 프란츠와 만나기 위해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녀의 삶은 오직 프란츠로만 가득차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이라는 이름을 생각하듯 나는 혼자서 계속 프란츠라는 이름을 생각했다. 행복과 불행, 구원을 위해서 내가 가진 것은 오직 이 한 단어, 프란츠뿐이었다. 오늘까지도 내내 그러했다. (p.123)


 

프란츠는 유부남이다. '나'를 찾아왔다가 밤 12시 반이 되면 아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나'는 프란츠의 아내에게 심한 질투심을 느끼고 프란츠가 아내와 여행을 떠나는 날 공항에서 훔쳐보며 그들의 관계는 잘못됐고 베를린 장벽이 없었다면 '절대로 그녀는 그를 차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여행을 떠난 후 '나'는 그의 여행 동선을 상상하고 그들이 머무는 호텔방, 그들의 육체관계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극도로 불안해한다. 프란츠가 떠나고 홀로 남은 그녀는 '지독한 고독의 감정'을 느끼며 그가 머물만한 호텔들 여기 저기로 전화를 거는데, 그야말로 사랑에 집착하는 한 여자의 처절한 모습이다. 


프란츠를 만나기 전, 사회주의 체제의 동독에서 살았을 때 '나'는 고생물학자로서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플리니 무디의 정원'에 가서 시조새의 발자국을 보길 간절히 원했었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를 얻었지만 그녀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곳에 가는 것을 미룬다. 장벽 안에 갇혀 있었을 때는 플리니 무디의 정원은 오직 꿈 속에서만 볼 수 있는 동경의 장소였지만 이제 그곳은 누구나 갈 수 있는 현실의 장소가 된 것이다. 이제 '나'에게는 오직 프란츠의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슬픈 짐승>은 사랑에 관한, 그것도 한 여자의 처절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나'의 회상 속에는 사랑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독일의 분단과 통일을 배경으로 다양한 사람들의 삶도 있다. 

베를린 장벽이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고 통일을 맞이한 세상은 개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통일이 되고 정치적 야망을 위해 사랑하는 여자를 배신하는 사람, 분단으로 헤어졌던 옛사랑이 다시 돌아오자 24년을 함께 산 아내를 떠나는 남편, 분단 시절 서독으로의 탈출을 도와준 여자와 결혼한 남자는 통일이 되자 사랑없는 결혼을 청산하고 자유를 찾는다. 또 하나 재밌는 것은 권태기에 서로 대화도 없던 부부들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서로를 '감사 가득한 결탁'이 가득한 시선으로 쳐다보게 됐다는 점이다. '이혼 소송 중 다수가 취소'되고 사람들은 '자신의 것이라고 지칭했던 것을 단단히 움켜'쥔다. 이 갑작스럽게 다가온 낯선 세계는 보기만 해도 권태감이 밀려오는 남편, 아내의 얼굴을 친숙하게 보이도록 만든 것이다. 


이 소설은 사랑이야기가 주를 이루기는 하나 동서독의 통일과 그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 가운데 드러나는 사회적인 혼란과 개인의 불안을 함께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나'가 보여주는 처절하고 광적인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낯선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한 사람의 그동안의 억눌린 몸부림이 아닌가 싶다. 

사랑을 통해 자신을 구원하려고 했던 여자, 그러나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자신마저도 파괴해야 했던 여자... 


'그대를 차지하거나 아니면 죽는 것'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그녀는...슬픈 짐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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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4-25 17: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All or Nothing 이네요 ㅎㅎ 체제의 혼란과 이에 따른 사랑이야기라니 관심이 가네요. 슬픈짐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 ^^

coolcat329 2021-04-25 17:46   좋아요 4 | URL
네~~사랑이아기를 통일 독일을 배경으로 보여준 점이 이책의 특별함인거 같아요.이 책 두껍지 않은데 천천히 읽게 되는 책이었어요. 문장을 자꾸 곱씹게되고 그래야 이해가 되는거같고...ㅎ
짐승은...책속에 화자가 이런말을 해요. 짐승은 지옥에 안간다고...

얄라알라 2021-04-28 15: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녀는...슬픈 짐승이다.

coolcat님 댓글을 읽고 나니, 아하 ‘ ‘ 작은 따옴표.
소설 속에서 ‘짐승‘ 단어가 자주 나오나봅니다.

저는 늘 소설 읽기에 야박해서 이렇게 소개해주시는 글들로 훌륭한 나침반 삼습니다.

coolcat329 2021-04-28 17:37   좋아요 1 | URL
‘짐승‘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진 않아요.☺
사랑, 특히 문명에 의해 ‘아직 교화되지 않은‘ 청춘의 사랑, 그 사랑을 중년의 나이에 하게된 한 여자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라고 하고 싶네요. 그래서 짐승이라는 이미지와도 통하는게 있어요.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