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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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직한 문화대혁명 시대 시골로 재교육을 받으러 간 두 청년의 이야기를 중국인 특유의 해학과 유머로 유쾌하고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무엇보다 발자크로 대표되는 문학의 힘, 문학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 매혹적이며 부드러운 힘이 사람의 숨결처럼 새어 나오는 듯 하다.

 

얇고 소품같은 책으로 긴 얘기는 하지 않으려 한다. 재미와 감동, 촌스럽지만 이 두 단어로 충분하다.

대신 책 끝에 역자가 인용한 작가 다이 시지에의 말을 옮기고 싶다.(쓸쓸한 어투의...)

 

"생활 수준은 많이 향상되었어요. 그 산골 마을에도 가 보았는데, 이제는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있더군요.(...) 유럽의 고전작품들이 도처에 있지만,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보느라고 책을 거의 읽지 않아요. 우리가 뒤라스, 보르헤스를 발견할 수 있었던 80년대에는 굉장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문학을 사랑하는 마지막 세대였습니다."

 

문화대혁명 때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책은 마오쩌뚱의 <붉은 어록>뿐이었다. 소설 속에서 시골로 재교육 받으러 강제로 내려간 두 지식인 청년은 책을 훔쳐 몰래 읽고 그 중 화자인 나는 발자크 소설의 일부를 양가죽 점퍼 안에 베껴 놓기까지 한다. 

 

작가는 실제로 부르주아 지식인으로 지목돼 문화대혁명 기간에 시골에서 재교육을 받았었고 그 때의 체험을 가슴 속에 간직했다가 글로 썼다. 당시 금서였던 서양의 문학들을 읽고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된 경험은 작가에게 문화적 충격이었다고 한다.

이런 시기를 견뎌낸 중국인들이 이제는 책 대신 텔레비전을 더 좋아하는 현실이 작가로 하여금 이 책을 쓰게 하지 않았나 싶다.

 

책의 매력을 뒤늦게 알게 된 나 또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읽을 책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 그래도 내가 텔레비전 볼 시간에 책을 읽는다는 사실, 모르는게 많기에 앞으로 알게 될 것들이 켜켜히 쌓여 있다는 사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들이 책 속에 있다는 사실이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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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9-20 2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떤 사람은 문혁 시절에 재교육을 받고
이렇게 멋진 문학 작품은 남기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같은 시절의 같은 경험
을 하고, 중화제국의 부활을 꿈꾸고 있
으니 그것 참.

페크pek0501 2020-09-21 14: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의 매력을 알았다는 건 행운을 얻은 것과 같죠.
그러나 읽을 책이 세상엔 너무 많다는 게 저를 슬프게 합니다. ㅋ

coolcat329 2020-09-21 22:56   좋아요 0 | URL
따라주지 않는 체력과 집중력도요...😭
 
가난한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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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이다. 7월에 읽은 책인데 이제야 후기를 쓴다.

가난한 사람의 고통과 슬픔이 주고받는 편지 속에서 절절하게 베어 나오는 이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첫작품으로 당시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가난이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가난에 대한 논문을 써도 될 정도로 가난한 사람의 심리를 매우 인상깊게 보여주는 9급관리 마까르의 편지가 한 때 돈으로 인해 피폐했던 나의 삶도 생각나게 했다. 빈곤함의 정도야 물론 마까르를 따라갈 수는 없겠으나 타인과 비교되는 나의 초라한 모습, 그에 따라 더욱 고개를 쳐드는 알량한 자존심과 주위 시선에 대한 의식, 그럼에도 또 다시 찾아오는 박탈감은 가난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이젠 아무도 저를 존중해 주지 않습니다.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은 정말 무서운 거예요."(p.144)

 

"바렌까, 제 목을 조이는 것은 사람들이에요. 그렇죠? 제 목을 조이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느껴지는 불안감, 사람들의 수군거림, 야릇한 미소, 비웃음입니다." (p.153)

 

마까르는 가난 그 자체도 힘들지만 그 보다 더 힘든건 가난으로 인한 주변의 멸시와 조롱이다. 이런 마까르에게 바르바라는 너무 예민하다며 주위를 의식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는 현실에서 차디찬 모멸감을 숱하게 느끼고  부자들이 자신과 같은 부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가난에 무덤덤할 수가 없다. 늘 주변의 시선에 긴장해야 하고 자존심을 다치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것이다.

 

이런 마까르가 바르바라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녀만이 자신을 존중해주기 때문이다.

"저를 존중해 주시는 당신의 마음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제게 가장 소중하다는 것입니다."(p.123)

 

내가 마까르라는 인물을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은 같은 하숙집에 사는 그야말로 가난해도 이보다 더 가난할 수 없는 극빈자 고르쉬꼬프를 마까르가 도와주는 장면이다. 이 책에서 가난의 냄새가 가장 짙게 베어나오는 부분인데, 바르바라와의 서신 교환을 통해 마까르가 얼마나 가난한지 그 가난이 독자로서도 지긋지긋한데, 이 고르쉬꼬프가 마까르게에 돈을 빌리러 온 것이다! 현실적으로 도와주면 안되는데 지금 본인 앞가림도 힘든 상황인데 마까르는

은화 한닢이라도 간절히 바라는 고르쉬꼬프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빌려준다. 그래봐야 푼돈이지만 그것이 그에겐 전부였다는게 중요하다.

 

"저는 서랍에서 20꼬뻬이까를 꺼내서 그냥 다 주어 버렸습니다. 나의 소중한 이여, 좋은 일 아닙니까! 에이, 빌어먹을 가난 같으니라고! 저는 그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p.179)

 

현실적으로 답답하지만 나는 마까르라는 인물이 더 이상 비루하게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전 재산을 빌려주고 또 그의 가슴 아픈 사연에 귀 기울여주는 마까르가 인간적으로 참 아름답게 보였다.  동정,연민의 감정에 대해 생각하다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시의 동정심이 떠올랐다.

 

"동정심을 갖는다는 것은 타인의 불행을 함께 겪을 뿐 아니라 환희, 고통, 행복, 고민과 같은 다른 모든 감정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감정의 여러 단계 중에서 이것이 가장 최상의 감정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토마시가 테레사를 떠나지 못한 것이 동정심 때문이었는데, 마까르에게도 이 동정심이 저런 행동을 낳은 것인가...그렇다면 동정심이야말로 쿤데라의 말대로 최상의 감정이 아닐까...

 

마까르는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니고 정신적으로 부유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책을 많이 읽어 문학적인 소양이 풍부한 바르바라와 꾸준히 서신을 교환하고 그녀가 추천해 주는 책을 읽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정신적으로 성장해간다.

 

"당신이 제 앞에 나타나면서 당신은 제 어두운 인생을 환하게 비춰 주었고, 제 마음과 영혼에 밝은 빛이 들게 되었던 겁니다. 저는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저도 다른 사람보다 못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저 또한 사람이라는 것을, 가슴도 있고 생각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p.161,162)

 

실제로 그의 편지글은 뒤로 갈수록 문장력이 향상됨을 알 수 있다. 한 예로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한 거지아이를 보고 연민을 느끼며 이렇게 쓴다.

 

"머지않아 더러운 벌레같은 질병이 꿈틀꿈틀 그 아이의 가슴을 파고들테고, 죽음은 어느새 그 아이의 어둠침침한 머리맡까지 와서 기다리겠지요." (p.173)

 

죽음을 의인화하여 표현한 그의 글은 처음에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썼던 그의 문장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자신이 다니는 거리묘사,사람들 바라보며 느낀 생각들, 더 나아가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비교하며 철학적인 사유까지, 어설프지만 자기만의 시선으로 자신만의 생각을 만들어 나가는 그의 발전이 애틋하게 다가온다.

 

"전에 비해 훨씬 나아진 제 문장력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보여 주고 싶어서입니다. 당신도 알아차렸겠지만, 얼마전부터 저의 문체도 좋아지고 있거든요.(p.175)

 

글쓰기와 책읽기 그리고 바르바라와의 우정과 사랑 덕분에 그는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비록 현실은 이들의 고난을 감싸주진 않지만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모습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희망을 본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인간이 인간에게 느끼는 동정과 연민이야 말로 암울한 세상의 빛과 같은 것...

 

"'하느님을 위해서 한 푼 줍쇼' 라는 말을 듣고도 아무것도 안 주고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 괴롭습니다." (p.174)

 

"저는 고르쉬꼬푸를 진심으로 동정합니다. 가여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p.180)

 

"그는 세상에서 버림받아 갈 곳이 없는 사람입니다. 보호가 필요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제가 그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p.181)

 

읽을 때마다 가슴을 적시는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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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9-13 1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죄와 벌을 읽고 천재라고 생각한 작가예요.
슬프고 처참하고 연민을 자아내는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많죠.

coolcat329 2020-09-13 19:39   좋아요 1 | URL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는 그런 인물들이 늘 나오나봐요. 다음에는 <죄와 벌>을 읽을 계획이에요. 댓글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0-09-18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이기 도끼 선생의 데뷔작이지
싶은데...

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읽고
나서 도끼 샘의 책들을 닐거 보겠다
작정만 하고서는... 뭐 그런 거죠.

coolcat329 2020-09-18 20:52   좋아요 0 | URL
네 첫작품 맞아요. 일단 도쿠가와를 끝내셔야 할 듯요 ㅎㅎ. 화이팅입니다!
 
깊은 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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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작가로 유명한 엔도 슈사쿠의 책을 7월에 처음으로 읽었다. 읽은 지 거의 두 달이 다 되어가 다시 책을 꺼내 살펴보니 참으로 줄을 많이 쳐놨다. 평생을 신과 구원에 대해 고민했던 작가의 마지막 소설이다.

 

종교는 진리는 찾아가도록 길을 인도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선 인간의 삶에 대한 여러가지 질문에 대답해야 할 의무가 종교에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종교는 답을 찾으려는 노력보다는 미리 답을 정해놓고 그 답에 무조건 복종하라고 하는 듯 하다.

어찌보면 종교도 주입식 교육이니 스스로에게 질문할 기회가 없음은 당연하다.

 

이 소설에는 카톨릭 신부인 오쓰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는 신부가 되기위해 프랑스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있지만 그의 믿음에는'이단적인 구석'이 있다는 이유로  그곳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신의 사랑은 너무나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서양 중심적이라 일본인인 오쓰는 그 사상에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결여되 있음을 느낀다. 그가 느끼는 신은 유럽의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생명'처럼 그 어디에나 있는 존재이다. 

 

"신이란 당신들처럼 인간 밖에 있어 우러러보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 안에 있으며, 더구나 인간을 감싸고 수목을 감싸고 화초도 감싸는 저 거대한 생명입니다." (p.177)

 

"신은 다양한 얼굴을 갖고 계십니다. 유럽의 교회나 채플뿐만 아니라, 유대교도에게도 불교도에게도 힌두교도에게도 신은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p.182)

 

"저는 오히려 신은 여러 개의 얼굴을 갖고 계시며 각각의  종교에도 숨어 계신다고 생각하는 편이 진정한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p.184)

 

오쓰는 프랑스의 성직자 앞에서 이런 말들을 쏟아낸다. 기독교만이 절대라고 믿는 서양 성직자의 도도함 앞에서 그의 이런 발언은 '순종의 덕'이 부족한 이단적인 것이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며 생각하는 오쓰에게서 나는 진정한 종교인의 모습을 보았다. 예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며 자신의 종교를 기독교 안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곳에서 실현하고 구하고자 한 그의 정신과 행동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소설에는 각기 사연이 다른 4명의 인물이 나온다. 이들은 인도 단체 여행을 통해 만나게 되는데, 무슨 사연으로 인도라는 나라를 찾게 됐는지, 이들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인도를 배경으로 번갈아가며나온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강', 정확히 힌두교도들이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찾아오는 성스러운 장소인 갠지스 강은 신의 손길처럼 한없이 자애롭고 더 이상의 차별이 없는 모두를 구원으로 이끄는 어머니와 같은 강이다. 우리 인간에게 어머니의 마음으로 감싸주고 받아주는 그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은 굉장한 위안이고 어찌보면 진정한 종교의 역할이기도 할텐데, 교리와 원칙의 노예가 된 종교는 인간에게 진리로 가는 길의 안내자가 될 수 없음을 이 책은 보여준다.

 

책 속에서 오쓰가 자주 읽는 <마하트마 간디 어록집>에 나오는 말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친다.

 

"다양한 종교가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동일한 지점에 모이고 통하는 다양한 길이다. 똑같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한, 우리가 제각기 상이한 길을 더듬어 간들 상관없지 않은가." (p.287)

 

우리는 같은 목적지(진리)를 향해 가는 모두가 가련하고 애틋한 사람들인데 왜 길이 다르다고 서로를 죽이고 미워하며 등 돌리는가...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신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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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9-18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이 엔도 슈샤쿠 선생이 돌아가실
적에 무덤에 넣어 달라고 했던 두 권
책 중의 하나가 아닌가요...

이번에 문지에서 엔도 슈샤쿠 선생의
<바보>가 출간되어 도서관에서 빌려
다 놓긴 하였으나 그놈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때문에 당최 책을 못잡고
있네요.

뭐든 그 시리즈부터 다 읽고 난 다음에...

coolcat329 2020-09-18 20:54   좋아요 1 | URL
네 이 책과 침묵 같이 묻어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도쿠가와 화이팅!
 
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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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서머셋 몸이 '인물보다 이야기를 출발점으로 삼아 쓴 소설'이라고 한다. 그만큼 이야기의 전개가 재미있고 몰입도가 높다. 누군가 민음사 세계문학 중 재미있는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그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나는 주저없이 이 책을 고를 것이다.

 

주인공 키티는 남편의 지위(정부 세균학자)가 자신을 돋보이게 해주지 않는 현실, 무엇보다 사랑없는 지루한 결혼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자신의 욕망을 자극하는 매력남 찰스와 불륜관계에 빠진다.

이야기는 이 둘의 불륜 현장에서 키티가 어떤 인기척을 느끼며 깜짝 놀라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첫 장면, 첫 문장부터 흥미진진하다.

 

그녀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p.15)

 

모든 불륜이 그렇듯 남편 월터가 알게 되고 매력넘치던 불륜남은 역시나 본색을 드러낸다. 월터는 자신을 배신한 키티에 대한 복수로 콜레라가 창궐한 중국 오지마을에 책임자로 자원한다. 만약 키티가 따라가지 않겠다면 불륜으로 고소를 하겠다는 월터의 협박에  키티도 함께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야기는 오색의 베일 painted veil 처럼 다채롭게 전개된다.

 

허영으로 가득찬 키티라는 여인이 남편에게 불륜을 들키고 질병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낯선 오지에 가서 다양한 인간의 삶을 체험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어리석고 부끄러운 삶을 살았는지 깨닫는다는게 이 소설의 간략한 줄거리이다.

 

키티는 월터가 자기를 사랑했기에 스스로를 경멸한다는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건 부당해요. 내가 어리석고 경박하고 천박하다고 해서 날 비난하는 건 공평하지 않아요. 난 그렇게 자랐어요. 내가 아는 모든 여자들은 다 그래요. (...)난 그냥 예쁘고 명랑해요. 장터 노점에서 진주 목걸이나 담비 외투를 찾지 마요." (p.182)

 

사실이다. 키티는 이런 환경에서 자라왔다. 야심많고 엄격한 그녀의 엄마는 출세에 대한 의지가 없는 하급 변호사인 남편을 경멸한다. 그러나 자신의 성공이 오직 남편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에 그를 출세시키기 위해 '가차없이 들볶는다'. 이런 엄마를 보며 자란 딸들은 아버지를 '수입의 원천 이외에 다른 존재로는 여기지' 않는다. 아버지의 존재란 가족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해주는 수단일 뿐 그 이상은 아닌 것이다.

또한 엄마인 가스틴 부인은 자신의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딸들을 좋은 곳에 시집 보냄으로써 보상받으려 한다. 특히 두 딸 중 더 아름답고 매력적인 키티에게 '타산적인 애정'을 쏟았으니 키티가 이렇게 자란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서머셋 몸은 남편의 성공을 통해서만 자아실현을 하려는 당시의 여자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했던것 같다.

<달과 6펜스>에서도 남자만 바라보는 독립적이지 못한 여자들을 안좋게 생각하는 그의 생각이 드러났던게 언뜻 기억난다.

 

역병의 한 가운데서 이성을 잃지 않고 죽어가는 병사들과 고아들을 돌보는 수녀들을 보며 키티는 무한한 경외심과 알 수 없는, 그러나 자신에게는 없는 무언가를 느낀다. 호기심으로 갔던 수녀원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키티는 수녀들이 남편인 월터를 존경하고 높이 평가함을 알게 되고 그동안 월터를 경멸했던 자신을 경멸스러워한다.

 

키티의 깨달음과 반성. 그리고 월터의 용서. 낯선 오지에서 둘의 사랑을 확인하고 다시 홍콩으로 돌아와 잘 살길 바라며 책장을 비교적 빠르게 넘겼는데...

삶의 의미, 진정한 의미의 통찰은 이렇게 쉽고 단순하게 오는게 아니라고 서머셋 몸은 보여준다.

 

마지막 영국으로 돌아와 엄마는 돌아가시고 홀로 남은 아버지와 만나 나누는 대화는 매우 감동적이다. 어머니와 딸들의 욕망의 수단으로 집안에서 그 존재감이 미미했던 아버지, 그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며 자신에게 과거의 잘못을 보상할 기회를 달라고 다시 한번 사랑할 기회를 달라고 눈물로 호소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는 말, "전 희망과 용기가 있어요." (p.329)

 

첫 장면에서 자신의 불륜 현장이 들켰을까봐 조마조마 하며 깜짝 놀라던 그녀가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깨닫고 희망과 용기를 가진 새로운 강인한 여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은 참으로 기분좋은 결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결말이 유치하지 않고 억지스럽지 않은 건 바로 서머셋 몸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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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8-30 1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머싯 몸의 광팬입니다. 그의 책을 거의 다 읽었어요. 이것도 흥미롭게 읽었어요.
한 여성의 변신이 전혀 억지스럽지 않죠.
인간이 변하기가 어려운 것도 맞지만 얼마든지 변한 모습으로 새 삶을 살 수도 있다고 봐요.

coolcat329 2020-08-30 17:41   좋아요 1 | URL
서머싯 몸의 광팬이신줄 몰랐네요. 앞으로 서머싯 몸하면 페크님 생각나겠어요.☺<면도날>도 가지고 있는데, 더 기대가 됩니다.^^

페크pek0501 2020-08-30 18:03   좋아요 1 | URL
면도날도 재밌게 읽었습니당~~ 즐거운 독서가 되시길 바랍니다. ^^

초딩 2020-09-05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베일을 읽으며, 안나 카레리나의 키티는 레빈과 참 밝았는데.. 라는 생각을 했어요.
베일은 잘 읽히고 잼있었고, 6펜스도 그림이야기라 좋았어요 ㅎㅎ
책들로 추억 돋는 중입니다~

coolcat329 2020-09-06 13:47   좋아요 1 | URL
그러고 보니 레빈과 월터가 진지하고 성실한 면에서 많이 비슷하네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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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뵐의 작품을 지난 달 처음으로 읽었다. 1917년 독일 쾰른에서 태어난 그는 1951년 '47그룹 문학상'을 비롯 197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다.

이 작품은 아주 예전에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 당시 내가 꽤나 이 작품에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이 청춘의 독서를 생각하면 바로 이 카타리나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1974년 2월 24일, 한 일간지 기자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살인범은 바로 27세의 평범한 여성 카타리나 블룸. 그녀는 스스로 경찰을 찾아가 자신의 범행을 자백한다. 생활력 강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신뢰받던 그녀가 왜 이런 살인을 저질렀는지, 이 작품은 살인이 일어나기 5일 전으로 돌아가 그녀의 행적을 재구성하여 그 정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사건의 결말을 미리 알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추적해 나가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다.

 

이 작품은 진실을 알려야 할 언론과 시민의 안전을 위해 존재하는 공권력이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한 인간에게 어떤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성실한 여인 카타리나 불룸은 댄스파티에서 범죄 용의자와 춤을 추고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하루 아침에 '살인범의 약혼녀', '창녀', '살인범의 정부', '음탕한 공산주의자', '테러리스트의 공조자'가 된다. 

통속적이고 선정적인 일간지 <차이퉁> 기자 퇴트게스는 어떠한 혐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룸을 용의자와 공범으로 몰아가기 위해 처음부터 그녀를 용의자의 정부로 단정, 추측성 기사를 써 여론몰이를 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녀의 사생활을 부정적으로 폭로, 한 인간의 삶을 파괴한다. 이 과정에서 그녀가 이혼녀라는 점, 그녀의 부모와 오빠의 바르지 못한 행동 등도 기사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이런 보도에 그녀를 좋아했던 이웃들도 다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블룸은 직장은 커녕 모든 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수사 과정에서 남용되는 경찰의 공권력도 매우 폭력적이다. 수사과장 바이츠메네는 불룸에게 "그 자가 너랑 붙어먹었지?" (p.21) 라고 묻는다. 성적인 면에서 지나치게 예민하고 결벽증이 있는 그녀를 자극하여 수치심을 느끼게 함으로써 자백을 받아내려는 언어 폭력이다.

경찰은 블룸을 범죄자로 단정하고 수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기 위해 그녀의 인권은 무시한채 수많은 유도심문과 폭력적인 심문을 한다.

 

작가는 이 작품이 '소설'이 아니라 '이야기'라고 말한다.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허구(fiction)에 있을텐데 이 작품은 '세상사와 무관하게 생산된 텍스트가 아니라는 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쓰여진 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책의 맨 앞에서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낸 것'이라 말함으로써 현실과 어떠한 유사점이 있다하더라도 그건 우연임을 강조한다.

현실에 바탕을 둔 이야기이지만 '꾸며낸 것'이라는 그의 말은 작품해설에서 나와 있듯이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할 것에 대비한 발언이겠지만 그만큼 이 작품이 현실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작가 하인리히 뵐은 '전통적이고 고답적인 독일 작가의 이미지'가 아닌 '독일의 죄의식'을 작품화한 작가라고 해설에서 말한다. 그가 살던 당시 독일의 사회 현실 문제에 늘 양심있는 작가의 목소리를 냈던 그의 이 작품 역시 사회가 한 인간에게 가하는, 언론과 공권력으로 대표되는 폭력을 다루고 있다. 실제 사건을 소재로 가상의 인물과 언론사를 통해 보여주는 그의 글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효력이 있다. 늘 언론의 주목을 받는 유명인들, 언론 폭력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했던 이들을 우리는 많이 봐왔다. 또한 익산 약촌 오거리 사건과 같이 공권력을 앞세운 경찰의 강압수사에 굴복, 허위 자백을 하게 해 무고한 한 인간을 옥고를 치르게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이 안 나지만 얼마나 이런 일들이 많겠는가! 그런 고통을 당한 무고한 사람들을 생각하니 그동안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에 반응한 나의 저급한 취향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보고서를 읽는 듯하여 소설이 주는 재미는 크게 못 느꼈지만 꾸며낸 이야기를 통해 감춰진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사회의 부당한 폭력을 비판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작가로서 의무를 다한 하인리히 뵐은 훌륭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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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8-25 1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주문해서 오늘 받습니다. ㅋ
내용을 대충 알기에 더 기대됩니다.

coolcat329 2020-08-25 13:39   좋아요 0 | URL
네~이 책은 내용을 알기에 더 기대되더라구요. 즐거운 독서 되시길요!☺

2020-08-25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olcat329 2020-08-25 18:57   좋아요 1 | URL
저도 미룬 책이 참 많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즐거운 독서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