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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디 프로젝트 - 로더릭 맥레이 사건 문서
그레임 맥레이 버넷 지음, 조영학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월
평점 :
2016년 맨부커 상 최종후보까지 올라갔던 스코틀랜드 작가의 작품.
내가 이 책을 읽은 첫 번째 이유는 스코틀랜드 작가의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같은 영국이지만 내가 책 속에서 자주 접했던 잉글랜드와는 또 다른 분위기가 있을 것 같아 호기심이 일었다. 내가 생각하는 스코틀랜드는 일단 위스키가 유명하고 따라서 술을 많이 마시고 보수적이며 타지인들에게 텃새도 심할거 같은, 일반적인 유럽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유럽 대륙과는 떨어져 있는 섬나라 영국의 북부 시골에서 벌어지는 살인과 그에 대한 기록. 안 끌릴 수가 없었다.
1869년 스코틀랜드 북부 총 9가구가 사는 작고 가난한 마을 컬두이에서 가족 3명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범인은 17살 소년 로더릭 맥레이. 범인은 도망가지 않고 순순히 잡혀 자신이 범인이라고 시인을 하고 재판을 받게 된다.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이다.
이 책은 마을 사람들의 진술, 범인인 로더릭 맥레이의 해명, 부검보고서, 의사의 진단문, 재판기록으로 구성 되어있다. 마치 소설가가 상상력으로 쓴 글 같지가 않고 그저 있는 사실을 기록한 글 같아 읽으면서 '이게 정말 실화인가, 어디까지가 사실이지?'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읽게 된다.
책 뒷표지에 "하나의 살인 사건, 서로 다른 기록들" 이라는 문구가 나중에 뭔가 대단한 반전이나 진실이 드러날 것 같은 인상을 주기에 잔뜩 긴장하면서 읽었다. 17살 소년이 확실히 3가족을 살해했고 또 자신이 죽였다고 인정하면서 시작하기 때문에 반전이라고 기대할게 없는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흐름에 긴장감과 흡입력이 있어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내려놓기 힘들다.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19세기 스코클랜드 소작농의 생활상과 함께 당시 사회상, 사법 제도 등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생활해 나가야 하는 하층민들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다. 지배자들에게 부당한 착취와 억압을 당함에도 그에 맞서 저항도 못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소작농들의 삶. 소설 속 로더릭의 살인은 이런 배경 속에서 일어난다.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살아가고자 했던 소년. 그러나 비참한 현실 앞에서 로더릭의 모습은 무기력하고 결국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이 소설은 범인을 잡기 위해 추리하고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가다가 막판 반전이 있는 그런 범죄소설이 아니다. 이 작품은 '범죄 소설이 아니라 범죄에 대한 소설'이라는 역자 후기가 나온다. 범인은 처음부터 밝혀지기 때문에 누가 범인 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왜 범죄를 저질렀는가'이며 '범인을 비롯해 등장하는 사람 중 누구의 말이 진실인가' 이다. 왜 죽였는가...표면적으로 드러난 답은 지배층의 부당한 횡포에 가족을 지키기 위해 우발적으로 일어난 범죄이다. 그러나 꼼꼼하게 기록들을 읽어보면 '혹시나'하는 의심과 함께 무엇이 진실인지 고민하게 된다.
역자는 맨부커상 위원회가 이 작품을 후보작으로 선정한 이유도 이 작품에서 장르소설 이상의 가치를 보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다른 범죄소설처럼 사건의 명확한 진실은 알 수 없다. 등장인물들의 진술과 진단, 범인의 고백을 통해서만 각자가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처음 만나는 작가의 작품이었지만 색다른 소설형식으로 독서의 즐거움을 준 소설이었다. 자칫 심심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기록의 형식으로 이토록 긴장감 있게 끌고 나갈 수 있다니 작가의 앞으로의 작품도 많이 기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