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빨간 구두가 인상적인 소설.
발자크를 또 만났다
나귀가죽 실패한 이후 애써 피했고 피하려고 했었고 피하고 있는데 또 만났다.
피하려고 애쓰면 쓸수록 어디에선가 불쑥 등장하는 발자크.
작년에는 <사라진느>라는 단편소설집을 만나야만 했고 올해는 일단 이름과 작품으로 먼저 만나게 되었다
이 정도면 발자크를 읽어야 되는 운명인가? 아직 나는 발자크를 만날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는 책을 훔쳐야만 볼 수 있는 사람들이야기. 보여주는 책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야기이다.
책을 훔쳐야만 책을 볼 수 있는 이야기는 문학에서 자주 다루고 있는 소재이다.
나치 시절에 책을 태우고 있는 속에서 책을 훔쳐 달아나는 소녀 리젤이 기억에 남아있는 마커스 주삭의 <책도둑>도 책을 훔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책을 훔쳐서라도 봐야하는 사람들..
이 작품은 중국의 문화대혁명시절 하늘긴꼬리닭이라는 시골로 재교육 온 두 청년과 그들이 사랑하는 한 처녀가 그 당시 금지되어 있는 세계문학을 만나게 되면서 겪는 사건들을 유쾌하게 풀어가고 있다. 문화대혁명시절 마오쩌둥은 모든 서양의 문화를 금지시킨 듯 하다. 마르크스는 발자크의 작품을 좋아한 것으로 아는데.. 왜 마오쩌둥은 발자크를 싫어했을까? 발자크는 몰락하는 부르조아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린 작가로 유명한데... 마오쩌둥이 마르크스는 아니니까..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공산주의로 가는 그런 과정은 아닌 듯하니..
왜 발자크지? 하는 의문이 들었는데.. 작가의 해설을 통해 마르크스의 발자크에 대한 에피소드를 읽고 아~ 그렇구나.. 그래서 발자크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는 발자크부터 시작해서 로맹 롤랑. 뒤마. 위고. 플로베르등.. 익숙한 작가들. 익숙한 작품들- 그러나 제대로 읽어 보지 못한 작품들-이 등장한다
통제된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금기된 것을 접한다는 것은 두렵기도 하지만 매혹적이기도 하다.
모르면 모를까 약간이라도 그 맛을 본 경우라면 그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 금기를 저지를 것이다.
책속의 화자와 뤄가 그랬듯이..
그러나 조금이라도 알고 있던 것을 접하는 것과 아예 모르던 것을 접했을 때의 느낌은 완전 다를 것이다.
바느질하는 소녀가 만난 발자크.,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은 그녀의 인생을 바꿔버렸으니..
누가 그런 두메산골 시골에 사는 여자가 담봇짐을 싸서 마을을 떠나리라 생각을 했을까..
바느질하는 소녀의 인생은 발자크를 알기전과 알고 난 후로 나누어질 것이고 아마 보바리 부인을 읽기전과 읽은 후로 나누어질지도 모른다. 발자크의 작품덕분에 여자의 아름다움은 비할 데 없을 만큼 값진 보물이라는 걸... (p252) 알게 되고 보바리부인을 보면서 저렇게는 살기 싫어라는 마음을 가지게 했을지도 모른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소녀>는 책이라는 것이 가지는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이다. 아니 일반적인 책보다는 문학이 가지는 힘을 이야기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지루하고 재미없을 지도 모르지만 또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문학.
그것도 소위 우리가 고전이라고 말하는 문학들.
문학이 가지고 있는 힘은 분명히 있다. 비록 문학이 모든 것을 담고 있을 수도 없고 해결책을 쥐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동시대뿐만 아니라 지나온 시대을 되 돌아 보면서 작가가 또는 책 자체가 독자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있다. 독자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은 그 자리에 있고 스스로를 이야기하지만 그 작품을 읽는 독자와 적절한 시점에서 만났을 때 주는 그 울림은 분명히 있다. 그 울림을 나의 울림으로 만들것인지는 책 읽는 사람의 선택이다. 작품과 독자의 공명이 이루어 질 때에 만 문학은 그 힘을 가지는 듯하다.
오늘 도서관에 구입해야할 책이야기를 하던 중에 장하성교수의 《왜 분노해야 하는가》를 언급되었다. 사지 말자는 의견이 나와 그 이유를 물었더니 어려울 것 같다는 것. 그리고 과연 이용객들이 이 책에 대한 수요가 있을지가 의문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책을 빌려가는 목록을 보면 우리의 생각과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
실제로 도서관에서 어렵다고 생각되는 과연 이런 책을 누가?라고 생각되는 책들.. 촘스키나 한나 아렌트등.. 작은 도서관에서 보기 힘든 책들은 실제 대여빈도수가 생각보다 높고 문학- 베스트셀러등 가볍게 읽을수 있는 문학을 제외한- 의 대여는 거의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 중 가장 대여횟수가 놓고 문의가 많은 책들은 소위 자기 계발서인 경우가 많다. 이지성씨의 책이라든지. 작년 핫했던 채사장의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얇은 지식>과 같은 자기계발서나 힐링서..
자주 회자되고 시험에 한번이라도 언급된 작품들은 빌려가지만 그 외의 문학작품들은 바람한번 안 쐬어본 책들이 안타깝게도 상당히 있다는 것이다.
우리 도서관은 작은 도서관치고는 어지간한 문학전집들을 구비해놓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아마 생각보다 더 잘 볼 수 있어. 요즘 핫한 책이기도 하고 문학책보다는 더 잘 대여될지도 몰라~ 라고 말하고 구입하기로 하기는 했는데..
이렇게 말해서 구입했는데 아무도 안보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도 살짝.. 책값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더 신중했어야 했나? 하고 생각도 하지만
더 씁쓸하게 한 것은 나의 이 말에 더 이상의 반론은 없었다는 것이었다. 맞아요.. 애들이 소설책은 안 봐요. ㅠㅠ
보는 사람만 보는 문학이 되어버린 건가. 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웃픈 말 “죄송해요 문사철이어서...”가 생각난다. 그중 문학은 더 죄송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다시 책 속으로 들어가서
뤄에게는 발자크가. - 바느질하는 소녀에게 발자크를 읽혀 계몽하고픈 욕망을 드러낼 정도로.. 이 둘은 발자크를 계기로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니 인생의 책이 아닐까? 책 속의 화자인 나는 로맹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 1권. - 찾아보니 여러권이었다- 이 답답하던 생활에 자유와 낭만의 바람을 불어넣어 잊고 있었던 인간의 감성을 찾게 해주었으니 인생의 책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바느질하는 중국소녀의 인생의 책이 보바리부인이었듯이 과연 나에게 인생의 책은 무엇일까..
삶의 터닝포인트를 만들어주었던 책..
- 아직 청춘의 혼돈 상태에 빠져 있는 열 아홉의 숫총각이 애국주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운동에 관한 혁명적 장광설밖에 모른다고 생각해보라. 그런데 그 작은 책은 칩입자처럼 나에게 욕망과 열정과 충동과 사랑에 눈을 뜨라고 말하면서, 그때까지 고지식한 벙어리에 지나지 않던 내게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p 80~81) -
표지의 빨간 구두는 안데르센의 분홍신에 나오는 카렌을 연상시킨다. 금기로 되었있는 빨간 구두를 신고 교회를 간 카렌. 그녀에게는 발이 잘리는 벌이 내려지지만 비록 발이 잘리더라도 빨간 구두를 신어야만 하는 그 절박함과 욕망은 억누를 수 없을 것이다. 춤을 춰야하기 때문에.. 작품속의 바느질하는 소녀는 빨간 구두를 신고 자신의 마을을 떠나지는 않지만 발자크를 읽고 플로베르를 읽었다는 것으로 마음속으로 신었다고 볼수 있지 않을까? 정신세계마저 통제하고픈 그 당시에 자신의 욕망을 위해 마을을 떠나는 소녀는 이름도 갖지 못한채 책 속에서는 살았지만 떠난 이후는 자신의 이름을 가졌을거라는 생각을 한다. 뤄처럼.
빨간 구두라는 가져서는 안 되는 욕망을 품고서 도시에 나가 바느질하면서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살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힘을 가져야 가능하고 이 소녀는 그럴 힘이 충분히 있어 보인다.
보지도 못한 브래지어를 글로 배워 만들 정도라면 충분한 힘이 되지 않을까..
창의력과 응용력.. 그리고 스킬까지..
이래서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고 하는 걸까?
그럼 더 위험해지자 !!
이 정도로는 택도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