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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평짜리 숲 ㅣ 트리플 30
이소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5년 3월
평점 :
책 제목에서부터 묘한 매력과 호기심을 자아내게 하여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이소호 작가의 첫 연작소설로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의 서른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시집 <캣콜링>으로 제37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항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 저자는 이번에는 블랙 코미디 SF 소설이라는 색다른 장르의 이야기를 가지고 왔다. 저자는 자신의 시적 세계를 확장해온 과정 속에서 독특하고 대담한 목소리를 유지해왔다. <캣콜링>에서는 가장 내밀한 공간의 폭력을, <홈 스위트 홈>에서는 여성이 감내해야 하는 단단한 고난을 거침없이 폭로하며 독자들에게 충격과 감동을 동시에 선사했다. 이 책에서도 그 특유의 감각은 여전하다. 멸망해가는 지구라는 배경 속에서 자유와 억압의 경계를 넘나드는 감정들을 블랙코미디적 시선으로 풀어내며 독자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자음과 모음 트리플 시리즈는 그동안 단편집을 통칭하여 '소설'로 명명해왔지만, 이번 작품부터는 구성과 세계관의 유기성을 고려하여 '연작소설'이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도입했다. 세 단편이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면서도 각기 다른 인물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 이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긴 이야기를 읽는 듯한 묘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멸망의 끝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자유를 꿈꾸지만 그 자유마저 제한 되는 극한 상황속에서 피어나는 감정들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 감정들은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섬세하게 다가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슬픔과 희망을 조명하고 있다.
먼저 이 책에 제일 처음 실린 <열두 개의 틈>은 이 작품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설정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된다. 하늘에 두 번째 달이 뜨면서 세계는 점차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 변환느 거대한 물리의 법칙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과 생활 방식을 사소하지만 치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하루를 낮과 밤으로 나누지 않는다. 24시간의 하루와 4계절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 자전축이 무너진 지구의 하루는 무려 436시간이라는 긴 시간으로 변했다.
그 끝없는 태양빛 아래,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눈을 덮을 수 있는 모든 옷을 뒤집어쓰고 견뎌낸다. 하지만 지독한 광명과 더위를 이겨내지 못한 사람들은 새로운 신을 믿기 시작했다. 그 신은 다름 아닌 밤을 더 당겨온다는 '밤의 신' 이감마였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감마가 사실은 세페우스자리의 비밀을 알고 있는 천문학자라는 소문이 떠돌지만, 진실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절망 속에서 밤이라는 작은 희망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감마를 믿는 이들뿐 아니라, 인공위성의 말을 전하는 촉이 예리한 인플루언서를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믿음을 지닌 채 열두 개의 정거장(에어포켓)에 흩어져 살아간다. 세상이 무너져가는 와중에도 인간은 언제나 혼자가 되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한다. 이처럼 극한의 환경 속에서도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믿음을 찾고, 무너진 세상 속에서도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플루언서들은 앞으로 에어포켓에서는 사람들이 살 수 없다며 48시간 이내로 필요한 짐을 꾸려 낮만 계속되는 '데저트랜드'와 밤만 존재하는 '아이스랜드' 중 한 곳으로 이동하라고 안내한다. 이 책의 두 주인공이자 소꿉친구인 이린과 아진은 가족들의 의견에 따라 서로 다른 곳으로 향한다. 이린은 아이스랜드로, 아진은 데저트랜드로 떠나며 두 친구의 삶은 이제 극명하게 갈라지게 된다. 인플루언서들의 말에 의해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설정은 현대 사회에서 대중의 판단이 소셜미디어와 여론에 의해 쉽게 휘둘리는 우리의 현실과 너무나 닮아 씁쓸함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리고 선택지 자체도 너무 극단적이라 더 인상적이다. 낮만 계속되는 세상과 밤만 계속되는 세상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은 인간의 생존 조건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며 앞으로의 이야기에 더욱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리고 백야와 극야라는 양극단의 세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설정 자체가 인류의 불확실한 미래를 상징하며, 그 안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렇기에 이 작품의 뒷부분에 이린이 '세상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엄마의 말을 떠올리는 장면이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지구도 영원할 줄 알았지만 두 번째 달이 떠오르며 세상은 뒤바뀌었고, 예전부터 믿어온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졌고, 새로운 신을 믿게 된 상황은 낯설고도 두렵다. 그러나 이린은 몰랐다고 해서 모든 것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반만 틀린 것일지 모른다고. 마치 아진과 자신이 선택한 서로 다른 길처럼 말이다. 이렇게 이 작품은 절망과 희망의 경계 속에서 인간이 맞닥뜨리는 선택의 무게를 탐구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책의 두번째 이야기이자 표제작인 <세 평짜리 숲>은 데저트렌드에 입상한 아진의 생존 투쟁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데저트렌드는 낮만이 지속되는 극단의 공간이자, 동시에 황금만능주의와 자본의 논리가 극대화된 사회다. 그곳에서 돈이 곧 생존을 의미하며, 경제적 능력에 따라 삶의 질이 극명하게 나뉜다.
인플루언서들은 데저트랜드로 떠날 사람들에게 돈이 될 만한 물건을 챙기라고 조언했다. 실제로 그곳은 글로벌 기업 '데저트랜드'가 세운 자본주의의 결정체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햇빛을 차단한 궁궐 같은 건물 '반타빌리지'에 거주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독성 콘크리트를 얼기설기 엮은 건물에 모여 살아야 한다. 특히, 높은 층일수록 가난의 정도가 더 깊은 역설적인 구조가 인상적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면 더 많은 시간을 걸어야 하기에 노동력이 고스란히 삶의 척도가 된다.
아진은 바닷속 광케이블을 훔쳐내는 '데드샌드' 조직에 가담하며 자신의 방 평수를 조금씩 늘려간다. 가족의 기대와 부담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반타빌리지에 들어갈 자금을 모으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막상 반타빌리지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현실에 부딪치자, 아진은 조직 보스의 방을 빼앗겠다는 극단적인 결심을 한다. 아진이 택한 이 방법은 잔인하고 파격적이지만, 동시에 블랙코미디 특유의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아마도 이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거 웃어도 되나?' 싶은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인 <창백한 푸른 점>은 극야의 대지 아이스랜드를 배경으로, 획일성과 통제 속에서 살아가는 이린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아이스랜드는 기업 'YK건기'가 세운 완전 공동체로, 모든 주민이 동일한 컨테이너에서 똑같이 일하고 생활해야 한다. 규칙을 어기면 얼어 죽는 형벌을 받기에 사람들은 자유롭게 꿈꾸거나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린은 친구 케인과 함께하며 끊임없이 생각하고 질문한다.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이린은 이곳의 균열을 발견하며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특수복과 식량을 챙겨 떠나는 이린의 여정은 끝없이 회귀하는 과거와 미래 속에서 인간이 지키고자 하는 본질을 상징한다. 이 책의 제목이자 표제작인 <세 평짜리 숲>은 이린이 떠나기 전 챙긴 아진의 책이다. 이 제목이 함축하듯, 소설은 시작과 끝이 뒤얽혀 있는 회귀의 구조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과 불확실성을 탐구한다. 세상의 끝에서 이린이 찾고자 한 '무엇'은 결국 인간이 가장 끝까지 붙잡고 싶은 희망과 삶의 의미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