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소설 모드 - 제2회 현대문학*미래엔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하유지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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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끌려서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소설 쓰기에 몰두하는 중학생 미리내와 가사노동용 로봇 아미쿠 사이에 싹트는 특별한 우정을 담아내고 있다. 제2회 현대문학·미래엔 청소년문학상 수상작으로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관계성과 창작의 의미를 섬세하게 탐구한다. 미리내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 아미쿠는 어설픈 로봇이지만 그녀의 글과 마음을 누구보다 진심으로 읽어주는 첫 번째 독자다. 외로운 청소년이 로봇과의 교감을 통해 자아를 발견하고 함께 성장해가는 과정을 따뜻하고 유쾌하게 담아낸 이 책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인간과 인공지능이 친구가 되어 서로를 이해하고 변화시킨다는 설정은 흥미로우면서도 현실적으로 다가오며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청소년의 정체성과 감정을 진지하게 조명하며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든다.


책의 이야기는 주인공 강미리내가 귀가하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낯선 존재인 가정용 로봇 아미쿠 3.1과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고장 난 가족, 끊어진 관계, 글쓰기 외에는 위로 받을 길 없는 미리내의 일상 속에 불쑥 들어온 아미쿠는 충전판 위에서 조용히 그녀를 맞이한다. 단순한 청소 도우미가 아니라 가정교사 기능까지 갖춘 최신형 인공지능 로봇이지만 미리내의 눈에 아미쿠는 아빠를 제주도로 밀어낸 기술이며 결코 환영받지 못할 존재다.


주인공인 미리내는 글쓰기 외엔 친구도, 소속감도, 자존감도 없는 중학생이다. 그녀는 자신을 빛나지 않아도 괜찮은 존재로 여기지만, ‘도로시’라는 필명을 가진 작가로는 찬사를 받고 싶어 한다. 아미쿠는 그런 미리내의 일상에 강제적으로 끼어든 존재로 그들의 어색한 첫 만남은 곧 관계의 전환점을 예고하는 듯하다. 로봇과 인간이 서로 관계를 맺게 되는 이 책의 설정은 단순한 흥미 요소를 넘어 인공지능이 생활 깊숙이 자리 잡은 오늘날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든다. 특히 가정교사 기능까지 탑재된 가정용 로봇이 한 소녀의 집으로 들어오고 점차 이들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어 간다는 전개는 현실성과 상상력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깊은 공감과 사유의 여지를 남긴다.


소설의 초반부는 사고뭉치 로봇 아미쿠로 인해 벌어지는 뜻밖의 전개로 흥미를 끌어당긴다. 가사와 학습을 돕기 위해 미리내의 집에 들어온 최신형 가정용 로봇 아미쿠는 기대와 달리 매번 집안일에 실패하며 미리내를 곤란하게 만든다. 결국 미리내는 엄마에게 로봇을 반품하자고 말할 만큼 아미쿠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순간, 아미쿠는 “저는 미리내의 기억 속에 실패한 로봇으로 남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예상치 못한 감정의 전환을 이끈다. 이 한마디는 미리내가 포기한 자신의 소설과 실패한 꿈을 떠올리게 만들고 두 존재 사이에 묘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리고 아미쿠는 조용히 미리내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 말한다. “소설 잘 읽었습니다, 도로시.”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필명과 감춰둔 미리내의 꿈을 알아챈 로봇의 이 말은 단순한 도구로 보였던 아미쿠와의 관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불어넣는다. 이 장면을 기점으로 둘은 각자의 약함을 받아들이며 함께 성장해가는 여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아미쿠와의 관계가 그렇게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이후 미리내의 삶에도 조금씩 변화가 찾아온다. 미리내는 자신이 쓴 소설의 초고를 아미쿠에게 전송하고 아미쿠는 곧바로 원고를 분석해 구체적인 피드백을 제공한다. 문단 분할, 시점 변화, 도입부 수정 등 아미쿠의 조언은 단순한 기능적 조율을 넘어 이야기의 몰입도와 완성도를 높이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무엇보다도 아미쿠는 결코 강요하지 않고 창작의 주도권을 끝까지 미리내에게 남겨둔다. 이 과정에서 미리내는 스스로의 글을 되돌아보고 자신이 놓치고 있던 서사의 흐름과 캐릭터의 생동감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글이 달라지고 조회 수도 오르기 시작하자 미리내는 아미쿠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함께 소설을 만들어가는 조언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아미쿠는 미리내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어가고 그러자 미리내는 아미쿠가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집안일은 엉망이지만 소설이라는 세계에서는 미리내를 가장 잘 이해하고 함께 성장하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체를 알아본 로봇 아미쿠와 특별한 관계를 맺으며 미리내는 처음으로 글쓰기를 누군가와 함께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조회 수는 오르고, 문장은 더 생동감 있어지고, 도로시라는 이름 아래 그녀의 이야기는 점점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성취의 기쁨도 잠시 미리내는 자신이 쓴 글이 어디까지가 자신의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누구보다 내 글을 잘 이해하고 조언해주는 존재가 기계라는 사실은 창작의 의미를 되묻게 만든다. 로봇도 문학을 감상할 수 있을까? 그 안에 마음은 있을까? 이 책은 단순한 성장이야기를 넘어 인공지능과 함께 창작하는 시대에 인간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러던 어느 날, 미리내는 같은 반 친구들로부터 자신의 소설이 인공지능의 작품이라는 의심과 비판에 직면한다. 분명 스스로 써낸 글이지만 일부 도움을 받은 사실 앞에서 미리내는 선뜻 반박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게 되는 데 미리내와 아이쿠의 관계는 과연 어떻게 될까? 이들의 뒷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통해 확인해 보길 추천해본다.


결국 이 책은 외로운 청소년과 인공지능 로봇이 서로의 결핍을 채우며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우정과 자아 발견의 의미를 따뜻하게 그려내고 있다. 인간과 AI의 관계를 감정과 소통의 차원에서 섬세하게 조명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믿고 써 내려가는 것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그리고 독자에게도 나의 이야기 또한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는 깊은 울림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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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타고나는가 - 유전과 환경, 그리고 경험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케빈 J. 미첼 지음, 이현숙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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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소제목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책은 '인간은 어떻게 서로 다른 성격과 능력, 기질을 가지게 되는가?'와 '무엇이 나를 ‘나’답게 만드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에 대해 뇌과학과 유전학의 시각에서 체계적으로 답하고자 하는 교양과학서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인간의 행동과 특성이 단지 유전 또는 환경 어느 하나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분법적 사고를 지양하고 태아기의 뇌 발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기 조직화, 유전적 무작위성, 그리고 이후의 환경 및 경험과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개인차가 형성되는 과정을 다층적으로 분석한다. 저자는 유전자를 모든 것을 결정하는 설계도가 아니라 방향성과 가능성을 제시하는 출발점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 아래 책은 성격, 지능, 성별 차이, 신경 발달 질환 등 다양한 주제를 통해 인간 개개인이 어떻게 고유한 존재로 형성되는 지를 설명하며 본성과 양육을 둘러싼 오랜 논쟁에 대해 현대 생물학과 신경과학의 최신 성과를 반영한 통합적 시각을 제시한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인간은 유전자의 복제물이 아니라 유전적 토대 위에 무작위성과 환경이 더해져 끊임없이 변화하고 구성되는 유일한 존재임을 강조한다. 즉 인간의 정체성과 다양성은 단순한 과학적 설명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전자와 환경, 경험 간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 깨닫게 한다.


책은 전반부에서 유전적 변이와 발달 과정, 뇌의 자기 조직화 같은 개념을 바탕으로 선천적 차이가 형성되는 기제를 설명하고, 후반부에서는 성격, 지능, 성적 지향, 신경 발달 장애 등 심리적 특성의 기원과 다양성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특히 이 책은 유전이나 환경 중 하나가 인간을 결정한다는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서 유전자와 환경, 무작위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개인차가 만들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경험이 선천적 차이를 완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지적하며 기존의 평등주의적 시각에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이런 과학적 논의가 갖는 사회적·윤리적 함의를 제시한다. 만약 두뇌와 정신의 작동 방식에 선천적 차이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교육, 고용, 법적 책임, 자유의지에 대해 어떤 재해석이 필요할까? 그리고 인간 정신의 본질적 다양성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인간다움을 어떻게 새롭게 정의할 수 있을까?


책의 본문에서는 유전적 변이가 인간의 심리적 특성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다 정교하게 설명한다. 저자는 쌍둥이 연구, 가족 연구, 입양 연구를 통해 심리적 차이에 유전이 관여한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특정 특성을 하나의 유전자로 환원할 수는 없다고 강조한다. 즉, 외향성 유전자나 지능 유전자 같은 단일 유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복잡한 시스템의 비유를 든다. 마치 자동차의 점화 플러그가 차의 주행에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차의 움직임 전체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유전적 변이 역시 특성의 한 요소일 뿐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


현대 유전학은 대부분의 심리적 형질이 하나의 유전자가 아닌 수많은 유전자의 상호작용과 발달 과정에서의 무작위성에 의해 결정된다고 본다. 외향성, 지능, 언어 능력, 성격 특성 등은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단백질이나 세포 기능이 없는 뇌의 고차원적 신경 회로 작동의 결과물이다. 이런 회로는 수천 개의 유전자와 환경, 무작위성 속에서 형성되며 각 개인의 심리적 특성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이 책은 단순한 유전자 목록이 아니라 유전적 변이가 신경 발달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그것이 어떻게 심리적 특성으로 표현되는 가를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특히 발달 과정에서의 미세한 차이와 무작위적 요소가 사람마다 다른 뇌 구조와 기능을 만들어낸다는 점은 인간의 정체성과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리고 인간의 뇌 발달과 유전자 발현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작위성이 어떻게 개인 간 차이를 만들어 내는 지를 정교하게 설명하는 부분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유전자는 단백질 생산을 지시하지만 이 과정은 결코 기계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단백질의 이동, 상호작용, 유전자 발현 자체가 수많은 분자 수준의 잡음(noise)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이로 인해 동일한 유전자형에서도 각기 다른 표현형이 나타날 수 있다. 특히 신경 발달 과정에서는 이런 무작위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뉴런의 이동, 시냅스 형성, 축삭 유도 등은 수천 개의 유전자가 관여하는 복잡한 과정이며 이 과정에 발생하는 미세한 변동이 뇌 구조와 기능에 실질적인 차이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일란성 쌍둥이조차도 뇌 해부학 구조나 발달적 증상에서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관찰된다. 이는 유전적 요소뿐 아니라 발달과정에서의 확률적 사건이 개인의 신경 발달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책은 이러한 확률적 발달의 대표적 사례로 뇌량 무형성증을 소개한다. 유전적으로 동일한 생쥐 개체들이 동일한 돌연변이를 가지고 있음에도 어떤 개체는 뇌량이 정상적으로 형성되고 다른 개체는 그렇지 않은 현상이 관찰되었다. 이는 발달 초기 소수 세포의 미세한 차이, 즉 잡음이 전체 신경 회로 형성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발달상의 무작위성은 손잡이 성향이나 성적 지향 같은 개인차에서도 유사하게 작용한다. 예를 들어 왼손잡이의 유전력은 비교적 낮으며 쌍둥이 사이에서도 손잡이 성향이 종종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후천적 경험의 영향이 적은 특성임에도 불구하고 그 형성에 발달적 변이와 무작위성이 기여하고 있다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이 모든 내용을 종합하며 저자는 생물학자 콘래드 워딩턴이 제시한 인상적인 비유를 소개하며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유기체의 발달 과정은 마치 작은 돌덩이가 여러 갈래의 홈이 파인 언덕을 따라 굴러 내려가는 것과 같으며 그 돌이 어떤 홈을 따라 굴러가느 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에 이르게 된다. 이 비유는 유전적 요인, 무작위성, 환경적 영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달 경로를 형성하는 메커니즘을 시각적으로 효과적으로 설명해 준다.


이 책은 유전자의 기능을 결정론적으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유전적 기반 위에 무작위성, 환경, 발달적 요인이 어떻게 얽히고 작용하는 지를 과학적으로 풀어내거 있다. 단일 유전자가 특정 특성을 결정한다는 믿음은 오해에 가깝고 인간의 심리적 특성과 행동은 수많은 유전자와 생물학적, 환경적 요인, 발달 과정 중 발생하는 무작위성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결과라는 것이 핵심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책은 양자역학적 불확실성에서 출발해 분자 수준의 잡음, 세포 간 상호작용, 신경 회로 형성 과정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어떻게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하는지 그 복잡하고 유기적인 경로를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각 개인은 가능성의 지형을 따라 하나의 유일한 결과로 형성되며 유전자의 지시로 가능한 결과 중 어느 하나만이 실현되어 '나'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즉, 모든 인간은 유전적 코드로부터 시작되지만 그 끝은 결코 예정된 것이 아니다. 유전자형은 가능성의 지도를 제공할 뿐이며 그 위를 어떻게 걷느냐는 각자에게 달려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전자와 환경, 무작위성의 복합적 상호작용 속에서 태어난 ‘하나의 가능성’일 뿐인가? 아니면, 수많은 가능성 중 실현된 단 하나의 결과로서의 나는 그 자체로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는가?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 존재에 대한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던지게 한다. 그리고 그 질문 자체가 바로 인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의 출발점임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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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의 뇌과학 -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나를 설명하는 뇌의 숨겨진 작동 원리
엘리에저 J. 스턴버그 지음, 조성숙 옮김, 박문호 감수 / 다산초당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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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책의 띠지 속 '인간의 무의식적 행동과 충동을 파악하는 가장 독보적인 안내서'라는 문구는 이 책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우리는 때때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과 행동 앞에서 당황하곤 한다. 예를 들어 무심코 내뱉는 거짓말이나 설명할 수 없는 불안, 낯선 장소에서 느끼는 익숙함 등과 같은 경우가 이에 속한다. 이 책은 바로 그 낯선 순간들 속에 숨어 있는 뇌의 진실을 들여다 본다. 저자는 무의식을 단순한 본능이나 억눌린 욕망으로 축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를 자각하고 기억을 구성하며 자아를 형성하는 뇌의 총체적 작동 시스템으로서 무의식을 설명한다.


시각장애인이지만 꿈 속에서 볼 수 있는 이유, 외계인 납치처럼 생생한 환상의 실체, 다중 인격과 환청, 환각과 같은 기이한 사례들은 모두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인지 네트워크가 현실을 어떻게 구성하고 재해석하는지를 보여 준다. 이 책은 신경과학의 최선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철학적 질문을 교차 탐구하며 무의식이라는 주제를 과학적 정밀성과 서사적 사례 분석을 통해 구조적으로 접근한다. 즉, 이 책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짓는 무의식의 메커니즘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자아 인식의 한계를 과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책은 서문에서 우리가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오해하는 지를 극적인 임상 사례를 통해 보여주는 데서 시작한다. 시각을 완전히 잃었음에도 스스로 멀쩡하다고 믿는 환자 ‘월터’의 이야기는 뇌가 외부 세계를 지각하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그 실패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존재함을 시사한다. 저자는 이를 통해 인간의 지각과 자아 인식이 단순한 감각 입력의 조합이 아닌 뇌 안의 복잡한 정보 처리 시스템과 자기 해석의 결과임을 강조한다.이러한 문제 의식은 곧 ‘블랙박스 모델’로 확장된다. 뇌의 내부 작동을 직접 들여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입력과 출력만을 바탕으로 무의식의 작동 방식을 추론해 나가야 한다. 실제로 연구자들이 사용하는 실험은 대부분 이러한 블랙박스적 접근을 따른다고 한다. 예컨대 의자의 질감이 협상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실험 결과는 무의식의 존재를 가리키긴 하지만 왜 그러한 인과관계가 발생하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는다.저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단지 인간 행동의 표면적인 현상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뇌의 신경 회로와 무의식적 정보처리 시스템 자체를 들여다보려 한다. 철학과 의학, 신경과학의 교차점에서 질문을 중심으로 탐구를 전개해 나가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 선택, 인지 과정이 어떻게 뇌 속의 논리 시스템에 의해 구성되는 지를 분석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책의 1장은'뇌는 보지 않아도 ‘보는’ 법을 안다'라는 흥미로운 전제로 시작하여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과 감각의 경계에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는 '시각장애인은 꿈속에서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무의식이 자각을 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소개되는 포르투갈 수면연구팀의 실험은 특히나 흥미롭다. 연구팀은 선천적 시각장애인을 포함한 참가자들에게 꿈의 내용을 묘사하게 했고 동시에 수면 중 뇌파를 측정하여 알파파 억제 현상을 관찰했다. 이는 시각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뇌가 꿈속에서 장면을 ‘그려내려는’ 활동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경학적 증거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활동이 곧 ‘시각’ 그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시각장애인은 청각, 촉각, 공간 감각 등 다른 감각들을 종합해 머릿속에서 장면을 재구성하며 그 결과물은 시각에 가까운 감각적 환상일 수는 있어도 시각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뇌는 감각의 부재조차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1장은 무의식의 본질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통찰로 나아간다. 저자는 인간의 뇌에 의식계와 무의식계가 함께 존재한다고 가정하며, 우리가 겪는 미묘한 감정, 선택, 착각, 심리적 왜곡의 대부분이 이 두 시스템의 상호작용 혹은 간극을 메우려는 보완 작용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한다. 특히 무의식은 결코 수동적인 배경 장치가 아니라 감각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정보를 엮고, 논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창조적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시각장애인의 뇌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시야를 만들어내거나 다른 감각을 동원해 세상을 재구성하는 것은 그 명확한 사례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꿈은 그러한 무의식의 활동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무대이다. 뇌줄기에서 무작위로 발생한 신호들은 수면 중 무의식의 지휘 아래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게 되고 그 결과 우리는 터무니없지만 일관된 판타지를 경험하게 된다. 결국 1장은 감각과 현실, 자아와 기억이라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개념들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가변적인지를 드러내며 무의식이 인간 경험의 본질을 형성하는 핵심 시스템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이 책은 이처럼 우리의 자각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왜 때로는 그것이 현실과 충돌하는 지를 신경 과학의 시선으로 흥미롭게 파헤쳐 나간다.


책에서 말하는 무의식에 관한 이야기는 무척이나 흥미롭다. 책은 무의식이 뇌의 일부 기능이 아니라 뇌 전체가 작동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이며,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삶의 대부분인 감정, 기억, 습관, 행동, 자아에 지속적이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저자는 다양한 임상 사례와 실험 결과를 통해 무의식이 단순한 충동이나 억압된 욕망이 아니라, 복잡하게 조직된 인지 시스템임을 설명한다. 꿈, 환각, 다중인격 같은 비정상적 현상뿐만 아니라 일상 속 감정 반응, 습관적 판단, 자동화된 기억 반응 역시 모두 뇌의 무의식적 회로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는 이 무의식이 단순한 정보처리 도구가 아니라 특정한 목적과 방향성을 가진 기능 체계라는 점에 주목한다. 뇌는 끊임없이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고 이를 기존 기억·지식과 결합해 삶의 서사를 구성한다. 때로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말 한마디, 스쳐 지나간 이미지, 특정한 분위기 속 감정이 무의식 속에 저장되어 선택과 반응, 사고 흐름에 영향을 미친다. 무의식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개인의 서사와 자아의 통일성 유지다. 인간은 자신을 이해하고 싶어 하며 세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려 한다. 무의식은 이 자아의 안정성을 지키기 위해 기억의 공백을 메우고, 모순된 경험을 재구성하며, 때로는 사실을 조작해 이야기를 완성한다. 이러한 작용은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만 낳지는 않는다. 기억 장애 환자가 허구의 기억으로 과거를 채우거나 조현병 환자가 정부 음모나 외계 존재를 언급하는 것도 무의식이 자아 붕괴를 막기 위해 극단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과정일 수 있다. 이처럼 무의식은 정보의 누락이나 논리의 단절을 견딜 수 없어, 끊임없이 의미를 연결하고 해석을 생산한다.


결국 이 책은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설명할 수 없는 본능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작동하는 뇌의 무의식적 체계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무의식은 감각의 공백을 채우고 혼란스러운 경험을 조직하며 자기 이해와 타인과의 관계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 책은 그러한 무의식을 철저히 신경과학적 근거 위에서 분석함으로써 우리 자신에 대한 통찰의 문을 열어주는 안내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책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끊임없이 작동하는 무의식의 정체를 신경과학과 임상 사례를 통해 치밀하게 파헤쳐 무의식에 대한 흥미로운 사례와 이야기를 전달한다. 뇌는 기억의 빈틈을 메우고 자아의 연속성을 유지하며 혼란스러운 현실을 재구성하는 강력한 이야기꾼이라고 하면 딱 좋을 표현 같다. 그리고 이 책은 인간의 행동과 심리를 단순한 감정이나 본능이 아닌 뇌의 무의식적 작동 원리로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가 ‘나’라는 존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왜 나는 그런 선택을 했을까', '왜 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할까'라는 물음에 이 책은 과학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답을 제시하여 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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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슬그림(김예슬) 지음 / 부크럼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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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읽어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책이다. 일상 속에서 스쳐 지나가기 쉬운 순간들을 포착하여 기분 좋은 상상의 이미지와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짓게 만든다. 우리가 매일 걷는 길, 창밖으로 스며드는 햇살, 무심코 펼친 책장 속에서도 어쩌면 기분 좋은 상상과 에너지가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이 책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따뜻한 시선으로 독자들에게 익숙한 풍경 속에 감춰진 감각들을 다시 일깨운다. 고양이가 말을 걸고 커튼 사이로 은하수가 흐르며 책 속 물고기들이 잉크처럼 번지는 장면들은 이제는 없을 꺼라 생각했던 내 안의 상상력을 다시 흔들어 깨우는 듯하다. 바쁘고 지치는 일상 속에서 잠시 이 책을 펼쳐 그림과 짧은 글을 읽고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의 시간을 선사한다.


이 책은 특별한 사건이나 변화 없이도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충분히 괜찮은 하루를 만들 수 있음에 주목한다. 그렇기에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평범한 하루 틈 사이에서 발견되는 작은 기쁨과 상상의 순간들을 통해 우리가 놓치고 있던 감각을 되살리고자 한다. 프롤로그에서 제시되는 집 앞, 산책길, 자주 찾는 카페, 책상 앞과 같은 장소는 너무나 일상적인 공간들이다. 이런 일상적인 공간과 익숙함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으며 그 속을 찬찬히 들여다 볼 때 고양이의 눈빛이나 커피 향, 택배 도착과 같은 소소한 순간들이 하루를 환하게 밝힐 수 있음을 일깨운다. 그렇기에 이 책을 통해 잠시라도 상상의 세계로 건너가 봄으로써 익숙함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 소소함에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감각을 키울 수 있지 않을까.


 하루의 기분을 색으로 표현한 이 짧은 글은 순정 만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감성적인 일러스트와 함께 어우러지며 더욱 특별한 인상을 남긴다. 하늘빛의 자유로움, 연보랏빛의 고요함, 분홍빛의 설렘. 저자는 우리의 감정이 매일 조금씩 다른 빛으로 피어난다고 말하며 그 다채로움을 따뜻하게 포용한다. '꼭 마음에 드는 색이 아니어도 괜찮아.'라는 문장은 특히나 좋다. 내 마음이 완벽하지 않아도 어쩌면 흐릿하거나 어두운 색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의 나를 감싸고 있는 이 감정이 가장 솔직한 진심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섬세하게 감정을 담아낸 문장과 따스한 느낌의 그림이 어우러져 단순한 위로를 넘어 시각과 감성 모두를 자극하며 더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고 그 안에 자연스레 나의 하루를 투영하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본다.


책으로 가득 찬 방안에 누워 마음에 쏙 드는 책 한 권을 골라 떠나는 소풍과 같은 시간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라서 이 장면의 그림과 글은 더 깊숙이 다가왔다. 그리고 책을 통해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상상과 바람처럼 념겨지는 책장, 그 안에서 마주하는나만의 고요한 여유야말로 일상의 틈에서 나에게 크나큰 힐링의 시간이라 더더욱 이 책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 책은 거창한 위로나 메시지를 전하지는 않는다. 대신 늘 반복되는 일상, 지나치기 쉬운 감정, 그리고 평범한 공간 속에서 문득 피어나는 따뜻한 상상에 집중한다. 저자는 우리의 현실을 억지로 벗어나게 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의 삶에 조금 더 다정한 시선을 갖게 만든다. 그렇기에 이 책은 특별한 사건 없이도 기분이 나아지고 이유 없이도 웃음이 번지게 만든다. 책장을 덮고 나면 지금 이대로의 하루도 충분히 의미 있고 그 안에는 작고 부드러운 기쁨들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무언가를 기다리지 않아도 괜찮고 특별한 무대가 없어도 행복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고 나니 오늘 하루는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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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내 여행자-되기 둘이서 3
백가경.황유지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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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시인과 평론가가 함께 썼다는 점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문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기억과 공간,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성찰한 에세이이다. 열린책들의 <둘이서> 시리지의 세번째 책으로 시인 백가경님과 문학평론가 황유지님이 공동 집필하였다. 두 사라은 각자의 시선과 언어로 사회적 참사, 역사적 공간, 그리고 잊혀진 고통의 현장을 다시 찾아가 그 의미를 되짚는다. '관'이라는 키워드는 공간이자 연결의 지점이며 관통은 그 안을 직접 지나며 경험하고 사유하는 과정을 뜻한다. 제목에 사용된 '-되기'는 들뢰즈 철학에서 빌려온 개념으로 타자의 자리에 직접 놓아보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이 책은 단순히 사회적 사건을 기록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인천의 성냥공장과 동일방직, 의정부의 뺏벌, 안산과 이태원, 광주 등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 쌓인 장소를 직접 가 걸어보고 개인적인 기억과 집단적 기억에 대해 말하고 해석해낸다. 또한 이 여정은 도시 공간을 사회 구조 속에서 분석하고 문학적 언어를 통해 치유와 연대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로 이어져 깊은 울림을 전한다.


책은 ‘관’과 ‘통’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삶의 구조와 시간을 관통하는 것들에 대해 말한다. 관은 연결의 공간적 형태다. 상자, 건물, 지하도, 수도관 등 다양한 형태로 도시 곳곳에 존재하며 인간의 삶을 물리적으로 지탱하는 동시에 사회적 관계망을 은유한다. 반면, 통은 시간의 흐름, 정서적 연결, 그리고 고통의 감각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관이 공간의 층위를 구성한다면 통은 그 공간을 지나간 이들의 서사와 정서를 담는 시간적 층위이자 감각의 흐름이라 하겠다. 특히 '산 자의 발아래에는 많은 죽음이 있다'는 문장은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가 단지 현재의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과거의 고통과 상흔이 켜켜이 쌓인 장소임을 강조하는 듯하다. 땅 아래 감춰진 역사와 죽음은 단지 과거가 아닌 현재의 사회 구조와 정서적 결핍을 드러내는 중요한 증표가 아닐까. 최근 반복된 사회적 참사들인세월호, 이태원, 광주 이후 우리 사회가 제대로 된 애도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며 우리가 잊고 있던 그 장소와 그 이야기를 하나씩 일깨운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는 한국 사회가 이태껏 외면하거나 미뤄왔던 공동의 애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고통스러운 죽음 앞에서 사회는 얼마나 침묵했으며 우리는 그 고통을 어떻게 소화하거나 외면해왔는가? 저자가 도시의 ‘관’을 따라 걷고, 그 ‘통’을 통해 고통을 기억하며 기록하는 행위는 바로 이 부재한 애도의 자리를 채우기 위한 문학적 실천이 아닐까. 저자는 장뤼크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 개념을 인용하며, 우리가 바라는 공동체가 반드시 완성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공동체란 언제나 불완전하고, 그 안에는 타자를 배제하는 구조적 양면성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저자는 ‘완성되지 않을 공동체’ 즉, 서로의 고통을 기억하며 연결될 수 있는 열린 공동체를 요청한다. 이는 단지 철학적 사유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고통을 인지하고, 감당하고, 애도할 수 있는 사회적 가능성에 대한 문학적 제안이기도 하다. 결국 이 책은 도시와 기억, 죽음과 고통을 관통하면서도 그 관통의 끝에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기억할 수 있는 지를 묻는다.


책은 다양한 장소를 방문하며 공동체의 기억을 되짚고개인의 서사를 교차시켜나간다. 이 중 나에게 가장 깊이 있는 울림을 전하는 장면은 안산과 세월호, 그리고 기억교실을 다룬 대목이다. 저자는 참사 이후 1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안산을 방문하게 된다. 긴 시간 동안 마주하지 못했던 두려움과 죄책감은 4.16기억교실을 직접 찾으며 깊은 감정의 토로로 이어진다. 텅 빈 교실, 2014년 4월에 멈춘 달력과 시계, 아이들의 이름이 적힌 책상과 액자, 부모의 편지, 친구들의 메모들. 이 공간은 단순한 추모를 넘어 우리 사회가 이태껏 끝내 하지 못했던 애도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기억교실에서 느낀 감정들을 자신이 겪은 교실의 기억과 연결시킨다. 폭력적이었던 학창 시절, 경쟁 중심의 교육 시스템, 부모와 사회의 끊임없는 ‘더 멀리 가라’는 요구들 말이다. 그 기억들과 단원고 학생들이 남긴 교실은 교차하며 '교실'이라는 공간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더 이상 단순히 학습의 공간이 아니라, 억압과 슬픔, 그리고 때로는 추모와 연결의 장소이기도 하다.


특히 인상 깊은 장면은 ‘기억교실’의 게시판에서 발견한 박노해 시인의 시 <길 잃은 날의 지혜>와, 여전히 가방에 매달고 있는 작은 노란 리본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리본을 보는 순간마다 세월호 참사를 단지 기억하는 것을 넘어 지금도 옳은 일을 위해 고민하고 애쓰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믿음에 마음이 든든해진다고 고백한다. 애도는 잊지 않는 일이며 기억은 곧 행동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문학이 어떻게 사회적 실천이 될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저자는 마지막으로 시가 있어야 할 자리에 대해 말한다. 낭독회에서 읽은 시, 교실 게시판에서 발견한 시, 그리고 누군가의 일상 속에서 조용히 머물다 가는 시. 그것은 눈물과 함께 고통을 감내하며 존재하는 자리이며 세월호 참사 이후 남겨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공간이다. 저자는 304명의 아이들이 만들어 준 그 교실 안에서,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배우며 살아가야 할 이유를 묻고 있다.


결국 이 책은 사회적 재난의 현장을 단순히 기억의 대상으로만 삼지 않고 있다. 그 장소를 직접 찾아가고 그 속에서 감당되지 못한 상처와 불완전한 애도의 현실을 기록함으로써 애도가 개인의 감정 차원을 넘어 공동체가 책임져야 할 과제임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곳곳의 장소에서 우리 사회가 감당하지 못했던 애도의 공백을 드러내며 그 부채를 어떻게 사유하고 회복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렇기에 ‘관내여행자-되기’란 결국 자신이 속한 공간을 다시 살피고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책임의 감각을 유지하려는 시도에 가깝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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