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해방은 곧 인민혁명이야. 해방은 곧 새 역사의 시작을의미하고, 그 시작은 인민혁명을 통한 새 나라의 건설부터네. 그런데자넨 시대역행적으로 케케묵은 민족이나 찾고 있지 않느냔 말야." "그렇게 속단하지마세요. 민족이라고 하니까 핏줄만을 중시해서 어중이떠중이 다 싸잡아서 말하는 민족인 줄 압니까? 현시점에서 친일반역세력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어요. - P112
그런 민족개념이라면 내가 경솔했네. 그러나, 자넨 현실을 제대로 모르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훼방꾼은 미국일 뿐인데, 미국이아무리 훼방을 놀려고 해도 그건 헛고생이네. 친일반역자들을 빼놓고는 모두가 혁명세력이고, 거기다 또 쏘련이 있는데 미국이 무슨 수로 힘을 쓴단 말인가." - P112
"과연 그럴까요? 내가 두 가지 사실만 지적해 볼게요. 첫째는 신탁통치 결의고, 둘째는 미군정이 조선인민공화국을 부인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탁통치라는 건 미국이 혼자서 결정한 일입니까? 그건엄연히 쏘련이 두 개의 제국주의국가와 나란히 앉아 작당하고 야합해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장소까지 모스크바에서 우리나라를 먹이로 놓고, 제국주의자들과 서로 이익을 분배하고 있는 쏘련의 처사가 과연 옳은 것입니까? 그런 쏘련이 어찌 우리 편일 수 있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자네가 상상할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쏘련의전략전술이야." - P113
"예,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행동통제를받지 않는 포로로 특별취급을 받으며 수용소에서 내가 한 일이 뭔지 압니까? 미쏘의 세계전략에 관한 책들과 논평들을 읽는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얻어진 것은, 미국은 제국주의적 팽창주의고, 쏘련은 그에 못지않은 공산주의적 패권주의라는 사실입니다. 그 두개의 어마어마하게 큰발에 짓밟히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땅과 우리 민족입니다. 이런 상황을 직시할 때 우리가 거기서 벗어날 수있는 방법은 우리끼리 이념대립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단합아래 하나로 뭉치는 거라는 내 나름의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겁니다. 이게 헛소립니까?" - P114
왜 이 여자는 나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일까. 정하섭은 이느낌을 물음으로 바꿀 수는 없었다. 흐린 달빛이 어려 있는 소화의고운 얼굴은 신비스럽게 아름다워 보였고, 희디흰 갈꽃의 흔들림같은 그녀의 슬픈 눈은 그의 가슴 한복판에 모닥불을 지피고 있었다. 그의 식은 욕구는 새로운 충동으로 불붙어올랐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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