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육적 탐욕과 도덕적 정의와 종교적 열심이 한데 어우러진 바로 그때의 기괴한 청량리역 광장이 내 내면 풍경이었다. 그때 나는 키르케고르(Saren Kierkegaard)와 이 책 「공포와 전율」(Firygt og Beeven, 문예출판사 역간)을 생각했다. 왜? - P182
흔히 ‘의심의 해석학‘으로 칼 마르크스, 지그문트프로이트, 프리드리히 니체를 꼽지만, - P183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인간은 세 가지 모습을지니고 있다. 하나는 아름다움의 모색이고, 다른 하나는 정의의 추구이고, 마지막은 신에게로의 귀의다. 이 셋은 일직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레벨 1을 통과해서 2를 거쳐 마침내 마지막에 도달하는 여정이아니다. 한데 뒤섞여 있지도 않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으로, 윤리는윤리로, 신앙은 신앙으로 각기 존재한다. - P185
그래서 윤리적 삶을 살수록 자신에게 절망하고, 타인에게는 엄격해진다. 잘라 말하자. 윤리는 삶의 기본이고 근간이지만, 인간을 결코 구원하지 못한다. - P187
아브라함이 요구한 것도 아니고, 기대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 당신이 먼저 다가오셔서 말씀하셨다. 이삭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과 약속과 상반된 현실에 직면한 것이다. 그렇다. "믿음은 사유가그만두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78쪽)한다. 신앙은 사유의 부정이면서도 그것이 지닌 한계를 다른 방식으로 훌쩍 뛰어넘는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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