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죽음‘, 두 자만 볼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겁쟁이가되었다. 죽음보다 무서운 것은 없으며, 죽음만큼 인생을 고달프고 서럽게 만드는 것도 없다. 대학 시절, 마르크스에게 매료되었으면서도키르케고르, 도스토옙스키, 카뮈 같은 실존주의에 함빡 빠져들고, 지금도 그 언저리를 서성거리는 까닭은 ‘죽음‘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아예 인간을 죽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하지 않았던가. 죽음은 ‘공포와 전율‘이다. - P166
내가 예수를 믿게 된 자초지종을 이따금 성찰해 보면, 아비 없는자식에게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었기 때문이다. - P166
황동규 시인의 연작 시편 「풍장(문학과지성사 펴냄)을 읽은 적이 있다. ‘풍장‘이란 사자(死者)의 시신을 볕이 잘 드는 나무나 바위에 올려놓고비바람과 함께, 세월과 함께 그렇게 소멸하여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장례법이다. - P167
"삶의 유일한 목적은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과제는 무조건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생의 수레바퀴, 300쪽). 성장에는 성공도 없고, 실패도 없다. 자기만큼 배우면 되고, 사랑하고사랑받으면 되는것뿐. - P169
그들에게 이야기할 공간을 열어 주고 들어줌으로써 죽음을 편안히 맞이하도록 도왔다. 1967년 상반기부터 금요일마다 "죽음과 죽어 "이라는, 비공식적이지만 정기적인 세미나를 시작했다. 여기에 신학생은 물론이고 의대생, 말기 환자들까지 참여하였다. - P169
그리하여 정신과 의사인 퀴블러 로스는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 죽음학(thanatology)의 대가, <타임>(Time)지에서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 ‘상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 P169
저자가 정립한죽음의 다섯 단계일 것이다. 부정과 고립의 1단계부터 분노하는 2단계, 협상하는 3단계를 거쳐 우울함에 빠지는 4단계, 마침내 5단계에이르러서야 죽음을 수용하게 된다. 죽어 간다는 것은 저 과정을 거친다는 뜻이고, 죽음이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 P170
부정하는 단계가 반드시나쁘거나 부정적인 현상은 아니다. 건전한 반응일 수 있으며 일종의 ‘완충재 역할‘을 해서 자기 삶을 돌아보도록 돕는다. 주변 사람들이해주어야 할 일은 부정하려는 욕구를 존중하는 것이다. - P170
환자의 분노를 감정적으로 맞대응하면 비극이 시작된다. 반면, "적절한 존중과 이해를 받고, 관심과 시간을 누린 환자들은 곧바로 자신의 목소리를 낮추고 분풀이를 멈춘다"(87쪽). 분노에 대한 공감만이 수치심과 죄책감 없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큰 도움이 된다(290쪽). - P171
이것은 내 운명의 주관자요 주인인 그분과의 협상이다. 이것은 "죽음을 미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138쪽). 그렇다면 왜 이런 협상을 할까? 바로 죄책감 때문이다. "죄책감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의 동반자다"(262쪽). 잘 살아 내지못했다는 때늦은 후회 말이다. - P171
이는 그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는단계이기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라‘와 같은, 용기를 주기 위한 말은 쏠데없다. 오히려 그의 말을 들어주어야 한다. - P171
최종적으로는 수용의 단계에 접어든다. 엘리자베스는 "이 수용의단계를 행복한 상태로 잘못 이해해서는 안 된다"(185쪽)고 주의를 환기한다. - P172
저자는 이를 감정의 공백기"라고 표현한다. 라인홀드 니버 (Reinhold Niebuhr)의 유명한기도문처럼,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가 필요한 때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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