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토요일 저녁이면 내 이웃들처럼 정원사 복장을 했다. 그러나 나는 고장난 잔디깎는 기계를 잔디밭 위에서 끌고 가는 대신, 제멋대로 자라난 화단의 잡초를 뽑는 대신, 위스키가 담긴 커다란 잔 하나를 앞에놓고 손에는 책 한 권을 든 채 베란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여섯 시에서 여덟 시 사이에 내가 한 일이 바로 이것이었고, 그때 폴이 불쑥 찾아왔다. 내가 죄인이고 무시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두 감정은 강도 면에서 거의 비슷했다. - P20
"많이 따분하세요?" 내 허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존재 자체라 할 수 있는 이 기묘한 잡동사니 속에서 사람이 자신이 많이 따분한지 조금 따분한지, 아니면 잘 모르겠는지 알 수 있는 걸까? - P28
나는 신경이 곤두섰다. 삼 분이라는 시간 동안 이 미지의 청년때문에 처음엔 나 자신이 비루하게 느껴지고, 그 다음엔 무용하게 느껴졌다.
사실 그 어리석은 직업이 매달 모았다가 매달 써버리는 몇 푼의 달러가 아닌 그 어느 곳으로 날 데려간단 말인가? 그러나 LSD를 복용하는 무능력한 부랑아에 때문에 이런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분명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종류의 약물에 절대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대개의 경우 그렇듯 사람들이자신의 기호를 뭔가를 경멸하는, 뿐만 아니라 그 기호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경멸하는, 하나의 철학으로 변모시키는 것은 탐탁해하지 않았다 - P29
나는 베티 데이비스(Bette Davis, 1908~1989: 미국의 여배우. 다감하고지성적인 연기로 인정받았다. 〈청춘의 항의〉, 〈소문난 여자〉, 〈이브의 모든 것)등에 출연했다. 옮긴이) 같은 냉소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 P30
내가 이 녀석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을까? 이녀석은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했던 걸까? 사람들은 그런 사랑을 광기라고 부르지만, 내게는 언제나 그것이 사랑의 유일한 분별 있는 형태로 여겨졌다. 이 녀석을 재규어 자동차의 바퀴 아래로 떠민 것은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약물 때문이었을까? 혹은 절망 때문에? - P31
나는 그의 침대 발치에 앉아 있었다. 창을 통해 저녁 공기가흘러들어왔다. 바다 냄새가 실린 공기, 내가 처음 들이마셨던 사십오 년 전부터 지금까지 잔인하다 할 정도로 변함없는, 너무나강렬한 냄새를 풍기는 그 공기가. 나는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이 공기를 기분 좋게 들이마실까? 지나간 해들, 입맞춤들, 남자들의 더운 몸에 대한 향수가 엄습하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 P32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이 질문의 답을 알고 있었다. 삶은 때로 내게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냉혹한 것으로 여겨졌고, 어떤 사랑들은 실제로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마흔다섯 살이 되어 여기에, 내 정원안에,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앉아 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채로. - P36
"말하자면 프랭크는 우쭐해지고 기분이 좋았던 거지. 그리고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 나를 떠났어. 그래서 난 마리 다구(Marie d‘Agoult, 1805 ~ 1876: 프랑스의 문필가, 1848년 혁명 이야기』, 『단테와 괴테』, 『넬리다』 등의 저작을 남겼으며, 프란츠 리스트와의 사이에 세 명의 아이를 두었다. 옮긴이) 처럼 절대로 돌이킬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거야. 무려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말이야. 놀랍니?" - P39
"당신은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당신도 알겠지만, 나는절대 당신을 떠날 수 없을 거예요."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눈을 감고 희미한 목소리로 시집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그의 마음에 들 만한 시집을 찾으러 서재로 갔다. 그것은 우리가 치르는 의식(儀式) 중 하나였다.
나는그를 깨우지 않기 위해 혹은 자극을 주지 않기 위해 월트 휘트먼에 관한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 1898~1936: 스페인의 시인 겸 극작가, 시집 『노래의 책』, 『집시 가집』으로 유명하며, 극작가로서 연극의 보급, 고전극 부활에도 힘썼다. 옮긴이)의 시를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낭송했다.
"하늘에는 인생이 피할 곳이 있고, 육체들은 새벽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 P41
나는 생각했다. 프랭크는 어떤 종류의 용기도 없는 사람이었다. 매력이라면 전부 갖추고 있었지만, 용기라고는 약에 쓰려고해도 없었다. 그리고 내 생각에 자살을 하려면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할 일이 자살밖에 없지만 자살에 성공하지 못한 많은 사람을생각해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 P43
"당신 힘들겠어요." 그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난 그를 오랫동안 사랑했으니까." 그가 짤막하게 말했다. "그는 당신을 떠났어요. 그래서 벌 받은 거죠. 인생은 그런 거나는 반론을 제기했다. "너 유치하구나. 하지만 고맙게도 인생은 너처럼 그렇게 유치하지 않아." "인생은 유치할 수 있어요." - P50
"당신은 당신 생활에 대해 모든 사람에게 설명해요?" 그의 목소리에 경멸의 억양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몹시화가 났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루이스? 나에겐 내 삶이 있고, 친구들이 있어. 그리고 또……… 또 내게 수작을 거는 남자들도있어." 마지막 한마디를 하면서 나는 모욕감이 절정에 달한 나머지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마흔다섯 살이라는 나이에 ! - P57
스크린 속의 그는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크린 속의 그에게는 뭐라고 규정지을 수 없는, 강렬하고 냉혹한, 극도로 사람의마음을 끄는 어떤 것이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그것은나를 불편하게 했다. 스크린 속의 그는 거침없고 놀라운 존재인동시에 낯선 사람이었다. 스크린 속의 그가 일어나고, 벽에 몸을기대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하품을 하고, 미소를 지었다. 마치아무도 없고 자기 혼자 있는 것처럼, 한눈에 보기에도 그는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과연 카메라를 보기는 한 것인지 궁금해질 만큼. - P61
오직 폴 브레트만 스튜디오의 바에서 갑자기 함께 하게 된 점심 식사 자리에서 루이스를어떻게 할 셈이냐고 내게 진지하게 물었다. 그는 조금 야위어 있었고, 그런 모습이 그에게 잘 어울렸다. 그는 이 고장의 사십대남자들이 곧잘 짓는 조금 슬픈 표정을 했고, 그런 그를 보자 세상엔 남자들이 존재하며 연애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나는 그에게 명랑하게 대답했다. - P64
나는 목덜미와 등줄기에 작은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 남자의 손이 목에 닿은 일이 야기할 수 있는 육체적 흥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런 흥분이라면 내가 잘 알고 있지만 그것과는 분명성질이 달랐다. - P71
이런 감미로운 상황이 삼 주 가까이 지속되었다. 아! 사람이삶을 사랑할 때 삶이 발산하는 매력을 나는 결코 제대로 묘사할수 없을 것이다. 낮의 아름다움, 밤의 혼란, 알코올과 쾌락이 선사하는 현기증, 부드러운 바이올린 소리, 일이 가져다주는 흥분, 그리고 건강, 또한 잠이 베개 위에, 죽음의 자세 속에 우리를 다시 묶어두기 전에 각자의 앞에 놓인, 자신에게 주어진 그 모든거대한 낮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생생하게 일깨우는 믿을 수 없는 그 행복을, 나는 하늘에, 신에게, 혹은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해준 내 어머니에게 충분히 감사할 수 없으리라. 모든 것이 내것이었다. - P74
내 안에는불안해하는 어떤 것이 분명 존재했고, 나는 미지의, 병적이지만결정적으로 ‘사실‘ 인 어떤 것을 향해 끌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이 들 때면 나는 몸을 흔들며 웃었고, ‘안녕, 루이스." 하고 말했다. 그도 나에게 답례로 미소를 지었다. - P75
나는 후회가 가득한 마음으로 잠자리에누웠고, 자정쯤에 다시 일어나 그에게 감사와 사과의 편지를 썼다. 몇몇 표현은 너무 달콤해서 지워야 했다. 나는 편지를 그의베개 밑에 넣어둔 뒤 그를 기다리며 오랫동안 깨어 있었다. 그러나 새벽 네 시가 되어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안도와 슬픔이 뒤섞인 마음으로 그에게 마침내 정부가 생긴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 P79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엄연히 네 권리야. 난 그냥 롤스로이스 때문에 기뻤다. 는 것, 그런데 너무 놀란 나머지 너에게 그걸 이해시키지 못했다. 는 걸 말하고 싶었어. 그뿐이야. 아무튼 미안해." 그가 말했다. "나에게 미안해하지 말아요. 절대로요."
(로멘틱해!ㅋㅋㅋ) - P84
1925년형 롤스로이스를 일요일 아침에 세차해보지 않은 사람은 삶의 커다란 기쁨 중하나를 모르는 셈이다. - P86
그러나 제기랄, 나는 때때로 삶과 그 연쇄적인 순환의 고리를 얼마나 증오했는지! 그건 우스꽝스러웠다. 내가 그래왔듯이, 모든 형태의 삶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밑바닥에서부터 삶을 증오할 필요가 있었다. - P87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에 나오는, 고독한 알코올 중독 여주인공과 비슷해 보였으리라. - P89
그가 내 의자에 몸을 기댔고,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내밀었던손을 그의 머리칼 속에 집어넣었다. 그가 머리를 뒤로 젖혀 내무릎 위에 얹었다. 급작스럽고도 강렬한 몸짓이었다. 그는 눈을감고 더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고, 나는 불에 데기라도 한 듯 그의 머리칼에서 손을 다시 거두었다. - P93
장례식은 화려했다. 두 달 동안 제리 볼튼을 합쳐 할리우드의유명인사 두 명이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났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존자가 보내온 헤아릴 수 없는 조화가 그녀의 무덤을 뒤덮었다. 나는 폴 그리고 루이스와 함께 거기에 갔다. 세 번째 장례식이었다. 바로 직전은 볼튼의 장례식이었고, 그 전에는 프랭크의 장례식이었다. 나는 세심하게 손질한 묘지의 산책로를 한 번더 걸었다. 나는 서로 너무나 다르지만 연약하고, 잔혹하고, 탐욕스럽고, 삶에 환멸을 느꼈다는 점에서는 공통분모를 가진 그들 세 사람을 그곳에 묻었다. - P97
"당신과 함께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어요. 당신은 그 살아 있는 대답이니까. 신 그 자신과 함께 신의 존재에 대해 토론할 수 없는 것처럼." 폴이 말했다. - P99
"당신은 …… 당신은 알아야 해요…….. 당신은 선량해요. 사람들은 대개 전혀 선량하지 않죠………. 그래서…… 그래서 그들은 그들 자신에게조차 선량할 수 없는 거예요. 그리고……." - P100
"루이스, 내 사랑...." 그러자 그가 몸을 일으키더니 내 품에 와락 안겼다. 그는 기묘한 오열과 동요에 몸을 떨었다. 그는 반쯤 질식 상태였고, 그런모습을 보자 나는 겁이 났다. 그가 내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내가 들고 있던 커피가 양탄자를 적셨다. - P108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내 얼굴 역시 붉어졌을 것이다. 나는 J., H. 체이스(James Hadley Chase: 영국의 소설가. 미스 블랜디시』, 『새들에게말하라』, 『이브』 등 냉혹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추리소설을 썼다. 옮긴이)의 분위기와 델리(Delly: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큰 인기를 끈 로맨스 소설 작가- 옮긴이)의 분위기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나는 기분이 상했다. - P117
"당신 날 원망해요?" 루이스가 상냥하게 물었다. 나는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자기를 기쁘게 해주려고 사람 세명을 죽인 누군가를 ‘원망‘ 조차 할 수 있겠는가? 그런 표현은내게는 조금 유치하게 느껴졌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니, 곰곰이 생각해보는 척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텅 비어 있었으니까. - P118
갑자기 끔찍이도 외롭고 무섭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는 비밀이, 치명적인 비밀이 있었다. 나는 성격상 절대 비밀 같은 것을 몰래 간직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나는 새벽까지 그렇게 깨어 있었다.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감상적인 내 살인자가 자신의 조그만 침대에서 꽃과 새들의 꿈을 꾸면서 평화롭게 잠을 자고 있을 동안. - P129
나는 그 달콤한 살인자가 아주 좋은 가문 출신이고, 학교 성적도 우수했으며, 그를 고용했던 사람들이 그를 매우좋아했다는 것, 다만 방랑벽과 변화를 좋아하는 기질 때문에 화려한 경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입을 헤벌린 채 두 남자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들었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거라면, 이 청년은 최고의 팜므 파탈인 도로시 시모어의 품안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완벽한 시민이었다. - P159
내가 총애하는 살인자와 함께 느긋한 마음으로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그러나 이런 손쉬운 행복을 손에 넣는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그런 행복은 사람을 속박한다. 행복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상심에서 빠져나오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우리는 최악의 근심거리 한가운데에서 헤엄치고, 몸부림치고, 스스로를 변호하고, 한가지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돌연 행복이 조약돌처럼 혹은반짝이는 햇빛처럼 우리의 이마를 친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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