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은 이리가레에게는 더욱 넓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창조하고 생성하는 힘, "사랑, 욕망, 언어, 예술, 사회적인 것, 정치적인 것, 종교적인 것"을 창조하는 힘이다(Irigaray, 1987:30).
남성은 여성의 이 생성적 힘을 재생산의 문제로 축소시키고, 언어를 통해 남성 신-아버지 - 아들로 이어지는 부계 계보에 창조 능력의 독점권을 부여했다.
따라서 이 남성의 언어와 계보가 여성의 언어와 계보를 대체하지 않도록 어머니와의 육체적 관계, 여성으로서 어머니의 쾌락, 주이상스(Jouissance), 정념을 표현할 언어를 발굴하는 것역시 중요한 과제다. 간단히 말해, 남근적 여성이 아니라여성으로서 여성 주체가 되기 위해 어머니와 딸 사이에, 그리고 여성들 사이에 모계 계보를 발굴하고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 P61
고대 그리스의 신화와 비극은 서양 세계를 구축한 토대이자이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로 여겨진다. 다양한 분야의 이론가들이 서양의 사회와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 신화와 비극에서 원형적 사건을 참조하곤 한다. 가령 오이디푸스의 부친 살해와 어머니와의 근친상간은 정신분석학에서 문명의 시작, 법의 설립, 주체 형성 과정, 부권적 질서의 확립을 나타내는 상징적 사건이다. - P64
이리가레 역시 어머니와 딸의 유대 관계의 원형, 모권적질서와 자연에 대한 존중이 살아 있던 시대에 대한 상상적이고 유토피아적인 묘사, 가부장제 건설의 서사를 제시하는 대목에서 신화와 비극을 불러들인다. 그 가운데서 가장자주 중요한 분석 대상이 되는 것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다. 이 짧은 한 편의 비극은 자연과 문화의 대립, 개인과 공동체, 가족과 국가의 관계, 두 영역 사이에서 분할된여성과 남성의 역할, 여성적 질서에 대한 남성적 질서의 승리, 남성 권력에 대항하는 여성 주체 등 다양한 주제를 품고 있다. 이 때문에 이리가레 외에도 수많은 이론가들이 관심을 가져 왔으며 다채로운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 P64
헤겔이 『안티고네』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 비극에 정신적인 보편성을 가진 인륜 공동체로서 국가와 자연적인 인륜 공동체로서 가족 간의 대립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 두 영역이 조화를 이룰 때 인간 행위는 윤리적존재를 실현하게 된다고 보았다(헤겔, 2010:926) - P66
헤겔이 안티고네를 높이 평가함에도 불구하고, 헤겔에게 안티고네는 여전히 윤리적 주체로서는부족하다. 가족이 따르는 법은 암묵적이고 의식에 밝혀지지 않은 내적 본질이며 내적 감정과 신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이에 관한 의무를 수행하는 여성 역시 자신의 행위에대해 무의식적이게 되기 때문이다(Chanter, 1995:88~89).
그런데 이것은 안티고네만의 한계는 아니다. 헤겔은 가족과 국가 간의 분열과 대립을 성별화한다. 남성은 장성하면 가족을 떠나 국가로 나아가지만 여성은 가정에 남아 신의 법을 수호하고 가족 구성원을 돌본다. 즉 헤겔에게 시민은 오로지 남성일 뿐이다. - P68
이리가레는 『안티고네』가 보여 주는 것은 가족과 폴리스의 공존 및 분열이 아니라, "모권제에서 부권제로의이행이 완수되고 있는 중인 역사적 이행"이라고 본다(Irigaray, 1974:270). 즉 가족과 국가, 여성과 남성은 결코대칭적이고 대등한 관계에 있지 않다. 여성은 가족 구성원인 남성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국가 안에서, 죽은 뒤에는대지의 품에서 자신의 개별성과 자연적 욕구를 보편화하고 정신화할 수 있도록 하는 ‘보편적 의무를 부여받았으나, 그녀 자신의 개별성을 보편화할 수는 없도록 가족 안에유폐되었기 때문이다. 남성은 여성에게, 폴리네이케스는안티고네에게 그와 같은 역할을 되돌려 주지 않는다. - P72
이리가레에 따르면 헤겔은 모권제와 부권제의 인륜적실체가 공존하는 이상적 분배를 상정하면서도, 인간의 법과 신의 법 사이에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차등적 위계 관계를 둔다(Irigaray, 1974:269, 274). - P72
"그러나 누가 감히 안티고네를 비난할 수 있을까?.…안티고네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Irigaray, 1984:116). - P74
이리가레에 따르면 여성은 남성 중심적인 사회문화 안에서 타자다. 서양 철학사에서 그리고 남성 중심의 문화에서, 타자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동일자의 타자로 사유되어 왔다. 다른 말로 하면 타자는 자아의 거울상으로서 타아에 불과했다. 그러면서도 타자는 주체의 자기동일성을위협하는 미지의 영역이기도 하다. 이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주체는 타자의 독특성을 폭력적으로 제압하고 주체로 동화시켜 버리거나 무화시키고자 했다 - P79
주체가 타자를 통해 자기 세계의 한계를 넘어가는 것이 바로 레비나스와 이리가레가 공히 제안하는 초월의 의미다. - P81
주체ㅡ타자 관계에 관해, 이리가레가 말하는 초월은 수평적인 것이며, 주체가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하는 과정이다. 한계를 가지면서도 무한한 초월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나의 한계를 깨닫게 해 주는 타자와의 만남,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성적 타자와의 만남이다. 왜냐하면 성차는 인간과 세계가 성적으로 최소한 둘 이상으로 분화되어 있다는것을 알려 주며, 이는 성차화된 주체가 속한 세계가 전체와동일시될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황주영, 2015:476). - P82
이리가레는 언어를 관계적 되기의 매개로사용하기 위해 언어의 시적 사용, 특히 동사의창조적 사용을 제안한다. - P87
이리가레에 따르면 지금까지 우리의 언어는 동일자의 언어, 단일한 주체의 언어였다. 이 주체는 자신이 생산한 생산물들과 대상들을 지시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는 코드화된 언어를 사용한다. - P89
이리가레가 현재의 언어에 대해 지적하는 문제들은 남성언어의 문제다. 언어는 성차화되지만 가부장제의 언어는이 는보이지만, 실상은 여성적인 것을 제거한 남성의 언어라는것이다. - P89
언어에서 성의 표식이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현상들의 폭로자이며, "하나의 성이 어떻게 다른 성이나 세계에 종속되는지"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Irigaray, 1987:187). 가령프랑스어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대명사로 지시할 때, 그무리의 대다수가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남성이 한 명이라도 섞여 있다면 남성 복수형인 ‘ils‘을 사용해야 한다. 즉 남성형이 문법적으로 우선시된다. - P90
중성 대명사 fil이 남성 대명사와 동일한 형태를띤다는 것 역시, 언어에서 제거되는 성차가 여성적인 것뿐임을 보여 준다(Irigaray, 1987:183~188). - P90
명사는 세계의 존재자들을 마비시키는 언어다. 특히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언제나 변화의 흐름 속에 있고, 인간이언어로 완전히 파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나 명사는 그 변화의 흐름과 미지의 영역을 일시적으로 고정시키고 일종의 본질을 부과하여, 주체가 대상들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을 용이하게 한다. 반면 동사는 변화와 운동 자체를 표현한다. 동사는 "하나의 연결, 하나의 상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과 관련되는 한 탁월한 단어" 다(Irigaray, 2002:39). 왜냐하면 동사는 시제, 수동태와 능동태, 의문형과 명령형 등 다양한 방식으로, 대화자들이 처한 상황과 맥락을 드러내고 그들이 겪는 시간성, 변화, 성적 차이, 상호적 교환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93
이리가레는 차이를 평등에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여성적 권리, 성차화된 권리를 보장하고 "차이의 가능성을 존중하는 철학적 틀에서 평등을 재정의하려고 하는것이다(Deutscher, 2002:17). - P100
이리가레는 현재의 시민법은 성차를 존중하지 않은 탓에 여성뿐만 아니라 모든 개인들이 시민으로서 적합한 권리를 부여받지 못한다고 본다. 또한 현재의 법은 소유권(la propriété)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생명에 대한 권리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 시민의 정체성과 시민들 사이의 관계가 소유권을 통해서 정의될 때, 여성과 아이들은 남성의 소유물이나 보호의 대상이 되며, "(남녀) 시민들을 항상 자기들끼리의 전쟁 상태에 있는 작은 주인들로 환원해 버리기OC (Irigaray, 1992:93). - P101
이리가레는 줄곧 여성이 어머니와 동일시되고 여성적인 것이 모성과 동일시되는 것을비판한다. 이때의 모성은 남성의 계보에 등록될 아이를임신하고 출산하여 길러내는 의무다. 이리가레는 가부장제에서 여성의 모성은 주인 혹은 정자-자본가인 남성이전유하는 재생산 수단이자 노동자이고 기계라고 말한다 - P103
이리가레의 사유는 초기의 날카로운 비판과 여성적 섹슈얼리티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읽힌다. 하지만 현재 우리에게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성차의 윤리학과 성차화된 권리를 주장하는 후기 이론들이다. 가부장제를 비판적으로분석하는 페미니스트는 많지만 가부장제의 폐허 위에 어떤 새로운 질서를 어떻게 세울 것인지에 대한 다각도의 윤곽을 그려 주는 페미니스트 이론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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