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였다. 지금껏 내가 만난 최고의 문장은, 나는 오늘도 너라는 낱말에 밑줄을 긋는다. 너라는 말에는 다정이 있어서,
진심이 있어서, 쉴 자리가 있어서, 차별이 없어서, 사람이있어서 좋았다. 나는 너를 수집했고 너에게 온전히 물들었다.
- P4

바쁘다고 핑계를 대고 만나주지 않는 사람과 바쁘더라도 흔쾌히 시간을내주는 사람의 차이가 관계의 진정성을 가른다. 시간이야말로 확실한 진심의 지표다.
- P20

우리 모두는 시간앞에서 유한한 존재들이다. 내가 가진 시간의 양이 목숨이다. 그러므로 내가 누군가에게 시간을 내고 있다는 말은 내목숨의 일부를 내주고 있다는 의미다.  - P20

모두에게 인정받고 인기를 얻으려고 목숨을 분산하지 마라. 정말 소중한 사람에게, 내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내주어라. 그렇게 진실해지고 깊어지기를 원해라. 그래야 목숨이 흩어지지 않고 집약되고 축적된다. 그 집약과 축적의 관계를 사람들은 막역한 사이라거나 베스트 프렌드라거나 단짝이라거나 삼총사등과 같은 말로 부른다.
- P21

믿음은 바라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자신의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나의 유익과 기대 때문에 누군가를 힘들게 하거나 자신을 옭아매게 해서는 안 된다. 믿음은 내 마음을 지키고 다스리는 일이다. 나의 욕심을 잠그는 일이다.
- P25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일들 때문에 어떤 이들은 숨은 뜻을 찾아 순례를 떠나고, 어떤이들은 은유법을 배워 시를 쓰고, 어떤 이들은 눈물바다를응고시켜 소금을 만든다.  - P28

"권총으로 빵 쏘아 죽이는 그런 건 아니에요. 제 마음속에서 죽이는 거예요. 사랑하기를 그만두는 거죠. 그러면 그 사람은 언젠가 죽어요.

ㅡ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중에서 - P30

제제의 말이 맞다. 사람은 자신의 운명으로 사는 게 아니다. 타인의 가슴속에서 죽으면 죽는다. 목숨의 길이는 생명공학 기술에 달려 있을지 모르지만 목숨의 깊이는 사랑의화학에 달려 있다. 누군가 당신을 흔드는 말을 한다면, 마음깊은 곳에서 천둥소리가 들린다면 그것은 다른 목숨 하나가 결합을 시도한 것이다. 떨림이 있고 울림이 있고 열이 나고 빛이 난다면 의심할 바 없다. 그것은 분명하고 진짜다.
- P32

넓게 보면 각 나라, 각 부족의 언어는 그들의 은어다. 그들을 다른 세계와 구분하는 중요한 징표이고 그들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우주적 차원으로 본다면 별들 하나하나가다 은어다. 반대로 미시적 차원에서 생각하면 사람들 각자가 쓰는 말들도 다 은어다.  - P35

매혹적이지 않는가. 은어처럼 맑은 자갈돌 속에 숨는 말이 그대와 나 사이에 있다는 것. 우리 둘이서만 알아듣고 붉어지는 은어가 있다는 것,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분리되지 않은 궁극의 언어가 있다는 것.
- P37

외로움이 타인과의 관계, 외부적 관계에서 오는 감정이라면쓸쓸함은 나와의 관계, 내부적 관계에서 오는 단절이다. 고독은 단절의 감정이 아니라 몰입의 감정에 가깝다. 몰입은중심에 집중하기 위해 주위를 거두는 상태이다. 고독은 고독을 뺀 나머지 모두를 소거한다. 그렇게 고독이 팽창하면혼자의 존재가 있음으로 가득해진다.
- P41

혼자 있을 줄 안다는 것은 자신을 돌보고 아낄 줄 안다는뜻이다. 혼자일 때도 완전히 혼자가 되지는 않는다. 그리워하느라 미워하느라 밀어내느라 누군가와 있기도 한다. 치열하게 자기를 부정하고, 애써 자기를 긍정하느라 사투를벌이는 혼자도 있다. 그래서 혼자가 되면 약해지고, 또 강해진다. 고독은 어쨌든 강렬하게 나를 느끼는 것이고, 그런 혼자의 느낌은 살아 있는 동안의 ‘선물‘ 이다.
- P41

인간의 이성으로는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이 사랑의감정이라면 더더욱 불가사의한 비합리와 비과학의 영역에있다. 차라리 우주를 이해하려고 덤비는 게 낫지 사랑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무모하다. 이해 불가한 것은 그냥 수용하거나 인용(認容)하거나 둘 중 하나다.
- P44

성격, 체질, 가치관, 식습관, 감수성, 말투, 취향 등등 모든것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다른 것이 정상이다. 우리는왜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가. 익숙한 여기와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와 다르지 않다면, 가서 보고 먹고 자고 만나고느낄 이유가 없다. 온갖 불편과 위험을 감수하고, 돈과 시간을 써가며 여행하는 이유는 여행이 다른 세계의 새로운 맛을 경험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 P45

"말은 관계야. 관계의 핵심은 사람이고, 나는 내 필요보다상대를 먼저 생각하면서 말해, 말에 사람이 들어 있으면 금이고, 사람이 빠져 있으면 똥이야. 내가 무엇을 말할까가 아니라 이 사람에게 어떤 힘을 부여할까가 우선이야. 자부심,
자존감, 쓸모, 존중받는 느낌, 이런 게 다 힘이거든. 자기에게 힘을 주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 P52

백 마디의 좋은 말 보다 나쁜 한 마디의 말에 자신의 기분을 온통 맡겨버릴 때가 있다. 이것은 생의 낭비다. 내면의 평화를 연습하지 않으면 인생은 악마의 말 한마디에도 함락될 수 있다. 인간은 우주 정거장을 건설할 수 있지만 자기 안의 감정과 마주할 탁자 하나 들여놓기가 어렵다.
- P69

인간은 침묵으로도 말한다. 말하기보다 침묵을 지킴으로써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경우도 있다. 말을 응축하고 닫음으로써 그 어떤 말보다 더 깊게 각인시킨다.
- P69

자주 생각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기울인 대상을 닮은 모습으로 삶은 물들게 마련이다.  - P70

우리는 하는 일, 하는 생각, 하는 말에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고 신경을 집중한다. 어쩌면 인생은 하는 것이 아니라하지 않는 마음, 하지 않는 말에 진면목이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 사랑을 증명하기위해서 좋아하는 무엇을 하는 만큼, 싫어하는 무엇을 하지않는 것. 그 깊은 마음은 사랑을 그윽하게 만든다.
- P74

"너, 무슨 일이 있나 보구나. 거기가 어딘데?"

가슴어는 점점 사어가 되어가고 있다. 가슴어가 사라져가는 이유는 서로 자신의 말만 하고 상대의 마음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가슴어란 말하기보다 듣기가 훨씬 중요한 언어다. 가슴어는 일상어와 같은 어휘를 써도 의미가 완전히다르고 반어법에도 능숙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메뉴를 고를 때 아무거나‘ 라고 말하면, 이는 ‘내가 늘 좋아하는 그것‘
이라는 의미다. 그 사람이 ‘아무렇지 않아, 괜찮아‘ 하고 말하면, 그것은 괜찮지 않아, 나 좀 봐줘‘라는 뜻이다.
- P86

묵언은 어떻게 말할까를 배우는 과목이다. 성내지 않고들뜨지 않고 참답게 말하는 궁극의 언어다. 마음의 말에 닿으려고 수행 푯말을 내건 사람들이 저 안에 있다. 돌아서 나오면 절 마당 어귀의 후박나무도 배롱나무도 묵언 수행 중임을 눈치채게 된다. 법당 처마에 달린 풍경도 공양간을 드나드는 방문객도 구름처럼 고요를 연습하고 있다.
- P92

관행이란 해오던 대로 관례에 따라서 하면 되는 편리함이 있지만, 따지고 보면 ‘생각하고 싶지 않음‘을 실토하는말이다. 원칙이란 것도 그렇다. 한번 정해지면 바꾸기 어렵고 행동을 제약한다. 처음 생겨날 때 원칙은 하나의 점이 아니라 하나의 원이었을 것이다.  - P94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은하수가 흐르고 사막을 건너는낙타가 보인다. 나는 지류의 물들을 모아 흘려보낸다. 선인장들이 붉은 꽃을 피워 올리고 체온 같은 별이 돋는다. 오목한 작은 우주, 나의 손.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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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3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23 15: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1-11-25 15: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주 생각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기울인 대상을 닮은 모습으로 삶은 물들게 마련이다. - P70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그러니까 무엇을 생각하며 사느냐가 중요해져요. ^^

청아 2021-11-25 15:42   좋아요 1 | URL
네! 그런 의미에서 생활이 삶 전체를 반영한다는 문장도 있었는데 좋았어요. 거창하고 먼 가치들이 아니라 일상에서 많은 것들이 드러난다는! ^^*
 


에밀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 중에서 유일하게 해피엔딩인 작품이다. 지금의 백화점과 크게 다르지 않은 130년 전 파리의 화려한 백화점 모습을 디테일하게 펼쳐놓았다. 백화점은 여성들을 위한 소비무대다. 대부분의 그 안을 채우는 물건들이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을 타깃으로 하고 있으며 판매 상품 뿐 아니라 그 외의 눈부신 내부 장식들도 여성들의 허영심을 자극한다. 여성학을 공부하기 전에는 이런 현상의 이유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저 의문만이 이어질 뿐이었다. 특히 맥시멀리스트인 어머니 덕분에 미니멀리스트가 된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현상을 경계하는 편이다. (올해 책 구매 기록 때문에 좀 많이 찔리지만..) 남성과 달리 주로 가정에 속한 여성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꾸미는 것과 가정을 가꾸는 방향으로 쏠릴 수 밖에 없었다. 지금보다 더욱 사회적 진출이 막힌 상황에 놓였던 여성들은 그런식으로 자신의 미적인 감각을 뽐내며 존재를 드러내고 때때로 억눌린 욕망과 슬픔을 일시적으로 해소할 수 있었다.  


터키, 아라비아, 페르시아 그리고 인도가 그곳에 모두 모여 있었다. 궁전을 모두 비워내고, 모스크와 바자르를 약탈이라도 해온 듯했다. 낡은 옛날 카펫들속에는 황갈색을 띤 금빛이 주된 색조를 이루고 있었고, 퇴색한 빛깔들은 불 꺼진 화덕의 잔해처럼 어두운 열기를 간직하고있었다. 나이 든 대가의 그림 속에서처럼 그윽하면서도 섬세한 느낌을 전해주는 색조들이었다. 태양과 해충의 나라에서 온 오래된 양털이 간직한 강렬한 내음이 너른 공간을 가득 메운 가운데, 야성적인 예술이 과시하는 화려함 뒤로 동양의 꿈들이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P153


부모님이 연이어 돌아가시고 어린 동생 둘을 떠안은 주인공 드니즈는 생존을 위해 파리에 상경한다. 하지만 그녀를 돌봐주기로 했던 큰아버지는 운영하는 실크매장 건너편에 생긴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때문에 사업이 위기를 맞은 상태로 이제 그녀를 도울 형편이 아니라고 말한다. 드니즈는 눈치가 보였지만 결국 큰아버지를 몰락시키고 있는 백화점에서 일을 하게 되고 판매원들간의 극심한 경쟁과 시기로 꾸준히 괴롭힘을 받게 된다. 프랑스의 제2제정기 철로의 확장과 함께 급속한 산업화를 상징한 백화점은 이 작품에서 사장 무레의 끝없는 욕구로 거대한 몸집을 더욱 키워나가며 주변 상권들을 거침없이 삼킨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고집과 거대 자본의 횡포로 경쟁에 밀린 소상공인들은 힘없이 짓밟히며 피를 흘린다. 이 괴물의 힘은 여인들의 끝없는 사치였고 무레는 이런 여성들의 심리를 꽤뚫어보고 있었다. 


여성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무레의 우아한 몸짓 뒤에는 여성의 살을 파운드로 떼어 팔고자 하는 유대인 상인의잔인함이 숨겨져 있었다. 그는 여성을 위해 신전을 세우고, 수많은 직원들로 하여금 여성을 위한 향을 피우게 함으로써 새로운 숭배 의식을 만들어냈다. 또한 자나 깨나 오직 여성만을 생각했으며, 끊임없이 더 효과적이고 강렬한 유혹의 방식을 생각해내기에 바빴다. P134 . 


백화점의 연이은 공격적 마케팅으로 남의 가정이 파탄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변 상인들을 오히려 백화점 확장의 걸림돌로만 여기던 무자비한 무레는 여성들과 방탕한 관계를 즐기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호감을 느끼게 된 드니즈가 그를 계속해서 거부하자 재능과 열정으로 부를 쓸어모으던 삶에 점차 회의를 느끼며 그녀를 향한 욕망만이 상대적으로 부풀어 오른다. 탐욕적인 백화점의 생리를 이어받아 서로를 물고 뜯는 백화점 내부의 판매 직원들간의 심화된 경쟁구도,외부의 쓰러져 가는 소상공인들의 모습을 통해 급속한 산업화와 자본주의에 휩쓸리는 나약한 인간들의 면면을 오늘날과 비교하며 생각해볼 수 있었다. 실제로 세계 최초의 백화점이었던 파리의 '봉 마르셰'를 모델로 쓰여진 이 소설에서 사람을 살리고 또 죽이는 사랑과 욕망의 상징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의 드니즈는 결국 선하고 순수한 마음을 굳건하게 지켜나가 최후의 승자가 된다. 단 한번 바람피우는 인간은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무레의 급변이 어색했고 동생의 거짓말에 한없이 돈을 뜯기던 순진한 그녀의 갑작스러운 이런 승리도 조금 난감했지만 졸라의 완벽한 심리묘사를 따라 가느라 그런대로 재밌게 신데렐라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 여전히 사는 게 즐겁나?" 무레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즉시 이해하지 못했다.그러다 예전에 삶의 공허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무의미한 고통에 대해 서로 얘기를 주고받았던 것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물론이지, 난 여태 지금처럼 삶을 충실하게 살았던 적이 없었네. "오! 이보게 친구, 날 비웃지 말게나. 고통스러워 죽을 것 같은 순간조차 더없이 소중한 거니까 말일세!" 그는 눈물이 덜 닦인 얼굴로 목소리를 낮추면서 애써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중략) 어차피 언젠가 한 번은 죽어야 하는 거라면, 지루해서 죽는 것보다는 무언가에 미쳐서 죽는 게 더 낫지 않겠나."그들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 P537


지금까지 에밀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 중에서 '목로주점','제르미날','인간짐승'그리고 이번에 읽은 '여인들의 행복백화점'으로 총 4권을 읽었는데 완성도에 있어서는 '제르미날'과 '인간짐승'이 가장 좋았다. 그래서 궁금해 찾아보니 시기적으로도 이 순서로 이어지며 작품이 나날이 발전해 나갔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이번작품의 주요 인물인 사장 '무레'의 이전 이야기가 '살림'에 나온다는데 최근에 '집구석들'이란 새 이름으로 재출간 되어 사두었는데 무척 기대된다. 문학동네에서 '대지'도 번역되어 예약구매를 해두었는데 이번주에 집으로 올 예정이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루공 마카르 총서의 일부가 하루 빨리 발행되기를 바란다. 





*앞으로 읽을 에밀졸라의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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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12-09 19:17   좋아요 3 | URL
thkang님!항상 함께해주시고축하해주셔서 감사해요!!😆👍

서니데이 2021-12-09 21:2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청아 2021-12-09 21:33   좋아요 4 | URL
감사해요 서니데이님!! 설레는목요일입니다ㅎㅎ 굿밤되세요~😉

bookholic 2021-12-09 23:5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12월 되세요~~

청아 2021-12-10 00:11   좋아요 2 | URL
네~감사해요ㅋㅋㅋ 북홀릭님도 행복한 12월 되세요!!😄

건수하 2021-12-10 13: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에밀 졸라의 책이 이렇게 많군요!
급 궁금해집니다.

청아 2021-12-10 13:53   좋아요 2 | URL
감사해요 수하님!😆 안맞으시는 분들도 물론 있겠지만, 한 번 잡으면 놓기 힘들만큼 잘 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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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자신의 전통 엘뵈프‘가 당하는 모욕과 함께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은, 그녀의 가게와 마찬가지로 그동안 축적돼온 힘으로 버티고 있는 것뿐이었다. 하지만가게의 파국은 곧 그녀 자신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며, ‘전통 엘뵈프‘가 문을 닫게 되는 날에는 그녀도 그와 함께 생을 마치게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 P49

다시금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보뒤는 밀랍을 입힌 식탁보위에서 손가락 끝으로 퇴각의 곡조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또다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보인 것에 나른한 피로감과 더불어 후회마저 느끼고 있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짓누르는 가운데 그들 모두는 허공을 응시하면서 자신들의 씁쓸한 인생 역정을 되돌아보았다.  - P49

무레는 온갖 종류의 무모함과 경솔함, 부주의로 인한 실수 그리고 여자들과의 우려할 만한 스캔들로 얼룩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부르동클은 열정적인 프로방스 출신의 동료처럼 반짝이는 천재성과 대담함, 사람들을 압도하는 매력을 갖추지 못했다.  - P59

매사에 분명하고논리적이며 냉철한, 따라서 추락할 위험도 없는 그였지만 성공은 여자와 같은 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파리는용감한 자에게만 키스를 허락한다는 것을.
- P62

드니즈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그런 생각이 너무나 엉뚱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리스도의 변용(變容)처럼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달라 보였다. 발그스레한얼굴에, 다소 커 보이는 입가에 띤 미소는 얼굴 전체를 활짝 피어나게 했다. 회색빛 눈동자는 부드럽게 불타오르는 듯했고,
양쪽 뺨에는 사랑스러운 보조개가 패었다. 빛이 바랜 것 같은머리조차 그녀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함과 용기를 동반한 경쾌함 속에서 위로 날아오르는 듯 보였다.
- P98

그는 신화로 둘러싸인, 무시무시한 기계의 주인이었다. 아침부터 강철 이빨로 그녀를 물고놓아주지 않으려 하는 거대한 톱니바퀴의 조종자였다. 그의 잘생긴 얼굴 뒤로, 잘 다듬어진 수염에서, 오래된 황금을 떠올리게 하는 눈 속에서 죽은 여인이 보이는 것 같았다. 피로 백화점의 돌들을 봉인한 예의 그 에두앵 부인이었다.  - P99

이제, 여인네들은 모두 마르티부인이 산 것을 보고자 하는 호기심에 몸이 달아올랐다. 그녀가 유혹에 약하고 낭비벽이 심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정숙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럽고 남자의 구애에도절대 흔들림이 없는 그녀였지만, 조그만 천 조각 앞에서는 즉각 몸과 마음이 약해지면서 그 유혹에 굴복하곤 했다. 평범한사무원의 딸인 그녀는 이제는 보나파르트 리세에서 제5학년과정을 가르치고 있는 남편을 파탄으로 내몰고 있었다. 그녀의남편은 점점 늘어나는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 1년에 6천 프랑의 수입을 두 배로 늘리기 위한 방편으로 출장 교습과 같은가윗벌이를 끊임없이 찾아다녀야만 했다.  - P109

여성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무레의 우아한 몸짓 뒤에는 여성의 살을 파운드로 떼어 팔고자 하는 유대인 상인의잔인함이 숨겨져 있었다. 그는 여성을 위해 신전을 세우고, 수많은 직원들로 하여금 여성을 위한 향을 피우게 함으로써 새로운 숭배 의식을 만들어냈다. 또한 자나 깨나 오직 여성만을 생각했으며, 끊임없이 더 효과적이고 강렬한 유혹의 방식을 생각해내기에 바빴다. - P134

"그러다 언젠가는 여자들한테 크게 당할 수도 있네."
하지만 무레는 오만하고 경멸적인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모든 여자들은 그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그녀들은 그에게 속했지만, 그는 그 누구의 것도 될 수 없었다. 그는 여자들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부와 쾌락을 모두 얻고 나면, 그녀들에게서 아직 무언가를 얻어낼 게 있는 이들을 위해 가차 없이그녀들을 버릴 것이었다. 이 모든 건 투기꾼 기질을 지닌 남부출신 남자의 치밀하게 계산된 자신만만한 행보였다.
- P134

바로 그 순간, 고개를 든 마르티 부인은 바로 앞에서 잔뜩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남편의 눈길과 마주쳤다. 그는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변한 얼굴로, 운명에 체념한 가난한 남자의 고뇌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토록 힘겹게 벌어들인자신의 급여가 얼음이 녹듯 순식간에 모두 사라져버리는 것을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레이스 한 조각은 그에겐 재앙과도 같았다. 그로 인해 힘겨운 수업과 출장 교습을 하며 보낸 나날들이 모두 탕진되고 먹혀버렸던 것이다. 그는 쉴 새 없이 밤낮으로 뛰어다니면서도 밖으로 드러낼 수 없는 고통과 지옥 같은 궁색한 삶을 떨쳐버리진 못했다.  - P144

석양이 느끼게 해주는 나른한 관능적 분위기와 여인들의 어깨에서 풍겨 나오는 달아오른 체취 속에서도, 환히 웃어 보이는 얼굴 뒤로 여전히 흔들림없이 스스로를 통제할 줄 알았다. 그는 여자였다. 여인네들은자신들의 깊숙한 내밀함을 간파해내는 섬세한 감각을 지닌 그에게 온통 까발려지고 지배당하는 듯했다. 그리하여 그에게 매료된 채 기꺼이 자신들을 내맡겼다. 반면 무레는 여자들이 자신의 손아귀에 있음을 확신한 순간부터 거친 태도로 그녀들 위에 군림하면서 천들을 지배하는 전제군주처럼 굴었다.
"오! 무슈 무레! 무슈 무레!"
- P146

터키, 아라비아, 페르시아 그리고 인도가 그곳에 모두 모여 있었다. 궁전을 모두 비워내고, 모스크와 바자르를 약탈이라도 해온 듯했다. 낡은 옛날 카펫들속에는 황갈색을 띤 금빛이 주된 색조를 이루고 있었고, 퇴색한 빛깔들은 불 꺼진 화덕의 잔해처럼 어두운 열기를 간직하고있었다. 나이 든 대가의 그림 속에서처럼 그윽하면서도 섬세한느낌을 전해주는 색조들이었다. 태양과 해충의 나라에서 온 오래된 양털이 간직한 강렬한 내음이 너른 공간을 가득 메운 가운데, 야성적인 예술이 과시하는 화려함 뒤로 동양의 꿈들이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 P153

그들은 한 단계를 더 올라가기 위해 바로 위에 있는 동료를 밀어내고, 누구라도 장애가 된다면 동료를 먹어치우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욕망의 대립과 서로를 밟고 올라서는 행위는, 거대한 기계가 순조롭게 작동하면서 판매를 촉진시키고, 파리 전체를 놀라게 하는 성공의 불꽃을 지피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었다. 위탱의 뒤에는 파비에가 있고, 파비에의 뒤로는 또 다른 이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괴물 같은 기계가 거대한 아가리로 요란하게 씹어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비노는 이미 끝장난 목숨이었다. 모두들 벌써부터 앞다투어 그의 뼛조각을 하나씩 차지했다.  - P273

무레의 궁극적이고 유일한 야심은 여성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여성이 자신이 이룩한 백화점의 왕국에서 여왕으로군림할 수 있기를 바랐다. 여성을 위한 신전을 지어 바친 다음,
그곳에서 그녀를 자신의 뜻대로 좌지우지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정중하고 세심한 배려로 여성을 취하게한 다음, 그녀의 욕구를 부추겨 달아오른 욕망을 충족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 P393

그들이 내세우는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무기는 광고였다.
무레는 카탈로그와 신문 광고, 포스터 등에만 연간 30만 프랑을 쏟아부었다. 여름 신제품의 판매를 위해 20만 부에 이르는카탈로그를 제작해 그중 5만 부는 각 나라 언어로 번역해 외국으로 보냈다. 이젠 카탈로그에 삽화까지 곁들였고, 심지어 종이에 샘플을 붙여 함께 보내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넘쳐나는광고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의 존재를각인시켰다. 건물들 담벼락이나 신문, 심지어 극장의 커튼에서까지도 그 이름을 만날 수 있었다. 무레는 여성은 본래 광고에약한 존재이므로, 필연적으로 소문의 진원지로 향하게 되어 있다고 공언했다. 게다가 이제 그는 인간의 본성을 세심하게 분석하는 학자처럼, 여성에게 좀 더 높은 차원의 덫을 놓았다. 여성이 값싼 물건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그것이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시키면서 필요 없는 상품을 구매한다는 사실을 간파해냈던 것이다. - P395

무엇보다 백화점 내부 배치에 관한 무레의 안목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의 어느 한 구석도 한가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천명했다. 어느 한군데도 빠짐없이 모든 곳에서, 북적거림과 몰려드는 사람들, 그리고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다. 삶은 또 다른 삶을 끌어당기고, 새로운 욕구를 잉태하며, 그 욕구를 빠르게 전파시키기 때문이다. 무레는 그러한 법칙에 근거해 온갖 종류의아이디어를 이끌어냈다. - P395

"그래, 여전히 사는 게 즐겁나?"
무레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즉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예전에 삶의 공허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무의미한 고통에 대해 서로 얘기를 주고받았던 것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물론이지, 난 여태 지금처럼 삶을 충실하게 살았던 적이 없었네.
오! 이보게 친구, 날 비웃지 말게나. 고통스러워 죽을 것 같은 순간조차 더없이 소중한 거니까 말일세!"
그는 눈물이 덜 닦인 얼굴로 목소리를 낮추면서 애써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 P536

"그럴지도! 난 나 자신이 무언가에 현혹되기를 바란다..
어차피 언젠가 한 번은 죽어야 하는 거라면, 지루해서 죽는 것보다는 무언가에 미쳐서 죽는 게 더 낫지 않겠나."
그들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 P537

"드니즈의 이러한 시도는 봉 마르셰 백화점의 마르그리트 부시코가 했던 시도를연상시킨다. 백화점 설립자인 부시코는 공동 설립자인 아내의 발의로 1876년 7월31일 직원들을 위한 공제조합을 만들었다. 그에 앞서 1872년에는 직원용 도서관을 열었으며, 음악과 펜싱 수업, 외국어 강좌를 개설했다.
- P592

허참! 우리가 대체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됐는지. 새파란 어린 것 하나 때문에 늙은이들이 줄줄이 죽어나가다니 참으로 기막히지 않은가 말이야! 다른 사람들한테는 이렇게 줄지어 도산하는 광경이한낱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겠지만.……. 게다가 앞으로도 문닫을 가게들이 줄을 서 있단 말이지. 그 작자들이 백화점에다꽃, 모자, 향수 그리고 신발 매장까지 낼 거라면서? 또 앞으로뭐가 더 생겨날지 그걸 누가 알겠나?  - P616

복잡한 관현악법으로 연주되는 대가의 푸가가 지속적으로 전개되면서, 끊임없이 더 높은 곳으로 영혼을 날아오르게 하는 듯했다. 오직 백색들만이존재했지만 결코 똑같은 백색이 아니었다. 백색들은 서로를 돋보이게 하거나 대립하고, 서로를 보완하기도 하면서 빛과 같은광채를 뿜어냈다. 처음에는 캘리코와 리넨의 무광 백색, 플란넬과 나사의 은은한 백색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벨벳, 실크, 새틴과 함께 단계가 차츰 올라가면서 백색이 조금씩 불타오르다가는 주름진 천의 가장자리에 이르러 불꽃이 점차 잦아들었다.
- P660

그가 창조해낸 것들은 새로운 종교를 일으켰다. 그의 백화점은 흔들리는 믿음으로 인해 신도들이 점차 빠져나간교회 대신, 비어 있는 그들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었다. 여인들은 공허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 그의 백화점을 찾았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예배당에서 보냈던 불안하고 두려운 시간들을 그곳에서 죽여나갔다. 백화점은 불안정한 열정의 유용한 배출구이자, 신과 남편이 지속적으로 싸워야 하는 곳이며, 아름다움의 신이 존재하는 내세에 대한 믿음과 육체에 대한 숭배가 끊임없이 다시 생겨나는 곳이었다. 그가 백화점 문을 닫는다면거리에서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해실과 제단을박탈당한 독실한 신자들이 절망적으로 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 P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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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연극배우에게 어느날 닥친 ‘재능의 죽음‘은 그를 재기 불능의 상태로 빠뜨린다.
이혼까지 하게되자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갔다 나온 그는 거짓말같이 시작된 사랑에 행복한 미래를 꿈꾸지만, 얼마안가 다시 혼자가 되어버리는데...
일에서도 사랑에서도 전락한 그의 마지막 연극이 무대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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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1-20 15: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재능의 죽음이란 단어가 그냥 죽음보다 더 섬뜩한 느낌이에요. 딱히 재능이 없어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ㅎㅎ 미미님 주말 잘 보내세요 *^^*

청아 2021-11-20 15:46   좋아요 3 | URL
저도 이런 재능은 가져본적이 없어서 실감은 안났지만 대리경험은 역시 안전하기도 하고 문학의 최대 즐거움이죠~^^♡ 미니님도 즐거운 주말 되세요!😄

새파랑 2021-11-20 16: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인생을 사는것도 어떻게 보면 다 연기 아닌가란 생각을 가끔 해봅니다 😅 로스옹책은 다 자전적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ㅋ

청아 2021-11-20 16:16   좋아요 3 | URL
새버스의 극장하고 유사한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별하나를 뺐어요ㅋㅋ새파랑님 리뷰 다 공감되고 좋아서 저는 요렇게 짧게 썼어요🤭

초딩 2021-11-21 11: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앗 추락인줄 알았어요 ㅎㅎ :-)
좋은 휴일 되세요~

청아 2021-11-21 11:45   좋아요 3 | URL
ㅋㅋㅋ제목 느낌이 비슷하죠? 초딩님도 즐거운 휴일 보내세요~♡ 😄
 

그를 그이게 만들어주었던 모든 것이 이제는 그를 미치광이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최악의 연기로 무대에 서 있다는 걸 매 순간 의식했다. 예전에는 연기할 때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의 훌륭한 연기는 본능에서 나온 것이었으니까. 이제 그는 온갖 생각을 했고, 거침없고활력 넘치던 모든 것이 죽어버렸다. 그런 것들을 생각으로 통제해보려 했는데, 오히려 파괴해버리고 말았다.  - P10

무대에 오르는 것이 두려워졌다. 시작신호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들으며 자신이 해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시작되는 순간의 해방감과 진짜 그 인물이 되는 순간을 기다렸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고 자신이 연기하는 바로 그 인물이 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대신 완전히텅 빈 채, 자신이 뭘 하는지 모를 때나 할 법한 연기를 하면서 무대에 서 있었다. 그는 온전히 쏟아내지도 못했고, 자제하지도 못했다. 그의 연기에는 유려함도 없었고 절제도 없었다. - P12

자신이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누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일에 그가 매료된 것은 서너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애초부터 자신이 연극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연기력이 떨어지는 배우는 목청만 높이지만, 그는 주의 깊게 듣고 집중하는 힘을 활용했다. 무대 밖에서도 그의 그런 능력은 힘을 발휘했다. 특히 그가 젊었을 때,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그녀들만의 이야기와 목소리, 스타일이 있다는 것을 그가 보여주기 전까지는 자신들만의 이야기가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던 여자들과 상대할 때 그랬다. 그 여자들은 액슬러와 함께 여배우가 되었고, 자신들의 인생에서 여주인공이 되었다.  - P12

그는 케네디 센터에서 푸로스퍼로와 맥베스 를 연기해달라는요청을 받았다. 두 편에 동시에 출연하다니, 이보다 더 대단한 기회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충격적이게도 그는 두 배역 모두 실패하고 말았는데, 특히 맥베스 역이 심했다. 그는 별로 격하지 않은 셰익스피어 작품도 잘해내지 못했고, 대단히 격한 셰익스피어 작품도 잘해내지 못했다. 평생 셰익스피어 작품을 해왔는데도, 그가 연기한 맥베스는 우스꽝스러웠고, 그의 연기를 본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말했으며, 보지 않은 대다수 사람들까지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 사람들은 날 모욕하러 굳이 극장까지올 필요도 없는 거야." 그는 말했다.  - P13

무너져내리는 인물을 연기할 때 거기엔 체계와 질서가 있다.
그러나 무너져내리는 자신을 지켜보는 건, 자신의 종말을 연기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한 일이다.
그는 스스로에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자신이 푸로스퍼로 혹은맥베스라는 것을 납득시키지 못했듯 자신이 미쳤다는 것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지 못했다. 그는 미치광이로서도 가짜였다. 그가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은 어떤 역을 연기하는 역할뿐이었다.  - P14

 아침마다 그는 몇 시간씩 침대에 숨어 있곤 했는데, 그런 역할에서 숨는다기보다는 단순히 그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살에 대한 게 전부였지만, 자살을 흉내내지는 않았다. 죽고 싶어하는 남자를 연기하는 살고 싶은 남자였으니까.
- P15

한편 푸로스퍼로의 가장 유명한 대사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는데, 아마도 아주 최근에 그가 완전히 망친 대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서 어찌나 자주 되풀이되었던지, 완곡한 의미조차 없고 어떤 실재도 가리키지 않았음에도 그 대사는 얼마지나지 않아 개인적인 의미가 충만한 주문 같은 힘을 지닌 아우성이 되어버렸다. "이제 우리의 잔치는 다 끝났다. 말한 대로 이배우들은 모두 정령이었다. 이제 다 흔적도 없이, 완전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는 혼란스럽게 되풀이되는 "흔적도없이"라는 두 마디를 머릿속에서 도통 몰아내지 못한 채 아침 내내 침대에 무력하게 누워 있었고, 그 두 마디는 점점 의미를 잃어가면서도 뭔가 모호한 비난의 분위기를 띠었다. 그의 복잡한전인격全人格이 "흔적도 없이" 라는 말에 완전히 휘둘렸다.
- P16

지금 무엇이 그의 자신감을 파괴해버린 걸까? 그는 이 병실에서뭘 하고 있는 걸까? 전에는 존재한 적 없는 자기 희화화가 생겨났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자기 희화화, 그가 바로 자기 희화화자체인 이런 일이 어쩌다 일어났을까? 그저 흐르는 세월이 가져다준 쇠퇴와 몰락일 뿐인 걸까? 그저 노화의 징후일까?  - P19

파 박사는 매주 두 번있는 면담 시간에 액슬러에게, 박사 자신이 "보편적인 악몽"이라고 묘사한 증세가 갑자기 나타나기 이전에 액슬러의 삶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되짚어보라고 했다. "보편적인 악몽" 이라는 말은 곧, 이 배우가 극장에서 겪은 불운이, 즉 무대에 서긴 했으나연기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실패에 충격을 받은 일이사이먼 액슬러처럼 전문 배우가 아닌 꽤 많은 사람들도 꾸는 스스로에 대한 뒤숭숭한 꿈의 내용이라는 의미였다. 무대에 서긴했으나 연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은 거의 모든 환자가 한 번쯤은털어놓는 흔해빠진 꿈의 유형에 속했다. 그런 꿈과, 사람들로 붐비는 도시의 대로를 알몸으로 걷는 꿈, 혹은 중요한 시험을 앞두었는데 준비를 전혀 못한 꿈, 혹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 - P20

고통이 일정 단계에 이르면 인간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기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게 마련이다. 설사 그 설명이 무엇 하나해명하지 못하고 결국 실패한 또하나의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는사실을 알더라도.
- P21

몇몇은 자살을 시도했을 때 자신을 엄습한 느낌이 사이코패스가살인을 저지를 때 느낄 법한 쾌감과 유사했다고 묘사했다. 한 젊은 여자가 말했다. "우리는 스스로한테도 주변 모든 사람한테도무기력하고 완전히 무능한 존재처럼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세상모든 행위 가운데 가장 하기 어려운 걸 실행하기로 마음먹을 수있어요. 그게 기분을 돋워주죠. 기운나게 해주고요. 행복감도 느끼게 해줘요."  - P23

 "자살은 우리가 스스로를 위해 창작한 역할이에요." 그는 말했다. "우리는 그 글 안에 존재하면서 그 역을 연기하는 겁니다.
모든 게 신중하게 연출되지요. 자기 시신이 어디서 발견될 것인가, 어떻게 발견될 것인가." 그런 다음 덧붙였다. 단, 공연은 한번만 가능합니다."
- P24

"이보게." 제리는 말했다. "누구나 못하겠다‘는 느낌이 어떤건지 알고, 자신이 엉터리라는 게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어떤 건지도 알아. 배우라면 다들 느끼는 공포감이야. 사람들이알아채고 말았어. 들켰어. 까놓고 말해 나이가 들면 한 번쯤 패닉에 빠지는 게 사실이네. 난 자네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여러해 동안 그런 문제를 겪어왔네. 그중 하나가 갈수록 느려진다는걸세. 모든 면에서, 읽는 것조차 느려지지. 내가 지금 뭔가를 빠르게 읽는다면 아주 많은 부분을 기억 못할 걸세. 말하는 속도도느려지고 기억력도 느려지지.  - P45

장서에 둘러싸인 채 그는 그곳에 앉아, 등장인물이 자살하는 희곡들을 떠올려보았다. 「헤다 가블러의 헤다. ‘영애令愛 줄리‘의줄리, ‘히폴리투스‘의 파이드라, ‘오이디푸스 왕‘의 요카스테,
안티고네 의 거의 모든 인물들, 세일즈맨의 죽음의 윌리 로먼, 모두가 나의 아들의 조 켈러, 얼음장수 오다의 돈 패릿.
「우리 타운」의 사이먼 스팀슨, 「햄릿」의 오필리아, 오셀로의 오셀로, 「줄리어스 시저」의 카시우스와 브루투스, 리어 왕의 고너릴,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안토니, 클레오파트라, 이노바부스, 차미언, 「깨어나 노래하라!」의 할아버지, 「이바노프의 이바노프, 「갈매기」의 콘스탄틴, 이 놀라운 목록은 한때 그가 연기했던 작품들만 꼽은 것이었다. 더 많았다. 훨씬 더 많이 있었다.
- P48

 자살은 기원전 5세기 이래로 극작가들이 경외감을 가지고 숙고해온 주제다. 이 대단히 예외적인 행위를 고취할 수 있는 감정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지닌 인간들이 매혹되어온 주제이기도 하고, 그는 이 작품들을 억지로라도 다시읽어봐야 한다. 그래, 소름끼치는 모든 것을 정면으로 마주해야한다. 그 누구도 그가 이 문제를 충분히 숙고하지 않았다고 말할수 없도록.
- P49

그는 그녀의 이야기에 귀기울였던 일을떠올렸다. 그처럼 집중해서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것은 오랜만에 연기를 하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그건 어쩌면 그가 회복되는 데도 도움이 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랬다, 그는 그녀를, 그녀가 했던 이야기를, 그녀가 남편을죽여달라고 부탁했던 것을 기억했다.  - P51

영화에서는 늘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돌아다니지만, 그런 영화를 제작하는 이유는 관객의 99.9퍼센트가 사람을 죽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그것도 없애버리고 싶어할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그 정도로 어렵다면, 상상해보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에 성공하기란 얼마나 어렵겠는가. - P52

그녀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무적의 분위기를 풍겼고, 비록 원형은 선머슴 같은 말괄량이였지만, 배우인 어머니의 발성법을 본받기라도 한 듯 사람의 마음을 끄는 억양으로 말했다.
- P59

우린 늘 캠핑과 하이킹을 갔어요. 심지어 눈이 오는 날씨에도요. 매년 여름이면 알래스카 같은 데로 떠나 하이킹과 캠핑을 했죠. 재밌었어요. 뉴질랜드에도 가고 말레이시아에도 갔어요. 대담하게 전 세계를 함께 돌아다니는 게 난정말 좋았지만, 그런 우리에겐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었어요. 우린 두 명의 도망자 같았어요.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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