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스크는 나치의 파괴적 본성을 가장 뚜렷하게 살펴볼 수 있었던곳이다. 독일 공군은 민스크가 항복을 선언한 1941년 6월 24일까지줄기차게 폭격을 퍼부었고, 심지어 독일 국방군은 그로 인한 불길이잦아들 때까지 도시 입성을 미뤄야 할 정도였다.
독일인들은 7월 말까지 교육 수준이 높은 현지인 수천 명을 사살했으며, 유대인들을 도시 북쪽 구역으로 몰아넣었다. 민스크에는 이제 게토, 강제수용소, 포로수용소, 대량학살을 위한 구역들이 생길 것이었다.
그곳은 결국승리의 대체물로, 즉 독일인들이 유대인 학살을 시연하는 일종의 무시무시한 죽음의 극장으로 바뀐다. - P404
영구 보존 처리를 한 레닌의 시신은 안전한 보존을 위해 크렘린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졌으나, 스탈린 자신만큼은 끝까지 그곳에 남아 지배력을과시했다. 레닌그라드는 포위당했고, 민스크와 키예프는 독일의 손에, 의떨어졌지만, 모스크바만큼은 스탈린의 완고한 지휘 아래 스스로를굳게 지켜내고 있었다.
11월의 여섯 번째 날, 스탈린은 소련 국민에게자못 도전적인 태도로 독일이 이른바 ‘몰살 전쟁‘이라 말한 군사 작전은 실상 아무것도 아니며, 오히려 내가 그들에게 몰살을 선사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딱 한 번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언급했는데, 바로 "나치 정권은 ‘집단학살을 조직하고 시행하는 데 여념 없는정권"이라 부른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진행되고 있던 대량학살의 진실을 그려내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것이었다. 11월 7일(소비에트의 기념일) 투친카로 끌려 간 민스크 유대인들은 11월 9일(나치의 기념일) 총살당했다. 5000명이 넘는 사람이 11월 20일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제정 러시아를 비롯해 역사 속 그 어떤 제국도 유대인을 이 정도까지 학살한 적은 없었다.
1941년 하반기 어느 날 하루 동안 독일인들이 쏴 죽인 유대인의 숫자는 제정 러시아 전체 역사 속 집단학살로 인한 희생자의 숫자를 모두 합한 것보다 많았다.
(아무튼 러시아가 ‘제정 러시아 시대‘에도 유대인 집단학살 했구나...) - P406
스탈린도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때문에 깊은 딜레마에 빠졌다. 히틀러는 연합국이 유대인을 위해 싸우고있다고 말했고, 따라서 (국민이 이 주장에 동조할까 우려하던) 연합국은자신들이 억압받는 국가들(하지만 특히 유대인은 아닌)을 해방시키고자 싸우고 있다는 주장을 펼쳐야 했다.
히틀러의 선전에 대한 스탈린의 답은 이후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의 소련 역사를 빚어냈는데, 그 대답은 바로 독일 학살 정책의 모든 희생자는 "소련 국민 이지만 이 소련 국가 구성원의 최대 다수는 바로 러시아인이라는 것이었다.
그의선전 부장 중 한 명인 알렉산드르 셰르바코프는 1942년 1월 "러시아인민, 모두 평등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인민 대중 가운데 첫째, 이들야말로 독일 침략자들과의 투쟁에서 오는 짐의 대부분을 짊어지고 있다"는 선언을 통해 이를 명백히 밝혔다.
셰르바코프가저 말을 내뱉기까지 독일인들은 이미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의동쪽에서 벨라루스 유대인 약 19만 명을 비롯해 100만 명에 이르는유대인을 학살하고 있었다. - P408
1941년 11월 7일에 있었던 광기 어린 죽음의 행진은 그저 유대인들을 몸서리치게 했던 그리고 앞으로 닥쳐올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들었던 일련의 피 튀기는 사건 중 하나일 뿐이었다.
전쟁 이전에 이름을 날렸거나 존경받던 이들을 위해 특별한 굴욕 행위들이 준비되었다. 독일인들은 한 저명한 과학자로 하여금 게토 한가운데에 위치한 주빌리 광장을 기어다니라명령했고, 그것도 모자라 그의 등 위에 축구공을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곧 그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또한 그들은 유대인들을 자신들의 집을 청소시키거나 옷가지를 빨게 할 노예로 삼았다. (오스트리아계) 독일인 의사 이름프리트 에베를은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은 이 "낙원"에서 따로 돈이 필요 없는 상황이라고 적었다.
그는 힘러가 민스크를 방문했을 때 영상으로 기록할 유대인 처형을 담당했다. 에베를은훗날 그 당시 자신의 모습과 그가 자행한 대량학살이 담긴 영상을 본것으로 여겨진다. - P412
유대인 여성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고통받았다. "인종적 더럽힘"을단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독일인은 재빨리 강간을 살인의 전주곡으로 만들었다. 적어도 일부 독일인은 유대인 여성들을 두고 일종의 "미인 대회를 개최하고는, 곧 그 여인들을 묘지로 끌고 들어갔으며, 강제로 옷을 벗긴 뒤, 몸을 그리고 목숨을 빼앗았다.
게토 안의 경우, 독일 군인들은 유대인 소녀들에게 한밤중에 발가벗긴 채 춤을 추도록 했고, 이튿날 아침 그곳에는 소녀들의 싸늘한 시신만 남아 있었다. - P412
소비에트의 지배는, 특히 1937년에서 1938년까지의 대숙청은 그곳 사람들이 어떤 정치 변동에도 즉각적이거나 자발적인 반응을 드러내지 않도록 만들었다. 1930년대에 민스크에서조금이라도 눈에 띄는 행동을 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쿠라파트로끌려가 내무인민위원회 손에 사살당했다.
심지어 모스크바 공산주의자들 입장에서는, 비록 민스크의 소련 시민들 각자 독일에 저항할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소련이 훗날 그곳을 회복했을 때 벌어질 박해를 피하기 어려웠다.
스탈린주의가 아래로부터 어떤 유의 자발적 반응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던 카지니에츠와 현지 공산주의자들은 하나같이 조직체 결성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각각 고립된 채, 스탈린에 대한 두려움으로 히틀러를 견더내고 있었다.
(스탈린이 어떤 면에서 히틀러보다 악랄한 이유) - P414
유럽의 유대인을 모조리 죽여버리겠다는 히틀러의 분명한 결정은 유대인과 빨치산 사이의 관련성을 과장하여 일종의 추상적인 관념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렸다. 곧 유대인들은 독일의 적을 지원하는자들로서, 우선적으로 몰살해야 할 대상이었다
힘러와 히틀러는 유대인의 위협을 빨치산의 위협과 결부지었던 것이다. 유대인과 빨치산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설명이 지닌 논리는 모호하고 문제투성이였지만, 빨치산 전투의 심장부인 벨라루스에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명백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군사 점령 지역이던 중앙 집단군 후방 지역에서는 1942년 1월부터 유대인 학살이 다시 시작되었다 한 기동대원은 자신들이 몰던 트럭에 다윗의 별 기호를 그려두고는, 확성기를 통해 자신들은 유대인을 색출해 처형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라고 밝히고 다녔다.
아인자츠그루펜 B의 지휘관들은 자신들 구역에 있던 유대인들을 히틀러의 생일인 1942년 4월 20일까지 한 명도빠짐없이 없애라는 임무를 받았고, 완수해냈다. - P422
1942년 3월 1일, 독일인들은 유대인 평의회에 이튿날까지 유대인5000여 명을 동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게토 지하활동 세력들은 반대로 그들에게 유대인의 목숨을 가지고 독일과 흥정하지 말 것을 종용했는데, 어찌됐든 그 일은 유대인 평의회 입장에서도 그리 내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몇몇 유대인 경찰은 독일인들이 그 숫자를 채우는일을 돕기보다는 동료 유대인들에게 이를 피해 숨어 있으라고 알려주는 길을 택했다. 이튿날인 3월 2일까지 숫자를 채우지 못하자, 독일인들은 유대인 고아원을 습격해 그곳에 있던 아이들을 총칼로 잔인하게 살해했다. - P423
당시 이 피바람을 피한 어린이 중 한 명이었던 펠릭스 립스키의이야기로는,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에 살해당한 그의 아버지는 폴란드스파이로 몰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딘가로 끌려간 뒤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제 그 소년은 자신이 알던 사람들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배수로에 던져지는 모습을 봐야 했다. 그는 살가죽, 속옷, 눈으로 뒤덮인 창백한 광경을 기억했다. - P423
1941년 11월 이후 스탈린은 단 한 번도 유대인들을 히틀러의 회생양으로 꼽지 않았다. 몇몇 빨치산 지휘관은 유대인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하지만 소련은 미국과 영국이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 구조를위한 직접적인 군사 행동을 진지하게 고려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련 체제가 가진 논리는 항상 일선 부대의 독자적인 계획이나작전 등을 부정했고, 또 인간의 목숨을 아주 가벼이 여기고 있었다. 어찌됐든 게토의 유대인들은 강제노역을 통해 독일의 전쟁에 힘을 보태고 있었고, 따라서 그들이 웅덩이에서 죽음을 맞는 일은 모스크바 지도부에게 있어 별다른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반대로, 독일을 돕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방해하고 있는 유대인들은 독자적인 계획을수립할 위험한 능력을 지닌 자들이기에, 훗날 소련의 지배에도 저항할 수 있는 이들로 비쳤다. 스탈린주의의 논리에 의하면, 그런 점에서유대인들은 게토에 남아 독일에 봉사를 하고 있는 아니면 그곳을 빠져나와 독자적인 행동을 할 능력을 보여주는 어떤 식으로든 미심쩍은 이들이었다.
(스탈린의 이러한 불신은 ‘수용소군도‘에도 자주 언급된다.) - P429
1943년 9월, 민스크 최후의 유대인 몇몇은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에 있던 소비부르란 이름의 시설로끌려간다.
그곳에서 이들은 심지어 벨라루스에서조차 몰랐던 죽음의 시설을마주하게 된다. 짐작했을지 모르겠지만, 그곳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모든 종류의 공포가 이미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P452
대량 살상의 의학은 아주 간단했다. 일산화탄소co는 산소에 비해 혈액 속 헤모글로빈과 훨씬 더 잘 결합하고, 이에 따라 신체 조직에 산소를 공급하는 적혈구의 정상 작동을 막는다.
희생자들은 표면상 의료적 실험및 치료라는 미명하에 시설로 오게 되는데, 실제로는 가스통에서 나오는 일산화탄소로 질식하게 될 "샤워장"으로 인도된다. 금니를 한 희생자들은 미리 등 뒤에 분필로 표식을 해두었는데, 이는 그들이 죽은뒤 금니를 회수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이 첫 희생양이었고, 부모들에게는 이들이 치료 과정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를 적은 가짜 소견서가전달되었다. 이 안락사" 프로그램의 희생자 대다수는 비유대 독일인이었다.
물론 장애를 가지고 있던 독일 유대인들은 아무런 검사조차없이 곧바로 살해당하기 일쑤였다. 어느 학살 시설을 돌리던 인력들은 1만 번째 화장을 축하하기 위해 해당 시신에 꽃을 두르기도 했다. - P461
앞날이 창창해 보이던 나치 친위대 지휘관 암살 사건은 학살의 페달을 밝기에 아주 좋은 구실이 되었다. 히틀러와 힘러의 뒤를 이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유대인 말살 정책의 가장 중요한 설계자였다. 아울러 그는 여러 조직을 한 사람에게 맡겨버리는 나치의 경향이매우 전형적으로 드러난 사례였다.
하이드리히는 이미 제국보안본부의 수장이었고, 동시에 보헤미아 모라비아 보호령 및 1939년 독일에병합된 체코 지역까지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다. 1942년 5월 27일, 그는 영국 정보부의 사주를 받은 체코인과 슬로바이키아인의 암살 시도 중 부상을 입었고, 6월 4일 사망한다.
히틀러와 힘러는 하이드리히가 경호 병력들을 대동하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했지만, 그는 체코인들 사이에서 자신의 인기가 높기에 별도의 경호 부대 등을 두지 않아도 될 것이라 믿었다. 독일은 점령한 폴란드나 소련같은 다른 지역에 비해 체코 땅에서는 억압적 정책을 펼치지 않았고, 하이드리히는 특히 체코 노동계급의 호감을 얻는 데 공을 들여왔다.
하이드리히 암살은 마지막 해결책의 기획자를 잃었음을, 하지만동시에 그 순교자‘를 얻었음을 뜻했다. 히틀러와 힘러는 1942년 6월3일부터 5일까지 사흘에 걸쳐 만남을 갖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힘러는 다음과 같은 찬사를 던진다.
"우리의 신성한 의무는 바로 그의 죽음에 대한 복수, 그가 하던 일을 끝까지 이어나가는 것, 그리고 우리 인민의 적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여기에 한 치의 망설임이나 자비 따위가 있어서는 안되겠지요!" - P471
폴란드인들은 유대인을 태운 기차가 지나갈 때 소리를 질러댔다. 물론 폴란드인들이 꼭 유대인들의 죽음을 바랐다고 볼 수는 없지만,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동작은 그것에 증오의 감정을 내비치며 이를기억해낸 소수 유대인 생존자의 증언에서처럼, 유대인들에게 이제 곧그들은 죽음을 맞이할 것임을 알려주던 신호였다.
어떤 폴란드인들은돈을 요구하기도 했고, 좀더 자비로워 보이던 이들은 다른 것을 달라하거나 혹은 아이들을 요구하기도 했다. 당시 바르샤바에서 비교적일찍 그곳으로 끌려온 얀키엘 비에르니크는 자신의 이송 당시에 대해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나는 그곳에서 모든 것을 지켜봤습니다만, 그곳에 가득했던 사악함과 불행,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습니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 P478
트레블린카에 온갖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자, 독일인들은 거짓 선전을 짜내느라 바쁜 상황이 되었다. 런던에 망명 중이던 폴란드 정부는 전부터 가스 학살에 관련된 보고를 비롯해 독일인들이 폴란드 시민들을 대상으로 벌인 각종 학살 소식을 동맹 영국과 미국에 전해주고 있었다.
이들은 그해 여름 영국과 미국에 독일 시민들을 대상으로앙갚음을 해줄 것을 호소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폴란드 저항군을 이끌던 망명 정부군 소속 장교들은 트레블린카를 습격할 것을 고려했으나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독일은 가스 학살을 부인했다. 바르샤바 유대 경찰 수장이자 "재정착 위원이었던 유제프 셰린스키는 자신의 경우 트레블린카로부터 줄곧 엽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물론이 시점에도 바르샤바 게토에는 우편 업무를 취급하는 곳이 있었고, 이는 몇 주 동안이나 돌아갈 것이었다.
이곳에서 모자를 쓴 채 일하던 이들은 밝은 오렌지색 노동 증명서를 가지고 있었던바 이송을 위해 끌려가는 일은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손에는 트레블린카로부터 온 어떤 소식도 있을 턱이 없었다. - P483
불과 몇 달 만에 슈탕글은 트레블린카의 모습을 바꿨고, 이에 따라 그곳이 가진 살인 역량 또한 더욱 강화되었다. 1942년 말 트레블린카에 도착한 유대인들이 내려선 곳은 그저 시체들로 둘러싸인 경사로가 아닌, 유대인 노역자들을 동원해 거짓으로 꾸며놓은 가짜 기차역이었다.
그곳은 시계, 열차 시간표, 매표소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 "역"에서 내려 걷던 유대인들의 귀에는 바르샤바 출신 음악가 아르투르 골트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들려왔다. 절뚝거리며 걷게나 스스로 어딘가 좋지 못한 기색을 보이던 유대인들은 이 지점에서 "치료소로 가게 되는데, 붉은 완장을 찬 유대인 노역자들이 이들을부축해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건물로 데려갔다.
이들 병든 유대인은이 건물 뒤에서 의사처럼 꾸며 입은 독일인들 앞에 누웠고, 목 뒤에총을 맞았으며, 배수로에 버려졌다. 그들 가운데 악명 높던 처형자는유대인 노역자들이 히브리어로 ‘말라흐 하 마베트‘ 즉 죽음의 천사라부르던 아우구스트 미에테라는 인물이었다. - P484
모든 여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음은 물론, 머리카락 한 가닥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가스실까지 걸어가야 했다. 그들 각각은유대인 "이발사, 앞에 앉아 삭발당했고, 종교적 관습에 충실해 가발을 쓰고 있던 여인들은 그것마저 내놓아야 했다. 죽음이 거의 턱밑까지 차오른 이 순간에도 사람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어떤 여인들은 이 순간까지도 이발이 소독의 마무리 과정일 것이라 여겼고, 또 다른 이들은 이것이 곧 자신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아차리기도 했다. 이렇게 확보된 여인들의 머리카락은 독일인 철도 노동자들이 신을 스타킹을 만들거나, 독일 잠수함 선원들이 신을 슬리퍼의안감으로 쓰일 것이었다. - P485
거기에는 "하~님"께로 가는 문. 마땅한 자는 응당 지나가리"라고 적혀 있었다.
물론 유대인들은 입구에 서 있던 두명의 트라브니키 출신 경비병에 의해 거칠게 안쪽으로 밀어넣어졌기에 이를 발견한 이는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명은 몽둥이를, 다른 한 명은 칼을 들고 있던 경비병들은 고함을 지르며 유대인들을 때리기 일쑤였다.
그 뒤 유대인들이 방 안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문을닫으며 자물쇠를 채우고는, 물을 틀어!"(바로 마지막 거짓말이자, 굳이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전혀 없던 거짓말이었다.
그 대상은 이미 가스실에 갇힌 불행한 유대인들이었다. 누군가는 이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있었던)라고 외쳤다. 그러면 세 번째 트라브니키 대원이 레버를 당겼고, 탱크 엔진에서 뿜어져 나온 일산화탄소가 가스실 안으로 쏟아졌다.
<원문 표현 G-d, 너무 신성하기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하ㅡ님이라 표현하는 정통 유대인들의 표현.> - P486
|